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만난 전 주 민족문화 전승 발전 ‘평생영예칭호’ 수상자 장정일(75세)은 “돌이켜보면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지난 32년은 저에게 참 많은 것들을 선물해줬다. 후회없는 기자인생을 살았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난 1971년, 당시 연변대학 조문계를 졸업하고 지식인 재교육을 받으며 석현진 종이공장에서 사업하던 장정일은 연변일보사 전근령을 받고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변일보》는 주요하게 신화사의 기사를 번역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몇년이 지나서 지방기사가 다루어지기 시작했고 교육, 체육, 리론부가 먼저 설립됐다. 이어 중요뉴스부가 생기면서 기자들의 활약도 커지기 시작했다.
워낙 문학에 흥취를 갖고 있던지라 취재를 하고 기사를 집필하는 과정은 젊은 그에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일 속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기자정신이나 언론사업에 대해 깊은 료해가 없었다. 주로 실천을 통해 하나씩 배워가는 과정이였다. 특히 선배들이 몸소 가르치는 기자정신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는 글 한편이 있다. 바로 작고하신 연변일보사 전직 총편 오태호의 글이다. <소의 코와 꼬리의 해방>이라는 그리 길지 않는 문장 한편이 당시 신문 2면에 실렸는데 충격을 받았다. 형식적으로는 소의 수난을 썼으나 섬세한 관찰력으로 당시 정치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피페해진 농촌과 사람들의 마음을 예리하게 짚어냈다. ‘기자의 눈’이란 무엇이고 기자는 어떤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그때 참 많이 배운 것 같다.”
그는 이어 선배기자인 황순룡 선생에 대해 회억하면서 “50년대에 당시 시대상황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조선어 순결화’에 대한 글을 썼는데 이 글은 단지 언어에 한한 것만이 아닌 민족문화와 령혼을 대표하는 언어의 힘에 대해 피력했다. 글을 쓰고나서 황선생은 비판을 받았지만 진정한 기자정신을 보여준 본보기로 후배들의 마음에 남아있다.”고 말했다.
1984년, 장정일은 부총편으로 발탁되였고 무거운 책임을 안고 사업에 정진했다. ‘목표는 높게 그러나 시작은 작게.’ 그는 모든 일에서 이 같은 생활신조를 지켰다. 신문을 꾸리는 일에서도 례외가 아니였다. 뭐든지 단술에 배를 부릴 수는 없는 법, 하나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 그러나 큰 목표를 바라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부총편의 직책을 맡기 시작한 후로 그는 우선 ‘건국 35주년 문학콩클’을 조직해 《연변일보》 문학작품공모를 시작했으며 그 것이 현재의 ‘해란강 문학상’전신으로 됐다. 또한 《연변일보》 중점작가 모임을 열어 문학교류를 증진하는 동시에 큰 몸살을 앓고 나서 피페해진 문단에 생기를 부여하고 작가들의 창작열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그는 신문의 1면에 발 빠르게 시평란- ‘사색의 여울목’을 설치해 뉴스와 론설이 쌍바퀴로 굴러갈 수 있도록 신문의 평형성을 이뤘다. 또 언론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해 3면에 사회인사 시평 전문란- ‘국자가’를 설치해 론설과 문예성을 결부한 칼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기자에게 제일 고귀한 것은 사회흐름과 호흡을 같이 하며 사회 현상을 잘 짚어내고 좋은 것을 찬양하고 나쁜 것을 탄핵하는 호소력 짙은 글을 써내는 것이다. 그 것이 바로 기자의 자세다.”
그는 자신에게 늘 이렇게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동료 기자나 후배들에게도 이 같은 자대로 요구했다.
“요즘은 매체들이 발빠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따라서 종이매체의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많으나 뉴디미어의 활발한 응용은 매체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일 뿐 그렇다고 종이매체의 작용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내용을 승화하고 질을 추구한다면 언론의 다양한 시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장정일은 이와 같이 말하면서 “시대를 막론하고 대중들이 아름다운 문화에 대한 지향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층 백성들의 삶을 포착하는 기사가 필요하다. 현실을 담아내면서 력사를 쓰는 것이 신문이다.”라고 짚었다.
글·사진 박진화 기자/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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