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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40] 현대판 ‘눈물 젖은 두만강’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2월28일 16시26분    조회: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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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0](채영춘편-5)

아버님이 1959년도에‘우파’모자를 쓰고 1964년도에 해외망명을 떠났다가 1983년도에 귀국한 25년 세월 어머님이 우리 가족 수난사의 주역으로서 치른 고생은 정말 한입으로는 다 말하기 어려워요.

1959년 로동개조를 하고 있는 남편에게 보낸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실 어머님이 딸 하나를 데리고 네 자식을 거느린 아버님과 합칠 때부터 벌써 고생문이 열린 것이 아니겠어요. 원래의 기성 자식 다섯, 그 다음 두분이 합친 후 내가 장남으로 세 동생이 있고 이렇게 모두 아홉이라는 이 잔 밥들을 다 어머님 손으로 수습할 수 밖에 없었으니 이것은 예고된 고생이였지요.

그래서 나는 우리 어머님처럼 그 고난의 세월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든 박해와 천대를 꿋꿋이 버텨내면서 자식들을 하나도 탈락시키지 않고 사회의 역군으로 키워내고 역경에 처한 남편을 지켜낸 이런 어머님은 세상에 둘도 없다고 늘 생각하는 거죠.

아버님이‘우파’모자를 쓰고 남들로부터 백안시당하던 그 나날에도 아버님에 대한 어머님의 존중과 헌신은 변함없었죠. 아버님이 모아산에서‘로동개조'를 하실 때 늘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갖가지 음식을 잘 장만하여가지고 자식들을 이끌고 아버님 면회를 가군 하였지요.‘우파'와 계선을 가르라고 강요하던 때 추호의 드팀이 없었던 어머님이셨던 것이예요. 아버님이 혹시 독한 마음을 먹을가봐 모처럼 가족 사진을 찍어서 아버님한테 보내기도 했어요.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어머님을 모시고(1974년).

(자식들을 봐서라도 절대 기 죽지 말고 무너지지 마시라.) 이것이 어머님의 간절한 속마음이였던거죠.

이 가족사진이 아버님한테는 얼마나 큰 힘이 되였는지를 후날 아버님이 많이 말씀하셨어요.

아버님이 해외로 망명을 떠난 후 아버님께 문안편지를 써 보내는 것은 또 어머님의 중요한 일과였지요. 한달에 두번씩은 꼭꼭 편지를 썼어요. 어머님이 구술하고 내가 대필하여 어머님 이름으로 썼고 꼭 우리 자식들 편지도 동봉해 보내군 했어요. 이국땅 오지에서 홀몸으로 고생하시는 아버님한테는 이 편지들이야말로 가족사랑을 한몸으로 느끼며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였던거죠.

아버님이 해외로 망명한 후 자식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어머님의 처절한 고전이 시작됩니다. 재원이 철저히 끊어진 기막힌 형편에서 어머님은 말 갈데 소 갈데를 가리지 않고 다니며 일했어요.

강변에서 김학철 사모님이랑 함께 자갈치기도 하고 로인들을 따라 심산속에 들어가 약초를 캐서 살림에 보탬을 하고 매탄장에 가서‘니야까'(밀차)를 끌기도 했어요. 그 세월에 매탄장에서‘니야까'를 끄는 조선족녀성은 보기 힘들었지요. 그러다가 한번은 ‘니야까'채에 심하게 얼굴을 다치면서 눈언저리에 큰 상처를 입었지요. 그렇게 영원한 모성애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였지요.

약혼녀 조현희와 함께 어머님을 모시고(1978년).

그 세월 어머님은‘우파마누라'라는 딱지를 달고 살았지만 나는 한번도 어머님이 기 죽는 걸 못봤어요. 아주 떳떳했어요. 항상 잔잔한 미소를 짓는 얼굴이였지요. 락천적이고 생활에 대한 그 어떤 이름할 수 없는 신심이 넘쳐 있었지요.

1974년도인가 그때 주은래 총리께서 조선을 방문합니다. 그 동안 문화대혁명으로 두 나라 관계가 악화되여 아버님과의 통신도 두절됐는데 주총리의 조선방문이 계기로 되여 중조 두 나라 관계가 풀리면서 아버님과의 편지래왕도 이어지기 시작했지요. 아버님은 그 때까지 조선 황해도 과일군 쪽에서 어떻게 보면 파묻힌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요. 문학창작이고 뭐고 모든 걸 다 접고 진짜 도연명 같은 삶을 산 것이였지요.

그 속에서 한가지만은 명확했던 것 같아요.“만약 조국이 자신을 모욕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다 ”프랑스 작가 듀마가 한 이 말은 아버님이 망명했을 때의 창작수첩에도 분명히 적혀 있었어요.‘조국은 영원히 너를 모욕하지 않는'다는 굳건한 신념을 갖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러니 그 어떤 원망도 불평도 없이 묵묵히 지내셨지요.

개혁개방시기에 들어서면서 형세가 좀 풀리게 되자 나는 아버님을 한번 찾아가 뵈야 하겠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지요. 그때 출판사에서 근무할 때인데 15일 기한으로 변경통행증을 내가지고 회령으로 친척방문하는 걸로 나갔어요.

회령에 도착하자 곧바로 황해도에 계시는 아버님께 전보를 쳤지요.‘아들 회령 도착 금래’속이 재가 되게 기다리는데 귀국날자를 며칠 두고 아버님께서 당장 출발한다고 전보가 왔어요. 아버님도 그 사이 번다한 수속을 거치느라 여념이 없었던거죠.

17년만의 부자 상봉(1982년).

아버님이 도착하시는 날 새벽, 오촌 숙부님 내외간과 함께 회령역 개찰구에 나가 아버님을 기다렸어요. 숱한 사람들이 다 밀려나왔지만 아버님은 보이지 않았어요. 사후에 안 일이지만 급하신 마음에 아버님은 역전 직원용 출구로 빠져나오시다보니 길이 어긋났던거예요. 그런줄 모르고 숙부님 내외분과 함께 맥없이 돌아오는데 숙부님 집근처의 캄캄한 골목에서 “영춘이 아니냐?” 하는 웅글진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전에 먼발치에서 아버님께서 나를 향해 막 달려오셨죠.

“아버님!” 저도 오열하고 말았어요… 17년만에 려명전의 그 어둠속에서, 이국땅 어느 초라한 골목에서 부자간에 서로 부둥켜 안은거지요. 무슨 말이 더 필요했겠어요?!

그 이튿날, 아버님을 모시고 회령 오산덕에 올라 두만강을 굽어보면서 17년동안 가정에서 있었던 많고 많은 사연들을 끝도 없이 들려 드렸어요. 아버님은 묵묵히 내손을 꾹 잡은 채 듣고만 계셨지만 감정의 분출을 애써 자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버님, 기뻐하십시오. 아버님은 이번에 철저하게 정책락실을 받고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그 순간, 아버님은 “엉!” 하고 끝내 애써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이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였지요.

아버님의 그 울음이 그렇게 가슴을 미여지게 하더라구요. 안해한테 미안함, 자식들한테 송구함 그리고 역시 당에 대한 고마움 이런 걸 다 담은 눈물이 아버님의 량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 내렸어요. 한 이틀동안 오상덕에서 많은 얘기를 나누고 부자간 기념사진도 남기고 했지요.

드디여 아버님과의 짧은 만남이 끝나고 갈라질 시간이 다가왔어요. 그야말로 벼락(雷风电别)과도 같은 짧은 순간이였지요. 회령교두 앞에서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저를 꼭 끌어안았어요.

“아버님, 제가 2년 안으로 아버님을 꼭 모셔가겠으니 부디 건강하셔야 합니다!”

아버님은 말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셨어요.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디디며 회령교두에 올라섰어요. 아버님은 숙부님 내외분의 부축을 받으며 저의 뒤모습만 애궂게 지켜보고 계셨지요.

회갑축수연에 앞서 부모님에게 꽃을 달아드리는 며느리 조현희.

내가 삼합교 중간 쯤에 막 들어서는데 앞쪽 강가에서 “오 -- 빠!”하는 웨침소리가 들려왔어요. 큰 누이동생 춘옥이가 소리쳐 부르며 손을 마구 휘젖고 있는 것이였어요. “오--빠! 큰 -- 형--님--도 – 왔--소!” 나의 안해가 갓 돌이 된 아들애를 업고 시누이와 함께 두만강 건너편에 와 있었던 것이였지요.

내가 귀국할 때 아버님도 꼭 교두에 나올 것이니 두만강을 사이두고서라도 아버님을 만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속셈이였나봐요. 그제야 문뜩 생각이 미쳐 오던 길을 되돌아섰지요. 다행스럽게 다리 중간 변경선을 넘지 않았기에 아버님쪽으로 뛰여가며 소리쳤어요.

“아버님! 저기 연길에서 아이들이 왔습니다! ”

“뭐라고?!” 아버님은 어쩔줄 몰라 하셨어요. 조선 회령세관 직원들의 배려하에 아버님은 숙부님의 부축을 받으며 다리아래 강폭이 좁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삼합쪽을 향해 앉으셨어요.

아버님 귀국 후 남긴 가족기념사진(1984년).

강 저쪽에서는 누이동생 춘옥이가 아버님을 목이 터지게 부르고 또 불렀어요. “아—버—지--! 큰—형—님—이— 절—을--- 올—립—니—다--!”

강건너 중국쪽에서는 며느리가 손주아이를 업은 채로 무릎을 굽히며 절을 올리고 조선 이쪽에서는 시아버님이 며느리의 절을 받고, 그래서‘두만강을 사이두고 며느리가 시아버님한테 절을 했'는 미담이 생겨난거지요. 아버님은 그 자리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데 있느냐고 하시면서...

두만강다리를 건너며 나는 아버님을 집으로 모셔가지 않으면 내가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지요. 아버님의 귀국을 위해 노력한지는 오래 되였으나 17년만에 아버님을 만나고 돌아온 후 템포가 빨라졌지요. 국가지도자, 국가관계부서 책임자, 중국주재 조선대사관, 조선주재 중국대사관, 인민일보 평양주재기자 등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모든 분들에게 편지를 띄우고 절박하게 호소하며 별의별 노력을 다 했어요.

결국 어느 쪽으로 걸렸는지 어느 날인가 아버님으로부터 귀국비자가 떨어졌다는 기별이 온거예요. 그것도 제가 아버님 앞에서 다짐을 한 2년 안으로 말이예요. 정말‘정성이 지극하면 돌 우에도 꽃이 핀다'는 것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지요.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1983년 7월 6일, 아버님께서 19년만에 다시‘눈물 젖은 두만강'을 건너는 순간을 맞게 됩니다. 제가 어머님을 모시고 고모님 계시는 온성까지 건너가 아버님을 모셔오게 됐어요. 온성에서 친척들의 배웅을 받으며 남양교두까지 나왔는데 그날 따라 련며칠 내리던 비가 딱 그치고 하늘이 활짝 개이더구만요. 기분이 좋았어요.

한자리에 모인 문학분야의 선배들.

중국쪽 도문 교두에서는 문련, 작가협회 그리고 아버님의 오랜 친구분들과 문우들, 가족과 친인척들이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어요.

19년만의 가족상봉이 이루어지는 시각이 다가왔어요. 내가 아버님의 팔을 딱 끼고 다리우의 중조변계선을 넘어서자 손자 둘이 달려와 할아버지 품에 안기였지요. 도문교두에서는 이 시각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리산가족의 상봉, 한 망명작가의 원대복귀 현장이 펼쳐졌어요.

김례삼, 정길운, 고철, 김순기 등 머리발이 희슥희슥한 아버님 친구와 문우분들이 모여와 “어디 갔다 인제 오느냐!”며 서로 그러안고 등을 두드리기도 하고 감격의 눈물들을 짓고 하는데 정말 눈을 뜨고 못 보겠더라구요. 아버님도 울고 가족친지들도 울고 작가문우들도 울고 관객들도 울고 모두 울었어요.

1985년 아버님 어머님 환갑축수연.

문련에서 도문세관측과 조률하여 세관귀빈실에서 채택룡환영간담회를 잠간 마련한 뒤 연길로 이동하였지요. 그때는 우리가 18평방메터 되는 집에서 살 때였지요. 온 동네에서 내막을 알고 구경을 오고 축하를 해주었어요. 련며칠은 문련, 작가협회, 신문사, 출판사, 연변대학 등 문화 교육 언론 분야의 지도자와 절친한 친구분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뤘지요.

1984년 부모님을 모시고 전국 유람길에 올라.

국적수속을 끝내고 주당위 조직부의 결정에 따라 복권과 리직휴양간부 관련대우 등 수속절차를 철저히 마무리했죠. 그 다음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을 모시고 북경, 상해, 항주, 양주, 대련 등 전국려행을 다녀왔어요. 잇달아 우리 자식들의 마음을 모아 두분의 환갑을 쇠드렸지요. 정책락실로 분양받은 아파트 정원에다 환갑상을 차리고 아버님과 어머님을 모셨어요.

19년만의 아버님의 귀환으로 우리 집에서는‘눈물젖은 두만강'이 아주 과거형이 돼버렸지요.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해외망명을 마치고 귀국하신 후 14년을 가족들과 함께 천륜을 누리면서 사셨어요.

아버님의 귀국, 자식들의 건실한 성장 이 모든 것을 이끌어낸 것은 어쩌면 어머님 특유의 억센 의지와 성격, 락천성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하지요. 나아가 어머님은 이 아들더러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시종일관 내 고향 문화건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도록 한 내적동력이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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