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살인은 십자가 아래서, 즉 신의 발밑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했다.” 데뷔작 <추격자>가 개봉하고 난 뒤 열렸던 특별 시사회에서 나홍진 감독이 “영화에 등장하는 기독교적인 요소들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한 관객의 질문에 대해 내놓은 대답이다. 그의 말을 빌려 비교하자면 데뷔작 <추격자>와 두 번째 영화 <황해>는 신의 발밑에서 가해자(<추격자>의 지영민(하정우), <황해>의 면가(김윤석)와 구남(하정우))가 벌인 폭력과 살인으로 긴장감을 구축해 일직선으로 내달린 장르영화였다. 두 영화 속 인물의 목표와 욕망 또한 분명했다. 중호(김윤석)는 연쇄살인범 영민을 잡으려고 하고, 영민은 그의 추격을 필사적으로 따돌리려고 한다(<추격자>). 조선족 구남은 빚을 갚고, 한국에 일하러 간 아내를 만나기 위해 청부 살인 제안을 받아들인다. 면가는 살인자 누명을 쓴 채로 도망자 신세가 된 구남을 죽이기 위해 그를 쫓는다(<황해>). 하지만 나홍진 감독의 신작 <곡성>은 피해자가 그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체가 불분명한 폭력(혹은 악)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앞의 두편과 여러모로 다른 작품이다.
전남 곡성. 살인, 화재, 자살 등 온갖 사건이 연달아 터진다. 희생자들의 공통 증상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는 사실이다. 또, 마을의 한 남자는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팬티만 달랑 걸친 일본 노인(구니무라 준)이 산짐승의 내장을 파먹는 걸 우연히 목격하고는 기겁한다. 여러 사건사고 때문에 마을은 뒤숭숭해진다. 버섯을 잘못 먹어 두드러기가 난 것이라느니, 외지인(일본 노인)이 마을에 나타나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등 소문들이 무성하다. 자살로 죽은 여자의 집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 종구(곽도원)는 사건을 목격했다는 여자 무명(천우희)을 만난다. 무명은 “일본 노인이 귀신인데, 그놈이 자꾸 (사람을) 보는 건 피를 말려 죽이려는 목적”이라고 종구에게 귀띔해준다. 그때 종구의 딸 효진(김환희)의 몸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한다. 종구는 동료 경찰 성복, 그의 조카이자 부제인 이삼과 함께 일본 노인을 찾아가 마을을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경고하고, 딸을 치료하기 위해 무당 일광(황정민)을 부른다.
선과 악의 구도가 분명한 <추격자> <황해>와 달리 나홍진 감독이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곡성>은 악의 정체가 불분명하다. ‘슬피 우는 소리’(곡성, 哭聲)라는 뜻을 가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피해자의 곡소리는 영화 내내 끊이질 않는다. 반대로 가해자는 이야기의 전면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종구가 일본 노인을 찾아가는 것도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거나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외지인이 마을에 오고나서 뒤숭숭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의심하던 중, 역시 정체가 불분명한 무명의 확인되지 않은 말을 듣고 용의자로 확신한 것이다. 마을에 도는 소문과 그 소문으로 인한 사람들의 의심이 서스펜스를 겹겹이 구축하며 서사를 힘껏 끌고 간다. 히치콕이 맥거핀으로 관객을 신나게 낚듯이 말이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이라는 영화를 만들게 된 건 “피해자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론 시사회가 끝난 뒤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나홍진 감독은 “피해자가 어떤 이유 때문에 피해를 입는 건가. 범죄자를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게 이유일 수는 없지 않나. 그 원인을 찾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현실에 국한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외지인과의 왕래가 적은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적나라하게 펼쳐낸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스타일은 다르지만 샘 페킨파의 <어둠의 표적>(1971)이나 임권택 감독의 <안개마을>(1982) 같은 작품이 떠오른다. 또, 그보다 더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가 폭력의 근원을 찾는 영화라는 점에서 미하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2009)이 연상되기도 한다. <하얀 리본>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들을 통해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는 폭력의 인류사를 조망한 작품이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곡성>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인용되는 누가복음 24장, 37∼39절은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는 대목인데, 감독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이해하는 데 힌트가 되어준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것도 그래서다. 이 영화는 앞에서 짧게 언급한 대로 폭력과 살인의 근원이 현실에 없다면 그건 신의 장난이라고 볼 수 있고 완전한 선도, 악도 없으니 선이든 악이든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쉽사리 믿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다(자세한 설명은 이후 이어지는 나홍진 감독 인터뷰에서 확인할 것).
자세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오컬트 장르로 전환되는 중반부부터 영화는 좀 더 직접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대체 초월적인 존재(혹은 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실제로 신은 존재하긴 하는 걸까. 현실에서 선과 악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종구가 사건의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의사조차 딸의 증상을 해결하지 못할 때 속상하고 답답한 ‘경찰’ 종구는 무당(무속 신앙), 부제(부제품을 받은 성직자)와 신부로 통칭되는 가톨릭 등 종교에 도움을 구한다. 십자가, 못 박힌 그림, 교회 등 기독교와 관련한 여러 암시가 드문드문 등장했던 <추격자>에 비하면 <곡성>은 종교적인 장치를 서사의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꽤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무속신앙, 가톨릭 등 종교들은 마을에 도사린 안 좋은 기운을 해결하기 위해 저마다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는데, 어떤 종교도 해법을 제시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앞의 질문들에 대해 초월적인 존재와 종교에 대한 감독의 대답인지도 모른다.
이 밖에도 흥미로웠던 점은 한 시퀀스 안에서 현실과 꿈(처럼 보이는 판타지)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여럿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일본 노인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시퀀스 다음에는 항상 종구가 악몽을 꾸다가 깨는 시퀀스로 연결되는 편집, 종구가 무명을 처음 만나 살인사건 목격담을 들을 때 종구가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무명이 사라지고 없는 연출은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나홍진 감독이 던진 미끼를 물고 나면 그 장면들이 웬만한 현실보다 훨씬 실감나게 다가온다. 사람 같은 듯, 사람 같지 않은 동선(컷 분할, 화면에서 인물의 위치)으로 화면에 배치된 무명을 유심히 지켜보면 재미가 배가될 것이다.
<곡성>은 완성도 높은 스릴러영화를 만들었고(<추격자>), 스릴러 장르를 통해 한국 사회의 씁쓸한 이면을 야심만만하게 드러냈던(<황해>) 전작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작품이다. 자신의 장기인 스릴러 문법을 활용해 긴장감을 구축하고, 그것을 맥거핀 삼아 폭력의 근원이 되는 초월적인 어떤 존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간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나홍진 감독의 작가적 야심과 무시무시한 고집이 느껴진다. 덕분에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나홍진표 장르영화가 탄생했다. 스릴러 장르의 세공사이자 시네아스트(작가)로서 한 발짝 전진한 나홍진을 목도하는 순간이다.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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