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단순히 글만 쓰는 사람이 아니다. 쓰기 이전에, 아니 쓰기 위해 읽는 사람이다. 결국 백지에, 그 백지를 메운 흔적을 묶은 책에, 그들이 쏟아놓는 것은 자신들의 생 체험과 독서 이력이 뒤섞인 어떤 덩어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 시대의 작가들은 요즘 어떤 책에 꽂혀 있을까. 그들 글쓰기의 뿌리에서 자양분 역할을 하는, 작가가 읽는 책 얘기를 작가로부터 직접 듣는다. 그들의 작업실을 찾아가서다. 표정과 육성이 살아 있는 책 소개, '작가의 요즘 이 책'이다. 1시간가량 동영상 촬영분을 10~15분 길이로 편집해 생생히 전한다. 영상에 못 담은 얘기는 기사로 함께 소개한다. 두 번째 순서는 '소설 여전사' 정유정이다. 간호사로 일하며 소설을 독학한 그는 특유의 완력으로 한국 소설 시장을 접수 중, 아니 접수했다. '작가의 요즘 이 책'은 격주 토요일 아침마다 업데이트된다. 첫 번째 순서는 소설가 김훈이었다.
내는 소설마다 베스트셀러, 독자 마음 사로잡은 소설가 정유정
"대상 확실하게 장악해야 쓸 수 있어…소설 무엇보다 재미 있어야"
요즘 빠진 책으로 미국 작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나와 세계』 꼽아
강렬하고 힘 있는 서사로 단숨에 스타 작가로 떠오른 정유정씨. 소설창작을 독학했다. [사진 백다흠]
'스타 작가' 소개 기사를 참신하게 쓰기는 어렵다. 그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이 알려질 만큼 알려진 경우가 많아서다. 소설가 정유정(51)도 마찬가지. 그는 일종의 '소녀 가장'이었고(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0대의 상당 기간을 세 동생과 아버지 뒷바라지에 바쳤다), 간호사가 생업이었으며 그래서 소설창작을 독학했다. 당연히 늦깎이 등단이었지만(마흔에 했다!)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책을 내면 팔리는 문단의 우량주, 대장주로 자리매김했다. 장르소설 필의 스토리텔러라는 박한 평가를 극복하고 각종 문학 행사에 단골 초대되는 어엿한 작가 대접을 받게 된 것 역시 뒤늦었지만 당연한 수순.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정유정, 아니 요즘 소설에 무심했던 거다.
정유정 작가 어머니의 젊은 시절. 정씨는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기가 나"라고 했다. [사진 정유정 제공]
숫자로 작가 정유정을 나타내 볼 수도 있겠다.
먼저 100(%).
2009년 상금 1억원 세계문학상을 그에게 안긴 『내 심장을 쏴라』를 포함해 '성인용 장편소설'(그의 2007년 등단작은 청소년 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였다) 네 권이 모두 영화로 만들어졌거나 영화 판권이 팔렸다. 영화화 비율 100%. 그의 작품은 영화판에서 알아보고 군침을 흘린다.
119만(부).
그의 전속 출판사 은행나무가 6일 밝힌 네 장편의 합산 판매 부수다. 출간 순서대로 『내 심장을 쏴라』 21만, 『7년의 밤』 50만, 『28』 21만, 『종의 기원』 20만. 설명이 필요할까.
정씨의 소설은 해외에서도 먹힌다. 그의 최근 장편 『종의 기원』은 8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8만(달러).
근친 살해 사이코 패스의 내면을 실감나게 그린 최근작 『종의 기원』의 이탈리아 판권 액수다. 1달러를 1000원으로 잡아도 8000만원이다. 한국 문학작품이 이 정도 가격에 판권 수출된 전례가 있었나 싶다. 그의 작품은 해외에서도 먹힌다.
그의 성공비결은 뭘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시대마다 시대정신, 당대에는 당대의 예술장르가 있듯 문학시장에서는 정유정 소설이 21세기 독서 대중의 갈증에 부응했다고. 명분과 대의에 문학이 복무했던 1970·80년대, 파리한 내면이나 감성에 골몰했던 90년대 이후 강렬하고 힘 있는 장편 서사가 아쉬운 길목에 정유정은 마춤하게 등장했던 거다. 아니면 읽히는 장편이 대접받는 문단의 새로운 풍토 조성에 정유정이 기여했거나.
정씨는 자신의 거침 없는 소설 만큼이나 솔직, 소탈했다. 소주·맥주를 절발씩 섞은 폭탄주를 즐긴다.
4월 중순 광주광역시 정씨의 자택을 찾아가는 날은 볕이 화창했다. 그는 화통했다. 자기 소설 만큼이나. 보통의 고양이를 뛰어넘는, 삵이라는 동물 몸집이 저 정도겠거니 여겨지는 '거대한' 고양이 두 마리가 아파트 거실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중 큰 놈은 여덟 살 먹은 수컷인데 애정표현을 과격하게 한다고 했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슬그머니 다가와 정씨 등에 피가 날 정도로 발톱을 깊게 박는다나.
"피학증 있으세요?"
정씨가 요즘 빠진 나와 세계 표지
[출처: 중앙일보] [작가의 요즘 이 책] 강렬한 서사, 힘 있는 문장…남성 작가 능가하는 소설 여전사씨가 요즘 빠진 나와 세계 표지
"몰랐는데 그런 것 같아요.(웃음) 그전까지는 고양이를 키운 적이 없는데 길 잃고 숲에서 울고 있는 새끼를 데려다 젖병으로 우유 먹여 기르면서 고양이를 사랑하게 됐어요. 덩치가 커졌다고 남편이 나보고 '고양이 확대범'이래요."
정씨는 반려묘를 키우며 장편 『28』을 구상하게 됐다고 했다. 『28』은 개도 전염되는 인수공통전염병에 의해 '화양'이라는 가상도시가 처절하게 파괴되는 내용의 재난소설이다. 치명적인 전염병 전파자로 확인되자 수백, 수천 마리의 반려견이 소설 속에서 살처분된다.
정씨는 말했다.
"어미 잃은 고양이들을 데려와 키우고 사랑하며, 얘네들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얘네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반대로 내가 먼저 간다면 얘들은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더라구요."
1시간 반 가량 진빠지는 문답 촬영이 끝나자 정씨는 그냥 올라가게 할 수 없다며 단골 횟집으로 취재진을 이끌었다. '낙지탕탕이'라는 목포식 산낙지 안주에 맥주·소주 비율이 반반인 돗수 높은 폭탄주를 권하고는 자신도 호기롭게 즐겼다. 주량이 기자보다 셀 듯했다.
정씨는 "매일 한 시간 수영한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요즘 가장 큰 낙"이라고 했다. 원래는 수영을 못 했다. 『종의 기원』의 사이코 패스 주인공을 전직 수영선수로 설정하면서 실감나게 쓰기 위해 배운 게 수영 매니어로 발전한 거다. 반려 동물이든 수영이든 확실하게 대상을 장악한 다음에라야 소설을 쓰는 게 스타 작가 정유정의 비결 아닌 비결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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