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김덕훈 인턴기자 = "인간은 이 세상을 잠시 스쳐 가는 나그네라고 생각합니다. 사는 동안 최대한 욕심을 버리고, 서로 격려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빈손으로 가야만 하는 인간은 경쟁을 통한 끝없는 탐욕의 삶에 지칩니다. 그러다 나그네로서 가야만 하는 길, 영원한 안식처로 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죽음은 잠을 자다가, 아니면 일정한 시간에 평안하게 고통 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병에 걸려 임종 과정에 이른다면 연명의료를 통해 생존 상태를 유지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온전할 때 이런 의사를 기록으로 남기려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이미 등록했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삶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영원하지도 않을 세상, 고통을 받는 것보다 빨리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아울러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안락사나 존엄사의 조기 도입이 필요하고, 적극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박영우(가명·64)씨가 보내온 글입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 스스로 원하는 죽음의 형태, 연명의료 의향 등 일부 내용을 포함해 달라고 미리 요청했습니다.>
◇ 약물투여 방식 국내선 불법…연명의료 결정제도 4년 전 도입
지난 3월, '세기의 미남'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이 향후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화제가 됐다. 뇌졸중을 앓은 그는 안락사를 법으로 허용하는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으며, 향후 건강이 더 악화하면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락사를 실행하겠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안락사 법제화와 관련한 각국 동향이나 유명인사의 안락사 사례 등은 의료·생명 윤리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늘 대중의 관심사가 된다. 2018년 104세가 된 호주의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스위스에서 약물을 주입하는 방식의 안락사를 통해 사망했을 때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국내에서는 의사가 치사량 약물을 직접 주입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네덜란드, 벨기에는 합법)와 약물 처방만 하고 투여는 환자 의사에 맡기는 '의사조력자살'(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 유럽 여러 국가, 오리건 등 미국 일부 주, 캐나다 등은 합법)은 불법이다.
다만 회복 가능성이 없고 사망이 임박한 환자에만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유보) 중단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제도는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일본, 대만 등 많은 국가에서 먼저 도입됐다. 흔히 의사조력 자살과 묶여 '존엄사'로 불리지만 국내법상 명칭은 '연명의료 결정'이며, 존엄사보다는 가치중립적인 이 용어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무의미한 연명의료에 따른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덜어줄 법적 근거가 비로소 마련된 셈이지만, 회복 가능성 없이 수일 내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임종 과정 환자'에게만 연명의료 중단 등을 할 수 있도록 제한한 탓에 제도 시행 이후 적잖은 문제점이 노출됐다.
◇ 사망 임박한 '임종과정 환자'로 제한…외국은 식물인간도 허용
연명의료 결정제도는 2009년 대법원 판결로 식물인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를 떼고 연명의료를 중단한 뒤 사망한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탄생했다.
이 제도는 환자가 건강했을 때 등록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질병 말기에 이르러 작성하는 연명의료계획서, 평소 환자가 밝힌 소신 등을 근거로 연명의료 거부 의사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존중되는 국면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조건적 생명 유지보다 환자의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고민할 계기를 제공한 것도 긍정적 측면으로 꼽힌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연명의료 결정 대상 폭이 외국에 비해 좁고 요건도 까다로워 실제로 제도의 도움을 받기란 쉽지 않다는 게 의료계의 지적이다.
이는 관련법 제정 당시 '생명 경시' 논란을 피하려다 보니 연명의료 결정 대상을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로 한정해버린 탓이 크다. 임종 과정의 법적 정의는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해 사망이 임박한 상태'인데, 이를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호흡곤란으로 입원한 70대 환자가 있었다. 20년 전 결핵에 걸렸고, 객혈과 폐렴이 반복돼 매년 두세 차례 입원치료를 받은 환자였다. 호흡부전 위험이 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치료받다 상태가 호전돼 일반병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내 의식이 희미해지는 등 상태가 다시 악화했다. 담당 의사는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야 하는 이유를 가족들에게 설명했다. 가족들은 환자가 1년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고 더는 고통받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다며 중환자실 치료를 강하게 거부했다. 담당 의사는 환자가 임종 과정에 진입했다고 확신할 수 없어 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환자가 수개월간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라 모두가 지쳤다며 환자 뜻대로 해달라는 입장이다. |
(출처: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의료인을 위한 연명의료결정 사례집』)
담당 의사는 환자가 임종기에 있다고 봐야 하는지, 온전한 정신으로 치료 거부 의사를 밝히는지에 대해 결국 다른 전문의들의 의견을 구해야 했다. 임종 과정인지에 대한 판단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임종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더라도 환자와 가족의 절박한 마음까지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
연명의료 결정제도가 시행되자 일각에서는 '식물인간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에서 해방된다'며 반기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식물인간은 적용 대상이 되기 어렵다. 식물 상태는 의식은 없으나 소화기관 등 장기 기능은 정상인 경우가 많아 영양을 공급하면 생명이 위급해지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명의료 결정제도 도입 계기를 만든 김 할머니도 결과론적으로는 연명의료 중단 대상이 될 수 없다. 식물 상태였던 김 할머니는 대법원 판결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뒤에도 예상과 달리 201일이 지나서야 사망했는데, 이런 경우를 '사망이 임박한' 임종기로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허대석 서울대 의대 내과학교실 명예교수는 "정상인 뇌파가 100이라 한다면 식물 상태는 50, 뇌사는 0 수준으로 볼 수 있는데 현행법상으로는 뇌사도 장기기증을 하는 경우에만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하다"며 "현재 국내에서 식물인간 상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더라도 법 적용을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이나 영국, 대만 등은 임종 과정에 들어선 환자뿐 아니라 지속적 식물 상태이거나 알츠하이머가 심각한 수준에 이른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도 엄격한 조건하에서 허용하고 있다.
2018년 연명의료 결정제도 시행 이후 여러 한계가 노출됐지만, 일상에서 일종의 금기였던 죽음 문제를 미리 고민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김명희 국가생명윤리정책원장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성인이 건강할 때 쓰는 것인데, 의향서를 작성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며 "죽음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필요성 등을 고민하는 시작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임종기에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며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누적 인원은 올 7월 기준 138만5천여명이다. 실제로 연명의료 중단 등이 이행된 사례는 22만8천여건이다.
◇ 의사조력자살 법안 계기 관련 논의 활성화 기대…부작용 우려도
인구 고령화로 웰다잉(well-dying·좋은 죽음)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연명의료 결정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의사조력 자살을 합법화하자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국회에서 지난 6월 발의된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은 임종 과정에까지는 이르지 않은 말기환자도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경우 의사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생을 끝낼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다.
형법상 자살방조죄의 예외를 두는 법안이어서 윤리적 논란 소지가 크고 입법 가능성도 불투명하지만, 갈수록 노년기가 길어지는 상황에서 삶의 질에 대한 우려, 그와 관련한 의료·복지제도 개선 필요성 등에 관한 논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안락사, 의사조력 자살 등 의료적 수단은 고령화 사회 대응에서 지엽적 사안이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인들에게 죽음을 사실상 종용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호스피스 등 '좋은 죽음'을 위한 인프라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김명희 원장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시는 어르신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자식들에게 부담되기 싫어서'라고 답하는 분들이 대다수"라며 "자녀들 키우느라 노년 준비도 못 한 분들이 부지기수인 상황에서 의사조력 자살을 하라고 하면 자녀 도움을 못 받는 노인들은 다 죽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남 웰다잉플래너는 "웰다잉의 목표는 자연사이고, 안락사나 조력사를 합법화하기에 앞서 호스피스나 완화의료와 같은 완충지대가 제대로 운영되는지를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며 "완충지대 없이 입법이 이뤄지면 어르신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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