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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시리즈 26] 준마상을 탄 《한세대의 별》탄생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1월25일 08시26분    조회: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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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26](김영금 편-6)

1996년 4월 말, 북경대학의 저명한 고생물학자 안태상 교수는 세번이나 장거리 전화를 걸어와 중국과학원 산하의 연구소들에서 두각을 내밀고 있는 우리 겨레 과학자들을 후대들에게 알리자는 것이였어요. 이미 취재대상도 선택했고 시간배치도 해놓았다고 하였어요.

그때 나는 실화집 《청산처럼 창공처럼》을 완성하고 상한 몸이 채 낫지 않았는 데다 과로로 뇌경색까지 겹치면서 혼자 걸어다니기도 힘들었어요. 그리고 또 이미 퇴직한 몸이라 그동안 자비로 취재를 하다 보니 경비도 어려웠어요. 하지만 기자의 책임감, 작가의 량심이 또 다시 나를 북경으로 떠나게 하였어요.

미사일전문가 김수복 연구원의 이야기

5월초 나는 치료를 중지하고 북경행 기차에 몸을 실었어요. 침대표도 못 끊고 식당바곤에 가 웃돈을 더 주고 식탁에 엎드려 자면서 북경에 도착하였어요. 기차에서 내리자 숨돌릴 새도 없이 당장 미사일시험기지로 떠나야 할 미사일발사대 주임이며 미사일전문가인 김수복 연구원부터 만나게 되였어요.

우주항공부 미사일전문가 김수복 연구원 

1970년 4월 24일 우리 나라 첫 인조지구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된 뒤로 90년대 중반까지 18개 인조지구위성이 발사되였어요. 그 속에는 우리 겨레 과학자들의 피땀도 스며있다는 것을 김수복 연구원을 취재하면서 알게 되였지요. 우주항공연구분야에 종사하는 고급기사 이상의 조선족전문가가 20여명이나 되였지요. 김수복 연구원은 바로 그들 중의 일원이였어요.

어린 시절 룡정 덕신 룡암골에서 어머니가 새벽마다 삼태성을 바라보며 지어준 새벽밥을 먹고 20리 산길을 걷고 강을 건느면서 소학교, 중학교를 다닌 아이, 일요일이면 집에 와서는 하숙집으로 가져갈 옥수숫, 감자를 주머니에 넣어메고 맨발로 걷다가 룡정시가지 입구에 있는 룡문교까지 와서는 헌신을 꺼내 신었던 고중생, 북경리공대학(원 북경공업학원) 미사일발사기술학부에서 공부하는 5년 동안 제도기가 없어 이 사람에게서 콤파스를, 저 사람에게서 삼각자를 빌어가며 설계숙제를 완성했던 대학생이였어요.

1963년 대학을 졸업하고 30여년간 우주항공부에서 줄곧 미사일연구에 종사해 온 그는 주임설계사로서 공군, 해군에서 사용하는 미사일발사기술연구를 직접 해왔고 세계첨단수준에 도달하는 미사일구축함에 쓰이는 새로운 미사일발사기술을 연구했으며 최대형 알루미니움합금주조물 주조기지를 세우고 국내 공백이던 관건 기술문제를 돌파하여 우주항공사업에 특출한 기여를 한 과학자였어요.

60세가 다 되여가는 그때까지도 거의 모든 시간을 시험기지의 군함갑판우에서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자면서 시험을 하고 물도 없고 풀도 없는 대사막에서 모래바람과 싸우면서 실험을 하고 있었지요. 집에 있을 때는 비좁은 침실에 자그마한 상을 끼워놓고 설계도를 보군 하였지요. 그의 말을 빌면 《아직은 나라가 가난하니 다 같이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였지요.

나는 과학자의 집을 꼭 가보고싶었어요. 그의 안해는 아주 열정적으로 나를 접대했는데 알고보니 나와 같은 연변대학 조문학부 후배 졸업생이였어요.남편 따라 북경에 가다보니 배운 전업을 바꾸지 않을 수 없어 실험실에서 사업했어요. 그들은 침실 하나 객실 하나 딸린 작은 집에서 살고있었어요. 당금 아들을 장가보내야 겠는데 방이 따로 없었지요.

생각다 못해 그녀는 남편이 없는 기회를 타서 몇십년 동안 남편이 타들인 미사일계통연구 국가과학기술진보 특등상이랑 우수 공산당원, 선진사업일군, 국방무기공헌자 등 영예의 붉은상장들을 한 보자기 싸 이고 연구소 당위서기 사무실 책상우에다 쿵 내려놓았지요. 《우리에게 아들을 장가보낼 집이나 바꾸어주세요.》하고 성난 목소리로 말했대요.

그랬더니 며칠후 연구소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를 왔더래요. 사실 알고보니 김수복연구원은 당지부서기 직책을 짊어지고 있으면서 곤난이 있는 동지들에게 먼저 집을 양보하군 하다 보니 자기는 계속 두칸짜리 비좁은 집에서 살아왔던 것이였어요. 연구소에서는 이듬해 당장 큰 집을 분여해주었다며 안해는 웃으면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항천부 미녀 연구원 장정자를 찾아서

취재를 시작은 했지만 나는 우주항공부가 어디 있는지 연구소가 어디 있는지 방향조차 알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북경대학 지구물리 석사공부를 하고 있는 둘째 딸이 북경대학 부근에 있는 10평방 되는 한칸 짜리 세집을 세 맡아주었어요. 당시 민족대학을 졸업하고 천진시정부에서 사업하는 큰딸과 작은 딸이 서로 엇바꿔가며 길을 안내하였기에 취재를 계속 할 수가 있었어요.

우주항공부 〈태양수감기〉연구제작자 장정자 연구원

우주항공부 우주항공연구소 장정자 연구원은 우주항공공업부 가족아빠트 18층에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분이 기자의 취재를 거절하는 것이였어요. 매우 언짢았지만 작가의 책임감으로 끝까지 찾아갔지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방정맞게도 정전이 되여 승강기가 통하지 않았어요. 그 때는 핸드폰도 없는 시절이라 그와 전화통화를 할 수도 없고 18층까지 걸어올라갈 자신도 없었어요.

돌아갈가 망설이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면 이 녀과학자를 다시는 취재할것 같지 못했어요. 딸보고 "올라가자. 계단에 앉아 쉬면서라도 가보자!"라고 말했더니 딸도 "내가 있잖아요.올라가 봅시다." 라고 대답했어요. 딸의 부축을 받으며 한층한층 걸어 올라갔지요. 올라가다가는 쉬고 쉬다가는 또 올라가고 하는데 딸이 옆에서 "엄마, 쨔유! 쨔유!"하면서 힘내라고 응원하였어요. 겨우 18층까지 올라가고 나니 땀에 옷이 흠뻑 젖었고 아주 쓰러질 것만 같았어요.그날 북경날씨는 37도였어요.

노크소리에 문을 열고 보던 그녀는 너무 감동되여 나를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쏟는 것이였어요. 이런 기자를 처음 봤다고 했어요. 그러니 나는  이런 나를 봐서라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얘기 해달라고 했지요.

50세가 넘었는데도 40대처럼 젊고 예술인처럼 예뻤어요. 이런 녀성이 20여년을 실험실에 붙박혀 분투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왔어요. 그는 〈태양수감기〉라는 우주공간비행물의 자태를 측정하는 민감기를 연구해냈어요. 위성이나 로케트의 태양과의 상대적인 방향, 위치를 측정해주는 위성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부분이였지요.

국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68년부터 이 연구에 달라붙었지만 그 과정은 그야말로 눈물나게 어려웠고 힘들었다고 했어요. 외국에서는 비밀에 붙이고  국내에서는 배울 곳이 없고 설비는 락후하고 게다가 문화혁명시기는 큰 봉변을 당하고…

우리 나라에서 70년대로부터 하늘에 오른 위성중 넓은 시야와 고정도를 가진 〈태양수감기〉가 달린 위성이 뜨기는 1987년부터였다고 했지요. "나의 연구발명품이 네가지 위성에 다 사용되게 되였을 때의 기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지요. 실험성능과 비행실험에서 내려 보낸 수치의 일치성을 보게 되는 그 순간 아이들처럼 소리 내여 울었지요. 그 울음은 실패와 고생을 밥먹듯 하는 과학자들밖에 리해할 수 없어요. 그야말로 일생의 실험, 분투, 실패, 고독, 눈물과 바꾸어온 것이였지요."

그런데 그 성공의 나날에 출중한 우주과학연구학자였던 남편을 잃는 무서운 타격을 당했다고 터놓는 것이였어요. 거기까지 듣고 보니 취재를 거절했던 리유를 알 것 같았고 마음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되려 내쪽에서 미안해났어요.

그녀의 고향은 안도현 복흥이였어요. 연변 한고향 사람이라서 더욱 대견했고 자랑스러웠지요.

세계 원심분리기전문가 - 김록송

중국과학원 생물물리연구소에서 만난 김록송 연구원은 고향이 도문이였어요.1963년 장춘광학정밀계기학원을 졸업하고 중국과학원 생물물리연구소에서 원심분리기연구실 실장을 맡고 있었지요. 원심분리기에 관한 리론과 기계를 연구, 제작하고 있는 그는 우리 나라 원심분리기연구제작의 창시인이였어요.

우리 나라 원심분리기연구제작의 창시인 김록송 연구원

그의 연구성과를 리해하자면 우선 원심분리기란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했어요.

원심분리기란 물질의 같지 않는 밀도, 크기, 모양에 의해 회전자의 고속도회전에서 생기는 원심력을 리용하여 액체와 고체의 혼합물 또는 액체와 액체의 혼합물을 분리해내는 대형정밀기계였어요.

"현대생물학이란 분자수준에 이르러야 현대수준급으로 취급됩니다. 간염을 진단하는데도 현대생물학이 들어갑니다. 비루스 병독을 끄집어내자면 원심분리기가 없으면 분리할 수가 없고 피검사도 원심분리기가 없이는 안됩니다…원자탄에 쓰이는 핵원료도 모두 초고속 원심분리기로 만듭니다."

과학연구분야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이 원심분리기가 없어 우리 나라에서는 해마다 거액의 외화를 들여 외국으로부터 수입해들이군 하였지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김록송은 1963년부터 피를 말리는 연구를 하여 미국, 스위스, 일본 등 몇 개 나라만 갖고 있는 원심분리설계제작기술을 모두 장악하였지요. 그는 국내에서 가장 선진적인 고속랭동원심기 (SL-14R)를 만들어냈고 또 자기가 발명한 기술을 고향 도문에서 성공시켜 고향 발전에 기여를 하였지요.

1979년 11월 7일 밤 10시 45분, 원심기의 관건부분인 회전자폭발실험이 한 지하방공굴에서 성공하였어요. 꼬박 3개월 동안 생명의 위험과 직결되는 실험을 54차례나 하면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초고속원심기회전자 폭발실험》에 성공한 것이였지요.

그는 국제학술교류를 부단히 진행하면서 세계선진수준을 초과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하였어요. 1980년 초겨울 구라파생물학연구중심의 초청을 받고  원심기연구를 새로운 단계로 밀고 나갔어요. 외국의 원심기전문가들은 그만하면 원심기연구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고 새로운 연구항목을 바꾸라고 권고했지요. 김록송은 빙그레 웃더니 아예 연구실에다 먹을 것을 장만해놓고 잠자리까지 만들어놓고 밤에 낮을 이어가며 연구를 거듭하였지요.

1982년1월 30일 새벽 2시 30분에 이 조선족과학자에 의해 《자체흡입련속류동원심원리》라는 원심기의 새로운 리론이 드디여 세상에 태여났어요, 그는 스웨리예 룬드대학에서 열린 세계학술보고회에서 직접 영어로 이 론문보고를 하였지요. 이 원심기연구분야에서의 새롭고 독특한 과학리론은 세계학술계의 새로운 성과로 인정받았지요. 그가 이 리론에 근거하여 설계해낸 원심기는 또 세계 원심기연구제작분야의 새로운 발명으로 되였지요

그뒤 미국의 원심기회사의 유럽대표가 그를 찾아와 어마어마한 거금으로 견본을 사겠다고 하였어요. (견본을 판다? 그것이 어디 나의 사유재산인가. 거기에는 조국 동료들의 심혈이 깃들어있고 고향사람들의 념원이 깃들어 있는데…)

그는 례절스럽게 대답을 회피하며 급히 비행기를 타고 조국으로 돌아왔지요.

그는 인터뷰가 끝날 무렵 뜸을 들이면서 한마디 하였어요. 《저는 저의 사업을 이어받을 우리 겨레 후계자를 양성해보려고 많이 애쓰고 있는데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그의 유감 앞에서 나도 할 말을 찾지 못했지요.

비보를 받고 울면서 다진 맹세

내가 취재를 다그치다 말고 잠간 천진에 있는 큰 딸한테가 휴식을 하고 있는데 북경의 둘째 딸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엄마, 빨리 돌아오세요. 안태상 교수님이 돌아가셔서 북경대학에서 추도식을 하게 됩니다. 》

저명한 지질고생물학자 안태상 교수

말그대로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였어요. 내가 안태상교수의 부름을 받고 북경에 도착하여 며칠이 되지 않았을 때 교수님은 나더러 북경대학 지질학부 맞은켠에 있는 자그마한 식당으로 나와달라고 하였어요. 그사이 너무 바빠서 초대를 못했는데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였지요. 래일은 평양으로 떠난다고 하였지요.

그렇게 바쁘면서 돌아와 만나도 되겠는데 왜 이렇게 급한 걸음을 하느냐고 나무람 하니 《사람의 일은 모릅니다》라고 하는 것이였어요. 내가 모셔온 손님을 내가 등한히 하서는 안된다며 돈 1000원을 내놓았어요. 돌아갈 때 침대표를 사라고 했어요. 그것이 내가 취재길에서 받은 유일한 〈경비〉였지요.이제 평양갔다 돌아오면 취재를 했던 과학자들과 한자리에 모여 재미있게 놀자고 하던 사람이 돌아오던 도중 연길에서 강연을 하다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그날 저녁 안태상교수댁으로 갔어요. 북경대학병원의 의사인 안교수 부인은 전등도 켜지 않은 집안에서 책상우에 골회함을 올려놓고 멍하니 마주앉아 있었어요. 내가 들어서자 부인은 나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안교수가 선생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 없느냐 묻는 것이였어요. 떠나면서 되려 나를 초대하고 갔다고 했지요.

이튿날 북경대학 널다란 강당에서 안태상 교수의 조그마한 골회함을 놓고 추도식을 치렀지요. 북경대학 지도자, 교수, 동사자, 제자들이 가득 모여 일생동안 우리 나라 코노돈트학을 탁월하게 연구 개척하여 세계과학계의 걸출한 선줄군으로, 〈세계명인록〉에 오른 안태상 교수를 높이 기리였지요. 자연과학자이면서 열정적인 사회활동가로 조국과 민족에게 효성하고 충성했던 안태상교수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나셨어요.

나는 안태상교수의 령전앞에 머리를 숙이고 맹세를 다졌어요. 아무리 바쁘고 힘들더라도 안교수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중국과학원 산하의 조선족자연과학자실화집을 꼭 완성하여 후대들에게 전하리라 마음 먹었지요.

1999년 작가 김영금 제6차 전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 수상

그리하여 두달동안 북경대학 동문옆 세방에서 머물면서 중국과학원 공간과학 및 응용연구센터 소장 강경산 연구원, 제4통계력학리론의 창시자 김일광 교수, 계통과학연구소 한경청 연구원, 저명한 어뢰총설계사 류영철 등 고급공정기사들에 대한 계획취재를 마무렸어요.

취재대상들에게서 갖고 온 자료들이 일본어로 된 것은 큰 딸이 번역해주고 영어문으로 된 것은 작은 딸이 번역해주었어요. 중국어고문자료는 아들이 번역해주고 타자는 며느리가 맡아주었지요. 그리고 자연과학자인 남편이 전적으로 지지하고 저극적으로 도와주었어요.내가 찾아 읽은 자료는 100만자도 훨씬 넘었어요. 한사람을 쓰는데 한달씩 걸렸지요. 한달을 쓰고는 머리병이 도져 주사를 맞고 또 한사람을 쓰고는 주사를 맞으면서 나는 25만자에 달하는 글을 완성하였어요.

1998년 7월 민족출판사에서 《한세대 별》이라는 제목으로 계획출판도서에 넣어 출판해 주었지요. 그리고 이 책은 또 1999년 10월 연변작가협회 추천으로 전국소수민족 제6회 준마상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지요.

이 상은 나에게 준 상이 아니라 중국조선족자연과학자 실화계렬작품집에 준 것이였지요. 주저앉고 싶고 울고 싶고 뒤걸음 치고 싶을 때마다 과학자들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정신, 과학을 위한 희생정신, 간고분투하는 정신과 높은 인격이 나를 꿋꿋이 일어서도록 받들어 주었지요. 나는 이 상을 거룩한 우리 민족 과학자들에게 드리고 싶었어요.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영상사진/ 김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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