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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의 막내딸 이정화 박사 '아버지는...'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12월4일 10시15분    조회: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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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이정화 박사. 80세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비상한 기억력과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2. 1935년의 춘원 이광수. 2년 뒤인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고초를 당한 뒤부터 친일행적 논란에 휩싸인다.
 

춘원 이광수의 막내딸 이정화 박사 “아버지는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남들이 해 입을 것이라 믿어”
[월간중앙] 독점 인터뷰 - 美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이정화 박사…어머니 허영숙(春溪·춘계)은 아름다운 동산(春園·춘원) 꽃피우게 한 한국 최초 여성 개업의… 남양주 사릉(思陵)에 있는 춘원의 구(舊) 가옥 문학원으로 만드는 일에 매진할 터



웅장하고도 신비하며 아름답고도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한층 더 빠져 드는…. ’ 한여름에 미국 보스톤에 가고자 하는 한국인이 있으면 필자가 꼭 권해주는 ‘추천상품’에 붙이는 수식어다. 바로 고래관광이다. 배를 타고 대서양 한가운데로 나가 ‘하염없이’ 고래를 지켜보는 여정이다. 평생 잊지 못할, 태고의 기억을 되돌려주는 황홀경을 만나게 된다. 참가비 50달러가량으로 3∼4시간을 즐길 수 있다.

필자는 5년 전에 운 좋게 10여 마리에 이르는 고래 대가족을 만났다. 한 시간 넘게 보트 위에서 고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기회였다. 크기가 보통 15m 안팎으로, 큰 녀석은 30m에 이르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느껴지지만 가까이서 보면 꽤 빠른 움직임에 놀라기도 한다.

고래의 매력은 단지 크다는 것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고래는 사람들에게 뭔가 특별한 쇼를 보여주지 않는다. 인간이 무섭다고 바닷속으로 도망치거나, 달려들지도 않는다. 평소처럼 바다를 유유히 가로지르며, 물고기나 새우 같은 먹잇감을 잡을 뿐이다. 거기다 15분마다 뿜어대는 ‘호흡분수’는 압권이다. 마치 태풍이 불 때의 바람소리를 연상케 한다. 지느러미가 바닷물에 부딪칠 때 내는 소리는 인생에서 잘못된 그 무언가를 꾸짖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평소와 다름 없는 고래의 일상적 모습이겠지만, 그냥 호흡하고 움직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DNA 깊숙이 감춰진 원시적 본능을 자극한다. 느리지만 빠른, 이성을 넘어 잠재의식 속에 숨겨진 자아에 밀어닥치는 신비하고도 신성한 모습 이다. 더하거나 뺄 부분이 전혀 없다. 고래 움직임 하나하나가 예술이다.

춘원(春園) 이광수에 대한 필자의 자세는 보스톤 앞바다에서 만난 이들 고래를 대하는 심정과도 같다. 춘원의 일생 그 자체를 조망해보면 20세기 전반 동아시아 한가운데에서 만난 고래의 행적 그 자체다. 문학은 물론, 삶과 사고의 흔적이 고래의 모습에 비견된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세계가 춘원의 삶에 투영돼 있다.

1892년 출생으로, 한국전쟁 직후 북한군에 납치돼 끌려가다가 1950년 10월 25일 세상을 떠난다. 58세 인생을 통해 남겨진, 문학·철학·사상·언론학적 유산이 넓고도 깊다. 1923년 5월부터 1933년까지 9년 동안 춘원은 하루 평균 원고지 70장의 글을 쏟아낸다. 13편의 소설과 시를 비롯해 사설·평론·시조·동화·수필·서평·기행문·번역물에 이르기까지, 글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장르의 작품을 창조해냈다.

밤에도 멈추지 않은 한국판 고흐

한국 근대장편소설의 효시에 해당되는 소설 <무정>의 표지.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자유연애소설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35세가 되던 1888년 프랑스 남부 아를(Arles) 지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당시 고흐는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막 탄생된 신문명(新文明)에 비교한다. ‘로코모티브(Locomotive)’, 즉 기관차다.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기계다. 아침 6시부터 시작되는 고흐의 예술작업은 밤 9시쯤에 끝난다.

하루 종일 똑바로 서서, 허리에 큰 좌판을 받친 채 그림에 몰두한다. 큰 소나무가 하늘로 치솟은 명작 <별 헤는 밤(The Starry Night)>은 심야의 별을 불빛 삼아 그린 밤의 풍경이다. 세상 모든 것이 숨죽인 깜깜한 밤 풍경을 들판에 홀로 서서 묘사한 화가가 고흐다.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그런 예술가는 없다. 로코모티브는 밤에도 멈추지 않는다. 춘원의 일생은 고흐의 로코모티브에 준하는, 열정과 노력 그리고 애정의 산물이다. 모든것이 불투명하고 어두운 시대였지만, 한국인 모두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상상력을 전해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창조물이다.

춘원을 친일파라는 수식어부터 시작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셰익스피어를 유태인과 흑인차별주의자라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살점마저도 돈으로 바꾸려 했던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부인을 죽이고 자살한 무어(Moors) 출신의 흑인 장군 <오셀로(Othello)>를 보자. 돈에 환장한 사회의 기생충 같은 샤일록을 보면서 셰익스피어야말로 독일 히틀러가 자행한 유태인 학살의 근거를 제공한 작가라 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춘원을 친일문제에서부터 시작하려는 사람을 위한 부연 설명이지만, 이 글의 무게중심은 춘원의 친일, 또는 친일 여부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는 점을 전제하고 싶다. 그 같은 논의는 저널리즘 차원의 영역을 넘어선다. 적어도 한 세대 앞을 내다보는 학문세계에서 논의될 문제라고 판단된다. 필자의 관심은 왜 춘원에게서 고래의 전설을 느낄 수 있는지. 그리고 춘원이 남긴 엄청난 행적과 주변환경은 어떠했는가라는 점에 있다. 춘원의 문화적·문학적 업적에 주목하자는 것이 의도 중 하나다.

춘원을 이해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Independence Mall)이다. 미국 독립을 상징하는 깨어진 모습의 ‘자유의 종(Liberty Bell)’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독립기념관에서의 만남은 필자가 아닌, 춘원의 모습을 보다 자세히 구체적으로 알려 줄 사람으로부터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춘원의 막내딸인 이정화(李廷華) 박사다.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가 분자생화학자로 일하다가 은퇴한 인물이다. 한국에 들러 잠시 교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렵게 찾아내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은 이 박사가 지목한 장소다. 정확히 말해 독립기념관의 하이라이트에 해당되는 헌법센터(National Constitution Center) 1층 카페가 인터뷰 장소다.

이 박사는 지난 10월 13일 국내 한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춘원과 가족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아버님을 사랑하는 분들에겐 감사를… 미워하는 분들에겐 사과를…”이란 타이틀로 구성된 글이다. 80세에 이른 그의 증언을 통해 20세기 초부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기까지 춘원의 행적을 읽을 수 있는, 타임슬립(Time Slip)형 인터뷰다. 당시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춘원의 가족사다. 50대의 필자가 40여 년 전 교과서를 통해 접했던 춘원의 피붙이가 아직까지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반가웠다. 장녀 이정란(李廷蘭)과 아들 이영근(李榮根)을 비롯해 춘원의 삼남매 모두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점도 놀라 웠다. 이정란은 영문학자, 이영근은 존스홉킨스대학 원자물리학 교수로 일하다가 퇴직했다.

독립운동가와 반민족행위자 사이에서

북한에 있는 춘원 이광수 묘. 춘원은 북한군에 납치돼 끌려가다 1950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치고 ‘파란만장(波瀾萬丈)’,‘우여곡절(迂餘曲折)’이란 수식을 달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춘원은 한 시대를 대표한 최고의 지식인인 동시에, 근대 초 당시의 고난을 온몸으로 체험한 근현대 수난사의 분신(分身)에 해당된다. 춘원만이 아니라, 춘원의 피붙이들이 경험한 역사는 바로 20세기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초상화다. 춘원의 파란만장한 삶은 1919년과 30년 뒤인 1949년의 두가지 모습을 통해 극명하게 나뉘어질 수 있다. 1919년 2월 8일 400여 도쿄(東京) 유학생의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쓰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러 간 춘원, 그리고 1949년 2월 7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特委)에 의해 체포돼 675번 수형번호를 단 죄수로서의 춘원이다. 춘원의 혈육들은 그 같은 극과 극의 시간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왔다. 춘원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체험하고 기억하는, 얼마 남지 않은 역사의 증인이 바로 이들 삼남매다. 과연 우리의 어제 모습과 생각은 어떠했는지를 보다 더 정확히 알려는 의도에서 이 박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다.

초겨울비 탓이겠지만, 토요일 오후 2시인데도 독립기념관 주변은 한산했다. 헌법센터로 들어서 카페로 향하는 순간, 유리 건너편에 선 아시아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첫눈에 그가 이 박사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80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고 화사하게 비친다. 붉은색 셔츠에다, 고동색 모자 목에 감긴 보랏빛 긴 스카프가 잘 어울린다. 카페 유리를 사이에 두고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 박사는 점심용으로 커피와 머핀을 주문하던 중이었다. 필자에게도 음료수를 권했다. 200여 개나 됨직한 카페 내 테이블이지만, 자리를 차지한 손님은 이 박사와 필자 단 둘뿐이었다.

“평소에는 사람들로 터져나가는 곳이지만, 오늘은 아주 한산하네요!”

단정한 외모와 더불어 목소리가 마치 40대 여성처럼 느껴진다. 말의 끝부분을 살짝 낮추는 식의 말투에서, 뭔가 애절함이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말 한마디한마디를 조심스럽게 던지는 식이다. “일부에서 저의 어머니 허영숙(許英肅)이 한국 최초의 여의사라고 하는데, 잘못된 겁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는 1900년 미국 볼티모어 ‘여자의학교’에서 공부한 김정동(1877~1910)입니다. 1918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여자 개업의사에 해당됩니다. 김정동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무려 3천여 명의 환자를 돌봅니다. 그러나 진료 도중 본인 스스로도 폐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여성환자만을 위한 병원을 열기 전에 돌아가신 셈이지요. 어머니는 1918년 서울에 돌아온 뒤 그해 실시된 조선총독부의 의사 검정시험에 통과합니다. 2년 뒤인 1920년 병원을 엽니다. 원래 살던 집을 개조해 병원으로 바꾼 것입니다. 1897년 생인 어머니가 23세 되던 해입니다.”

가장을 대신해 가계를 책임진 허영숙

1. 1944년 춘원이 직접 짓고 거주한 사릉 저택. 그의 허름한 집이 당시 보통 조선인들과 다름없는 삶이었음을 말해준다. 딸은 이곳을 춘원 문학관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2. 서울 효자동에서 병원을 개업할 당시의 허영숙(앞줄 가운데). 한국 최초로 여성이 주관하는 병원을 개업했다. 3. 1943년의 춘원 가족. 왼쪽부터 허영숙 여사. 막내딸 이정화, 장녀 이정란, 아들 이영근. 이영근은 장남이란 말을 삼갔다. 형인 장남이 일곱 살 때 병으로 숨졌기 때문이다.


대화는 어머니에 관한 ‘기록 정정’에서부터 시작됐다. 어머니가 한국 최초의 해외유학 여성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없는 사실을 부풀려 말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알리려는 듯했다. 춘원 가족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인물은 허영숙이다. 춘원의 부인이자 삼남매의 어머니다.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들어가던 시기에 공부를 시작해,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사가 주관하는 병원을 개장한다. 병원명(名)은 영혜(英惠)다. 허영숙의 중간 글자 ‘영(英)’과, 조선시대 의술을 시행하던 광혜원(廣惠院)의 중간 글자 ‘혜(惠)’를 합친 것이다. ‘영’은 춘원이 부인을 부르던 호칭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신여성의 대표주자라 볼 수 있겠지만, 거꾸로 현모양처를 지향하는 전통적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로서 저희들의 교육에 정력을 쏟는 한편, 아버지의 생각을 따르고 도와주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었습니다. 요즘처럼 여성 자신을 주체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기반으로 한 여성상 입니다. 사실, 아버지가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기에 어머니가 번 돈이 생활의 기반이 됐습니다. 어머니는 살아갈수록 점점 강해졌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렵지만, 주변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허영숙은 춘원의 아내로서의 허영숙에 그치지 않는다. 허영숙 자신의 그림자도 결코 춘원에 지지 않는다. 여성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물론, 스스로 병원을 개업해 의사 겸 경영자로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의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이었다. 여성 환자는 어디가 아파도 쉽게 병원에 갈 수 없던 시절이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은 남녀 간의 연애만이 아닌, 병원에도 해당된다. 진료라 해도 남성 의사가 여성 손을 잡거나, 몸을 본다는 것이 금기시되던 시기였다. 산모(産母)의 경우 여성 산파(産婆)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 허영숙은 그 같은 재래식 발상을 뛰어넘어, 여성환자를 위한, 여성의, 여성에 의한 병원을 처음으로 세운 인물이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직접 짜주신 명주 한 필과 광목 두 필을 팔아 여비로 삼은 뒤 서울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열두 살 때 입니다. 열한 살 때 할아버지·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부터 세상에 혼자 내던져진 것입니다. 춘원의 할머니에 대한 정이 남달랐습니다.”

춘원은 평소에 고아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부모가 세상을 뜬 때는 1902년이다. 원래부터 가난하게 자랐지만, 부모가 떠나면서 한층 더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다. 춘원과 허영숙의 관계는 어찌 보면 아들과 어머니 같은 관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추측에 대해, 이 박사는 춘원 문학의 근거는 춘원의 어머니에 있다고 단언한다.

춘원의 어머니 충주 김씨는 몰락한 양반 이종원(李鍾元)의 세 번째 부인으로 들어간다. 이른바 삼취(三娶) 부인의 자식인 셈이다. 어머니를 놀리고 천대하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어릴 때부터 경험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콜레라로 숨지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묻은 뒤, 당시 두 살이던 춘원의 동생과 함께 무덤을 타 넘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스스로의 인생을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묻은 직후 똑같이 콜레라로 세상을 뜬다. 허영숙은 혼자 자란 춘원의 빈자리를 채워준 여성이다. 허영숙의 호가 춘계(春溪)라는 점이 그 같은 상황을 반증하는 증거일지 모르겠다. 봄의 아름다운 동산(春園)을 깨끗하고 생기 있게 만드는, 물과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봄의 계곡이 허영숙의 삶이자 역할이었다. 동산을 꽃피우게 만드는 계곡이다. 허영숙이 없었다면 춘원이 있을 수 없다는 얘기가 가능해 진다.

“어머니는 돈에 대해 각별했습니다. 항상 저희들에게도 돈을 아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75년 5월, 어머니가 저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꿈을 꾼 뒤, 이상한 예감이 들어 서울에 전화를 했습니다. 국제전화를 두 번 했는데, 어머니는 전화값이 많이 나온다고 연락을 하지 말라는 편지를 저한테 보내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제전화값이 아주 비쌌습니다. 명령을 어기고 세 번째 전화를 했을 때 어머니는 혼수상태로 백병원에 입원한 상태였습니다. 1975년 9월 7일 세상을 뜨십니다.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영결미사를 가졌는데, 당시 아버지가 남기신 시(詩) ‘아내여’가 식순에 들어갔습니다.”

아내여! 귀여운 아내여! 귀엽고도 불쌍한 아내여! 힘없는 내 여윈 팔에 매달려 좋아하는 불쌍한 아내여! 바늘 잡은 손에도, 단장하는 거울에도, 작은 가슴이 노염으로 뒤집힐 때에도, 두 눈에 야속하다는 눈물이 고일 때에도, 내 생각에 매달리는 아내여! 무엇을 주랴. 아 불쌍한 네게 무엇을 주랴. 황금도 노적도 귀인의 영화도 못 가진 궁(窮)인이라, 무엇을 주랴. 아 근심에 여윈 이 가슴을 받으라….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인들이 아우슈비츠 유태인 학살 사건을 알고 있었을까요?”

대화 도중 전혀 엉뚱한 질문을 이 박사가 던졌다.

“제 자식이 유태인 출신 여성과 결혼을 했습니다. (며느리가) 독일이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본을 지지했는지, 저에게 물어왔기 때문입니다. ‘일본 지지=유태인 말살에 나선 나치에 대한 지지’로 통하니까, ‘당시의 상황을 알았더라면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가’라고 의문을 달더군요.”

이 박사는 미국에 건너온 뒤 피츠버그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생화학과를 다니던 중 함께 공부하던 인도 과학자 라자아이엔가(Raja Iyenger)와 만나 결혼한다. 필자가 아는 한 인도인 가운데 종교가 다른 외국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인도인과 만나 결혼하는 한국인 역시 극히 드물 것이다. 이 박사는 자신의 남편은 인도에서 온, 어릴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퇴학 처분을 받은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한때 스님이 되려고 절에 가서 머리를 깎으려 했던 인물이 춘원이다. 불교와 독립운동이란 두 가지 키워드가 두 사람을 맺어준 인연의 배경일지 모르겠다. 과학자 아이엔가는 1989년 세상을 떠난다. 슬하에 자식을 셋 두었다.

독일의 집단학살극을 알았나?

1. 허영숙 여사의 별세 소식을 알린 당시 신문의 부음기사. 사라진 춘원문학의 내조란 타이틀로 실렸다. 2. ‘이렇게 혼자 건너 방에 앉아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이외다.’ 춘원이 남긴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
이 박사 질문의 요지는, ‘일본, 나아가 춘원이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알았는가?’라는 점에 귀착될 수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아니라고 답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후에 아이젠하워 장군을 통해서다. 좀 나쁘게 말하자면, 독일과의 전쟁을 지휘한 아이젠하워의 이미지를 높이고, 독일에 대한 전쟁이 악(惡)에 맞서는 성전(聖戰)이었다는 의미에서 아우슈비츠가 ‘뜬’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만, 나치 독일이 자행한 집단학살극은 유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집시·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폴란드인·슬라브인·장애자·동성애자 등 다양한 인종과 신체· 정신적 장애자를 가스실로 몰아세운다.

“정확한 통계는 아무도 모르지만, 집시 학살자의 수가 유태인보다 많다는 얘기가 일반적입니다. 그 같은 상황하에서 특별히 ‘유태인 학살’이란 점만이 일본에 알려졌을 리가 없다고 봅니다. 전쟁 중 학살은 다반사겠지요? 대량학살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전해졌을 수는 있지만, 유태인에 맞춰진 참사라는 것은 몰랐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런 사실이 입증됐는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성품을 보면, 그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일본편을 들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더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 미국 내 관련학회에 참석해 객관적 사실을 모으고 있습니다.”

해방 후 춘원의 집에 닥쳤을 수난사에 대해 물어봤다.

“아버지를 잘 아시는 분들은 춘원이 친일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해를 입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일제 말기 3만 명이 넘는 조선지식인 살생부 명단이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여차하면 한순간에 전부 처형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하는 분들은 거꾸로 저희 가족들에게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학교에가도 선생님들이 잘해주셨습니다. 박목월 선생님은 저의 언니를 불러 ‘춘원은 아주 큰 나무와 같은 존재다. 바람이 아무리 강하게 불어도 결코 흔들리거나 부러지지 않으실 분’이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저의 아버지를 좋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요즘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해방 후 칼이나 무기를 들고 친일했던 사람들을 위협하던 모습도 일상적이었습니다.”

필자는 1994년에 고(故)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필자가 다니던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숙생들과 함께 한국 지도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동교동 사무실로 찾아갔다. 김대중은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실패한 뒤 정계은퇴를 발표한다. 일본 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김대중은 자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1시간 30분 동안 전해줬다. 전적으로 일본어로 이뤄진, ‘은밀한 대화’이기도 했다. 그 어떤 한국인보다 능숙한 일본어로 이뤄진 강의였다. 인간 김대중의 솔직한 모습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필자가 관심 있게 들었던 부분은 1945년 해방 당시의 김대중이다.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고향 상선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던 때다.

“전쟁이 끝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내가 내린 반응은 ‘미국이 졌어?’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대부분은 일본이 진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했다.”

8·15 춘원 행적에 대한 오해

이정화-아이젠가 부부와 두 자녀들. 가운데가 춘원의 부인 허영숙 여사다.
누군가의 말처럼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일본이 진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퍼붓는 프로파간다를 들으며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됐을까? 인터넷 시대로 모든 정보가 공개된 지금도 일본의 흐름을 잘 모르는 곳이 한국이다. 해방을 전후한 상황에 대해 물어봤다.

“해방 때 제가 열 살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이 질 것이란 사실이 저의 주변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어요. 제가 제비 뽑기로 일본이 질지 이길지에 관한 놀이를 한 기억도 있습니다. 일본이 졌다는 제비가 나와서 아버지에게 들고 가서 알렸답니다. 그런 발상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에서 일본 패망 얘기가 있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세계정세를 읽는 춘원의 정확한 세계관 덕분인지 여부는 알기 어렵지만, 이 박사는 일본 패망론이 상상 밖의 세상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는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역사적 순간이다. 라디오를 통해 퍼져 나온 일본 천황의 ‘옥음(玉音)’은 한 시대의 종언인 동시에 앞으로 닥칠 혼란과 투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날 그 시각 춘원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소설가 김동인은 춘원이 라디오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증언 한다. “1945년 8월 보름날 정오에 일본 천황 유인(裕仁)이 울음 섞인 소리로 온 일본인에게 부득이 항복한다는 포고를 할때, 라디오 앞에 외배(이광수)도 울면서 그 방송을 들었다.

이 박사는 김동인의 증언이 자신이 겪은 기억과 다르다고 말한다. 첫째, 8월 15일 당시 춘원은 남양주 사릉에 머물렀으며, 지금까지도 거주하는 사릉 주민 대부분도 그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둘째는 당시 사릉의 집에는 라디오가 없었다고 한다. 녹음으로 다시 들을 수도 없는 것이 당시 상황이다. 김동인의 증언이 공간적으로 어디에서 이뤄졌는지, 어떤 근거에서 만들어졌는지 오히려 자세히 알고 싶다는 것이 이 박사의 생각이다.

그러나, ‘만약’ 김동인의 증언이 사실이라 한다면, 어느 정도 일본 패망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던 춘원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춘원을 민족의 배반자라 규정하는 사람들은 친일파가 흘리는 ‘악어의 눈물’쯤으로 해석할 듯 하다. 그러나 춘원은 자신의 저서 <나의 고백>을 통해 당시 상황을 달리 설명한다. “형님, 일본이 항복하였소. 어저께 오전에 일본 천황이 항복한다는 방송을 했다오.” 항복 소식을 알려준 인물은 봉선사 운허 스님이라고 한다.

필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증언 가운데 어디가 옳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둘 다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춘원의 당시 심정이 어떠했는지 물어봤다. 답은 <나의 고백>에 실린 글로 대신했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 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가까이서 본 아버지 춘원, 인간 춘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결핵으로 인해 몸이 워낙 허약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참선을 하고 곧바로 불경을 읽었습니다. 이후 수건 마사지로 몸을 단련했습니다. 항상 차(茶)를 가까이 했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커피도 직접 만들어 들었습니다. 물론, 술도 즐기셨습니다. 사람들과 만나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셨습니다. 참선과 관련해, 어머니가 벽을 보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벽을 보고 있으면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잊고 지냈던 것도 알게 되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된다.’ 저는 그런 것이 없지만, 아버지는 육감(六感)이 발달하신 분이었던 것 같아요. 글은 항상 만년필로 쓰셨습니다. 해방 후 자술서를 쓰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자신의 만년필을 꺾어 부러뜨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대단한 분인 것은 알았지만, 저에게는 마음씨 좋은 친절한 아버지로 기억됩니다. 영어로 된 안데르센이나 그림 동화를 한글로 곧장 번역해 저에게 들려주셨어요. 아버지는 돈을 전혀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책과 글을 써서 번 돈도 순식간에 없어졌습니다. 돈을 찾는 인감도장을 잃어버려 고생한 적도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춘원의 생각은 어떠했나요?

“불교가 중심이지만, 기독교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불교의경우 자비심을 강조했습니다. 추운 겨울 길을 가다가 거지를 만나자, 자신의 코트를 벗어주기도 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신문에 전사자 명단이 거의 매일 실렸습니다. 일본군 전사자지만, 아버지는 그들을 기리기도 했습니다. 친일행위라 비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인, 한국인 여부를 떠나,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사실을 슬퍼했습니다.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저에게 “내가 보고 싶으면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려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부처를 믿고, 예수님을 배우는 것이 인생 최고의 길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신약 성경과 염주를 함께 주셨습니다. 좋아하시는 찬송가도 풍금으로 치셨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저와 함께 불렀습니다. 세상을 뜬 뒤에는 자신의 재를 하늘로 날려보내라고 부탁했습니다. 한국이 참 아름다운 나라라는 말씀도 자주 하셨습니다. 자연을 즐기고 항상 어딘가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여행기를 남겼습니다. 평범한 사람을 좋아하시고, 사람들과 어울려 얘기를 듣거나 나누는 것도 좋아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같은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따랐습니다. 남아 있는 편지를 보면, 두 분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수백 통 편지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것들입니다. 아버지가 납북된 뒤, 집에 있던 편지를 어머니가 전부 보관했습니다만, 자신의 편지는 필요 없다고 모두 없애신 듯 합니다.”(웃음)

남양주 사릉의 옛집을 문학원으로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톨스토이,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이들이 가진 공통분모는 세계인으로부터 ‘문호(文豪)’라 불린다는 점이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크게 뛰어난 문학가’가 문호다. ‘문웅(文雄)’이라고도 불리며, 단순한 작가의 수준을 넘어서는, 시대를 넘어 인류 모두의 영혼을 울리는 인물만이 문호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다. 수많은 작가와 더불어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르내린다는 작가 대국의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나 문호가 없는, 그만그만한 얘기꾼 수준이 전부다. 문호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작가가 없는 곳이 한국이다. 과연 한국은 문호가 없는 곳일까? 가슴 저 밑바닥에 숨겨진 순결한 영혼을 일깨우고 북돋아 줄 문화가 한국에는 과연 전무할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소리 높여 ‘있다’라고 말할 자신도 없다. 이유는 한국역사를 지배한 수많은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세계에 내세울 문호의 기반은 작가의 출신국가에 있다. 100%는 불가능하겠지만, 자국민 대부분이 이의없이 받아들이는 대작가가 문호의 대열에 오를 수 있다. 한국에서 자국민 모두가 받아들이는 작가는 과연 얼마나 될까? 친일·반공·출신지·대학·민주주의 그리고 좌우를 둘러싼 이념 대립은 19세기 말부터 21세기까지 이어진 한국 갈등사의 키워드들이다. 유능한 작가라면 시대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에 떠밀려가기 쉽다는 의미다. 그 같은 흐름 속에서 한국민 대부분이 동의하는 대작가도 사라진다. 문학성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어딘가에 속하거나, 부딪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단죄하고, 단죄된다.

만약 2014년 겨울 한국을 대표하는 문호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어떤 인물이 오르내릴까? 연령, 관심사 그리고 세계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춘원이야말로 가장 먼저 언급되지 않을까? 근·현대문학을 되돌아 볼 때 춘원은 출발점이자 나침반에 해당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출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장편소설 <무정(無情)>을 시작으로, 종래의 문어체를 대신한 구어체 문학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소설·시·시조·평론·논설과 같은 문장가로서만이 아니라, 1919년 3·1운동에 앞서 이뤄진 도쿄(東京) 2·8 독립선언의 선언문을 작성한 우국지사의 모습이 춘원이 걸어온 삶의 궤적이다. 여성문제에서부터, 21세기 선진국의 키워드인 동성애나 흑인차별 문제를 이미 100여 년 전에 세상에 알린, ‘인류의 선각자’가 춘원이다.

사후 60년이 넘도록 흔들리는 그림자

춘원의 딸로서만이 아니라, 이 박사님 스스로가 근·현대사의 역사적 증인인데, 육체적·심적으로 고통이 많았을 듯 합니다.

“주변 분들이 잘해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북한군에 끌려간 뒤 피란을 다니느라 고생이 심했습니다. 항상 주변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어린이 3명이 수류탄을 갖고 놀다가 터지면서 온몸이 파편으로 터져나갔습니다. 그들을 보면서도 무서워하거나 동요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죽고 살아가는 것이 당시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허리춤에 돈을 가득 숨긴 채 피란생활을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허리춤의 돈이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돈이 전부 사라지면 가족 모두 한강에 가서 자살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때 어머니의 말씀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돈이 떨어지면, 그냥 그렇게 자살하는가 보다’ 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때 모든 한국 사람들이 저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요?

“춘원사업을 계속해야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남양주 사릉(思陵)에 있는 춘원의 구(舊) 가옥을 문학원으로 쓰려는 일에 매진하고 싶습니다. 사릉 집은 아버지가 1944년 구입해 직접지은 집입니다. 아버지가 쓰신 <단종애사(端宗哀史)>의 현장으로 단종의 비, 정순(定順)왕후의 묘지가 있는 곳입니다. 단종에 대한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과 함께, 서쪽으로 해가 넘어갈 때의 삼각산 풍경이 좋아서 땅을 구입해 지은 집입니다. 가능하면, 1944년 당시 집 모양을 복원해 문학원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작가가 되려는 후세들이 거기에 들러 영감을 받고, 제2, 제3의 춘원이 되어 달나라에서, 깊은 산골이나, 외딴 섬, 세계적 문화 도시, 아니면 별나라에서 불후의 작품을 써내는 일이 있었으면 합니다.”

필자가 이 박사와의 인터뷰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한 가지 작용했다. 신문에 실린 이 박사의 모습이 필자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이 박사가 걸어왔던 숨막히는 근·현대사는 필자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은 필자만이 아닌,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은 선배 세대 모두로부터 느껴질 수 있는 공통분모일 듯하다.

움직임 그 자체가 예술이고 창조인 고래. 그 엄청난 고래가 남긴 역사적 유물과 정신은 후손과 후배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크고 벅차다. 춘원의 그림자가 사후(死後)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잡혀지지 않는 이유일지 모르겠다. 그를 한국의 문호라 부르는 바로 그날이, 거인 춘원의 가닥을 잡을 수 있는 시점이 될 듯 하다. 불교신자도 아니고, 피붙이는 더더욱 아니지만, 춘원을 그리며 하늘나라에 염(念)을 올려 보낸다. ‘나무관세음보살’.

글=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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