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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성립 및 문학연구세미나'가 지난 5월 24일 오전, 연변작가협회와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비교문학연구소'의 주최 하에 중국조선족 학계, 문학계, 언론매체 인사 약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변대학교 과학기술청사 8층 제4세미나실에서 성료됐다.
재한조선족문학은 1992년 8월24일 한중수교 전후로 중국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역이주를 하면서 생겨났다고 봐야 한다. 역이주초기, 대부분의 조선족 작가들은 거처를 중국에 두고 한국을 오가면서 보고 느끼고 체험한 것들을 문학작품에 담아냈었다. 여기에는 허련순의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2004)’, 김혁의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2007)’, ‘리혜선의 ‘코리안 드림, 그 방황과 희망의 보고서(2012)’ 등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2010년 전후로, 한국의 비자 개방과 더불어 재한조선족사회가 정착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 작가들도 한국에서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많은 조선족 작가들은 벌써부터 템포 빠르고 복잡 다양한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과 힘겨운 노동속에서 삶의 고뇌를 느끼며 필을 들기 시작했고, 재한조선족 작가 끼리끼리 문학동아리나 친목회 같은 소모임을 갖고 활동해왔다.
그러다가 동북아신문사 사장 이동렬이 재한동포문인협회를 설립을 해서 공식 문학단체가 만들어졌고, 이 단체가 오늘까지 발전해오면서 많은 재한조선족 작가들의 ‘집’이 되고 ‘문학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고향을 떠나 한국이란 특수한 생활환경에서 끈질기게 터전을 닦고 '동포문학'이란 협회지를 7년간 8호를 발간해오면서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나름대로 좋은 사회적 이미지를 심어주고 가꿔 나가고 있다.
현재 한국에 거주 체류하고 있는 중국 조선족은 약 80여만명이 된다. 2018년 1월31일 한국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에 따르면, 중국동포가 710,037명인데, 이중 중국 조선족 재외동포비자(F-4)가 약 30여만명, 방문취업제(H-2) 비자가 약 23만명, 영주권(F-5) 비자가 약 8만여명이며, 한국국적 취득자도 약 10여만명이 된다. 이외에 동거비자(F-1), 유학생 비자, 투자비자 등 다양한 비자들을 발급 받아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해서 체류 거주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의 한국 정착의 역사는 소위 ‘탄원·항거’와 ‘적응·화합’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비자 개방의 빗장을 조금씩 조심스레 열어온 한국 정부와 ‘조상의 나라, 한민족, 한겨례, 동포1세~2세, 민족독립운동가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대한민국에서 ‘살 권리’를 줄기차게 요구해온 재한조선족들의 대립과 협력이 마침내 오늘과 같은 고국에로의 ‘자유왕래’의 길을 열어왔었다.
재한조선족들은 체류과정에서 내국인과의 정체성과 문화 습성 면에서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재 및 단일민족 국가에서 생활해오던 내국인들과 사회주의 체재에서, 그것도 대부분 농경문화권 속에서 생활해오던 재한조선족은 우선 이데올로기와 정체성면에서 충돌을 했다. 그래도 서로가 민족의 동질성을 내세워 화합을 도모해왔다. 그렇지만 재한조선족의 부정적인 농경문화 의식과 일부 불량한 습성 등은 하루 이틀에 버릴 수가 없기에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를테면 쓰레기 무단투기, 고성방가, 나쁜 음주습관, 횡단보도 무단횡단 등이나 마약, 보이스피싱 사기사건 연류, 심지어 살인사건까지 수차 발생하고 있기에 여론과 민심은 늘 싸늘해 있다. 이럴 때마다 재한조선족사회는 더욱 적극적이고 자각적인 행동으로 여론을 순화시키고 내국인들의 부정적인 마음을 돌려세우고 재한조선족사회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자 안간힘을 써왔다.
2010년 전후로, 한국정부는 재외동포비자, 영주권 등의 비자 개방 정책을 실시해 재한조선족사회는 급격히 몸체를 불구며 안정과 번영을 이뤄왔다.
현재 재한조선족들은 우선 장기적이고도 안정적으로 체류 거주할 수 있는 다양한 비자를 소지하고 있다. 한국국적 취득자 외에도 재외동포비자, 방문취업제비자, 영주권, 투자비자 등의 비자소지는 곧 재한조선족들의 삶에 종사 직업면에서 아주 큰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무역업, 여행업, 식당, 가게, 보험, 화장품 판매, 학원 등에 취업하거나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고 있으며, 심지어 대학교나 연구기관 같은 학계나, 변호사 사무실 같은 법조계에도 취업을 하고 있는 현상이 많아지고 있다.
서울 대림동 중앙시장 중심 차이나타운, 건대입구 중국 조선족 양꼬치거리, 가리봉시장 등 조선족 경제 집거지도 형성되면서 지역사회의 경제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거주의식도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에 투자해서 아파트 등을 마련하던 데로부터 이제는 중국의 부동산을 팔아서 한국에 삶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으며, 자녀들을 한국에 데려와서 공부시키는 경향도 늘고 있다.
소비문화도 바뀌고 있다. 돈 벌어 빚을 갚고 자식을 교육하기 위해 아글타글 적금을 해오던 데로부터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누려가며 인생의 행복을 찾으려는 지향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다양한 재한조선족 단체와 신문사의 출현을 도래하는 기폭제가 됐다. 현재 어림잡아 약 100여개의 크고 작은 단체가 한국사회와 재한조선족사회의 맥을 이어 놓으며 순기능 역할을 해오고 있다. 재한동포문인협회도 그중의 하나이다.
재한중국동포 교수, 박사 중심의 '재한동포문학포럼' 발기인 모임이 지난 1월 28일 대림동에 있었다. 오른쪽부터, 최유학 교수, 전월매 교수, 전은주 박사, 최미성 박사과정, 이동렬 동북아신문 대표, 이미옥 박사, 조은경 박사(소설가), 리위 박사과정 등 순이다.
재한동포문인협회는 2012년 8월19일 재한조선족사회 유지인사 20여명의 참여하에 구로구에서 발족됐다.
초대회장 이동렬은 소설가 출신에 연변에 있을 때 중.장편 소설작품집도 여러 부 출간했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 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등을 비롯해 10여 차례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다. 또 2005년 10월부터 동북아신문 편집국장에 취직해서 언론인으로 활동해 오다가 2012년 5월에 이 신문사를 인수 해서 경영을 하다 보니 문인협회 운영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본 협회의 사무실을 동북아신문에 두고 영등포구청 문체부와 동작세무서에 등록해서 ‘고유번호’(사업자등록증)를 발급받았다.
2014년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도서출판 바닷바람' 출판사 허가를 내서 정기 출판사도 운영했다. 동포문학과 조선족 작가, 그리고 중국 작가들의 번역 작품들을 정기적으로 출판하면서 작가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한국문단과 중국 문단과의 친분 관계를 돈독히 맺어갔다.
협회는 사람 먼저의 원칙, 즉 회원들 간의 친목을 우선 강조했다. 고향을 떠나와서 저마다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겪으면서 살고 있는데 상호간에 친목이 없이는 단체의 운영이 불가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호 간에 애정을 가져야 서로가 서로를 부추기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설립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협회는 큰 말썽이 없이 단체의 화목을 도모해 오면서 연변작가협회 회원들을 비롯해 흑룡강성, 료녕성 작가협회 회원들을 받아들여 그 영향력을 점차 키워왔다.
또 매년 ‘동포문학(同胞文學)’지를 1~2회 발행하고 시상을 해왔는데, 이는 재한조선족 작가들의 응집력과 창작 적극성을 부추기는 기폭제가 됐다.
협회는 사무국을 비롯해 각 장르 분과장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들 스스로 한국 유명 문인들을 초청해 특강을 시키고 세미나를 갖는 등 창작의 질적 제고를 위해 해년마다 4회 이상 모임을 갖도록 했다. 또 회원들이 한국문단에 등단하고 중국 문단에 작품을 발표하며 국내외 작가협회에 가입하도록 유능 임원들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나갔다.
협회는 또, 회원들의 사회참여 의식을 키우기 위해 재한동포사회의 여러 활동과 내국인 문인들의 다양한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생산 현장에서 뛰는 경험만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알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역 문학단체인 (사)구로문인협회를 비롯한 여러 문학단체 간의 교류와 네트워크를 강화해 왔고, 서로 오가며 배우고 격려해주는 문화를 형성해 왔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배우고 도움을 주고받았다.
한국에서 우리 작가들은 특수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 똑같은 재한조선족사회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중요했다.
조선족 작가들이 작품을 쓰고 책을 펴내는 것을 보고 적지 않은 내국인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포들도 글을 써요? 책을 내요?’, ‘우리 민족의 글을 쓰고 우리 민족의 말을 하고, 또 이렇게 단란하게 모여서 시도 읊고 노래도 부르며 문학행사를 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정말 찡-해나요, 눈물이 날 것 같네요’하고 감동을 했다.
2009년부터 동북아신문의 주도하에 우리는 거의 해마다 ‘한중지성인과 함께하는 문화교류의 밤’ 행사를 7회째 진행했다. 한중지성인 약 150~250명이 참석하는 문화교류 행사에서 ‘중국동포지성인상’과 ‘고마운 한국인상’들을 시상하면서 작가의 사회적 역할을 찾기 힘썼다.
2015부터는 ‘한중국제문화예술교류대전’과 그림 서예 개인 작품전 등을 6회째 개최해서 한중문화예술인들 간의 교류의 장을 만들어주었다. 우리의 주장은, 디아스포라 삶을 사는 재한조선족 작가는 우선 재한조선족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문화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사회적 의무를 다할 때만이 작품창작과 더불어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협회가 성장하자면 자금이 있어야 하고, 그 자금을 만들 사람이 필요하고, 또 그 자금을 활용할 시간과 작업, 그리고 순수한 봉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동북아신문이 후원자로 나설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됐다.
2001년 6월에 발행이 된 동북아신문은 그동안 나름대로 재한조선족사회의 대변지의 하나로 자리매김해 왔다. 인터넷신문 외에 타블로이드판 24면의 종이신문을 격주간(월 2회)로 무료 발행을 해온다. 재한동포사회에 소식을 전하고 한중간의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고 좋은 뉴스 네트워크 형성을 위해 정진하고 있다.
협회가 설립된 후 동북아신문은 매번 발행 때마다 2~3면의 지면을 활용해 조선족 작가 5~6명의 작품을 발표했고, 인터넷으로는 매달 30~5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인건비와 신문 인쇄비 등을 계산해보면 1년 비용이 한화 2천만 원쯤 든다. 거기에 동포문학 발행 및 시상, 그림전시, ‘한중지성인간의 문화교류의 밤’ 행사 등도 별도로 큰 예산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무척 시간이 드는 작업이다. 그래도 순수 봉사를 7년째 이어오고 있다. 이리하여 회원들은 동북아신문을 통해 수시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장(场)이 마련됐는데, 1년에 어림잡아도 8~900여 편(수) 가까운 다양한 장르의 문학작품이 동북아신문을 통해 빛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회원들의 창작 적극성을 부추기면서 동북아신문을 발판으로 한국문단과 중국 조선족문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데 적극적인 플랫폼을 형성할 수 있었다.
동북아신문은 또 광고주나 지인들과의 인맥에 힘을 입어 400페지 좌우 분량의 ‘동포문학’을 매년 1~2회 발행을 하고 우수작품을 시상해왔다. 특히 법무법인 안민 변호사 사무실의 차홍구 사무국장의 후원과 지지를 받아왔다. 차 국장은 동북아신문과 재한동포문인협회 고문 회장을 맡아 ‘안민문학상’을 설치하고 동포문학의 발행과 시상을 시종 도와주었다.
(사)소정한중문화예술교류협회 이상규 이사장(시인)도 중국 조선족 문학과 민족교육, 그리고 동포문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 이외 가인국제무역 이용섭 대표, 사단법인 ‘한중사랑’ 이상부 이사장, 중국 심천완구회사 양남수 대표 등, 이 사회 한중지성인들이 힘을 보태고 함께 성원을 해주었기에 ‘동포문학’은 오늘까지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독보적으로 자리매김을 해올 수 있다고 본다.
협회가 성장하자면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안 된다. 한국사회에서 재한조선족 개개인들은 우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는 존재이다. 조선족 작가들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러나 작가들 개개인이 조금씩 힘을 보태면 협회가 힘이 생기고 탄력을 받을 수가 있다. 관건은 임원들의 사명감이고 적극성이다.
2017년부터 중반기부터 이동렬 초대회장은 류재순 소설가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본인은 대표직을 맡았다. 협회 내부의 조직 행사는 류회장이 맡아 하고, 대표는 동포문학 작품집을 편집해서 만들고, 자금을 조달하며, 대내외 외교와 큰 행사를 기획하는 등 역할 분담을 했다. 이외 사무국과 시분과, 수필분과, 소설분과, 문체부, 시낭송분회, 홍보부 등의 임원들과 부회장 및 이사들은 각자가 해마다 연초에 계획을 세워 어김없이 이루도록 했다.
류재순 회장은 중국 작가협회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서, 일찍 80년대 조선족 여류작가로 주목을 받아왔고, 그때 벌써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중단편소설작품집을 출판했었다. 오랫동안 지방 문화관에서 사업해온 경험이 있기에 회원들과 어울리면서 단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선뜻 아까운 시간을 내서 회원들의 활동에 참여하고 한국 문학단체와의 네트워크 형성을 위해 애써 왔다. 또 부임 첫해부터 회원들로 하여금 스스로 회원이란 자부심을 갖도록 회비 납부제를 실시해 단체 활동의 기반을 마련하여 대표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변창렬 중견시인은 누가 시키나 안 시키나 밤낮없이 단체 위챗방에 시작품들을 올리고 문학 관련 정보를 전달하며 국내외 신문사나 문학지와 연결해서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보내주곤 했다. 해마다 국내외 여러 상을 수상하고 있는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재한조선족 문학의 '살림꾼'이다.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누구보다 디아스포라 인생의 아픔을 소리높이 외치는 림금철 시인(현임부회장), 조선족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며 재한조선족 시조문학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신현산 시인(현임부회장), 낮으로는 식당에서 일하고 밤으로는 저녁 늦게까지 책을 보면서 줄기차게 개성 있는 시를 써내고 있는 홍연숙 시인, 묵묵히 소설창작으로 문학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강호원·김노 소설가, 한국에 데려와 자식을 공부시키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도 시와 소설창작에 전념하고 있는 곽미란 작가, 묵묵히 ‘성좌문학방’을 이끌어가고 있는 김재연 전임사무국장, 병환에 계신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면서도 협회 사무국 일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방송통신대 공부와 시 수필 창작에 전념하고 있는 김경애 사무국장, 한국 공자학당과 손을 잡고 회원들에게 헌신적으로 시낭송 기법을 배워주면서 협회에 시낭송 열풍을 불러온 방예금 시낭송분과장, 협회 활동에 항상 발 벗고 나서는 박수산 시인, 수필 공부에 전념하며 협회 수필의 질적 제고를 위해 애쓰고 있는 천숙 수필분과장, 문체부를 책임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최미영 분과장, 시 이론을 파고들며 새로운 문학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리춘화 시인, 언제나 빠짐없이 협회 활동에 와서 촬영기자의 역할을 다해온 윤효덕 기자… 이외에도 회원은 아니지만, 장경률 전 연변일보 논설위원, 김철호 시인 등은 항상 재한조선족작가들을 도우려고 애쓰고 있다.
현재 협회에는 회비 납부 정회원이 75명인데, 그중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20명 가까이 된다. 동북아신문의 주도로 한국에서 박사, 교수, 전문직 종사자 위주로 결성된 ‘재한동포문학포럼’ 소속 회원(현재 20명)들이 동북아신문과 흑룡강신문 공동주최로 펼치고 있는 ‘대림칼럼’란에 칼럼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다. 이들은 장차 ‘재한조선족문학창작’ 도약의 신생역량으로 발돋음 할 것으로 기대된다.
필자소개
중국 서란시 출생. 소설가, 언론인. 동북아신문 사장/대표, 재한동포문인협회 초대회장/現대표. 중국 작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월간잡지 中國新聞 차이나위크(한국어판) 편집주간, 도서출판 바닷바람 발행인. 장편소설집 ‘고요한도시’, ‘낙화유수’ 중단편소설집 ‘눈꽃서정’, ‘토양대’ 등 4부. 연변조선족자치주문학상 등 10여 차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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