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의 매혹] 23일, 대문호 떠난지 400년
영국 미들랜드 장갑 제조공의 아들…세계가 존경하는 작가로 성장
인간과 세상 꿰뚫은 통찰에 공감
셰익스피어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흡수해 예술적이고 정교한 언어로 작품에 녹여냈다. 그의 작품은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다채롭게 변주돼 그 시대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맥베스가 세 마녀와 마주치는 장면을 그린 요제프 안톤 코흐의 작품 동아일보DB
시종이 가져온 거울을 응시하며 리처드 2세는 한탄한다. “이 얼굴이 궁전의 지붕 아래서 매일 1만 명의 신하를 거느리던 그 얼굴이냐?”(‘리처드 2세’ 4막 1장)
거울 속에 권력을 잃은 왕의 얼굴이 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무대라는 거울’을 바라보며 인간의 나약함, 삶의 곡절, 권력의 허망함과 역사의 순환을 읽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생생하고 냉철하게 그려낸 천재였다.
23일 서거 400주기를 맞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 영국 미들랜드 지방의 소도시 스트랫퍼드에서 장갑 제조공의 8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문법학교는 졸업했지만 가정 형편 탓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18세에 결혼해 세 자녀를 둔 가장이 되었다.
그는 기회를 찾아 1589년경 런던에 상경해 극장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당시 런던은 연극의 전성시대였다. 관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연극 관람객은 매주 1만5000여 명에 달했다. 런던 인구의 10분의 1에 가까운 수치다.
셰익스피어는 극장에서 처음에는 관객들이 타고 온 말을 돌보는 일을 하다 소품이나 대본을 담당하는 무대 보조원에서 군소 배우 역할을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마침내 1590년 초 어느 날 작가로서 첫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는 제독, 더비, 레스터, 펨브룩 극단과도 관계를 맺었지만, 주로 체임벌린 극단에 소속돼 20여 년간 활동했다. 극단 소속의 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배우 겸 주주이기도 했다. 그는 사극 11편, 희극 13편, 비극 10편, 로맨스극 5편 등 모두 39편의 극작품과 장시 4편, 소네트 154편을 세상에 선보였다. 극작품은 1년에 거의 2편을 쓴 셈이다.
젊은 셰익스피어는 권력 다툼으로 피비린내 진동하는 사극에 관심이 컸다. 틈틈이 웃음 가득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희극도 즐겨 썼다. 그리고 영광의 절정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의 겨울왕국을 지나 창작 생애 말기에는 비극을 넘어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로맨스’의 세계를 창조했다. 자신의 작품에는 매춘부와 노예부터 귀족과 왕, 유령과 마녀에 이르기까지 110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을 그려냈다.
관객들은 열광했고 그의 무대는 뜨거웠다. 그는 말 그대로 ‘만 가지 마음을 가진’ 세상 최고의 이야기꾼으로서 부와 명예를 모두 쟁취한 런던 연극계의 총아가 되었다.
셰익스피어 사후 7년이 지난 1623년, 극단의 친구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작품들을 모아 전집을 출간하였다. 책 서두에는 당대 최고의 작가 벤 존슨의 헌시를 실었다.
“그는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만세의 시인이다.”
존슨의 예견처럼 셰익스피어는 오늘도 여전히 무대를 활보하고 있다.
그는 왜 400년 동안이나 우리와 함께 울고 웃고 있는가? 그것도 마치 서울 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동시대 사람인 것처럼 우리 눈앞에 생생히 살아 있는가? 답은 다양하겠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담긴 오락성과 예술성, 보편성 때문이라고 믿는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극은 밝음과 어두움, 가벼움과 무거움, 느림과 빠름, 격정과 평안이 교차되는 뛰어난 극 구성으로 관객들은 극적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정교한 묘사와 적확한 비유, 아름답고 심오한 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언어의 마술사로서 생생한 이야기와 입체적인 인물을 창조했다. 한 행에 약강 5박자의 리듬이 어우러지는 시적 대사는 눈을 감고 듣는 것만으로도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무대의 인물들이 마치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셰익스피어는 인간과 삶과 세상과 시대를 꿰뚫어 통찰하였으므로 시공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인간과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해 공감과 깨달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속에서 탐욕과 양심, 도덕과 부도덕, 진실과 위선, 권력과 굴종, 충성과 배반, 사랑과 미움, 영광과 몰락, 야망과 헌신, 복수와 용서, 삶과 죽음 등 삶의 본질을 이루는 수많은 화두를 마주하게 된다.
오늘도 무대에서는 막이 열리고 셰익스피어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우리는 변함없이 그가 남긴 거울을 통해 인간과 세상과 역사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무대가 존재하는 한 셰익스피어는 불멸이다.
안병대 한국셰익스피어학회장·한양여대 실무영어과 교수
동아일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