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대형련재]《한락연을 추억하여》(5)중국혁명가 한락연을 회억하며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9월27일 08시28분    조회:97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르위·앨리

한락연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동북 길림성의 한 조선족가정에서 탄생했다. 그의 사업작풍과 혁명정신은 마치 그의 이름마냥 꾸밈새가 없고 자연스럽다. 일을 대함에 있어서 그는 종래로 곤난에 머리를 숙인 적이 없으며 혁명사업에 대한 견정함과 열정은 더없이 뜨거워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을 고무해주었다.

한락연의 유화작품〈광명을 향해 전진하는 장족사람들〉(117cm×80cm, 1945년)

나는 1938년에 무한에서 한락연을 알게 되였다. 그는 무창에 살고 있었는데 경상적으로 장강을 건너 한구에 와서 스메들리(史沫特莱)를 도와 전선을 위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팔로군을 도와 자금을 마련해 약품을 구입했다. 그는 또 전방의 사진과 신문보도를 갖고 외국 기자들을 상대로 항일선전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한창 ‘공업합작사’를 건립해 중국의 항일전쟁을 돕는 일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락연의 집요함과 솔직함, 그리고 성실한 일본새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빨리 벗으로 친하게 되였으며 식당, 해군 구락부, 기독교 녀성청년회 뒤에 있는 잔디밭에서 늘 만나 사업을 토의하군 했다.

1939년 중경에서 락연은 기독교 녀성청년회 서기중 한사람인 류옥하와 결혼했는데 나는 초청을 받고 그들의 혼례식에 참가했다. 당시 동북의 마점산(马占山), 류란파(刘澜波), 염보항(阎宝航) 등 유명인사들도 참석했다. 그리고 밀드레드 오븐과 마그리트 브레마카도 서기중의 일원들이였는데 그들은 사천에서 생산되는 아마천으로 된 모기장을 리용하여 신혼집의 커튼을 만들었다.

보계의 ‘공업합작사’ 판사처는 초기에 매우 허술하여 일을 하기 힘들었다. 에드가 스노가 판사처에 왔다가 이를 보고 돈을 줘서 장식을 다시 해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락연은 통일전선사업으로 매번 태항산에 갈 적마다 보계에 있는 우리 판사처에 들렸다. 락연은 그 시기 국민당정치위원회에서 리제심을 위수로 하는 통일전선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나에게 당시 그가 경유하는 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항일을 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또 중경의 위원들에게 전방에서 목격한 모든 것을 회보했다. 처음으로 전방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돼 그는 또다시 갔다. 그리고 전방에서 돌아오던 도중 그는 체포되여 족쇄를 찬 채로 서안의 감옥에 갇혔다.

이는 가능하게 국민당특무가 국민당에 대한 락연의 충성을 의심해서일 수 있으며 또는 그가 일찍 상해에서 혁명운동에 참가한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였을 수도 있다. 우리는 락연을 몹시 근심했다. 3년 후 락연이가 석방되여 다시 보계로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돈을 주면서 옷을 사서 입으라고 했다. 얼마 후에 그는 성도로 갔으며 안해와 아이를 서북으로 데려갔다. 란주에서 그는 집을 세맡고 몸을 안착한 후 경상적으로 서북으로 그림을 그리러 떠나군 했다.

1944년 내가 책임진 배려훈련학교는 사천성 서북에서 감숙성 산단으로 옮겨왔다. 락연은 산단학교로 여러번 왔으며 학교의 사생들과 빨리 친숙해졌다. 배려학교의 학생들은 매번 란주에 갈 적마다 락연의 집에 들렸으며 그는 이 기회를 빌어 학생들에게 혁명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락연은 나와 산단학교에서 함께 일한 적 있는 게오르기 호게가 세상을 떠난 후 교육사업에 평생을 바친 그를 기념하기 위해 유화로 된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나에게도 초상화를 그려주었는데 나는 이 그림을 뉴질랜드에 있는 고향집에 부쳐보냈다. 락연은 근성이 있는 예술가이다. 그는 매일 그림을 그렸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몇폭씩 그리기도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거기에 빠져서 금방 자신을 망각해버린다. 그림을 그리는 락연을 보는 것은 일종 향수로서 그것은 그의 기예를 볼 수가 있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나라와 인민들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을 의식할 수도 있기 때문에서다. 그림이 완성되면 우리는 보통 대화를 나누군 했다. 그가 그린 우리 학교의 작품은 후에 란주에서 ‘서북 풍정’이란 이름으로 된 전시회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한락연이 키즈천불동굴을 고찰할 때 들었던 집

통일전선은 항일전쟁승리의 3대 법보중 하나이다. 락연같은 사람들만이 정책에 대한 고도의 자각성과 원칙에 대한 견정함과 령활성을 갖고 서북의 국민당 고급장교들과 친할 수 있었다. 당시 서북정부 주석인 장치중과 서북 신강군구의 사령인 도치악은 모두 락연의 절친으로서 락연은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들의 저택에는 모두 락연이 그린 그림이 걸려있었다. 락연은 장치중에게 배려학교의 교육방침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서 장치중은 직접 산단에 가서 참관했으며 그 후 자신의 막내아들을 도시학교에서 작은 진에 있는 산단 배려학교에 전학시키기까지 했다. 도치악과 락연의 우의는 더욱 깊었는바 후에 락연은 나를 소개하여 도치악과 조수산 장군을 만나게 하였다. 조수산은 감숙에 주둔하는 국민당부대 사령이였는데 락연과 관계가 괜찮았다. 후에 이들은 모두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락연의 끊임없는 노력과 세밀한 사업은 서북의 해방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1946년 봄, 락연은 신강행 준비로 바빴다. 이번 출발은 서북에 있는 중국의 오랜 예술보물고와 소수민족 생활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를 찾아와 사업에서 비교적 큰 곤난은 교통도구 문제라고 말했다. 나는 학교에서 비교적 괜찮다는 트럭 두대를 골라서 그의 곤난을 해결해주려고 했다. 락연은 그중의 한대를 사서 신강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그는 키지르천불동과 고창 고성유적을 답사했다. 그 곳에서 몇달 동안 일하고 란주로 돌아온 후 그는 신심으로 가득차서 재차 가서 깊이 있는 일을 하려고 계획했다. 그는 또 산단으로 왔다. 우리는 오래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락연은 나에게 그의 계획을 알려주면서 또 자신의 가족사도 일부 말해주었다. 두번째로 신강에 갈 때 나는 배려학교의 예술을 좋아하고 신체가 건장한 학생 두명을 그와 함께 가도록 해 기사 겸 조수로 일하도록 했다. 나는 두 남학생에게 답사일은 절대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 락연선생을 잘 도우라고 부탁했다.

그번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던중에 락연이가 탄 비행기가 산에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해 그는 불행히도 별세했다. 그 사고가 발생한 후 누군가 나에게 락연이가 이전에 줄곧 통일전선사업을 위해 국민당 고급관료들을 대상해서 공작해왔으며 그로 인해 국민당특무의 엄밀한 감시를 받았다고 알려주었다. 또 다른 소식에 의하면 락연이가 탄 비행기가 하미에서 리륙한 후 폭격으로 추락되였으며 비행사고가 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소식은 한 녀성 공작일군이 국민당특무로부터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제기법이 있었는데 락연과 그 두 학생이 신강의 남쪽 지역에서 공산주의 정치선전사업을 한다는 것이였다.

1952년 로광금이 외국에서 돌아와 락연의 부인과 자녀가 신개로(新开路)의 한 자그마한 집에서 아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이 일을 응당 해당 일군들에게 알려야 하며 그들이 혁명선렬의 유가족들임을 말해줘야 한다고 했다. 1960년대 나는 상해에 거주하면서 우연하게 광주로의 한 낡은 책들을 파는 서점에서 제1차 국내혁명전쟁 후기의 지하공산당 투쟁에 관한 서적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 책에서 락연이가 조기 혁명활동에 참가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이 내용은 그가 산단에서 나한테 알려준 것들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책을 샀다. 락연은 나에게 그가 프랑스에 있을 때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해 일한 사실도 말했다. 락연이가 한 아래의 말은 아직도 나의 귀전에서 맴돌이친다. “중국에서 국민당정부가 성공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은 기필코 최후의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락연이의 일생과 사업에 대한 그의 충직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후에도 나와 벗들은 늘 그를 떠올리면서 그가 고상하고 비범하며 혁명사업에 자신의 전부를 바친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군 한다.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1987년 7월

저자 소개: 르위·앨리(路易 ·艾黎, 1897년—1987년) 뉴질랜드 사람, 청년시절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27년 중국에 와서 20세기 30년대 상해 첫 국제 맑스주의소조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의 지하혁명을 지지. 항일전쟁이 시작된 후 스노 부부와 함께 공업합작사 운동을 발기하고 여러 공업합작사를 조직해 항일전쟁을 지원했다. 배려학교를 설립했으며 해방 후 전국을 돌면서 글을 써 중국을 세계에 알렸다. 작가, 교육가, 사회활동가로서 중국 혁명과 건설을 위하여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번역: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사진 민족출판사 제공

파일 [ 2 ]

Total : 1576
  • ①(김영식, 유화). 우리 주 예술시장의 활성화와 문화관광산업의 발전에 일조하려는 데 착안점을 둔 제1회 연변예술품박람회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22일, 연변미술관을 한발 앞서 찾아 직원들과 함께 전시장을 포치하느라 바삐 돌아치고 있는 연변미술관 서화 관장을 만나봤다. (김진일, 홀치기염색). 기획자로서의 그는 ...
  • 2020-12-25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81](박문일편4) 연변대학교 발전의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의 배려입니다. 1949년 3월에 연변대학교가 세워진 것도 바로 민족정책의 결과로서 민족정책이 꽃을 피운 것입...
  • 2020-12-22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80](박문일편3) 연변대학이 혁신개혁방면에서 분투하는데 체제개혁의 선봉이 되였다는 것과 그 다음 실제 연구에서는 어떻게 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요하게는 특색이 선명하고 우세가 돌출한 대학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기구개혁에서...
  • 2020-12-21
  • 장백산밀림속에 있는 부얼후리호수를 일명 원지 혹은 천녀욕궁처라고도 한다. 원지는 과거나 지금이나 태고연한 원시림속에 숨어있다. 두만강의 원류인 적봉과 부얼후리호수는 홍토산 밑에 있다. 이번기‘우리 동네(温馨家园)'에서는 《청실록》,《만주실록》, 《만주원류고》등 청나라시기의 많은 력사문...
  • 2020-12-18
  • 조선언어문자의 법제화, 규범화, 과학화 추진을 위한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제32차 실무회의가 15일,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판공실의 주최로 장춘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에는 북경, 상해, 료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등지의 중국조선어규범위원회 위원 등 30여명이 회의에 참석,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판공...
  • 2020-12-18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9](박문일편2) 연변대학교가 설립된 후 대학의 지도사상을 어떻게 하겠는가를 둘러싸고 〈10대 강령〉이 제출되였습니다. 이 〈10대 강령〉은 지금봐도 완전히 현실적인 의의가 있으며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1...
  • 2020-12-14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8](박문일편1)  전임 연변대학 교장 박문일. 박문일 프로필: 1932년 출생, 중국공산당 당원, 저명한 사학가, 교육가, 저명한 사회활동가. 중국고대사, 조선고대사 전업, 국별사박사생 지도교수. 1960년 전국문교 ‘군영회’에...
  • 2020-12-14
  • 우리 민족은 명절, 휴가때면 온 가족이 모여 가정 오락으로 화투놀이를 하는 풍속이 있습니다. 년말 년시를 맞은 지금 여러분들도 식구들과 화투놀이를 하던 추억이 새록새록 하실겁니다.   혹시 여러분은 화투가 어떻게 왔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화투는 한어로 “画图” 나 &ldq...
  • 2020-12-11
  • 26일, 안도현 장백산무형문화유산전시쎈터가 정식으로 개관되였다. 참관자들은 관내에서 무형문화유산 프로젝트들과 지척에서 접촉하며 그것들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안도 장백산무형문화유산전시쎈터는 장백산문화박람성 광장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면적은 1,000평방메터이다. 전시쎈터는 비문화유산 전시...
  • 2020-11-30
  • 예로부터 조선민족은 정월 초하루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윷놀이를 많이 행하였는데 윷놀이는 장소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기에 대중적인 전통민속놀이로 되였습니다   윷놀이의 기원에 대해 이러저러한 설법들이 존재하지만 력사적으로 분석해보면 적어도 조선반도의 신라,백제 시기부터 유래된 것만은 사실이고 오직 우...
  • 2020-11-27
‹처음  이전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