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Friedrich Wilhelm August Froebel은 1782년 4월 21일 독일의 튀링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가 있었으나 깊은 영향을 받지 않고 외로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11세부터 15세까지 개신교의 지역 교회 관리인인 목사 아저씨 댁에서 지내, 이 시기에 부모보다 아저씨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프뢰벨은 1797년 학교를 졸업한 후 측량사가 되었다. 삼림 감독관에게서 조경과 식림 등을 배우던 2년간 프뢰벨은 자연과의 긴밀한 생활을 최대로 이용하여 자신의 사고 영역을 넓히는 자기 공부를 별도로 해왔다. 프뢰벨은 가능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려고 노력했고 사물을 근본에서부터 관찰했으며 넓은 관점에서 자연의 종합성을 보려고 했다. 1799년 그의 배움의 갈증은 드디어 예나대학에 입학을 하게 하였으며, 자연과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여기에서 그는 방법론적인 문제에만 흥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의 독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간단한 기초에서부터 일어나는 현상의 내적인 관계성을 찾았고 알기를 원했으며 해명하려고 했다." 그는 이때에 '자연연구협회'의 회원이었다.
1802년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프뢰벨은 삼림관리 보조, 측량 공무원 그리고 재산 관리 비서에 관한 실습생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또한 자기 스스로 많은 다른 공부를 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하여 건축가가 되려는 결심을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뢰벨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페스탈로치의 제자이며 프랑크푸르트 시범학교의 교장인 Anton Gruner(1778~1844)를 알게 되었으며, 이 학교에 교사로 임용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프뢰벨은 진지하게 교육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열중하게 되었으며 교육 관계 서적을 읽게 되었다. 특히 페스탈로치의 업적과 이론을 신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프뢰벨의 영혼 속에서 잠자고 있던 교육적인 천재성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교육이야말로 자신의 생의 사업이며, 교육적인 문제에 관련된 모든 것과 그 원리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생겼다.
1808년 프뢰벨은 다시 Yverdun에 가서 페스탈로치의 학교에서 2년간을 지냈다. 여기에서 프뢰벨은 페스탈로치의 국민 교육 사상에 반하게 되며, 직관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학습 방법을 알게 된다. 프뢰벨은 광범위한 흥미를 지니게 되었고 인간의 형성과 인간의 교육의 과정 및 법칙에 관한 자신의 철학의 기초를 쌓게 되었다. 특히 프뢰벨은 페스탈로치보다 더 날카롭게 유아기의 취학전 단계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교육 철학과 관련하여 미래의 교육 계획에 대한 관심과 함께 자신의 지식을 더욱 깊이 할 수 있는 교육적인 요구를 철학적으로 정립하고픈 욕망이 생겼다. 그는 29살의 나이에 1810년부터 1812년까지 괴팅겐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인간학, 윤리학, 교육학, 언어학, 역사, 지리학, 방법론 등을 배웠다. 특히 그는 결정학에 흥미를 지녔으며, 이 결정체의 성장에서 프뢰벨은 구조법칙이 있음을 믿었고, 이 법칙은 자연의 생존과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삶 속에서도 작용하는 유효한 법칙임을 인식했다. 결정체의 요소와 형태의 근본적인 규명을 하려고 노력했고, 얻어진 발달 법칙을 인간 교육에도 응용해 보려고 고심했다. 프뢰벨에게는 球狀의 자연 철학적인 법칙이 떠올랐고, 이 법칙은 자연 형체의 기본 형태가 공의 모양으로서, 이는 삶의 단위의 상징이며 내·외적인 자연의 법칙성을 깨닫게 한다고 믿었다. 이 '球狀的 法則'은 프뢰벨의 모든 인간 교육의 기본 법칙이 된다.
1817년 루돌슈탓의 카일하우에 '일반 독일 학교'를 설립했다. 1818년 Wilhelmine Hofmeister와 결혼했고, 부인은 자신의 교육 사상을 매우 잘 이해했다. 1826년 카일하우에서 프뢰벨은 자신의 교육적인 주요 저서 을 저술했다. 1800년대 전반기의 독일은 국민 정치교육 시대이므로 협동과 공동체 의식을 위한 교육이 성행한 시기이다. 학교 교육도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여 자유롭고 자발적인 인간을 교육할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페스탈로치, 피히테, 훔볼트의 사상과도 일치되는 흐름으로써 교육적인 노력이 더욱 경주되었다. 프뢰벨의 학교 역시 이러한 조류에 큰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820년대에는 특히 민주주의적인 흐름이 국가에 해롭다는 인식이 형성되어 새로운 교육적인 노력들이 혐의를 받게 되기도 했다. 프뢰벨의 카일하우의 학교도 이에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결국 프뢰벨은 친구에게 학교를 맡기고 스위스로 가서 박흐텐제, 빌리자우 그리고 브억도르프에 학교를 세웠고, 브억도르프 학교에서는 스위스 교사들의 현직 교육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프뢰벨은 모든 교육의 근본은 가정 안에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성의 순수한 표현의 과정은 가정의 순수한 가치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가정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 자체는 상대적인 동일성의 일체가 되는 변증법적 율법이 실현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제3의 제도가 성립된다."
프뢰벨은 어린이들은 어린이 자신의 자연적인 발달 단계를 살아간다는 점과 자신의 내면에 활동적으로 형성되어 간다는 점을 증명했다. 그는 어린이들의 창조적 힘을 생각하여 창조되어지고 표현되어지는 삶이 있음을 강조했다. 특히 프뢰벨은 어린이들의 놀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프뢰벨에게는 어머니에게 어려운 교육의 임무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점이 특히 중요했다. 이 사상의 실현의 중요한 과제를 안고 프뢰벨은 고향인 튜링겐으로 돌아와 1837년 블랑켄브억에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노작 욕구 보호학교'를 설립했다. 학교 설립과 교육에 필요한 자금은 '모금'으로 충당하였다. 이 모금은 곧 유명해졌다. 사립학교 설립의 시작이 된 것이다. 이 때에 은물을 창안하게 되었다.
어린이 교육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1840년 '일반 독일 킨더가르텐'을 설립했다. 이 킨더가르텐은 1844년 받 디벤슈타인으로 이전했다. 1848년은 프뢰벨에게 노력의 결실을 수확하는 해였다. 그러나 곧 1850년은 다시 프뢰벨의 교육 철학의 사망의 해가 된다. 프로이센에서는 모든 킨더가르텐이 금지당하게 된 것이다. '무신론주의 교육'이 폐쇄의 이유였다.
프뢰벨의 이론과 학교는 실제로 종교적인 바탕 위에 성립되었다. 프뢰벨은 자신의 사상의 정당함을 많은 동료로부터 얻게 된다. 이러한 학계의 여론은 초기에 무시되었다. 1860년에 이 폐쇄 조처는 해제되었으나 프뢰벨은 1852년에 이미 서거했다. 1852년 6월 21일 70세의 나이로 마리엔탈에서 죽었으며, 그곳 성주에 의하여 죽기 2년 전인 1950년부터 성내에 킨더가르텐을 세워 운영케 했었다.
살아 있을 때에 프뢰벨은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그의 인격과 사상의 힘에 의하여 교육 제도에는 막대한 작용을 했다. 그의 이름과 학교는 교육학사에서 킨더가르텐 이름과 함께 국민교육 사상가로서 페스탈로치와 나란히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