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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98]조선족민속력사 발전 개관(허휘훈편1)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2월4일 08시36분    조회: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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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98](허휘훈편1)

 

 

학술대회에서 론문을 발표하고 있는 허휘훈 교수.

프로필:

 

1956년 연길시 출생

1981년 연변대학 어문학부 졸업.

선후로 연변대학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조문학부 부주임,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주석 력임.

현재 연변민속학회 회장, 아시아민속학회 중국동북연구중심 주임.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교수 박사생도사

학술성과 및 수상경력:

1996년 고급방문학자로 한국 한양대학에서 1년간 민속연구를 진행. 1992년 고급방문학자로 조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1년간 문학연구를 진행.

저서 《조선민속학》,《조선족민속문화 및 그 중국특색》,《조선민속문화연구》, 《중한민간문학관련연구》, 《조선문학사(고대중세기부분)》, 《중국소수민족종교신앙》 등과 론문 80여편.

국가급교수성과상을 획득.중국민간문학‘산화상’학술저작상 수상.‘진달래’문학상 등 수상.

오늘은 〈조선족민속탐방〉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족민속의 형성발전과정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먼저 민속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속은 일반적으로 생활문화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생활해 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일종 풍속습관들을 포함하는데 이런 생활습관을 삶의 지혜, 삶의 기술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 조선족은 유구한 문화전통을 가진 우수한 문화민족으로서 훌륭한 미풍량속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선족의 민속을 살펴 볼 때 그 형성발전과정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몇개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조선족민속의 형성기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19세기 중엽으로부터 1949년까지로서 이 기간을 조선족민속이 형성되던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 싶이 우리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살길을 찾아 괴나리보짐을 지고 쪽박을 차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의 동북지역에 이주해왔습니다.

첫단계는 조선반도를 떠나서 새로운 삶의 터전에 정착한지 얼마 안 되였기에 당시의 민속은 기본적으로 조선반도의 민속과 거의 같았습니다. 적지 않은 력사자료들과 문자기록, 사진자료들이 그 당시 조선족들의 삶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보더라도 동북지역에서 살고 있던 조선족들의 생활모습이 그 당시 조선반도의 생활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조선족의 민속은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으로 되는 의식주로부터 관혼상제, 민간명절, 민속놀이 그리고 민간신앙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됩니다. 이러한 민속의 내용들은 기본적으로 조선반도의 전통문화를 거의 그대로 옮겨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응당 주의를 돌려야 할 것은 이주해 온 조선족들이 대부분 넉넉치 못하게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조선족민속이 평민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조선반도를 보면 반도의 북쪽은 서민적인 특성이 농후하고 남쪽은 일반적으로 량반적인 기분이 짙습니다. 우리 조선족은 조선반도 북쪽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서민적인 성격이 뚜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단계에는 어렵게 강을 건너 동북지역에 와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또 수난도 많이 겪었습니다. 초기에는 청정부의 박해를 받게 됩니다. 청정부는 만족이 세운 왕조로서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해 들어온 조선족에 대해‘치발역복'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즉 머리를 만주족식으로 빡빡 밀어깎고 만주족복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조선족이 동북지역에 들어와 처음으로 봉착한 문제가 바로‘치발역복'이였습니다. 당시 력사기록에 따르면 민족 고유의 머리양식과 옷차림을 고수하기 위해 지어 목숨을 잃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토록 엄혹한 시련을 겪었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끈질기게 자기 고유의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이주초기 조선이주민의 생활.

청왕조가 멸망된 뒤에도 수난은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두번째 수난은 위만주국시기에 겪게 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위만주국당국과 일제침략자들의 2중적인 억압착취를 받게 되였고 민족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악랄한 책동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당시 학교에서는 교원들이 일본군관들처럼 칼을 차고 다녔고 조선족학생들이 조선말을 하면 벌로 변소청소를 시키거나 벌금을 내게 하였으며 지어는 모든 조선족들에게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처럼 문화적인 박해가 혹심했습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조선족들은 아주 힘들게나마 자기의 전통문화를 지키려고 이악스럽게 노력하였습니다. 당시 학교들에서 진행되였던 민족적인 분위기가 짙은 운동대회의 정경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항일전쟁시기를 뒤이은 해방전쟁시기를 보면 당시 길림성과 흑룡강성은 중국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 되였는데 료녕성만은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조선족은 19세기 중엽으로부터 40년대까지 무려 200여만명이 이주해왔습니다. 그중에서 1945년 광복이후에 70여만명이 조선반도로 돌아갔습니다. 그 가운데 료녕일대에 살던 조선족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자기가 살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것은 국민당당국의 민족적인 기시와 박해 때문이였습니다. 당시 국민당당국은 조선족들을 공산당과 련계가 있는 족속들이라 하면서 이를 빌미로 삼아 강제로 축출하는 시책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국민당당국은 여러 차례에 거쳐 조선족들을 강제로 귀국시켰으며 당국의 사촉하에 사회의 악세력들이 조선족들을 함부로 구타하고 재물을 빼앗는 악행을 자주 감행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조선족들이 국민당당국의 민족적 기시와 정치적 박해를 더는 이기지 못해 부득불 조선반도로 돌아갔습니다.

이처럼 첫단계 형성기에 조선족은 동북지역에 이주해 들어와서 여러 차례 수난을 당하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이런 역경 속에서도 고스란히 자기들이 고향으로부터 가지고 들어 온 민족적인 풍속습관을 지켜왔다는 것은 아주 귀중하다고 하겠습니다.

조선족민속의 두번째 단계는 조선족민속의 발전번영기로 볼 수 있는데 1949년부터 1950년대, 60년대까지를 말합니다. 력사적으로 볼 때 동북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특수합니다. 1945년도에 일제가 멸망하면서 광복을 이룩하게 됩니다. 그 후에 해방전쟁을 겪었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 우리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1949년 9월, 제1차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열릴 때 조선족대표가 처음으로 중국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이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게 됩니다.

 

전국소수민족참관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다녀오는 림민호.

그 당시의 인민일보 》에는 정협회의에 참가하는 조선족대표들을 환영한다는 론평이 실렸습니다. 이것이 조선족이 공식적으로 중국의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되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표징으로 됩니다. 이렇게 정치협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하여 조선족자치지역의 건립에 관한 론의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후 1952년 9월 3일에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성립되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자치구(1955년 자치주로 됨)가 성립되면서부터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 소수민족의 일원이 되여 당과 정부의 많은 배려를 받게 됩니다. 여기서 실례를 든다면 1950년 초부터 해마다 국경절이면 전국소수민족참관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수민족가운데서 우수한 인물들로 참관단을 무어 국경기간 북경에 가서 여러 날 경축대회에도 참석하고 많은 지역을 참관도 하였습니다. 1950년 10월, 모택동 주석께서 국경절 경축활동에 참가한 조선족대표를 접견하였고 조선족대표는 모주석께 조선족 두루마기를 드렸습니다. 연변대학의 초대부교장 림민호선생도 국경절 소수민족 관례단의 일원으로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만큼 조선족은 50-60년대에 소수민족사회에서 국가적인 중시를 받았고 또 우수한 민족문화를 전승, 발전시켰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50, 60년대 상황을 보면 우리 조선족의 생활은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문화교육이 발전한 것입니다. 당시 통계자료를 보면 전국의 50여개 소수민족가운데서 문화사업과 교육사업에서 앞장서 나갔습니다. 또 하나는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풍속습관이 훌륭하게 계승되고 발양된 것입니다. 이로 볼 때 50-60년대는 전반 조선족사회에서 민족문화가 크게 고양되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조선족민속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 시기의 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조선족민속의 발전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족민속의 세번째 단계는 문화대혁명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우리 조선족의 민속발전력사에서 일대 수난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 싶이 문화대혁명가운데서 극좌적인 사조의 영향하에 전통적인 민속문화가 많이 파괴됩니다. 이 시기 극좌적인 사조를 주장하는 반란파들은 민족적인 전통문화를 낡은 봉건잔재로 비판하고 부정했습니다.

20세기 20년대 중국조선족의 전통결혼식.

이를테면 결혼식에서 큰상을 받는 것까지 봉건적인 습속으로 비판받아 적지 않은 신랑신부들이 민족전통에 따라 결혼식을 하면 반드시 받게 되는 큰상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또 간고분투의 정신을 발양한다 하여 신랑신부가 두발로 걸어서 신행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극좌적 사조가 살판치던 문화대혁명시기에도 시골마을에는 민족복장이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조선족복장을 살펴보면 이주해 들어와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시골마을에서 로인들은 민족복장을 입고 있는 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시골마을에서는 로인들이 흰옷의 민족복장을 입고 있는 것이였습니다. 문화대혁명기간이 한차례 민족문화전통의 수난기라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역시 우리의 전통은 어느 정도로 지켜졌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조선족민속의 네번째 단계는 개혁개방이후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조선족민속의 부흥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를 보면 특히 80, 90년대에 와서 과거에 이런저런 원인으로 하여 소실되였거나 퇴색해진 많은 민속전통들이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례를 들어 말씀드리면 민족 고유의 관혼상제 풍습에서 사라졌던 절차들이 회복되였는데 민속적인 내용들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개혁개방이후 처음으로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를 지내는 로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과거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던 회혼례입니다.

민간이야기대왕 황구연로인의 회혼례(1986년).

민간명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민족이 명절을 쇨 때면 과거에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여러 가지 민속놀이라든가 민속활동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다시금 되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고유의 민속전통이 부활되는가 하면 또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전통적인 민속이 현대적으로 변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모든 민속의례행사들을 가정에서 했기 때문에 가정성원들에게 부담이 컸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는데 개혁개방이후 특히 90년대 이후에 와서는 대부분의 민속의례행사들이 상업화, 사회화되였습니다. 결혼식으로 말하면 이제는 과거시대처럼 가정에서 이 행사를 진행하는 것을 거의 볼 수 없고 지금은 례식장에서 결혼식이나 환갑식을 진행합니다. 이같이 현대적인 생활의 진척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생활문화가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족의 민속발전과정을 네개 단계로 나누어 살펴 보았는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 조선족민속은 그 뿌리를 조선반도에 두고 있고 이 땅에 이주해 와서 나름대로 자기의 특징을 갖춘 조선족민속문화를 형성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김청수 기자

사진 영상/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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