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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봤다. 처음 영국으로 왔던 십여 년 전에는 각 방송사의 ‘다시 보기’ 서비스를 통해서만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 그나마 인터넷이 느리고 안정적이지 않아서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면 볼 수도 없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상전이 벽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드라마로 등극하더니 인기 드높은 한국 콘텐트를 접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하기야 후보로만 올라도 영광이라던 칸영화제에서 감독상 및 최우수 남자배우상을 한국인들이 받는데도 지나친 흥분이나 감격은 없어 보인다.
하여간 다시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개인적으로 저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 가족의 아버지 염씨와 재혼한 초로의 여성이 눈 내리는 창 앞에서 독백처럼 하는 대사였다. 재혼한 남편과 방바닥에 나란히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날도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내용의 대사다. 편안하고 좋다는 이야기겠다.
황혼재혼 늘지만 전체 결혼은 줄어
‘힘이 있다’면 결혼하지 않는 세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염씨
자식들에게 어딘지 이기적인 충고
이 대사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여성이 꾸려 내야 할 생활이 그리 수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 맞은 남편은 병의 후유증으로 신체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뭔가 노동력을 보태 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병구완도 했을 것이다. 근교의 단독주택에 살고 있으니 안팎으로 건사해야 할 살림도 만만찮을 터이다. 본인 자식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 생긴 자식은 셋이나 된다. 남편과 그의 자식들을 위해 차린 상차림을 보면 어마어마한데, 평상시 김치나 동치미 등을 부지런히 다량으로 장만하는 거로 보인다. 말하자면 해내야 하는 노동량이 엄청난 거로 보이는데도 지금의 일상이 예전보다 더 낫다는 것 아닌가.
선데이 칼럼 6/11
지난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2020년 60세 이상 소위 황혼재혼 인구는 9938명으로 2010년의 6349명보다 57% 늘었다고 한다. 반면 전체 결혼 건수는 사상 최저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저 드라마에서도 주된 등장인물 중 젊은데 결혼한 커플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염씨의 자식 셋은 모두 결혼하지 않았는데 염씨는 새로 결혼한 아내가 음식을 가지러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자식들에게 굳이 결혼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힘이 있다면’ 말이다. 본인은 힘이 없기 때문에 아내가 죽고 그리 긴 세월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다시 결혼했다는 주장이다.
노인들이 재혼을 결심하는 이유는 다양하다고 한다. 이혼이든 사별이든 배우자가 없이 노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인 경우 예전처럼 자식 등 가족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줄어들었다. 재혼을 통해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둬서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남녀 모두에게 강하지만, 남성 노인 쪽은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가 크고 여성 노인 쪽은 질병이나 생계유지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크다는 것이다 (이도영 외, ‘재혼 노인이 겪는 어려움과 대처과정에 대한 질적 연구’).
이 드라마에서 염씨 커플의 재혼은 위 연구에 나타난 기대 유형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염씨가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일상생활을 혼자서 독립적으로 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인을 수발할 수 있고 일상 가사를 돌봐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혜를 입으면서도 자식들에게 ‘두 번 결혼해 본 입장에서’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걸 보면 새로 맞은 배우자에 대해서나 새 결혼 생활에 대해 매우 감사하거나 만족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럴 거라면 늙고 병들기 전에 힘을 좀 길러 두지 그랬냐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건사를 하는 방법을 미리 익혔다면 먼저 간 부인도 덜 힘들지 않았을까.
한편, 이 드라마가 한국에서 방영될 당시 시청자들 사이에서 염씨가 사별한 후 꽤 서둘러 재혼했다는 점에 대해 놀라거나 분개하거나 심지어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는 걸 봤다. 이런 반응은 죽은 아내에 대한 감정이 어떻게 그리 빨리 사라져 새 사람을 만났냐는 것일 터이다. 이런 분들에게는 염씨가 그다지 행복해하지 않는 것이 작은 복수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상생활을 못 꾸려 나가는 남성 노인이 어떻게 혼자 살아갈 수 있겠는가. 애정이라기보다는 실용이다. 아내가 없다면 자식들이든 누구든 이를 대신해 줄 수밖에 없다. 노인 재혼이 늘어나는 데는 자식들이 노부모의 부양 부담을 지기 싫어하게 된 것도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으려면 심신이 건강하고 일상생활을 스스로 꾸려갈 수 있어야 한다는 건 젊으나 나이 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방법은 미리 배워 둬야 하고 틈나는 대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힘이 있는 두 사람이라면 힘을 합해 같이 사는 생활도 그리 나쁘지 않지 않겠나. 그래야만 사회도 유지된다. 그러니 자식들에게 하는 염씨의 충고는 역시 어딘지 이기적이다. 물론,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결혼을 강권하는 목소리 큰 어른들이 여전히 많은 현실에서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충고야말로 젊은이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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