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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29 :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삶을 건 대답 - 산도르 마라이 <열정>
" "... 할 수 있으면 대답해 주게."
그는 소리 높여 말한다. 마치 대답을 재촉하는 듯 들린다.
"왜 나에게 묻나?"
상대방은 조용히 말한다.
"그렇다는 것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봄이 다가오는 발렌타인 주간의 [북적북적]엔 풋풋한 신간을 들고 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괜히 의미를 부여하면서 까다롭게 굴어 그런지, 이번 주 따라 딱 '이거다!' 싶은 책을 찾아내지 못했네요. 그래서 결국, 언젠가는 꼭 [북적북적]에서 낭독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 늘 미루게 되는, 제 '인생 도서' 중에서 한 권을 큰 맘먹고 뽑아 봤습니다^^
지금까지 북적북적에서 낭독에 '도전'했던 책들 중에서 그렇게 -마땅한 신간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어렵고 소중하게 한 권씩 꺼냈던, 버겁지만 중요한 숙제 같은 책이라면, (저는 [어른 학교 아이 학교]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반 고흐 영혼의 편지], [프라하의 소녀시대],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철학자와 늑대], [책 읽어주는 남자] 정도가 당장 떠오릅니다.
여기 또 한 권 더. 아쉽도록 품에 안고 있다, 감히 내놓습니다.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입니다.
"집은 일종의 위장이었네. 아니면 자네에게는 군복이 위장이었을까? 자네만이 대답할 수 있겠지. 다 지나간 지금, 자네는 사실 삶으로 대답했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자네는 내 친구였나?"
중편이라기엔 긴 편이지만, 장편이라기엔 짧은. 많지 않은 분량 속에 엄청난 예술적, 인간적 에너지가 응축된 이 소설 '열정'을 뭐라고 소개하면 좋을까요.
독일의 저명한 주간지 [디 차이트]는 이 소설이 재출간돼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당시에 이렇게 소개했네요. (한국 단행본 뒷표지에 인쇄돼 있습니다.)
"기적, 커다란 기적! 이백여 쪽 남짓한 이야기의 승리가 이미 고인이 된 거장을 20세기 문학에 선물했다. 우리는 앞으로 토마스 만,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과 나란히 이 거장 산도르 마라이를 거론할 것이다. 이 소설은 르네상스의 서곡이었으며 우리는 늦게나마 이 르네상스의 증인이 되었다."
[북적북적]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겠습니다. [열정]은 소설이라기보다, (한국판 단행본으로) 270쪽짜리 시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읽어보신 가운데 가장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찬 사랑 이야기일 겁니다.
[열정]을 혹 직접 읽어보겠다고 결정하신다면…아마 책장을 넘겨갈수록, 심장을 두드리는 긴장감이 켜켜이 더해가는 것을 몸으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열정]은…2020년의 한국인인 우리가 읽거나 듣기에는 아마도 너무나 고색창연하고, 지나치게 유럽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시대 배경상, 1차 대전 당시 유럽 식민주의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아주 없지 않아 새삼 거슬리는 순간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서 문학사에 영원히 살아있을 걸작입니다.
"어느 날 전쟁이 끝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네. 그리고 기다렸지. 세월이 흐르고, 세계가 다시 한번 불붙었네. 나는 지난번과 같은 화재라는 것을 확신했지.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전쟁이 날뛰어도 억누를 수 없는 물음이 내 영혼 안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네. 다시 수백만의 사람이 죽어갔어. 그러나 이 미친 세상에서도 자네는 41년 전에 해결하지 못한 것을 나와 함께 해결하기 위하여 다른 기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지 않았네. 인간의 본성은 아주 강한 것일세. 그것은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물음에 반드시 대답을 하거나 대답을 받아야만 하네. 그것은 다른 길을 모르네. 자네가 돌아온 것도, 내가 자네를 기다린 것도 다 그 때문일세."
산도르 마라이는 1900년에 지금의 슬로바키아 지역에서 태어난 헝가리 작가로, 2차 대전 후 공산주의 체제의 헝가리를 떠나 망명합니다. 그리고 1989년에 89세로, 캘리포니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망명생활 41년 만이었습니다. 이 책 [열정]도 41년이란 숫자로 시작되거든요. [열정]은 산도르 마라이의 30대와 40대 초반 사이에 쓰여졌으니까, 그가 미리 계획했던 우연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삶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의 작가는 자신이 [열정] 안에 창조해 놓았던 이 세계와 그 안의 그들 세 사람의 시간을 기억했을까, 저는 때때로 궁금해지곤 합니다. 자신이 [열정] 안에서 묘사했던 그런 노인이 되어 있었을까. 자신의 89세에 삶을 놓기 전에, 헨릭과 콘라드와 크리스티나를 기억했을까.
[열정]은 1942년에 첫 출간됐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헝가리에서 아마도 도드라질 수 없었던 이야기라고 짐작합니다. 그 뒤 50년도 더 지난 1998년에 이탈리아에서 재출간되면서, 그때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이름을 영원히 문학사에 올려놓습니다. 카프카, 토마스 만, 무질 같은 거장들의 이름과 마라이를 나란히 놓은 [디 차이트]의 찬탄은 지당한 것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 "콘라드에게서 편지가 왔네."
장군은 편지를 높이 들어 보였다.
"자네도 기억하지?"
"네."
니니가 대답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기억했다.
"그가 이곳 시내에 있다네."
장군은 아주 중요한 비밀이나 되는 듯이 말했다.
"지금 흰 독수리 호텔에 머물고 있는데, 오늘 저녁 이곳에 올 걸세. 그를 데리러 보낼 생각이네. 여기에서 식사할 걸세."
"여기 어디 말인가요?"
니니는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푸른 눈, 생기 넘치는 미소 띤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성에서 손님을 맞지 않은 지가 햇수로 이십 년을 헤아리고 있었다."
[열정]은 41년 만에 찾아오는 친구를 맞기 위해 헝가리의 한 부유한 퇴역 장군이 수십 년째 닫혀 있던 성의 응접실을 활짝 열고, 은둔의 삶에서 걸어 나오는 어느 오후로 시작됩니다. 반가움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는, 반가움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41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친구는, 장군이 이런 은둔의 인생을 살면서, 저택을 걸어 잠그게 한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은둔하는 퇴역 장군 헨릭과 41년 만에 찾아오는 친구 콘라드는 젊은 시절에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눈 영혼의 친구입니다. 둘은 1800년대 말 빈에서 함께 사관학교를 다니고, 장교가 된 뒤에도 사실상 생활을 함께 합니다. 그러다 헨릭이 크리스티나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합니다. 완벽한 나날을 보내던 부유하고 젊은 장교 헨릭은 어느 아침 어떤 충격적인 사건과 순간을 통해서, 자신의 아내와 콘라드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콘라드는 그들을 말없이 떠나고, 그 후 헨릭은 아내 크리스티나와 한마디 말도 더 나누지 않은 채 8년을 지냅니다.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8년을 지낸 뒤 세상을 떠나고, 헨릭은 복수를 꿈꾸며 콘라드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콘라드가, 돌아옵니다. [열정]은 그 41년에 대해, 하룻밤 그들이 나누는 이야깁니다.
뻔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죠? 하지만 저는 [열정]처럼, 그런 뻔한 예상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우정을 맺은 지 4년이 지났을 무렵, 그들은 밖을 향해 벽을 쌓기 시작했으며 자신들만의 비밀을 가졌다. 그들의 관계는 점점 깊어졌고, 더불어 더 격정적이 되어갔다. 소년은 할 수만 있다면 콘라드를 자신이 창조한 최고의 걸작으로 모든 사람에게 내보이고 싶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길까 봐 내심 두려워하고 질투 어린 눈으로 감시했다.
"좀 지나쳐요."
니니(유모)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콘라드가 언젠가는 도련님 곁을 떠날 거예요. 그러면 많은 상처를 받을 수 있어요."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야."
어머니는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시들어가는 아름다움을 응시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마련이야.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안된 일이지. 그런 사람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야." "
헨릭과 열렬한 우정을 나누는 콘라드는 예술가의 영혼을 지녔지만, 몰락 귀족 부모의 기대라는 감옥에 갇힌 가난한 장교입니다. 그리고, 헨릭 몰래, 헨릭의 아내 크리스티나의 연인이 됩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콘라드와 크리스티나죠. 하지만 이 책은, 사실상, 75세 노인이 된 헨릭의 독백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배신당한 남편이자 친구. 불행하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던 두 예술적인 연인의, 돈 많고 잘난 척하는 세속적인 남편 역할에 어느 날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헨릭이 41년 만에 도달한 곳을, 우리가 모두 따라갑니다.
" "그 인간에게서 무엇을 원하세요?"
유모가 물었다.
"진실."
장군은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아니, 모르네."
하인과 하녀들이 꽃을 꽂다 말고 쳐다보는 것에 개의치 않고,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눈을 내리뜨고 하던 일을 기계적으로 계속했다.
"나는 바로 그 진실을 모르네."
"하지만 현실은 알고 계시잖아요."
유모는 날카롭게 말했다.
"현실은 진실이 아닐세."
장군이 대답했다.
"현실은 일부에 지나지 않아. 크리스티나도 진실은 알지 못했어. 콘라드가 알고 있을 걸세. 그래서 지금 그에게서 알아내려는 걸세."
그는 조용히 말했다.
"무엇을 알아내겠다는 말씀인가요?"
"진실."
그는 짧게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인과 하녀들이 홀을 떠나고 두 사람만이 위에 남았을 때, 유모도 팔을 난간에 올려놓았다. 두 사람은 마치 산 위에서 풍경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한때 세 사람이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던 방을 보면서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죽음을 앞둔 크리스티나가 장군님을 찾았어요."
"그래."
장군은 말했다.
"그때 나는 집에 있었네."
"집에 계시면서도 없는 거나 다름없었어요. 여행 떠난 사람처럼 그렇게 멀리 계셨지요. 장군님은 장군님 방에 있었고, 크리스티나는 죽음과 싸우고 있었어요. 동이 틀 무렵 저와 단둘이 있을 때, 장군님을 찾았어요. 오늘 저녁 그 사실을 알고 계시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장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노인답게 점은 양복을 장중하게 차려입은 그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계단을 내려갔다. 홀의 커다란 유리문이 열리고, 하인 뒤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보게, 내가 왔네."
손님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다시 올 것을 한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네."
장군도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격식을 갖추어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헨릭이 콘라드에게 던진 질문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날 밤의 대화 내내 콘라드는 사실상 별 말을 하지 않지만, 헨릭은 답을 찾아갑니다. 아니, 그 답을 들을 사람이 비로소 찾아왔을 때, 비로소 41년 동안 찾아 헤매 온 그 답을 하나하나 내놓습니다.
사랑과 우정, 또는, 사랑하는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맑은 거울 하나를 갖기 원하신다면 이보다 더한 작품은 없을 겁니다. [열정]은 그야말로 지독한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이고, 사랑과 우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인생과 존재에 대해서 지독하게 성찰해 내는 걸작입니다.
이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있는 여주인공은 사실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회상 속에서만 잠시 그림자를 언뜻언뜻 비치며 묘사되죠. 하지만 저는 여주인공이 등장하지도 않는 이 불륜 소설처럼 강력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본 적이 없고요. 여주인공의 존재감이 이토록 강렬하고, 그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존중이 느껴지는 사랑 이야기도 어쩌면 거의 접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선 2001년에 1쇄를 찍은 뒤에 2006년에 11쇄를 찍은, 그 11쇄 버전으로 이 책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사진에서도 당시 표지를 찾아 썼습니다.) 솔 출판사에서 낸 책 표지가 이 소설을 참으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살짝 내려다보듯 바라보는 검은 고수머리 귀부인. 아마도 헨릭의 아내이자 콘라드의 연인이었던 크리스티나의 초상이 있을 뿐, 헨릭도 콘라드도 다른 아무것도 없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이 표지가 얼마나 적절한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번 낭독에서는 헨릭과 콘라드 두 사람의 젊은 시절에 집중했고, 사실상 이 책의 핵심인, 그 밤, 41년 만의 대화는 부러 모두 건너뛰었습니다. (이 글의 앞부분에 등장시킨 헨릭의 독백들은 이 밤의 대화 중 일부입니다.)
낭독을 들어주시고, 혹시 헨릭의 독백이 궁금해지신다면... 지금부터 발췌하는, 콘라드에게 건네는 헨릭의 마지막 질문, 그리고 이 책 내내 사실상 말이 없는 콘라드의 딱 한 마디 대답의, 무서울 만큼 엄청난 무게가 벅차게 가슴을 짓눌러오는 듯한 고통스러울 만큼의 충만감을 꼭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모든 단어가 농밀하게 가득 차 있는 이 걸작의 무게감을 받아들이며 읽어나가다 이 이야기가 결말을 내는 방식 앞에 도착했을 때, '아 이런 것이 바로 문학이 선물하는 축복이었다' 오랜만에 벅찬 기분을 느끼실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게.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이것이 질문일세.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키는 정열의 강도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할 수 있으면 대답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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