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5](채영춘편-10)
제가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을 떠나 1998년 9월에 연변주신문출판국으로 전근할 때 우리 나라 출판계는 시장화, 산업화의 충격에 모대기고 있었어요. 연변 나아가 전국의 조선족출판계도 례외가 아니였지요.
시장경제와 개혁개방에 따른 조선족사회의 전대미문의 지각운동으로 조선족출판문화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기존의 저술인, 출판인, 독서인 진영이 대분화, 재편성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시점이였지요. 특히 중한수교 후 조선족인구 대이동으로 하여 생긴 조선족거주구도의 균렬과 변화로 하여 민족출판은 사상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되였어요.
조선문도서 출판학술모임에서 연설하고 있는 채영춘(2003년).
워낙 200만명도 채 안되는 국내 조선족인구에서 상당한 수량이 빠져나가고 있으니 민족신문 출판사들이 직접적으로 곤혹을 치를 수 밖에 없었지요. 《중국조선족소년보》의 경우 제일 호황기를 맞을 때는 8만부까지 올라 갔었는데 이때에 와서는 만부 좌우로 추락되고 《연변문학》을 비롯한 문학지들은 더구나 울상이였어요. 잘 나가던 통속잡지 《청년생활》, 《연변녀성》도 만부아래로 하락세를 보였고 일반 도서들은 1000부 선이 허물어지는 악재를 맞게 되였구요.
2000년 제2회중국조선족출판문화대상시상식에서 정판룡 교수로부터 상패를 수여받는 조선족출판문화대상 수사자들
민족류동에 따른 조선족중소학교의 생원(生源)감소는 조선문교재출판을 위기에로 몰아갔어요. 이같은 상황은 신문사나 출판사, 잡지사의 경영부실에서 온 것이 아니라 출판대환경의 변화로 빚어진 것이였어요. 국가의 정책보조금으로 여직껏 살아온 민족신문사, 민족출판사와 잡지사들은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였지요. 거기다 "시장은 민족출판의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자조(自嘲)섞인 비관정서가 범람하면서 적잖은 출판인들이 하해(下海)보따리를 싸는 난국이 나타나고 있었지요.
민족문화의 근간이고 민족의 정신좌표인 민족출판이 된서리를 맞고 있는 때 자치주출판행정이 해야 할 일은 출판계를 새로운 각오로 결집시키고 실의와 비관에 빠져있는 민족출판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어요. 고민끝에 떠오른 해결책이 중국조선족출판문화기금을 마련하여 우리 출판인들을 격려하는 출판문화대상시상활동과 학술세미나를 정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굳혔지요.
유창근, 임종현 두 부국장과 토의하여 공감대를 형성한 뒤 방안을 내왔어요. 그런데 자금이 문제였어요. ‘정부의 젖줄기를 끊는다(断奶)'는 공포용어가 심심찮게 민족출판계를 망라한 민족문화가족 전체를 기죽게 하고 있던 시국에 정부에 향해 출판문화기금을 장기 구걸한다는 것은‘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아둔한 발상이 아닐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누가 도와주려나 앉아서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였지요. 결국 바쁜 불부터 끄고 본다는 생각으로 조선족문화를 각별히 사랑하는 해외 한 지성인의 도움으로 기금을 마련하였어요.
중국조선족출판대상 후원인 주선영 회장 부부(앞줄 가운데)를 모시고(1999년).
그리하여 1999년부터 중국조선족출판문화대상평의시상활동과 출판문화학술세미나를 정례화하였어요. 1999년에 발족하여 2002년까지 3회에 거친 중국조선족출판문화대상시상대회에 주당위와 주정부의 지도자들, 정판룡 교수를 비롯한 조선족사회 리더들이 참석하여 포상도 해주고 하였지요.
오랜 세월 출판문화의 무명영웅으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신들이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것이였어요. 제1회 시상식을 취재한 《중국신문출판보》 기자는 이날 행사를 “건국 50년래 처음으로 개최한 조선족출판계의 훈장수여식”이라고 절찬하면서 장내에서 무시로 터지는 박수소리는 “조선족인민들이 최초로 자기 민족출판인들의 반세기란 세월의 말 없는 로고에 수여한 최고의 훈장 그 자체였다.”고 평가하였어요.
저는 제3회 시상식 때‘공훈출판인' 대상을 수상한 한족기업인 손장학이 일생동안 국가급 상을 비롯하여 많은 상을 받았지만 이 상처럼 감동을 주는 상은 처음이라며 “이 상은 중국조선족 출판계가 일생을 조선문출판사업에 몸 바쳐 온 이 한족기업인에게 준 최고의 훈장”이라며 눈물이 글썽해 터놓던 고백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제2회 중국조선족출판문화학술세미나 기념촬영.
출판문화시상활동과 더불어 1년에 한번씩 개최한 출판문화학술세미나는 민족출판의 현황을 진맥하고 활로개척 대안에 고심하는 출판계의 학술분위기를 이끌어 냈어요. 한해에 한책씩 학술론문집을 출판했는데 “금싸락 같은 출판문화참고서”라고 제 후임들은 물론 출판업계의 리더들이 입을 모았어요.
중국조선족출판문화학술세미나 기념 론문집.
아쉽게도 조선족출판문화대상평의활동은 2003년부터 10년간 안타까운‘휴면기'를 거치다가 림혜영이 국장으로 부임해오면서 정부의 지원과 자선단체의 후원을 이끌어 내여 2013년에 다시 해볕을 보게 되였어요. 시상범위도 신문언론으로 확대하였구요.
우리 민족 출판의 세계와의 접목은 90년대 썩 후반이였다고 생각돼요. 물론 그 전에 개별적으로 조선의 일부 출판단위와 접촉한 사례가 있었지만 연변출판계가 조선반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출판계와의 전방위적인 공식접촉을 시작한 것은 1999년도였고 그 플래트홈은 한국의‘서울국제도서전'이였어요. 이 해에 10여명으로 구성된 연변출판대표단을 인솔하여‘서울국제도서전'을 탐문, 견학하였어요. 국제도서전을 꼼꼼이 돌아보고 시야를 넓혔으며 한국출판인협회 회장도 만나 담화를 나누고 몇몇 출판사도 방문하면서 첫해에는 출판고찰을 하였어요. 참으로 눈을 뜬 한차례 출국고찰이였어요.
귀국한 후 국지도부에서 토론을 거치고 상부에 보고한 후 연변출판계의‘서울국제도서전’진출을 화제에 올리게 되였지요. 뒤이어 연변출판의 국제화를 위한 동원회의를 열었어요. 2000년부터 연변 각 출판사, 잡지사의 도서와 잡지들이 한국 코엑스 국제도서전매대에 전시되면서 연변조선족출판을 전격 알리는 일이 가동되였어요.
2000년 연변출판계대표단을 인솔하여 서울국제도서전에 참가(뒤줄 왼쪽 세번째).
처음에는 우리 출판물들이 여러 모로 대비가 생기면서 눈이 감겼는데 점차 변화가 알리기 시작했어요. 해마다 서울국제도서전에 참가하여 보고 느끼고 하는 과정에 우리의 차이점을 보완하고저 하는 출판계의 노력이 탄력을 입으면서 경쟁심리가 촉발되더라구요.
지금의 연변조선족출판물은 20년전에 비해 표지디자인이나 판심설계, 종이질 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변화와 진보를 가져 왔다고 할 수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출판인들의 열린 자세와 분발심리에 힘입은 긍정적 에너지가 내적동력으로 되고 있다는 점이예요.
연변대학 겸직교수로 신문학부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고 있는 채영춘(2010년).
저는 워낙 신문출판국에 전근하기 전 텔레비죤방송국에 있을 때부터 연변대학의 겸직교수로 있었어요. 1995년 연변대학 신문학부 최상철교수가 저한테 방송학이 공백으로 되여 있다면서 이 부문을 맡아 달라고 하여 쾌히 수락했지요. 그때로부터 일주일에 두번씩 대학에 올라가 신문반을 중심으로 본과생들에게 방송과 신문출판에 대해 강의를 하였어요. 학생들의 반응이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정상적인 강의 외에 학생들의 과당토론도 조직하고 현시로 견학을 데리고 가기도 하면서 과당공부와 과외실천을 결합시켰어요. 이 애들 속에서 앞으로 우리 언론을 계승할 후배들이 배출된다고 생각하며 성심성의로 교수에 최선을 다했어요. 과연 그때 제가 가르친 학생들 속에서 오늘날 신문, 출판, 방송 분야의 중견들이 적지 않게 나온 걸 보면서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게 되더라구요. 이렇게 연변대학 신문학부 강의를 텔레비죤방송국에서부터 주당위 선전부에서 퇴직할 때까지 12년을 한 셈이였어요.
1996년 연변대학 94년급 신문전업학생들을 이끌고 연변TV를 견학.
지난해 12월,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70주년, 신문학교육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우수교수 7명 중의 일원으로 저도 포상받고 공로패를 받았어요. 12년 객원교수직분에 나름대로 충실하게 림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어요.
2004년 5월, 주당위 선전부 부부장 겸 주정신문명판공실 주임으로 임명받아 일터를 옮기게 되였어요. 선전부에서도 제가 문화, 언론, 대외선전, 문명건설 등 분야를 장악하게 되였지요.
선전부에 도착하면서 제일 먼저 보아 낸 문제가 2년에 한회씩 하는 자치주 최고의 상 ‘진달래문예상'을 8년 동안이나 못 했다는 것이였어요. 이건 큰 실착이였어요. 너무 안됐다 싶어 자료를 다 훑어보고 나서 부장과 주관서기한테 반영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 갖고 주장을 찾아갔지요.
“‘진달래문예상'이 8년 동안이나 끊겼습니다. 이‘빚'을 어떻게 할 것인가요? 포상받아야 할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무시되였는데 늦었더라도 올해는 꼭 해야겠습니다.”
주장께서 얼마만한 자금이 필요한가고 묻더군요. 한 10만원쯤 이면 될 것 같다고 대답을 했는데 주장이 한참 궁리하더니 어렵지만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하더라구요. 그런데 준비작업에 들어 가면서 보니 8년 동안 ‘적치'된 포상대상이 200여명이 된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였어요. 초심과 재심을 거쳐 저한테까지 올라온 100여명 수상자들이 모두 문화실적이 어마어마한 분들이였지요. 최후 확정된 제5회‘진달래문예상’수상자 후보가 115명(제6회는 61명)이였어요.
어렵게 책정된 10만원 자금으로는 판판 부족하였던거죠. 얼마간 더 보태는 선에서의 문제가 아니였어요. 돈 때문에 이번에도 일차적으로 매듭을 짓지 못한다면 그 후유증은 계속 이어질 것임이 분명했어요. 지도소조회의를 가지고 중론을 모았어요. 결국 상금을 취소하고 상패와 증서, 기념품에 신경을 쓰고 시상식을 문예야회형식으로 성대하게 거행하기로 하였어요.
2009년 연변의 미술가 서예가 촬영가들과 함께 있는 채영춘(왼쪽 첫사람).
수상자들에게 몇백원씩 포상금을 나눠드려 웃음거리로 되기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라 판단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사상 처음으로 기획한‘포상금이 루락된’시상야회가 TV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성대하게 열렸어요. 수상자 전원이 차례로 나와 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사이사이에 수상작품으로 각색된 문예프로그램을 끼워넣어 분위기를 고조시켰지요. 시상야회 프로그램은 재방송까지 몇차례 하여 문예인들의 업적을 전 주 인민들에게 회보할 수 있었어요. 수상자와 시청자들의 시상야회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이였어요. 아무튼 '빚'은 갚은 셈이였어요.
주당위 선전부에서 근무하던 6년 남짓한 사이 저는 두가지 일만은 분명히 했어요. 우선 자신이 맡은 언론, 문화 령역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확실하게 관계해야 한다는 문화자각이였어요. 두리뭉실하거나 반중건중한 태도와 담을 쌓고 문화리더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였어요. 다음으로는 언론사, 작가협회, 문련 각 협회, 여러 문화단체에 자주 드나들며 언론인, 문학인, 예술인, 문화인들과 벗으로 사귀면서 특강도 자주 하고 난제도 풀어 줄 수 있는 능력자로 되고저 애쓴 것이였지요.
2006년 중국작가협회 제7차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연변대학 김관웅교수와 함께(오른쪽 채영춘).
어느 해인가 문련에서 새봄맞이 련환회를 소집하였는데 주당정 주요 지도자들이 많이 참석했어요. 문련은 전 주 문학예술계 리더들이 집결한 단체로서 산하에 10여개 협회가 있어요. 이날 련환회에서는 각 협회 회장과 비서장들을 한줄로 나란히 서게 한 다음 문교서기더러 그들의 각자 이름과 직무를 맞춰보게 하는 종목이 있었어요. 그런데 문교서기가 저한테 넘기는 바람에 제가 나서게 되였지요.
20명 가까이 되는 각 협회 회장과 비서장의 성함과 직무를 한사람도 오차 없이 꼭꼭 짚어 맞췄더니 장내에서 환호성이 터지더라구요. 등개 서기(등개는 당시 길림성당위 상무위원, 주당위 서기였음)는 제 손을 잡아주며 “합격된 선전부장”이라고 치하하더군요. 제가 평소에 맡은 분야에 대해 건성건성 대하지 않고 꼼꼼이 살폈기 때문이였겠죠.
2007년 민간이야기대전 《황구연전집》 저술자 김재권선생을 만나 출판을 두고 담론하는 채영춘(오른쪽)
문화리더라면 문화령역에서 적어도 문화인들이 공감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거지요. 유년시절 화가의 꿈을 시작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재현하는 창조적 흥분에 눈을 뜨면서 거기다 작가였던 선친의 영향으로 문학세계로의 입문도 한몫하여 저의 문화인 삶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70년대부터 병진한 미술편집과 유화창작, 문학편집과 문학창작 경력은 문화리더로서의 형상사유능력과 조형예술감각을 뿌리내리게 하였고 줄곧 하나의 저력으로 저를 충동하여 새로운 분야에 입문할 때마다 '창조적 긴장상태'에 몰입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지요.
미술평론성과로 수상한 <진달래문예상> 영예상, 문학창작성과로 수상한 <진달래문예상> 창작상,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족문화전승발전 특수기여인물>상은 저의 문화인의 삶에 대한 자치주 당정의 영예훈장이라고 느껴져요.
2010년 두만강문화포럼 사회를 마치고 학자들과 함께(왼쪽 네번째)
제가 2010년에 주당위 선전부에서 퇴직한 후에도 편안할 새가 없었어요. 지금도 연변일보 론설위원, 지부생활 론평원, 연변인민출판사 선제전문위원,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예프로 고문, 길림성조선문신문잡지도서 심열전문가소조와 주당위보도심열 평의 전문가 소조 조장 등으로 바삐 보내면서 맡은바 일에서 에누리 없이 초심을 간직하고 최선을 다 하고 있어요. 그속에서 인생의 락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업에 참가하여 반세기가 되는 세월 속에 정치인, 언론인, 작가, 문화인으로서의 채영춘으로 여러 가지 배역에 충실한 삶을 살아 오지 않았나 생각돼요.
조선족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재직에서나 퇴직해서나 항상 우리 민족 운명에 대한 고민을 품고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민족 대이동이 급물살을 타고있는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출로와 생존발전대안을 두고 고민하는 것은 중국조선족 구성원 모두의 몫이겠지만 우선 지도층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족사회의 엘리트들이 선두주자가 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무엇보다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민족문화성채를 구축하는 면에서 소임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7년 전 주 민족문화전승발전 '특수기여인물'상 수상자로 선정된 채영춘(왼쪽 첫사람).
지난날 페쇄된 변강오지 연변은 오늘날 개혁개방의 전초기지, 국가 실크로드 북향개방의 허브로 자리매김하고 있어요. 나라의 정책지원 레이어드(叠加)효과로 탄력을 얻고 있는 연변은 큰 그림을 그려야 되는데 그 포인트는 연변조선족자치주라고 생각해요. 이 그림은 청산록수의 자연생태, 민족자치주의 인문풍토, 정책고지의 변강개발, 세계인과 함께 하는 다문화환경이 복합된 파노라마로 작품화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기적 프로젝트에서 우리 언론과 문화인들의 역할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문화연변으로 가는 길은 바로 우리 발밑에 있어요. 우리 선인들이 닦아놓은 길 따라 우리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걸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경청해주시고 지켜봐주신 시청자,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기자 영상/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파일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