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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피해자의 입은 누가 막았나? ①]
시간당 3.4건 발생하는 성폭행 "신고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아"
해바라기센터 "피해당하고도 죄책감 느끼는 피해자…2차피해 우려에 위축"
변호사 "강간죄 좁게 해석하는 형법…가해자 처벌 어려운 사례 많아"
피해자 "마음속에서 떨쳐내기 힘든 죄책감…완전한 치유 없어"
심리학자 "자책하기 쉬운 피해자…위로해주는 사회 분위기 마련해야"
[사진=자료사진/픽사베이]
"왜 8년 동안 참았을까요? 피해자가 더 이상하네요"
위 글은 '한집에 살던 처제를 8년간 90여 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40대' 기사의 댓글이다.
댓글엔 가해자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뤘지만 피해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도 눈에 띄었다. 다년간 성폭행을 당하고 신고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에 동향 2018'에 따르면 2016년 발생한 성범죄는 2만9357건이다. 인구 10만명당 56.8건으로, 하루에 80.4건, 시간당 3.4 꼴로 성범죄가 발생했다. 10년 전인 2007년(1만4000건)에 비하면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이토록 높은 성범죄율에도 불구하고 현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은 실제 성폭행 피해자가 통계보다 더 많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성폭행을 당하고도 신고하지 못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피해자의 심정
성폭력 피해자에게 상담, 의료, 수사·법률, 심리지원을 제공하는 서울해바라기센터 박혜영 부소장은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우려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를 신고하지 못하는 이유로 꼽았다. 성폭행을 당해 극도로 위축돼있는 피해자가 신고하면서 짊어져야 할 부담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박 부소장은 "많은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자책한다"면서 "왜 내가 당했을까, 왜 더 격렬하게 저항하지 못했을까, 왜 막아내지 못했을까 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혼자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겪은 피해자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네 행실에 문제가 있었던 거 아니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무고 여부를 따지다보니 피해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설 정명신 상담지원팀장은 "센터를 찾는 상담자가 인터넷 댓글에 대해 꼭 이야기한다"며 "신고하기 전에 자신과 유사한 사례를 인터넷에 검색했을 때 댓글이 적대적이고 2차피해가 있으면 신고를 주저하게 된다.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마음을 닫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팀장은 "해바라기센터라고 적힌 간판 때문에 방문조차 망설이는 피해자도 있다. 센터에 들어가는 걸 누가 보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다"며 "피해자는 지원기관에 올 때조차 사회적 시선을 두려워한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범죄 사실이 알려질까 겁먹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서울해바라기센터 박혜영 부소장과 정명신 팀장 [사진=윤홍집 기자]
■ 강간죄 성립 좁게 해석한 '최협의설'…"가해자 처벌 어려울 때도"
우리 형법은 강간죄 성립과 관련해 범위를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을 따른다. 형법 제297조는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을 때 강간죄로 규정하고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인해 공포감을 느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거나 수치심에 구조를 요청하지 못하면 사실상 동의한 것과 같다는 셈이다.
이 때문에 동의한 성관계가 아니었음에도 강간은 아닌 법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7 상담 통계 및 상담동향 분석'에 따르면 같은 해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124건 중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혔으나 강간죄로 처벌하지 않은 사례가 54건(43.5%)이었다. 10건 중 4건 이상이 강간죄로 성립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 대검찰청 성폭력 공인전문검사 출신 이승혜 변호사는 "폭행과 협박을 동반하지 않는 강간도 있다"며 "최협의설에 따라 검찰 입장에선 협의없음 처분을 내릴 수 밖에 없고 법원 역시 무죄를 선고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성폭행이 뭔지도 모르는 나이부터 친족에게 성폭행을 당해 의사에 반했다는 정황이 없는 피해자도 있다"며 "그루밍도 대표적인 케이스다. 가해자는 대부분 재판에서 합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한다. 누가 봐도 반인륜적인 사람인데 법적으로 처벌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강간죄 성립에 대해 폭행과 협박이 아니라 비동의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며 "실제로 인권단체 등에서도 법을 개정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 "성폭행당했을 때 기억 선명해…완전히 치유될 순 없어"
지난 3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표한 '2018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의료지원을 받는 성폭력 피해자 중 49%(39명)가 성폭력 피해가 발생하고도 3념 넘게 의료지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 피해가 발생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의료지원을 받는 대상자 역시 27.8%(22명)으로 높게 조사됐다.
7살 때부터 10년간 이복 오빠에게 친족 성폭행을 당했던 A씨는"완벽하게 치유될 순 없는 거 같다"며 "처음 성폭행당했을 때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가끔 성폭행당했던 상황에 대해 꿈을 꾸는데 눈을 뜨면 너무 두렵다"고 토로했다.
A씨 "성폭행을 당하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넌 잘못한 게 없어'였다"면서 "머리로는 나도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지만 마음으론 '정말 잘못한 게 없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피해자가 돼보지 않으면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고 털어놨다.
이어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면서 "나만 말 안하면 될 줄 알아서 평생 피해 사실을 숨길 작정이었다. 나도 내가 성폭행 피해 사실에 대해 말하고 치료 받게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피해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트라우마를 갖는 건 자주 나타나는 사례다.
곽 교수는 "성폭행 피해자가 신고하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며 "인간은 불안한 상황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때문에 현실을 도피하고 잊어버리려 하는 심리가 있다"고 짚었다.
그는 "피해를 당한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데 신고를 하기 위해선 상처를 다시 상기해야 한다"며 "정상적인 사람일수록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하며 자책하기 쉽고 자신이 앞으로 겪어야 할 일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고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신고하지 못한 성폭행 피해자가 많을 수 밖에 없다"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피해 사실에 대해 알리기 부담스러운게 현실. 피해자를 보듬고 위로해주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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