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4](동희철 편-2)
《고향산기슭에서》의 창작과정을 돌이키고 있는 동희철 옹.
1950년도에 룡정에 연변제1고급중학교가 서면서 나는 9월달에 음악교원으로 가게 되였소. 그때 주당에서 문교사업을 맡으셨던 최채동지는 교원사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엄선을 거쳐 기어코 사도학교 졸업생인 나를 찍는 것이였소. 그러면서 책임감, 사명감을 지니고 열심히 잘하라고 당부를 하셨지.
그뒤로 1956년까지 선후로 연변제1고급중학교, 연변사범학교, 연변제2고급중학교 음악교원으로 사업하면서 취주악대도 조직하고 합창단도 조직하고 교내 문예회연도 정기적으로 조직하면서 학생들의 음악재질을 키워줌과 동시에 문학성, 창조성 계발에 많은 힘을 넣었더랬소. 하여 적지 않은 인재들을 전업단체에 수송했고 연길시우수교사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주덕해 주장의 연설을 들을 수도 있었지.
1955년 동희철선생은 연길시제1차중소학교우수교사대표대회 우수교사로 표창받음.
제자와 합작하여 음악창작을
1955년 연변제2고급중학교에서 음악교원으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소. 5월초에 졸업식을 앞두고 취주악대와 합창단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을 데리고 모아산으로 원족을 가게 되였소.
산기슭에 있는 전국에 소문난 김시룡집단농장을 바라보면서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개척한 이 땅을 기계화, 전기화가 실현된 행복의 락원으로 건설하련다는 청년로력모범의 보고를 듣고난 사생들의 심정은 한없이 격동되였지.
학생들이 산비탈 소나무숲 속을 오르내리며 보배줏기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소. 학생회 문예부 부장인 김경석동무가 소나무에 기대앉아서 무엇인가 골똘히 적고 있는 것이였지. 문예부장이 활동에 참가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한다고 학생들이 의견이 있었지. 그래서 부장이 한창 시상이 떠올라 그러니 부장이 없으면 부부장들이 나서면 되지 않느냐며 말려놓았소.
그리고 학교로 돌아온 후 김경석에게 원족 가서 무얼 그렇게 열심히 적었는지 보여달라고 했지. 그가 내미는 책장을 펴보니 《모아산기슭에서》라고 제목을 단 산문시였소. 김시룡의 새벽집체농장도 보이고 해란강도 흐르고 세전이벌도 보이는 것이 아주 형상적이였소. 그래서 가사로 고쳐보라 했지.
합작파트너 김경석(앞줄 오른쪽)과 함께.
그리고는 연변문공단 창작조에 있는 차창준과 홍성도한테 보이면서 우리 학교 학생회 문예부장이 쓴 것인데 고칠데 있으면 손을 대달라고 했지. 내가 곡을 달자고 그런다고. 차장준이 찬찬히 보더니 후렴을 하나로 통일하지 말고 1절은 ‘산천아’ 2절은 ‘벌판아’ 3절은 ‘마을아’ 이렇게 층차를 두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였소.
경석이한테 그 의견을 말했더니 공부를 잘하는 김경석은 사회주의발전모식을 떠올리며 마을이 있어야 기계화도 가능하다면서 그 의견을 채납하기로 하였소. 그리고 제목도 《모아산기슭에서》라고 하면 연변의 한 지방에 국한되므로 보편성을 잃을 수 있기에 《고향산기슭에서》라고 고쳤지.
이 노래가 독창곡으로 완성된 후 맨 처음 연변위생학교 박경이라는 녀학생이 대중가수로 불렀소. 전국종업원경연무대에도 오르게 되였는데 나도 직접 무대에 올라 손풍금 연주를 하면서 창작 2등상을 받았소. 성에서는 또 청중들이 사랑하는 노래 15수에 당선되였고. 자치주에서는 《고향산기슭에서》와 《내고향 좋구 좋다》(임효원 작사/ 1958년)는 두수의 노래가 주덕해상을 받게 되였소.
이 노래는 연변의 신문, 간행물, 방송, 예술무대에 소개되였고 널리 류행되다가 중앙음악간행물 ‘가곡’(歌曲)과 중앙인민방송국 노래교수프로에 한어로 소개되면서 전국각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지.
장백산에 올라 곡상을 무르익히는 동희철선생(왼쪽 첫사람).
그 다음은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10돐 에 김시룡집단농장을 제재로 《새벽》이라는 예술기록편을 찍었는데 방초선이 녀자목동으로 등장하여 《고향산기슭에서》를 주제곡으로 불렀소. 박우와 고자성이 이 영화음악을 책임지고 하면서 《고향산기슭에서》가 가장 적합한 음악이라며 양몰이를 하는 방초선의 영상장면을 넣었소. 이때로부터 이 노래는 더욱 크게 소문나기 시작했지. 그러니까 전업가수로는 방초선이 처음 불렀고 후에는 연변가무단의 김선옥 가수가 주로 불렀지.
국계를 모르는 ‘고향송가’
《고향산기슭에서》는 높은 음악적 형상성과 서정성으로 당시 청중들의 큰 공명을 일으켰으며 국내는 물론 멀리 조선, 일본, 윁남, 스웨리예, 대만 등 나라와 지구들에 소개됨으로써 당시 중국음악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중국조선족의 대표적 가요로 되였다고 평론가들은 분분히 견해를 발표했었지.
그러면서 이 가요는 또 많은 일화들을 만들어 냈더랬소. 1956년 5.4청년절 맞이 전국청년참관단이 100일간 전국을 순회하였는데 연변에서 54명 청년적극분자들이 참가하였지.
10월 2일, 북경판점에서 중앙지도자들의 초청을 받고 연회에 참가하게 되였소. 그런데 신강의 한 녀성독창가수가 《고향산기슭에서》를 부르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우리 연변의 녀성단원들이 그 가수 한테 《고향산기슭에서》의 작곡가가 이 자리에 있다고 알려주었지. 그 가수는 나를 찾아와 그러안으며 얼굴에 뽀뽀를 하는 것이였소. 그바람에 되려 내쪽에서 부끄러워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였지.
동희철(오른쪽 첫사람) 전국소수민족청년참관단 녀성중창단과 함께.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 노래가 멀리 스웨리예에까지 전해졌던 것이였소. 연변대학의 정판룡 왕유 교수부부가 스웨리예로 학술교류를 갔다가 성탄절전야에 스톡홀름대학의 조승복 교수의 초청을 받고 그 댁을 방문하게 되였다오.
조교수의 부인 로우스는 음악교원이면서 유명한 피아노연주자로서 연변가요 《고향산기슭에서》를 연주하며 그들부부를 맞이하였다는구만. 그런데 그들 부부는 그 선률에 흠뻑 빠져 고향생각을 하며 눈시울을 적셨다오. 정판룡 교수는 《외국견문》(1984년)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이 사연을 책에 실었더구만.
그걸 보면서 명곡이라는 것은 나래가 있어 국경도 날아넘는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였지.
유명세를 탄 또다른 합작곡 《산간마을에 드리는 노래》
《고향산기슭에서》는 학생 김경석과의 첫 합작이였소. 그뒤로 1957년에 김경석동무가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에 다닐 때인데 한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12월말에 《산간마을에 드리는 노래》라는 가사를 보내왔었지.
그해는 중국공산당 제8차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이듬해로서 국민경제발전 제2차 5개년계획을 실시하기 시작한 첫해였소. 8차 당대회에서 제기한 임무를 받들고 전 당과 전민은 사회주의건설에 일떠섰으며 천백만 지식청년들이 사회주의건설을 위하여 고향으로, 산촌으로, 조국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달려가서 청춘을 바치는 것이 희망이고 리상이였소.
2010년 《영원한 고향멜로디》 작품음악회에서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한 동희철선생(가운데)
김경석동무는 이런 시대적 맥박을 틀어쥐고 필을 들어 《산간마을에 드리는 노래》를 창작하였던 것이였소.
해맑은 하늘가에 꽃구름 피고
전야엔 푸른 물결 넘실대누나
우리가 지나온 길 몇백리런가
이 산골 언덕 찾아 마음은 꽃피네
아, 간곡한 나의 념원 내 마을이여
영원히 그대 품에 돌아왔노라
가사가 참 깔끔하고 시대상을 형상적으로 표현한 것이 마음에 딱 들었소. 그러니 경쾌하고 약동적인 곡조가 쑥 빠져나오는 것이였소.
이 노래는 1958년 1월 12일 《연변일보》에 발표되였고 1월 20일부터 7일간 연변가무단 가수 리원경의 독창으로 연변인민방송국의 ‘매주일가’프로로 방송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지.
그리고 이 가요는 또 기악곡으로도 연주되였고 1961년 말에는 《음력설연창자료집》에 한문으로 발표되였고 1962년 6월 23일 《연변일보》(한문판)에 발표되여 한어로도 불리우게 되였소.
길림신문 글 / 김청수 영상사진/김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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