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구술110]중국조선족 무용의 형성(한룡길편1)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2월26일 08시01분    조회:104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10](한룡길편1)

한룡길 프로필:

1957년 출생. 원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교수. 석사연구생 지도교수, 연변조선족무용연구소 소장,

연변조선족무용가협회 고문, 연변무형문화유산 평심전문가, 북경무용학원 중국민족민간무용학부 객원교수,

대한민국무용기록학회 국제연구원.

저작:

《조선민족무용 춤 동작 연구》, 국가과학연구프로젝트 《21세기 조선족무용훈련체계연구》,

1991년 장백산문예상, 1993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수상.

2005년 국가 교수성과 2등상과 길림성 교수성과 특등상 수상.

저는 약 40여년간 무용사업에 종사해오면서 무용을 모르던 데로부터 점차 무용에 입문했고 2017년에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무용교수로 은퇴를 했습니다. 은퇴를 하면서 무용교육자의 사명감으로 《중국조선족 무용사》를 집필하여 지금 출판과정에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무용에 입문하다 보니 문화관 무용지도, 예술학교 교원으로, 연변가무단의 안무가로 있다가 또 다시 연변대학예술학원에 전근하여 사업하면서 항상 “우리 춤이 어떻게 형성되였고 어떻게 전승되여 왔고 오늘은 어디까지 왔으며 래일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하는 점들을 (두고) 많이 고민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좀 하면서 글도 좀 썼습니다. 그러던중 처음에는 정부의 부탁을 받고 《조선족명인록》 집필에 참가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무용명인들을 찾아서 한 50여명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중국조선족 무용의 가치를 더 인식하였고 중국조선족무용사를 집필해야 되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책임감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은퇴한 다음 2, 3년간 무용사를 집필하였는데 오늘 주로 우리 민족 무용의 형성, 발전과 특징 그리고 농악무의 전승과 발전, 무용예술교육의 형성발전과 현황 등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원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교수,《중국조선족무용사》 집필자 한룡길선생.

아시다 싶이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왔기 때문에 무용도 역시 이주문화의 일부분으로서 이주와 관련된 무용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이들 문화는 초기에는 이주민들에 의해 전승되였고 후에는 재기를 갖춘 민간예인들이 이주를 해오면서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하게 되였습니다. 초기이주를 보면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왔기 때문에 자발적인 민속놀이형태로 전승이 되였고 전통적인 민속무용같은 것들은 완벽한 형태로 전승이 되지 못했습니다.

중국조선족의 이주사를 놓고 보면 19세기 중엽으로부터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는 낮에는 국경을 넘어와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돌아가고 그 다음에는 점차적으로 봄에 와서 농사를 지어 가지고 가을에 농산물을 배에 싣고 건너가고 이러다가 20세기초엽에는 완전히 정착하는 현상이 생깁니다. 그 후 항일투사들이 들어오면서 교육이 시작되였고 이러면서 전반 조선족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초기에는 두만강과 압록강 북안지역에 정착하고 그 후에는 이들 지역에 인가가 많아지면서 정착할 공간이 줄어들어 부득불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정착하게 됩니다. 결과 이주민들은 연변지구나 압록강 북안지역을 벗어나 료녕지구, 흑룡강지구로 뻗어가면서 동북 3성의 여러 지역들에 많이 이주하여 정착하였습니다.

연변의 실례를 보더라도 초기에는 함경북도 분들이 많이 건너왔는데 후기에는 또 강원도 또는 그 남쪽의 분들도 건너오면서 훈춘 같은 곳에는 강원도마을, 안도에는 경상도마을 이렇게 지역적인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마을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왔기에 조선팔도에 있는 여러 지역의 문화현상들을 기본적으로 미약하게나마 어느 정도로 전승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하여 온 이주민들이 서로 어울려 지내는 과정에서 상호간에 문화교류가 이루어 지면서 점차 지역적인 특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또 중국이라는 새롭고 특수한 생존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중국 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민속적인 무용형태들이 전승과정에 생존환경과 심미지향에 따라 변이되기 시작합니다.

아박춤.

그 례로 아박춤을 들 수 있습니다.아박춤은 원래 궁중무용인데 중국에 전승되는 과정에 참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1923년도에 조선 북부지역의 이주민들이 두만강을 건너서 안도현의 송화골로 가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니 그 때는 민가들이 적어서 야외에 주숙하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겨울이라 춥고 야외니까 들짐승도 많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공포 속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며 고통스러웠지요.

이 때 이주민들 속에‘복실이 엄마’라는 궁중에서 무기(舞妓)로 활동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일어나서 옆에 있는 나무를 도끼로 찍어 가지고 여러 분들의 손에 쥐여주면서 이걸 두드리면서 우리 같이 춤을 추자고 합니다. 이것을 궁중에서‘아박춤’이라고 했는데 아박은 원래 상아로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고 아박춤은 아주 장엄하고 아주 우아하게 추는 춤이였으나 이분은 여러 분들을 동원하기 위하여 자기가 먼저 두손에 막대기를 쥐고 두드리면서 그 때 추던 춤을 어투리나게 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많은 분들이 거기에 호응하여 춤을 추면서 막대기를 두드리니 들짐승들도 달아나고 추위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아박춤이 전승되였지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조선반도의 무용형식들이 대부분이 완정한 형태로 전승되지 못하고 이렇게 삶을 위한 수단으로 리용되고 전승되면서 변이되였다는 점입니다.

또한 농악놀이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1927년 일부 이주민들이 왕청쪽으로 이주해가면서 연들라자(영벽촌)라는 곳에 이르러 보니 산세는 평범한테 큰 바위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다가가 보니 그 바위에 의지해 살면 바람막이도 되고 좋겠다 싶어 연들라자 바위밑에다 움막집을 짓고 정착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존환경이 렬악하였으나 그들은 이곳에 정착하여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저녁에는 어둠 속에서 밥을 지어 먹은 후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자기 몸짓으로 풀어 가면서 자기 정서를 달랬습니다. 사실 이분들은 전문 농악을 하던 사람이 아니고 고향에서 남들이 노는걸 어깨너머로 봤을 뿐이였습니다.그들은 농악패의 인상을 되새기며 두드리고 춤을 춘다는 이런 두가지 요소로 몸을 움직이면서 흥풀이도 하고 고달픈 마음을 달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춤에는 이 사람들의 고통과 설음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젖어나기 마련이지요.

농악놀이.

때문에 이들 이주민들의 춤은 조선반도의 농악하고는 대체적으로 형태는 같지만 몸짓에 의한 춤사위는 긍정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왜냐 하면 무용이라는 것은 자기 감정의 직설적인, 형상적인 구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벽촌은 치벽진 곳이기 때문에 늘 항일투사들이 거기에 가서 량식도 구하고 또 그 곳에 은둔도 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제는 영벽촌을 한 때 완전히 페기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리하여 영벽사람들은 그 부근의 서위자나 면전이라든가 배초구 등 마을로 옮기면서 농악이 또 다시 이들 지역에 전수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 가서도 농악놀이를 하였지요.

그러다 보니 그 농악도 완정한 한개 농악형식인 것이 아니라 아주 빈약한 흥풀이형식으로서, 자신의 삶의 정서를 토로할 수 있는 문화적인 근원으로 전승되였다고 봅니다. 이리하여 중국조선족의 무용시원은 이런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성과 그 사람들의 생활처지, 그 사람들의 생활정서, 새로운 환경에서의 삶의 의식들이 반영되면서 걸걸하고 소박하고 직설적인 춤형태로 시작되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후기에 3040년대를 전후하여 재기를 갖춘 조선의 일부 민간예인들이 이주해 오게 되는데 이분들은 민속무용을 아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도 기타 이주민들과 같이 생존을 위해 온 가난한 사람들이였기에 그 춤이 제대로 완벽하게 전승될 수 없었습니다. 이외에도 재기를 갖춘 민간예인들을 주자로 하여 조직되는 표현 및 놀이패들의 대부분이 농민출신의 이주민들이였고 또한 이들에 의하여 수행되기 때문에 거기에서 또 일정한 변이가 생기게 됩니다. 이리하여 40년대로부터 이주민집거지들에 많은 아마추어극단과 놀이패들이 형성되는데 북산촌과외극단이라든가 훈춘문예공작단 등 이러한 단체들이 형성되였습니다.

안도현 신촌 농악놀이.

안도현 신촌도 1938년도에 경기도 집단이주민들에 의하여 마을이 형성되였는데 황무지를 개간하여 첫해 농사를 지어 수확을 얻으니 그 기쁨을 토로할 데가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 고향에서 보았거나 혹은 놀던 놀이를 생각하면서 수확한 농산물을 가지고 일부 마을의 청년들을 뽑아 고향에 보내가지고 놀이에 필요한 북이나 장고, 꽹과리 등 농악기구들을 사가지고 와서 농악놀이를 했습니다.

신촌농악으로 말하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경상도 사람들이라 경상도 농악놀이를 했지요. 후에 1941년도에 리원보라는 민간예인이 이 마을에 이주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분도 경상도 출신이지만 전라도 사당패에서 농악을 하던 분이였지요. 이분이 신촌이라는 경상도 마을에 와 자기가 놀던 전라도 농악을 가르침으로 하여 경상도 농악과 전라도 농악이 어울리게 되면서 서로 결합되여 새로운 농악놀이를 만드는 이런 변이과정이 있습니다. 이런 변이과정들을 통해 우리 놀이, 우리 문화, 우리 춤의 형태가 형성되는데 이러한 경향 및 현상들이 우리 중국조선족 무용의 형성에 기본바탕으로 되여 지금까지 전승되여왔습니다.

지금 우리의 춤은 한국이나 조선의 춤과 다른 점이 있는데 전업적인 시각으로 보면 소박하고 직설적이고 걸걸한 특징이 그 속에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중국조선족 문화의식, 생존방식의 구현이기 때문에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보고 자신의 아름다운 지향을 작품에 많이 부여하지만 그러나 자기 민족의 피, 우리 민속적인 바탕이 있기 때문에 역시 그런 춤의 성격들이 그 속에 계속 잠재하여 우리 춤의 특징이 형성되였다고 보아집니다.

조선민족 전통무용의 대가 한성준.

이렇게 전승되고 발전하다가 40년대로부터 여기에 구전한 극장이 많이 들어서면서 조선의 명무이며 전통무용의 거장으로 불리우는 한성준이나 신무용의 기수 최승희나 조택원, 이런 분들이 동북지구에 와서 공연을 합니다. 심양, 신경(지금의 장춘), 목단강지구, 제일 가까이는 도문극장까지 와서 공연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들어오면서 무대공연이 활성화되니까 민간에서 농망기가 지나 농한기가 오면 놀이패를 조직하여 놀면서 점차적으로 무대에도 오르게 되였습니다. 이 시기 춤의 특징은 우에서 말한 것처럼 조선반도와 일정한 차이가 있는 이곳 이주민들의 삶과 의식이 침투된 그런 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춤을 소박하다고 할가요? 그것은 우리 춤 자체가 교묘한 몸짓으로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달하려고 하는 수단으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소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감정의 직설적인 현상으로 구현되고 또 모든 사람들이 자기 정서를 그대로 발로하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형태들이 아주 풍부하게 만들어집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전통춤으로 말하면 궁중무용, 종교무용, 민속무용으로 나뉘는데 궁중무용형태도 여기에 와서는 민간에서 전승되였기 때문에 민속적인 특징을 띠게 되고 종교형태도 역시 민간에서 전승되였기 때문에 민속적인 성격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면서 주요하게는 민속행사를 계기로 하는 민속놀이마당을 통해 전승되였습니다.

1923년도에 룡정에〈성세극장〉이 서고 40년대를 좌우하여〈훈춘극장〉,〈도문극장〉,〈연길극장〉이 섰는데 많은 농민들이 농악대를 꾸려가지고 또 민간예인들의 지도하에 부채춤이라든가 혹은 학춤을 모방한 이런 간단한 무용을 만들어 무대에 올려 점차 우리 춤의 특징을 다져가지 시작했습니다.

 연길시 민주촌에서 도라지춤을 추고 있는 선전대원들.(1947년)

그러다가 8.15해방을 맞이하여 조선의용군이 동북에 진주하면서 새로운 문화환경이 형성됩니다. 여기에서 왜 조선의용군이 예술무용의 형성에 크게 역할을 하였다고 할가요? 조선의용군이 1지대, 3지대, 5지대, 7지대 네개 지대로 나뉘여 동북에 들어왔는데 이들의 주요임무는 토비를 숙청하고 민주정권을 세우고 생산적극성을 동원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니까 각 지대마다 자기 공연대를 조직하여 많은 선전활동을 합니다. 이런 선전활동에 민간의 재기가 있는 분들이 많이 참가하여 아주 활약했습니다.

그러다가 5지대와 7지대가 합병하면서 연변전원공서 문공단을 형성하였습니다. 그 후 주덕해동지가 3지대 문공단을 이끌고 와서 연변문공단을 구성하고 지방예술단체로 지방정부에 소속되면서 전업예술 즉 예술무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파일 [ 1 ]

Total : 1576
  • 왕청 홍색문화에 의거하여 경제 전환 발전 추동 붉은색은 왕청의 바탕색이다. ‘동만항일련군의 력사는 왕청의 산속에 있다.’ ‘왕청항일봉화, 동만대지를 불태운다’는 글자가 새겨져있는 비석은 지금도 소왕청항일근거지유적지에 우뚝 서 중외 관광객의 마음을 끊임없이 세례하고 그 감동적인 력사...
  • 2018-05-04
  •   북경대학화석문화주활동 개막식에서 연길 공룡화석에 관해 연설하고 있는 연길시정부 부시장 조이홍./래원 연길뉴스넷 연길룡산공룡화석이 3일부터 개최된 북경대학 120돌 기념 계렬행사 -‘2018북경대학 화석문화주'전시활동에 전시되였다. 연길시정부는 본 활동의 협력단위의 하나로 부시장 조...
  • 2018-05-04
  • 5월2일,연변커피문화교류발전협회 설립식이 연길만달광장에서 있었다. 연변커피문화교류발전협회는 연변지구에서 키피업종에 종사하는 상가나 관련 커피문화연구 및 기업 대표들로 구성되였다. 근년래 연변의 사회경제발전에 힘입어 커피산업은 온당하고도 쾌속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지만 불정당 경쟁과 품질관리 등 면에서...
  • 2018-05-04
  • 지난 4월 27일, 연길 경영인  '함께독서회' 오픈식이 금정빌딩(金鼎大厦)선치구강에서 성황리에 거행되였다.   행사는 시식타임을 첫시작으로 채성철 사장의 와인소개와 함께 축하샴페인을 터뜨리며 독서회의 대박성공을 기원했다.먼저 청도 함께독서회에서 온 유선희 회원이 '함께독서회 '및 걸어온 ...
  • 2018-04-30
  •          4월 24일, 비교문화학자이며 중일한 국제문화연구원 초대원장인 김문학씨는 심양시조선족제6중학교에서 ‘중국조선족의 어제와 오늘과 래일’ 및 ‘조선족 학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를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김문학씨는 우리 조선족의 민족적 특성, 민족성...
  • 2018-04-27
  • 26일, 주정무중심에서 열린 제12회 연변독서절 사업 소식공개회에 따르면 올해 연변독서절은 4월 27일에 시작해 10월에 막을 내리게 되며 활동주제는 ‘새시대로 나아가며 더불어 중국의 꿈 이루자’이다.   독서절을 맞으며 기관단위, 학교, 사회구역, 농촌, 기업, 가정, 부대, 매체 등 7개 분야로 나누어...
  • 2018-04-27
  •  4월 21일 , CCTV-6 영화채널의 긍정적 에너지 영화《5월리화향(五月梨花香)》이 무순현 리화곡(梨花谷)에서 촬영을 시작하였다. 이 영화는 목전 향촌진흥, 정밀 빈곤부축, 군인전업 안착 등 여러개의 주제와도 잘 맞는다. 또한 관중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희극 스타들인 곽동림, 황효연, 구호, 추덕강, ...
  • 2018-04-26
  • 사진출처 인터넷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사이트에서 일전 발표한 수상정보중 단편 경쟁부문에 중국의 《연변소년(On the border)》이 들어 있어 주목을 끈다. 위서균(魏书钧)감독의 이 단편작은 기타 7부의 작품과 함께 단편경쟁부문 금종려상을 다투게 된다. 해당 단편의 편집은 북경영화학원 영화학학과 2009급 본과졸...
  • 2018-04-26
  • 영화 《공성기》 촬영식에서의 조선족영화감독 박준희선생(왼쪽 세번째) 2018년 4월 19일, 절강마환공원영화오락유한회사에서 출품하고 북경성지문화매체유한회사에서 촬영하는 영화 《공성기》(空城计) 촬영식이 강서성 상요(上饶)시에서 거행되였다. 이 영화는 범죄경고계렬 첫 작품으로서 금전의 유혹에 의해 최종 비극...
  • 2018-04-23
  • 요즘 세상은 스토리를 원한다. 기업이나 단체 역시도 새로운 활력을 모색하기 위해 스토리 경영전력을 짜야 하고 다른 사람이 궁금해할 만한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봄해살이 유난히 따스했던 지난 19일 연변인민출판사는 책 만드는 이들로 무어진 출판인 독서클럽 ‘어깨동무’를 설립했다. ‘어...
  • 2018-04-23
‹처음  이전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