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구술86]〈오래오래 앉으세요〉의 탄생과 뒤따른 풍파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1월8일 08시43분    조회:96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 -86](허동철편2)

운수로 말하면 저도 행운아이고 노래 〈오래오래 앉으세요〉도 행운아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 리유는 차일로 미루고 오늘은 모두다 궁금해하는 〈오래오래 앉으세요〉의 가사가 어떻게 나왔는가 하는 것부터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장모님이 환갑 쇨 떄 축수의 술잔 올리는 허동철과 그의 안해 한경자.

1981년이면 장모님의 환갑년이였습니다. 설명절이면 장모님댁에 일가친척이 모여서 설을 쇠군 하는데 설 쇠기 앞서 갑자기 처남(한국록)이 올해는 어머니의 환갑년이라 환갑을 쇠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둘째 매부가 노래를 짓기 때문에 어머니께 남다른 축복을 드릴 수 있는 조건이 있으니 어머니 환갑에 노래를 선물하면 어떻겠냐?”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맏사위, 맏딸, 처남댁 모두가 박수를 치면서 그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우리 집 사람은 둘째 딸인데 뒤이어 안해 한경자가 “우리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입니까. 가사에 ‘고생끝에 락을 보신 우리 어머니’라는 구절을 꼭 넣어주세요.”라고 간곡히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사는 그날로 쓰게 되였습니다.

장모님은 김씨댁 맏딸인데 아버지 김성국은 항일투사였습니다. 일본놈들에게 잡혀 여덟번이나 개산툰감옥에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비밀을 루설하지 않으니 일본경찰들은 고추물을 먹이고 발로 배를 막 걷어찼습니다. 고추물이 입으로 토해 나오고 했으니 그 고통이 오죽했겠습니까. 이런 경력을 가진 장모님의 아버지는 ‘흰두루마기'라는 별명으로 연변당사에도 기록되여 있습니다.

우리 장모님은 항일투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소년아동단에 참가하여 머리태에 삐라를 숨겨가지고 비밀리에 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가정사를 갖고 있는 장모님은 스물넷 꽃나이에 불행하게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홀로 삼남매를 키우게 되였습니다.

장모님 김봉란(중간사람)과 그의 아들딸.

그러던 차에 다행으로 연변1중 종업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여 연길에 오게 되였는데 그 때는 집이 없어 자식들을 두 큰집에 나눠 보내게 되였습니다. 그 때 큰집들에서는 장모님이 아직은 나이가 청춘인데 애들을 우리가 키우겠으니 재가를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장모님은 재가를 하면 자식들에게 루가 될가봐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와도 재가를 하지 않고 애들을 혼자 키웠습니다. 이런 장모님이 환갑을 쇤다고 하니 제가 어찌 격동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3남매의 자식들이 한집에 아들딸 둘씩 해 모두 여섯이 있는데 거의 장모님이 키우다 싶이 하였습니다. 그러니까〈오래오래 앉으세요〉에서 나오는 화면들이 정말 우리 가문의 실생활을 담은 것이나 별 다름이 없습니다. 여기서 “고생끝에 락을 보신 우리 어머니”라는 주제가 이미 섰고 우리 가족생활이 바로 가사의 화폭이 될 수 있었기에 그걸 바탕으로 하고 음미해 쓴 것이 오늘의 가사입니다.

장모 김봉란과 손자손녀들.

저는 그 이튿날 가사를 들고 이미 〈모란꽃 피였네 〉,〈우리네 자랑 꾀꼴새〉를 함께 창작한 파트너 방룡철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가사를 보던 방룡철선생은 무릎을 탁 치며 “아, 바로 이겁니다!”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또 작곡에 도움이 되겠는가 싶어 방룡철선생을 모시고 장모님댁으로 가 장모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경청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방룡철선생의 어머니도 청상과부였는지라 ‘과부설음'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마 여기서 방룡철선생님은 새로운 감수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둘은 또다시 방룡철선생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보통 창작할 때 책상에 마주 앉아 하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에 엎드려 두다리를 쭉 펴고 합니다. 방선생님이 콩나물대가리를 세우고 다듬더니 얼마 지나 한번 들어보라며 흥얼흥얼하는 것이였습니다.

방선생님은 노래가락을 정말 잘 넘깁니다. 누구도 흉내를 못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의 안해는 방선생님이 곡을 가지고 우리 집에 찾아와 가락을 넘길 때면 그냥 웃음으로, 기쁨에 잠겨있군했습니다. 방선생님은 가사가 마음에 들었는 데다 또 원래〈모란꽃 피였네 〉와 〈우리네 자랑 꾀꼴새〉에서 이미 자기의 천부적 재능을 보였단말입니다. 게다가 그 분의 어머니도 우리 장모와 같은 처지인지라 감동적인 곡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겠지요.

노래 〈오래오래 앉으세요〉가 전국문명건설의 노래로 찬평받으면서 기자의 취재를 받고 있는 작사가 허동철(가운데)과 작곡가 방룡철(오른쪽).

쭉 뽑아내는 노래가락을 들으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대목이 “아—아—어머니 오래오래 앉으세요”의 “아”자에 얹힌 음조가 너무 높더란 말입니다. 저는 “노래에서 고조부분은 보통 높은 소리로 처리되지만 이 노래만은 남녀로소가 모두 부르도록 해야 하는데...고조부분이라고 해서 꼭 높은 소리로 웨쳐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낮은 소리로, 내심으로도 고조를 형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고 귀띔했습니다.

그것은 1958년 제가 길림성중등학교문예경연에서 시랑송을 하게 되자 6촌형님 허동활(연변연극단 배우, 감독)한테 지도를 받고저 찾아 갔을 때 제가 감정을 더 살리느라고 줄곧 높은 소리로 랑송하다가 고조부분에 가서 더 높은 소리를 내자 형님께서는 “고조라 하여 무작정 높은 소리를 낸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더 썩 낮은 소리로도 고조를 만들 수 있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 그렇게 제기한 것입니다.

그 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방룡철선생의 부인 김순화(연변가무단 가야금수)가 그 말을 듣더니 일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파트너이고 또 그들 부부의 두터운 신임에서인지 방룡철선생은 제꺽 다시 방바닥에 엎드리더니 콩나물대가리를 정리하는 것이였습니다. 잠간 지나서 나온 대목이 지금의 “아-어머니”이 대목입니다. 정말 방룡철선생님은 재간 있는 우리 민족의 작곡가입니다. 우리 민족 가요계의 빛나는 이지요.

저는 이 노래를 장모님의 환갑림박에 방송국에서 록음하여 처음으로 들려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음악부의 김태종선생이 '3.8 국제부녀절 음악특집'프로를 편집하면서 이 노래가 마음에 든다며 자기 프로에 쓰겠다고 록음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3.8절프로’에 나가기 전에 장모님께 련락을 드렸습니다. 워낙 제가 장모님의 환갑잔치날에 쓰자고 지은 노래인데 이런 사정때문에 ‘3.8절 프로'에 나가게 되니 경청해달라고 했지요. 그러니 장모님은 알겠다고 하셨습니다.‘3.8부녀절’황금시간대에 이 노래가 전파를 타고 방송되였습니다.

바로 이튿날 저는 장모님의 소감을 들으려고 아침 일찍 장모님댁으로 향했습니다. 장모님의 집은 그 때 연변1중 사택에 있었는데 연변1중 교직원 사택은 다 한줄에 있었습니다. 그 길머리에 저의 은사 리상길 수학선생님 집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집 앞마당을 지나가는데 선생님이 집에서 나오더니만 다짜고짜로 “야- 좋은 노래를 썼더구만. 허동철이 정말 좋은 노래를 썼더구만!”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제자가 선생님한테서 먼저 인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야– 정말 눈물이 나더구만. 우리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셨소.” 라고 하시는 것이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부랴부랴 장모님을 찾아가 소감을 물으니 장모님은 “노래를 들으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냥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였습니다.

70년대 중반 중앙인민방송국 음악편집들과 함께 연변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김태종(왼쪽 첫사람), 허동철(가운데).

그리고 젊었을 때 사별한 남편이 가끔 꿈에 나타나군 하였는데 꿈에 볼 때면 방바닥에 들어서서 비스듬히 열린 정주문 틈으로 집안을 들여다 보고는 늘 섭섭해서 돌아가군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처음으로 동침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기뻤습니다. 장모님을 위해 지은 노래였는데 사위값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장모님도 감동시켰고 동네 어머니도 그리고 선생님도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니 이번에는 사회의 반응을 들어보아야 했습니다. ‘3.8절'에 방송된 다음 방송국 음악편집실에 청중들로부터 “따라배우기에 배치해달라” “매주일가에 배치해달라”라는 이런 편지가 눈송이처럼 날아들었습니다.

이 때 갑자기 방송국에서 지령이 내렸습니다. “노래 〈오래오래 앉으세요〉 방송을 중지하라.”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그때 문화대혁명이 금방 끝났으니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여독이 그냥 있기 때문에 그리 순탄치는 않을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장장 10년간 당을 노래하고 조국을 노래하고 수령을 노래하는 3송 노래가 차고 넘쳐날 때였는데 수령을 만수무강하라고 노래할 대신에 그것도 보통 가정 어머니를 “높이 모시고” “오래오래 앉으라”고까지 했으니 그게 될 말이냐고 생각할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였지요.

1982년 대학(중앙민족대학)시절의 은사 장량오선생님(가운데)을 모시고.

문화혁명기간, 그 몇년전까지만 해도 청춘남녀들의 결혼잔치에 술도 없고 신혼부부가 어록책을 서로 교환하고 호미와 낫을 서로 결혼선물로 주고 받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아들며느리 차리는 큰상…”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그래 공개적으로 당과 맞서서 떠벌려 랑비를 하라고 고취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음력설기간에 방송하지 못한다는 령이 떨어진 것이였습니다.

그 때는 1981년이였는데 문화대혁명이 금방 지나고 중국공산당 13기 3차전원회가 열린지 얼마 안되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의 력사의 수레바퀴는 자기 관성에 의해 멈추지 않았단 말입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그냥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문화대혁명이 끝나니 양지의 눈은 녹았지만 음지의 눈과 얼음은 그냥 녹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조국'이라든가 ‘어머니 당'을 노래할 대신 보통가정의 어머니를 노래하였으니 그때 당시에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였습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사진 영상/김성걸 김파 정현관

파일 [ 1 ]

Total : 1576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97](김철수편6) 저는 2009년에 정년퇴직하였습니다. 퇴직하기전에 조직과 나라의 많은 관심하에 이러저러한 칭호도 받았습니다. 우수공산당원, 선진일군 등 칭호를 17번이나 받았습니다. 그외에도 연변조선족자주민족문화전승발전 &lsqu...
  • 2021-02-02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96](김철수편5) 박물관은 문물을 수집하고 소장할 뿐만 아니라 전시도 합니다. 이 전시와 소장은 모두 과학연구를 떠날 수 없습니다. 특히 박물관의 과학연구는 다른 부문과 좀 다릅니다. 하나는 박물관학인데 고고학을 하는 사람은 고고학연...
  • 2021-02-01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 –95](김철수편4) 2012년 12월 8일, 《불멸의 투사》 출간기념회에서 발언하는 김철수. 전시는 박물관의 한개 중요한 직능입니다. 박물관은 문물수집만 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전시를 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렬, 전람이 있어야 한...
  • 2021-01-28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 –94](김철수 편3) 박물관사업이 보기에는 야외를 다니고 현지를 답사하고 하는 것 같지만 매우 힙듭니다. 어떤 때에는 거리를 재이게 되는데 어떤 곳은 자로 재일 수 없어서 발걸음으로 재이다보니 많이 걸어야 합니다. 이전에 박물관에...
  • 2021-01-27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 –93](김철수편2)   박물관은 주요하게 문물을 소장하고 보관하는 기관입니다. 그럼 문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문화유물이라고도 하고 한국에서는 문화재라고 합니다.   문물은 기실 자연표본과 달라 력사의 견...
  • 2021-01-25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92](김철수편1)     김철수 프로필: 중국문물박물관학 전문가, 1949년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출생. 1974년 동북사범대학 력사학부 졸업. 1980년 연변박물관 임직. 혁명문물부 연구원, 1984년 연변박물관 주관업무부관장. 2000년 ...
  • 2021-01-21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 -91](허동철편7) 허동철: 노래 〈오래오래 앉으세요〉애창의 리유가 "고생끝에 락을 보신 우리의 어머니"라는 구절이 있었기에 노래 〈오래오래 앉으세요〉가 동북 3성 음악회에서 창작 1등상을 받았고 전국 민족단결 가요 응모에서 3등상을 ...
  • 2021-01-19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90](허동철편 6) 지금은 노래를 록음할 때 가수들이랑 다 방송국에 모셔다 록음을 하지만 그때는 연변가무단을 제외하고는 각 현의 음악작품들은 다 기층 문공단이나 문화관에 내려가 록음하였습니다. 몇십근씩 되는 록음기를 메고 음...
  • 2021-01-16
  • 두만강하류에 자리잡고 있는 훈춘은 중국, 조선, 로씨야 3국 접경지대로서 중국에서 유일하게 일본해와 근접해있는 동북아지구의 기하학적 중심지이다. 훈춘은 력사가 유구한데 《신당서·발해전》에 “예맥의 옛터는 동경인데 룡원부라 불렀고 또 책성부라고 했으며 경, 염, 목, 하 4주를 갖고 있다.”고...
  • 2021-01-15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 -89](허동철편5) 저는 자기 맡은바 방송업무에 충실하느라 밤낮없이 뛰여다녔습니다. 무게가 30-40근씩 되는 록음기를 메고 산골에도 찾아가 실황을 록음하고 심양, 길림까지 찾아가 록음하면서 자기 사업에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니 평소에는...
  • 2021-01-14
‹처음  이전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