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고 송몽규 선생의 만96세 탄생일이다. 송몽규 선생은 간도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연희전문대를 졸업 한 후 교토제국대 유학 중에 치안유지법 혐의로 수감된 사촌동생인 윤동주 시인과 함께 20대에 후쿠오카 형무소서 옥사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같은 집에서 태어나서 같은 형무소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일제강점기 공간의 비극적인 희생이었다.
성큼 다가온 가을바람 속에서, 비록 짧았던 삶이었지만 문학청년으로서의 꿈을 키우던 연희전문대 시절에 그들이 적었던 「문우」라는 잡지 속의 기억을 되새겨본다.
참고로 윤동주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작품집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일본에서도 양심적인 일본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곳곳에서 추모기념을 개최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관련시설이 개관 되는 등 추모움직임이 활발하기에 여기서는 그의 고종사촌형이자 문학청년이었고 독립운동에 참가했었던 송몽규를 떠올리며 그가 잡지 후기를 적었던 「문우」에 대해서 소개하려 한다.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간도성 연길현 용정신촌 명동(間島省 延吉縣 龍井新村 明東,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윤하현 장로 집 맏딸인 윤신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치안유지법 혐의의 재판 판결문에는 본적이 조선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 422번지(朝鮮咸鏡北道慶興郡雄基邑雄尚洞四百二十二番地)로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2월에 윤신영의 동생이자 윤하현의 외아들인 윤영석도 아들을 낳으니 그가 윤동주였다. 그들은 집 주변의 미루나무 사이로 비치는 맑은 하늘처럼 티 없이 순수하게 자라며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 소년으로 성장했다. 다섯 살까지 같은 집에서 자란 둘은 향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와 교토 유학생활, 그리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옥사 때 까지 생애의 동반자이자 운명적 존재로 살다 간다.
송몽규는 여덟 살 때 윤동주, 문익환 등과 현지의 명동소학교(교장은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에 입학, 월간잡지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그 뒤, 화룡현립 제1 소학교 6학년에 편입 후 1년 동안 한족학교에 다니다 1932년 4월에 은진 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송몽규는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하게 되고, 1934년(은진중학 3학년) 12월에는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부문에 ‘숟가락’이 송한범이란 필명으로 당선되어 당시의 고향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한편, 은진중학에서 동경제대 사학과 동양사학 출신으로 민족의식이 강했던 명희조 선생의 영향도 받게 된다. 명희조가 다녔던 당시의 동경제대엔 제국주의 비판과 민주주의 의식이 강한 계몽적 사상운동이 전파되고 있었다.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학생운동의 중심핵이었던 ‘신인회’엔 조선인 학생 김두용 등도 활동했다. 그런 민족의식이나 신념이 강한 지식인운동의 흐름에 영향을 받았던 명희조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송몽규는 1935년에 남경의 김구 산하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반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는다. 그 뒤, 제남(済南) 소재의 이웅일 산하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1936년 4월경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본적지인 웅기 경찰서에 구류되어 취조를 받은 뒤, 같은 해 8월에 석방되지만 경찰로부터 ‘요시찰인’이란 낙인을 받고 일제 감시 하에 놓이게 된다.
1936년 8월에 석방된 송몽규는 다음해 4월 용정의 대성중학교에 입학 후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하였고, 1938년에 윤동주와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함께 문과에 입학한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1938년의 8월에 적은 시를 9월 12일 조선일보에 《밤》이란 제목으로 당시의 어두웠던 제국주의 지배하의 조선 민족의 굴하지 않는 희망을 시사 하는 글을 발표하는 등 문학적 재능을 나타낸다.
▲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송몽규 선생이 작업한 잡지 「문우」표지 |
발행 후기에는 송몽규의 폐간 인사 및 발간 과정의 고충을 암시하는 글들이 게재되어 있다. 1941년 6월에 발행한 연희전문학교 문우회 문예부의 「문우」(비매품)의 폐간 후기를 담당한 송몽규의 복잡한 심경이 응축된 후기 문장을 소개하기로 한다.
원문은 당시 시대를 반영한 일본어 문장으로 되어 있다(번역은 필자).
『원고에다 광고에다 검열에다 교정에다… 도저히 2-3명으로는 어림도 없음을 느꼈다.(중략)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후략)』
『原稿やら、広告やら、検閲やら、校正やら・・・・・・とても、二三人の手に依るべきでないことをつくづく感じた。(中略)この雑誌を受け取る人々は、内容の貧弱、編集のまづさなどのために顔をしかめるだらう。然し、これは若い、経験のない学生達の手によって出来上ったものであると云ふことと、東奔西走して、かき集めた原稿の大部分が載せられなかったことを諒解してもらひたい。国民総力運動に統合して、学園の新体制を確立せんがために、文友会は解散するやうになる。そして国民総力学校連盟は徹底的に活動しなければならないやうになる。そこで、交友会の発行としては、これが最後の雑誌になるわけである。然し雑誌発行の事業は連盟に継承されて、もっといい雑誌が出るだらうと思ふ。我々は新しきものへの合流を喜び且つそれへの尽力を誓ひながらこの最後の号を送る(後略)』(원문)
이 내용을 읽다보면 문학을 사랑했던 그였기에 숱한 고생 속에 겨우 모았던 원고 대부분이 검열에 걸려서 게재 불가능이 되었던 사실과, 식민지 공간 속에서 총력전의 군국주의 체제 강화로 인해 교우회 발행의 「문우」 최종호로 그들이 해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억압속의 현실이 더더욱 서글프게 느껴졌음을 행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들이 보인 마지막 저항이었다면 「문우」 앞 페이지의 강가에서 어머니가 빨래를 방망이로 두드리는 삽화(엄달호 작)가 아니었을까?
▲ 잡지 「문우」의 표지 뒷쪽에 삽인된 '빨래하는 어머니' 삽화 |
그들의 아픔이 어떠했을지는 근대사 공간 속의 아픔들을 규명해 온 필자에겐 절실히 다가온다.
2005년의 10월에 필자의 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대학원의 자매결연 체결을 위해 연세대를 방문했을 때, 윤동주 시비를 보고 싶은 필자는 당시의 교육대학원 원장님 및 관련 교수들이 안내를 받았었는데, 처음으로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캠퍼스 공간에 젖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윤동주 시비 바로 뒤에 송몽규 시인이 재학 중에 묵었던 핀슨 홀이 있고, 그 건물 2층에 ‘윤동주 기념실’이 있다.
이 동인지 「문우」 1941년 호는 필자가 2011년 8월 23일, 연세대 국학자료실 서고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대학 측 협력으로 내용을 제공받았으나, 지금은 핀슨 홀의 ‘윤동주 기념실’에 소장 중이다. 그 곳에는 송몽규와 윤동주가 학창시절에 찍었던 사진 등 많은 자료들이 그들의 기억을 더듬게 만든다.
▲ 연세대 윤동주 시비 및 윤동주 기념실에 잠시 앉아 있는 이수경 교수 |
재판 판결문에는 1944년 4월 13일에 선고되어 같은 해 4월 17일에 확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2년의 판결을 받은 송몽규와 윤동주는 교토에서 떨어진 큐슈의 관문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매일 밤, 원인 모를 주사를 맞다가 1945년 2월 16일에 윤동주가 옥사했고, 같은 해 3월 7일에 향년 만27세로 송몽규도 생을 마친다. 큐슈대학교 의대생들이 정부명령으로 당시 생체실험을 했었다는 증언은 이미 관련 의사가 언론을 통해 보도한 바, 그들도 어떤 형태의 인체 실험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맑은 영혼으로 아름다운 고향땅을 그리워하다 광기어린 전쟁 공간 속에서 처절히 죽어간 송몽규나 윤동주, 그리고 수많은 비명 속에 사라져 간 사람들…
비록 그들의 육신은 억울한 죽음에도 고요히 역사에 잠들어 있지만, 군비확대의 재무장으로 인한 무리한 침략 전쟁은 패망과 삶터의 파괴만이 남는다는 것을 절실히 깨우쳐주는 시대의 이정표로 살아있다.
칸트가 역설한 ‘영구히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 구축의 방법’을 다시 한 번 그들의 삶 속에서 되새겨보면서 송몽규가 식민지 통치하의 경성에서 번민하던 거대한 밤의 상황과, 그 속에서도 결코 지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표출한 1938년 작 ‘밤’을 읊어본다.
《 밤(夜) 》
延專 宋夢奎
고요히 沈澱된 어둠 (静かに夜の帳が下りた暗闇)
만지울 듯 무거웁고 (触れそうで重く)
밤은 바다보다도 깊구나 (夜は海よりも深い)
홀로 밤 헤아리는 이맘은 (一人夜を過ごすこの心は)
險한 山길을 걷고――― (険しい山道を歩き)
―――나의 꿈은 밤보다도 깊어 (我が夢は夜よりも深し)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揺れ動く水の音を後に)
머-ㄹ 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遠くの星を見上げ口笛を吹く)
(1938년 8월 16일 작, 『조선일보』 1938년 9월 12일자 게재, 일역은 필자 역)
참고; 「문우」 및 송몽규, 윤동주에 관련해서는 졸저가 삽입된 「한국문학논총 제61집」(2012) 등에서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 이수경 /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재외한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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