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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문학이 비즈니스로, 얼굴없는 작가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2월14일 01시45분    조회: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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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상 받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인터뷰 “문학이 비즈니스가 됐다… 작가들 문체는 비슷하고 얼굴이 없어”

 

이어령 선생은 “새벽 2~3시에 글을 쓰다가 베란다 밖을 내다보면서, 그 시간까지 불을 켜놓은 채 잠들지 않고 있는 이들에 대해 이런저런 공상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삶에 궁금증이 부쩍 늘어난 데 대해 “나이가 들어 마음이 약해진 탓인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 때문인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ㆍ“80살이면 영원을 산 것, 이젠 그간 축적한 것 나누며 살겠다… 잘난 글 쓴다고 가족에 등만 보이고 산 게 가장 후회”

그는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입담도 여전했다. 말에 막힘이 없고 비유는 위트로 반짝였다. 의외의 속내도 털어놓았다. 마음 속 트라우마와 지독한 외로움, 그리고 회한을 토로했다. ‘고백’이었다.

그는 평생을 쉼 없이 달려왔다. 문필가로서, 문화이벤트 창조자로서 시대를 앞서왔다. 엄청난 독서량과 늘 허기진 호기심은 그 밑천이 됐다. 그가 얼리 어답터이자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가로질러 사유하고 그 안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재해석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이자 초대 문화부 장관 이어령 선생. 그가 15일 팔순상을 받는다(실제로는 지난해가 팔순이지만 딸이 먼저 세상을 떠나 못했다. 올해 축하연도 반세기 이상 그의 문화 활동과 동행한 이들의 설득으로 겨우 이루어졌다). 그에게 80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인터뷰는 지난 9일과 10일 서울 중구 태평로 성공회성당 옆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진행됐다.

■ 창조 자체가 욕망이자 즐거움, 60년 글쓰기의 원천

- 팔순을 축하드립니다.

“내가 서른 넘어서까지 살 줄 몰랐어요. 우리 시대에는 ‘천재병’이라는 게 있었거든. 천재들이 대개 폐병 걸려 일찍 죽잖아요. 그런데 나는 서른이 됐는데도 안 죽는 거예요. 그래서 ‘아, 내가 천재가 아니구나’ 했지요(웃음). 이럴 바에는 장기작전을 짜야겠다 해서 나이 80을 기준으로 삼았어요. 8자를 누이면 시작과 끝이 무한대로 통하는 뫼비우스 띠의 모양이니까 80을 영원으로 보기로 했죠. 그동안의 삶이 나 개인을 위한 삶이었다면 80 넘어선 내가 살아오면서 축적한 것을 사회에 나누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생명과 사랑을 돌아볼 수 있는 일들이죠. 예를 들면 새 생명이 잉태된 순간부터 세 살까지 아이를 사회공동체가 나서서 잘 키우자는 운동으로 2010년 시작한 ‘세살마을’이 그 중 하나예요. 곧 출간될 <생명이 자본이다>(마로니에북스)도 그렇고요.”

-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서너달 전 뇌에 고인 피를 빼낸 수술을 한 것 외엔 괜찮아요.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포럼 참석 후 상경하다 문막휴게소에 들렀는데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 길로 서울대병원에 가서 CT를 찍어봤더니 넘어진 적도 없는데 뇌두개(腦頭蓋) 쪽에 피가 고여 있다는 거예요. 다음날 아침 바로 수술했어요.”

- 항상 청년과 같은 열정으로 살아오셨습니다. 동력이 뭔지 궁금한데요.

“창조에 대한 욕망이죠. 나는 어려서부터 나의 존재 이유를 문학과 창조에 뒀어요. 창조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거든요. 어떤 일을 선택할 때도 얼마나 즐거우냐가 우선순위였어요. 서울올림픽 개·폐막식 식전행사 연출, 한·일 월드컵 총괄기획, 새천년준비위원장과 같은 일을 맡은 것도 그래서였죠. 그것으로 이미 보상을 충분히 받은 것이기 때문에 금전적인 보수도 안 받았어요. 100억원 가까운 예산으로 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데,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6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는 끊임없이 글을 썼다. 비평가로, 에세이스트로, 칼럼니스트로, 소설가로, 시인으로…. 저서만 100여 편이다. 그 가운데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3), <축소 지향의 일본인>(1982) 등 시대를 넘나드는 베스트셀러도 수두룩하다.

- 수재들은 법대 진학이 일반적인 시대였어요. 국어국문과를 선택하고 문학을 하신 이유가 뭔가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동화를 많이 읽어주셨어요. 게다가 형들의 어깨너머로 보고 배워 일찍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죠. 내 나이 여섯 살 때부터 상상력을 발휘해 누나의 습자책 여백에 몽땅연필로 동화를 지어 썼어요. 물론 학교에서 우리말을 못 쓰게 하던 일제 치하여서 일본어였지요. 어느날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내려온 큰형들이 제가 써놓은 동화를 읽고는 ‘어디에서 베꼈지?’, ‘너가 썼다면 노벨상감이고 천재야’라며 안 믿어주는 거예요. 나는 억울해서 펄펄 뛰었죠. 형들은 놀리려고 한 건데 그때는 분하면서도 ‘내가 진짜 천재인가보다’라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래서 나는 당연히 문학을 한다고 생각했지요. 문학 이외의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 문학적 기질을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문학적 감성은 어머니, 창조적 기질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어요. 아버지는 배재학당, 어머니는 숙명학당에서 공부하셨지요. 당시 여자가 학교에 가는 것은 흔하지 않았잖아요. 어머니가 소녀시절 과일을 싸놓은 신문지에 글을 써놓은 것을 외할아버지가 우연히 보시고는 ‘머리와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해 학교에 보내주셨다고 해요. 아버지는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기계를 좋아하셨어요. 병아리 부화기 등 재미로 이것저것 사서 해보다 실패하면 전부 창고에 쌓였는데 그러면 나의 장난감이 됐지요. 나도 아버지를 닮아 새것을 탐하잖아요. 신제품 나오면 계속 사들이니까 집에 아이패드를 포함해 컴퓨터만 10여대, 휴대폰은 5~6개나 되지요. 옛날 목가구를 좋아하는 아내는 질색합니다.(웃음)”

- 경제적으로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하셨습니까.

“어릴 땐 그랬어요. 하지만 소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이후 집안형편이 아주 나빠졌어요. 아버지가 현실감각이 없어 사업하다 망하고, 사기도 당하고 하셨으니까요. 해방 후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월사금(공납금)도 못내 선생님께 불려 다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안은 완전히 해체돼 나는 고아처럼 자랐어요. 나를 돌봐줄 어른도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요. 그래서 내 마음 속에는 그 시절의 굉장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 외로운 ‘대나무 사주’… 친구가 많으면서도 없어

-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컸겠군요.

“어머니는 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의 하얀 백골과 함께 노란 귤 서너 개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때는 귤이 국내에서 재배되지 않아 참 귀했어요. 문안 온 사람이 사간 모양인데, 어머니는 목이 아무리 타도 저에게 주려고 그걸 안 드셨던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귤을 보면 눈물이 나요. 어머니 제사상에는 귤을 꼭 놓지요.”

- 많이 외로우셨겠네요.

“내가 대나무 사주라고 해서 외로운 사주라고 해요. 가족이 많아도 외롭다는 거예요. 맞는 것 같아요. 나처럼 친구가 많으면서도 없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주위에 사람은 많은데 진짜 친구는 없어요. 내가 빨리 결혼(부인은 서울대 국문학과 동기인 강인숙 전 건국대 교수다)한 것도 너무 외로워서, 너무 추워서였습니다.”

그는 술을 체질적으로 못 마신다. 그러다보니 남과 술 마시고 흉도 보면서 쌓는 정(情)이 생길 수 없었다. 또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매일 저녁 6시면 집에 돌아가서 새벽 2, 3시까지 책을 읽고 집필하는 게 거의 매일의 일상이었다. 그는 “시간이 아깝고 인정머리가 없어 나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남들의 경조사도 챙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실 그의 예민하고 꼿꼿한 성격은 문단에 많은 적(敵)을 만들었다. 데뷔부터 범상치 않았다. 1956년 스물세살 나이에 그가 한국일보에 기고한 칼럼 ‘우상의 파괴’는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작가 김동리와 시인 조향, 농민문학 작가 이무영씨 등 문단의 대가들을 공개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평론가로 데뷔한 그는 스물일곱 살에 자유당 붕괴와 함께 시민들에 의해 불탄 뒤 거듭난 서울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영입됐다. 이후에도 경향, 중앙, 조선 등 중앙일간지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하며 이름을 날렸다.

■ 김수영 시인과 벌인 문학의 ‘순수 - 참여’ 논쟁 유명

- 칼럼 ‘우상의 파괴’가 게재된 날의 기억, 특별하시지요.

“당시 문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서울 명동의 동방회관이었어요. 신문을 보려고 그날 동방회관에 나갔더니 화제가 온통 내 이야기였어요. ‘이어령이 누구냐’부터 ‘앞으로 글 조심해서 써야겠더라’, ‘저놈 버릇 가르쳐야 한다’까지 떠들썩했지요. 반면 노천명씨 등 소위 문단의 아웃사이더들은 ‘통쾌하다’며 좋아했어요. 당시엔 기성 문인들에게 미움 받으면 완전히 매장되는데 난 그걸 몰랐으니까 겁없이 그런 글을 썼던 거예요(웃음).”

- 기성 문단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신 건데 그렇다면 요즘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문학이 비즈니스가 됐어요. 적어도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작가들의 문체도 비슷하고요. 얼굴이 없어요. 문학은 유일하게 남은 1인 수공업인데 참 못마땅해요.”

- 1968년 김수영 시인과 벌인 문학의 ‘순수- 참여’ 논쟁이 유명한데요.

“사람들이 당시의 논쟁을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오해하고 있어요. 김수영은 사회적 외압으로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 불온시들이 햇빛을 볼 수 있는 세상이 와야 비로소 한국에 제대로 된 문학이 생겨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세계의 모든 저항시는 당시의 정치권력과 싸워야지 무섭다고 서랍속에 넣어두는 게 무슨 불온시냐고 한 거고요. 4·19를 겪은 후 나는 정치적 시류를 쫓아다니는 것은 문학의 본질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선언 후 안했지만 너희들 입장이라면 지금 불온시를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죠. 내가 쓴 경향신문 ‘여적’과 조선일보 ‘만물상’을 보세요. 나는 이승만, 박정희를 당대에 누구보다 공격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문학에서는 그런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게 내 소신이에요. 문학은 10년 후, 100년 후 읽어도 감동이 있어야 하니까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그와 관련해 또 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1967년 남정현 작가의 <분지> 사건이다. <분지>가 북한의 유력 신문에 전재됐다는 이유로 검찰이 남 작가를 북한의 간첩 혐의로 고발한 것이다. 엄혹한 시대, 남 작가는 꼼짝없이 간첩죄를 뒤집어쓸 판이었다. 그런 판세를 시종 논리적이고 당당한 대응으로 단숨에 뒤집은 이가 변호사 이항녕, 한승헌 등의 요청으로 피고측 증인으로 출정한 이어령 선생이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이어령의 ‘장미 뿌리 논쟁’이 나온다. “장미의 뿌리는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 있는 것으므로, 설령 어느 신사가 애용하는 파이프를 만드는데 장미 뿌리가 쓰여졌다고 해서, 장미 뿌리는 파이프를 위해 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한 명언이다. 그는 정말 두려움이 없었던 것일까.

- 용공으로 몰린 이를 옹호했다가 자칫 자신도 혐의를 뒤집어쓸 수 있는 모진 시대였는데 어떤 마음으로 나서셨습니까.

“나도 사람인지라 무서웠어요. 내심 갈등이 있었지요. 공판장에 들어서기 직전까지만 해도 ‘너무 세게 말하지 말까’ ‘타협할까’ 고민했어요. 한데 법정에 막 들어서는데, 학교도 빼먹고 나를 보겠다고 온 고등학생 두 놈이 보이는 거예요. 그 순간 ‘내가 비겁하게 처신해 저 아이들을 실망시키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까지 비겁해지면 저 아이들이 앞으로 누구를 믿고 살아가나 싶었어요. 그러자 마음이 느긋해졌어요.”

■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생활 못해 장관직도 자진 사퇴

-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지낸 2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요.

“나는 장관을 자진 사퇴한 사람이에요. 그만두기 6개월 전에 정원식 총리에게 사표를 냈어요. 나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생활을 못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싫어서 어려서는 양치질도 제일 안했어요(웃음). 교수 시절 교수회의에도 나가본 적 없고요. 그런 내가 남 앞에서 보고하고 닭살 돋는 말을 한 것은 그 시절이 처음이었어요. 그래도 국무회의에선 밤낮 목청 높여 싸웠지요. 나는 대통령의 결재가 난 안건도 몇번이나 뒤집었어요.일례로 외무부가 유엔 가입 기념물로 신라금관 복제품을 보내기로 대통령 결재까지 받아놓은 것을 우리의 금속활자와 그것으로 찍은 ‘월인천강지곡’ 복사본으로 바꾸도록 노태우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지요. 그 직후 노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참된 용기가 무엇인지 아세요? 참으라, 용서하라, 기다려라입니다. 저는 일생을 참용기, 이 석자로 살았습니다.’ 저를 위해 하신 말씀이었어요.”

- 사회학자 김호기 교수는 선생의 사상을 ‘한국적 인문주의’라고 요약하며 여기에 ‘정감 있는 디지털 문화론’(경향신문 12월2일자 16면)을 덧붙였는데요.

“정확히 본 거예요. 서양의 사상을 겉핥기식이 아니라 토착적인 우리 사상과 함께 몸에 배어서 사유하고 해석하는 게 나의 길이라고 생각해왔거든요. 그런데 정감 있는 디지털 문화론은 말은 내가 했어도 실제로 실현한 사람은 스티브 잡스예요. 디지털 기기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접목시켜 손으로 화면을 줄이고 늘리는 등의 편집기능을 넣었으니까요.”

그는 2007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외동딸(고 이민아 목사)의 실명(失明) 위기,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의 영적 구원을 갈구하는 딸의 소망과 기적같은 딸의 시력 회복…. 그는 고뇌했고 선택했다. 아버지에게 기독교 세례의 길을 열어준 딸은 한국, 미국, 아프리카 등에서 선교활동에 헌신하다가 위암 투병 끝에 지난해 53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현대의학이 선고한 6개월보다 1년을 더 살았다. 그는 “마음이 많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생애 마지막 시기를 평생 못받은 아비의 사랑도 처음 받아보고, 책도 세 권 쓰면서 행복하게 살다 갔다는 점 때문에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축축히 젖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회한은 무엇이냐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가족”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실명 위기에 처한 딸을 보러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예요. 기내 상영 영화를 보게 됐는데, 굉장히 바쁜 재벌이 생일을 맞은 딸과 밥을 먹는 장면이 나왔어요. 딸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선생님이 특별하다고 칭찬했다며 자랑하지요. 건성으로 듣던 재벌아빠는 왜 특별하다고 하느냐고 묻기는 했지만 아이가 막 대답하려는 찰라, ‘소금 좀 줘’라고 말해요. 같이 식사하던 아들이 그때 그래요. 동생이 아빠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인데 대답을 들을 그 3초를 못 참느냐고. 그건 바빠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순간 나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어요. 내 얘기였으니까요. 나는 밤에 원고를 쓸 때 우리 애들이 ‘아빠’ 하고 인사를 하면 돌아보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만 했어요. 그렇게 우리 애들에게 평생 등만 보였지요. 바쁘다는 핑계로, 그 잘난 글 쓰느라고….”

■ 이어령이 살아온 길

▶1933년 12월29일(음력 11월13일) 충남 아산에서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남

▶1944년 어머니 타계

▶1950년 12월 학도의용군 입대

▶1952년 부여고 졸업. 서울대 문리대 입학. 문리대 교지 편집 등 동아리 활동

▶1955년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 게재

▶1958년 경기고 국어교사(~1960). 시사잡지 ‘새벽’ 최연소 편집위원

▶1959년 첫 저서 <저항의 문학> 출간

▶1960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서울신문 논설위원. 이후 한국·경향·중앙·조선 등 일간지 논설위원 역임. 평론집 <지성의 오솔길> 출간

▶1963년 에세이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출간

▶1966년 소설 <장군의 수염> 발표. 평론집 <통금시대의 문학> 출간

▶1967년 반공법 위반 혐의 남정현 작가 변호

▶1968년 시인 김수영과 사회참여 문제로 논쟁. <이어령 전작집> 출간

▶1972년 ‘문학사상’의 창간 주간

▶1982년 <축소지향의 일본인> 출간

▶1987년 <유치환론>으로 문학박사 학위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 연출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 취임

▶1998년 이화여대 석좌교수(~2001·8)

▶2001년 영인문학관 개관(관장 강인숙)

▶2008년 (재)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발족


경향신문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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