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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거장들> 걸작선, 11월 27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주간경향]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에선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포화가 할퀴고 간 흔적을 마주해야 했다. 전 세계를 무대로 식민지를 확보하기에 여념이 없던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결국 첫 번째 세계대전 이후 함께 몰락의 길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한한 확장과 진보를 보증하는 것처럼 보이던 인간의 합리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됐다. 초현실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을 연원으로 하는 것도 바로 이런 흐름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합리성 대신 상상력과 무의식, 꿈의 세계를 예술의 무대로 옮긴 거장들의 시대 또한 열리기 시작했다.
오는 11월 27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하는 ‘초현실주의 거장들: 로테르담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 걸작전’은 예술의 새로운 시대를 연 이 시기 거장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전시다. 초현실주의 예술사조의 시발점이 된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비롯해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 ‘그려진 젊음’, 살바도르 달리의 ‘머리 속에 구름 가득한 커플’, ‘아프리카의 인상’, 마르셀 뒤샹의 ‘여행 가방 속 상자’ 등 지금까지도 초현실주의의 고전으로 널리 알려진 회화와 입체 작품, 관련 자료 등을 만날 수 있다. 초현실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위적 예술운동이라는 점에 착안해 당대의 불안과 돌파구를 조망할 수 있도록 특정 작가의 작품에 치우치지 않고 초현실주의와 관련된 자료와 다양한 작품을 차분히 만날 수 있게 구성됐다.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180여점에 달한다. 유럽 전역에서 초현실주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에서 온 작품들이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에 싹을 틔운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들, 즉 르네 마그리트나 살바도르 달리 외에도 만 레이, 호안 미로, 에일린 아거, 막스 에른스트, 폴 델보, 카렐 윌링크 등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작가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에일린 아거, 앉아 있는 사람, 1956, 캔버스에 유채, 184×163cm / Photo ⓒ MuseumBoijmansvanBeuningenCollectionofMuseumBojmansvanBeuningen
총 6개의 주제로 구성된 이 전시에선 각 주제에 걸맞게 분류한 쟁쟁한 작가들의 대표작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초현실주의 혁명’, ‘다다와 초현실주의’, ‘꿈꾸는 사유’, ‘우연과 비합리성’, ‘욕망’, ‘기묘한 낯익음’ 등으로 구성된 각각의 주제는 초현실주의 예술의 흐름 속에서도 예술가들이 저마다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췄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초현실주의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를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돕는다.
첫 테마인 ‘초현실주의 혁명’에서는 앙드레 브르통이 1924년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부터 만날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문학에서 시작됐지만 빠르게 회화, 조각, 영화, 사진, 공연, 디자인 분야로 확산됐다. 초현실주의가 미학이나 문체로 정의되기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다양한 움직임을 포괄하는 것도 이러한 흐름에 바탕을 뒀다. 시인이자 미술이론가였던 브르통이 쓴 선언문 외에도 살바도르 달리의 기념비적인 작품 ‘머리에 구름이 가득한 커플’ 등의 유명 작품도 살펴볼 수 있다.
이어지는 테마인 ‘다다와 초현실주의’는 초현실주의 예술을 개괄하기 위한 일종의 ‘프리퀄’ 역할을 한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스위스 취리히에 모여든 문인과 예술가들이 엘리트주의와 문화에 대한 모든 관습적 사고에 저항하며 일으킨 반란이 바로 ‘다다(Dada)’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피해 중립국 스위스로 향했던 예술가들은 전쟁을 멈추지 않는 현실 체제를 거부하는 활동을 자극적인 연극과 춤, 귀에 거슬리는 음악, 문맥과 동떨어지게 서술한 시의 형태로 드러냈다. 미술 역시 아름다움과 이성, 질서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뒤흔든 작품들을 쏟아냈다. 마르셀 뒤샹의 ‘여행가방 속 상자’와 막스 에른스트의 ‘커플’ 등을 여기서 만날 수 있다.
살바도르 달리, 머리에 구름이 가득한 커플, 1936, 판넬에 유채, 98.5x77x4.5cm(L), 87.5x72.4x4.5cm(R) / ⓒ SalvadorDali, FundacioGala-SalvadorDali, SACK, 2021CollectionofMuseumBojmansvanBeuningen
꿈과 욕망에 집중하다
다다로부터 10년가량의 시차를 두고 나타난 초현실주의는 일면 다다를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을 시도했다.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은 꿈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꿈이 길들여지지 않은 생각을 활용하기 위한 도구라고 믿은 이들은 작품에서 환상적이면서 종종 악몽 같은 세계를 함께 그렸다. ‘꿈꾸는 사유’ 섹션으로 분류된 작품들을 모아놓은 전시실에서는 만 레이의 ‘증인’과 살바도르 달리의 ‘아프리카의 인상’ 등의 작품이 눈에 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꿈’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작품을 창작해낸 기법에 초점을 맞춰 별도의 주제로 분류한 전시실도 있다.
특히 ‘자동기술법(Automatisme)’은 꿈과 무의식, 상상력의 세계로 발돋움하는 이들의 방법론적 탐구를 구체화한 기법 중 하나였다. 무의식으로 가는 다양한 길을 열기 위해 의식의 흐름대로 그림을 그리며, 환각을 추구하거나 서로의 꿈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렇게 개발한 여러 기법의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들을 ‘우연과 비합리성’ 전시실에서 마주할 수 있다. 이성, 도덕, 미학, 즉 서양의 전통적 가치인 진선미로부터 자유로운 무의식적 사고를 추구했던 흔적이 이곳에서 발견된다. 에일린 아거의 ‘앉아 있는 사람’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편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은 사랑과 욕망을 매우 중요한 주제로 재발견하고 충실하게 표현한 집단이기도 했다. 성에 대해 엄숙한 체하는 태도와 인식을 허물어 인간의 육체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을 때로는 매우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작품에 나타냈다. ‘욕망’을 테마로 한 전시실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은 나체와 성적인 주제를 포함한다. 달리의 오브제가 주로 성적인 묘사를 내포했던 점과 비슷한 차원에서 관능적이고 기이한 물건, 사진, 빈티지 잡지 등 폭넓게 수집된 작품과 자료들이 ‘욕망’이란 주제로 분류돼 선보인다. 만 레이의 ‘복원된 비너스’와 한스 벨머의 ‘인형’ 등을 통해 육체가 어떻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지를 고민한 이들 예술가의 시선을 뒤쫓을 수 있다.
마르셀 뒤샹, 여행 가방 속 상자, 1952, 아상블라주, Closed: 10.5x41x38cm / ⓒ AssociationMarcel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21CollectionofMuseumBojmansvanBeuningen
익숙한 세상을 낯설게 보기
마지막 전시실에서 만나는 ‘기묘한 낯익음’이란 주제의 작품들은 우연한 만남에서 가능성의 세계를 본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공통점을 재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오래된 예술과 글은 그들이 창조하고자 하는 파괴적인 세계에 영감을 줬고, 일상용품의 의미를 재발견해 익숙한 이미지와 사물들을 묘하고 신비로운 작품으로 만들도록 해줬다. 호안 미로의 ‘신사와 숙녀’ 같은 작품에서 보듯 별로 연관성이 없는 임의의 물체가 만나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전시는 내년 3월 6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6개 전시실에서 감상할 수 있다. 개막 하루 전인 11월 26일까지 예매하는 얼리버드 관객은 성인 기준 입장료 정가인 2만원에서 30% 할인된 1만4000원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다만 얼리버드 예매 관객은 내년 1월 14일까지만 티켓을 사용할 수 있다.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은 “전후의 불행과 희망이 중첩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와 코로나19에서 일상을 회복하는 지금이 묘하게 닮아 있다”며 “많은 시민이 이번 전시를 보고 코로나19 이전과 같이 일상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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