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회 신동엽문학상 수상 금희 조선족 작가
금희 조선족 작가 “개인적 경험이 없다면 상상도 힘들어… 경계인, 객관적 입장에서 볼 수 있어 좋아요”금희(37)는 조선족 작가다. 중국 지린성 장춘에서 글을 쓴다. 그의 이름이 한국문단에 알려진 건 2014년 봄 계간 ‘창비’에 단편 ‘옥화’를 발표하면서다. 지난 연말 첫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창비)를 냈는데, 올 8월 제34회 신동엽문학상을 덜컥 받았다. 신고식을 치른 지 3년 안에 이뤄진 ‘초고속 출세’인 셈이다. 이 상이 외국인에게 돌아간 건 처음이다. 11월 시상식에 앞서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하는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초청받아 내한한 그를 지난 1일 서울 종로구의 숙소에서 만났다.-습작 과정은.
“어려서 독서를 한 게 전부다. 친구가 별로 없어서…. 엄마가 주문해준 전래동화집, 삼국지,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걸 좋아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린 생각에도 작가가 되는 건 가난과 번뇌를 거쳐야 되는구나 싶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 길은 피했던 것 같다.”
그랬던 그가 작가가 됐다. 개인적 체험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옌볜조선족자치주 옌지의 사범학교(고교과정)를 나와 초등학교 선생님을 했던 그는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살며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말해 달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무렵부터 2년 반 정도 머물렀다. 대전 근처 소도시에서 중국어 강사를 처음엔 하다가 모텔 청소, 식당 서빙 등 여러 일을 했다. 중국에서는 해보지 않던 일이었다. 뭐랄까. 나 자신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하며 자신감이 하나하나 벗겨지고 ‘나는 참 쓸모없는 인간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 된 딸을 중국에 두고 신혼의 그는 남편과 둘만 왔다. “너무 힘들어 애가 보고 싶지도 않았다”는 그가 “그런데 중국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그 때부터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하는데,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있다.
-그래서 작가가 되기로 했나.
“중국으로 돌아가서도 여러 일을 했지만, 어느 것도 내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2006년의 어느 날이다. 톈진에서 살던 당시 인터넷을 검색하다 ‘옌볜문학’의 소설 공모 광고가 눈에 번쩍 띄었다. “돈을 좇아서 살았던” 그에겐 구원의 끈이었다. 이후 ‘조선어’로 소설을 틈틈이 발표하던 그는 2013년 첫 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를 중국에서 냈다.
22살에 결혼해 현재 고1, 초 4인 두 자녀를 둔 금희 작가는 나이에 비해 인생경험이 풍부하다. 남한과 북한, 중국의 경계인으로 살고 있고, 특히 한국 작가들이 접하기 어려운 탈북자들을 일상의 공간에서 만난다. 탈북 여성 이야기를 다룬 등단작인 ‘옥화’는 그런 경험의 총화다. 박완서 작가는 늦깎이로 등단해 산전수전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리얼리즘 미학을 꽃피웠다. 그런 점에서 그를 ‘조선족 박완서’라고 부를 만하다.
-작가관을 말해 달라.
“경험주의 작가다. 근원적 경험이 없다면 상상한다는 것도 힘들지 않은가. 교회에서 만난 탈북자 친구들이 10여명 있었다.”
-경계인의 자리에 서서 펼쳐보이는 소설 미학이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이게 얼마나 좋은 지 느낀다.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한국과 북조선, 중국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한국에서의 불법 체류 경험이 소설 속에 녹아 있지만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은 없다. 단편 ‘노마드’의 경우 한국에서 ‘중국 조선족’ 노동자로 일했던 남자가 주인공이지만, 중국으로 돌아가는 ‘기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국 무대는) 굳이 이야기가 나오면 쓰지만 아직은…. 한국말에는 묘한 속담 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한국에서 체험이 힘들었지만 한국이 싫지는 않았다. 내 민족의 나라라서 좋은 거다. 한국은 저력이 있는 나라다. 하지만 조선족에 비해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조금 더 없지 않나 싶다. 뉴스를 보면 항상 스스로를 선진국과 비교하고, (따라잡기 위해)뭔가를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국민일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