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김덕훈 인턴기자 = "병원에서 3개월 남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덜컥 겁도 났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죽음이 눈앞에 성큼 와 있었으니까. 그런데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더라.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의 여유가 생겼달까.
한창 힘들 때는 스스로 생을 끝낼 용기는 없고, 어디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콱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 삶에는 행복도 있었지만 고난이 더 컸어. 신은 왜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서 이런 고난을 주실까, 원망도 했지.
좀 더 살아보니, 내가 죽음을 준비하고 주변에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더는 바랄 게 없겠더라. 예상치 못한 죽음이 산 사람들에게 주는 상처와 슬픔을 숱하게 봐왔기 때문일까. 그런 점에서 차근차근 내 삶을 정리하고 이별을 고할 시간을 선물 받아 감사할 따름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나니, 죽음은 삶의 종착점이 아니라 삶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연명의료는 하고 싶지 않았어. 내가 더는 스스로 말도, 생각도 무엇도 할 수 없을 때, 나를 그저 산 송장으로 세상에 남겨두는 건 나를 위한 일도, 남은 이들을 위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어. 너희가 사랑했던 나는 웃고 떠들고 춤추던 나지, 누워서 숨만 쉬는 몸뚱아리는 아니잖니. 그 돈 아껴서 파티를 준비했다.
장례식은 오늘 임종 파티로 대신하자. 죽어서도 아파트 같은 곳에 있긴 싫어서 납골당 대신 나무를 한 그루 봐놨어. 그 밑에 뿌려줘. 다들 안녕."
<#. 김미정(가명·28)씨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가상해 쓴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죽음의 의미, 연명의료에 대한 입장 등 일부 내용을 반영해 달라고 미리 요청했습니다.>
◇ '좋은 죽음' 요건은…"고통 없고 주변에 민폐 안 끼치는 것"
무병장수(無病長壽), 천수(天壽)를 누리다, 만수무강(萬壽無疆), 백수백복(百壽百福)….
예로부터 전해지는 한자 성어에는 수명에 관한 표현이 많다. 전쟁, 역병 등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재난이 잦다 보니 오래 살고 제 명에 죽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인식이 드러난다. '끝없이 오래 살다'(만수무강)라는 성어가 있을 정도로 옛사람들은 자신과 가족, 존경하는 대상 등의 장수를 기원했다.
과거와 비교해 평균 기대수명은 훨씬 길어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1970년생이 62.3세였던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2020년생 83.5세로 50년간 21.2년 늘었고, 2070년생은 91.2세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 보니 오늘날에는 오래 사는 것 자체는 '좋은 죽음'의 요건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8년 만 40~79세 남녀 1천5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를 보면 63.3%가 '가능한 한 오래 살다 죽는 것'을 좋은 죽음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명 자체보다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고통이 없는 것, 가족 등 주변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는 것 등이 좋은 죽음의 주요 조건으로 꼽힌다. 지난해 발표된 보건복지부의 '2020 노인실태조사'에서도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죽음' '신체·정신적 고통 없는 죽음', '스스로 정리하는 임종', '가족과 함께 맞는 임종'을 원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허대석 서울대 의대 내과학교실 명예교수는 "존엄한 죽음의 공통분모를 뽑아보면 객지에서 갑자기 죽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죽는 것, 고통 없이 편안한 모습으로 죽는 것, 인간적 고통이나 상처를 풀고 가는 죽음, 말년에 남의 수발을 받지 않는 품위 있는 죽음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 마지막 가는 길 품위 지키려…'곡기 끊는' 죽음도
나이 든 사람들은 '벽에 X칠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종종 한다. 알츠하이머(치매)나 중풍 등 각종 중증질환으로 의식이 온전하지 못하고, 혼자 음식을 섭취하거나 대·소변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신체기능이 떨어진 채 목숨만 붙어 있는 모습에서 자신의 존엄이나 품위를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로 연명의료를 받으며 생명만 유지하는 시간을 원하는 사람은 드물다.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서도 85.6%가 연명의료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46%는 '매우 반대'였다. 이는 지역이나 성별, 연령대, 교육·소득 수준 등 요인과 무관하게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경향이다.
기대수명은 길어지지만 건강수명(기대수명에서 질병이나 부상으로 고통받은 기간을 뺀 숫자)과의 격차가 짧지 않아 노년기에 대한 우려는 커진다. 2020년생 기준 한국인의 건강수명은 66.3세로 기대수명(83.5세)보다 17.2년 짧다. 생애의 20%에 달하는 기간을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니어링처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곡기를 끊을 수도 있지만, 노쇠나 질병의 결과 자연스럽게 식욕이 사라지고 음식 섭취가 어려워졌을 때 튜브로 유동식을 투입하는 등 인위적인 영양 공급조치를 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렇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오히려 고통이 덜하다고 한다.
박중철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곡기를 끊으면 자연스럽게 탈수가 이뤄지고, 그 결과 피가 산성으로 변하면서 통증이 없어지고 오히려 행복감이 생긴다"며 "이전까지 심한 통증에 시달렸더라도 임종 과정에서는 고통이 없도록 인간의 몸이 세팅돼 있는데 의학이 여기에 개입해 피를 교정하고 영양을 공급하면 자연스럽게 죽는 과정이 어그러진다"고 말했다.
◇ 죽음까지 여정 함께하는 호스피스…현실적 제약도
그러나 이런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기력이 떨어져 거동이 어려우면 최소한의 일상생활을 도와줄 이가 필요하지만, 자녀들이 생업 등으로 간병이 어려우면 결국 요양시설로 들어가곤 한다. 병세가 악화하면 차분히 임종 과정으로 진입하기보다 응급실로 실려 가 연명의료를 받는 경우도 많다.
의학적 치료로도 회복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에게는 호스피스가 하나의 대안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 의료행위의 목적이 '치료하고 살리는 것'이라면 호스피스는 '죽음에 이르는 길을 함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머지않은 미래에 죽음이 예상되는 환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신체·정신적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삶의 질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 호스피스의 역할이다.
이 때문에 호스피스에서는 질환 치료가 아니라 통증과 증상을 완화해 환자를 편안한 상태로 만드는 의료행위가 이뤄진다. 아울러 당사자와 가족이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묵은 갈등이나 응어리를 풀고, 차분히 죽음을 준비하도록 심리적·영적 측면으로도 지원한다.
국립암센터 중앙호스피스센터에 따르면 호스피스 서비스 만족도는 매년 90%대를 유지할 정도로 높은 편이다. 그러나 국내 인프라는 충분하지 않다는 게 의료계의 평가다.
일단 호스피스 이용 가능 대상 폭이 좁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현재 법적으로 호스피스 대상이 되는 질병은 암·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에이즈)·만성 폐쇄성 호흡기질환·만성 간경화·만성 호흡부전 5가지로 제한된다. 호스피스 전문기관 입원은 말기암만 가능하며, 의료팀이 가정으로 찾아와 환자를 돌보는 가정형 호스피스는 나머지 질환도 이용할 수 있다.
2022년 5월 기준으로 입원형 호스피스를 운영하는 기관은 전국 88곳, 병상 수는 1천478개에 불과하다. 입원형은 통증 등 신체적 고통이 발생하면 즉각 조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가장 선호하는 유형이지만 병상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문턱이 높은 편이다.
2020년 암 사망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23%, 호스피스 대상 5개 질환 사망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21.3%다. 영국 말기암 환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이 90%, 미국이 50%인 것과 비교하면 낮은 수준이다.
김명희 국가생명윤리정책원장은 "영국이나 미국은 호스피스가 한국처럼 의료기관이 아니라 자선기관 성격이어서 진입장벽 자체가 다르다"며 "호스피스는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을 날을 앞둬 의료적 의미가 없는 환자의 통증 관리와 스트레스 해소가 관건인데, 이를 꼭 의료기관이 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의료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잘 정리하느냐의 문제"라며 "삶을 어떤 시각으로 돌아볼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을 어떻게 줄일지, 가족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 등이 중심이지 호스피스 병동에 꼭 입원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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