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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의 터전—‘룡가미원’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7월25일 11시09분    조회: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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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충국 구술, 김창석 정리



만일 내가 건설국에 계속 있었다면 ‘룡가미원’을 꾸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문학예술계련합회와 관계가 좋았다면 미술관을 했을 거다. 아마도 운명이 나를 ‘룡가미원’을 꾸리도록 핍박하고 안내한 것 같다.


장소를 정하기 위해 나는 룡정, 화룡, 훈춘, 왕청 등지를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당시 훈춘건설국 국장과 상의해서 훈춘 권하에 자리를 잡아두었다. 그런데 김종국 주임이 도문시 장안에 가보라고 해서 가봤더니 자연환경이 좋고 성자산이 가까이 있고 연길도 가까와서 마음들었다.

1994년, 당시 안전부문에 불미스러운 일까지 생겨나 심사가 엄격했다. ‘룡가미원’을 민족특색이 있게 하려면 우선 국내의 형세와 당의 령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첫째로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시기 우리 민족이 인구당 렬사가 가장 많이 나왔던 특점을 주제로 내세우기로 했다. 당시 우리 민족의 렬사가 만 7,430명으로 민족인구 평균수자로 치면 렬사가 가장 많은 민족이였다. 두번째로는 동북삼성의 벼농사는 마멸할 수 없는 근로하고 부지런한 우리 민족의 력사로 남은 거다. 세번째로 문화예술면에서 우리 민족은 기질이 뛰여나고 공헌이 큰데 나는 문화예술을 중심으로 유적지를 만드는 데 착안점을 두었다.

원래 이곳은 자갈밭이였다. 나의 총체적 설계에 따라 이곳에는 인공호수, 인공섬이 만들어졌다. 이곳은 무인면적이 많고 겨울에 나무가 없어 볼 거리가 없었다. 우선 소나무를 옮겨 록화를 해야 했다. 처음에는 홍송과 흑송을 옮겼는데 대부분 죽어버려 다시 원림처의 미인송을 옮겨왔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미인송들이다.

조각을 시작하면서 알아보니 우리 민족이 문화예술에 참 공헌이 많았다는 게 알렸다. 다음 미술관, 박물관을 세워 문화차원을 높이고 그 다음 자연환경을 보호하고 독특한 생태환경을 만들어낼 계획을 세웠다. 나는 자연과 문화가 결합된 생태문화를 구상했다.

처음에는 애로가 컸다. 우선 비준이 걱정되여 양어장으로 시작했다. 기초자금은 내가 세운 연변조선족미술연구소에서 상표도 만들고 인테리어도 하면서 축적한 것이다. 나는 기획사무실에 있을 때 밤잠도 안 자고 일했다. 휴일도 없이 지어 식품공장의 작은 상품들의 상표도 설계해서 돈을 벌었다. 당시 대학졸업생의 월급이 54원이였는데 상표 하나를 설계하면 적어도 150원을 받았다. 장홍을이 출판사에 있을 때도 표지설계 같은 것을 자주 맡겨주었다. 그 때 연변이란 이름을 붙인 개인연구소는 두개 뿐이였다. 나의 연구소와 주과학기술위원회의 어느 처장이 꾸린 신과학기술협회 개발연구소였다.

‘룡가미원’의 자금 마련을 위해 안해는 공무원을 사직하고 연길시불임진료소를 꾸렸다. 바로 지금의 방생진료소이다.

당시 나는 기획사무실에 있었고 문화, 의료, 교육 부문의 일은 될수록 지지해주고 편리를 돌봐주었다. 시립병원에서 사택을 지을 때 전지공장과 분쟁이 있었는데 그 때도 시립병원의 립장을 생각하고 편의를 돌보아주어 내가 법정에까지 나선 일이 있었다.

우리 진료소는 남들이 하지 않는 성과 불임에 관한 것을 택했다. 당시로는 우리 나라의 의학연구에서 미개척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이란 이름 자체가 또 문제되여 다시 이름을 연길시불임진료소로 하였다. 원래 살던 집을 뜯어고치고 기재도 사들이고 약재도 사들이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처음 일년은 많은 혼란을 겪었다. 안해가 원래 공무원으로 있다가 사회에 나와 개체업을 하자니 많은 일들이 생소했고 시끄러움에 부딪친 것이다. 일년 반 정도 지나서야 제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하고 본인도 신바람이 나하였다.

안해는 원래 그 부문을 연구한 사람은 아니지만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서 많이 적응하고 후에는 성과도 많이 냈다. 처음에 상해훈련반에 가서 삼개월간 학습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 나가서 서점을 돌면서 그 방면의 교과서들을 많이 사다 주었다. 당시 중국에는 그 방면의 서적이 아주 결핍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료나 교과서, 그림이나 사진은 우리 병원에 밖에 없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성병도 많이 돌았는데 돌팔이들이 쓸어나와 광고를 마구 뿌리고 아무 약이나 막 써서 그런 약을 쓴 환자들이 다른 병에 걸리는 사례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면서도 몇백원씩 받았으나 우리 병원에서는 웬만한 병은 단돈 몇십원으로 진료해주었다.

병원이 시작되여 제 궤도에 오르자 나는 연변조선족미술연구소의 명의로 ‘룡가미원’을 꾸리기시작했다. 중국생태학회 생태관광위원회에서 <중국조선족생태문화관광원으로 비준할 데 관한 문건>을 발급했으며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에서도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중국조선족생태문화원을 건립할 데 관해 지지를 요청하는 보고를 올렸고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도 지지를 표시하는 문건을 내렸다. 이에 관한 보고도 수없이 많이 올리고 또 지지하는 문건도 많이 받았다. 우리는 2014년에 중국 인류학, 민족학 연구회, 민족관광전업위원회의에서 비준한 ‘중국민족문화관광시범건설기지’로도 되였다.

지금까지 나의 개인자금이 2천만원 가량 들어갔다. 시작은 개인으로 했지만 우리 민족의 문화원을 형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이는 물론 일정한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비록 내가 개인적으로 시작했지만 지지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룡가미원’의 영구성 보존을 위해 내가 생각한 것이 비석조각이였다. 다른 것들은 없어질 수 있어도 자연을 리용한 조각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목전에는 문화원, 박물관, 극장에 힘을 들이고 있다. 이곳에 와서 우리 민족의 숨소리를 듣고 면모를 볼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지금은 마지막 궤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원래는 가정적 차원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이제는 국가에 들여놓으려 한다. 나는 얼마 전에 매체를 통해 정식으로 국가에 바치련다는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다.

인물조각에는 략력을 꼭 곁들였다. 력사가 지나도 략력을 보게 되면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력사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세대에서 하지 않으면 영원히 없어질 수 있다. 나는 민족의 영웅들을 조각하면서 중국의 위대한 인물들도 곁들여 조각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영구적인 보류에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완성된 인물조각으로는 모택동, 한락연, 정률성, 신정, 김학철, 김염 조각이다. 우리 조선족들은 모택동을 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조선족 력사는 근대사에 속한다. 우리는 현대사와 근대사를 강조해야 하며 전통문화만 강조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항일투쟁사, 벼농사력사, 문화예술 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 력사를 세세대대로 이끌고 나가야 우리 민족이 할 말이 있고 립지가 든든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유적지라는 것이 얼마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룡가미원’을 유적지로 만들고 있다. 우리의 문화, 력사를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일방적 사상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발전 속에 력사의 자취를 보전하는 것도 발전에 필요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문물이 없기에 복구하는 작업이라고 보면 되겠다. 살아있는 것은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나는 이런 리념으로 ‘룡가미원’을 꾸려가고 있다.

나는 제일 처음으로 모택동의 조각을 세우고 저 앞에 로타리를 만들었는데 대문이 9메터 30센치이다. 이는 9.3을 의미하는 것이며 량옆의 조각을 따로 보면 자연을 여는 열쇠의 표징이고 합하면 학이 하늘로 치솟는 도안이다. 우리 민족은 학을 상징으로 하기 때문에 이런 구상을 했다. 옆의 조각은 전체 구도가 배이고 뒤의 것은 돛이다. 세개의 돛이 산모양으로 되였다. 장백산을 념두에 두었다. 그 곁의 돌은 54톤으로 가장 무겁다. 오래 가공하지 않고 두었다가 작년에 곰과 범을 조각하였다. 곰과 범은 우리 민족의 토템이며 우리 민족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제일 앞의 것은 룡의 머리이다. 룡도 우리 동양인들이 숭상하는 동물이다. ‘룡가미원’의 이름도 그렇게 온 것이기에 룡두를 설치하였다. 조선의 개성에도 고려 때의 룡조각문물이 있다.

전체 민족의 력사를 배로 상징하여 계속 앞으로 발전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족은 산에 가면 먼저 산신제를 지낸다. 그 뜻에서 배조각 옆에 모택동의 조각을 세웠는데 그것은 그가 우리 민족이 숭배하는 신령이란 뜻이며 우리 민족을 보호해달라는 념원을 담아 그 자리에 세웠다. 그리고 모택동의 문예방침을 조각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에 대해 상당히 숭배하는 나의 감정이 들어있다. 투쟁 속에서 강자가 남게 되여있다. 우량종이 남아야지 모든 게 다같이 남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백화제방, 추진출신(推陈出新)’ 여덟 글자를 조각했다. 모택동의 문예사상에서 나는 이것을 흔상한다. 자연에서 우량종이 남는 것처럼 문예방면에서도 우수한 것이 남게 된다는 의미이다.

돈벌이만 생각하면 전통문화를 발전시킬 수 없다. 정부에서 앞을 내다보고 차근차근 기획하고 투자하며 문화력사를 설계해야 한다. 문화를 산업으로 생각하고 단시일의 경제효과를 추구한다면 바른 문화를 발전시키기 어렵다. 경제효과를 떠나서 무조건 투자해야 하는 것이 문화산업이다. 내가 한 일들도 이미 20여년 이상 투자하고 진행했으니 지금만큼 되는 것이다. 자연이 세월을 경과하며 세례를 겪어야 명물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월의 고험을 겪지 않은 문화는 명문화가 될 수 없다.

내가 이제 나이도 있으니 국가에서 ‘룡가미원’을 접수해가고 나는 구상했던 창작이나 어느 정도 마무리하려고 한다. 내가 구상한 것들에 아직 손 대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많다. ‘룡가미원’의 뒤쪽에는 기념비적인 조각을 위주로 하고 앞에는 예술적인 조각을 위주로 하여 이야기, 전설을 주제로 하고 있다.

‘룡가미원’이 ‘중국조선족문화원’으로서의 명색에 맞게 구색을 갖추어가는 것 같다. 점차적으로 사회적 인정도 받고 있다. 앞으로 한보한보 알차게 실천해가기 위해 여생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문화시대>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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