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간병인으로 있던 6개월
안순옥
내가 60세 이상 출국비자를 받고 한국길에 오른것은 2014년 9월이였다. 한국은 놀러 간 곳이 아니라 돈 벌러 간 곳이기에 가자마자 일거리를 맡았다. 처음 찾은 일은 모텔일이였다. 정작 해보니 쉬운 일이 아니였다. 5층건물을 매일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내리다보니 한주일만에 발뒤축이며 발바닥이며 닳아서 피가 흘렀고 얼굴피부도 거칠어지고 눈에서는 피발이 섰다. 감짝 놀라 식모아주머니한테 달려갔더니 너무 뛰여다녀 그렇다며 약을 발라주었다. 나한테 나이가 얼마인가 묻기에 61세라고 했더니 모텔일은 젊은이나 할수 있어 나이 많으면 버티기 힘들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래도 나는 참고 계속 일했다. 하루는 발바닥이 갈라터져 근본 걸을수 없었다. 생각끝에 사장님을 찾아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사람을 찾는 동안만 있어달라고 하였다. 필리핀 일군이 오자 난 모텔에서 나왔다. 후에 한 부자집의 가정부로 들어갔으나 주인집 아주머니가 의심증이 있는지 밤에 잘 때 자주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군 하여 잠을 잘수 없었고 할수없이 그 일도 그만두었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꽤나 오랜 기간 할수 있고 나로써 노력만 하면 족히 견딜수 있는 그런 일자리를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벼룩신문을 보고 찾은것이 바로 간병일이였다.
그러나 간병일도 누구나 마음대로 할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한국에는 전문 간병인의 취직을 관리하는 협회가 있는데 만일 이 협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간병일을 할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이런 간병협회가 환자의 보호자들로부터 일정한 금액을 받아 간병인들에게 로임으로 지급하기때문이였다. 맨 먼저 찾은것이 서울 강북의 휴먼협회인데 가입비용은 한달에 회비 7만원, 복장비 6만원과 보험비 15만원이다. 돈을 내고 정식으로 가입한후 협회의 배치에 쫓아 녹번이라는 료양병원 공동 7인실(공동이란 환자 여럿이 한데 있는것. 7인실이면 일곱 사람 환자가 있는 곳.)에 들어가서 환자들의 병간호를 혼자 하게 되였다.
내가 첫 출근을 했을 때였다. 다른 실의 간병원들이 귀속말로 이 병실에 배치된 사람들 태반이 2일 내지 3일 일하고는 떠나간다는것이였다. 그만큼 이 병실 환자들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심을 가지고 병실에 들어가 먼저 친절하게 인사부터 한후 환자분들의 이름부터 하나하나 확인하였다. 환자들이 하는 말이 첫 시작부터 일하는 솜씨가 돼먹었다는것이다. 그런데 일은 그닥 힘들지는 않고 가끔 쉴 틈도 있었지만 우선 잠자리가 아주 불편하였다. 겨우 한 사람 누우면 돌아누울수도 없는 좁은 침대인데 그나마 땅바닥에서 얼마 높지 않은 침대여서 랭기가 올라와 깊은 잠을 잘수가 없었다. 그래서 돈 만원을 들여 철관을 준비하여 그것으로 침대를 받쳐 조금 높이였다. 그래도 잠자리가 시원치 않은것을 본 환자들이 간호사와 원장님한데 말해서 빈 환자침대에서 자게 하였다. 병원의 규정에 의하면 아무리 침대가 비여있어도 환자침대에서는 누구도 잘수 없는데 환자들이 내가 하도 잠을 못 자니 원장님께 청구했던것이다. 그러나 밤중에 일어나 두세번씩 환자의 기저귀도 갈아야 하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분은 화장실까지 모시고 가야 했으니 깊은 잠을 잘수 없었다. 어떤 환자는 변비약을 규칙적으로 이틀에 한번씩 넣어주어야만이 비로소 변을 볼수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분은 아이들처럼 앉혀야 하는데 체질이 약한 나는 젖 먹던 힘을 다 내여 안고 물리치료실까지 모셔갔다. 환자 두세명을 4층까지 차례차례 모셔가서 30분씩 물리치료를 끝내면 다시 4층에서 한분한분 모셔내려와야 했다. 때로 두세분을 동시에 모셔가야 할 때는 팽이처럼 돌아쳐야 했다. 토요일 오후에는 전문 목욕을 시키는데 그때면 진땀을 뺐다. 몸이 웅장한분은 정말 힘이 든다. 운신이 가능하면 괜찮았는데 못 움직이는분은 내가 몸을 끌어안고 애기처럼 시켜야 했다. 그런 날은 너무 힘이 들어 저녁밥도 먹지 못하고 기진맥진하여 잠자리에 자빠지군 했다. 그래도 환자의 보호자분들이 미리 알아서 새 음식을 해다주어 큰 위안이 되군 했다.
어느날 점심식사시간때였다. 가족은 바빠서 못 오고 15일간 링겔주사만 맞고 누워있던 김정자할머니께서 갑자기 구토에 설사까지 겸하여 변을 보았다. 할수없이 밥을 먹다 말고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주위의 환자들은 냄새에 식사도 못하고 밥상을 물리면서 불만을 토해냈다. 그래도 나는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웃으면서 식사를 해야 오후 치료를 받지 않겠느냐며 다른 환자들의 마음을 달래였다. 그러자 환자들은 중국아줌마는 성질도 좋다며 다시금 식사를 하였다. 그러자 김정자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나의 손목을 꼭 부여잡았다. 중국아줌마는 꼭 복을 받을수 있다면서 말이다. 그때 마침 과장이 들어와 이 광경을 보고 고맙게도 붕어빵을 사다주었다.
7인 공동실에 누워있는 환자 7명중에 리한선할머니의 피부병이 아주 엄중했다. 돼지고기를 먹고 피부병에 걸리게 되였다고 하는데 전에 들어와 돌보던 간병인중에 피부병이 전염되여 나간 사람도 두세명 있다고 하면서 보호자와 간호사선생님들이 매번 부탁하는것이 꼭 환자와 접촉할 때는 마스크와 장갑을 항상 갖추라고 당부하였다. 그곳에서 40일 넘게 간병일을 하면서 매일 다섯시에 리한선할머니를 목욕시킨후 소금물로 닦아내고 약을 발라주군 했는데 냄새가 어찌나 역한지 다른 환자들의 불만이 많았다. 나도 더럭 겁이 났다. 이러다가 그 피부병이 나에게 전염되면 어쩌나? 그러나 정성스레 간병을 해드린 보람이여서일가? 20일이 지나니 상처에 딱지가 앉으면서 병이 낫기 시작하자 의사선생님들도 좋아하고 환자의 보호자들도 기뻐서 병원에 올적마다 맛나는 음식을 갖다주었고 써비스로 보너스까지 찔러주군 했다. 여기서 나는 세상 무서운것은 정이라는것, 가는 정이 있으면 반드시 오는 정이 있게 된다는것을 더욱 심심히 느꼈다.
후에 자리를 바꾸어 수원 료양병원 6인중환자실로 들어갔다. 6명중 두분이 자립으로 화장실출입이 가능했고 나머지 네분은 자리에서 누워만 있었다. 아침 다섯시부터 일어나 기저귀를 갈아야 했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어드려야 했다. 과일도 깎아 나누어주며 매일매일 온갖 정성을 다 들이니 간호사님들과 가족들도 흡족해했다. 일이 사랑이라고 약한 체질에 어찌 그렇게 잘할수 있느냐, 식사는 제대로 하느냐, 잠은 제대로 잤느냐고 복도로 오가는 간병인들의 문안을 받으니 더더욱 하는 일에 힘을 얻게 되였다.
6인실은 남녀 간병인들이 함께 환자를 간호하는 곳이다. 환자분들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같이 있었다. 남성 간병인중에 장춘에서 간 중국조선족 아저씨 한분이 있었다. 환자의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시킬 때도 둘이 같이 하니 훨씬 수월했다. 그곳에서는 환자들의 가래 뽑는것도 해야 하고 음식을 매달아놓고 환자에게 먹이는것도 잘해야 하는데 8년전 한국에 가서 간병을 할 때 해본 일이라 두려울것 없었다. 하지만 25일만에 또 자리를 옮겨야 했다.
내가 근무하는 이 협회는 소망협회라 하는데 대표님이 다른 협회에서 온 간병원을 쓸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 협회사람을 쓰겠다고 나더러 나가라고 했던것이다. 나는 또 짐보따리를 등에 지고 떠나야 했다. 이때문에 나는 소망협회에 일자리를 알선해준 나눔협회에 가서 사실을 밝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찾아갔다.
“도대체 왜 안되는가요?”
다른 협회에서 간병인을 찾지 못할 때는 이쪽에서 사람을 보내주군 하지만 그 협회사람이 있을 때는 우선 그 협회사람을 써야 하는 원칙때문에 나를 내보낸것이란다. 듣고나니 내가 협회를 잘못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자리를 다시 찾아달라고 했더니 사랑드림협회를 소개해주었다. 여기서는 회비를 따로 내지 않았다. 먼저 나눔협회에 낸 회비와 보험비를 사랑드림협회에 넘겨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망협회에서 소개해준 성수동재활치료병원에서 다시 간병인의 일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급 올라 팀장으로 일하게 되였다.
사랑드림병원에서 내가 돌보던 환자중에는 진주에서 오신 한은숙이라는 68세 환자가 있었는데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져서 어깨뼈가 끊어져 수술을 하였는데 자나깨나 멜가방을 메고있었다. 그 가방은 빈 가방이 아니라 물건을 가득 넣어 무겁게 하여 어깨가 처지지 않게 기둥처럼 받쳐주는 역할을 했다. 어깨가 처지지 않아 뼈가 빨리 아물수 있다고 했다. 그때문에 목욕을 하지 않으려 했다. 멜가방을 풀면 다시 메기가 너무 어려워서 말이다. 다른 병실의 간호사들도 하지 못하여 원장님이 다시 메워준다는것이다. 나는 그 멜가방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다가 자진해서 나섰다.
“제가 목욕을 시켜드리겠습니다. 제가 멜가방을 메여드릴수 있습니다.”
그러자 환자분이 화를 내는것이였다.
“그러다 못하면 어쩌려구!”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해드렸다.
“아니요. 얼마든지 할수 있어요.”
나는 장담하고 환자를 목욕시켰다. 예전에 옷을 하던 솜씨가 있었기에 어떻게 메면 되는지를 알수 있었다.
내가 한은숙할머니한테 멜가방을 메여드릴 때였다. 병문안 와서 지켜보는 아들은 걱정이 태산같은 눈길로 지켜보고있었다. 주위의 환자들도 긴장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았다. 이윽고 나는 자신 있게 한가닥 한가닥씩 멜가방의 끈들을 원래 자리에 놓아 멜가방을 원만히 메워드렸다. 그 일이 있은후 한은숙할머니는 너무도 기뻐 퇴원하면서 월급도 많이 주겠으니 자기 집에 가서 간병을 해달라는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럴수는 없다며 한은숙할머니한테 멜가방을 메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성수동 303호실에는 방옥림이라는 90세 할머니 한분이 교통사고로 입원을 하고있었다. 입원치료 20일이 되여도 아무런 효험이 없게 되자 보호자분이 다른 간병인을 찾을수 없는가고 전화가 왔다. 원인은 간병원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간병을 하기때문이라고 했다. 간병인이라면 항상 환자들과 정을 나누면서 가족처럼 지내야 한다. 환자 할머니는 식사도 스스로 할수 없기에 한술한술 떠서 먹여야 하는데 간병인은 짜증만 내면서 식사도 끝나기전에 나가버렸다는것이다. 또 짬만 있으면 옆방에 건너가서 환자들 흉이나 본다는것이다. 소변자리도 제시간에 갈아주지 않아 욕창이 생겼다. 보호자들이 너무 가슴 아파하며 착한 간병원을 찾아달라고 하기에 리사님이 나를 추천한것이다. 내가 자신감이 없어 망설이는데 실장과 리사님이 공동료양원에서처럼 하면 얼마든지 해낼수 있다면서 적극 추천했다. 그러면서 1대1로 일하라는것이였다. “1대1”이란 한 간병인이 한 사람의 환자를 돌보는것을 말한다. 그러다보니 이번에는 한 사람을 돌보는 간병인 일을 하게 되였다.
방옥림할머니는 오토바이에 치여 거의 식물인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다보니 아이처럼 세심하게 돌보아야만 했다. 방할머니를 보는 순간 마치 나의 어머님을 보는것 같았다. 자식 2녀 1남을 두었는데 며느리 되는분이 그토록 시어머니에게 잘하였다. 팥죽, 녹두죽, 호박죽, 밤죽 등을 엇바꾸어가며 쑤어오면서 나의 몫까지도 챙겨왔다. 뿐만아니라 환자들의 몫으로 나오는 식사는 내앞으로 돌리여 나는 따로 화식비를 내지 않고 4개월 동안 공짜밥을 먹었고 식비를 절약하게 되였다.
인간은 서로가 오가는 정으로 산다. 보호자분들이 이렇듯 나를 관심하는만큼 나는 치매에 걸리셨던 내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분은 장기간 누워만 있다나니 등에 욕창까지 생겼는데 욕창에 자주 신문지를 붙여 15일만에 깨끗하게 새살이 돋아났다. 가족들은 너무나 좋아하였다. 그렇게 되자 말씀을 전혀 안하시던 할머니께서 나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웃기도 하고 롱담도 곧잘 하였으며 운신도 못하던 할머니가 옆으로 돌아누울수도 있게 되였다. 매일 물리치료 30분을 받은후에 나는 또 따로 안마까지 해드렸다. 신문지사용법은 내가 신문에서 보고 알게 된것이다. 아마 신문지의 먹물이 상처의 진물을 흡수하게 되면서 아무는 속도가 빠른것 같았다. 내 경험을 따라 여러 간병인들이 신문지를 사용하면서 많은 환자들이 욕창때문에 생긴 고생을 덜게 되였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공동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와 나가보았더니 보호자아저씨와 중국간병인이 말다툼이 벌어진것이다.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보호자아저씨께서 나더러 직접 할머니의 기저귀를 벗겨보라기에 보았더니 제대로 닦아주지 않아서 냄새가 진동하였다. 나는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와서 깨끗이 닦아주었다. 보호자아저씨가 하는 말이 “간병인 혼자서 여러 환자를 돌보다보면 빠뜨릴수도 있다며 미안하다고 하면 되는거지 왜 간병인이 목에다 피대를 세우며 대드는지 모르겠다.”며 나더러 다시 공동실로 건너오라고 했다. 그럴수는 없기에 자주 가서 돕겠다 하고는 간병인언니를 복도에 데리고 나와서 마음을 달래주었다. 간병인언니 역시 중국동포인데 목에 피대를 세우면서 우리가 왜서 굽신굽신해야 하며 할 말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가며 화를 나한데 푸는것이였다. 그래서 언니처럼 간병하며는 주머니에 용돈도 생길수 없고 언니 같은 사람때문에 중국동포들이 일자리찾기가 어렵다고 타일러주고 돌아갔다.
이번에는 남자 공동실에서 다툼이 벌어졌다.
나는 팀장이기에 책임감을 다하려고 들어가보았더니 육신을 못 쓰는 환자가 옆에 있는 물을 좀 갖다달라고 간병인한테 부탁했는데 간병인아저씨가 못 들은척했다는것이다. 한심한 생각이 들어 “아저씨, 환자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했더니 한다는 말이 “아주머님, 내가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공안국에 있었습니다.”라고 하는것이였다. 나 역시 열이 나서 “중국에서 공안이면 한국에서도 공안입니까? 대소변을 치러 왔으며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더니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면서 환자에게 가는것이였다.
료양병원에 4인실, 2인실 환자들은 엄중하지 않아 치료받을 때나 화장실 갈 때나 자립할수 있었다. 그런 환자중에 문태옥이란 할머니가 있었는데 처음은 6인공동실에 3개월 있다가 가정형편때문에 간병비 지불이 어려워 자립하겠다고 4인실로 옮겨갔다. 내가 돌보던 환자인지라 틈만 있으면 자주 가서 돌보았고 식사할 때마다 찾아가서 거들어주군 했다.
한국에서 짧은 6개월 동안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싫은것, 힘든것들을 말없이 극복하면서 정성스레 도합 30여명의 환자를 돌보았는데 그가운데 병이 나아 퇴원한 환자가 열대여섯이 된다. 어느 한분도 차별하지 않고 내 몸이 불편해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진심으로 일했다. 그랬더니 짧은 기간이지만 돈도 꽤나 벌수 있었다.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에 가서 일자리 찾기 쉬운 간병인일, 지금도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하고있는 간병인생활, 비록 힘들고 보호자분들이 까다로와도 자신이 진심으로 일하면 간병인 이 직업도 환영받고 대접받을수 있는 직업이란것을 6개월간의 간병인생활을 하면서 절실히 느꼈다.
<청년생활>잡지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