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윤동주 평전》 최초 발간한 송우혜 작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88년 《윤동주 평전》을 발간한 송우혜 작가를 만났다. 그의 저서는 현재까지도 윤동주 연구에 있어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평소 독립운동사를 연구했던 송 작가는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친우(親友)인 송몽규의 조카다. 윤동주와 학창 시절을 함께했던 고(故) 문익환 목사와 친분이 있었던 송 작가는 “평소 문 목사의 어머니인 김신묵 권사에게서 윤동주와 명동촌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윤동주에 빠져들었고, 결국 ‘평전’까지 냈다. 그는 1990년 송몽규의 묘지를 처음 찾아내기도 했다. 시서저널은 9월26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근처에서 송 작가를 만났다. 그는 “암흑의 시대에 윤동주라는 시인이 있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말했다.
윤동주 시인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윤동주를 폄훼하는 움직임이 상당했다. ‘윤동주가 무슨 독립운동가·저항시인이냐, 평생 공부만 하던 사람이 재수 없이 걸려서 옥사(獄死)한 거다’라는 식이었다. 그 당시 내가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한 글을 한 잡지에 실었다. 그랬더니 그걸 보고 ‘열음사’라는 출판사에서 윤동주 평전을 쓰자고 제안해 왔다. 처음엔 내가 무슨 시인 평전을 쓰냐 해서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 더 있으면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없어지고 그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 같았다. 그래서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에선 ‘윤동주가 무슨 저항시인이냐, 순수했던 청년이다’라는 얘기가 있다. 윤동주가 ‘중국 애국시인’으로 돼 있기도 하다. 조선족의 정체성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내면적 욕구 때문이라고 본다. 내가 만나고 친해진 조선족들은 한국 사람들 흉을 본다. 우리는 다 ‘모택동’ ‘북경’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마오쩌둥’ ‘베이징’이라고 하는 거 보면 정말 웃긴다고. 그 흉이 내 가슴을 치더라. 그 사람들은 ‘우린 여기서 중국인으로 살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국말로 말하며 산다’고 강조한다. 그와 연결된 맥락으로 시 《별 헤는 밤》에서도 윤동주가 ‘패,경,옥’이라고 적었다. 중국어 발음이 전혀 없다. 본질 자체를 보면 정말 조선인 중 조선인인데, 그런 역사까지 감안하면 참 착잡하더라.”
“1970년대 윤동주 폄훼 움직임 있어”
윤동주가 중국 시인으로 편입되는 듯한 느낌도 있다.
“시대적인 맥락이 있다. 일본이 송몽규를 비롯한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을 속속 잡아들였을 때, 결국 징역을 살게 하지 못하게 한 게 이때 이들이 만주에서 살던 만주 국적의 국민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만주 국민이기 때문에 일본법으로 처벌할 수 없어 풀어준 거다. 그때 만주국 국민으로 취급을 받았으니 지금 중국 쪽에서 주장하는 건 어찌 보면 그런 사실들과 맞닿아 그럴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송몽규 묘소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때 찾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하던데.
“동산(東山)에 있는 중앙교회 묘지였는데, 그 집안 분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으로 같은 집안 식구가 죽어도 같은 데 묻지 않았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사망한 순서대로 묻었다. 어쨌든 현지 학교 조직 등을 통해 무덤을 찾아 나섰는데 어느 날 명동촌 쪽에 묘비가 하나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막상 가보니 증언들이 제각기 달랐고 날조한 경우도 있어 찾기 힘들었다. 무덤 가운데 한 곳을 파보니 그곳에서 유골을 담은 함이 나왔다. 그 순간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래서 그걸 송몽규 무덤이라고 확정한 거다. 한 가지 의미 있는 건, 당시 죄다 창씨개명하던 때였는데도 비석에 송몽규, 윤동주라고 이름을 새겼다. 당시 유족들의 한(恨)과 저항정신이 배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송몽규는 본인이 윤동주 못지않은 글을 썼던 걸로 묘사된다.
“함께 어울렸던 문익환 목사님 말에 의하면 윤동주는 대기만성형이었다. 당시 윤동주가 송몽규에게 벼르는 게 있었다고 한다. 일종의 열등감. 문 목사에 따르면, 그때 동네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송몽규, 윤동주, 그리고 문 목사 등이었는데 자신은 윤동주에게 열등감 있었고 윤동주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이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올해 개봉한 영화 《동주》에선 윤동주가 송몽규에게 지나치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 것 같아 문인 후배들이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열등감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단어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문 목사가 표현한 ‘열등감’은 진지한 의미라기보단 ‘경쟁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윤동주 시 중 최고로 꼽는 건 무엇인가.
“《서시》가 힘이 있다. 사람을 정화하는 힘이 있어서 난 그걸 참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참회록》도 좋다. 내가 평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참회록》은 폄훼를 많이 당했다. 역사의식의 과잉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생활하고 직결돼 있는 시를 써오지 않았나. 내가 보기에 창씨개명을 한 것과 직결된 시였다. 그렇게 《참회록》을 다시 해석하고 재평가해 보니, 가장 저항성이 강한 시였다. 그러면서 《참회록》은 명시 반열에 올랐다. 그런 면에서 보람을 느낀다.”
“찾지 못한 윤동주 시 더 나와야”
윤동주와 송몽규를 연구하는 데 남은 과제가 있다면.
“일본인들의 자생적인 팬클럽이 있다. 도쿄에도 있고 후쿠오카에도 있는데, 도쿄 분들이 가장 열성적이다. 그런데 체포됐을 때 빼앗긴 자료 등이 혹시 남아 있을 수 있다 해서 자료 찾는다는 전단지를 만들어 여기저기 뿌린다. 나사행 목사님 인터뷰를 보니 윤동주가 자신에게 편지 보낼 때 늘 시를 적어 보냈다고 하더라. 근데 그걸 보관 안 해놔 너무 후회가 된다더라.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시를 적어 보냈을 텐데, 혹시라도 그런 것들도 남아 있는지 더 찾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런 게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윤동주 시 가치를 어느 정도로 평가하나.
“암흑기에 윤동주 시인이 없었다면 더 어두웠을 것이다. 그 시대 일종의 등대처럼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진정한 길을 제시해 준 존재였다고 평가한다. 본인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지금 돌아보면 우리 민족의 격을 올려주고 우리가 좀 더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게 해 준 시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시사저널 2017.10.11 | 14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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