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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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문학]『文人相輕』再論 (1) (김관웅52) 댓글:  조회:4309  추천:106  2007-03-16
『文人相輕』再論 (1) 김 관 웅   중국의 유명한 당대소설가 리국문은 “문인상경(文人相輕)을 꿰뚫어 말한다면 한마디로 문인상질(文人相嫉)이다”라고 지적한바 있다. 즉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는 궁극적인 원인은 문인들은 서로 질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첫째로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고 서로 질투하는 악습은 길고도 긴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   건안문학의 대표자의 한 사람인 조조의 아들 조비는 『전론 ‧ 론문』에서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는 것은 자고이래 이러했다(文人相輕, 自古而然)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의 조비가 이렇게 개탄했으니 문인들이서로 질투하는 이 악습이 시간적으로 아주 길다는 것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둘째로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고 서로 질투하는 이 악습은  공간적으로는 아주 넓어 세계적인 보편성을 띠고 있다.   동양의 문단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단도 이러하다. 그 단적인 실례를 든다면, 지금은 사실주의 문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발자크는, 그토록 방대한 저작량과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선거에서는 번번이 떨어졌다고 한다.     셋째로 문인들의 질투는 그 정도가 인간사회의 여타의 분야에 비해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   문인들의 질투와 그 질투로 인한 반목과 질시는 조만해서는 끝이 나는 법이 없다. 심지어는 한평생을 서로 질투하면서 살아간다. 마치도 개들이 진흙탕 우에서 서로 물고 뜯는 니전투구(泥田鬪狗)의 형국이다. 승부도 없이 물고 뜯다 보니 양자의 입에는 모두 대방의 개털만 가득 묻었을 뿐이다. 붓으로 하는 싸움은 흔히 승부가 없는 지구전이다.   칼부림을 하는 무인들의 사회에서도 질투는 있으나 승부가 명백하므로 문인들 사회처럼 질투가 끈질길 수가 없다. 무인들은 일단 무예를 겨루어 지면 깨끗하게 승복한다.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 승복하지 않다가는 경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고 중하면 목숨까지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호전』제2회에서 간신고구의 박해를 피해 도주 길에 오른 80만 금군 교두인 왕진을 알아 보지 못하고 달려들었던 구문룡 사진은 곤봉겨룸에서 가슴팍을 찔려 벌렁 나자빠지고 나서는 대뜸 꿇어 엎드려 절을 하고 왕교두를 스승으로 모시지 않던가.       권력방망이를 휘두르는 벼슬아치들의 사회에도 질투는 있으나 상하의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철칙이 있으므로 문인들 사회처럼 질투가 끈질길 수 없다. 관계(官界)에서는 한 급만 높아도 남을 눌러 죽일듯한 위세를 갖고 있으니 적어도 언감생심 상전하고는 질투를 할 수 없다.  그러나 문단에서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위계질서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평등한 만큼 동배들뿐만 아니라 선후배 사이에도 질투는 여전하다.   그 원인은 문인들 사이에서의 붓으로 하는 싸움에서는 칼부림과는 달라 명확한 승부를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에는 완전히 객관적이 통일적이고 절대적인 표준이 없고, 치밀하게 량이나 질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렵고, 따라서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표준이 많이 작용하기에 문인들은 서로 제가 잘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문인들은 언제나 자아감각이 좋아서 제 잘난 멋에 살면서 자기의 작품은 한 송이의 꽃으로 보고 남의 작품은 쓰레기로 보는 폐습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주관에 묻혀서 사는 문인들은 다들 정도부동하게 과대망상증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정신질환으로 앓고 있는 환자들이다.   그래서 문단은 언제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언제나 질투와 질시의 눈빛이 번개처럼 오고 가고,  언제나 뒤에서 남을 헐뜯는 험담들이 무성하여 한마디로 시끌벅적하다. 여기에 파벌싸움까지 곁들어지면 더더욱 저자거리처럼 소음으로 하여 단 한시각도 귀청이 평온을 찾을 새가 없다.   요즘은 연변작가협회의 개선(改選) 시즌이라 더욱 기관이다.                                     2007년 3월 15일 연길에서
49    [사회] 패기와 사나이 (김관웅51) 댓글:  조회:3788  추천:77  2007-03-11
패기와 사나이 김 관 웅  물론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의식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자신의 신체를 보존하고자 하는 자연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물과 구별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러한 자연적인 욕구와 더불어 다른 인간의 선망에 대한 욕구, 즉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갖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즉 어떤 가치나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가치욕구는 우선 순수한 위신을 위한 투쟁에서 기꺼이 목숨을 거는 자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로씨야의 시인 뿌쉬낀이 자기의 안해를 유혹하는 단테스에게 아무런 승산이 없었으면서도 결투를 걸었고 그로 해서 36살에 자기의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헤겔에 따르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욕망으로 인해 두 명의 전사(戰士)는 서로 상대에게 자신의 인간다움을 인정받을 욕심으로 목숨을 걸고 치명적인 결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한편이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로 인해 두 손을 들었을 때, 두 전사 사이에는 주군(主君)과 노예(奴隸)의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추구와 수호는 인간이 기타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인간의 이러한 속성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국가』에서 처음으로 묘사되었는데, 여기서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에는 욕망(慾望) ‧ 이성(理性)  그리고 그가 말하는 튜모스(Thymos), 즉 “패기(覇氣)” 의 세가지부분이 있다고 갈파했다. 인간 행동의 대부분은 처음 두 가지부분, 즉 욕망과 이성의 조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욕망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구하도록 인간을 충동하며, 인간은 이성 또는 계산에 의해 그것을 손에 넣는 최선의 방법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이나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자기 자신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그와 같은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속성은 오늘날 일상 쓰는 말로 하자면 “자존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자존심을 느끼는 속성은 인간 영혼의 “패기(覇氣)” 라고 부르는 부분에서 발생한다.   오늘날 인욕(人慾)이 횡류(橫流)하는 이 물질주의의 시대에  인간의 욕망은 넘쳐나서 주체할 바를 모르고 또 각자는  그런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갖은 술수는 다 부리고 갖은 계산을 다 하면서 살아가야 하므로 이성도 대단히 발달하여 가고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가장 발달되지 못했고 오히려 나날이 증발해가는 것이 인간 영혼 중의 “패기(覇氣)” 라는 이 부분이다. 김학철 옹의 말에 대입을 한다면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마음”이 바로 “패기(覇氣)”이다.   특히 우리 남자들에게서 이런 패기가 점점 증발해버리고 있는 추세이다.  패기가 없는 남자는 골격이 없는 무골충이다. 남자로서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설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가장 일상적인 가정생활이나 부부생활에서 마누라한테 사람 이하의 수모를 당하고도 그냥 머리를 숙이고 살아가겠다는 남자는 적어도 패기가 있는 남자라고 볼 수 없다.   오쟁이를 지고서도 “어쩌겠는가? 아이들을 보고서라도 다시 살아야지”하면서 정부와 놀아나서 5, 6년씩 바깥에서 나돌던 여자를 용서하고 복혼을 해서 살고 있는 남자는 패기를 상실한 남자이다. 혹은 “어쩌겠는가? 마누라가  돈을 그냥 자식한테 송금하는데…” 하면서 다른 남자와 외국에서 임시 부부로 살아가는 것을 번히 알면서도 알량한 돈 타산 때문에 모르는 체 하거나 눈을 질끈 감아주는 남자는 패기를 숫제 포기한 남자다. 그리고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마누라가 위장결혼하는데 동의를 하는 남자는 패기만이 아니라 쓸개까지 빠져버린 남자다. 진정한 사내대장부들에게 있어서 패기는 바로 생명 그 자체임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바보 같고 등신 같은 패기를 상실했거나 포기한 남자들이 기수부지이다.      패기를 상실했거나 포기한 남자는 노예 그 자체이다.                                                                 2007년 3월 8일 연길에서
48    신 “칠거지악(七去之惡)” (김관웅50) 댓글:  조회:5822  추천:142  2007-03-09
신 “칠거지악(七去之惡)”  김 관 웅   여자들의 명절인 3.8절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여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외람되기는 하지만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컴퓨터에 마주 앉았다.   남권주의 시대의 이혼의 조건이나 이유를 동양에서는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규정했었고 이혼하지 못하는 조건과 이유로 “삼불출(三不出)”로 규정했다.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불출(三不出)”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은 “무릇 아들을 못 낳거나, 음탕하거나, 시부모를 잘 모시지 않거나, 말이 다사하거나, 손버릇이 나쁘거나, 질투를 하거나, 나쁜 병이 있으면 이혼을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른바 “삼불출(三不出)”은  “어디 갈 데가 없거나, 시부모님의 삼년상을 다 마쳤거나, 빈천한 남자가 부귀해진 후에는 마누라를 내치지 못한다” 고 규정했다.   물론 이것은 남편의 일방적인 결단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안해로 된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은 안해가 어쩌다가 밥을 설게 지었다고 내쫓았다고 한다. 지금 말로 하면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서 나는 진짜로 세월이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남권주의 시대가 이미 사양기(斜陽期)를 맞았고 그 대신  여권주의시대가 도래하여  문자 그대로 여성파워가 욱일승천(旭日昇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제 세상을 만난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내치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소박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자 소박데기들이 비일비재한 것이 오늘 우리 남편들의 가련한 처지의 현조소다.    작년 10월 3일, 한국 여성축제에서는 이른바 "신 칠거지악(七去之惡)"이 공개됐다고 한다. 그 일곱 조목을 그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1. 명절 때 시부모는 30만원, 친정부모는 10만원 줄 때,  2. 딸을 낳았는데 남편이 아들타령을 할 때,  3. 섹시한 안해의 눈빛을 외면할 때,  4. 안해가 직장동료와 회식하는 걸 알면서도 자꾸 전화할 때,  5. 밥상에 마주 앉아 반찬 투정을 할 때,  6. 의처증, 안해구타, 알콜중독 걸렸을 때,  7. 안해 비상금 집어가지고 시치미 뗄 때.     이상의 7항조목중 어느 조목에 든지 해당될 경우에 안해는 남편을 가차없이 "엄벌" 하거나 집에서 내쫓을 수있다는 것이다.     "신 칠거지악"은 우리 연변에도 있다. 물론 무슨 여성축제에서 공식적으로 피로된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 연변에서 불문률로 된지가 오래다.   연변의  "신 칠거지악"은 한국과는 대체적으로 비슷하나 좀 다르기도 하니 아래에 소개한다.    1. 돈을 못 벌어들이는 남편(혹은 다른 남편들처럼 잘 못 벌어들이는 남편),  2. 술을 잘 먹는 남편,  3. 손이 가벼워서 안해를 구타하는 남편,  4. 장인 ‧ 장모한테 등한한 남편,   5. 안해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는가 살피는 남편,  6. 말투가 거칠고 매너가 없는 남편,  7. 가무를 잘 돕지 않는 남편.   무릇 이 7항 조목의 어느 조목에 해당돼도 안해는 남편을 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혼부가 위장결혼을 하는데 남편이 거치장스러울 때도 이혼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안해들이 남편들을 내치는 이유는 많고도 많다고 한다.   우리 연변의 남편들이 소박데기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이 조항들에 저촉되지 않도록 말조심, 손조심, 눈조심, 술조심하면서 그냥 숨만 쉬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조심해도 남편들의 신세는 별로 호전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게 요즘 실태다.   안해들의 맹렬한 공세에 의해 남편들이 수세에 밀린  오늘 이 세상에서  이래저래 소박데기는 대부분 안해가 아닌 남편들이다. 수천 년 동안 남편들에게 억눌림을 당했던 그 앙갚음을 요즘에 와서 한꺼번에 해치워 버리자는 잡도리인지  이 암범들의 기세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사회적 지위나 지식이나 재부나 모든 면에서 남편보다 더 나은 점이 꼬물만치도 없는 주부들마저도 오늘날 날로 신장해가는 여성파워에 편승해서 신수 멀쩡한 남편들을 법원에 끌고 다니고 망신을 주고 야단법석 소란을 피워대는 것이다. 다달이 월급을 봉투채로 마누라에게 바치고, 퇴근해서는 집으로 직행하는 남편이라도 어쩌다가 자기에게 불리한 행동을 하게만 되면 법원놀음까지 불사한다. 이런 암범들의 사전에서는 “양해”라거나 “양보”라는 낱말은 찾아볼 수 없다. 남편을 궁지에 빠지게 하고, 온갖 망신을 다 시키고야 직성이 풀려 한다.    이런 싸가지 없는 암범 같은 독부(毒婦)들이 속출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편들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책략이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첫째 부류의 남편들은 이런 싸가지 없는 여자들에게 고분고분 길들려서 아침마다 장바구니를 들고 장거리에서 기웃거리거나 허리에 행주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지지고 볶는 가정주부(家庭主婦)가 아닌 가정주남(家庭主男)으로 약삭빠르게 변신을 한다. 심지어는 마누라는 놀음판에서 밤을 패우는데도 남편은 집에서 앞치마 두르고 밥하고 빨래하면서 "내조"를 정성껏 한다.  또 적잖은 남편들은 숫제 안해를 돈 버는 경제 제1선에 내세우고 자기는 암탉처럼 집을 지키면서 자식들을 챙기고 있다. 외국서 목돈을 손에 쥐고 들어어 왔겠다 또 바깥 세상에서 이런저런 남자 맛도 많이 봤겠다 ........ 안해들은 집에 돌아와서 시골오지에서 사는 남편을 보니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데라고는  없단다. 남편들은 똥진 오소리처럼 몇년 동안 집을 지키고 아이들을 챙기느라 별별 수고를  다했지만 여전히 안해들 앞에서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기가 죽어서 숨소리마저도 조심스럽게 지낸다. 마누라가 이혼을 하겠다는 말을 밥먹듯이 해도 눈 한번 흘기지 못하고 속으로 분을 삭일 수밖에는 없는 가련한 남편들이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가정주남(家庭主男)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주변에서 마누라가 공개적으로 이혼으로 협박을 해도 불깐 황소같이 큰 눈만 슴벅거리는 남편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주변에 마누라 아무리 지랄발광을 해도 "잡아 잡수" 하고 무비의 인내성을 발휘하는 남편들이 얼마나 많은가?    둘째 부류의 남편들을 이 급변한 시대의 발걸음을 맞추지 못해 많은 불협화음을 빚어내고 있다. 마누라와 우연하게 싸움을 벌였다가는 코피가 터져 녹다운(knock down)돼서 남자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구기고 안해의 판정승으로 끝나기가 십중팔구다. 코피가 터지고도 그런 암범 같은 마누라의 "슬하(膝下)"에 다시 기신기신 기어들어가야만 하는 비극은 아마도 인생 비극중의 최대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국문예부흥 시대의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원시축적시대의  “울치기운동”을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비유했듯이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양처럼 유순했던 우리의 적지 않은 여성들이 표독스러운 암범으로 변해가고 , 반대로 우리의 적지 않은 남편들은 기세당당한 호랑이로부터 점점 순하디순한 양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호랑이가 양한테 잡혀 먹히는 비극이 심심찮게 우리 눈에 띠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호 애재라, 암범으로 변해가는 마누라들에게 날로 억눌리고 수모를 당하면서 살아가는 불쌍한 우리 남편들이여!!!!     오호 애재라,  신 “칠거지악(七去之惡)”의 등쌀에 하루하루를 전전긍긍 살아가는 가련한 우리 남편들이여!!!!!     오호 애재라, 여자들이 여자들의 본성을 잃어가게 하는 이 수상한 세상이여!!!!!   오호 애재라, 음(陰)이 날로 성해가고 양(陽)이 날로 쇠퇴해가는 이 이상한 세태여!!!!!   2007년 3월 5일 연길에서
47    [단상] 아기의 웃는 얼굴 (김관웅49) 댓글:  조회:3948  추천:85  2007-03-04
                     아기의 웃는 얼굴                                                                       김관웅     방정환의 그 유명한 수필 『어린이 예찬』에서는 아기들의 웃는 얼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어린이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는, 우리는 찡그리는 얼굴, 성낸 얼굴, 슬픈 얼굴을 못 짓게 된다. 아무리 성질 곱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어린이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험상궂은 얼굴을 못 가질 것이다. 어린이와 마주 앉을 때 - 적어도 그 잠깐 동안은, 모르는 중에 마음의 세례를 받고, 평상시에 가져 보지 못하는 미소를 띤 부드러운 좋은 얼굴을 갖게 된다. 잠깐 동안일망정 그 동안은 순화된다. 깨끗해진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동물세계의 아기들인 강아지도, 망아지도, 송아지도 웃을줄 몰른다. 애오라지 인간세계의 아기들만이 웃을 줄 안다. 누가 배워주지 않아도 천성적으로 웃을 줄을 안다. 조물주가 우리 인간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이다.   아기의 웃는 얼굴은 바로 천사의 얼굴이다.   천사는 멀리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붕아래의 조촐한 방안의 요람에서 달게 자면서 방그레 웃는 아기의 얼굴에 있다.   아기-천사와의 20일 동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그 동안에 내 영혼이 순화(純化)되여 가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이 지저분한 사바세계이라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아기처럼 밝게, 맑게 웃으면서 살 수는 없는 걸까?                                  2007년 3월 1일 연길에서
46    가치관의 선택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명상 댓글:  조회:3682  추천:98  2007-03-02
  사람들은 이 세상의 똑 같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모두 나름대로의 부동한 가치관에 좇아 부동한 가치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를테면 인격에 대한 사람들의 부동한 이해와 판단은 부동한 가치관의 차이에서 인기되는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인격을 잃으면」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부(富)를 잃으면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무엇인가 잃은 것이다.인격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 빌리 그레이엄 「인격을 잃으면」전문   그러나 프랑스 고전주의 희극의 대표적 희곡가인  몰리에르의 희극 「수전노」의 주인공 아르빠공이 시를 지으라고 한다면 상황은 180도로 달라 질것이다. 아마도 다음과 같이 지을 것이다. 인격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무엇인가 잃은 것이다.부(富)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인격만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동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사랑의 가치에 대해 부동한 판단을 내리게 되기 마련이다.   항가리아의 투사이며 시인이었던 뻬떼피는 「자유」라는 유명한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생명이 중한들 사랑보다 귀중하랴내 자유를 위해서는생명도 사랑도 바치리      - 뻬떼피의 「자유」전문 그러나 영국의 문예부흥시대의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애정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들인 애정지상주의자 로미오나 줄리엣더러 시를 지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지을 것이다.  생명이 중한들 자유보다 귀중하랴 내 사랑을 위해서는 생명도 자유도 바치리  가치관의 차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똑같은 대상을 놓고 부동하게 생각을 하게하고 가치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가치관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매개 인간들의 각이한 본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상한 인격자가 되던지, 땡전 한 잎에도 울고 웃는 너절한 수전노가 되던지, 정의를 위해 목숨마저 바치는 용감한 투사가 되던지, 사랑을 위해서는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 애정지상주의자가 되던지 모두 자기 나름의 가치관의 선택에 달린 것이리라.                         2007년 3월 2일 연길에서
45    '이정관물(以情觀物)' -정을 가지고 사물을 보다 댓글:  조회:3443  추천:90  2007-03-02
 며칠전, 유협의 『문심조룡』을 장춘의 큰 딸집에서 번역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큰 딸내미는 석달 동안의 산후 휴가를 마치고 자기의 직장인 길림대학 병원에 나갔다가 저녁 무렵에 퇴근해 집에 돌아왔다. 한창 외손녀를 어르고 있는 나를 보고 큰 딸애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앨범을 가지고 병원에 나갔더랬지요. 그런데 우리 병원의 간호사들과 젊은 의사동료들이 우리 지연이 사진앨범을 보고는 고작 한다는 게  ‘애가 건실하다’, ‘영리하게는 생겼다’ 이런 평가뿐이지 뭐예요. ‘곱다’, ‘예쁘게 생겼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없고요. 정망 우리 지연이가 못생겨서 그럴까요?”   큰딸은 기대 밖이라는 듯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나한테 회보했다.   이때는 내가 마침 유협의 시인의 감정과 경물(景物)의 관계에 대한 논술을 번역하고 있는 중이라 이렇게 허두를 떼었다.    “아빠가 지금 번역하는 이 부분에 이정관물(以情觀物)이라는 말이 있구나”   “우리 지연이 말인데 무슨 왕청 같이 책속의 얘기예요?”   웬 동문서답(東問西答)이냐고 큰딸애가 시쁜 소리를 했다.   “이정관물(以情觀物)이라는 개념은 말이야,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을 지니고 객관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본다는 뜻이야.”   “그런데요?”   “너나 외할미, 외할배인 너 엄마나 나나 이모인 네동생 정은이나 모두 우리 지연이한테는 뜨거운 감정을 갖고 대하지만 네네 직장 동료들이야 그렇지 않잖어? 사람이란 감정에 좌우되면 객관성을 잃기 쉽다 그 말이지. 중국성구에 ‘애인의 눈에서 서시(西施)가 나온다’는 말이나, ‘고슴도치도 제 새끼의 털은 함함하다 한다’는 우리속담이 바로 이정관물(以情觀物)이라는 개념을 형상적으로 표현한 말이지. 미는 객관성도 있지만 주관성을 띠고 있는 거야……”  이에 큰 딸이 더 크게 실망해서 입을 다시 열었다.  “아빠 말을 듣고 보니 역시 우리병원동료들의 태도와 비슷하구만요. 우리지연이가 이쁘게 생기지는 않았으나 자기 외손녀이니까 이쁘다 그 말이지요,  객관적으로는 이쁘게 생기지 않았지만 감정이 있으니 이쁘다 그 말이지요 안 그래요?”   “아니지, 우리 지연이는 객관적으로 이쁘게 생긴 점이 많지. 얼마나 똘똘하게 생겼다구, 우리 지연이 그렇지?!”   나는 계속 지연이를 어르며  큰 딸의 말에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날 외손녀 지여이를 두고 나와 큰딸사이의 논쟁은 결론도 없이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사실 그렇다. 만일 아기가 육손이나 언청이 같은 선천성 불구아라면 아무리 제 새끼라도 이쁘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미에는 객관적 표준이 꼭 있는 것이다.    미는 주관과 객관의 결합되어 산생 것이라는 이택후의 말은 맞는 말이다.                              2007년 3월 2일 연길에서
44    우리 문단의 흑마 ― 김관웅교수 (조성일) 댓글:  조회:4757  추천:35  2007-02-28
김관웅교수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언제나 거친 초원에서 갈기를 휘날리면서 질주하다가는 문뜩 멈춰 서서 갑자기 무엇에 노했는지 두 앞발을 건뜩 쳐들고 울부짖는 한필의 야생 흑마(黑馬)를 연상하군 한다. 흑마(黑馬)를 영어에서는 다크 호스(dark horse)라고 한다. 영어에서 다크 호스는 단순히 털빛이 검은 검정말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크 호스는 선거나 경기 등에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강력한 우승후보나 선수 또는 유력한 경쟁상대를 뜻하기도 한다. 이런 영어의 뜻 빛깔이 한어에 영향을 주어 흑마(黑馬)라는 이 낱말은 영어와 비슷한 뜻 빛깔을 가지게 되였다. 1970년대 말, 김관웅교수는 대학교 학부생 1학년 때 단편소설 《청명절》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처녀작인 이 작품이 개혁개방이후 연변의 첫 문학상에서 수상하게 되면서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5년 단편소설집 《소설가의 아내》로 문단에 호적을 붙이기는 했지만 김관웅교수가 《강력한 우승후보나 선수》 또는 《유력한 경쟁자》의 이미지로 내 머리 속에 각인되지는 못했다. 김관웅교수가 진정으로 우리 문단의 한필의 흑마로 내 시야에 유표하게 안겨들어 오게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후였다.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학사, 석사, 박사를 거쳐 10년 이상이나 대학교에서 두문불출하고 공부에만 정진하고 있던 김관웅교수가 소설창작에서 문학평론에로 전향하여 유망한 평론가로 갑자기 문단에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쓰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한번 쓰기만 하면 문단을 놀라게 하는 그러한 평론들이 김관웅교수의 손에서 속사포마냥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래 그가 내놓은 저서들과 논문 그리고 평론문장들의 골자만 대충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론저서들로는 《조선고대소설서사방식연구》, 《조선고대소설사고》, 《조선문화와 문학의 이해》, 《조선고전문학의 발전과 중국문학》, 《중조고대소설비교연구》, 《중조시가비교연구》, 《조선문학의 이해》, 《외국문학사》, 《서양문학사》, 《서방모더니즘 문학사론》, 《수필창작논》 등 10여권이 있고, 60여 편의 학술논문과 70여 편의 중국조선족문학과 관련된 비평문장을 써냈다. 이밖에도 그는 문학창작도 게을리 하지 않아 칼럼, 수필에서도 자기의 개성과 장끼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달성한 학문적인 수준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였는데, 적어도 조선문학이나 중한비교문학 등 분야에서는 중국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조선반도의 남과 북을 비롯한 세계 각 국의 조선―한국학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였다. 이는 중국조선족평단에서는 있어본 적이 없는 일로서 우리 노일대의 문학이론가, 평론가들이 해내지 못한 장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학문적 수련과 기초를 바탕으로 하여 김관웅교수는 대학강단에서 서양문학, 서방모더니즘문학, 조선문학, 20세기서방문학이론, 문학이론, 비교문학, 문화학, 세계문화사, 수필창작 등 다양한 학과목을 가르치고 학사, 석사, 박사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함과 동시에 이런 와중에서도 학문연구와 문학창작의 쌍 풍수를 거두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2003년부터는 《우리동네 문학동네》라는 개인홈페지를 운영하면서 품위있는 연설고, 강의고, 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 걸치는 글들과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칼럼, 비평문장들을 쏟아내어 우리 문단의 이목을 한 몸에 집중시키고 있다. 이 개인홈페지가 우리 문단에서의 문학적 영향은 어중간한 문학지를 능가한다. 그 가운데서 특히 중국조선족문단 평론계에서 김관웅교수의 눈부신 활약상이 가장 주목된다. 그의 비평문장의 가장 큰 특점은 우리 민족의 현실문제에 초점을 맞춘 그의 《민족적사실주의론》에서 잘 보여진다. 이밖에도 그의 비평문학은 새로운 문학비평방법론에 립각한 엄밀한 론리성과 심각하고 날카로운 사회, 문화 비판성에서 보여진다. 이를테면 《식민주의사관과 김문학현상》, 《김문학의 <반문화지향의 중국인>을 평함》, 《민족적 사실주의로 나아가는 우리 소설문학》, 《여성과 시》, 《문화혁명시기 중국여성의 애정비극과 정치》 등은 그의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비평문장들이다. 이에 대해 북경대학 박충록교수는 90년대의 중국조선족평론문학을 논하면서 김관웅교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평론가 김관웅은 학자형의 평론가로 그의 장끼는 비교문학평론이다. 그는 근년에 새별처럼 평단에 등장하여 맹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문학의 여러 장르에 다 장끼가 있는데, 평론에서도 다방면시각에서 문학을 평론하는 인기평론가로 부상하였다. 그의 평론이 돋보이는 점은 그가 동서방의 문학에 정통하고 맑스주의문예학, 유럽의 예술수법을 잘 알고 있으며 조선문학에도 익숙하다는 점이다. 그 이론전개가 넌리적이고 설복력이 강하다… 김관웅은 동서방문학에 정통한 학자형 평론가로 우리 문단의 작가들의 창작을 잘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망한 평론가이다. 평단은 그에게 기대하는바가 크다.》(박충록 《중국조선민족문학비평연구》. 민족출판사. 2003년. 107∼109쪽을 참조.) 박충록교수의 평가처럼 김관웅교수는 동서고금의 문학사와 문학리론에 대해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역사, 문화 등 문학 밖의 기타 문화 분야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그릇이 큰 학문적 스케일과 합리한 지식구조를 가진 김관웅교수는 50년대에 대학공부를 한 우리 같은 기성세대문인들에 비하면 분명히 우세를 갖고 있다. 김관웅교수는 한필의 흑마마냥 선배평론가들의 유력한 경쟁자로 나타났다. 《청출어람이승어람(靑出於藍而勝於藍)》이고, 후에 난 뿔이 우뚝하다고 나는 우리 평단에 김관웅교수 같은 유망한 신진평론가가 나타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는 김관웅교수에게는 탄탄한 학문적인 준비만이 아니라 천생적인 평론가의 기질도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수한 평론가는 작품의 해명과 취미의 교정가이면서 불의에 도전하는 영원한 《도전자》이고 《시비군》이여야 한다. 한사람이 평론가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감상능력의 수준여하에 달릴 뿐만아니라 그 사람이 시비 가르기를 좋아하고 변별력이 강한가 약한가에도 달린다. 극히 이지적인 소크라테스로부터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니체에 이르기까지 무릇 대평론가들은 모두 불의에 도전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쟁투적 비평을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마디로 평론가들은 세상만사에 대하여 시비 가르기를 좋아하는 《시비군》의 기질을 가져야 하고 스페인 투우장의 뜨개소 같이 용감하게 뜨고 박는 기질을 가져야 한다. 김관웅교수는 천성적으로 이런 뜨개소 같이 용감하게 뜨고 박는 저돌적인 성향과 기질을 갖고있다. 김관웅교수는 급하고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내는 성미를 갖고 있다. 그는 기교를 부릴 줄도 모르고 아첨하지도 않는다.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시도 참지 못한다.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은 워낙 시비를 마음속에 두고 겉으로 관용을 내비쳐야 하는 법이지만, 그는 성격적으로 관청에서 벼슬을 하는 것보다는 글방에서 선비노릇을 하는 게 적성에 더 맞는 것 같다. 김관웅교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하고야마는 성격을 가졌다. 설사 상대가 선생이든, 선배이든, 친구이든,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정계의 요인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김관웅교수의 사전에는 숫제 《거짓》이나 《아첨》 같은 단어는 없는상 싶다. 그는 학문적 견해나 정치적 견해를 그때 그때의 세류에 따라 수정하거나 바꾸는, 바람 따라 돛 다는 속물근성이 가득한 평론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대 바른 인격의 소유자이다. 김관웅교수는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내다보니 최근 몇년동안만 해도 다섯번이나 필화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입덕》을 많이 입은 셈이다. 그래서 그는 조화보다는 쟁투가 더 많은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그 쟁투가 번번이 그의 옳음과 대방의 그름으로 인해 벌어진 것만은 아니지만, 십중팔구는 그가 옳았다. 김문학씨와 김관웅교수사이의 오랜 논쟁과정에서 그는 처음에는 문단의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고 많은 불이익을 당했지만 나중에는 그가 완전히 옳은 것으로 판정이 났다. 이처럼 김관웅교수는 쟁투로 점철된 문단생활을 하다 보니 많은 동지를 규합하게 된 동시에 또 많은 적을 만드는 결과에 이르게 되였다. 한마디로 그는 애증이 분명하고, 옳고 그름은 분명히 밝히려 고집한다. 그는 사랑과 증오,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물타기를 하거나 줄타기를 하거나 중용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미우면 밉고 고우면 곱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다고 똑 부러지게 말한다. 에누리하는 법이 없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객관의 평가도 아주 양극적이다. 그래서 김관웅교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겉보기에는 터프해도 사귀여보면 다정다감하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와 함께 《잘난체하는 놈》이요, 《뜨개소》요, 《괴짜》요 하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살아오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떤 사리를 볼 때 동양사람들 이를테면 우리 조선족은 그 사리를 객관적, 이성적인 논리구조에 따라 보는 서구인에 반하여 주관적, 감성적으로 보려는 극단적인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 예컨대 로씨야의 위대한 문호 똘스또이는 생전에 악처에 늘 시달렸다. 똘스또이 자신은 물론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은페한다는 법 없이 공개적으로 말하였다 한다. 그런 사실이 주관적 사고를 하는 우리 조선족들에게 큰 착오로 여겨져 말썽이 자자하기 마련이지만 객관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들은 똘스또이의 이미지에 루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조선족은 사리를 봄에 있어서 훌륭하면 모두가 훌륭해야 하고 그렇지 말아야 한다는 극단 논리에 사로잡히는 것이 상례이다.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구조에서 헤어 나와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의 공(功)과 과(過)를 객관적으로 전면적으로 평가함과 아울러 그의 과(過)로 공(功)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 요즘 우리 평단의 어떤 평론가들은 온통 중간에서 시비를 캐는 것을 말리고 남의 귀에 거슬리지 않는 찬송가만 부르고 만세삼창만 외치고 있다. 심지어 자기를 욕하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욕해도 비평은커녕 맞장구를 치면서 잘한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또 어떤 평론가들은 오늘날의 상업주의에 물젖어 돈이나 생기고 이득이나 생기면 달갑게 거짓말을 하고 칭찬을 한다. 이런 유순한 무 골격 평론가, 세류를 따르는 바람잡이평론가, 상황에 따라 향배(向背)를 달리하는 눈치보기평론가들이 번성하는 이 문단에서 문학은 일정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잃고 있다. 문학창작에 대한 감시와 감독의 기능을 잃고 있다. 이런 지조 없고 주체성이 없는 문인들이 있는 문단에서 좌충우돌하며 불의와 싸우는 흑마 같은 김관웅교수가 있다는 것은 우리 문단의 자랑이고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김관웅교수의 인격적 매력은 바로 그 저돌성과 쟁투성에 있고,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그 의로움에 있다고 본다. 비록 이러한 저돌성과 쟁투성이 앞으로도 그에게 많은 불이익을 가져다줄 소지는 많지만 그렇다고 그 모난 것을 다 죽이고 점잖은 젠틀맨이 되고자 한다면 그때는 김관웅교수가 자기의 본질을 잃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김관웅교수가 김관웅교수로 되지 않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는 하지만 모난 돌이야말로 좋은 돌이다. 우리 문단의 흑마(黑马)― 김관웅교수가 앞으로도 그 날카로운 모를 죽이지 말고, 그 강인한 초지(初志)를 굽히지 말고 계속 용왕매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동시에 문단쟁명에서 경우에 따라 자제도 하고 수단과 방법에도 유의하고 표현의 강약완급에도 신경을 쓰길 바란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야 비판적 사실주의문학을 올바른 궤도에로 올려 세우고 러시아문학의발전방향을 리드한 벨린스키처럼 김관웅교수가 중국조선족문학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대비평가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연변문학>> 2006년 7월호에서 전재
43    [수필] 나의 좌기(坐驥) 댓글:  조회:4631  추천:78  2006-07-18
나의 좌기(坐驥) 김 관 웅 며칠 전, 나는 학교로 가다가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는 나의 제자 마금과(馬金科)를 만났다. 한국 충북에 있는 제천대학 중문학과에서 중국어를 배워주는 객원교수로 있다가 여름방학에 휴가차로 올아 온 터였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나서 내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는 무람없이 한어로 롱담을 걸어왔다. 《선생님의 좌기(坐驥)는 여전하십니다. 허허허》 좌기(坐驥) - 앉을 좌(坐)자에 천리마 기(驥)자의 합성어이니까 타고 다니는 천리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보통 인간들이 타고 다니는 비루먹은 말이나 조랑말 따위가 아니라 옛날 무사들이 전장에서 종횡무진으로 타고 다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전마(戰馬)를 일컬을 때 쓰는 고색(古色)이 창연한 낱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제자의 롱담에 응수를 했다. 《암 여전하구말구, 내게는 이 좌기(坐驥)가 관운장의 적토마(赤ꟙ馬)요, 동키호테의 로시난테란 말이야, 허허허》 아마도 누구라 없이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한국의 교수님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여서 이런 롱담을 한 것이리라. 한국에서 교수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요, 또 어쩌면 사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연길이고 연변대학이 아닌가 한다. 작년 내가 한국 대전의 배재대학에 객원교수로 있을 때의 광경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교수들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적잖케 자가용을 끌고다녀서 학교의 캠퍼스는 말그대로 승용차 천지였다. 때로는 학생들이 교수님들의 전용주차장에 주차를 시켜서 말썽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런 갈피 없는 생각에서 잠겼다가 문득 끌고 가는 내 자전거를 내려 보노라니 12년 전을 회상하게 되였다. 큰 딸애가 17살 초중을 마치고 연길시 2중에 입학하게 되였을 무렵이였다. 연변1중에 지망했지만 단 5점 차이로 1만 2천원을 내야만 연변1중에 입학할 수 있었다. 1만 2천원을 내놓겠으니 연변1중에 가겠는가고 딸애에게 물었었다. 제힘으로 안 되는 일을 엄마, 아빠의 억울한 돈을 팔아가면서는 절대 안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큰 딸내미가 대견스러웠지만 집사람은 기어코 돈을 팔면서도 가라고 설복하려고 했으나 막무가내로 안가겠다고 뻗쳤다. 큰 딸내미는 고집스러운 점만은 나를 꼭 빼닮았다. 1만 2천원을 안 쓰게 된 우리 부부는 그 대신 자전거라도 좋은 걸 사주려고 그때 600백 원을 호가(呼價)하는 제일 좋은 소형 곤차(坤車 )-녀자용 자전거를 사주었다. 자전거바퀴의 대소에 따라 중국에서 자전거는 28, 26, 24로 나뉘는데 큰 딸애의 자전거는 제일 작은 24이다. 아이들의 장난감 자전거보다 바퀴가 좀 더 클 따름이다. 큰 딸내미가 고중을 다니던 3년 동안을 타다가 외지대학에로 가고 작은 애가 자전거를 탈 나이가 되였지만 왼손잡인지라 자전거도 왼쪽에 써서 끄는 꼴을 보니 하도 안돼서 언니자전거를 물려주는 것을 내가 오히려 말렸다. 까마귀 날자 배떨어진다고 마침 내가 술 먹고 자전거를 잃어버리다 보니 큰 딸내미의 소형 곤차(坤車)는 내가 물려받게 된 것이다. 그 때로부터 장장 9년 동안 큰 딸내미의 소형곤차는 나와는 떼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 나의 애지중지하는 좌기(坐驥)로 되였다. 173cm의 키에 80kg의 체중을 가진 내가 자전거를 탄 모습은 사실은 적토마를 탄 관운장이나 로시난테를 탄 동키호테에 비기기보다는 땅딸막한 나귀를 탄 뚱보 산쵸 빤싸에 비기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마누라도, 제자들도 교수의 체신에 맞지 않는다고 타고 다니지 말라고 했으나 체신이고 뭐고 돈 안들고 편리하기만 하면 그만이 아닌가. 나의 좌기(坐驥)는 적어도 땡전 몇 푼이 안 들고 아무런 품도 안 들어서 좋다. 내가 이 좌기를 타고 다닌 9년 동안 자전거 수리방에 가본지 거퍼 서너번 번도 안 된다. 길거리에서 바람을 넣느라고 20전만 팔면 무난하게 두어주일씩은 타고 다닌다. 부대에서 나는 마부노릇을 하면서 말을 많이 타보았기에 말타기가 얼마나 거치장스러운지 잘 알고 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여물을 먹이고, 물을 먹이고, 마구간에서 분뇨를 쳐내고, 매일마다 털을 빗겨주고, 정기적으로 말발굽을 깎아내고 철을 신겨야 하고 .... 정작 타고 출타를 하려면 말안장을 올려야 하고 자갈을 물려야 하고 참으로 거치장스럽기 그지없다. 어디 이뿐인가. 군마(軍馬)가 하루에 먹는 여물 값은 우리 병사들이 화식대보다 서너 배나 더 많았다. 나의 좌기(坐驥)는 돈 안 들고, 품 안 드는 리점만 있는게 아니다. 또 내 좌기(坐驥)는 무공해 교통수단이다. 이 지구에 단 한점의 유독가스도 방출하지 않으면서 매일 가장 효과적인 신체단련을 한다. 캠퍼스 안에서는 물론이고 시가지에 나가도 나는 언제나 내 좌기를 타고 다닌다.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량쪽 귀전과 량 볼로 시원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그렇게 시원하고 상쾌할 수가 없다. 자가용 안에서 에어컨을 틀어놓았다고 해야 이렇게 시원하고 쾌적할 수 있을까? 요즈음은 우리 연변대학에도 자가용바람이 세차게 불고있다. 내가 소속된 조선-한국학 학원에만도 이미 4명의 교수가 자가용을 굴리고 있다. 캠퍼스 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자가용 안에서 내가 내 좌기를 타고 다니는 것을 건너다보면서 미소를 짓군 한다. 아마도 대부분은 선의적인 미소들일 것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시대의 발전에 뒤처져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나를 비웃는 웃음도 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웃든 말든 나는 내 사랑하는 좌기(坐驥)와 더불어 10년 이상은 연변대학 캠퍼스를 더 누벼야 할 것 같고, 30년 이상 사랑하는 연변 땅을 더 누벼야 할 것 같다. 금년에 90세인 나의 아버지는 지금도 자전거를 거뜬히 타시고 연길의 거리거리와 골목골목들을 누비시지 않은 데가 없으시다. 만주국시절 전 만주국의 사이클 챔피언의 당년의 름름한 모습을 재현하기라도 하듯 작년에는 홀로 자전거를 타시고 연길에서 도문까지 하루 동안에 거뜬히 왕복행을 하기도 하셨다. 기니스북에 오를만도 한 장거(壯擧)이니 자식된 나로서는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나의 아버지만큼 자전거를 타고 건강하게 살려면 아직은 34년이라는 긴 세월이 더 흘러야 한다. 하지만 다른 것은 아버지를 이어받지 못하더라도 자전거사랑만은 이어받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사랑하는 좌기(坐驥)를 타고 내 고향 연길의 거리를 신나게 달리고 있다. 2006년 7월11일 연길에서
42    동키호테타입과 햄리트타입 그리고 제3의 인간형 댓글:  조회:4707  추천:46  2006-04-20
동키호테타입과 햄리트타입 그리고 제3의 인간형 김 관 웅 지난 여름의 어느 등산의 점심시간이였다. 산정의 나무 그늘밑에서 도시락들을 거의 다 비워가고 가지고 간 맥주캔들도 다 비워질 무렵에 륙십에 가까운 XX형이 늦장가를 드느냐 마느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으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아직 미성년인 제 새끼 둘에 후처감으로 지목된 녀자의 미성년의 자식 둘, 이렇게 자식 넷을 재구성하여 여섯식구의 새 가정을 꾸리시겠다는게 당사자 XX형의 드팀없는 결심이였다.처음에는 나를 비롯한 반대론자들이 우세였다. 득과 실을 따져 볼 때 득(得)이 전혀 없는것이 아니라 실(失)이 너무 크다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이구동성의 의견이였다. 늦게 장가를 든 XX형은 자연히 자식농사도 늦게 시작하여 큰 아들라고 하여 금년에 대학에 들어갈 고3이고 작은 애는 겨우 소학교 졸업학년이다. 녀자쪽도 아이가 둘이여서 상황은 비슷했다. 그러니 자식들의 뒤바리지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였다. 그런데 서발 장대기를 휘둘러도 거칠것이 아무것도 없는 살림형편에 바야흐로 외지에 가서 대학공부를 하고 고중을 다녀야 할 각성받이 네 자식의 뒤바라지를 과히 해낼 수 있느냐 하는것 이 반대파들의 가장 주된 반대의 의거였다. 반대파의 맹장들인 녀자들이 가장 실제적인 측면에서 xx형을 설복하려고 하였다. 정 마음이 든다면 대방도 과부이고 xx형도 홀아비이니 서로 사랑하는 애인으로 서로 오가면서 사는게 좋지 법률적인 책임과 도덕적 의무에 결박당하는 결혼 같은 모험은 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권고했다. 분명히 충언이였다. 별로 귀에 거슬리지도 않는 충언이였다. 이런 충언에도 xx형의 태도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연길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녀자의 집에 가서 살림을 합한다는게 아닌가. 게다가 연길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작은 아이까지 녀자가 있는 도문에 전학시켜 가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녀자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여 졌다. xx형이 이렇게 대꾸하자 반대파 녀자들쪽에서 항의가 쇄도했다. 이렇게 되자 XX형도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어떤 녀자이기에 xx형이 아파트를 처분하는것마저 불사하고 기어코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는가? XX형보다 10년이나 년하라니 얼마나 젊고 예쁠까? 음식솜씨나 매너마저 사람을 죽여 준다니 다들 그 녀자한테 호기심이 동하여 다음 등산은 도문으로 행선지를 정했고, 산에서 내려와서는 곧바로 그 녀자의 집으로 가서 약혼턱 겸 신부감 구경도 하기로 했다. -- 남자들이란 녀자한테 빠지기만 하면 세상이 다 녹두알만해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옛날 당현종은 양귀비에 혹해 3천궁녀도 마다하고 조정의 정사(政事)마저 게을리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옛날뿐이랴. 지난 세기 30년대에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8세는 40도 넘은 과부 심프슨부인한테 반해 임금의 옥좌마저 마다하지 않았던가. 우리 XX형이 민초로 태여났으니 이 정도에 머물렀지, 만일 룡종(龍種)으로만 태여났으면 결코 당현종이나 애드워드 8세에 짝지지 않을 정종(情種)으로 세상에 소문을 냈을텐데... 나는 XX형과 반대파들 사이의 설전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 이런 생각을 굴리였다. XX형은 금년에 쉰아홉이니 공자의 말대로 하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지나서 이순(耳順)의 나이에 접어 든다. 분명히 청춘의 나이가 아니다. 그러나 20대나 30대의 청년들처럼 자기를 생각하고 있는것이다. 봄에는 봄에 할 일이 있고 ,여름에는 여름에 할 일이 있고, 가을에는 가을에 할 일이 있고, 겨울에는 겨울에 할 일이 있다. 객관에서 볼바에 xx형은 인생의 가을이라도 마가을에 와 있는데 마땅히 인생의 봄철에 해야 할 일을 인생의 마가을에 들어 서서 하시려는 잡도리이다. 마치도 강남의 농사군들이 이모작을 하듯이 다시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그 사랑의 곡식을 가꾸려 하고 있는것이다. 북국(北國)의 기후와 농사절기를 모르고 농사를 짓는 농부에 비길수도 있다. 바로 이런 동심에 살기에 XX은 나이에 비해 언제나 젊어 보이고 혈기 또한 좋은것 같다. 또 바로 이런 동심이 계속 살아 있기에 시를 쓰고 있지 않는가. 3년전에 내가 롱담 반 진담 반으로 XX형의 성격을 류형학적으로 분류를 할 것 같으면 타입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리웠던 것이 아주 적중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심리학에는 타입을 객관적 현실상황을 정시하지 않고 주관적인 리상이나 동기나 판단이나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주관적 성향을 지닌 심리류형을 가리킨다. 랑만주의자라고 할수 있다. 현실이란 이 자기가 서있는 립지를 무시하고 리상의 하늘에서 날으려고만 하는 랑만주의자들은 참으로 지금 한창 류행되고 있는 시체말로 표현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쑈싸(瀟灑)한 인간이고 삶의 의욕과 용기가 가득한 아름다운 인간임이 분명하다. 단 하루를 살더라고 행복하기를 원하는 랑만주의자, 리상주의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랑만주의자, 리상주의자들의 이러한 이 별로 오래 가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남을 나는 적지 않게 보아 왔다. 한 인간을 다음과 같은 메타포를 동원하여 설명할수 있다. 비행기의 가장 큰 기능은 하늘에서 나는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가 하늘에 나는 목적은 인간을 한 고장으로부터 다른 한 고장의 지면에 내려 놓으려는데 있는 까닭에 비행기는 하늘에서 일정한 시간을 비행하다가는 반드시 지면에 착륙해야만 한다. 하늘에서 날기만 하고 땅에 내릴 줄 모른 비행기는 비행기(飛行機)가 아니라 살인기(殺人機)이다. 마찬가지로 주관적리상만 추구하고 객관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동키호테타입의 인간들은 흔히 하늘에 떠오르기는 했으나 땅에 내릴 수 없는 비행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하늘에 떠오르기가 무서워서, 하늘에서 날다가 땅에 착륙할 수 없을가바 무서워서 그냥 활주로에 정박해 있는 비행기는 비행기기 아니다. 비행기인 이상 리륙하여 하늘에 날아올라 가 보아여 할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XX형은 용감한 인간, 아름다운 인간임이 분명하다. 단 하루를 살더라고 행복하기를 원하는 랑만주의자, 리상주의자임이 분명하며 제 주장과 생각대로 살아가는 동키호테타입임이 분명하다. 동키호테타입과 정반대의 타입은 햄리트타입이다. 햄리트타입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주관적인 리상이나 동기나 목적 같은 것이 분명한 점에 있어서는 동키호테타입의 인간들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햄리트타입의 인간들은 그 실현의 객관적가능성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쓴다. 생각은 뻔하지만 객관적인 여건만 고려하면서 우물쭈물 자기의 생각을 행동에 옮기려 하지 않는다. 마치도 햄리트가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앞뒤 좌우를 재기만 하고 눈치만 보다가 복수의 기회를 다 놓치고 종당에는 자기의 목숨마저 잃는것처럼 햄리트타입의 인간들은 주저하고 꾸물거리고 좀자르다가 일생을 다 보내기가 일수이다. 햄리트타입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생각에서는 거인이나 행동의 난쟁이라면 동키호테타입의 성격을 가진 인간들은 생각에서는 난쟁이나 행동에서는 거인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과에는 대학시절의 두 동창생이 있다. 한 분은 에서 나오는 장비나 애서 나오는 리규 같은 생김생김에 완전히 동키호테적인 타입의 성격을 갖고있어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남을 웃기는 일도 만들어 냈으나 남들이 해보는 일은 거의 과감하게 다 해 본데 반해 다른 한 분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느는 소심한 군자여서 한평생 살아 오면서 큰 실수를 저지른적은 한번도 없으나 또 그렇다고 대단한 업적을 쌓아올렸거나 세인을 놀래우는 장거를 한 일도 없다. 사실 동키호테타입과 햄리트타입은 각자가 모두 각자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허물없는 사이인지라 나는 늘 이런 롱담을 건네군 한다. 동키호테타입의 상격을 가진 그 형의 일생은 바다의 파도처럼 기복이 있고 모험과 실패와 그리고 그에 따르는 스릴이 있는 일생이라고 할수 있다. 이와 달리 햄리트타입의 성격을 가진 그 형의 일생은 마치도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하고 변화와 자극이 적은 일생이라고 할수 있다. 나는 늘 이 두 형을 맞대 놓고도 이런 롱담을 하군 한다. 동키호테타입의 인간이나 햄리트타입의 인간이나 모두 인간류형의 량극이여서 그다지 바람직한 인간형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인간향은 동키호테타입과 햄리트타입아라는 이 량극의 복판에 있는 제3의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꿈과 랑만도 있고 현실감각도 뛰여난 인간들이 바로 이런 제3의 타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주관과 객관 그리고 리상과 현실, 목적과 수단을 잘 조화시키고 통일시켜 나가는 능력을 가진 인간성격은 우리가 희구하는 바람직한 인간형인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리상적인 인간형을 만들어 내자면 동키호테와 햄리트를 한데 골고루 반죽하여 새로운 제3의 인간형을 빚어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같은 절대자이면 또 모르겠으나 나 같이 바보적 기질이 다분한 인간이 동키호테타입과 햄리트타입이라는 이 량극 사이에서 적절한 도를 장악하느라고 줄타기를 한다는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41    (책서문) 나의 익우량사-채영춘 댓글:  조회:4757  추천:39  2006-04-18
(책서문)나의 익우량사-채영춘 김 관 웅 무슨 책이든 읽고 리해하려면 우선 그 책의 작자의 인간성을 알아야 하고, 그 인간성을 알려면 어린시절부터 알아야 한다. 영춘이가 나보다 석달 먼저 《귀가 빠쪘다》고 언제나 《형》이라고 으시대기는 하지만 사실은 모두 1951년에 태여난 동갑이다. 영춘이와 나는 다섯살때부터 집안의 말소리마저 서로 다 들리는 이웃에서 함께 자라난 송아지 동무이고, 소학교 6년 세월을 한 반급에서 그림자처럼 붙어다닌 불알친구이고, 중학교도 한 학교 이웃 반급에서 함께 마친 클라스메이트나 다름없는 중학동창생이다. 어디 이뿐이랴. 영춘이는 집체호를, 나는 군대를 거쳐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서로 비슷한업(영춘이는 주로 언론과 출판, 나는 주로 문학)에 몸을 담고있다 보니 보름이 멀다하게 각종 문화인들의 행사에 참가하여 회의를 같이 하고 술자리를 같이하군 한다. 그리고 그 인연이 계속 이어져 지금은 사돈(나의 막내동생과 영춘의 막내 누이동생은 부부이다)까지 되였으니 영춘이와 나 사이의 인연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하니 내가 영춘이의 인간성을 안다고 해도 아마 머리를 저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영춘이 부친 채택룡(1913∼1998)선생은 1927년부터 《카프》계렬의 잡지에 처녀작을 발표하기 시작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원로일 뿐만 아니라 중국조선족문학의 중요한 개척자의 한분이시다. 문학이라도 주로 아동문학울 하는 엄부(嚴父)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서 영춘이의 예술적 천부는 일찍부터 우리들의 눈에 띄이기 시작했다. 늘 영춘이의 손을 잡고 습자련습을 시키거나 영춘이가 영화만 보겠다고만 하면 무조건 지갑을 꺼내여 돈을 주시군 하는 영춘이 아버님을 볼 때마다 나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그리고 영춘이가 싫어하는데도 예술학교에 피아노레슨을 받도록 손목을 잡고 가는 영춘이 아버지의 뒤 모습을 바라보거나 혹은 북경이나 외지에 출장 갔다가 영춘이에게 사다주었다는 고급스러운 크레용이나 연필 같은것은 구경할 때에 그저 부럽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은 영춘이의 부친이 의도적으로 예술에 대한 자식의 흥미를 키워주고 나아가서는 예술쪽으로 자식을 이끌기 위한 고심(苦心)이였음이 분명하다. 벌써 일여덟살 때부터 영춘이는 부친의 옥필(玉筆)을 닮아서 글씨를 아주 이쁘게 썼고 그림도 아주 재치 있게 그렸다. 나와 함께 아이스호케이경기를 보고 와서는 공책이나 지어는 베니다로 만든 자기집 미닫이에도, 판자나무로 막은 동네의 울타리들에도 언제나 영춘이가 그려놓은 그림들로 울긋불긋했다. 아무튼 부친이 배양한 덕분인지 아니면 본인의 천부 때문인지는 잘 몰라도 영춘이의 예술적 재능은 일찍 피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춘이는 소학교 1학년 때부터 선생님으로부터 글을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늘 들어왔으며, 나는 집에서 영춘이의 이런 예술적 재능 때문에 나의 어머님으로부터 늘 꾸지람을 들어왔다. 이뿐만 아니라 원족에 갔다와서 마저도 영춘이 때문에 며칠씩 두고 내 어머님한테 욕을 먹군했다. 영춘이는 노래를 시키니 벌떡 일어나서 그렇게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는데, 너는 뭣이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지 못해 하는냐, 주로는 이런 욕들이였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리론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유년시절의 조기경험과 기억들은 마치도 암벽(岩壁)에 글자를 아로새기듯이 영원히 마멸되지 않는 흔적을 남겨놓게 되는 법이다. 이런 것들은 한 인간이 어른이 된 이후의 인격이나 재능의 형성에 커다란 영형을 미친다. 한마디로 영춘이가 유년기에 부친으로부터 받은 예술계몽교육은 어른이 된 후에 언론, 방송, 출판분야의 지도자로서 훌륭하게 소임을 다 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작용을 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영춘이가 벼슬길로 전향을 하지 않고 화가의 길을 계속 걸어 왔더라면 오늘날에는 큰 화가로 대성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도…… 영춘이가 유년기와 소년기에 누린 행복은 너무나도 짧았다. 영춘이의 부친이 영춘(永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자식의 앞길이 영원히 봄빛으로 무르녹을 것을 바란 기대와는 달리 영춘이의 앞길에는 너무나 일찍이 무정한 서리와 폭설이 내렸다. 이 때 아닌 서리와 폭설은 영춘이에게 따사로운 봄빛 같은 사랑을 몰부어 주셨던 영춘이의 부친이 1959년에 이른바 《우파》라는 감투를 쓰게 되면서부터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영춘이의 부친과 함께 《우파》로 두들겨 맞았던 난우(難友) 김학철선생의 말을 빈다면 이른바 《반우파운동》은 《선량한 지성인들울― 정직한 지성인들을― 미친개 때려잡듯 마구때려잡은 치욕의 력사》이고 진시황을 찜쪄먹을 《제2의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같은 철부지마저 소학교 1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59년 늦은 봄부터 영춘이네 집에는 비운이 감돌기 시작함을 어슴프레하게 나마 느꼈다. 나는 영춘이네 가정의 비운을 통해 정치란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인간비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철부지시절에 너무나도 일찌기 알게 되였다. 1964년, 날로 우심해지는 정치적인 박해로 하여 채택룡선생이 조선에 건너 간 뒤로 영춘이네 집은 더욱 비참해졌다. 내가 대학학창시절의 고한문시간에 《학정이 맹호보다 무섭다(虐政猛於虎)》는 맹자의 말을 배울 때 저도 모르게 련상한것은 영춘이네 집식구들이 정치운동의 풍파속에서 겪어온 수난사였다. 영춘이네 집식구들에게 있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정치적인 박해만이 아니였다. 남편과 생리별한 20년 가까운 세월속에서 영춘이의 모친은 자갈치고 모래치는 노가다판의 뜨내기로, 심심산중을 무른 메주 밟듯하는 약초군으로, 심지어는 매탄장(賣炭場)에서 연탄을 실어 나르는 리어커군으로 그야말로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지 않으셨다. 아마도 영춘이 모친의 희생적인 모성애가 없었다면 영춘이네 집은 언녕 풍지박산이 났을것이다. 우리 속담에 《초년 고생은 금울 주고도 못 바꾼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집이 가난하고 불행만 해도 안된다. 가난과 억압만 있으면 자식들이 주눅이 든다. 가난과 억압이 있으면서도 부모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이 흘러 넘쳐야만 자식들이 주눅이 들지 않고 잘 자랄수 있고 따뜻한 마음을 키워갈수 있는것이다. 온실의 화초들은 온실밖으로 나와 한번만 서리바람을 만나게 되면 순간에 얼어 죽어버릴수 밖에 없지만 엄동의 시련을 겪은 들꽃이나 야초들은 어지간한 추위에는 얼어 죽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법이다. 영춘이가 어린시절에 겪은 역경은 의지의 칼날을 시퍼렇게 세워주는 숫돌같은 기능을 수행했고, 세태염량(世態炎凉)을 일찍이 느낄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선생같은 기능을 수행했다.로신선생은 부친이 갑자기 벼슬자리에서 나떨어지고 옥살이를 함으로 하여 남들로부터 백안시를 당했던 어린시절의 아픈 기억에 비추어 《가세(家勢)가 갑자기 기울어지게 되면 세태염량을 몸으로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적 있는데, 이는 영춘이의 경우에도 맞는 말이다. 그리고 역경은 영춘이로 하여금 인간을 뜨겁게 사랑할 줄도 알고 불의(不義)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할줄도 아는 애증(愛憎)이 분명한 성격을 부각시켜 주었다고도 해야 할 것이다. 국난을 당해야 충신이 나오고 집안이 어려워져야 효자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 가세가 기울어진 까닭에 영춘이가 효자로 되였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영춘이는 오늘의 현실속에서는 보기 드문 효자이다. 우리 부모님들의 말씀을 빈다면 보통정도의 효자가 아니라 《효자문(孝子門)을 세워야 마땅한 효자》이다. 그런데 부모에 대한 영춘이의 뜨거운 마음은 결코 《효》라는 한 글자에 죄다 포괄시킬수는 없다. 영춘이에게 있어서 비록 짧았지만 엄부(嚴父)의 교화(敎化)는 인생의 첫 걸음을 내디디게 한 귀중한 가르침이였고, 자모(慈母)의 피눈물 어린 사랑은 추운 엄동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닐수 있게 해준 은혜로은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아버님에 대해서는 천리인륜(天理人倫)적인 《효》외에도 복잡한 감정이 내재해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춘이는 부친를 통해서 자기의 정신적인 뿌리를 찾을수 있고,부친의 귀환 그리고 부친의 명예회복을 통해서야 만이 모친과 자기 그리고 모든 가족 나아가서는 자기 부친처럼 억울함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서리서리 맺혔던 한을 풀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영춘이가 조선에 나가서 조선공민으로 국적을 바꾸고 19년이나 살아온 부친을 다시 중국으로 모셔와서 억울한 루명을 벗기고 모든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고 공직까지 회복시켜서 천수(天壽)를 다 하도록 극진히 봉양한 일은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글에서 반드시 언급되여야 할 것은 바로 영춘이가 부친를 모셔오기 위해 조선측과 벌려 온 장기적이고도 일구난설(一口難說)의 어려운 교섭과정이다. 영춘이도 이 일에 대해서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 너무 자세한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영춘이가 조선측의 안전부, 외교부 심지어는 김일성수상에게 이르기까지 수 백 통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만은 나도 알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영춘이의 끈질긴 노력과 다함없는 효성은 끝내 조선측 해당부문의 지도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조선측에서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채택룡선생이 부인과 자식들이 살고 있는 중국에로 귀환하는 것을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구체적인 내부사정을 알 수 없는 조선측 회령해관의 출입국을 관할하는 일군들이 《이런 전례가 없었다》는 말을 거듭 되뇌이면서 채택룡선생의 려권과 증명서류들을 검사하고 또 검사했다는 에피소드만은 영춘이가 나한테 대충 말해준적이 있다. 자기의 부모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어찌 남들을 사랑할 수 있고 나아가서 민족과 나라를 사랑할 수 있으랴. 그래서 나는 연변탤레비죤방송국과 연변출판국에서 지도자로 있으면서 쏟아 부은 연변지역사회와 우리 민족에 대한 영춘이의 뜨거운 사랑을 그의 지극한 효심(孝心)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영춘이가 묶어 내놓은 이 에세이집에는 도합 15편의 연설문, 편의 수필, 8편의 론문이 수록되였는데, 그 대부분이 연변T방송국과 연변신문출판국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발표한 연설과 론문들 중의 일부분이다. 이 글을 통해 연변TV프로그램 총체전략의 주요한 설계사, 지휘자 그리고 연변민족출판 생존발전전략의 기획인 그밖에 연변축구구락부회원 초대회장으로서의 영춘이의 뚜렷한 민족우환의식, 확실한 문화자세, 랭철한 사고와 판단력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을 현실화하는 조직력과 실천력을 엿볼 수 있다. 연변TV의 20년을 반추하면서 영춘이는 다음과 같이 연변TV가 가져여 할 바람직한 자세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 《세계화시대를 열어가는 연변사람들의 자세와 안목을 키워주는 향도의 방송, 세계에서 한점의 부끄럼도 없는 연변사람의 떳떳한 삶을 부각하는 창조의 방송, 〈연변을 세계에로의〉꿈을 영글어 가게 하면서 21세기 새 연변의 부흥을 이끌어가는 견인의 방송, 중국조선족의 문화창출과 민족문화의 진로개척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선도의 방송이여야 한다.》민족언론의 당면한 자세와 당면한 자세에 대해 영춘이는 이렇게 지적한다. 《시장경제체제의 충격과 조선족공동체가 겪고 있는 혹심한 위기로 우리 말 언론은 휘청거리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이 존재하는 한 우리 언론은 쓰러질 수 없다. 조선족동포사회가 전방위적인 곤혹을 치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언론이 조선족 동포사회를 잘 이끄는 견인차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비상시기라고 생각한다.》 연변의 축구는 단순히 스포츠의 범위를 초월하여 연변의 자존심과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나아가서는 13억 중국에 연변 나아가서는 200만 중국조선족의 존재를 알리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여 왔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점이다. 연변축구구락부 초대회장으로서의 영춘이는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연변TV방송국 국장으로서 연변축구구락부회원 초대회장을 맡아 나섰을 뿐만 아니라 연변의 축구사업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뛰여 다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유태민족이나 서장의 장족같은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민족과는 다른 민족이다. 유태민족이나 장족의 경우에 있어서 그네들의 민족문화를 담는 그릇이 종교인데 비하여 우리의 경우에는 우리 민족문화를 담는 그릇은 비종교적인 교육, 문학예술 및 스포츠 그리고 언론, 출판 같은것이라고 할수 있다. 특히 우리의 말과 글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교육, 문학예술, 언론, 출판 같은것이 살아야만 우리 민족은 자신의 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 인생태도의 측면에서만 영춘이와 나를 비교한다면 영춘이는 입세(入世)적이고 나는 출세(出世)적이여서 영춘이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웅심을 품은 유가(儒家)적 선비형이라고 한다면 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의 리상을 지닌 도가(道家)적인 은사(隱士)형이라고 할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인간세상의 벼슬을 시답잖케 보는 내가 영춘이를 존중하는것은 결코 영춘이가 TV국장, 출판국장 같은 벼슬자리에 있다고 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영춘이는 지금에 이르기 까지 TV국장이나 출판국장 같은 벼슬자리를 자기 일신의 부귀와 영달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벼슬자리 지키기에만 고심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문화를 지키는 참된 파수군이 되여 우리 민족문화를 지키고 살려나가기 위해 자신의 혼신을 다했기 때문이며, 아울러 오래 동안 벼슬길을 걸어 왔지만 영춘이가 본연의 참된 인간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춘이를 단순한 친구로만이 아니라 언제나 부모에 대한 나의 효심(孝心)과 민족에 대한 나의 애심(愛心)을 비추어 보고 내 삶의 자세와 의지를 점검해 보는 귀감(龜鑑)으로 여기여 왔다. 특히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환경이 그렇지 않다고, 시운(時運)이 없다고 스스로 한탄하고 주저 앉으려 할 때마다 나는 영춘이를 머리속에 떠올리 군 했으며, 그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군 하였다. 내가 군대에서 나의 아버님의 해방전 력사문제로 하여 입당하는데 큰 난관에 봉착했을 때도, 그토록 되고 싶던 군관으로 승진되지 못하고 퇴대하여 지방에 돌아온 후 좌절과 패배의 고배를 마시며 방황할 때도 영춘이를 머리속에 떠올리고는 다시 삶의 용기와 의지를 되찾 군 했다. 왜냐하면 내가 삶의 길에서 봉착한 난관들은 영춘이가 봉착한 난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기 때문이다. 영춘이나 나나 아직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면서 자아도취에 빠져있을 나이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 어깨의 짐은 무겁다. 나는 내 친구 영춘이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 강인한 의지와 투혼으로 자신의 삶의 길을 걸어나가고 우리의 연변 지역 사회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의 문화 창달을 위해 더 많은 유익한 일들을 함과 아울러 계속 나의 익우량사(益友良師)로 되여 주리라고 기대하면서 필을 놓는다.
40    (잡문) 매문자(賣文者)와 매심자(賣心者) 댓글:  조회:4858  추천:56  2006-04-14
잡문 매문자(賣文者)와 매심자(賣心者) 바 보 매문자(賣文者)는 옛날부터 있었다. 옛날에는 비록 지금처럼 한 손으로 원고를 주고 한 손으로 돈을 받는 직거래식의 매문은 아니였지만 돈 외의 벼슬이나 봉록 같은 다른 것으로 보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매문자들 가운데서 가장 차원이 높은 매문자는 어용문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용(御用)이라는 이 낱말의 본의는 는 것이다. 그러니 어용문인이란 원래는 임금님이 부리는 문인이라는 뜻 이였으나 후에는 정부나 기타 권력기관에 영합하여 그 리익을 위해 활동하는 등 자주성이 없는 것을 경멸하여 이르는 말로 되였다. 어용문인은 권력본위시대의 산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시대는 권력본위의 시대가 아니라 금전본위의 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시대를 자본주의시대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또 그래서 금전본위의 시대라고 하면 어페이기는 하지만, 오늘의 시대는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자본주의시대와 마찬가지로 역시 금전, 아니 점잖게 표현한다면 공방(孔方)선생의 위력이 대단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국의 속담에는 는 말이 있는데, 지금도 이 속담은 유효하다. 귀신도 부릴 수 있는데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문인도 오곡잡량과 기름, 간장, 소금을 먹고 사는데 문인이라고 돈을 싫어 한다는 법은 없지 않는가. 몰락 량반의 자제인 필자의 조부는 지난 세기 20년대의 평양에서 대서업(代書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니 역시 매문자였음이 분명하다. 현대의 문어구에서 살아오신 필자의 조부는 아마도 조선현대사회의 가장 일찍한 매문자의 한분이였을것이다. 필자 조부의 매문이라야 고작해서 문맹들을 대신하여 편지나 써주고 법원에 올리는 진정서, 상소문 따위의 문서나 대신 써주는데 그쳤던것이다. 만일 30년대말기 일제식민통치의 말기인 암흑기까지 사셨다면 혹시 친일적인 매문이라도 했을 가능성도 있었겠으나 그때까지 사시지 못한 조부이다 보니 친일파의 반렬에 오를 기회마저 없었다. 매문자는 대개 사회적 지위가 낮고 가난하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자였다면 필자의 조부님이 어찌 자기는 일본의 륙법전서를 통탈한 유식한 문인이면서도 자기의 아들(필자의 아버지)은 학교문에도 보낼 수 없었겠는가? 어찌 18세밖에 안 되는 아들(필자의 부친)이 살 길을 찾아 산 설고 물 설은 만주땅에로 혈혈단신으로 떠나가는데도 붙잡지 않았겠는가?조부를 본적 없는 필자는 언제나 조부의 말이 나오기만 하면 로신의 소설 에서 나오는 동명주인공을 련상하군 한다. 필자의 조부님이 사셨던 지난 세기 20년대에 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세상은 많이 변하긴 했다. 그러나 문인들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처지는 그리 많이 변한 것은 아니다.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금전만능의 시대라고 말할 수 없지마는 돈이 없으면 한 시각도 못사는 시대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문학의 상업화, 상품화의 추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세로 우리 모든 문인들에게 육박해 오고 있다. 오늘날 중의 주류문단인 한족문단에서의 상품화경향은 아주 심하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 리국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한평생을 살겠다고 버득거려도 고급승용차는 고사하고 오토바이 한대, 호화형 아파트는 고사하고 비둘기장 같은 아파트 한 채를 천신하지 못하는 우리 연변의 수많은 문인들에게 있어서는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북경이나 상해 같은데 비하면 우리 연변의 상업조합식의 문학생산은 너무나도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 한 점만 보아도 우리의 문학이 순결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연변은 절해고도가 아니므로 한족 주류문단의 상업화, 상품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몇 년전부터 우리 연변에고 아무 아무개가 돈을 받고 누구의 오체르크를 써주었다, 아무 아무개가 무엇을 대가로 누구누구의 글을 대신 써주었다 등등 소문이 심심치 않게 우리들의 귀에 전해오군 했다. 하지만 리아무개, 장아무개가 무슨무슨 장사를 하는 김아무개의 전기체 장편소설을 써주고 각각 만원씩 받았다던가 하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울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장편대작을 써주고 고급승용차나 호화형 아파트 같은 것은 가지지 못하더라도 고작해서 만원이라니?! 오히려 돈 많은 놈들한테서 착취를 당했다는 억울한 생각마저 들고 련민과 동정의 마음마저 생긴다. 요즘에도 아무개가 어쩌고 저쩌고 뒤골목들에서는 소문이 파다하다. 다들 집도 장만해야 하고 아이들도 공부를 시켜야 하고 자기의 호주머니에 얼마간의 용돈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글을 팔아서 살아가는 우리 문인들이 이 상품화의 거세찬 조류속에서 물방울 하나 묻지 않고 살아 간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 세상에 완인(完人)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설사 이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문인들은 적어도 최저한도의 시비감별 능력만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부자가 된 보스나 정상적인 문화활동을 통해 이름을 날리고 돈을 번 명류들을 위해 좀 나발통이 되여 주는 것쯤은 충분히 량해할 수 있다. 또 돈을 받으며 글을 써주어도 무방하다. 매문(賣文)도 하나의 정신로동이니깐. 사실 필자도 매문의 일을 한적이 없지는 않다. 미적가치를 조금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도 원고료를 푸짐이 준다니 밤을 패워가면서 무협소설들을 번역한 경력이 있는 필자로서는 매문이라는 이 직업이 그리 쉽지는 않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길목을 지키다가 보짐을 빼앗거나 은행의 금고를 털어온 강도(량산박의 호걸들이나 청석동의 림꺽정이나 홍길동 같은 의적들은 제외하고)를 위해 수비립전(樹碑立傳)---비석을 세워주고 전기를 써주었다면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김문학은 사실 보짐을 빼앗거나 금고를 턴 도적이나 강도보다도 더 용서할수 없는 죄를 지은 문적(文賊)이다. 자신을 포함한 전반 민족을 팔아먹고 나라을 팔아 먹은 매국배족의 망나니이다. 이런 망나니를 위해 사례금을 받고 글을 써서 하늘 높이 올리 추고도(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몇년동안이나) 추호의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인간은 실로 문제의 인간이다. 잘못한 것보다 잘못한 것을 뉘우칠 줄 모르는 것이 더욱 문제이다.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매문자들보다는 자기의 잘못을 번연히 알면서도 계속 리속만 따지고 풍향만 살피면서 매문자노릇을 계속해 나가는 문인들이 더더욱 문제이다. 필자는 이러한 매문자들을 매심자(賣心者)들이라고 인정한다. 즉 글을 파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인의 마음---량심과 량지마저 파는 자들이라고 인정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매문자로 되는 것은 용서하더라도 매심자는 절대 되지 말고 또 매심자에 한해서만은 절대 용서하지 말자는 것이 필자가 우리 문단의 여러 문우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맹세이다.
39    (단상) 종교의 소외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4708  추천:87  2006-04-13
종교의 소외에 대한 단상 김관웅인간이 신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가? 나는 물론 인간이 신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내고는 오히려 자기가 만들어 낸 신이 인간을 만들어 냈다고 여길뿐만 아니라 달갑게 오체투지(五體透地)를 하면서 신의 노복으로 되여 모든 면에서 신의 의지에 따르려고 한다. 이런 경우를 두고 종교의 소외라고 한다. 이러한 종교의 소외가 다 나쁠까? 유태인은 하나님을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신앙은 강인하고 우수한 유태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첫째, 유태인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유일신-예호와. 즉 하나님을 모시는 종교를 만들어낸 사람들로서 저희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선민의식은 유태인의 독선주의적 성향을 조장해줌과 동시에 강렬한 민족자존의식을 가지게 했다. 유태민족의 민족적자신감은 바로 이런 선민의식과 밀접한 련관성을 가지고 있다. 둘째, 유태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과 약속을 한 민족이고 하나님은 꼭 자기들을 버리지 않고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까닭에 유태인들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락심을 하지 않고 비관하지 않는 강인한 민족정신을 가질 수 있었다. 1800년 동안이나 소실되였던 유태인의 나라를 다시 하나님이 가리켜 주었다는 가나안땅-팔레스티나의 땅에 이스라엘국가를 재건한 기적은 이 점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셋째, 유태인과 하나님과의 약속으로서의 구약은 그들의 경전으로 되였고 또 이런 경전은 유태인들로 하여금 언제나 경전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게 하여 유태인으로 하여금 문화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였으며 뛰여난 머리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노벨상 수상자 총수의 3분의 1이 유태인이라는 점은 이를 증명해 주지 않는가. 넷째,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그들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확립시켜 주었고 민족을 결집시켜주는 강력한 점착제 같은 구실을 하였다. 확실히 하나님은 유태인들이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유태인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은 또 유태인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것이다. 유태인들은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의 노복이 된 값어치를 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2006년 4월 10일 연길에서
38    (칼럼) 신 <<서옥설(鼠獄說)>> 댓글:  조회:4518  추천:56  2006-04-13
신 김관웅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조선의 근대화를 일본이 도왔다'고 교과서에 버젓이 써넣어 한일 관계에 다시 '교과서 왜곡 파도'가 밀려오고 독도의 영유권을 놓고 한·일간에 다시 분쟁이 불거지고 있는 시점에서, 한승조 전(前) 고려대 명예교수의‘일제 식민지배는 축복’ 기고문 등으로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가 “친일보다 더 나쁜 건 친북”이라며 사실상 친일세력을 옹호하는 글을 올려 요즘의 한국은 시끌벅적하다. 한국에서의 국론의 분열은 한·일 관계개선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부지중 조선조 중기 임제(林悌)의 「서옥설(鼠獄설)」이라는 우화 속의 장면이 떠오면서 이를 패러디할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쩌는 수가 없다. 조(韓)씨네 집 자손들이 왜(倭)씨네 조상이 몇 십년 전에 자기네 아버지를 타살하고 어머니를 강간하고 자기네들을 구박했다고 반세기가 지나도록 거듭 상소를 했다. 혼암한 법관은 끄떡 끄덕 졸다가 눈을 떠보니 또 이 두 가문의 후손들이 몰려와서 콩팔칠팔 떠들어 대는지라 시끄럽다는 듯이 말들을 해보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피고인 왜씨네 후손들이 먼저 "한씨네는 우리들처럼 지면 졌다고 앗싸리하게 승복하는 멋도 없고, 지나간 일을 앗싸리하게 잊어버리는 멋도 없는 너무 끈질긴 족속들입니다. 이제는 백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이렇게 그냥 물고 늘어지고 있지 않고 뭡니까? 물론 일부 한씨네 후손들 가운데서 일부 제 정신이 있는 친구들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라고 법관을 향해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보세요, 똥 뀐 놈이 성낸다고 오늘도 말머리를 가로채는 걸!!! 왜씨네는 자기 참회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족속들입니다. 백년이 아니라 천년이 지나도 저질렀던 죄는 죄가 아닙니까? " 하지만 법관은 숫제 두 눈을 감고 있는지라 이에 조씨네 자손들은 법관을 행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그래도 법관은 못들은 체 했다. 힘의 논리, 돈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법관 역시 힘 있고 돈 있는 왜씨네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게 뻔했다. 판국이 그러하니 왜씨네는 더욱 기고만장해 졌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우리 아버님께서 손을 대지 않아도 너희들의 애비는 이미 병이 골수에 들어 다 죽게 된 거였어. 매일 술 처먹고 마누라나 패고 가정불화나 일으키고 또 게을러 빠져서 제 새끼들도 거두지 못하는 병신 같은 애비를 가지고 뭐가 생광스럽다고 그냥 떠들어대는 거야? 못난 남편을 만나 고생하는 너희들의 어미가 하도 불쌍해서 우리 아버님께서는 애첩으로 들어 앉혀 첩살림을 차려주고 너희들도 몇 십년 동안 잘 거두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강간이 웬 말이냐? 우리 아버님께서 너희들의 살림 밑천을 마련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너희들은 아직도 쪽박을 차고 거지노릇을 하고 있을거란 말이야! 안 그래?"법관의 경향성을 눈치 채고 왜씨네 후손들의 기고만장함에 기가 눌린 한씨네 가문의 한 얼간이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을 한다. "그래요, 계부님께서는 우리 집을 틀어쥐면서부터 가풍이 판연히 달라지고 살기도 많이 나아졌어요. 우리 집에는 계부님이 맞은 게 축복이었지요. 만일 계부님이 아니고 아라사(俄羅斯)씨나 화(華)씨 강도를 맞아들였더라면 아마도 우리 집은 아마도 풍비박산이 났을 겁니다. 오늘의 우리 가문이 건재할리가 없었겠지요. 우리 어머니를 강간하고 목을 비틀어 죽여 버렸을 것이고, 우리 자식들도 몽땅 칼로 도륙을 냈을 겁니다. 입이 비뚤어져도 말이야 바른 대로 해야지요. 우리가 오늘 이만큼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된 것도 모두 계부님께서 엄히 단속하고 가르친 덕분이 아니겠어요?" 이 얼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법정은 조씨네 후손과 왜씨네 후손간의 설전으로부터 조씨네 후손간의 난투극으로 번졌다. 사신(史臣) 평왈(評曰) -- 역사는 화학실험과 달라서 재연할 수가 없는 것이니 왜씨에게 당하는 것보다 아라사(俄羅斯)씨나 화(華)씨에게 당하는 쪽이 더 참혹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송사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즉 성폭행을 저지른 자가 자신의 강간죄를 자인한 뒤에야 강간을 당한 피해자가 자기가 문단속을 잘 못했다든지 혹은 평소에 헤프게 보인 것은 아니었는지를 반성해보아야 그 순서가 맞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약자들은 언제나 공리(公理)가 없는 이 세상을 한탄하지 말고 힘을 길러야 할 것이며, 아울러 송사에서 이기자면 언제나 수미정연하고 만중일치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한일 관계 개선에 있어서 아직도 순서가 잡히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것도 피해자 측에서 먼저 자기 잘못을 반성하고 가해자의 로고를 칭송하는 얼간이들이 속출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말 깨나 하고 글 깨나 쓴다는 한승수나 조갑제같은 엘리트들이 아직 한일 양국 사이의 역사청산의 순서도 모르고 있으니 더욱 한심하다.일본 우익의 ‘침략유공론’은 조금도 이상할게 없다. 하지만 피해국 한국인으로서 누가 핍박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자진하여 '일제의 식민지배를 예찬한 한승수나 이를 두둔하는 조갑제씨의 망언은 제 정신이면 쏟아낼 수 없는 미친 소리, 얼빠진 소리라고 할수밖에는 없다.
37    (잡문) 녀자들의 질투는 무섭다 댓글:  조회:4963  추천:79  2006-04-12
.잡문. 녀자들의 질투는 무섭다 김 관 웅 서양에서는 질투를 검은색과 흰색으로 나누는데, 전자는 상해(傷害)적 질투이고 후자는 경쟁적 질투이다. 질투의 감정은 남녀를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녀자들사이의 질투에는 흰색의 질투보다는 검은색 질투가 많고 아울러 그 비례도 남자들에 비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녀자들의 질투는 끈질기고 무섭다. 한고조(漢高祖) 류방(劉邦)의 황후인 려후(呂侯)--려치(呂雉, ?—기원전 180년)는 질투심이 강한 녀자로 중국력사에서 소문이 높다. 류방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려후가 낳은 아들은 병약(病弱)한 류영(劉盈)뿐이였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들 류영의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부인들과 왕자들을 몹시 경계하였다. 기원전 195년 류방이 죽고 류영이 즉위하여 황제의 옥좌에 오르기는 했으나 려후는 뒤일이 근심스러워 류방의 다른 일곱 아들들을 차례로 죽였다. 이중에서도 척부인(戚夫人)에 대한 려후의 박해는 그야말로 지독하기 그지없다. 류방은 생전에 총비(寵妃)인 척부인의 소생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황태자로 책봉하려고 타산했었기 때문에 려후는 여의를 독살하고 척부인의 네 손발을 자르고 돼지굴에 처넣어 이른바 사람돼지—인시(人豕)로 만들어 버렸다. 류영이 재위 7년만에 콜콜 앓다가 죽으니 후궁의 아들 소제공(少帝恭)을 옥좌에 올려 앉힌 뒤에는 아무리 보아도 탐탁치 않아 소제공도 죽이고 다른 후궁의 아들 항산왕(恒山王) 홍(弘)을 세워 자신이 정권을 친히 틀어 쥔다. 그 뒤 려후는 공공연히 자기의 친정집 사람들을 요직에 올려 앉혀 류씨황실이 외척인 려씨에게 눌리고 만다. 려후가 죽자 란을 일으키려 하던 려씨일족을 조정의 대신들인 태위 주발(周勃)과 승상인 진평(陳平) 등 한고조의 공신들이 진압하여 려씨일족을 멸망시켰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것은 척부인에 대한 려후의 질투이다. 려후는 류방이 패(沛, 지금의 강소성 회음현)라는 지방에서 정장(亭長)이라는 쥐꼬리만한 벼슬을 할 때 얻은 마누라였기에 인물이나 여타의 면에서 류방이 황제로 등극한 뒤에 얻은 척부인에게 대면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남편인 류방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 하다 싶이 하니 려후인들 어찌 질투가 불붙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질투를 해도 너무 했다. 네 손발을 다 잘라 버린것도 성차지 않아 돼지굴에 처넣기까지 하다니…. 력사는 재연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절대적인것은 아니다. 우리는 강청을 현대의 려후(呂侯)라고들 하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 강청이 장개석정권을 뒤엎고 새로운 정권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모택동주석의 부인이라는 점은 려후가 항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천하를 얻고 한나라라는 새로운 조대를 일으킨 한고조 류방의 부인이라는 점과 상당한 류사성이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더욱 류사한 점은 강청이나 려후는 모두 정치야심이 크고 녀성 특유의 질투심도 대단하였다는 점에서도 서로 꼭 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당대 정치사에서 은 특기할만한 대사건이다. 이 와중에서 국가주석인 류소기의 부인 왕광미에 대한 강청의 질투가 을 더 한층 비극의 심연에로 끌고 갔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면 강청은 어떤 녀자인가? 강청(1913—1991)은 산동성 주청현 출신이다. 미천한 가정에서 태여난 강청은 어려서 리혼한 어머니를 따라 천진의 담배공장에서 녀공으로 일한 경력도 있다. 1929년부터 자그마한 류랑극단에 들어가서 배우로 전전하다가 1934년부터는 상해에 들어가 영화배우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1937년에는 일본군대가 점령한 상해를 탈출하여 연안으로 갔다. 연안 로신예술학원에서 모택동의 강의를 듣는 과정중에서 모택동과 접근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모택동과 부인인 하자진 사이에서 감정상의 갈등이 생긴 틈에 1939년 모택동과 동거하게 된다. 그러나 강청과 모택동의 부부관계는 명매정취(明媒正娶)의 관계가 아니였기에 강청은 오랫동안 합법적인 도경을 통해 맺어진 류소기와 왕광미의 관계처럼 공중들앞에서 떳떳할 수가 없었다. 해방후, 특히는 60년대이후 왕광미는 국가주석의 부인의 신분으로 늘 출국방문길에 올라 국제적인 뉴스인물로 부상하여 세계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였다. 워낙 자기가 해야 할 만인이 경모하는 제1부인의 행세를 왕광미가 하고 다니니 강청이 어찌 질투가 나지 않았으랴. 왕광미는 비단 외모가 강청을 추월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수준이나 덕성도 심지어는 가정출신마저도 강청의 질투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왕광미는 천진의 대부자집의 고명딸로서 부친은 일찍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에는 농상부 공상사장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지낸 분이다. 모친은 천진의 부유한 상인의 가정에서 태여나서 북양녀자사범대학을 졸업한 녀수재이다. 이런 훌륭한 가풍을 가진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왕광미는 천부마저 뛰여 나서 대학시절에는 수학녀왕으로 불리웠고 중국의 첫 원자물리학 녀석사졸업생이다. 게다가 류소기와는 찰떡궁합이여서 자식들을 줄느런히 두고 있기까지 하니 강청의 질투는 극에 달할 수 밖에 없었다. 왕광미에 대한 강청의 이런 질투가 문화혁명중에서 대단한 변수로 작용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려후가 척부인을 박해한 것처럼 네 손발을 잘라내고 돼지굴에 처넣지는 않았지만, 강청과 그 일당들은 류소기를 박해해 죽이고 왕광미를 12년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어 두었으니 그 질투심이 결코 려후에 비해 손색이 간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려후와 강청이 다른점은 그 끝장이 많이 다른 것이다. 즉 려후가 죽은 뒤에 류방의 공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과는 달리 강청의 경우에는 아직 퍼렇게 살아있는데 엽검영 등 로일대의 혁명가들이 일어나서 강청과 그 일당을 일거에 숙청한 것이다. 강청은 1976년 10월달에 감옥에 갇혀 사형 잡행유예 23년의 선고를 받았다가 1991년에 감옥에서 자살했다. 기자 양란(楊瀾)이 하고 물었을 때 왕광미의 대답은 생각밖으로 대답은 평담했다. 아마도 왕광미는 이미 녀인의 질투 같은 것은 초개같이 보는 초월적인 경지에 들어선 것 같았다. 1966년 왕광미가 아직 중남해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6세밖에 안되는 왕광미의 딸애에게 류소기를 타도하자는 아동가요를 왕광미 앞에서 배워 주었다고 한다. 기자 양란이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물으니 왕광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남에게 박해를 받아본 사람만이 궁지에 빠진 인간의 가련한 처지에 대하여 리해할수 있게 되는 법이다. 남을 용서해 줄줄 아는 그러한 너그로운 마음이 왕광미의 여생에 자유와 안녕을 가져가 준것 같다. 중앙령도간부들중에서 왕광미의 자식들만큼 잘된 자식들도 흔치 않다. 류소기의 원혼도 아마 구천에서 이 한점에 대해서만은 만족해 할것이다. 물론 왕광미가 강청이 죽었으니 말이지 만약 살아 있었다면, 그런 초연한 태도를 취할 수있었을까?녀권주의의 라 평가 받는 의 작자인 시몬느 드 보봐르는 이란 소설에서 녀자들 사이의 질투에 대해 그것을 녀자의 본능적인 본질로 파악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야에 피에르와 그의 애인 프랑소아쯔는 동정심 때문에 크싸웨르라는 외성의 불쌍한 처녀를 자기들이 사는 집에 데리고 온다. 이 이녀일남 세 사람은 참신한 애정과 우정의 관계를 건립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그래도 하모니를 이루는것 같던 에는 미구하여 차츰 비협화음이 끼여들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두 녀인 사이에 질투가 생겨서 메울래야 메울수 없는 갈등의 곬이 패이기 시작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피에르는 참군하여 전선으로 나가고 집에 남은 두 녀인은 끝내 불구대천의 원쑤로 된다. 어느날 깊은 밤, 프랑소와쯔는 크싸웨르가 한창 자고 있는 침실에 가만히 들어와서 가스코크를 틀어 놓는다. 우리 민족의 속담에 남자를 두고 벌어진 녀자들사이의 질투와 싸움을 두고 는 말이 있지 않는가! 특히 녀자들의 질투는 흔히 살인을 부를 정도로 무서운 법이다.
36    (수필) 인간의 실존과 본질에 관한 명상 댓글:  조회:4716  추천:70  2006-04-06
(수필) 인간의 실존과 본질에 관한 명상 김관웅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온다. 코끼리부부한테서는 코가 길다란 새끼 코끼리가 나오고, 기린부부한테서는 목이 길다란 새끼 기린이 나온다. 백인부부한테서는 흰둥이 자식이 생겨나고, 흑인 부부한테서는 검둥이 자식이 생겨난다. 이는 만고불변의 유전학적인 법칙이다. 생물학적인 각도에서 볼 때 자연계나 인간계의 모든 물종이나 인종은 태여 나면서부터 본질이 주어지는 것이다. 본질이 존재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물적 존재임과 동시에 문화적, 사회적 존재이다. 문화적,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문화적 및 사회적 본질에 대해 이상의 법칙을 가지고 론하는것은 언어도단이다.문화대혁명 초기 북경의 하룡(賀龍)원수의 아들 같은 일부 고위급 간부 자제들로 무어진 이란 홍위병조직에서는 라는 혈통론을 고취했다는 소문을 우리는 시골에서 전해 들었다. 솔직히 이에 반발하여 나는 반란파조직에 가담했었다.우리들이 소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는 과문에 의하면 하룡원수도 젊은 시절에는 한낱 호남 상서지방의 무지렁이 장사군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자기들은 룡이고 봉이고 할 수 있는가? 문화대혁명 초기에 극성을 떨었던 이른바 , 은 바로 는 어거지주장의 가장 대표적인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일 나는 중국력사를 공부하면서 봉건사회에 들어선후 중국농민봉기의 첫 두령이였던 진승이 밭두렁에 올라 서서 하고 소리쳤다는 말에 언제나 커다란 공명을 일으키군 했다. 개혁개방이후 서양의 문학사조를 접하면서 나는 잡다한 문학류파들중에서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제일 큰 공명을 일으키군했다. 문화적인 차원에서 는것은 실존주의철학의 전제적인 명제이다. 인간은 나서부터 천생적으로 자기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의 각도에서 볼 때 인간은 한장의 백지장처럼 태여 난후 사회화하는 장구한 과정중에서 그 백지에 자기의 일생의 궤적을 그려 넣게 되고 따라서 점진적으로 자기의 본질을 형성해 가게 되는것이다. 인간은 태여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시시각각 변화, 발전하는 과정중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고정불변의 본질이 없으며 그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력사적 조건과 그속에서 그가 처한 구체적 상황속에서의 그때 그때의 그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이 그때 그때의 그 인간의 본질을 결정한다. 이런 까닭에 오직 죽어서 관속에 들어간 뒤에야 그 사람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그 어떤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하나의 력사로 존재할 뿐이다. 일제식민지 시대를 살아왔던 리광수나 홍란파 같은 조선 현대문화의 거물급 명사들의 영욕이 점철된 애족과 매족의 전후의 변절과정을 돌이켜 보노라니 더욱 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명제를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금년(2002년) 3.1절을 계기로 하여 발표된 일제시기의 708명의의 친일파 명단과 요즘 인터넷의 문학 홈페지에 오른 전광(오성륜)의 흑(黑)과 백(白)처럼 선명한 일생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실존주의철학을 립증하는 증거이기라고 한 것 같다. 사실 영웅과 비겁쟁이도 인간의 선택하기 나름이다. 전광은 그야말로 오랫동안 일제와 중국의 반동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전설적인 영웅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일셍의 마지막의 선택에 의해 그는 비겁한 변절자와 일제의 주구로 전락했다. 좋은 시작보다 좋은 결말이 더 아름다움을 반증(反證)하는 좋은 실례가 아닐 수 없다. 한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한번이나 두번 혹은 세네번의 옳바른 인생선택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으나 한평생 그 어느 중대한 선택마저도 죄다 옳바르고 떳떳하게 할 수있겠는가 하는것을 나는 요즘 자꾸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임을 뼈저리게 느끼군 하는 것이 요즘의 나의 심경이다. 그래서 윤동주님도 은 아닐까?
35    (수필) 가난, 억압 그리고 사랑 댓글:  조회:4725  추천:54  2006-04-04
수필 가난, 억압 그리고 사랑 김 관 웅 우리 집 칠남일녀 팔남매중에서 이미 셋은 박사학위를 땄고 둘은 지금 박사학위를 따려고 국외에서 류학을 하고있는중이다. 말하자면 항렬로 셋째인 나와 넷째인 호웅이는 연변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땄고, 다섯째인 철웅이는 일본 고찌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땄으며, 여섯째인 영웅이와 일곱째인 정웅이는 각각 한국의 서울대학과 일본의 대학에서 채육학박사와 정치학박사 코스를 밟고 있는 중이다. 한 로동자가정의 칠형제 대학생중에서 박사가 다섯이나 나왔다고 국내외의 신문, 방송이나 텔레비죤 기자들로부터 여러 번 인터뷰를 당하였었다. 그럴때마다 기자들이 이른바 《우리형제들이 성공한 비결》을 묻군했으며 또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하군했다. 지난 섣달그믐날에도 한국 KBS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역시 대답을 못해 우물우물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해놓은 일이 별로 없고 갈 길이 아직 멀고도 먼 우리 형제들을 두고 《성공했다》고 표현하는것은 당치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시점까지는 상대적으로 탈없이 잘 크고 공부를 열심히 해온 것만은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KBS 기자들과의 인터뷰가 있은 뒤의 이 며 칠 동안에는 이른바 그 《성공의 비결》에 대해 여러 모로 정리해 보았다. 우리 집은 결코 세세대대의 학문적인 전통이 있는 선비집안도, 돈 많은 부자집안도, 떵떵거리는 고위급간부집안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결코 남보다 뛰여 난 머리를 타고난 것도 아니다. 이른바 《성공의 비결》을 억지로 총화를 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아니겠는가고 귀결해 본다.첫째는 건강한 몸, 둘째는 가난했던 가정살림, 셋째는 정치적인 억압과 그에 따르는 심리적 고통, 네째는 부모형제들 사이의 뜨거운 사랑바로 이 네 가지 조건이 주어졌기에 우리 형제들은 그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오늘날까지 배움의 길을 꾸준히 걸어올 수 있은것 같다. 금년에 85세인 나의 부친은 지금도 저전거를 씽씽 타고 다닐만큼 근력이 좋으시다. 젊은 시절에는 위만주국 전국 자전거 전능우승을 련거퍼 3년이나 확보한 챔피언이였으며 위만주국에서 선정한 1940년 동경올림픽의 종자손수였다. 물론 이것은 그 무슨 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양성해서가 아니라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방의 약배달부로 어려서부터 자전거를 익힌 덕분이였고 타고난 건장한 체질 덕분이였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 칠형제에게 준 가장 귀중한 유산은 건강한 몸이였다. 하기에 우리 칠형제들은 그 엄혹한 가난의 시련속에서도 감기 한번 크게 앓지 않으면서 몇 십 년을 하루와 같이 학업에 정진할수 있게 되였다. 병들고 벌레 먹은 꽃나무가지에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만개할수 없듯이 병치레만 하는 집안에서 심신이 건강한 자식들이 속출할수 없음은 정해진 리치가 아니겠는가. 나의 부친은 조실부모하고 소학교문전에도 다보지 못하고 사회의 최하층에서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노가다판의 뜨내기로, 료리집의 심부름꾼으로, 약방의 약배달부로 그야말로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지 않으셨다. 일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배우려는 목적으로 위만군 운수부대에 들어가서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운 것이 밑천이 되여 평생의 밥통으로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죄로 되여 해방후 계급투쟁을 기본으로 했던 수 십년 동안의 세월속에서는 혹독한 정치적 박해를 받아야만 했으며 우리 팔남매에게까지 련루되였다. 남들이 다 드는 소선대나 공청단 심지어는 홍위병이나 홍소병에마저 들여주지 않고 성적이 높아도 제가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수 없는 억울함으로 인해 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심리적 고통을 우리 형제들은 너무도 일찍이 또 너무도 많이 당해 보았다. 그때는 이 모든 것들이 죄다 원망스럽기만 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역경은 사실 우리 칠형제의 의지의 칼날을 시퍼렇게 갈아주는 숫돌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우리 칠형제들은 그 계급투쟁의 엄동설한속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얻었다. 온실의 꽃들은 온실밖으로 나와 한번 서리바람을 만나게 되면 그 순간에 죽어버릴 수밖에 없지만 엄동의 시련을 겪은 풀들은 봄이 돌아오면 소생하게 되는 법이다. 우리 칠형제는 극좌로선이 살판치던 정치적인 겨울을 이겨낸 자그마한 일곱 포기의 야초에 비길 수 있다.싸움이 없는 곳에 승리가 없듯이 시련이 없는 곳에 값진 성공은 있을 수 없다. 복(福)은 쌍으로 오지 않지만 화(禍)는 흔히 쌍으로 겹쳐서 온다. 우리 집은 부친의 70원 남짓한 월급으로 열 식구의 입을 막아야 했다. 6억 인구에서 3천만명이 굶어죽은 지난 세기 60년대초에 우리 집 열 식구중에 한명도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양실조로 인한 간염같은 병에도 걸리지 않고 전원이 무사했다는 것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 아닐수 없다. 부모가 주신 건강한 몸과 부모님들의 눈물 나는 자식사랑이 우리들을 살려냈다. 어머니는 연길시 근교의 모아산 등지의 후미진 산자락에 가만히 밭을 일구어 열콩, 옥수수, 감자같은 것을 심어 식량을 보태였고 철따라 산에 가서 산나물 뜯어다 반찬감을 마련했으며, 가을이면 우리 형제들을 이끌고 콩이삭, 벼이삭, 감자이삭, 고구마이삭 줍기에 나섰다. 겨울철이면 복장공장으로부터 단추구멍 틀고 휘갑을 감치고 실밥을 따는 등 바느질감을 목이 부러지게 이여다가는 밤늦도록 삯바느질로 푼전을 벌기도 하시였다. 그때 우리 팔남매는 모두 한창 자랄고비인지라 언제나 허기진 배를 가누기 어렵던 때였다. 하루 세끼 돌이라도 삭이는 우리 팔남매에게 시래기를 가득 썰어 넣은 콩장이나 호박풀데기죽이나마 건데기로 퍼주고나면 어머니는 언제나 허여멀건 국물이나 철없는 우리들이욕심을 부려서 먹다가 남긴 것이나 거두어 자시는 것으로 끼니를 때우시군 했다. 그때 나는 열서너 살이여서 지각이 전혀 없은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배를 주리는 줄 알면서도 그나마 얌얌해서 제 몫은 다 먹고는 어머니에게 약간이나마 남겨진 국물마저 훌훌 빼앗아 먹어 버리는 얌체 짓을 저지르 군 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하루는 갑자기 마당에서 졸도하여 들것에 실려 연변병원 구급실에 옮겨지는 장면을 울면서 따라가서 지켜본 후에야 차츰 이런 얌체 짓을 하지 않게 되였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담배와 술도 끊으시고 한평생 반반한 양복 한 벌 입어 보시지 못하고 우리 형제들의 공부 뒤바라지에 모든 정성을 쏟으셨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을 먹고 자라났다. 정작 먹을 것이 떨어져도 우리 집에는 언제나 명랑한 웃음소리가 끊일 줄 몰랐으며 엄혹한 정치적 억압이 몇십년 계속되여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학교에서 소외당하고는 울면서 하소연하는 우리들을 부등켜 안고 통곡하시다가도 옥수수죽이나마 대수 요기하시고는 언제 통곡하셨더냐듯이 전등불밑에 쪼크리고 앉아 밤새도록 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였다. 그러면 철든 형님과 누나는 어머니를 위로하려는 마음에서 밤늦도록 실밥을 따고 단추구멍을 틀면서 어머니의 일손을 도왔다. 우리집 부모형제들은 바로 이렇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 기나긴 가난과 정치적인 억업을 이겨내 왔다. 집살림이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억업당하기만 해서도 안된다. 가난과 억압이 있으면서도 부모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의 후더운 정이 흘러 넘쳐야만 자식들이 주눅이 들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다. 가난과 억압만 있으면 쭈그러든다. 곱다곱다 어루만지기 하면 자식들은 버릇이 고약해지고 의지가 약해진다. 잘 먹고 잘 입어서 키는 장대처럼 크고 인물도 희여멀끔하지만 철이 들지 않고 응석이 데룽데룽 달린 나의 자식들을 보면서 나는 늘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 바꾼다》는 우리 속담을 되뇌이군 한다. 물질적인 가난과 정신적인 고통은 사랑과잉으로 자라나는 요즘의 신세대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34    (수상록) 기다려지는 토요일 등산 댓글:  조회:4355  추천:44  2006-03-30
수상록 기다려지는 토요일 등산 김 관 웅 오늘은 등산날이다. 하루라도 본연의 나를 찾을 수 있는 날이여서 기다려지는 날이다. 자기의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게 인생인데 등산날만은 자기의 마음대로 사는것 같은 착각을 주는 날이여서 귀중하다. 내가 등산날을 기디리듯이 아마도 다른 분들도 모두들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살고 있을것이다. 기다림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기디림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베케트의 부조리극 에서처럼 인간은 기다리는 대상과 영원히 만날 수 없으면서 숙명적으로 기다리면서 사는가 본다. 인생의 부조리를 인식하면서 살아 가야 할것이다. 오늘 등산의 행선지는 연집 남계골안으로 해서 뻗은 골짜기 웃자락의 무명의 봉우리...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산길에서 고사리, 기름고비, 미나리를 캐면서 고 읊었던 도연명 같은 은사(隱士)가 된 기분이였다. 잡놈들이 들끓는 속세를 떠나서 단 하루라도 때묻지 않은 친구들과 청정한 자연속에서 거닐수 있는게 내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해주는지 모른다. 우주적 차원에서 생각하면 티끌의 티끌 같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희로애락, 애욕의 오정육감을 지닌 우리 인간들이 속세에 몸을 담기만 하면 피치 못하게 타인들과 싸우고 질투하고 걸리고 걸면서 티끌 먼지 이는 속세의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살겠다고 아등바등 하는게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하늘과 싸우고 인간과 싸우는 그 재미가 무궁하다고 한 모택동의 말도 얼마간 리해가 된다. 인간은 이처럼 속세를 둘러싸고 초월과 일탈의 욕구만 지니고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 침잠의 욕구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법이다. 수리개처럼 창공을 높이 높이 치솟아 올라 오연히 날아예고도 싶고 메돼지처럼 먹고 살겠다고 땅을 뚜지고 산속을 쏘다니면서 천적을 만나면 윽윽거리고 삐죽한 주둥이와 이빨로 떠박아 넘기려고도 하고 싶은 충동을 지니고 살아 가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33    (단상) 수필과 거울 댓글:  조회:4415  추천:48  2006-03-23
☆단상☆ 수필과 거울 김 관 웅 나에게 있어서 수필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수필은 독자들에게, 젊은 후진들에게 문학이나 철학의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메가폰이기도 하고, 우주와 인생에 대한 나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대화의 수단이기도 하고, 또 사회의 부조리를 까밝히고 비판하는 투창이나 비수 같은 무기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수필은 또 나 자신을 비추어보는 하나의 거울이기도 하다. 수필의 이상의 여러 가지 기능들 중에서 이 마지막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허구를 허용하는 소설이나 여러 가지 표현기법을 활용하여 갖은 재주를 다 피우는 시에 비해 수필의 주인공은 영원히 남이 아닌 나요, 또 작자인 나의 개성이 적라라하게 드러나야만 수필로서 매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수필이 은페하거나 모호성 속에 가릴 수도 있는 기교적 장치를 지니지 않고 드러나는 것을 당연시하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격이 도야(陶冶)되고 개성이 멋들어서 품위 있는 김학철 선생 같은 분의 글은 개성이 로출된다고 하여 나쁠게 하나도 없지만, 아직 인격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천박한 나 같은 사람의 글에서는 개성의 로출이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거울 앞에 앉히고 자기의 성격적이거나 인격적인 결함을 바라보고 또 드러내는 글을 쓸 엄두를 감히 내지도 못했다. 남들앞에서 자기의 유식함을 자랑하거나 자기가 아닌 사회에 대해 비판의 투창을 날리기는 쉽지만 거울에 비낀 자신의 추한 모습을 정시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고 그렇게 개운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서 스스로 자기를 미추(美醜)을 가늠해보기 위하여 방안에서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으나, 자기의 《심적 라상(心的裸像)》을 수많은 독자들앞에 적라라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알라》고 했고, 중국의 옛 사람들도 《인간에게서 가장 귀중한 것은 자기를 아는 명석함이 있는 것이다(人貴有自知之明)》라고 했으리라. 나는 2년 전 심심풀이로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내가 운영하고 있는 문학 홈페지에다 회상록을 시리즈로 올려보았다. 그중에서 《나의 카인콤플렉스》라는 나의 심적 라상 드러낸 보인 글 한편을 《도라지》에 보냈고, 그 글이 미구에 실리게 되였는데 독자들로부터 나의 자기 드러내기의 솔직성에 찬사를 보내는 이메일편지들을 적잖게 받았다. 나는 이로부터 수필은 자기의 심적 라상을 솔직하게 드러낼 때야만 독자들의 공명대(共鳴帶)를 울려놓는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였다. 그래서 앞으로 남보다는 자기를 엄하게 해부하는 수필들을 많이 써보려는 생각을 그때부터 가지게 되였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루쏘의 《참회록》이나 파금의 《수상록》처럼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는 용단은 그리 쉽게 내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필은 나에게 있어서는 갈수록 심산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수필 쓰기가 점점 두려워지고 점점 어려워짐을 절실하게 느낀다. 내 마음의 창문을 열어서 독자들에게 모든 것을 진솔하게 드러내 보이고 자신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또 그래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감동적인 수필을 정말로 써낼 수 있겠는가 늘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전전긍긍 수필을 써가는 요즈음이다. 내게 있어서 수필이란 내 자신의 《심적 라상(心的裸像)》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라는 것을 리성적으로는 분명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 2005년 12월 6일 연길 자택에서
32    (단평) 김치담그기와 수필쓰기 댓글:  조회:5097  추천:67  2006-02-26
☆단평☆ 김치담그기와 수필쓰기 김 관 웅 배추김치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우선 배추김치를 만드는 재료의 근본인 배추의 품질에 의해 좌우된다. 이밖에도 좋은 고추, 마늘, 생강, 젓갈류 등 배추김치를 담그는 데에 소요(所要)되는 기타 자료의 품질도 아주 중요하다. 화학비료를 가득 쳐서 재배한 배추는 인체에 안 좋을 뿐만 아니라 달지도 않다. 앓지 않는 청정한 대자연속에서 무공해농법으로 재배한 배추가 최상이다. 기타 재료도 마찬가지다. 수필쓰기도 마찬가지다. 우선은 수필의 재료인 글감(소재)이 보편성과 객관성을 띠고 개성적이고 참신해야 한다. 가장 좋기는 자기의 체험에서 얻어낸 글감이 최상이다. 이것이야말로 앓지 않는 《대자연속에서 무공해농법으로 재배한 배추》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만일 자기의 체험과는 관계가 없는 남의 얘기거나 또는 체험과는 관계가 다소 있다고 하더라도 거짓을 뒤섞은 얘기라면 마치도 《화학비료를 가득 쳐서 재배한 배추》같은 수필의 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우리 수필들을 둘러보면 소재의 선택에서 문제가 있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흔히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들의 절실한 체험이 아니라 그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문제들을 글감으로 선택하여 아프지도 가렵지도 수필을 만든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 면에서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것은 류광철의 근작수필 《수캐와 나》이다. 이 수필은 자신이 8년동안이나 겪어오고있는 기러기아빠의 아픔과 고독과 슬픔을 우리민족의 많은 부부리산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수많은 중장년부부들의 보편적인 아픔과 고독과 슬픔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커다란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이 성공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대자연속에서 무공해농법으 로 재배한 배추》같은 진실성, 보편성, 개인성을 두루 갖춘 훌륭한 소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배추김치는 재료만 좋아서 좋은 맛을 내는 것은 아니다. 담그기도 잘 해야 한다. 김장철에 김치 담글 때 처음에 나서는 가장 관건은 초절이를 할 때 소금을 얼마 뿌리는가 하는 것이다. 깨끗이 다듬고 물에 잘 씻은 배추에다 소금을 너무 적게 뿌려 넣으면 초절이가 되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소금을 너무 많이 뿌려 넣으면 마치도 끓는 물에 데쳐놓은 시래기처럼 다 죽어버리게 된다. 소금을 적당히 쳐야 배추가 적당하게 절여지면서도 사각사각한 신선도를 보전할수 있다. 초절이가 잘 되여도 배추를 버무려넣을 때 양념장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으면 김치가 너무 짜고 양념장에 소금을 너무 적게 넣어도 김치가 너무 싱거워 제 맛이 나지 않는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글쓰기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마치도 김치 담그는 데 있어서의 소금과도 같은 존재로서 소금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너무 적어서 사상이나 철학이 빈약한 글은 절대 상품(上品)으로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과잉된 글은 마치도 소금을 너무 많이 넣은 까닭에 김치가 너무 짜서 잘 익지를 않고 또 그래서 김치가 맛이 없는 것처럼 역시 상품(上品)으로 될 수 없다. 김치를 담는데 있어서 소금을 적절히 넣는 것만 요긴한 것이 아니다. 초절이를 한 김치포기마다에 버무려넣을 양념장에 들어가는 각종 재료의 비례가 적절해야할 뿐만 아니라 소금도 적당히 넣어야 한다. 양념장에 새우젓이나 꼴뚜기젓 같은 동물성 재료를 넣으면 좋다고 하여 너무 많이 넣으면 오히려 김치가 비릿하여 상큼하고 시원한 맛을 살릴 수 없고,마늘이나 고추의 비례가 너무 많으면 쉽게 배추를 상하게 하거나 너무 매워서 먹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다른 양념의 재료도 비례를 적당하게 넣어야 함은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양념장은 당한 비례를 좇아야 맛있는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것이다. 김치를 담그는데 있어서 양념장은 마치도 글을 쓰는데 있어서의 고사, 성구나 격언, 속담 등의 인용에 비길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고사, 성구나 격언, 속담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람용하거나 과도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글의 맛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문단의 일부 문인들의 글을 보면 자기의 체험이나 그것에 대한 감수나 느낌은 극히 적고 대부분 지나간 고금중외의 력사나 고사, 성구들을 무절제하게 끌어들여 자기의 글을 장식하고 있는 폐단이 있다. 중국 송나라시기의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무일자무래처(無一字無來處)》, 《점철성금(点鐵成金)》은 당나라시기에 많은 시인들이 숱한 좋은 시들을 이미 써놓아 그것을 초월하기 어려운 상황하에서 그 곤경을 타개하기 위한 일종 책략으로서 당시에는 일정한 영향을 일으키기는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고사, 성구, 격언, 속담이나 남의 시구들을 작품속에 끌어들이는 바람에 창의성을 잃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청신한 시의 맛을 잃어버렸다. 마치도 소금을 너무 많이 넣거나 양념장을 너무 버무려 넣어 김치가 사각사삭하고 시원하고 상큼한 맛을 잃은 것처럼 말이다. 너무나 용전(用典)을 많이 하면 독자와 작품사이에는 무언9無言)의 장벽이 가로 막히게 된다. 이런 작자들은 자기의 심오하고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것으로 여길지는 모르지만 독자들은 그것을 받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중국문론에서는《격(隔)》과 《불격(不隔)》이라는 미학범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격(隔)》이란 작품의 감상과정에서 작품과 독자사이에 간극이 생김을 의미하고 불격(不隔)》이란 작품의 감상과정에서 작품과 독자사이에 간극이 생기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는《격(格)》하기보다는《불격(不隔)》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에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문학은 본질상에서 작자가 자기 만들어낸 작품을 통해 독자들과 대화하고 교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난해하거나 난삽한 고사, 성구, 격언, 속담들을 무절제하게 작품에 끌어들이는 것은 마치도 대화에서 대방이 알아 못 듣는 말이나 듣기 싫어하는 말을 그냥 해대는 것은 실례인 것과 마찬가지이다.문학작품에 대한 감상은 흔히 직각(直覺)적이고 즉흥적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독자들은 자기가 모를 난해하고 난삽한 고사, 성구, 격언, 속담들이 갈피갈피에 끼여 있으면 오리무중에 빠져 짜증을 내거나 독서를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흔히는 평이하고 단도직입적인 문장으로 작자가 말하고 하는 바를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수필에서는 더욱 이러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한 때는 남이 잘 모르는 고사, 성구, 격언, 속담들을 대량적으로 인용하면 좋은 글이 되는 줄로 착각하여 왔었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안지는 별로 오래지 않다. 《대자연속에서 무공해농법으로 재배한 배추》에 맞춤하게 소금을 뿌리고 맞춤하게 양념장을 버무려넣어, 잘 익은 맛있는 배추김치를 만들듯이 앞으로는 가급적이면 자기의 일을 자연스러운 자기말로 올곧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맛있는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다. 2006년 2월 24일 연길에서
31    (문학)《강아지파》와 《도깨비파》 댓글:  조회:4451  추천:45  2006-02-26
《강아지파》와 《도깨비파》 김관웅 춘추전국시대에 제(齊)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나의 임금 환공은 당시 제나라에서 으뜸가는 화공(畵工)을 불러서 그림그리기에 대해 의론하게 되였는데, 먼저 환공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자네는 이 나라에서 제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이 세상 만물가운데서 무엇을 그리기 제일 어려운고? 》 이에 그 화공이 다음과 같이 아뢰였다. 《강아지나 송아지나 망아지 같은 것을 그리기 제일로 어렵사옵니다》 이 대답에 환공은 의아쩍게 여기면서 되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강아지 같은 것들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익숙히 보아왔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니 좀만 틀리게 그려도 누구나 다 흉허물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서 자연히 제일로 그리기 어려운 것들이옵니다. 》 환공이 들어보니 사리에 맞는 말이라 또 다른 문제를 물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만물 중에서 무엇을 그리기 제일 쉬운고?》 이 물음에 화공은 아무런 사색도 없이 대뜸 입을 열었다. 《귀신이나 도깨비가 제일로 그리기 쉽사옵니다.》 이 대답에 환공은 역시 의아쩍게 여기면서 되물었다. 《그건 왜 그런고?》 이에 화공은 다음과 같이 아뢰였다. 《귀신이나 도깨비나 허깨비는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 않사옵니까?》 《그래 그렇지.》 《그러하오니 이 세상에 귀신이나 도깨비를 본 사람이 사실은 없사옵니다. 꿈속에나 보았겠지요. 누구도 보지도 못한 도깨비는 아무렇게나 그려도 되옵니다.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려도 되고, 둘이 달려도 되고 백개가 달려도 무방하옵니다. 또 형체가 있어도 되고 형체가 없어도 되옵니다. 한마디로 아무렇게나 상상을 해서 그려도 누가 틀리게 그렸다고 할 사람은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 그리기가 아주 쉽사옵니다.》 이 말에도 환공은 머리를 끄덕이였다고 한다. 이 고사(故事)가 어찌 회화에만 국한되는 얘기이겠는가. 문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상하고 해괴한 이른바 《파격적인 이미지》, 《낯선 이미지》만들어내는 시작업은 마치도 화공이 귀신이나 도깨비나 허깨비를 그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이를테면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꿈이나 광기, 환각》등 무의식세계를 자동기술법에 의해 마음대로 그려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미친 생각, 허튼 생각들을 아무런 예술적 가공도 없이 자동적으로 기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깐. 그리고 한때는 미국의 선봉파들이 고양이 앞발에 붓을 비끌어 매여주면 고양이가 즉흥적으로 마구 찍어놓고 오려놓은 그림들을 명화라고 버젓이 갤러리에 전시를 해놓기도 하였으니깐. 사실 이런 미친 자들의 이른바 《예술실험》들은 이미 한물 갔다. 필자는 이런 황당한 예술적 추구를 하는 자들을 일러《도깨비류파》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러나 예술사나 문학사에 오랜 예술적 생명력을 가진 작품들을 창작해낸 사람들은 대부분 제나라 화공의 말처럼 《강아지나 송아지나 망아지 같은 것을 그렸다.》 다른 실례는 그만두고 한국의 현대시문학의 력사만 대충 둘러보아도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를 시적인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오히려 오래오래 독자들속에서 사랑를 받아왔음을 잘 알 수 있다. 한룡운의 《나루배와 행인》,《님의 침묵》 이나 김소월의 《진달래》나 《접동새》, 정지용의 《향수》,《파도·2》로부터 당대의 서정주의《국화꽃이 필때까지》나 김수영의 《풀》이나《폭포》, 구상의 《초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우리가 일상에서 늘 가깝게 보고 평범한 소재를 취해서 이미지화를 했음을 알수있다. 그중 김수영의《풀》과 《폭포》 보기로 하자.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 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전문 (1968년, 현대문학)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가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을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 《폭포》김수영의 《폭포》는 정치적인 시로도 볼 수 있고 시인의 억압된 리비도가 시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상황에 대한 분노로 환치되여 표현된 《은폐적 대리배설》의 시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가 씌여진 1960년의 4.19혁명 전야의 1950년대 후반의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할 때 으로부터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상징시라고 볼 수 있다. 《폭포》는 곧 《민중》을 가리키는 것이며, 《무서운 가색도 없이 떨어진다》는 표현은 민중이 집단적으로 뭉쳐 군중심리에 편승했을 때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집단행동은《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된다. 하지만 그 물결은 결국 《고매한 정신》이 되여 정의의 편에 기울어지게 된다는 것이다.평소에 잠복되여 있던 민중의 힘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다. 밤에는 실제로 모든 소리가 특별히 크게 들리는데, 기차의 기적소리라든지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특히 그렇다. 여기서 《밤》이 의미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어둡고 막막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하에서 민중의 힘은 《곧은 소리를 내며》떨어지는 것이다. 곧은 소리는 곧 정의 소리이며, 《민심이 천심이다》라고 했을 때의 《천심》이다. 힘은 곧 정의요, 힘은 힘을 부른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가 의미하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 힘의 파급효과라고 하겠다.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통해 프랑스혁명 때 파리시내를 뒤덮은 데모군중이라든지, 4.19때 서울거리로 쏟아져 나온 데모대의 행렬 같은 것을 련상할 수 있다. 이런 시들은 비록 가장 평이한 소재를 다루었고 따라서 아무런 기교도 부리지않은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엄청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김수영 같은 시인들을 《강아지류파》라고 명명하고 싶다. 우리문단의 시인들속에는 《도깨비류파》도 있지만 《강아지류파》도 있다. 필자는 그래도 《강아지류파》가 시문학의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도깨비류파》에 미혹된 일부 문학신인들은 그 동기는 아름답기 때문에 비록 《도깨비류파》의 현란하고 또 그래서 선동적인 선전에 잠시 귀가 솔깃해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문학의 정도에로 되돌아 설것이라고 믿는다. 2006.2.24일 연길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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