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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103] 조선족민속의 특성(허휘훈편6)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2월18일 10시16분    조회: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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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03](허휘훈편6)

오늘은 조선족민속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조선족민속은 자체의 발전과정에 점차 독특한 특성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크게 아래와 같은 세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종합대학 방문학자로 문학연구에 오른 허휘훈교수.

첫번째 특성은 평민성입니다. 조선족 이주사를 보면 조선반도에서 동북지역으로 이주할 때 이주민의 대부분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였습니다. 조선반도에서 살기 어려웠기 때문에 살길을 찾아서 들어온 것입니다. 못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생활풍속을 보면 대부분 평민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우리 조선족풍속을 보면 좀 의아해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의 풍속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조선반도 남쪽 지역은 량반귀족의 풍속이 주도적이여서 조선족과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조선족들이 사는 이곳은 의식주를 포함하여 민속의 여러 면에서 확실히 평민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여기서 실례를 하나 들어 보면 남도지역에서 전통결혼식을 할 때에는 량반식으로 하기 때문에 큰상을 받지 않습니다. 큰상을 받는 것은 먼 옛날로부터 전해 내려온 고유의 풍속입니다. 그런데 봉건시대에도 량반유학자들은 큰상을 받는 것이 유교의 법도에 어긋나는 쌍놈풍속이라 하면서 반대해 나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도지역의 민속자료를 보면 혼례식에서 큰상을 받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여기를 보면 맞절을 하고 합환주를 마신 다음 중요한 절차로 큰상받기가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조선족사회에서 오래 동안 전해오는 민간속신이 있는데 그것은 일생에 상을 세번 받아야 복하다는 것입니다. 즉 첫돌생일상이 일생에서 받는 첫번째 상입니다. 두번째 상이 결혼식에서 받는 큰상입니다. 세번째 상이 환갑상입니다.

큰상받기의 유래를 말씀드리면 먼 옛날에는 큰 행사를 할 때 꼭 큰상을 차렸는데 그것은 신에게 올리는 제사상이였습니다. 큰 행사를 할 때마다 신에게 그 뜻을 고하는 의식을 거행하였고 그 때마다 신에게 올리는 성스러운 음식상으로 큰상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신에게 올리는 큰상의 음식은 행사가 끝나기 전에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음식이였기에 행사가 끝나 신이 가신 다음에야 그것을 먹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차려놓은 큰상의 음식은 행사를 마치기 전에는 먹을 수 없습니다.

이런 풍속은 옛날로부터 민간에서 평민들이 지켜오던 풍속입니다. 물론 조선족의 풍속은 어느 정도 세련되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반면에 남도의 풍속은 아주 세련되였고 정교하게 모든 행사가 진행됩니다.

여기서 일화 하나를 더 말씀드리면 조선족들이 민속의례를 치를 때 큰상차림에서 오늘도 빠뜨릴 수 없는 음식의 하나로 색과자를 들 수 있습니다. 조선족의 색과자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면 바로 유밀과에서 온 것입니다. 옛날 우리 민족에게는 유밀과라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밀가루를 꿀에 반죽하고 기름에 구웠다 하여‘유밀과'라고 합니다. 이런 전통적인 유밀과가 조선족사회에서 색과자로 되였습니다.

조선족전통혼례의 큰상 차림.

조선족의 색과자는 큼직한데 전통적인 유밀과는 아주 작습니다. 그런데 색과자와 유밀과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 모양을 동물모양이거나 과일모양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옛날 고려시기는 불교를 숭상하던 시기였는데 부처를 각별히 모시면서 그 전에 신에게 올리던 전통적인 제사음식이 점차 바뀌게 됩니다. 처음에는 부처에게 올리는 음식으로 생선이나 과일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살생을 하면 안되기에 그 때로부터 제사음식이 변화되여 직접 동물이나 과일을 올리지 않고 그것을 밀가루로 만들어 올렸습니다. 처음에는 밀가루로 물고기나 과일을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둥글게 만들면 상에 놓기 불편했기에 그것을 납작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유밀과나 색과자는 동물이나 과일모양으로 만든다는 것만은 꼭 같습니다. 그런데 워낙 유밀과는 봉건시대에 량반들이 차물을 마실 때 곁들여 먹던 간식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정교하게 작게 만든 것입니다. 그 크기는 조선족 색과자의 4분의 1도 안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여기에 이주한 초기의 조선족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였기에 량반식으로 유밀과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밀가루를 꿀에 버무려 기름에 구워서 만들자면 상당히 품이 많이 들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족식으로 만든 유밀과가 바로 색과자입니다.

비록 남도지역의 유밀과처럼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 기본모양에서의 전통만은 지켜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사는 조선족들이 자기식대로 민족 고유의 전통을 지킨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족사회의 생활문화는 확실히 량반귀족적인 분위기를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조선족민속의 평민성에 있습니다.

 

조선 회령에서 도강하는 조선 이민들.

두번째 특징은 지역적 차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반도의 력사지도를 보면 조선반도를 원래‘조선팔도'라 했습니다.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입니다. 이 여덟개 도에서 중국 동북에 이주해 온 순서를 보면 제일 처음으로 이주해 온 분들이 평안도 분들과 함경도 분들이였습니다. 지리적으로 평안도와 함경도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두고 있기 때문에 이 강들을 건너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다음으로 남도 분들은 그 대부분이 1937년이후 일제가 개척민 강제이송을 하면서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일제침략군의 군량미 확보를 위해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벼농사를 잘 짓는 농민들을‘개척민'이라는 명의를 걸어서 집단적으로 강제이주를 시킨 것입니다. 력사자료에 따르면 이주민들은 기차를 타고 동북에 건너 와서 송화강류역에서 살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조선족의 구성을 보면 그 전체가 200만명에 가까운데 함경도 출신이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 경상도 출신들이고 세번째는 평안도 출신들입니다. 그런데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보면 아주 묘합니다. 우선 조선족들은 대부분 큰 강을 낀 지역에 집거해 살고 있습니다. 두만강류역에는 함경도분들이, 송화강류역에는 경상도분들이, 압록강지역에는 평안도분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 출신에서 지역적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민속조사를 해보면 조선족은 조선팔도에 각기 속하는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족민속에는 북도풍속과 남도풍속이 다 포함되여 있습니다. 평안도와 함경도는 북도에 속하고 경상도는 남도에 속합니다. 이렇게 보면 조선족민속에는 조선반도 남북의 풍속이 모두다 들어있습니다.이를테면 함경도 분들에게 특유한 영채김치라든가 경상도 분들이 즐겨 드는 매운탕 그리고 평안도 분들이 선호하는 불고기 등은 남북도지역의 서로 다른 음식맛을 잘 말해줍니다.이러한 민속생활의 세갈래가 합류하여 조선족민속의 전반 구성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선족의 김치 담그기.

세번째 특징은 복합성입니다. 복합성이라는 것은 조선족민속과 다른 민족의 민속이 서로 융합된 특징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조선족은 동북지역에 오래 동안 살아오면서 민족 고유의 풍속을 지켜가면서 또 주변 민족들의 생활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체의 민속에 잘 융합시켰습니다. 다른 주변민족 특히 한족과의 민속교류는 이런 복합성을 잘 말해줍니다.

조선족은 음식문화에서 한족들의 음식조리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조선족음식으로 하여금 한족료리의 우점을 어느 정도 띠게 한 모두 즐기는 음식으로 되게 하였습니다. 또한 명절풍속에서 한족들의 설음식인 물만두(饺子)와 정월대보름음식 왠쇼(元宵), 단오음식 쭝즈(种子), 추석음식 월병(月饼)등을 공통적인 명절음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족들도 조선족의 전통적인 3대 특식인 랭면, 김치, 개장국을 맛 좋은 지방특색 별식으로 즐기게 되였고 또한 적지 않은 한족가정들에서 김치를 담그어 먹습니다. 그리고 명절 때 조선족처럼 온 (집)식구들이 공원에 모여 오락도 즐기고 회식도 합니다. 이러한 민속교류와 융합은 해외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민족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국수틀에 눌러 만든 랭면은 한족들도 잘 먹는 음식.

조선족과 한족이 이처럼 량호한 민족적 관계를 오래도록 이어올 수 있은 것은 몇가지 력사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우선 조선족과 동북지역의 한족은 민족적 련계를 결성한 시간이 길지 않지만 서로 처지가 같았기에 친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조선족과 동북의 한족은 모두 이주민들로서 각기 조선반도와 중국 산동지역에서 살길을 찾아온 가난한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들은 시간적으로 거의 동시에 동북지역에 이주해왔으며 서로의 처지를 보아도 두 손에 아무 것도 쥔 것이 없는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이였습니다. 동북에 온 뒤 그들은 다 같이 봉건통치자와 군벌세력 및 외래침략자들의 억압과 착취를 당하였으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조선족과 한족은 같은 이주민이고 같은 못사는 사람들이여서 다 같이 힘들었기에 함께 손잡고 역경을 헤쳐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 친분을 이루고 우의를 형성하게 되였습니다. 이것이 조선족과 한족이 민족적 단결을 결성할 수 있는 기초로 되였습니다. 이러한 원인으로 하여 조선족들은 한족들과 화목하게 지내게 되였고 그러는 사이에 자연히 서로의 생활습관을 받아들이게 되였습니다.

박사생들과 함께 있는 허휘훈 박사생도사(가운데).

다음으로 동북지역의 조선족과 한족은 그 출발기점과 향후목표가 기본적으로 일치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소수민족과 한족은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차이가 큽니다. 많은 경우에는 한족이 앞선 위치에 있고 소수민족은 뒤떨어진 편입니다. 그런데 동북지역의 상황은 퍼그나 다릅니다. 해방전에 조선족과 한족은 다 같이 반봉건반식민지사회에서 살고 있었고 두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도 비슷했습니다. 다만 조선족이 문화적으로 약간 나았습니다. 이런 원인으로 하여 조선족과 한족은 서로 돕고 이끌면서 함께 나아갔으며 선진적인 민족이 뒤떨어진 민족을 멸시하는 불화와 불평등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같이 조선족은 한족 등 기타 민족들과 오래동안 화목하게 생활해오면서 서로 상대방의 생활문화를 받아 들일 수 있게 되였으며 또 그것들을 지혜롭게 자기의 것으로 융합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조선족민속의 복합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과외활동을 고무 지지하는 시상식에서.

우에서 말씀드린 것들을 모두어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조선족민속은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고 민족문화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발양하면서 또한 주변민족들의 민족문화에서 우수한 장점을 받아들임으로써 현시대에 알맞는 생활문화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조선반도의 생활문화와도 다르고 국외의 기타 조선민족공동체의 생활문화와도 구분되며 국내 기타 민족들의 생활문화와도 다른 독특한 조선족생활문화라 하겠습니다. 이런 조선족생활문화의 총체적 특징은 평민성, 지역적 차이성, 복합성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어언간 민속 탐구에 진력해온지 30여년이 되였습니다. 그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깊이 느끼게 된 것은 민속은 민간에 살아있는 전통문화로서 그것은 유구한 민족전통에 대한 문화적인 기억인 동시에 또한 민족의 문화적 생맹력을 구성하는 기본인자로 된다는 점입니다.

오늘 현대화와 글로벌화가 급속히 추진되고 있는 현실에서 민속문화를 지켜가고 계승해감으로써 민족문화전통을 세세대대로 이어가는 것은 인류문화발전에서의 중요한 과업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민족의 생활문화를 알아두고 거기에 담겨진 삶의 기술과 생활의 지혜를 잘 터득하여 생활을 민족적으로 풍요롭게 꾸려갑시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사진 영상/ 김성걸 김파 정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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