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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人相輕』再論 (1)
김 관 웅
중국의 유명한 당대소설가 리국문은 “문인상경(文人相輕)을 꿰뚫어 말한다면 한마디로 문인상질(文人相嫉)이다”라고 지적한바 있다. 즉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는 궁극적인 원인은 문인들은 서로 질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첫째로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고 서로 질투하는 악습은 길고도 긴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
건안문학의 대표자의 한 사람인 조조의 아들 조비는 『전론 ‧ 론문』에서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는 것은 자고이래 이러했다(文人相輕, 自古而然)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의 조비가 이렇게 개탄했으니 문인들이서로 질투하는 이 악습이 시간적으로 아주 길다는 것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둘째로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고 서로 질투하는 이 악습은 공간적으로는 아주 넓어 세계적인 보편성을 띠고 있다.
동양의 문단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단도 이러하다. 그 단적인 실례를 든다면, 지금은 사실주의 문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발자크는, 그토록 방대한 저작량과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선거에서는 번번이 떨어졌다고 한다.
셋째로 문인들의 질투는 그 정도가 인간사회의 여타의 분야에 비해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
문인들의 질투와 그 질투로 인한 반목과 질시는 조만해서는 끝이 나는 법이 없다. 심지어는 한평생을 서로 질투하면서 살아간다. 마치도 개들이 진흙탕 우에서 서로 물고 뜯는 니전투구(泥田鬪狗)의 형국이다. 승부도 없이 물고 뜯다 보니 양자의 입에는 모두 대방의 개털만 가득 묻었을 뿐이다. 붓으로 하는 싸움은 흔히 승부가 없는 지구전이다.
칼부림을 하는 무인들의 사회에서도 질투는 있으나 승부가 명백하므로 문인들 사회처럼 질투가 끈질길 수가 없다. 무인들은 일단 무예를 겨루어 지면 깨끗하게 승복한다.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 승복하지 않다가는 경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고 중하면 목숨까지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호전』제2회에서 간신고구의 박해를 피해 도주 길에 오른 80만 금군 교두인 왕진을 알아 보지 못하고 달려들었던 구문룡 사진은 곤봉겨룸에서 가슴팍을 찔려 벌렁 나자빠지고 나서는 대뜸 꿇어 엎드려 절을 하고 왕교두를 스승으로 모시지 않던가.
권력방망이를 휘두르는 벼슬아치들의 사회에도 질투는 있으나 상하의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철칙이 있으므로 문인들 사회처럼 질투가 끈질길 수 없다. 관계(官界)에서는 한 급만 높아도 남을 눌러 죽일듯한 위세를 갖고 있으니 적어도 언감생심 상전하고는 질투를 할 수 없다. 그러나 문단에서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위계질서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평등한 만큼 동배들뿐만 아니라 선후배 사이에도 질투는 여전하다.
그 원인은 문인들 사이에서의 붓으로 하는 싸움에서는 칼부림과는 달라 명확한 승부를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에는 완전히 객관적이 통일적이고 절대적인 표준이 없고, 치밀하게 량이나 질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렵고, 따라서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표준이 많이 작용하기에 문인들은 서로 제가 잘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문인들은 언제나 자아감각이 좋아서 제 잘난 멋에 살면서 자기의 작품은 한 송이의 꽃으로 보고 남의 작품은 쓰레기로 보는 폐습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주관에 묻혀서 사는 문인들은 다들 정도부동하게 과대망상증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정신질환으로 앓고 있는 환자들이다.
그래서 문단은 언제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언제나 질투와 질시의 눈빛이 번개처럼 오고 가고, 언제나 뒤에서 남을 헐뜯는 험담들이 무성하여 한마디로 시끌벅적하다. 여기에 파벌싸움까지 곁들어지면 더더욱 저자거리처럼 소음으로 하여 단 한시각도 귀청이 평온을 찾을 새가 없다.
요즘은 연변작가협회의 개선(改選) 시즌이라 더욱 기관이다.
2007년 3월 15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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