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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122]중국조선족연극의 발전맥락과 해방전 연극(한영희편1)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3월24일 08시59분    조회: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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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22](한영희편1)
한영희 프로필:
 1965년 연길시 출생, 1988년 중앙연극학원 졸업, 석사도사, 연변대학예술학원 문학박사,
국가예술과학계획대상 《조선족연극문화연구》, 국가교육부 《조선반도연극년표》, 국가사회과학기금대상 《조선족연극발전사》 등 프로젝트 담당, 선후로 《한국탈극연구》 등 30여편의 론문 발표
문화부 교육사 지도교수상, 제6기 ‘진달래’ 문예상 등 수차 수상
현재 연변대학 연극학부 주임(학부장) 및 길림성연극가협회 부주석, 연변연극가협회 주석, 연변주문련 부주석,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3기 정치협상회 상무위원

연변대학 예술학원 문학박사,교수 한영희.
중국조선족연극은 100여년의 발전력사를 갖고 있습니다. 조선족연극의 100여년의 발전맥락을 알기 위해 우선 ‘조선족연극'(戏剧)이라는 개념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족연극은 (우리 민족들이) 한반도에서 이주할 때 갖고온 전통적인 연극(가면극, 판소리 등)과도 구별됩니다. 조선족연극은 (우리 민족들이) 중국에 이주해 살면서 항일전쟁에 참가하고 무장혁명에 참가하는 과정에 쏘련, 조선 및 중국 연극의 영향을 받고 또 서방의 언어를 주요 표현수단으로 하는 연극의 형식을 접수하면서 형성된, 대화를 주요형식으로 하는 연극(话剧)입니다. 조선족연극이란 곧바로 중국조선족이 만든 연극이며 여기에는 가극과 가무극도 포함됩니다.
조선족연극의 발전은 1945년을 분기점으로 해방전 연극과 해방후 연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해방전 연극은 반일투사들의 연극,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연극, 조선의용대선전대연극으로 구성되며 해방후 연극은 일원문화시기 연극, 다원문화시기 연극, 21세기 현대연극으로 구성됩니다. 그동안 중국조선족들은 우수한 연극작품을 창작하여 항일전쟁, 해방전쟁, 사회주의건설 등 부동한 력사시기에 중화민족예술의 발전을 위해 특수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럼 오늘은 해방전 중국조선족연극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해방전 중국조선족연극이란 주로 1914년부터 해방이 된 해인 1945년까지의 연극을 말합니다.
당시 조선족연극은 중국신문화계몽사상, 조선독립자주운동, 쏘련 10월사회주의혁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반제반봉건의 현대연극입니다. 조선족연극은 처음부터 반제반봉건혁명운동과 밀접하게 련관되여있으며 급진적인 사회주의혁명단체와 단합하여 연극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독특한 예술형식으로 사회발전에 특수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성립된 조선의용대.
중국조선족 관내 혁명투쟁사를 살펴 보면 반일투사들의 연극활동은 1920년대에 시작되였는바 주요한 대표작들은 대체로 지주계급의 압박과 착취의 본질을 폭로한 것이였습니다. 주제별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경숙의 마지막》, 《지주와 머슴》등 작품은 날따라 각성하는 농민형상을 반영하였고, 《야학으로 가는 길》은 경희극의 형식으로 농민의 문맹퇴치와 문화계몽의 필요성을 보여주었고, 《민며느리》는 봉건혼인제도를 비판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혁명가의 안해》, 《혈해지창》, 《싸우는 밀림》 등은 항일정신을 가송하였습니다.
연극《경숙의 마지막》은 지주의 잔혹한 압박에 목숨으로 싸우는 농민들의 반항을 보여주었습니다. 농촌에 살고 있는 경숙의 일가는 지주에게 진 빚을 갚을 때가 되였지만 가난 때문에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주는 기한내에 빚을 갚지 않으면 세를 준 땅을 몰수하겠다고 합니다. 경숙의 아버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대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때 지주는 절름뱅이 자기 아들에게 경숙이가 시집 오면 빚을 면제해주겠다고 경숙의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경숙이는 집을 살리기 위해 시집가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결혼식날 저녁, 경숙이는 우물에 투신하여 자살합니다.
연극 《야학으로 가는 길》은 문맹퇴치와 문화계몽의 필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일년전에 시집간 외동딸에게서 편지가 왔지만 일자무식인 늙은 부모는 편지를 읽을 수 없습니다. 편지를 들고 길가에서 기웃거리는데 멀리서 신사 한사람이 다가옵니다. 그들은 기뻐서 신사에게 편지를 보이지만 신사는 한참 올리 훑고 내리 훑고 하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도 문맹이였습니다. 신사의 표정을 보고 늙은 부모는 딸에게 불상사가 생겼다고 통곡을 합니다. 때마침 이 곳을 지나던 야학선생이 편지를 보고 딸이 아들을 낳았다고 편지내용을 알려줍니다. 부모는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이 때 야학선생은 글을 배워야 할 도리를 일깨워 줍니다. 부모는 야학선생을 따라 야학교로 갑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아직까지 어디서 누가 어떻게 썼는가가 똑똑치 않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939년의 조선의용대 선전원들의 합영사진.
그러나 중국조선족 관내 항일투쟁혁명사와 연극작품내용을 살펴보면 (이런 작품들은) 20세기 초부터 30년대 중반까지 주로 조선족항일투사들이 거주했고 많이 활동했던 상해, 광주, 남경 일대의 조선 반일지사들이거나 조선 반일단체들에서 창작한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이 외에도 1937년에 창작한 항일영웅을 구가한 연극《혈해지창》과 1938년에 창작한 《싸우는 밀림》이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해방전 중국조선족연극에서 유일하게 극본이 남아 있는 작품입니다. 두 작품의 작가의 본명을 알 수 없으나 모두 ‘까마귀’ 라는 필명을 사용하였습니다.
《혈해지창》은 3막으로 된 연극인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상당한 항일유격대 정찰원 ‘뻐꾹새’ 는 추격을 받아 도망치다가 깊은 밤중에 쑹마마네 집 앞에 쓰러집니다. 쑹마마는 부상당한 ‘뻐꾹새’ 를 집안에 업고 들어가 상처를 싸매줍니다. 깨여난 ‘뻐꾹새’ 는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수집한 정보를 유격대에 알려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쑹마마는 아들 왕핑을 시켜 임무를 집행하게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왕핑은 유격대를 찾아 가는 길에 왜놈헌병대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합니다. ‘뻐꾹새’ 는 걸을 수 있게 되자 쑹마마네 집을 떠납니다. 얼마 안되여 왜놈들이 왕핑을 끌고 쑹마마네 집에 이릅니다. 유격대원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지만 쑹마마는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싸웁니다.‘뻐꾹새’ 가 유격대를 이끌고 쑹마마네 집에 이르러 보니 쑹마마와 왕핑은 이미 왜놈들에게 살해되였습니다. ‘뻐꾹새’ 와 유격대원들은 복수를 다집니다. 이것이 바로 《혈해지창》의 줄거리입니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치부 선전대 
5막 연극 《싸우는 밀림》은 수림 속 동굴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유격대원과 산아래의 백성들이 단합하여 항일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 줄거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산아래에 살고 있는 한족 왕로인은 늘 쌀과 소금 등을 산속 동굴에 날라다 줍니다. 부상당한 유격대장 박민은 왕로인을 통하여 산 아래 일본헌병대가 끊임 없이 마을에 드나드는 사실을 알고 해산기가 림박한 안해 계순을 산 아래에 보내 적정을 살피고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킵니다. 하지만 배신자의 밀고로 왜놈들에게 체포됩니다. 박민은 적정을 장악한 후 작전을 포치하여 왜놈의 군영을 일거에 까부십니다. 이 과정에서 안해 계순은 귀중한 생명을 잃고 왕로인은 그가 낳은 아들을 구합니다. 싸움에서 패한 왜놈 중위는 자살을 합니다. 이것이 연극 《싸우는 밀림》의 줄거리입니다.
우의 두 작품에서 볼 수 있는바 항일투사들은 언어와 행동을 주요 표현수단으로 하는 서방연극의 창작특점을 수용하면서 전통연극과 구별되는 현대연극을 창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비록 성숙되지 못한 면도 있지만 이미 전통연극의 틀에서 벗어나 현대연극에로 향한 어려운 첫 발자욱을 내디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용면에서 보면 현실생활을 기본소재로 하였는 바 반제반봉건사상을 보여 준 작품도 있고 문맹퇴치와 문화계몽을 주제로 한 작품도 있으며 특히는 항일주제를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류형면에서 보면 연극도 있고 무언극도 있습니다. 장르면에서는 비극, 희극과 정극이 있습니다. 류파면에서 보면 비판적사실주의 연극사조가 주류를 차지합니다.
아래 조선의용대의 연극활동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무한에서 성립되였는데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이중성격을 띤 무장대오입니다.
조선의용대의 임무는 중국의 항일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중국 지사들과 어깨를 같이하여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천 3백만 조선민족에게 호소하여 전 민족적 항일혁명을 일으켜 중국의 항일운동을 지원하는 동시에 조선민족 자신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였습니다.

가극 《아리랑》.
이 대오는 무한보위전에 참가하여 영용히 싸웠으며 무한이 함락되자 조선의용대대 본부는 계림, 중경 등지로 이동한 후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서남행영(西南行營)정치부의 령도를 받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파견하여 각 구대의 항일정황을 료해하는 한편 수시로 전시상황을 회보하고 중국국민당정부의 군정요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성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1939년 10월에 이르러 조선의용대대 본부는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고 중한관계를 밀접히 하기 위하여 강연회, 좌담회, 토론회, 기자회, 기념회 등을 정기적으로 조직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의 관할하에 있는 이동선전대와 한국청년전시복무단은 중국의 여러 개 전구(战区)에 나뉘여 다니며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내에 있는 조선교포와 중국 각계 민중들에게 항일에 대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의 선전형식은 다양했습니다. 표어, 삐라, 벽보, 만화 등 여러가지 방식이 있었으나 가장 환영받고 효과적인 것은 가무와 연극이였습니다. 조선의용대 이동선전대는 주로 《아리랑》,《조선의 딸》,《두만강변》,《의용대》 등을 공연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통신》 제18기에 의하면 1939년 7월 5일부터 6일까지 계림에서 가극 《반격(反攻)》을 공연하였는데 관중이 2000여명이나 되였다고 합니다.
또한 항일전쟁 제1선의 장병들에게 보낼 겨울옷을 장만하기 위하여 중경대량자의 청년회관에서 연극 《국경의밤》, 《삼강호》, 《다시 만나다》등 작품을 공연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서안에서 조선의용대 위문공연이 있었는데 그 때 공연한 연극 《국경의 밤》, 《한국의 한 용사》와 가극 《아리랑》(한유한 작사, 작곡 및 지휘)은 광범한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특히 가극《아리랑》은 조선민족의 오랜 력사를 두고 전해진 전설 《아리랑》을 소재로 하여 일제강점하에 타향으로 류리걸식하는 조선사람들의 처참한 생활을 매우 리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서북문화일보》, 《공상일보》, 《서경일보》, 《대공보》 등 매체들은 앞다투어 가극 《아리랑》의 공연상황을 보도하면서 매우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가극《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막이 오르면 들꽃이 만발한 아리랑고개가 관중들의 시야에 들어옵니다. 〈봄노래〉음악과 함께 예쁜 처녀가 바구니를 들고 사쁜사쁜 등장하여 코노래를 부르면서 들꽃을 꺾어 바구니에 담습니다. 이 때 름름하게 생긴 목동이 구름송이 같은 양떼를 몰며 등장합니다. 아리랑고개에서 만난 두 사람은 대자연의 품속에서 사랑을 무르익힙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5년 후 왜놈들이 아름다운 고향을 강점하자 도탄 속에 빠진 조선 난민들은 〈아리랑〉노래를 구슬프게 부르면서 아리랑고개를 넘어 중국의 동북지구에 피난해 옵니다. 35년 후 당시의 목동과 처녀는 이미 로인이 되였습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동경하면서 〈아, 빛나는 래일이여!〉란 노래를 부를 때 조선혁명군대오가 이 마을을 지나게 됩니다. 두 늙은이는 자식들을 거느리고 이 대오에 참가합니다. 원쑤와의 결전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이들은 장렬하게 희생됩니다. 마지막에 아리랑고개에 승리의 기발이 휘날리면서 연극은 막을 내립니다.

조선청년전지공작대가 공연한 가극 《아리랑》.
1937년 7.7로구교사변이후, 항일투쟁은 동북은 물론 전국에 전면 파급되였습니다. 의용대 대원들은 한편으로는 최전선에서 무기를 들고 직접 일본군과 싸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문예활동을 펼쳐 애국관병들과 민중들의 항일투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연극의 특유한 신속성과 직접성으로 하여 이들이 공연한 각가지 연극은 이 시기 중요한 항일선전도구로 되였습니다. 특히 이 시기 연극창작은 수량이 많고 영향력이 매우 넓었는바 전 시기에 비해 큰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가극 《아리랑》의 문헌기재자료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바, 이 시기 연극창작은 연극의 문학적 요소, 연기적 요소, 음악적 요소, 무대조형적 요소 등을 고루 갖추었으며 비교적 완정한 연극형태를 가졌는바, 이는 그들의 연극이 이미 성숙단계에 들어 섰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였습니다.
다음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시기와 조선의용군 시기 연극활동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41년 1월, 중경에 대 본부를 두고 있던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는 그 해 6월에 강행군을 하여 중국의 대일 최전방인 화북으로 진출하였습니다. 화북에 이른 조선의용대는 화북에 있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령도를 받게 되며 부대명칭을 ‘조선의용대화북지대’ 로 개칭하였습니다. 이 때로부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대일함화전 뿐만 아니라 전투적 무장작전으로, 적후공작 등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조선의용대의 획기적인 발전이며 력사적 의의가 있는 새로운 출발이였습니다.
1942년 7월에 이르러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산서성 태항산에서 제2차 대회를 열고 ‘조선의용대화북지대’ 를 ‘조선의용군’ 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 후 조선의용군의 이동선전대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항일선전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중국 국내 조선교포와 중국의 각계 민중들에게 항전의 의의를 널리 선전하였습니다.
우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의용대의 상용적인 선전방법은 표어쓰기, 삐라살포, 벽보와 만화였지만 대중들로부터 제일 환영을 받고 효과가 뚜렷한 방식은 가극과 연극이였습니다. 당시 공연한 작품들로는 연극 《서광》(1941), 장막극 《조선의 딸》(1941), 《승리》(1942), 장막극《태항산에서》(1942), 3막 4장 연극 《강제징병》(1944) 등이 있습니다.

하북성 섭현에서 연극공연을 하고 있는 조선의용군(1943).
그중 《태항산에서》가 비교적 대표적이고 영향력이 있는 작품입니다. 장막극 《태항산에서》는 1941년 호가장전투를 소재로 하여 창작된 작품인데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제1막에서는 항일부대 전사들이 춤판을 벌리면서 휴식하고 있는데 적의 봉쇄선을 뚫고 적후에 들어 가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전사들은 전투를 준비합니다. 제2막에서는 전사들이 적의 봉쇄선을 뚫고 적후로 들어갔다가 특무의 밀고로 하여 적들의 습격을 받습니다. 전사들은 결사적으로 적들과 싸웁니다. 제3막에서는 전사들이 전투에서 희생된 전우들을 추모하면서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끝까지 싸우려는 의지를 보입니다.
이와 같이 해방전 중국조선족의 관내 지역 연극창작은 여러 시기를 거치면서 거족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창작량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창작수준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창작내용 면에서 보면 제재는 현실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가져왔으며 특정적인 인물에 이야기선이 굴곡적이며 사상이 선명하고 짙은 시대적 특징을 지녔습니다.
장르 면에서 보면 비극과 희극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극도 있습니다. 종류 면에서 보면 선전극, 표현극, 가송극 등이 있습니다. 표현수단으로 보면 연극, 가극, 무언극 등이 있습니다. 류파 면에서 보면 사실주의특징이 있으면서 동시에 짙은 랑만주의색채를 띠였습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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