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시비 자체에 대해서는 신경숙 단편의 문제된 대목이 표절 혐의를 받을 만한 유사성을 지닌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이것이 의도적인 베껴쓰기, 곧 작가의 파렴치한 범죄행위로 단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애초에 표절혐의를 제기하면서 그것이 의식적인 절도행위에 해당한다고 단정했던 일부 언론인과 상당수 문인들에게 창비의 이런 입장표명은 불만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불쾌한 도전행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경숙 표절 사태가 수그러드는가 했더니 ‘보도자료’로 한 차례 욕을 먹었던 창비가 가을호 계간지 발행에 맞춰 잇따라 ‘입장’을 내놓으며 다시 구설에 오르고 있다.
이에 앞서 민중민족문학 계열 평론가로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지낸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는 한국작가회의 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차용한 것을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자신의 작품의 맥락 속에 녹여냄으로써 작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줬다. 이는 일찍이 표절혐의를 받았지만 이를 이겨내고 거장의 반열에 오른 많은 선배작가들이 밟아온 길”이라며 신씨를 두둔했다.
며칠 뒤 창비 편집주간인 백영서 연세대 교수는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 책머리에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지만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신씨를 표절 작가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반론을 폈다. 창비를 만들었고 지금도 끌어가고 있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의견을 내지 않고 있다가 27일 페이스북을 통해 그 역시 백 주간과 같은 생각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창비의 이 같은 대응에는 유감스러운 대목이 있다. 우선, 비판하는 쪽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는 듯한 표현을 지극히 점잖은 어조로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경숙이 ‘우국’을 펴놓고 베껴 쓰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신경숙 감싸기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한 소설가는 이런 창비의 대응을 접하고 “문자도 아니고 문자적, 의도도 아니고 의도적. 무슨 적이 이렇게 많을까.…적적거리는 건 문학이 아니다.…사과는 없고 신중함을 가장한 적적거림만 가능하구나”고 비꼬았다. 신경숙을 형사고발한 고려대의 한 교수를 제외하면, 신경숙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창비에 묻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신경숙을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온 게 아니지 않은가.
또 하나는, 잠깐 들뜨기라도 한 것 같던 신경숙 사태가 가라 앉으면서 정말 이 문제를 “차분하게 검토하고 검증”할 분위기가 만들어져 가는 국면에서 이런 문제제기가 나와 오히려 차분하지 못한 반응을 부추겼다는 점이다. ‘보도자료’ 사태에서도 드러났듯 창비는 구조적으로 상황을 인식하는 시야에 제약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된다.
물론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창비가 한국문학에, 한국지성계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한국사회의 진보적인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결코 폄하할 수 없다. “창비에 공공적 가치의 실현은 창사 이래 가장 중요한 목표”였고 “그간 거둔 사업적 성과”가 “공공적 기여와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은 틀리지 않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지금 창비의 대응이 더 안타깝다. 신경숙 사태와 관련한 의견을 담은 글 몇 편을 모았다.
“그간 내부토론을 거치면서 신경숙의 해당 작품에서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의식적인 차용이나 도용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표절이라는 점이라도 신속하게 시인하고 문학에서의 ‘표절’이 과연 무엇인가를 두고 토론을 제의하는 수순을 밟았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작가가 ‘의식적인 도둑질’을 했고 출판사는 돈 때문에 그런 도둑질을 비호한다고 단죄하는 분위기가 압도하는 판에서 창비가 어떤 언명을 하든 결국은 한 작가를 매도하는 분위기에 합류하거나 ‘상업주의로 타락한 문학권력’이란 비난을 키우는 딜레마를 피할 길이 없었기에 저희는 그 동안 묵언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표절 문제에 대한 발언이 특히 어려웠던 것은 그것이 또다른 쟁점, 곧 문학권력(내지 문화권력) 논란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비가 ‘문학권력’으로 지목되는 순간 감정이나 도덕 차원의 비난 대상에 오르고 무슨 발언을 해도 불순한 권력행사로 비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문제 또한 찬찬히 따져볼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문학권력이란 것이 문학장 안에서 일정한 자원과 권위를 가진 출판기업을 가리키고 그 출판사가 유수한 잡지를 생산하는 하부구조로 기능함을 의미한다면, 창비를 문학권력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창간호 권두논문에서 ‘창조와 저항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한 창비에 공공적 가치의 실현은 창사 이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리고 공공성을 지속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적 기반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공공성과 사업성의 결합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왔습니다. 창비가 그간 거둔 사업적 성과 또한 저희의 공공적 기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창비가 그 과정에서 양자 사이의 균형을 언제나 잘 유지해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창비주간논평 8월 26일 ‘표절과 문학권력 논란을 겪으며’▶ 전문 보기)
“나는 이번 신경숙씨의 표절에 대한 이응준씨의 문제제기를 백번 공감하고 지지한다. 그 글에 표현된 그대로 그동안 한국문단에 신경숙만큼 많이 또 자주 표절 시비가 있었던 작가도 드물 것이다. 이토록 표절 시비가 잦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말이 나올 때마다 그게 변방에 우짖는 새 소리로 정도로 그치고 문학판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응준씨도 출판권력이 만들어낸 ‘침묵의 카르텔’에 대해서 말했지만, 또 한겹의 카르텔이 있다. 한국문단의 고질적 문제로 ‘문단 보험 카르텔’과도 같은 출판시스템이 존재한다. 나들이에서 서울 부산 대구를 찍듯 문지 창비 문학동네에 차례로 돌아가며 책을 내니까 문단권력과도 같은 출판사가 작가를 호위하고 엄호하며 표절문제를 은폐해 버린다. 거기에 얹혀 있는 평론가들의 상습적 외면도 침묵에 일조했다. 한국 출판권력이 문제를 은폐해온 방식이 놀랍게도 ‘세월호 방식’과 똑같다. 바로 ‘가만 있으라’이다. 가만있지 않고 말하면 너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것이다, 대놓고 협박하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압박해왔던 것이다.
그러면 10년 전과 지금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10여년 전엔 한국 출판권력들이 그걸 은폐하려면 얼마든지 은폐할 수 있었다. 그것을 이슈화할 수 있는 신문이 몇 개 되지 않았고, 또 문학기자들과의 면식을 통해 알음알음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지금은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각종 포털사이트의 블로그와 카페, 거기에 한번 문제가 터지면 인터넷에 수십 개의 새로운 기사가 경쟁하듯 올라온다. 표절에 시효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언제든 이슈화 될 때마다 현재성을 갖는다.”(한국일보 6월 19일자 기고 ‘한국문단, 표절이 부끄러운 줄 알라’▶ 전문 보기)
“신경숙씨의 일부 작품 표절과 문단에서 그들 부부의 권력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나 같은 일반 독자도 10년이 훨씬 넘도록 들어온 이야기다. 특히 그간 ‘남진우 교수, 남진우 편집위원’이 특정 작가를 타기팅, 비난해온 행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여론 재판, 과도한 징벌”(윤지관)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앞뒤가 바뀐 사고방식이다. ‘여론 재판’은 문제가 아니라 결과다. ‘신경숙급’ 인사의 뉴스는 여파가 크다. 현실 진단도 틀렸지만 나는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론 재판’이라는 틀에 박힌 분석이 더 싫다. 지성의 반대는 무식이 아니라 상투성이다. 이미 이 문제를 보는 시각이 없다는 얘기다.
독자는 작가나 출판사보다 성숙하다. 나를 포함, 독자들은 이번 사태로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실 창비는 ‘절대 권력’만큼이나 ‘절대 역할’을 해왔다. 창비는 대중작가의 작품 수익으로 학계의 비판적인 저널인 ‘안과 밖’(영미문학연구회)이나 ‘여성과 사회’ 등을 지원해왔다. 운영이 어려운 계간지(창작과비평)가 거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원래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탄식의 뜻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이 속담은 합리적이다 못해 급진적인 말이 되었다. 외양간을 안 고치기 때문이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문제는 사고 자체보다(사고는 과거이므로), 이후 대응이다. 대응이 더 큰 사고, 더 큰 문제다. 처음부터 “인정한다” 아니면 최소한 “검토하고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면 ‘여론 재판’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비와 작가회의 일부 책임자의 발언은 분노를 넘어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신경숙 작품이 더 낫다”, “필사를 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 이들은 기본적으로 ‘문학과 지성’이 없구나.…
말할 것도 없이 이번 사건은 시스템과 작가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녀는 결혼제도와 출판권력 등 공사 영역에 걸친 절대적 보호 아래, 자신과 직면할 수 없게 된 거대한 바위가 되었다. 당황한 나머지 변명조차 자기 언어가 없었다. 문단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거대한 바위가 아니라 ‘거대한 뿌리’이다.”(경향신문 8월 7일자 정희진의 낯선 사이 ‘표절 이후의 사회’▶ 전문 보기)
“표절을 윤리적이게 하는 것은 명시성(출처 표시)이 아니라 원본을 빌려 쓴 사람의 원본과의 대결 의식이며 원작을 극복하려는 노력, 곧 작품성이다. 강을 건너면 배를 버려야 하고 지붕에 오르면 사다리가 필요 없듯이, 표절이 완수되었을 때 명시성은 중요하지 않다. 경계할 것은 삼류 표절작이 원작의 권위에 기대고자 명시성을 이용하는 사례다. 나는 오래전에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이라는 시를 쓴 바 있는데, 제목 아래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라는 부제를 달았던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 표절은 도덕적 고발의 대상이 아니라, 비교와 즐김의 대상이다. 아직 문학의 성년(成年)이 되지 못한 ‘문학소녀’만이 의식적인 표절을 해놓고도, 표절을 더러워하는 자기기만 속에 허우적댄다. 그래서는 모던(modern)을 성취할 수 없다.…
문학이 영속해온 비밀은 그 어떤 주류가 99%를 점거하고 있더라도, 비주류가 차지할 1%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례가 잘 보여주었듯이 정치는 그 1%조차 남겨두려고 하지 않지만, 문학은 1%의 ‘빈 공간’을 언제나 남겨둔다. 정치에서는 1%가 주류가 되는 변태가 절대 없지만, 문학사에서는 예삿일이다. 어떤 문학 권력도 이 흑점을 없애지 못한다.…신경숙이나 귀여니나 살아생전 글로써 생계를 잇고 있는 것이지, 아직 ‘작가의 삶’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작가의 삶은 그들이 죽고 나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명성’이라고 잘못 알려진 작가의 삶은 대개 육체적 죽음과 함께 피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이처럼 엄혹한 문학적 진실 앞에서 문학 권력으로 지목된 3사가 부릴 수 있는 야료는 대수롭지 않다. 나는 이응준을 지지하는 한편, 이렇게 말한다. “표절을 보호해야 한다!””(시사인 7월 28일 장정일의 독서일기 ‘표절을 보호해야 한다’▶ 전문 보기)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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