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15](한룡길편6)
저는 40여년간 조선족무용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2017년에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정년은퇴를 했습니다. 은퇴를 하면서 생각해보니까 교육자로서 평생을 보냈다는 자부감도 있지만 더우기는 중국조선족무용의 형성과 발전 및 특징들을 정리하여 후세들에 전해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스스로 느끼게 되였습니다. 하여 은퇴 후 3년간 50여명의 조선족무용선배님들을 찾아다니며 탐방조사를 하여 30여만자에 달하는 《중국조선족예술무용발전사》를 집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마디로 느낌을 말한다면 사명감이라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평생을 무용교육사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 또 그 지속으로 조선족무용발전사를 집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사실은 제가 무용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무용이 저를 선택했다고 봐야 하지요. 왜냐 하면 제가 1957년생인데 그 때 반우파투쟁이 시작되였습니다. 저의 부친은 룡정1중 교원이였고 당시 28세였는데 반우파투쟁에서 억울하게도 반혁명우파분자라는 모자를 쓰게 되였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우파분자의 자식으로서 어려서는 몰랐는데 점차 크면서 특히 문화대혁명시기에 많은 타격을 받았습니다.
한룡길교수의 아버지 한생철과 어머니 김영자.
하루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우파분자 자식의 옆에 자기 자식을 앉힐 수 없다고 하면서 아이를 데려 내가는 부모들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소학교 담임선생이 저의 어머니한테 저를 다른 학교에 전학시키라고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할 수 없다며 저더러 1년 휴학하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휴학도 했고 다른 학교에 전학했다가 겨우 룡정1중에 승학하였습니다.
부모님들이 다 교육자이니까 어려서 저의 지향은 학자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우파자식으로서 저의 지향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룡정1중에서 재학할 때 키꼴이 크고 하니 취주악대에 들게 되였습니다. 그 때 예술학교의 무용교원으로 있다가 농촌에 하방간부로 내려 오신 박용원선생이 룡정1중에 학생써클지도교원으로 초빙되여 왔습니다. 당시 이 분은 학생취주악대에 있는 저를 키꼴이 크다고 무용조에 불러다가 학생들이 출연하는 5장 무극중 뒤에서 달아다니는 역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난생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보았습니다.
학생시절의 한룡길.
그 뒤로 2년 후인 1974년의 어느 하루 중간체육시간에 예술학교로 간 박용원선생이 학생모집을 왔습니다. “동무, 나와보세요.”라고 하길래 사무실에 따라 들어가니 무용을 안하겠는가고 묻는 것이였습니다. 얼떨결에 “녜? 글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춤을 춰보라고 하자 춤을 배운 적도 없고 하니 체조동작 몇가지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나왔는데 후에 정치심사에서 우파분자의 자식이여서 미끄러졌습니다.
락방통지를 받고 완전히 포기하고 있는데 얼마 후에 담임선생이 예술학교에서 전화가 왔는데 저더러 보충학생모집에 참가하라는 것이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들께 말씀드리니 “남자가 무슨 무용이냐?”며 동의를 안했습니다. 그래도 호기심에 몰래 친구와 함께 예술학교에 찾아가서 시험을 쳤는데 통지서가 왔습니다. 담임선생이 통지서를 전달해주는 것이였습니다.
당시 저의 학급담임인 김춘식선생님은 저의 아버지 제자였습니다. 저는 선생님한테 집에서 반대를 하는 것도 무릅쓰고 몰래 시험을 쳤다고 실토를 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은 “내가 너의 아버지를 찾아 가서 설득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룡정뜨락또르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도 우파집으로 드나드는 것이 좀 눈치가 보일 때였습니다. 저녁에 아버지가 퇴근한 후 밤중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찾아 오시여 아버지와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창 얘기를 하다 말고 아버지는 저를 나오라고 하더니 말씀하는 것이였습니다.
“너 누이가 지금 집체호에 내려간 뒤로 나 때문에 추천도 못받고 5, 6년째 농촌에 있는데 네가 독자아들로서 앞으로 농촌에 가게 되면 그것도 걱정스럽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사람이 하는 직업인데 반주임선생님의 의견대로 예술학교 무용반에 가는 것이 좋겠다. 너는 교육자 가문의 출신이니 좋기는 공부를 잘해서 무용교원으로 되면 좋겠다.”라고 하시면서 무용에 입문하는 것을 허락하시였습니다.
연변예술학교시절의 한룡길.
그래서 예술학교 무용전공에 입학하였고 정말 열심히 노력하여 최우등으로 1977년도에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우파분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있기에 안도 송강에 배치되였다가 예술학교지도부의 동정과 배려로 겨우 룡정문화관에 재배치를 받았습니다. 당시 룡정문화관에는 김기운이라는 무용지도원이 있었는데 그 분을 따라다니며 어떻게 무용지도를 하는가 공부하면서 한 1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1978년도에 아버지는 반혁명우파분자라는 억울한 루명을 벗고 다시 룡정1중에 복직하게 되였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저에게 “내가 지금 대학입시 력사지도를 하는데 너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으니까 보습반에 참가하여 다시 대학시험을 치거라.”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초중시절의 동창생들은 모두 집체호에 내려갔는데 저는 문화관의 지도교원으로 취직하여 로임을 38원 50전을 탔으니 그 우월감과 동창생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지니게 되였습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우파자식으로 위축받던 것이 처음으로 그런 자부심을 갖고 있으니 다시 대학공부를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1980년도 가을의 어느 하루 문화관 관장님이 저를 사무실에 오라고 불렀습니다. 관장실에 가니 모교인 예술학교의 최호욱선생이 와 앉아계셨습니다.
“너희 선생이 너를 데려 가려고 왔는데 젊은 사람이 전도를 봐서 예술학교로 가는 것이 옳지 않겠냐. 집에 돌아가 부모님들과 상의해보려무나.” 관장님의 권유였습니다.
“박용원선생이 동무를 제안해서 데리러 왔으니 잘 생각해보세요.” 최호욱선생도 한마디 다그치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니 긴장하면서도 기뻤습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부모님들께 말씀을 드리니 아버지는 “이제야 우리 집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 우리 가정은 다 교원출신이니까 너도 교육사업에 입문하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앞으로 교원으로서 명심해야 할 점은 ‘훈장의 재산은 제자’이니 모든 일들에서 사리를 따지지 말고 제자 양성에 열심하거라.”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은사 박용원선생(중)과 함께.
그래서 그해에 예술학교 무용교원으로 전근하였습니다. 그 때 저의 나이가 23세였는데 어려서부터 지향하던 학자의 길에 들어선다는 자부심으로 맡은 바 조선족무용교육사업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1989년도에 연변가무단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무단 단장실을 찾아가니 안무가 최옥주선생이 단장실에 와 계셨습니다. 김동관 단장이 저를 보고 “우리 지금 〈춘향전〉무극을 하려 하는데 남자 안무가가 없고 남자감독이 없어서 동무를 초빙하려고 하니 전근해 오겠소?”라고 묻는 것이였습니다.
워낙 제가 1989년도에 학생들을 이끌고 우연하게 〈웨침〉이라는 남성군무작품을 하나 내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작품에서는 제가 어려서부터 겪은 사회적인 억압과 래일을 위한 분투 및 희망을 무용으로 담아냈습니다. 억압받던 형상으로부터 격발하여 분투를 하는, 파격적인 동작으로 마지막에는 붉은 조명아래에서 두층 조형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그런 작품을 처음으로 꾸며가지고 표현훈련을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때 가무단에서 교수참관을 왔다가 이걸 보고 작품으로 쓰겠다고 수개를 하라고 했습니다. 수개를 마친 그 작품을 연변가무단의 작품으로 길림성 제1차 예술절 무대에 올렸는데 무용창작 1등 작품으로 뽑혔더랬습니다.
중국조선족의 첫 대형무극 《춘향전》.
그 다음 1991년도에는 길림성 제2차 ‘장백산’문예상까지 타고 하니 연변가무단에서 저를 놓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를‘안무가'라고 하면서 연변에 젊은 남성 안무가가 없는데 이런 훌륭한 작품까지 내놓았으니 초빙한다는 것이였습니다. 특히 최옥주선생은 제가 무용예술에 입문하여서부터 우상으로 모시는 분이였습니다. 그러니 제의에 동의하고 학교에 돌아와 전근을 신청하였습니다.
학교에서는 “동무를 유일한 조선족 남성 무용교원으로 양성하자고 하였는데 왜 가겠는가?” 하고 말렸습니다. 이에 갈팡질팡하다가 제가 가장 의뢰하는 박용원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 박용원선생은 은퇴를 하고 집에 계실 때인데 “이런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할가요?”하며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박용원선생은 “글쎄 내 생각엔 학교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가서 단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소. 동무의 인격이나 기질 또는 가정배경을 봐도 교원사업에 더욱 적합할 듯한데 장원한 견지에서 보면 가무단에 가서 단련하고 꼭 다시 학교에 돌아오게 될거요.”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당시 저는 박용원선생님의 위안을 받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여 연변가무단 창작실에 전근하여 최옥주선생을 도와 중국조선족의 첫 대형무극 《춘향전》을 완수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1990년도에 아시아문화제에 나가 중국 제2차 문화대상도 탔습니다. 그리고 1994년도에 예술학교에서 돌아오라고 하여 다시 교원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교수도 열심히 하고 글도 써보려 하였습니다.
그 때 조선 류학코너가 있어 1997년도부터 신청하였는데 젊은 교원들이 신청하면서 양보하고 양보하다 보니 2000년도에야 입선되였습니다. 그 때부터 조선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조선무용리론계에서는 최고권위인 리만순선생의 문하에서 예술학 준박사학위도 수여받았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음악무용대학 류학시절.
2001년도 초에 류학을 마치고 귀국하려고 하는데 집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딸애가 무용을 하겠다고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제가 워낙 지향하는 것이 학자다보니 자식을 학자로 키워 보려고 딸애를 어려서부터 무용에 접근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딸애가 무용을 한다니 심기가 아주 불편했습니다.
“네가 진정 무용을 하겠으면 내가 돌아갈 때 북경으로 가겠으니 북경에 오너라.”
집사람(안해는 당시 연변군중예술관의 무용지도로 사업)이 딸애를 데리고 북경으로 오자 당장에서 딸애를 이끌고 북경무용학원으로 갔습니다. 동료들을 통해 교수참관을 시켰습니다. 딸애는 무용이라는 것이 그저 춤을 추는 정도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간고한 훈련과정을 다 보고도 그래도 무용을 하겠다는 것이였습니다.
제가 기분 좋게 “북경무용학원은 우리 나라 무용교육의 최고 학부인데 네가 지방에서 무용공부를 해가지고 여기에 입학할 자신이 있니? 신심이 있으면 무용을 시작하고 그렇지 못하면 아예 거둬치우자!”라고 하니 딸애는 신심이 있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니 이미 시작한 바에는 안무가로 발전시켜 보자고 애를 써서 북경무용학원 안무학부에 1년 연수를 시켰습니다. 시험을 쳤는데 운 좋게도 수백명의 응시생과 경쟁을 하여 수석으로 입학한 것이였습니다.입학시켜 놓고 보니 저의 가정이 중국조선족가운데 한집식구가 모두 조선족무용을 하는 유일한 가족이였습니다.
여기서 더욱 귀중한 점을 느꼈고 조선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박용원선생의 모든 걸 전승해보자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족무용연구에 몰입하면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늘 “훈장의 재산은 제자”라고 하시던 말씀이 머리속에 떠오르면서 후대들을 키우는 일에 모든 정력을 투입하였습니다.특히 교육자로서 학생들의 인격성장과 전도에 대하여 항상 고심하였습니다.
학생들에게 무용실기를 가르치는 한룡길교수.
그러던 중 지금 인기가수로 활약하는 김윤길, 장진우, 김문혁 등 학생들이 당시 사회에서 놀고 있는 것을 안타갑게 여기여 어느 기회에 북경에서 활약하는 제자 김택남학생에게 이 학생들을 잘 조직해 보라고 일일이 소개해주면서 북경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체의 노력으로 그룹을 뭇고 열심히 활동했는데 하루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밤중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리랑그룹이라고 압니까?”
“모르는데요.”
“김택남이라고 압니까?”
“네. 압니다.”
이 김택남이랑 김윤길,장진우, 김문혁 네명이‘아리랑그룹'을 무었는데 이번‘전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프로에서 1등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리니 애들 모르게 와서 무대에 나와 생방송프로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하여 불시로 비행기표를 끊고 북경으로 갔지요. 도착하여 애들과 접촉 못하고 안내에 따라 저녁에 중앙텔레비죤방송 스튜디오에 가 분장도 하고 기다렸습니다.
안내하는 분이 무대뒤에까지 데려다 주면서 감독이 무대에 등장하라고 할 때 등장하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리하여 감독의 지령에 따라 무대에 등장하니 애들도 아주 놀라면서 감동을 했고 무대에서 아나운서와 교류하는 장면이 실황으로 한 7, 8분 동안 방송되였습니다. 애들은 실황 인터뷰에서 “한룡길선생이 우리를 관심하여 무어주었기에 ‘아리랑그룹'이 있게 되였고 학생시절에도 선생님은 늘 예술인의 의식과 정감표현을 강조하여 주었기에 무용기능을 토대로 하여 오늘날 가수로 발전하게 됐다.”고 하였습니다.
중앙텔레비죤 생방송 무대에서 '아리랑그룹'과 만나는 장면.
이 일을 계기로 교육자로서의 자부감과 사명감이 더욱 격발되는 것이였습니다. 동시에 존경하는 고 박용원선생도 생각나고 또한 조선족의 유일한 무용가정이라는 자부감과 맡은 바 제자들을 좀 더 열심히 도와주면 애들은 인재로 될 수 있다는 교육자의 성취감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였습니다.
2001년도에 제가 조선에서 돌아오자마자 국가프로젝트를 하나 신청하였습니다. 주제는 '21세기중국조선족무용훈련체계연구'인데 그 연구에서 최승희로부터 박용원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훈련체계를 분석하고 승화시켜 새로운 조선족무용기능훈련체계를 처음으로 서면화하였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국가심사에 합격되여 학술회의도 다니고 50여편의 학술론문들도 발표하였습니다.
졸업반 학생들과 함께.
제가 사회적으로 배척을 받던 우파분자의 자식으로부터 이렇게 60대까지 줄곧 무용교육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된제일 중요한 힘은 조선족무용교육자라는 사명감이였습니다. 언제나 사명감으로부터 출발할 때 모든 일이 잘 풀리였습니다. 참으로 지금 돌이켜 보면 행운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항상 젊은 교원들에게 꼭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라고 조언을 합니다.
은퇴한 후 현재에는 딸을 도와 북경에서 ‘초혜무용공간’이라는 조선족무용공작실을 창립하여 조선족무용보급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정적이라고 하기보다 중국조선족무용에서 유일하게 세식구가 무용을 하는 가족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제가 40년동안 무용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이룩한 연구성과들을 어떻게 후세들에게 전승하겠는가 하는 사명감을 앞세워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게 된 것은 제가 2012년도에 북경무용학원에 초빙되여 반년 동안 교수를 하면서 그 때 보니까 확실히 우리 조선족무용의 문화특색으로 하여 예술적인 훈련가치가 풍부하다는 점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족의 유일한 무용가정 한룡길교수 일가의 무용연구모임.
그런데 북경에서 조선족무용을 전승하고 보급하는 과정에 타민족들이 우리의 무용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왜곡적인 변이가 있다는 점을 보아내게 되였습니다. 동시에 북경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자기의 민족무용에 대한 갈망이 박절하다는 점을 느끼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북경에서 딸을 도와 조선족무용보급공간을 마련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전문학교 학생들, 교원들도 훈련을 받고 또한 중국조선족무용의 형성과 발전 및 특색을 주제로 제가 특강도 합니다.
저는 역시 사명감으로부터 출발하여 선배님들에게서 물려받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재부를 후세들에게 전수하려는 취지와 사명으로 지금 열심히 활약하고 있습니다. (끝)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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