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funE | 김지혜 기자] 장률 감독은 '필름시대사랑'(감독 장률, 제작 률필름)의 VIP 시사회에서 "이상한 영화 한 편이 나온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십시오"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명세, 정지영, 윤종빈, 박정범 감독을 비롯해 신민아, 강동원, 김호정 등의 배우들은 영화를 보고 난 뒤 감독에게 힘찬 박수를 보냈다. 다소 낯설지만 흥미로운 결과물에 대한 환호였다.
'필름시대사랑'은 보기에 따라서는 어렵게 다가올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개봉을 앞두고 만난 장률 감독은 '이상한 영화'일 수 있지만, '어려운 영화'는 아니라고 바로잡았다.
이 작품의 시작은 '서울노인영화제'였다. 노인과 영화에 대한 주제로 개막작 연출을 의뢰받은 장률 감독은 10여 분 내외의 단편 영화를 계획하고 박해일, 문소리, 한예리를 캐스팅했다. 그리고 총 3회차의 촬영을 마쳤다.
"이상하게 며칠간 잠이 오질 않았어요. 뭔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찝찝한 마음이랄까요. 게다가 이야기의 주 무대였던 병원이 우리 촬영을 마지막으로 철거된다고 들었어요. 우리가 철수한 다음 그 공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했어요. 사실 이건 영화를 찍을 때마다 들었던 궁금증이기도 했어요. 감독과 배우의 감정을 투영했던 그 공간에 사람이 빠지고 나면 뭐가 남을까 이런 물음표가 작품마다 생기더군요. 근데 이번엔 그게 유독 심했어요"
감독의 머릿속을 원혼처럼 떠돌았던 그 잔상이 문제였다. 결국 장률 감독은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영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필름시대사랑'의 이상한 여정이 시작됐다.
◆ 정신병원과 노인에 투영된 장률의 영화와 공간
단편으로 시작해 장편으로 확장된 '필름시대사랑'은 1장 사랑, 2장 필름, 3장 그들, 4장 또 사랑까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영화는 필름과 디지털, 색채와 흑백, 유성과 무성, 내러티브와 비내러티브 등 상반된 방식의 스타일로 전개된다.
손녀(한예리)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안성기)를 면회 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노인은 흠모하고 있던 간호사(문소리)에게 공들여 깎은 사과를 건넨다. 하지만 간호사를 여러 차례 거절한다. 화가 난 노인은 병원에서 간호사와 난데없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쫓고 쫓기던 두 사람이 가까워지던 찰나 '컷' 하는 소리가 스크린을 채운다.
이것은 영화 속 영화의 한 장면이다. 그리고 이 현장을 지켜보던 조명부 퍼스트는 감독에게 대뜸 "감독님은 사랑을 믿으세요?", "영화 이렇게 찍으면 사랑을 모욕하는 거예요"라고 반기를 든다.
장률의 영화에선 늘 공간이 중요한 요소였다. 중경, 이리, 경주 같은 도시 자체가 스토리텔링이 되고 인물들은 그 공간 안에서 복잡미묘한 감정을 주고받았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 무대를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으로 한정시켰다.
"한국에 정착한 지 3년 반 정도 됐어요. 영화를 만들고, 영화에 관한 강의를 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위주로만 교류해 왔죠. 제가 살던 중국에서 영화라는 건 아주 작은 요소였는데 한국에서의 제 모든 생활은 영화와 연관된 거예요. 이게 정상인 건가, 어떨 땐 내가 병이 걸린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영화 현장에 반기를 드는 조명부 퍼스트를 감독의 분신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장률 감독은 촬영 이후 남겨진 공간에 대한 잔상만큼이나 현장 스태프들의 수렴하지 못했던 의견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고 했다.
영화라는 건 감정을 다루는 예술인데 감독이 스태프들의 다양한 감정을 아우르지 못한 채 짓밟는 경우가 많다고.
"배우, 감독, 조명, 촬영 등 영화에 참여하는 스태프마다 작품을 해석하는 시각이나 방식이 다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영화시스템의 권력 구조 아래에서는 결국엔 감독 생각으로 영화가 만들어져요.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의견과 시각이 사라져야 하나?'. '사라졌다고 해도 과연 진짜 사라진 걸까?'. 이런 생각을 자주 했어요. 물론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현장에서는 제 식대로 영화를 찍어왔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생각이 많고 예민해요. 그런 것들을 현장에서 모두 반영할 수는 없지만, 촬영이 끝나고 나서라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감독이라는 사람은"
장률 감독은 영화 현장에서 불가피하게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는 감독의 숙명을 잘 알고 있다. 조명부 퍼스트의 반란은 감독의 자기 반성의 시각이 투영된 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 장률의 필름 시대 그리고 배우의 필름 시대
'필름시대사랑'은 장률 감독의 필름에 대한 애정시다. 2000년 '11살'로 데뷔해 '두만강'(2009) 때까지 35mm으로 영화를 찍어온 그는 명백히 필름 시대의 감독이다. 필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장률 감독은 2장 '필름'을 1장 '사랑'과 똑같은 공간에서 인물은 빼고 음향만 채워 완성했다.
가장 난해하게 느껴지는 장이었다고 하자 "이번 영화에서 가장 수월한 챕터"라고 답했다. 장률 감독은 "영화는 어떤 이야기 틀 안에서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것보다 정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겐 오히려 이야기를 정교하게 짜고, 대사를 만들어 내는 게 더 어렵다. 그런 빈 공간에서 소리만 존재하고 그게 하나의 기억이 되고..꾸밈이 없지 않나. 실제 우리의 삶도 이야기가 부재한 경우가 많다"고 부연했다.
게다가 2장은 디지털이었던 1장과 다르게 16mm 필름으로 촬영했다. 거친 질감이 스크린에 도드라지지만 오묘하게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진다.
"디지털, 물론 편리하죠. 그 누구도 영화제 접근하기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고요. 그렇다고 필름의 정서라는 게 없어질까요? 어떤 정서는 필름으로 담아야 맞아요. 질감이 전혀 다르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필름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주류로 돌아오지는 못한다 해도 사람들이 필름을 그리워한다면 돌아올 것으로 생각해요"
장률 감독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필름의 속성이 좋다고 했다. 그는 "디지털은 10년, 100년이 지나도 늙지 않아요. 그런데 늙지 않는다는 건 공포스러운 거예요. 필름도 오래되면 스크린에 비가 내리잖아요. 사람도 사랑도 그래요. 시간이 흐르면 감정도 변하죠. 그런데 이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이 영화에 출연한 안성기, 박해일, 문소리, 한예리 역시 필름 시대에서 디지털로 넘어온 배우들이다. 3장의 '그들'을 배우들의 필름 영화로 채웠다. 기존의 대사가 아닌 자막을 통해 새로운 대사를 입히는 식으로 영화와 연결된 내러티브를 만들었다.
"과거 이 배우들을 담았던 필름을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과 지금의 디지털을 연결하면 어떤 화학반응이 나올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배우들의 대표작이면서 필름으로 촬영된 '화려한 휴가', '살인의 추억', '박하사탕', '귀향'을 각 감독에게 허락을 받아 새롭게 대사를 입혀봤어요"
◆ "사랑을 믿으세요"…"필름을 믿나요"
필름통을 훔쳐 현장을 빠져나온 조명부 퍼스트는 다시금 어떤 노인과 마주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랑'을 떠올린다. 왜 조명부 퍼스트는 영화를 찍다 말고 난데없는 사랑 타령을 한 것일까. 모든 관객이 이 영화를 보면서 끝날 때까지 품을 수밖에 없는 의문이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은 영화(필름)로 치환될 수 있을까. 언제나 그러했듯 장률 감독은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죠"라며 해석을 관객 각자의 것으로 남겨두었다.
이 영화의 가제는 '필름시대의 사랑'이었다. 조사 '~의'가 빠진 것은 감독의 의도가 반영될 결과다. 장률 감독은 "'~의'를 빼면 범위나 의미가 넓어질 것 같았어요. 필름, 사랑, 시대 이 세 가지를 각각의 개념으로도 볼 수 있고요"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필름의 시대, 필름에 대한 사랑, 필름시대의 사랑 모두를 아우르고 싶었는지 모른다.
재중동포인 장률 감독은 지난 2012년 한국에 정착했다. 3년째 신촌의 한 대학(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영화학 강의를 하고 있으며 상암동에 거주하고 있다. 여가 시간에 집 인근에 위치한 영상자료원에서 고전 영화 보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일상이 영화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차기작을 묻는 질문에 "영화는 늘 계획 없이 우연히 찍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친한 후배이자 절친인 양익준, 박정범, 윤종빈 감독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의 추진 여부를 묻자 "3년 전에 이야기가 나온 건데...언젠가는 써야죠. 그런데 감독들이 주인공인 영화라 투자가 쉽게 될까 싶어요. 그 친구들이 십시일반 도와주겠죠?"라고 넉살 좋게 말했다.
장률 감독은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그게 어디 저만의 어려움이겠어요. 투자 문제는 천만 감독도 쉽지 않을 거예요. 수월과 덜 수월의 차이일 뿐이죠"라고 했다.
그의 말투에선 달관과 무소유의 내공이 느껴진다. 영화도 그를 닮았다. 아리송하고 아련하다. 충무로의 시네아스트 장률 감독의 이상한 영화가 또 보고 싶다.
ebada@sbs.co.kr
<사진 =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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