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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우리 가요의 현시점과 갈길은 어디인가? 댓글:  조회:942  추천:0  2022-03-10
우리 가요의 현시점과 갈길은 어디인가? - 박영일 필자는 작곡이 주전공이여서인지 류학이 끝나고 귀국 후 항상 동일한 질문을 지인들한테서 받게 되였다. 등 항상 받는 질문이다.  피하고 싶은 질문이였고 직접적인 답변은 언제나 피하였던 현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제 우리 음악, 우리 가요를 사랑하며 그 발전을 기대하는 한 음악인으로서, 또한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비판적으로 행동하는 한 지식인이 되기 위해 이 부분을 대담하게 짚어보려고 한다. 필자는 우선 우리 가요가 대중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당과 정부는 모택동의 연안문예좌담회 연설 정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민을 중심으로 하는 창작방향을 토대로 문예창작 규률을 존중하는 기초에서 문학예술작품의 개혁과 창의를 제창하고 있다. 하기에 ‘백화제방, 백가쟁명’은 문예창작에서 부동한 풍격과 부동한 수법의 동시 존재와 자유발전을 고무격려한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필자는 우리 연변의 일부 음악전문가들이 우리 인민(대중)들이 좋아하는 우리 음악, 우리 가요를 보는 시각이 웬지 외곡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일부 음악전문가들이 말하는 소위 고급예술음악은 누구를 위한 음악인가? 적지 않은 소위 엘리트층의 예술인들은 항상 전통음악, 서양음악 등 음악들을 진정한 고급예술음악이라 하며 대중음악(대중가요)은 그 하위 음악으로 평가하고 저급한 산물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해“대중음악도 예술이요?” 하는 질문들에 항상 대중음악은 무기력하였으며 언제나 소외된 존재로 되기도 했다. 과거 우리 서민들 사이에서 창작되고 전해져온 민요도 말하자면 전통 시대의 대중가요라 불릴 수 있다. 필자는 대중음악, 대중가요를 우리 예술의 중요한 한개 부분으로 보고 있다.그런데 현재 우리 연변 음악계에서 일반 서민 즉 일반 대중들이 공감하고 좋아하는 음악들이 소외당하고 있고 그 발전도 부진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 가요(음악)의 다양성도 많이 결핍하다고 본다. 연변가요가 무슨 쟝르인지 물어보면  이에 답변할 작곡가와 가수를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왜서 연변가요가 무슨 쟝르인지 답변할 작곡가나 가수가 손에 꼽을 만큼 적은 것일가?  곰곰히 따져보면 우리 리론계의 문제점 즉 론리적 시스템과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방향이 없었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외국에서는 실용음악(대중음악)학과 박사과정이 나왔고 그들은 세계 유명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한 학자급 대중음악 전문가들이 과학적인 커리큘럼의 적절한 도입으로 대중음악을 세계화로 이끌어가고 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국내 9대 음악학원에도 이제 류행음악학과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심양음대 같은 대학에는 류행음악학과가 한개 단독학원으로 승화되였다. 그러나 우리의 현시점은 대중음악의 쟝르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고 우리 음악에 대한 정확한 리론적 정의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 우리 가요는 보편적으로 무슨 쟝르에 속하는가? 신민요, 트로트, RMB, 발라드 등 다양한 쟝르에서 우리만의 쟝르가 따로 있는지? 우리 음악학 학자들의 참여로 우리 가요의 쟝르 구분과 우리 가요 정체성의 리론적 정리, 정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리론적 근거와 받침이 있어야 다원화와 다양화의 글로벌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야의 세대교체에도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후배들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이 시스템내에서 자기들이 아무리  뚜렷한 사명감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지치는 순간이 대부분이라 한다. 우리 후배들이 그 림계점에 가까이 서있지 않나 하는 념려가 든다.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통해 순환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면 동화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몇번의 창작 콩클의 참여자 데이터를 보고 필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 창작대오가 고령화 현상이 너무 뚜렷하고 청년 작곡가, 작사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대로 페쇄된 우물 안에서 변화와 세대교체를 거부하고 있다가는 우리 음악이 정말로 어디로 갈지 걱정이 앞선다.  우리 음악계의 잃어버린 자률성과 다양성 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구교체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또한 평의를 위한 평의, 불합격을 위한 평가기준 등 평의기준에도 많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전문가만의 특유하고 관료적인 평의기준도 많이 개변하고 바로잡아야 할 대목이다. 예술은 틀린 것이 없다. 생각하기 다를 뿐이다. 평의기준을 그들 각자의 취향에 따라 맞추다 보니 우리 음악이 그 기준에 상응하는 위치로 고스란히 보존돼가고 있었다고 본다. 평의위원과 평의기준도 새세대 젊은 음악인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우리 음악의 새로운 구도가 탄생하고 우리 음악의 새 시대성과  글로벌화가 되여 젊은층들의 관심도가 높아질 것이다. 우리 연변은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고장으로 전국에 소문나있다. 지금도 김봉호 선생님이 20세기 60년대  작곡한 , 등 노래가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을 통하여 중국대지에 널리 울려퍼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리는 감동도 받지만 스스로 반성도 해야 한다.  21세기 우리의 명곡은 아직도 진행중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정신적인 것의 감각적 표현이다. 나름 대로 우리 시대 예술을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분야가 대중음악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음악에 대한 정신이 아름다움과 그 미적 기준이 너무 분주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연변가요, 연변음악의 갈길은 우리절로 반성하고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연변일보 
160    우리 가요의 현시점과 갈길은 어디인가? - 박영일 댓글:  조회:950  추천:0  2022-03-10
우리 가요의 현시점과 갈길은 어디인가? - 박영일 필자는 작곡이 주전공이여서인지 류학이 끝나고 귀국 후 항상 동일한 질문을 지인들한테서 받게 되였다. 등 항상 받는 질문이다.  피하고 싶은 질문이였고 직접적인 답변은 언제나 피하였던 현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제 우리 음악, 우리 가요를 사랑하며 그 발전을 기대하는 한 음악인으로서, 또한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비판적으로 행동하는 한 지식인이 되기 위해 이 부분을 대담하게 짚어보려고 한다. 필자는 우선 우리 가요가 대중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당과 정부는 모택동의 연안문예좌담회 연설 정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민을 중심으로 하는 창작방향을 토대로 문예창작 규률을 존중하는 기초에서 문학예술작품의 개혁과 창의를 제창하고 있다. 하기에 ‘백화제방, 백가쟁명’은 문예창작에서 부동한 풍격과 부동한 수법의 동시 존재와 자유발전을 고무격려한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필자는 우리 연변의 일부 음악전문가들이 우리 인민(대중)들이 좋아하는 우리 음악, 우리 가요를 보는 시각이 웬지 외곡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일부 음악전문가들이 말하는 소위 고급예술음악은 누구를 위한 음악인가? 적지 않은 소위 엘리트층의 예술인들은 항상 전통음악, 서양음악 등 음악들을 진정한 고급예술음악이라 하며 대중음악(대중가요)은 그 하위 음악으로 평가하고 저급한 산물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해“대중음악도 예술이요?” 하는 질문들에 항상 대중음악은 무기력하였으며 언제나 소외된 존재로 되기도 했다. 과거 우리 서민들 사이에서 창작되고 전해져온 민요도 말하자면 전통 시대의 대중가요라 불릴 수 있다. 필자는 대중음악, 대중가요를 우리 예술의 중요한 한개 부분으로 보고 있다.그런데 현재 우리 연변 음악계에서 일반 서민 즉 일반 대중들이 공감하고 좋아하는 음악들이 소외당하고 있고 그 발전도 부진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 가요(음악)의 다양성도 많이 결핍하다고 본다. 연변가요가 무슨 쟝르인지 물어보면  이에 답변할 작곡가와 가수를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왜서 연변가요가 무슨 쟝르인지 답변할 작곡가나 가수가 손에 꼽을 만큼 적은 것일가?  곰곰히 따져보면 우리 리론계의 문제점 즉 론리적 시스템과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방향이 없었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외국에서는 실용음악(대중음악)학과 박사과정이 나왔고 그들은 세계 유명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한 학자급 대중음악 전문가들이 과학적인 커리큘럼의 적절한 도입으로 대중음악을 세계화로 이끌어가고 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국내 9대 음악학원에도 이제 류행음악학과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심양음대 같은 대학에는 류행음악학과가 한개 단독학원으로 승화되였다. 그러나 우리의 현시점은 대중음악의 쟝르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고 우리 음악에 대한 정확한 리론적 정의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 우리 가요는 보편적으로 무슨 쟝르에 속하는가? 신민요, 트로트, RMB, 발라드 등 다양한 쟝르에서 우리만의 쟝르가 따로 있는지? 우리 음악학 학자들의 참여로 우리 가요의 쟝르 구분과 우리 가요 정체성의 리론적 정리, 정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리론적 근거와 받침이 있어야 다원화와 다양화의 글로벌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야의 세대교체에도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후배들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이 시스템내에서 자기들이 아무리  뚜렷한 사명감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지치는 순간이 대부분이라 한다. 우리 후배들이 그 림계점에 가까이 서있지 않나 하는 념려가 든다. 자연스러운 세대교체를 통해 순환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면 동화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몇번의 창작 콩클의 참여자 데이터를 보고 필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 창작대오가 고령화 현상이 너무 뚜렷하고 청년 작곡가, 작사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대로 페쇄된 우물 안에서 변화와 세대교체를 거부하고 있다가는 우리 음악이 정말로 어디로 갈지 걱정이 앞선다.  우리 음악계의 잃어버린 자률성과 다양성 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구교체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또한 평의를 위한 평의, 불합격을 위한 평가기준 등 평의기준에도 많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전문가만의 특유하고 관료적인 평의기준도 많이 개변하고 바로잡아야 할 대목이다. 예술은 틀린 것이 없다. 생각하기 다를 뿐이다. 평의기준을 그들 각자의 취향에 따라 맞추다 보니 우리 음악이 그 기준에 상응하는 위치로 고스란히 보존돼가고 있었다고 본다. 평의위원과 평의기준도 새세대 젊은 음악인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우리 음악의 새로운 구도가 탄생하고 우리 음악의 새 시대성과  글로벌화가 되여 젊은층들의 관심도가 높아질 것이다. 우리 연변은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고장으로 전국에 소문나있다. 지금도 김봉호 선생님이 20세기 60년대  작곡한 , 등 노래가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을 통하여 중국대지에 널리 울려퍼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리는 감동도 받지만 스스로 반성도 해야 한다.  21세기 우리의 명곡은 아직도 진행중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정신적인 것의 감각적 표현이다. 나름 대로 우리 시대 예술을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분야가 대중음악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음악에 대한 정신이 아름다움과 그 미적 기준이 너무 분주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연변가요, 연변음악의 갈길은 우리절로 반성하고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연변일보 
159    조선의 뜸부기는 다 네 뜸부기냐 댓글:  조회:949  추천:0  2022-03-07
[김경애의 대림칼럼] 조선의 뜸부기는 다 네 뜸부기냐 김경애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장) 750만 한민족 재외동포중 중국 조선족이 200만쯤 된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너도나도 잘 알고 있었던 이 사실이 논란의 씨앗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중국 조선족들이 한복을 입고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무대에 나선 것은 근래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에서 개최한 2022년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한 조선족 여성이 민족 복장을 입고 퍼포먼스에 참가하자 일부 한국 언론들에서는 이를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이요, ‘한복 공정’이라고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뜬금없이 불거진 이슈들은 흔히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하고 어떤 사건을 덮기 위한 위장의 무기가 되기도 했었다.    안타깝게도 누군가 바라던 대로 이번 한복 논란은 수많은 중국 조선족들의 반한 감정과 불만을 자아냈다. 또 역사를 잘 모르는 일부 한국 정치인들을 비롯한 소수의 악플러들에게 반중 정서를 표출해내는 좋은 빌미를 제공해주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의 지성인들은 알고 있다. 이번 논란은 극소수의 한국인들이 중한 수교 30주년을 맞으며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반중 심리를 선동하고 표출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이슈화하여 정치적 논쟁으로 이끌어가려는 수단이라는 것을.   세계 각지에 정착한 이주민을 비롯하여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은 이주 지역이 다르고 이주 배경과 단계 등이 조금씩 다르지만 다른 나라에 정착한 재외동포와 마찬가지로 출발지는 모두 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즉 중국 조선족의 뿌리는 반도에 있다는 말이다.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조선족은 중국의 공민이자 반도의 재외동포라는 사실은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국적은 중국이지만 재외동포로서 민족의 생활습성과 문화를 끈질기게 유지하고 또 그것을 지켜온 중국 조선족은 세계 각지에 분포된 재외동포 중 손꼽힐 정도로 민족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의식주, 민족풍속 등 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도 본토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변화시켜서 자신들에게 맞는 민족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 왔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선포하면서 영토 내의 모든 민족에게 중국 공민의 자격을 부여했다. 이는 어떤 이유로 어디에서 왔는지를 따지지 않고 조건 없이 대륙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조선족은 집거지마다 학교를 설립하고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전통의상을 입고 물동이를 이고 다녔고, 부뚜막과 구들을 설치하고 메주를 쑤어서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어 먹었다.    강제 이주를 당했거나 장사하러 떠났거나 항일투쟁하러 떠났거나 이주한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만주벌판 즉 지금의 중국 동북 3성 지역에서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와 더불어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계승하였다.    중국이 해방되고, 조선반도 (한반도)는 분열되면서 점차 국경이 선명해지게 되었다. 그나마 소식통이 빠른 절반은 조선반도 내로 돌아오게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한동안 광복 소식도 모른 채 중국에서 살게 되었다. 여기에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그리고 민족운동을 한 항일투사들과 구국 활동을 하고 민족투쟁을 했던 국가 유공자 후손들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중국 조선족은 이주민 1세, 2세들에 의해 중국 땅에서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고 오늘날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민족문화란 “오랜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한 민족이 같이 생활하면서 축적하여 온 경험과 지식의 총체를 말한다. 즉, 민족문화는 민족 내부의 어느 특정 계층이나 어느 시기의 문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되어 온 생활 양식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므로 우리 민족문화는 어느 한 나라의 것으로 국한된 것이 아닌 한반도를 포함하여 750만 재외동포가 함께 지켜온 것이다.   누군가 필자에게 물었다. 중국에서 살지 왜 한국에 왔나? 라고. 그냥 좋아서…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한국은 필자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이다. 갓을 쓰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복은 조선 시대부터 입던 옷이며 우리 민족의 전통의상이다. 중국 조선족은 물론 모든 재외동포는 언제 어디에서나 당당히 자기 민족의상을 입을 자유와 권리가 있다.    여담이지만 유명한 중국 조선족 작가 림원춘의 “몽당치마”가 1984년 중국 작가협회에서 중국 단편소설 우수문학상을 받게 되었는데 북경으로 수상하러 갈 때 림 작가는 민족의상을 입고 참가했다고 한다. 그때 민족의상을 입은 그가 외투를 벗자마자 현장의 카메라가 모두 집중되어 셔터 세례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몽당치마”를 읽을 당시 필자는 단발머리에 노란 저고리, 빨간 치마를 입고 중국의 어느 한 조선족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한복은 교복이자 평상복이었는데 ‘몽당치마’라는 소설은 필자에게 문학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켜 주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스무 해 전 필자는 세 살배기 아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 올라서 천지를 바라보며 추억을 남긴 적이 있다. 그때 수많은 다른 민족 관광객들이 옷이 이쁘다고 부럽게 쳐다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고, 필자는 우리 민족의 전통의상이라고 자랑스레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중국 조선족은 우리 말을 당당하게 지켜왔으며 우리 민족의 풍속과 전통을 이어왔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전통의상을 입고 회사를 다니거나 일상생활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국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조선족도 개량 한복을 디자인하여 서비스 업종에 활용하거나 평상복이 아닌 전통의상으로 설맞이, 운동회 등 각종 공연이나 행사, 결혼식 예복 등 격식을 갖출 때 주로 입는다. 한국인들도 전통의상은 축제 때나 각종 공연, 피로연, 전통 혼례, 한국을 대표하는 공식 석상, 그리고 제를 지낼 때 등 관혼상제를 비롯한 특별한 날에만 입는 줄로 알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역사 시간에 꾸벅꾸벅 졸았던 이들이 이제 막 깨어나서 봉창 뜯는 소리는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더 말해봤자 자신의 무지를 세상에 알리는 격이 되고 민족의 창피이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의 뜸부기는 다 네 뜸부기냐”라는 말이 있는데 “제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덮어놓고 다 제 것인 것처럼 우기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한복은 결코 한국이라는 한 나라의 것만이 아니다. 소위 한민족이라고 하는 우리 민족은 조선(북한)을 포함한 8천 460만 인구를 가리키는데 한복은 우리 민족 8천460만의 전통의상이다. 한복을 민족 복장이 아닌 한국의 것만이라고 우기면서 잘 안 입던 한복을 꺼내 입고 뜬금없이 SNS에 한복 지키기 챌린지를 펼치는 사람들은 여론에 휘말리지 말고 진심으로 한복을 사랑하고 전통의상을 평상복에 접목하여 전통을 이어 나갈 새로운 패션 디자인이나 구상해봄이 어떨까 싶다.   오늘날 한국도 다문화사회로 진입하면서 다른 민족과의 교류는 필연 적이 되었다. 다문화적인 글로벌시대에 우리는 서로 다르게 발전한 민족문화를 폭넓게 수용하고 발전시키기에 노력해야 하며 글로벌시대에 외래문화와 전통문화는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같은 민족임을 잊어서는 안 되며 중국에서 조선족이 발전시키고 지켜온 민족문화를 왜곡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750만 재외동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일전에 일부 한국 언론이 보도한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이니 ‘한복 공정’이니 하는 논란에 대하여 주한 중국 대사관에서는 “한복은 한반도의 것이며 또한 중국 조선족의 것으로, 이른바 ‘문화공정’, ‘문화약탈’이라는 말은 전혀 성립될 수 없다.”라고 명백히 밝힌 바가 있다.   민족문화는 민족통일을 근간으로 하게 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민족통일이 아직 안 된 현재 시점에서 단순히 과거를 논하고 누구의 것인지 연구하는 과제에 그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외래문화를 흡수하고 동화하여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민족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문뜩 중국 위나라의 유명한 시인 조식의 칠보 시가 떠오른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은 솥 안에서 울고 있네 본디 한 뿌리에서 자랐건만 어찌 이리도 서로 들볶아야만 하는가 동북아신문
158    자대 댓글:  조회:904  추천:0  2022-02-25
[두만강칼럼] 자대   최정실(교원) 살다 보면 인간의 일거일동은 자대의 차이에 따라 부동한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연히 긍정을 받아야 할 습관과 행위가 말밥에 오르거나 부정당할 경우 기분이 잡쳐진다. 이는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고정 관념과 선입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애교가 꽤 많은 축이다. 좋으면 “아, 좋아!”라고 손벽을 치며 환성을 올리기도 하고 신나게 춤까지 출 때도 있다. 나의 둘째언니는 그런 나의 애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먼 후날 나의 애교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가살로 느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십년이 지난 어느 날 무용련습이 끝난 후 우리는 한 동료가 사온 꿀떡을 먹게 되였다. 알록달록 여러가지 색갈의 꿀떡을 보는 순간 나는 또 저도 모르게 “아, 좋아!”라고 손벽을 치며 환성을 올렸다. 그런데 며칠 후 동갑인 A씨가 나를 보고 아주 정색해서 말하는 것이였다. “정실이, 우리 이 나이에 너무 가살 피우면 안돼, 꿀떡은 못 먹어본 음식도 아닌데 그게 뭐 그리 좋아서 그 날 몸짓까지 해가며 환성까지 올리지?” 나는 진심으로 나를 위해 충고를 아끼지 않는 A씨의 마음이 고마왔다. 그러나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그대로 좋다는 표현을 했을 뿐이였다. 이로 해서 나는 며칠 동안 고민에 잠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날 한자리에 있었던 나의 몇십년 지기인 B씨에게 느낌을 조심스레 물었다. 그랬더니 B씨는 전혀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언니도 B씨도 나의 애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은 자주 나의 애교를 보아와서 익숙해졌기 때문이였고 A씨에게 나의 애교가 가살로 비춰진 것은 내가 상대에게 익숙해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량측 다 자기만의 익숙한 정도의 틀 안에서 만들어낸 자대로 나를 쟀던 것이다. 즉 후자는 자기 틀 안에서 생긴 기준으로 고정된 관념으로 나의 애교를 판단했기 때문에 나의 애교가 가살로 느껴진 것이다.   한 사람의 고정 관념은 또 늘 그 사람의 선입견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한 사물과 사람을 평가할 때 우리는 절대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하늘이 우물 만큼 크다’는 식으로 자기에게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판정하면 안될 것이다. 반드시 익숙한 틀 안의 자대로 재는 고정 관념과 그로 말미암아 초래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우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람을 포용해주자. 약간은 부자연스럽더라도 인정하고 허용하자. 그런 다음 타인의 단점도 받아들이자.   한 사람의 흉금의 크기는 얼마만큼 포용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고 흉금의 크기는 그 사람의 삶의 무대의 크기를 결정한다. 즉 사람을 너그럽게 많이 포용하면 할수록 우리가 늘 말하는 그릇이 큰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술병을 꽃병으로 사용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고 담기는 꽃에 따라 술병이 꽃병보다 더 돋보이는 것처럼 기존의 틀을 깨여 고정 관념을 타파하고 선입견을 버리면 한 사물과 사람의 단점이 장점으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나무잎이 그렇게 많아도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서로 다른 존재이다.   소시적의 아인슈타인이 둔하기로 이름 나고 문제아 취급을 받았을 때 그의 어머니가 변함없는 모성애로 보듬어주지 않았더라면 후날의 세계의 유명한 과학가로 자라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으로 포용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고정 관념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사람을 보고 세상을 바라보자. 그러면 이 세상이 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질 것이며 진정 살맛이 날 것이다.   길림신문
157    [한복론난] 과연 된장다운 민족 댓글:  조회:811  추천:0  2022-02-14
과연 된장다운 민족   글 / 연변오덕된장술유한회사 회장 리동춘       요즘 시끌벅적거리는 한복 논란을 접하면서 새삼스레 우리조선민족은 과연 “된장민족”이구나 하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아 이참에 된장 얘기를 하고 싶다.   정통의 된장은 최하 9개월의 발효시간을 거쳐서야 “된”자를 붙인 이름으로 탄생된다. 똑같은 원료와 환경에서 빚어져도 집집마다, 심지어 한집안의 장독마다의 맛이 좀 씩 다르다. 왜냐하면 된장은 발효식품이기에 장독주변 공중에 서식하는 미생물 군체의 환경지배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된장의 맛은 그 속에 살아 있는 수천 종의 좋은 미생물, 나쁜 미생물들이 서로의 생존을 위하여 치열하게 싸운 결과에 따르게 된다. 즉 A라는 미생물 군체가 승리하면 A맛이 나고, B라는 미생물 군체가 이기면 B의 맛을 내게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살펴보면 좋은 미생물편이 우세를 차지하여 맛도 좋고 영양도 많고 기능도 우월하고, 더불어 단심, 화심, 선심, 불심, 항심이란 신기한 영성문화까지 생성시켜 정신적 자양분까지 갖추므로 그 어떤 식품이 비교될 수 없는 완벽한 식품으로 탄생한다. 그래서 가장 완벽함을 뜻하는 “된~장”이다.   자연계 모든 동물의 특성은 그들이 섭취하는 먹을거리에 따르게 된다. 마치 초식동물은 성질이 유순하고 육식동물은 날카롭고 곡물식동물은 약삭빠르듯이 말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인간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된장은 우리민족 식품의 혼이다. 그러니 더욱 우수한 문화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자그마한 문제만 나타나면 치열한 “격투”를 벌인다. 이번 한복 논란도 마찬가지다. 내가 볼 바에는 별거 아닌 것 같다.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과 언론들에서 나름대로 자기들의 문화를 지킨다는 문제의식에서 중국정부를 향해 항의를 제기했을 뿐이다. 옳고 그름은 중국정부에서 당연히 가장 적절한 답을 할 것이다.   그들이 제기한 항의가 조선족이 한복을 입는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조선족들이 스스로 피해의식을 내비치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앞장에 나서서 거창하게 내부 싸움을 만들어 가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한국의 일부 사람들이라 했다. 내가 보기에는 된장속의 미숙한 일종의 미생물들일 뿐이고 그들의 관점일 뿐이다. 한창 잘못된 발상이지만 그들이 전체 한국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세계 속의 조선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일부 조선족지식인들이 스스로 해석한 정의로운 글에 따라서 조선족 일부 평민들 심지어 한국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고 기술을 배우고 선진적인 관리법도 배우는 등 많은 혜택을 받는 부분적 사람들까지 "싸움"에 가담하여 대한민국을 폄하하고, 그 나라의 어른나리들에까지 삿대질하고 나서면서 시야비야 따지고 드는 것은 과연 우리 조선족들이 취해야 할 자세인가 사뭇 반문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조선족이 중국에 살면서 자체로 해결해 나가야 할 새로운 문제점들이 많이 산재되어 있다. 즉 지키고 이어가면서 업그레이드해 나가야 할 민족의 전통문화문제, 교육, 경제, 기술, 기업 발전 등등. 결론적으로 우리는 시대 발전적 흐름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고 그 과제들을 풀어 나가는데 더욱 몰두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더욱 완숙한 참 된장민족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자!   동북아신문
156    호호호虎虎虎 호호호好好好 댓글:  조회:1025  추천:0  2021-12-29
호호호虎虎虎 호호호好好好 정성수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으로 육십 간지의 39번째 해이다. 임壬은 흑黑이므로 검은 호랑이 즉 흑호黑虎다. 온몸이 검은 호랑이는 현재 세계적으로 7마리 정도 남았다고 한다. 호랑이를 한자漢字로 ‘虎狼호랑’이라고 쓰지만 우리 민족은 ‘호랑이’보다는 범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했다. 요즘에는 범 대신 호랑이라고 부르는데 범이 호랑이에게 밀려난 셈이다. 호랑이의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다. 범을 뜻하는 虎(범 호)와 이리를 뜻하는 狼(이리 랑)에 접미사(이)가 붙어(虎+狼+이) 호랑이가 되었다고 한다. 호랑이는 발달된 근육과 균형 잡힌 신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천천히 걷거나 느리게 움직이다가도 먹잇감을 공격할 때의 몸놀림은 말 그대로 전광석화電光石火다. 늠름한 기품과 빼어난 지혜가 있다고 해서 산중왕山中王 ․ 산령山靈 ․ 산군山君 ․ 산신령山神靈으로 추앙받는다. 호랑이는 우리 민족과 대단히 친숙한 동물로 건국신화에 등장하고 동화에도 나온다. 호랑이의 형상은 선사시대 청동기와 암각화 ․ 토우와 12지신 상 ․ 고려시대의 동경銅鏡과 석관石棺 ․ 조선시대 능묘 등에서볼 수 있다. 그 외에도 공예품이나 의식주 용품과 신앙의례 기물, 연희용 오락기구, 악기 등의 장식에서도 나타나며 그 밖에도 그림 ․ 조각 등 미술품에도 등장한다. 또한 호돌이라고 명명하여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가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프로야구팀 기아타이거스 로고, 군부대 이름인 백호부대와 맹호부대를 상징한다. 현재에도 고려대학교 로고와 정예 특전 공수부대의 상징물로 쓰이고 있다. 호랑이의 생김새는 등 쪽은 암적황색이고 불규칙한 검은 무늬가 많다. 네 다리는 약간의 담색을 띈다. 눈과 뺨 밑은 흰색이며 검은 점이 있고 주둥이 끝은 암연피색暗軟皮色이다. 또한 머리 위와 복부, 뒷다리에는 뚜렷한 갈색 반점이 있다. 귀 뒤는 광택이 나는 흑색이고, 귀 끝 가까이에는 흰 점이 있다. 꼬리 기부基部는 등 쪽과 같은 색이며, 끝과 뒷면은 연피색軟皮色 또는 대회백색帶灰白色으로 8~9개의 둥글고 검은 무늬가 있다. 수염은 백색이며 겨울털은 여름털에 비하여 길다. 호랑이는 대개 깊은 산 속이나 밀림 지역에서 단독생활을 한다. 힘이 세고 헤엄을 잘 쳐 주로 밤에 사냥하며, 멧돼지를 비롯해서 사슴 등 주로 동물들을 잡아먹는다. 그런 호랑이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멸종 상태다. 현존하는 호랑이의 아종은 시베리아호랑이 ․ 벵골호랑이 ․ 남중국호랑이, 인도차이나호랑이 ․ 말레이호랑이 ․ 수마트라호랑이 등 6종으로 보고되었다. 호랑이를 불교에서는 대충大蟲이라고 부른다. 이는 포유류 고양잇과에 속한 같은 종이라는 뜻이다. 중국 원나라의 시내암施耐庵이 쓰고 명나라 나관중羅貫中이 다듬은 장편 무협 소설 수호지水滸誌에 모대충母大蟲이라는 별명을 가진 여자 호걸 고대수顧大嫂가 등장한다. 모대충은 '암호랑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설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환웅에게 마늘을 받아 곰은 신의 계율을 지켜 사람이 되었고, 호랑이는 그러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나 토템Totem 신앙으로 본다면 호랑이는 곰과 달리 환웅에 반발한 반골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호랑이가 인간으로 변신한 설화가 있다. '김현감호金現感虎' 또는 '호원虎願'으로 불리는 '호랑이 처녀' 이야기다. 신라시대 초파일에서 보름까지 남녀가 흥륜사興輪寺(경주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한 사찰) 전탑塼塔을 도는 복회福會를 행하였는데 김현金現이라는 낭군이 있어서 밤이 깊도록 혼자서 탑을 돌기를 쉬지 않았다. 그때 한 처녀(호랑이)가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눈이 맞아 으슥한 곳에서 정을 통하였다. 사람과 호랑이가 사랑했다는 점에서 이물교구설화異物交媾說話(사람이 식물이나 동물과 교합하여 관계를 맺는 내용의 설화)로 분류되기도 한다. 또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는 범에게 부모, 자식, 남편 등을 잃은 가족이 그 원수를 갚고 시신을 찾아오는 설화가 실려 있다. 이것은 호환을 당한 가족들을 끝까지 지키는 유교 윤리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 태종부터 단종 대에 호두虎頭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내용은 한강漢江, 양진楊津, 박연朴淵 등의 용소龍沼에 호랑이 머리를 넣고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다. 동화 ‘호랑이와 곶감’에서는 우는 아이에게 곶감을 주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치는 것을 지켜 본 호랑이가 자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곶감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이 이야기는 호랑이를 어리숙한 존재로 만들어 호랑이를 인간과 친근한 동물로 희화화戱畵化하여 호환虎患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보고 싶은 민중의식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조상들은 호랑이를 사악한 잡귀들을 물리치는 영물로 인식되기도 했다. 정초에는 대궐이나 민가 할 것 없이 산신도山神圖나 호랑이와 까치 등의 세화歲畵를 벽에 걸어두거나 호축삼재虎逐三災 용호오복龍虎五福이라는 글씨를 기둥이나 출입문에 붙여 악귀를 쫓아내 액땜을 하고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다. 예로부터 호랑이 꿈을 꾸면 길하다고 했다. 특히 태몽胎夢에서 ‘호랑이를 품에 안았다거나 호랑이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거나 호랑이와 싸워 이겼다, 호랑이에게 물렸다는 꿈은 길몽吉夢 중의 길몽으로 치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명예와 재물 등을 몽땅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신비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시묘侍墓를 하는 효자를 지켜준다거나, 효성이 지극한 효자의 성묫길을 인도 하는 등 설화들은 효를 장려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호랑이는 살아 있는 자를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영혼의 인도자 또는 저승의 영역을 보호하는 신의 심부름꾼, 혹은 사경死境의 문지기 역할로 보고 있다. 위와 같은 여러 설화에 나오는 호랑이는 보은報恩의 수호자, 산신의 사자使者, 기우제祈雨祭의 희생물인 동시에 용맹하고 날렵한 동물로 절대적인 권위와 힘 등 다양한 비유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과 뗄 수 없는 밀접한 동물로 무섭고 두려운 맹수지만 한편으로는 어리석고 의뭉스러워도 결코 간교하지 않으며 배신을 모르는 우직함이 돋보인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에는 원칙과 기본이 중시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한다. 정치권은 물론 정부와 사회는 구태와 관행을 벗어 던지고 모두가 변해야 산다. 정치인 ․ 사회지도층 ․ 공직자 등이 솔선수범하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낡은 제도나 관습 따위를 고쳐 모습이나 상태가 새롭게 바뀐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환골탈태換骨奪胎만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진리가 통하고 사람들이 올바른 사고를 갖아야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내가 먼저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구태에 젖어 있거나 관행에 빠져 있으면 변화도 발전도 없다. 반성과 성찰만이 살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는 물론 사회와 경제 등 전반에 걸쳐 변화하고 바뀔 때 살기좋은 세상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법치를 바로 세우고 준법을 행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제는 눈짐작이나 고무줄 잣대를 버려야 한다. 세상을 직시하고 선명한 사회가 돼야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면 기득권도, 특권도 사라진다. 임인년을 맞이해서 각 지방단체에서는 사자성어를 내 걸고 있다. ‘변화에 한발 앞서 대응하고 주도적으로 길을 개척해 나간다’는 ‘응변창신應變創新’,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 나간다’는 ‘승풍파랑乘風破浪’, ‘어떤 일이든 강한 의지로 전력을 다하면 쇠와 돌도 뚫을 수 있다’는 ‘금석위개金石爲開’, ‘새로운 길을 열어 미래를 창조하자’는 '개신창래開新創來’, ‘거문고 줄을 바꾸어 다시 맨다’는 해현경장解弦更張', ‘흙을 쌓아서 산을 만든다’는 '토적성산土積成山', ’위기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 솔선수범한다’는 '성심적솔誠心迪率', ‘도약할 준비를 하고,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다’라는 ‘비도진세備跳進世’,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 등을 선정하여 새해의 각오를 다지고 있다. 반성도, 성찰도, 사자성어도 좋다. 우리 사회의 핫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소통이다. 소통은 일방적 소통이 아니라 쌍방적 소통어어야 한다.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어야 한다. 불통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 양상은 개인을 넘어 사회적으로 풀어야 하는 과제가 된 지 오래다. 요즘은 하루 종일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 없이 살기 어려운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시대다. 여기에 MZ(밀레니얼+Z세대)세대의 등장은 ‘바람직한 소통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장벽이 있다고 하여 소통을 멈춰서는 안 된다. 세대 간 소통이나 조직 내 소통은 부단한 노력만이 가능하다. 플랫폼이 달라지더라도 본질이 변하지 않는 것이 소통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소통을 하기위해서는 지시나 명령이 아닌 물음으로써 말문을 열고(이위하여以爲何如), 상대방의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며(경언심가卿言甚嘉), 겸손하게 의견을 듣고(자불지자自不知者), 이전 의견을 검토하자며 생각과 사람을 연결하여(소술선지紹述先志), 진심을 다해 솔선하면서 책임지고 대화를 실천(성심적솔誠心迪率)해야 한다. 우리들이 지켜야 할 세종의 5단계 화법이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 당신은 호호호虎虎虎인가? 호호호好好好인가? 묻는다.  동북아신문
155    송년회의 의미 □ 림창길 댓글:  조회:981  추천:0  2021-12-24
바쁜 하루는 끝났다. 온 가족이 다정하게 한자리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하루 있었던 일들을 주고 받으면서 마음 편히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식사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의 창문 쪽으로 다가가 찬바람이 부는 밖을 내다 보면서 나는 올해 일년도 다 가는구나 하고 감개에 젖었다가 습관적으로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위챗에 올해 처음으로 송년회를 한다는 통지가 들어 와 있다. 그 순간 집식구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즐기던 장면이 떠오르며 이것도 사실 하루를 마무리 하는 작은 회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식구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가족들 정서나 문제점도 제때에 교류할 수 있고 대화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알 수 있으며 서로 오고가는 관심 속에 정도 더 깊어가니 말이다. 송년회는 개인적으로나 단위, 조직, 팀에서 지나간 한해에 거둔 성과를 총화짓고 다가오는 한해에 도전할 계획을 세우는 중요한 내용을 갖춘 모임이다. 봄에 씨앗 뿌려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풍성한 성과를 받아안고 흰눈을 밟으며 사계절중 마지막 계절인 겨울을 보내면서 진행하는 모임이나 송년회 같은 사회활동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정신 상태를 한층 더 활기차게 한다. 참가자들은 평소와 달리 옷차림부터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된다. 남성들은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 례의이고 녀성들은 머리스타일부터 메이크업, 의상, 가방까지 꼼꼼히 신경을 써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만나서 서로 허리굽혀 인사하고 악수하고 오래동안 못 만난 지인들은 포옹도 하고 회포를 풀며 담소를 나누는 장면들이 사람을 흥분시키고 즐겁게 한다. 수년에 걸쳐 송년회는 이미 하나의 중요한 이벤트로 거듭나고 있다. 회의장도 알심들여 꾸며 주최측의 특색을 갖추고 스피커부터 현수막 제작, 회의장 식탁의 인원 배치까지 세심하게 준비한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일환인 회사의 홍보 영상은 각별히 신경을 써서 잘 준비한다. 대회장 배치는 기업의 응집력 제고를 위해 여러가지 기준이나 룰을 따져서 신중하게 대하며, 회의내용은 지나간 일년에 대한 총화, 우수 사업일군 표창, 래년 전망과 목표 등으로 알차게 꾸며진다. 그 외에도 추첨 행사와 문예공연 그리고 참가자들의 자발적 표현 등 다채로운 행사도 준비한다. 성공적인 송년회는 지난 1년을 잘 총화짓고 열심히 노력한 선진 인물을 표창, 격려함으로써 미래 비전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근무 의욕을 극대화하고 직원과 리더의 거리를 좁히며 무엇보다 한 회사의 기업 이미지를 높여주고 응집력을 높일 수 있다. 송년회는 모두가 일년 내내 바쁘게 지낸 뒤에 가지는 한차례 휴식의 모임일 뿐만 아니라 기업문화의 홍보수단이기도 하다. 좋은 기업문화는 기업이 치렬한 경쟁중에서 생존과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송년회는 희망의 준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기회이자 배움의 기회이기도 하고 자기를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구상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기업문화에서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완수정하며 현시대 기업인의 자세를 반성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송년회에 대하여 더 새롭게 인식하고 송년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한층 더 높여 적당한 사교도 하고 무대에 올라 자신을 어필하기도 하는 것이 보람된 현대문화생활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송년회에 대한 기대감 또한 고조되는 가운데 현대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면서도 자신의 존재가 묻히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게 또 하나의 현명한 선택이 아닐가. 나는 이번 송년회에서 또 어떤 것을 준비해 자신을 드러낼가. 연변일보 
154    영문자 이름의 재외동포로 살아간다는 것 댓글:  조회:987  추천:0  2021-12-16
[대림칼럼]  영문자 이름의 재외동포로 살아간다는 것 최미령    한국에서 나는 재외동포이다 보니 한글 이름이 아닌 중국어 병음 이름으로 외국인 거소증에 등기되어 있다. 내가 여러 가지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본인인증을 거치는 단계에서 한국인 서비스 제공자들의 얼굴은 찡그려진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중국어 병음 강의를 공짜로 해줘야 하나 싶기도 해서 나 또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씨-” 난 내 이름의 첫 영문자 C를 발음한 것인데 상대방은 가끔 흠칫 놀란다. 내가 성격이 좀 까칠하기는 하나 이만한 일에 언어적 폭력을 행사할 정도의 개념 없지는 아닌데 말이다. -알파벳 C로 시작되는 영문자 이름입니다. -아, 네. 확인 감사합니다. ‘#알파벳 이름을 사용’, #한국어를 너무 잘하는 외국인이라는 딱지가 붙은 나는 그러니깐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요를 속으로 되뇌게 된다. 오프라인에서 자주 연출되는 이러한 상황에는 익숙해졌다. 온라인상의 에피소드들은 그 버전이 참 다양하다. 10여 년 전 주민등록번호로만 온라인 쇼핑몰에 회원가입이 되던 시절의 일이다. 일부 사이트에서 외국인 거소증 번호로는 외국인 회원가입 자체가 불가하였다. 다소 알뜰형인 나는 비회원일 경우, 포인트나 쿠폰 사은품 지급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사이트 관리자한테 전화해 항의하였고 가입 기념으로 지급되는 포인트를 현금으로 받아내기도 했다. 결제 때마다 사용 가능한 몇 백 원 포인트를 사용하기 위해 물건을 살 때마다 전화해서 결제 금액에 관해 문의를 했고 진상 고객인 내가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담당 책임자가 통이 커서인지 포인트에 상관없이 결제 금액의 백 단위부터는 아예 차감해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감한 포인트보다 통화료가 더 많이 나왔을 수도 있겠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이는 좋은 예들이다. 나를 뚜껑 열리게 한 것은 휴대폰 통신사였다. 내 이름 알파벳 10개 자모를 힘겹게 누르고 다음 단계를 클릭했는데 정보 오류의 창이 자꾸만 떴다. 혹여 빼놓은 알파벳 자모가 없는지 손가락이 가늘지 않아 옆자리 알파벳으로 잘못 눌리어진 것은 아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점검을 계속하였는데도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바질바질 속을 태우다가 설마 하면서 성씨의 마지막 자모인 I와 이름의 첫 자모인 M 사이에 띄어쓰기 버튼을 터치해 넣어보았다. 기적같이 성공하였다. 성과 이름자를 띄어쓰기하지 않아서 나는 본인인증이 거부되었던 것이다. 반강제적인 영문자 이름 사용도 모자라, 이렇게 '엄밀한' 이산의 양태를 갖추어야 하다니 참 허구프게 슬프다. 이름 따로 성 따로 하니 면세점에 회원 가입하던 일이 생각난다. 면세점 회원가입 페이지에서 신분 선택을 함에 있어 ‘외국인’을 클릭하는 순간 영문자가 가득한 창이 떴다. 글로벌하게 이름과 성의 첫 알파벳은 대문자로 써야지 하는 '상식'을 잊지 않으며 아 Q의 원 그리기 못지않게 키보드를 전환해가며 대문자와 소문자를 구별해 입력하느라고 애썼다. 드디어 가입 완료가 되고 나서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Meiling Cui를 즐겨 감상했다. 구매 결제를 다하고 나의 여권 정보를 대조하다가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영문자로 뜨니 당연히 잉글리시 습관대로 자체 판단하여 이름+성 순서라고 생각했는데 해당 홈페이지에서 요구한 것은 성+이름이었다. 김치와 함께 나온 스테이크 같은 조합에 멘붕이 왔었다. 울고 웃지 못할 영문자 이름 에피소드에 대처 가능한 데이터가 내 안에서 이미 충분히 구축되었다고 판단했는데 또 한 번 엿을 먹게 될 줄은 몰랐다. 모 온라인 쇼핑몰에서 옷을 카카오 송금 형식으로 결제 완료하고 당일 발송이라고 하였으니 이튿날이면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었다. 배송 상황을 체크하느라고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입금 전이라는 거다. 뭐가 잘못되었지 하는 생각에 물의 창에 입금확인을 부탁했더니 입금자 이름이 CUIMEIL로 표기되어서 구매자의 정보와 일치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입금 전이라고 판단하였다고 하는 ‘아주 논리적이고 성의 있는 답변’이 왔다. 다소 억울하기도 했다. 구매자와 입은 자의 이름이 다른 이 사태를 초래한 것은 절대 내가 덤벙거리면서 이름을 쓰다 말아서가 아니라 전산상 외국인인 내 이름이 길다 보니 맨 뒤에 알파벳 3개는 자동으로 다 가려지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이 같은 사태의 발생을 미연이 막을 수 있는 방지책은 뭘까? 전산상 체현되는 알파벳 개수에 맞춰 개명하는 거 일가 아니면 긴 성명을 작성하여 부득불 이렇게 밖에 되지 못하는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정상참작을 바라는 성명서를 보내는 것일까? 의도치 않게 나는 입금자명과 구매인 명을 통일시키지 못한 덜떨어진 인간이 되어버렸다. 여기저기 4차 산업 혁명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진행하는 행사들이 있어서 검색해 보았다. 스마트가 어쩌고 하는 인문학 전공인 내가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낱말들이 가득 나열된 부분들을 건너뛰고 단점이 무엇인지를 보니 개인 정보의 무제한적인 공개라고 하였다. 정보가 오픈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나'라는 아이디 쓰기 방식을 박탈 당한 것인 것 같다. 나한테 편한 기호로 말하고 쓰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어디서 언제 즈음 허락될까? 최미령 약력 : 1987년생.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 박사 재학 중. 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가끔 지면에 글을 쓰기도 하는 불성실한 글쟁이다. 동북아신문
153    구狗와 견犬 댓글:  조회:1094  추천:0  2021-10-25
  구狗와 견犬   정성수   사철 먹는다는 보신탕에 대하여- 반려로 보는 견犬 요즘 ‘개고기 식용 유무’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대통령이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이제는 개 식용 금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며 ’관계부처에서 검토해 달라’고 지시했다는 보도가 나간 후 부터다. 이는 사실상 개고기 식용을 금지한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다. 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자 동물보호단체들은 일제히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반하여 개 식용을 옹호해 온 ‘대한육견협회大韓肉犬協会’와 식용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개 식용 금지 검토' 지시에 항의하는 의견서를 청와대에 전달하며 크게 반발했다. 그런가 하면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식문화를 법률로 금지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며 의구심을 나타냈다. 개고기 식용 유무는 2003년부터 농림축산식품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이 논의했지만 아직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사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먹는 보신탕補身湯이 국제적으로 논란이 된 것은 ‘88서울올림픽’ 때였다. 당시 개최국인 우리나라 음식문화에 관심이 높아지자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가 한국인을 개고기를 먹는 야만인으로 비난하면서 촉발되었다. 이에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대외적 이미지를 재고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보신탕을 집중 단속하여 보신탕집들이 도심에서 외곽으로 밀려나는 수난을 겪었다. 최근에는 BBC(英國放送公社)가 한국에서는 매년 100만 마리의 개가 식용으로 도축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하자 찬반 여론이 들끓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브리지트 바르도의 우리나라 보신탕문화 비판에 대한 볼로냐대학교 University Of Bologna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주 볼로냐 위치)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 교수의 말이다. 그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이 프랑스 사람처럼 개고기를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결속주의結束主義이자 파시스트Fascist' 로 밖에 볼 수 없다. 어떤 동물을 잡아먹느냐의 문제는 인류학적 문제다’라고 말했다. 또한 ‘상이한 문화권에서도 서로 다른 관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감수할 수 있는 것과 감수할 수 없는 것과의 사이에 경계를 구분하는 잣대는 상식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음식은 그 사회의 풍속이고 문화이며 전통이다. 따라서 음식문화는 나라마다 다르므로 다른 민족의 음식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식용으로 보는 구狗와 반려로 보는 견犬​ 개는 인류와 함께하는 동물로서 반려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민족들의 훌륭한 식재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보신탕은 개고기를 푹 삶아 수육으로 만든 후 뼈를 곤 육수에 토란대나 삶은 배추시래기와 고춧가루, 된장 등 각종 양념을 넣어 끓이다가 대파, 부추, 생강, 마늘 등을 넣고 더 끓인 국이다. 먹을 때는 깻잎, 고추, 들깨가루를 넣고 수육을 곁들인다. 이런 보신탕을 먹는 민족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중국, 베트남 등으로 최대 소비국은 중국이었다. 베트남 역시 우리나라를 추월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중국인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일본이나 다른 동남아 국가도 역시 마찬가지다. 아시아에서 보신탕을 먹는 나라는 이제 우리나라와 베트남, 북한뿐이다. 북한에서도 개고기를 ‘단고기’라고 부르며, 외국 손님에게까지 공식적으로 대접한다. 서구권인 프랑스에도 1910년대에 찍힌 개고기집 사진이 있다. 심지어 극지 탐험가들도 필요하면 썰매견을 잡아먹었다. 이런 의미에서 유독 한국인들만이 개고기를 섭취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서구권 사람들의 인식은 옳지 않다. 가난을 면치 못하던 농경문화에서 돼지는 잔칫날에나 잡는 귀한 동물이었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소나 알을 낳는 닭의 경제성에 비하면 개는 집을 지키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식용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개고기 식용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보신탕은 이름도 다양하다. ‘사철탕’, ‘자양탕’, ‘영양탕’ ‘개장국’ 등으로 불리며 주로 삼복더위에 먹는 우리의 전통 음식이다. 요즘도 즐겨먹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복날 보신탕을 먹는 이유는 다양한 문화와 민속이 얽혀 있어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 풍속서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조선 정조·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정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의 세시풍속을 월별로 서술한 세시풍속지)’가 인용한 ‘사기史記(전한시대前漢時代 사마천司馬遷이 편찬)’에는 복날 개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벌레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함이라고 했다. ‘동국세시기’에서는 곤충을 뜻하는 벌레 ‘충蟲’ 자를 썼지만 원본인 ‘사기’에는 벌레 ‘고蠱’라고 쓰여 있다는 점이 다르다. ‘사기’에서 말하는 벌레는 일반 곤충이 아니라 배 속에 있는 벌레다. 기생충에 의한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기록은 ‘사기’의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에 의하면 역질疫疾을 막으려고 개고기를 문설주에 걸어놓음으로서 나쁜 기운이 성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았다. 6세기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중국 육조 시대의 형초로 지금의 후베이, 후난 지방의 행사와 풍속 등을 기록한 책)’에서도 복날 뜨거운 국을 먹는 것은 나쁜 기운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결국 전염병이 도는 여름날, 뜨거운 국과 고기를 먹음으로서 영양도 보충하고 전염병도 예방한 것이다. 개고기는 조선시대 어느 푸줏간에서나 볼 수 있어 평민들이 자주 먹던 고기였다. 정조正祖(조선 제 22대 왕이자 영조의 손자, 사도세자의 아들)임금 역시 보신탕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서민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증거다. 뿐만 아니라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전 시 외무독판外務督辦이 각국 외교관을 초청해서 서양식 고기요리와 함께 보신탕을 대접했다는 이야기가 프랑스의 시사 잡지 ‘일뤼스트라시옹Illustration’ 지에 실린 적도 있다. 보신탕을 서구 언론에 소개한 나라 프랑스가 유독 우리나라 보신탕 문화를 거론하고 나서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중요한 것은 개를 ‘반려伴侶’로 보느냐? 가축家畜으로 보느냐?다. 개를 반려로 보는 측은 개고기 생산 과정에서 문제점과 위험성은 제기하고 있다. 쓰레기 같은 음식물로 개를 사육한다는 것이다. 불법 개농장에서 발생하는 분뇨나 소음으로 주위에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불법 도살은 위법이며 재래시장에서 개고기 전시와 판매는 비위생적이라고 한다. 특히 전기가 흐르는 쇠꼬챙이로 개를 도살하는 감전사感電死는 잔인하고, 목을 매달아 죽일 때 개가 당하는 심한 통증은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사용을 자제하고 있는 현실에도 위배된다고 항변한다. 특히 약물을 이용한 도살은 개고기를 먹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식용 목적으로 하는 개에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축 및 유통과정을 다른 가축과 같이 양성화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 이제 세상은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더 이상 보신탕을 먹기 보다는 개를 애지중지하는 나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펫팸Pet-fam(애완동물pet과 가족family을 합성한 신조어)'이 늘어나면서 이색적인 반려동물 상품이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 벨기에 밀 맥주 브랜드 호가든Hoegaarden은 한국에서 최초로 반려견이 마시는 맥주인 '펫비어Pet-beer)'를 출시했다. 그뿐 아니다. 개를 위한 패스트푸드가 나와 인기를 끈지 오래다. 미스터피자는 개 전용 피자 '미스터펫자(Mr.Petzza)'를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사람처럼 6년 근 홍삼으로 건강을 챙기기도 한다. KGC인삼공사의 반려동물 브랜드 지니펫Ginipet은 정관장 6년 근 홍삼을 가미한 사료를 판매하고 있다. 그 외에도 CJ제일제당이 반려견용 오네이처O’NATURE 선물 세트를 선보였다. 하림 펫푸드 역시 더:리얼The Real 선물세트를 출시했다. 개를 반려로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개를 개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개를 가축으로 보는 입장은 개는 가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축산법 및 축산법 시행규칙에 19개 가축의 종류가 나열되어 있다. 즉 개를 비롯해서 소, 염소, 노새, 당나귀, 말, 돼지, 꿀벌, 토끼 등이며 관상용 조류와 지렁이 등 사육이 가능하고 농가 소득증대에 기여할 수 있는 동물을 가축으로 고시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개가 ‘가축’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개는 가축이고, 식용으로 먹는 것은 합법이라는 것이다. 개를 가축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개는 개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식용으로 보는 구狗와 반려로 보는 견犬을 구별할 때다.   ​식용으로 보는 구狗​ 동북아신문
152    죽음의 일상화 댓글:  조회:1162  추천:0  2021-10-14
죽음의 일상화 류경자 죽음은 삶의 한 과정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크게 바뀌는 시대 얼마전에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년세가 꽤 있는 분이긴 하지만 워낙 건강한 분이시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 2주전까지만 해도 친구의 집에 놀러가서 그분이 해주시는 밥을 먹군 했다. 나중에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어머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숨을 거두기전까지 딸과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흔히들 마지막 유언으로 아주 중요한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분은 딸과 일상을 얘기했다. 마침 딸이 차를 바꿀 예정이였기에 딸과 어떤 차를 사면 좋을지 차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딸과 일상을 공유하면서 보낸 것이다. 친구는 또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문서에 서명을 했다고도 했다. 어머니는 본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연명치료같은 건 필요없다고 생각해서 주저 없이 서명했을 것이다. 한국은 2016년 연명치료와 관련된 법 즉 〈연명의료결정법〉을 통과시켰다. 원래의 명칭은〈호스피스 ‧ 완화의료 및 림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라고 하며 ‘존엄사법’이라고도 부른다. 〈연명의료결정법〉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로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이 법이 존엄사법으로 불리우는 데는 리유가 있다. 흔히 림종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 암환자나 뇌질환 환자들의 경우 단순 생명 연장을 위해 중환자실로 들어간다. 중환자실의 환자들은 혼수상태에서 똥오줌을 받아내거나 호흡을 돕기 위하여 기관내 삽관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말도 전혀 할 수 없게 되고 가족과 만나기도 쉽지 않으며 결국은 쓸쓸하게 혼자 죽어가면서 ‘품위 있는 죽음’이란 전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존엄사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연명치료를 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미리 작성해서 제출하면 된다.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리고 2021년 8월, 연명의료결정 제도가 시행된 지 3년 6개월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만에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작성자가 100만명을 돌파했다.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저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이다. 예전에는 죽음을 론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 수치를 통해 우리는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바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은 우리의 일상과 멀지 않으며 삶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말기암환자에게 병의 진행을 속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생각한다면 굳이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 환자나 그 가족들이 죽음을 터부시하거나 환자 본인이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렇지만 본인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는다면 그 환자가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과 다름없다. 환자에게 솔직하게 병의 진행 상황을 얘기하면 그 순간 힘들지는 몰라도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는 셈이다. 언젠가 일본에서는 죽음체험이 인기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미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현재 일본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가 매우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몇년 일본에서는 잘 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죽음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생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준비하게 하는 ‘슈카쓰’(終活) 가 인기를 끌고 있다. 자신의 장례식장을 예약하고 수의 및 납골방법을 선택하며 심지어 림종 후 지인들에게 련락할 방법까지 정할 수 있다. 또 자기의 의식이 갑자기 없어질 때를 대비해 엔딩노트를 작성하기도 한다. 관에 미리 들어가 보고 수의를 입어보는 등 ‘죽음체험’ 을 하는 젊은층들도 있다. ‘죽음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잘 죽고 싶은 사람들’이다. 죽음을 외면하기 보다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태도이며 그래서 생겨난 말이 ‘웰다잉’ (安乐死)이다.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잘 죽고 싶은 사람들’ 이란 바로 ‘잘 살고 싶은 사람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리상(李箱)의 〈종생기〉는 작가가 자신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방식을 통해 삶에 대한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종생기〉의 주인공은 리상이며 소설에 리상이 죽는 과정과 그가 죽은 후 그 주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소설은 정확히 리상이 ‘대작 〈종생기〉한편’을 남기고 ‘1937년 정축(丁丑) 3월 3일 미시(未時)’ 에 ‘향년 만 25세 11개월’로 죽었다고 쓰고 있다. 그가 이 소설을 쓰는 목적은 “〈종생기〉가 천하 눈 있는 선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놓기를 애틋이 바라는 일념 아래’ 의 ‘린색한’ 맵씨의 절약법을 피력한 것이다. 물론 실제 리상이 죽은 날은 1937년 4월 17일이다. 바로 한달이 조금 넘는 시간차를 두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흔히 무거운 주제로 생각되는 ‘죽음’을 그는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설에서 리상은 삶에 연연하며 제대로 된‘에피그람’ 한구도 얻지 못한 채 일생을 마무리하는 것에 못내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소설은 죽음에 대한 리상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중 한 군인과 톨스토이의 림종 모습 비교가 인상적이다. 그는 소설의 초반부에서 한 군인과 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풍자적으로 비교한다. 여기서 군인은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고 인생을 잘 끝냈지만 톨스토이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 유언을 남기면서 자신의 일생에 흠집을 하나 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그런 실수 따위는 할리가 없다고 쓴다. 여기서 유언 한마디의 차이란 삶에 미련을 갖고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곁에서 떠나보낸다. 또 타인의 죽음을 통해 다시 선명해진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으며 그 시간이 지금 당장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죽음은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류경자 필자 략력: 현재 서남민족대학교 강사, 연변대학 중문과 석사 졸업, 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 학위 취득, 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역서 〈디지털기술과 신 사회질서의 형성〉, 론문 〈로신의 탈경계적 상상력과 치유의 글쓰기〉, 〈장용학 소설의 자기 반영성과 메타픽션적 글쓰기〉외 다수.
151    해방타운 댓글:  조회:1150  추천:0  2021-09-16
[대림칼럼] 해방타운 정연 JTBC에서 방영하고 있는 "해방타운"이라는 예능프로그램이 있다. 자체 설명으로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절실한 기혼 셀러브리티들이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결혼 전의 '나'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관찰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하고 있다. 시작한지 한참 된 것 같은데, TV를 잘 보지 않기도 하고 언뜻 봤을 때에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인가 싶은 마음에 주의 깊게 보지 않다. 그러다가 최근에 최영재라는 특전사출신의 대통령경호원의 스토리가 나오면서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주요 스토리는 이렇다. 가정을 꾸려서 살고 있던 연예인들에게 살림을 모두 구비한 오피스텔을 구해서 일정기간 독립하도록 하고 그들의 독립생활을 관찰하여 방송한다.  최영재가 오피스텔에 들어가는 장면부터 나는 보기 시작했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는 들어가자 마자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그리고 본인의 취미인 “총 닦기(진짜 총과 거의 똑같이 만든 모형 총, 총 애호가로서 총 만지는 것을 너무 좋아하지만 아이와 수시로 놀아줘야 하는 가정에서는 할 수 없는 일)”를 했다. 그러고 나서는 음악을 틀고, 마음껏 긴 시간 운동을 했다. 방송 속 최영재의 모습은, 스무 살 때의 첫사랑인 아내와 결혼하고 두 딸을 낳게 되었는데 아직도 아내 바보에 딸 바보라고 할 만큼 가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직업군인의 정리벽을 가진 그에게 가족과의 생활에는 그만의 고단한 구석이 있다. 집이 정리된 시간이 10분을 넘기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방송을 보면서 격한 공감을 느꼈다.  성격이 급하고 정리벽이 있는 나는 늘 있던 물건은 그 곳에 있어야 하고 정리정돈이 되어 있어야 스트레스를 덜 받는 사람이었다. 물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이 모든 것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나의 끝없는 정리와 청소는 늘 단 10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 가족들은 옷은 벗은 곳에, 물컵은 먹은 곳에 놓는 성향이었고 책가방과 소품 등이 바닥에 널려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밟고 다니는 그런 성향이었다. 나는 쫓아다니면서 정리하고 방치했다가 화내고 다시 정리하는 생활을 십 수년 간 반복해 왔다. 이런 불편함은 가족 때문에 손이 많이 가거나 피곤해서 오는 피로감이 전혀 아니다. 그냥 정리되어 있는 흐뭇한 그 상태로 음악을 들으며 차 한잔 하고, 내가 마신 찻잔을 씻고, 누워서 책을 읽고, 다시 보아도 정리되어 있는 그런 정서적인 상태에 대한 그리움이다.  나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희망하는가? 책임으로부터라고 하면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도피이다. 나는 나의 배려에 의하여 내가 원하지만 누리지 않고 있었던 것들을 잠깐 탐닉하고 싶을 뿐이다. 마치 다이어트를 일상적으로 하다가 어느 날 나에게 치즈케익을 유유히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언뜻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2017년에 나홀로 이태리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이태리의 많은 것이 나를 매료하였고 나는 마음껏 그것들에 빠졌다. 그러면서 느꼈다. 여행지의 아침은, 내가 혼자 일어나서 씻고, 조금 흐트러트린 짐을 다시 들고 길에 오르면 되는 그런 단출한 아침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의 보통의 여행지의 아침은, 깨우고, 씻으라고 윽박지르고 아침에 뭘 입냐며 줄 서 있는 세 식구의 옷을 하나씩 챙겨주고, 마음껏 흐트러진 짐을 다시 정리하는 것, 그런 분주한 것들이었다. 단지 정리정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 우리의 짐에 무엇이 있고 그대를 위한 오늘 필요한 짐은 무엇인지에 대한 계획을 공유하는 것이 포함된다. 내 가족의 모든 짐과 모든 일과에 내 손길이 묻어나는 것은, 그렇게 피곤하거나 나쁜 일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태리에서의 여유로운 아침은 분주한 직장인의 아침이 아니라, 10분 미리 일어나서 뉴스를 뒤적이며 커피 한 잔 하는 직장인이 된 듯한 느낌을 줄 뿐이다. 이렇게 나는 나의 “해방”을 느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여 우리는 24시간 영화를 보지는 않고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여 24시간 아이에게 봉사만 하고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 있고 원칙이 있으며, 그것을 깨는 지점도 그렇지 않고 이겨가는 지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혼조정기간 같은 심각한 시간이 아니라 그냥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일상에서의 일탈이라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 이런 해방타운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비워 둔 집에서 정리정돈 없이 마음껏 벌려놓고 살 수 있는 것이 우리 가족들의 해방타운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누린 해방타운을 되짚어 생각해봤다. 나는 매년 혼자 가는 1박2일 한라산여행을 즐겨왔다. 부작용은 귀가했을 때 폭탄 맞은 집을 수습해야 한다는 점이 있지만, 나에게 제주도 땅을 밟고, 한라산을 꾸역꾸역 등반하며 혼자서 조용히 우럭조림에 먹는 소주 한병이 해방타운이었다.  숨막힐 정도는 아니어도 내가 조금 힘들다고 느끼는 것, 불행하지 않아도 내가 조금 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 간과하고 살지 않았던가. 본의 아니게 주변에게 연애, 결혼, 육아, 직장생활에 대한 고민상담을 많이 해주는 역할이 되어 버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너무 “모 아니면 도”의 사고방식과 선택에 얽매여 있는 것 같다. 직장에 견디기 어려운 이유가 있으나 떠나기는 아쉬울 때, 나는 그냥 새 직장을 알아보면서 새 월급이 꽂히기 전까지만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며 지내 보는 것을 권한다. 판을 뒤집지 않아도, 판을 뒤집지 못하더라도 지금보다 조금 나아질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판”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나아지지 못하도록 옥죄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상 대부분 일은 가치관과 인생관에 어긋나지 않으며 사소하고 또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견딜 것과 괜찮은 것들이 만들어진다. 마치 오랫동안 갈망하던 여행일정을 잡아 두면 그 일정을 생각하면서 고단했던 일과 사람이 한결 나아진 것으로 느껴지는 것 과도 같다. 나는 두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모두 예정일의 전날까지 근무를 했고, 본의 아니게 임신하고 있는 동안 야근을 매일같이 해야만 하는 바쁜 시간들을 보냈다. 첫 아이 때는 나를 믿어주고 의지해주는 동료들 덕분에 주말포함 야근을 해도 늘 즐거웠지만 둘째 아이 때는 임산부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을 한껏 받을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늘 힘들었던 일도, 그 사람이 말 한 마디만 해도 내가 삐딱하게 생각할 만큼 내가 좋아하지 않던 사람도, 나는 뱃속의 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다는 마음 때문에 “하하하하 괜찮아.”하면서 잘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손에 박힌 가시 하나가 남 몸에 생긴 암덩어리보다 아프다고 한다. 하지만 가시는 가시일 뿐 암덩어리는 아니다. 새로 한 매니큐어가 맘에 들어 누가 내 자리에 커피를 엎어도 괜찮은 그런 날들이 우리에게 수많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세 시간 앉아 고생하면서 한 헤어스타일이나 전전긍긍하다가 새로 사온 양복 한벌이나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나의 해방타운이 되어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닌 그렇게 살아지는 것들을 만들어 주지 않았나 싶다.  해방을 원한다면 꿈은 아닌 것이다.  흔히 가지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을 “꿈”이라고 표현하지만, 내가 그것을 위하여 오늘을 견뎌내는 것이 너무 힘이 든다면 나는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중학교때부터 나는 가족을 떠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아무도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내가 공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학교생활을 빼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2살인 그 때 이런 고민이 들었다. 지금의 내가 너무나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 간다면 그 하루하루로 모여진 나의 미래는 과연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때부터 나는 소설을 읽고 친구와 놀고 가끔 몰래 술도 마셨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런 나의 일탈들이 결국 나에게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학교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돼 주었다. 그리고 가진 것이 없는 나에게 성실한 학교생활은 좋은 학력과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포기는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 이지만, 수많은 갈림길 속에서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잡지 못하는 길일 수 있기에 그 또한 꼭 필요한 것이다. 포기와 일탈은 어느정도 구분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해방타운”은 꼭 풀 셋팅 되어있는 오피스텔을 얻어서 나가지 않더라도 군데군데 순간순간 있을 수 있고, 그리고 그런 순간순간을 즐길 준비를 늘 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진정한 나의 “해방타운”인 것 같다.  정련 약력 : 2002년 흑룡강성 문과 수석. 북경대학 경제학원 국제경제무역학과 졸업. 동북아신문 칼럼니스트. 현재 브이아이금융투자 기획담당 상무, 재한동포문학연구회 이사. 수필, 수기, 칼럼, 여행기 등 수십 편 발표. 출처 : 동북아신문
150    코로나 시대의 ‘현실화된 유토피아’ 댓글:  조회:1045  추천:0  2021-09-01
[대림칼럼] 코로나 시대의 ‘현실화된 유토피아’   이미옥 우리는 어둡고 밝은 면이 있고  제각기 높이가 다르며 계단처럼 올라가거나  내려오고 움푹 패고 불룩 튀어나온 구역과,  단단하거나 무르고 스며들기 쉬우며 구멍이 숭숭 난 지대가 있는, 사각으로 경계가 지어지고 이리저리 잘려 얼룩덜룩한 공간 안에서 살고, 죽고, 사랑한다.       인간이 불안하듯 공간도 불안하다. 미셀 푸코의 이 말은[ 미셀 푸코 저·이상길 역, 『헤테로토피아』, 2014, 문학과 지성사. ],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 곳에서 살고 있는 지를 감각적으로 잘 표현해준다. 얼마 전 모 학회에 토론자로 참여하면서 패기 넘치는 한 연구자의 발표를 들으면서 헤테로토피아 즉 공간에 대해 다시금 사유하게 되었다. 헤테로토피아는 ‘다른, 낯선, 혼종 된’이란 의미로 일상의 공간과 ‘다른 공간’ 장소이면서 동시에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곳을 의미한다.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일상의 장소들을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환기시키는 장소, ‘현실화된 유토피아’. 미셸 푸코는 최초의 정원을 헤테로토피아라고 칭했지만, 사실 그런 공간은 어디에나 있다. 나만의 포근한 침대, 침묵만 흐르는 고요한 사원, 처음 간 여행지의 매혹적인 광경. 내 마음을 빼앗기는, 그래서 시간의 흐름마저도 잊게 되는 초(超)공간적인 장소를 우리는 간절히 원하고 매순간 찾게 된다. 무덤처럼 더 이상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헤테로토피아도 있고 무한의 시간이 쌓여가는 도서관이나 박물관 같은 헤테로토피아도 있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의 공간, 어떤 의미에서든 코로나 이후의 공간은 커다랗게 구획되고 말았다. 함께 모여서 떠들던 광장은 사라지고 개인의 밀실만 남았다. 비좁은 개인의 밀실에서 어떤 사람은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대개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며 자신만의 헤테로토피아를 찾기 시작했다. 연결되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공간을 찾아야만 했고 그것이 온라인이라는 무형의 세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줌으로 통화하고 줌으로 회의하고 줌으로 강의를 듣고 또 줌으로 친목을 도모한다.   미셸 푸코도 아마 온라인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숫자 1와 0으로 이루어진 컴퓨터 인터넷 공간이 ‘현실적인 유토피아’가 되다니! ‘현실적인’라는 용어 안에 가상의 공간이 포함된 것이다. 매일 들여다보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넷플릭스… ….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온라인 세상에 접속한다. 온라인 세상에서 즐거움을 얻고 행복을 찾고 관계를 도모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도 온라인 세상에서는 모호해진다. 코로나 1년 반 동안, 현실의 공간은 철저히 단절된 대신 온라인 공간은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됐던 가상의 세계가 도리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여섯 시 이후 2인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는 요즘에는, 오프라인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벤트가 되었다. 가족이나 동거인, 정말 친한 지인이 아닌 이상 쉽게 만나자고 운을 뗄 수도 없는 상황이 온 것이다.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코로나 시대, 2년이 안된 시간이지만 이미 많은 변화를 가져왔듯, 앞으로 우리는 더욱 공간을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만의 “공간”하면, 과거엔 물리적인 질료로 만들어진 공간을 떠올렸다. 딱딱한 벽이 있고, 내 허리를 받쳐주는 등받이 의자가 있고, 내 한 몸 뉘일 수 있는 나만의 침대 그리고 부드러운 이불 같은 것들이 내가 소유한 공간을 상징했다. 그러나 이제 나만의 공간은 새롭게 구상되고 구성되어져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의해서, 내가 알고 싶은 것들에 의해서, 내가 접속하고 싶은 것들로 폴더들이 생성되고 링크가 저장된다. 권력과 위계에 의해 철저히 구획된 현실 속 공간이 사라지고 내가 주체가 되어 닿고 싶은 곳을 향해, 무형의 팔을 힘껏 뻗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아프면 병원에 가야 되고, 외로움을 달래려면 누군가를 만나야 하겠지만 그것조차도 내 의지에 의해서 최소화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역할, 체면이란 가면을 쓰고 억지로 수행해야 하는 모임들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공권력, 제도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광장”의 부재로 인해, 포획할 수 있는 그물망은 전보다 헐거워졌다. 온라인의 세계는 모종의 의미에서 자본주의 세계보다 더 열려있고 사회주의보다 더 평등하다. 나를 구성하는 관념의 씨앗들을 자유롭게 끌어 모을 수 있고 또 심을 수 있고, 다양한 방식을 통해 그 결과물을 수확할 수도 있다. 어떤 주제라도 검색 가능하고, 백수든 재벌이든 원한다면 누구라도 1인 기획자가 되어 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변화를 향해 힘껏 달려가고 있다. “코로나 감옥”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집단의식보다는 개인의식이 더 성장할 수밖에 시대적 환경을 부여받은 것이다. 누군가는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었던 과거의 따뜻한 공동체 경험을 여전히 그리워 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 투사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만의 정신적 지도를 그려 나갈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집단주의의 옷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개인주의의 속살은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서 어떤 개체로 남을 지는 여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렇게 별처럼 무한 거리를 두고 흩어진 개인들이 어느 곳에선가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더욱 단단해진 정신적 공동체가 되어 우주의 은하수처럼 밝게 빛날 것이다.   동북아신문     이미옥 서울대, 인문학 연구원, 책임연구원, 재한조선족작가협회 평론분과장   
149    도전하는 꼴찌에게도 박수갈채를 댓글:  조회:1136  추천:0  2021-08-27
[대림칼럼] 도전하는 꼴찌에게도 박수갈채를  전월매 천진사범대학교 교수    현대사회에서 경쟁에서 1등을 했거나 이긴 사람은 박수갈채를 받게 되지만 꼴찌를 한 사람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갈채는 뭐니 뭐니 해도 승자의 몫이다. 더구나 기록을 갱신한 승자의 경우, 불꽃축제처럼 화려한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우러르는 동경의 대상이 되며 두고두고 호명되고 회자된다. 만약 꼴찌에게 갈채를 보낸다면 어떨까?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는 씁쓸하고 억지스럽다. 그만큼 우리는 언젠가부터 일등만 추구하는 지나친 경쟁 위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사회에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무한경쟁으로 인한 불확실성과 적자생존의 압력 속에서 무엇이든 숫자로 우열을 책정하기 좋아하는 현대사회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숫자라는 건 언제나 비교하기 쉽고 서열을 매기기 용이하다. 네모와 동그라미 같은 도형은 서열을 매기기 어렵지만 1,2,3과 같은 숫자는 한눈에 표가 난다. 결국 숫자적 삶이란 계속하여 비교하고 비교되고 서열이 매겨지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가장 처참해진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낮은 값어치로 매겨질까 안절부절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와 서열을 확인하고 체크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세워진 숫자의 기준 속에서 개인 이력서에 쓸 숫자들을 위해 분투하고, 쉴 새 없이 계산기 자판기를 두드리며 사람의 모든 걸 숫자로 환원시키는 숫자의 삶에 빠져들어 있다.    실제로 아이큐가 지혜를 측정할 수 없고, 친구의 숫자가 관계의 깊이를 증명할 수 없으며, 집의 평수가 가족의 화목과 행복을 보장할 수 없고, 연봉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할 수 없다. 진정한 가치는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담을 수 없는 것들에 있다.    한국의 여류작가 박완서의 수필 에서는 마라톤에서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감수하면서 등수와 상관없이 묵묵히 뛰는 꼴찌의 삶,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꼴찌의 삶도 당당하여 칭찬받아 마땅하기에 꼴찌에게도 박수갈채를 보낸다고 하였다. 이 글은 2017년 신편중국조선어문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다.    꼴찌주자는 쓸쓸하고 사람들의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선두주자를 기다리는 응원객과 구경꾼들이 어느새 흩어져 없고 홀로 남은 여정을 계속 달려야 할 때, 꼴찌주자에게는 많은 고민들이 있을 것이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고독과 외로움, 고통으로 남은 여정을 꼴찌로 계속하여 달려야 할지? 아니면 중도포기 해야 할지? 꼴찌인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 등등이다. 실제로 꼴찌주자가 마지막 완주하기까지에 대결해야 할 적수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마라톤이라는 지루하고 기나긴 여정을 달려간다는 것, 꼴찌주자는 모든 환호와 영예의 우승자와는 달리 관중들의 무관심속에서 환호 없이 달리는 고독에 익숙해야 하고, 승리나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완주하려는 일념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무서운 의지력이 있어야 하며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꼴찌라는 수치심도 지워버려야 한다. 마라톤이 슬프도록 정직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자신과의 싸움을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가는 데 있고 그 기나긴 시간을 꾸준히 해나간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라톤은 극대화 된 고통과 고독과 극기를 요구하는 장거리 운동이다.   우리의 생활 또한 마라톤과 흡사하다. 끝없이 펼쳐진 마라톤이라는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어제를 뒤로 하고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에 끝없이 경주한다. 그 과정이 즐거움으로만 되어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고통으로 점철된 마라톤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고통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한 마리 물고기, 그 고통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하여 부단히 성숙하고 성장하고 성공한다. 고통을 겪은 사람이 모두 성공할지는 몰라도 성공한 사람의 이면을 현미경으로 확대해보면 무수한 실패와 좌절이라는 개미들이 수만마리 지나간다. 이 속에서 그들은 참고 견디고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Ann Arbor)라는 곳에는 세계 유일의 실패박물관이 설립, 운영되고 있는데 1년에 20만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미국의 실패 연구 권위자 로버트 맥메스가 40년에 걸친 연구와 수집 끝에 1990년 설립한 실패박물관에는 식료품에서 가정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패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코카콜라 회사도 보관하고 있지 않은 1980년대의 실패작 무색콜라의 샘플을 비롯해 심지어는 일본, 호주 등 외국의 실패작들까지 볼 수 있다. 7만여 점의 실패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실패박물관에서 많은 관객들은 실패의 원인을 꼼꼼히 종합 분석하고 거기에서 성공으로 가는 열쇠, 즉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의 성공의 해답을 찾는다 한다.   일본과 미국에는 실패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실패학이 학문으로 정립되어 실패학회가 있고 정기적으로 ‘실패학 국제세미나’가 열리고 있는데 실패학은 주로 첨단 기술과 과학의 최고 단계에서 다뤄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실패학회에는 히타치, 후지쓰, 미쓰비시 등 일본 대표 기업이 참여하고 있으며 실패학은 경영학 석사(MBA)보다 100배 효용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실패학이 성공학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실패 바람이 불고 있다. ‘실패학 국제세미나’가 열리는가 하면 회사에서 실패 사례 분석은 물론 실패 보고서에 실패 파티까지 열리고 있을 정도다. 삼성 에버랜드만 해도 직원들 사이에서 열리는 실패 파티가 큰 화제라 한다. 팀원들이 빙 둘러서서 붉은색 양초를 X자형으로 꽂은 케이크를 앞에 놓고, 실패한 직원의 실패 발표에 이어 생일 축하 노래의 가사만 ‘실패 그만 합시다’로 바꾼 축하 노래까지 선사한다고 한다. 게다가 서울의 한 유치원에서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시간까지 있을 정도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샤를 페팽 (Charles Pépin)은 저서 에서 세네카, 키케로, 사르트르, 프로이트를 통해 실패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이끌고, 우리 삶에서 실패가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낸다. 그는 “실패는 우리가 가능성을 갖고 있고 그 가능성에 도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단 한 번도 실패를 겪지 못한 삶이 진정한 실패”라고 말한다. 성공이 도취로 우리의 눈을 가린다면, 실패는 현실과 만나고 자신에게 정직해질 기회와 다양한 해법 등 성공을 위한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실패에서 배우면 큰 실패를 막고 성공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쿄대학 명예교수 하타무라 요타로는 저서 에서 실패 없이는 발전도 없다, 실패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 실패 원인은 여러 계층으로 되어 있다, 실패는 방치하면 더 커진다, 하나의 큰 실패 앞에는 300개의 작은 실패가 예고되고 있다, 실패를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를 여러 개 갖고 있으면 실패를 예방할 수 있다, 실패를 창조로 바꾸는 사람이 되라, 실패를 살리는 리더가 되자 등으로 개인이 직장에서, 개인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 현장에서, 실패를 줄이거나 예방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실패 이용법을 소개하고 있다. 끊임없이 분석하고 다시 도전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실패를 거듭되는 실패의 씨앗으로 남겨두느냐 성공을 위한 디딤돌로 만드느냐가 결정된다.    실패를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하는 삶, 열심히 뛰고 있는 꼴찌주자에게 보내는 박수갈채, 바로 여기에 이러한 도전정신에 대한 긍정과 격려가 있다. 현재 조선족의 조선어문교육이 현실에 맞추어 인문성, 도구성, 창의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은 박수갈채를 보내야 할 일이다. 2014년에서 2019년에 편찬된 중국조선족조선어문의 신편교재에서는 개인 성장의 아픔과 고민 서사, 내면의식의 자아성찰 서사, 노력과 분투를 통한 성공서사, 사람과 사람 관계 스토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사회가 고난을 딛고 실패를 극복할 줄 아는 인내심과 끊임없이 도전할 줄 아는 끈기 있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그 노력을 찬미할 줄 아는, 인간으로서의 삶, 윤리로서의 삶을 중시하는 인간존중의 사회가 만개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정호승의 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전문을 인용한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동북아신문
148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댓글:  조회:1085  추천:0  2021-08-26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남명일(편집기자) 올해에 열린 2020 도꾜올림픽 륙상 남자 400메터 계주 예선경기에서 15차례나 올림픽에서 우승할 만큼 한때 최강자로 불리우던 미국 남자팀이 배턴 련결동작이 매끄럽지 못하여 결국 결승 진출이 좌절되였다. 미국 륙상의 전설로 불리우는 칼 루이스는 이날 경기 장면을 목격하고 혹평했다.   “이번 계주 경기에서 미국 대표팀은 단 하나도 잘한 게 없다. 배턴을 넘기는 시스템도 틀렸고 앞뒤 주자가 발을 맞추는 동작도 틀렸다”며 “완전히 리더십이 무너진 상태였다”고 지적했다. 이날 경기를 관람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미국 륙상팀의 실력이 예선에서 탈락할 만큼 저조한 실력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탈락한 데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을 너무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불행은 찾아온다. 뛰는 놈 우에 나는 놈이 있다고 운동경기라 하더라도 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판이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할진대 스포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고 꾸준히 임해야 하지 않을가 싶다. 영국의 정치가 처칠은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없어도 아무런 저애가 없이 일이 성사될 수 있다.”고 했다. 잘 아는 지인이 있는데 집안 사정으로 반년 동안 출근하지 못하게 되였다. 그는 회사에서 판촉업무를 담당하고 관계망도 넓어 업계에서는 신망이 높은 편이였다. 그러던 그가 한번은 나를 보고 회사의 일에 대해 론하면서 “내가 그동안 많은 관계망을 통해 업무를 처리해왔는데 이렇게 손을 놓고 있어서 회사가 엉망으로 되지 않을지?”라고 하면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출근했을 때 그의 위치에서 사업하는 직원이 새롭게 관계망을 구축하면서 회사는 원래보다 더 잘 운영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친구 자신도 회사에서 설 위치를 잃게 되였다고 한다.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고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해도 절대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처신하는 것은 일종 수양이고 일종 매너이며 도덕적 경지이기도 하다. 여기서 코로나19 델타 바이러스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최근 남경의 한 할머니가 양주에 가서 마작놀이를 하면서 한사람이 47명에게 전파했고 이 사람들에 의해 또 162명이 감염되는 ‘슈퍼전파’로 이어지면서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코로나19가 전국 33개 도시로 퍼져나갔다. 바이러스는 우리의 생활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 지속적 방역의 중요성을 망각한 일부 사람들의 방심에 의해 초래된 악과였다. 지금도 전국 상하가 합심하여 코로나19에 대처하던 지난 시기가 떠오른다. 당시 당중앙의 정확한 령도하에 제때에 발견하고 합당한 조치를 대고 전국 인민들이 합심했기에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였다. 이는 결코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여기에는 밤낮이 따로 없이 방역의 제일선에서 분투한 의무일군들과 코로나19의 예방수칙을 철저히 지킨 중국인민들의 공동한 노력이 스며있다. 방심은 금물이다. 이 모든 결과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거둔 성과가 크다고 해도 방심하고 교오자만하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쉑스피어는 “교오자만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교오자만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훼멸시킬 것이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미 얻은 성과에 만족하면서 교오자만하게 되면 언젠가는 훼멸의 쓴맛을 보게 된다. 반면 언제 어디서든 낮은 자세로 모든 일을 열심히 해야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이 부단히 자신을 제고시키고 생활 속에서 봉착하는 모든 난관을 이겨내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길림신문 
147    디지털 정보화 시대, 우리가 반납한 것은 댓글:  조회:1134  추천:0  2021-08-06
디지털 정보화 시대, 우리가 반납한 것은 최해선 디지털 정보화 시대는 과연 우리에게 편리만 가져다 줬을까 하는 의문이 요즘 들어 자꾸만 뇌리를 스친다. 코로나19로 언택트의 생활이 일상화 되고 재택의 시간이 길어질 수록 점점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확실하게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줬지만, 그 이면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소중한 것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 편리를 받고 내어 준 것은 사생활 실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활 속의 많은 불편함이 해소됐다. 은행업무나 정부 민원업무도 몇 번의 스크린 터치로 해결이 되고 쇼핑도 몇 번의 터치로 주문한 물건을 익일 날 바로 배송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편리함의 대가로 무엇을 내주었을까?  며칠 전 포털사이트에서 그릇에 대해 검색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내가 자주 이용하는 SNS에는 “폴란드 그릇”을 비롯하여 그릇에 관한 광고들이 마치 SNS 친구들이 올린 콘텐츠인 것 마냥 심리스하게 추천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머리 속에 생각하고 있던 어떤 이슈에 대한 콘텐츠도 심심찮게 스크롤 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스마트폰이 독심술이라도 있는 것인가? 내 관심사를 어떻게 알았지?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스마트폰 이용자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과 생각을 한번쯤 해 봤을 것이다.  실은 인터넷의 발전으로 우리는 정보 홍수의 국면을 마주하게 된다. 2020년 전 세계에서 생성된 디지털 정보량은 35제트바이트(zettabyte)라고 한다. 이는 전 세계 해변가에 있는 모래 알갱이 수의 57배에 해당되는 숫자다. 앞으로 2년 마다 이 숫자는 2배로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각 회사들은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사용자들에게 보다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경쟁력으로 삼고 모바일 기반의 맞춤형 광고를 마케팅 채널로 간주하고 있다.  이때 개인화된 맞춤형 광고 송출의 기반은 인터넷 사용 기록인 쿠키의 수집이다. 쿠키란 사용자가 특정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시점에서 서버가 사용자의 기기에 보내 저장되는 텍스트 파일을 일컫는다. 즉 우리가 스크린을 스크롤 하다 어느 화면에서 잠깐 멈췄던 정보, 동영상을 몇 분 보고 나갔는지 어떤 화면에서 정지 버튼을 눌렀는지, 어떤 사이트에 접속하고 어떤 상품을 구입했는지, 어떤 키워드로 무엇을 검색했는지 등 인터넷 상의 모든 행동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사용자의 취향을 알아내고 의도까지 예측한다. 그러고 그들이 개발한 알고리즘과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결합하여 사용자의 취향을 저격할 만한 콘텐츠나 광고를 송출한다.  실제로 거대한 영화 플랫폼인 넷플릭스의 성공 신화가 바로 콘텐츠 추천 서비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용자의 성향과 관심사를 분석하여 좋아할 만한 영화나 TV프로그램을 추천함으로써 사용자의 충성도를 향상시켰다. 구글이 운영하는 동영상 공유 서비스인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추천 알고리즘의 작동 방법과 사용자의 정보에 기반해 치밀한 알고리즘 전략으로 사용자들이 보는 동영상의 70%를 추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게 만들어서 유튜브에 락인(Lock-in)되게끔 한다.  이처럼 편리한 정보와 서비스를 누리는 대신에 우리의 소중한 개인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사생활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노출되는 샘이다. 또한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편향된 정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선택의 권리를 빼앗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 내 시간이 저당 잡히고 있다.  2021년3월25일 통계청에서 발표한 사회지표에 의하면 2020년 한국인의 평균 스마트폰 사용시간은 평일 2.0시간, 휴일 2.3시간으로 집계 되었고 전 국민의 23.3%가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으로 나타났다. 특히 20세 이하 청소년의 경우 10명 중 4명이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인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로 신체적 활동이 줄어든 것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우리는 식사할 때도 스마트폰을 보고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수시로 체크한다. 사실 반드시 처리해야 하거나 해결해야 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핸드폰이 손에 없으면 온 종일 신경 쓰이고 심한 사람은 불안증세까지 보인다.  그럼 다들 스마트폰으로 무엇을 볼까? 가장 많이 보는 것은 SNS, 메신저, 동영상, 게임 등이다. 인터넷 기업들은 사용자들을 락인시키려고 필사적이다. 일단 사용자들은 해당 서비스에 익숙해 지면 해당 서비스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고 없으면 불편하고 괴롭기까지 하다. 이렇듯 우리는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르고 소중한 시간을 빼앗겨 버린 격이 된 것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우리 생활의 일부분을 편하게 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존재로서 온라인으로는 우리 육체의 욕구를 돌볼 수 없다. 우리의 몸은 적당히 움직여 줘야 하고 우리의 눈은 먼 곳과 가까운 곳을 자주 번갈아 봐 줘야 하며 오감을 적당하게 자극해줘야 정신건강에 이롭다.  누군가가 기술 발전의 피해는 사용자의 몫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온라인 상의 각종 콘텐츠들은 무료함과 심심함을 달래주고 고통을 망각하게 하며 SNS를 통해 사회적 인정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 뇌는 이런 것에 대단히 취약하여 우울함에 빠지기 쉽고 의욕이 상실되기 쉽다. 때문에 적당하게 고독을 느낄 줄도 알고 혼자서 시간을 보낼 줄 알아야 사고 능력을 키울 수 있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며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도모할 수 있다. 이럴수록 고도의 자가컨트롤 능력을 키워서 스마트폰의 좋은 것만 취하여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가는 지혜와 행동력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가 생각해 본다.  모두 잠시 스마트폰을 꺼놓거나 치우고 독서도 좋고 운동도 좋고 명상도 좋으니 실제적으로 육체적 본능과 정신적 본능에 충실한 것을 찾아서 해보자.  출처 : 동북아신문(http://www.dbanews.com)디지털 정보화 시대는 과연 우리에게 편리만 가져다 줬을까 하는 의문이 요즘 들어 자꾸만 뇌리를 스친다. 코로나19로 언택트의 생활이 일상화 되고 재택의 시간이 길어질 수록 점점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확실하게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줬지만, 그 이면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소중한 것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 편리를 받고 내어 준 것은 사생활 실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활 속의 많은 불편함이 해소됐다. 은행업무나 정부 민원업무도 몇 번의 스크린 터치로 해결이 되고 쇼핑도 몇 번의 터치로 주문한 물건을 익일 날 바로 배송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편리함의 대가로 무엇을 내주었을까?  며칠 전 포털사이트에서 그릇에 대해 검색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내가 자주 이용하는 SNS에는 “폴란드 그릇”을 비롯하여 그릇에 관한 광고들이 마치 SNS 친구들이 올린 콘텐츠인 것 마냥 심리스하게 추천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머리 속에 생각하고 있던 어떤 이슈에 대한 콘텐츠도 심심찮게 스크롤 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스마트폰이 독심술이라도 있는 것인가? 내 관심사를 어떻게 알았지?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스마트폰 이용자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과 생각을 한번쯤 해 봤을 것이다.  실은 인터넷의 발전으로 우리는 정보 홍수의 국면을 마주하게 된다. 2020년 전 세계에서 생성된 디지털 정보량은 35제트바이트(zettabyte)라고 한다. 이는 전 세계 해변가에 있는 모래 알갱이 수의 57배에 해당되는 숫자다. 앞으로 2년 마다 이 숫자는 2배로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각 회사들은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사용자들에게 보다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경쟁력으로 삼고 모바일 기반의 맞춤형 광고를 마케팅 채널로 간주하고 있다.  이때 개인화된 맞춤형 광고 송출의 기반은 인터넷 사용 기록인 쿠키의 수집이다. 쿠키란 사용자가 특정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시점에서 서버가 사용자의 기기에 보내 저장되는 텍스트 파일을 일컫는다. 즉 우리가 스크린을 스크롤 하다 어느 화면에서 잠깐 멈췄던 정보, 동영상을 몇 분 보고 나갔는지 어떤 화면에서 정지 버튼을 눌렀는지, 어떤 사이트에 접속하고 어떤 상품을 구입했는지, 어떤 키워드로 무엇을 검색했는지 등 인터넷 상의 모든 행동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사용자의 취향을 알아내고 의도까지 예측한다. 그러고 그들이 개발한 알고리즘과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결합하여 사용자의 취향을 저격할 만한 콘텐츠나 광고를 송출한다.  실제로 거대한 영화 플랫폼인 넷플릭스의 성공 신화가 바로 콘텐츠 추천 서비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용자의 성향과 관심사를 분석하여 좋아할 만한 영화나 TV프로그램을 추천함으로써 사용자의 충성도를 향상시켰다. 구글이 운영하는 동영상 공유 서비스인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추천 알고리즘의 작동 방법과 사용자의 정보에 기반해 치밀한 알고리즘 전략으로 사용자들이 보는 동영상의 70%를 추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게 만들어서 유튜브에 락인(Lock-in)되게끔 한다.  이처럼 편리한 정보와 서비스를 누리는 대신에 우리의 소중한 개인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사생활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노출되는 샘이다. 또한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편향된 정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선택의 권리를 빼앗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 내 시간이 저당 잡히고 있다.  2021년3월25일 통계청에서 발표한 사회지표에 의하면 2020년 한국인의 평균 스마트폰 사용시간은 평일 2.0시간, 휴일 2.3시간으로 집계 되었고 전 국민의 23.3%가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으로 나타났다. 특히 20세 이하 청소년의 경우 10명 중 4명이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인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로 신체적 활동이 줄어든 것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우리는 식사할 때도 스마트폰을 보고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수시로 체크한다. 사실 반드시 처리해야 하거나 해결해야 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핸드폰이 손에 없으면 온 종일 신경 쓰이고 심한 사람은 불안증세까지 보인다.  그럼 다들 스마트폰으로 무엇을 볼까? 가장 많이 보는 것은 SNS, 메신저, 동영상, 게임 등이다. 인터넷 기업들은 사용자들을 락인시키려고 필사적이다. 일단 사용자들은 해당 서비스에 익숙해 지면 해당 서비스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고 없으면 불편하고 괴롭기까지 하다. 이렇듯 우리는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르고 소중한 시간을 빼앗겨 버린 격이 된 것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우리 생활의 일부분을 편하게 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존재로서 온라인으로는 우리 육체의 욕구를 돌볼 수 없다. 우리의 몸은 적당히 움직여 줘야 하고 우리의 눈은 먼 곳과 가까운 곳을 자주 번갈아 봐 줘야 하며 오감을 적당하게 자극해줘야 정신건강에 이롭다.  누군가가 기술 발전의 피해는 사용자의 몫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온라인 상의 각종 콘텐츠들은 무료함과 심심함을 달래주고 고통을 망각하게 하며 SNS를 통해 사회적 인정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 뇌는 이런 것에 대단히 취약하여 우울함에 빠지기 쉽고 의욕이 상실되기 쉽다. 때문에 적당하게 고독을 느낄 줄도 알고 혼자서 시간을 보낼 줄 알아야 사고 능력을 키울 수 있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며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도모할 수 있다. 이럴수록 고도의 자가컨트롤 능력을 키워서 스마트폰의 좋은 것만 취하여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가는 지혜와 행동력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가 생각해 본다.  모두 잠시 스마트폰을 꺼놓거나 치우고 독서도 좋고 운동도 좋고 명상도 좋으니 실제적으로 육체적 본능과 정신적 본능에 충실한 것을 찾아서 해보자.  동북아신문
146    월드컵 가는 길 첩첩산중,‘리철군단’ 꽃길 있을가? 댓글:  조회:1117  추천:0  2021-07-15
[정하나 시선]   천적 피한 ‘아홉째’ 복병 만나나?      9월로 눈앞에 다가오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중국팀은 B조에 편입, 환호하는 이들의 리유는 강팀 한국과 이란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B조는 오히려 A조보다 강팀이 많고 복병까지 있다.   중국팀은 한국과 이란의 파워를 두려워하는데 당장은 힘이 좋은 ‘유럽’팀인 오스트랄리아팀과 조우한다. 거기에 아시아에서 기술이 제일 뛰여난 일본과 사우디까지 겹쳐 3강이 길목에 도사리고 있다. 광주팀 감독 칸나바로는 B조를 첩첩산중, 최악의 조라고 보고 있다.    게다가 ‘제2의 히딩크’로 불리우는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윁남은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면서 현재 흐름을 타고 있어 고전이 예상되는 복병이다. 윁남의 최고 왕훙인 미녀팬은 B조 제일 약체는 중국팀이라면서 “홈장에서 2:1, 원정에서 1점을 딸 것”이라는 등 윁남은 언감생심 중국팀을 ‘벼락 맞은 소고기’ 취급을 하고 있다.    하긴 현재 중국팀은 아시아에서 2류 팀으로서 8~9위 정도에 있는 ‘아홉째아저씨’ 위치다. 지난 아시아 지역 예선 40강 추첨 시 종자팀중 8위였으며 현재 세계 랭킹도 아시아 9위이다.    리철 감독은 호랑이일가?    세계 최고 명장중의 하나인 리피 감독이 손사래를 치고 떠난 중국팀 구원투수로 등장한 리철 감독이 아시아 1차 예선에서 4전 4승이라는 파죽 련승을 거둘 줄은 누구도 예상 못했다. 아직 림시 감독이지만 정식 감독으로 승격할 가능성이 높다.   유럽 류학파 출신에 다년간 프로팀에서 감독 경력을 쌓았고 또 국대팀에서 리피 감독을 보좌하면서 제일 아끼던 조수로 총애받던 리철은 차곡차곡 준비된 감독이다. 따거(형님)형 감독인 그에게서 특별히 돋보이는 점은 팀 장악력, 무엇보다도 정신력이 약한 중국팀 선수들의 고질병을 잘 알고 처방할 수 있는 적임자로 보인다. 리피 리스크에 혼난 중국 축구계는 이제는 명성이 있는 감독보다는 비방을 가진 토배기 의사가 더 용하다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금방 끝난 유로(歐洲杯)에서 우승 이변을 일으킨 이딸리아팀, 슈퍼 선수가 없기에 최고의 팀은 아니지만 제일 단결된 팀으로 불리운다. ‘양무리를 거느린 호랑이’인 만치니 감독은 ‘호랑이 무리를 거느린 양’인 잉글랜드팀 감독 슈스케를 먹어버렸다. 승리는 용감한 자에게 속한다는 도리, 그렇다면 리철 감독은 과연 호랑이일가?      귀화 선수 그리고 화제의 고준익    그런 와중에 그래도 중국팀이 이번 월드컵 꿈을 포기하지 않는 리유중의 하나가 바로 귀화 선수에 대한 기대다. 까타르팀이 아시아의 강팀으로 재빨리 부상한 비결은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귀화 선수 기용 성공이다.    리철 감독은 12강전에서 귀화 선수를 많이 기용할 것이라고 피로했다. 슈퍼리그 5년에 무려 58꼴을 몰아친 카르덱을 비롯, 아란이나 페르난도, 리가, 강광태 등으로 어떤 경기는 경기장내서 뛰는 선수 절반이 귀화 선수일 가능성도 있다. 국대팀의 현재 진영으로 보면 공격선은 물론 중원을 무게 있는 귀화 선수가 받쳐주는 것이 시급하다.   그리고 조선족 선수를 선호하는 리철 감독이 12강전에서 계속 조선족 선수를 기용할지가 주목된다. 이미 40강에서 선발로 뛴 김경도의 경우 이딸리아팀의 우승 공신 키에사( 基耶薩)를 배우라고 주문하고 싶다. 투지, 기동성에서 키에사와 비슷한 점이 있는 김경도는 그의 결심과 용기 그리고 침략성을 잘 배워 실력을 한단계 올리지 않으면 잔혹한 12강전에서 자칫 위치가 밀릴 수 있다.    화제에 오른 고준익선수가 은근히 주목된다. 월드컵에서 우승컵에 수비로 골든볼상까지 수상한 광주팀 감독 칸나바로는 “국내 선수중 가장 해외 류학에 추천할 만한 선수”로 고준익을 꼽았다. 그는 고준익은 능력이 매우 강하고 여러 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으며 거기에 출중한 신체 조건까지 갖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축구》보가 조직한 국가팀 관련 토론에서 리철 감독이 고준익을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왼쪽 측면의 공수에서 경기를 읽는 능력과 공 처리가 뛰여난 고준익이 어쩌면 12강전과 같은 큰 무대에서 의외로 큰 몫을 기대할 만한 선수로 보인다.    정하나 길림신문 론평원
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왕지루(望志路) 106호에서 중국 공산당 제 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당국의 감시를 피해 50여명의 당원 중 마오쩌둥(毛澤東)과 천두슈(陳獨秀) 등 13명이 참석한 비밀회의였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중국 공산당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강력한 정당이 되었다. 당원 수는 9200만 명으로 인도 집권당 BJP(1억8천만 명) 다음이지만, 1949년 신중국 건국이후 72년간 집권한 역량을 보면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이자 가장 강력한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00년간 수많은 국가의 정당들이 창당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했다. 소련 공산당과 동유럽 공산당들도 몰락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더욱 강력해지고 인민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 13명의 비밀모임으로 출발해 100년만에 9200만 명의 세계 최대 정당이 된 중국 공산당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그 성공의 원천은 무엇인가? 첫번째로 인민주의를 꼽을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던 국민당을 몰아내고 외세를 물리친 힘의 원천은 인민에 대한 무한봉사이다. 인민제일주의의 창당 이념이 100년동안 일관되게 지켜지고, 이를 통해 인민과 일체화가 된 정당, 그것이 중국 공산당이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싸움, 즉 국공내전 당시 전력의 열세로 쫓기면서도 인민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부패한 국민당군이 점령한 마을을 노략질하고 괴롭힌 반면 공산당은 인민들을 위해 농사일을 거들고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민심은 자연히 국민당을 떠나 공산당으로 향했다. 두번째는 변화와 혁신이다. 중국 공산당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변화와 혁신의 선택을 통해 더욱 강해지고 발전했다. 모두가 무모한 선택이라고 했던 1930년대의 대장정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장정을 통해 공산당 세력을 지키고 단련시키지 않았다면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외세에 굴복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개혁개방을 선택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지도력도 변화와 혁신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고양이라는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무슨 상관이냐'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중국 공산당 특유의 혁신 역량을 보여주는 말이다. 세번째는 역사의 요구에 부응하는 지도자의 출현이다. 창당과 내전, 외세와의 투쟁 시기에는 마오쩌둥(毛澤東)과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전략적 능력이 있는 지도자가 나왔다. 그는 대장정의 결단을 통해 세력을 보존하고 대륙통일과 건국의 꿈을 이루었다.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혼란으로 위기에 처한 시기에는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전략적 실용주의자가 나타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 시장주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노선을 제시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일본과 미국을 방문해 도움을 요청했고, 그의 선택은 중국의 번영을 가져왔다.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말로 발전적 계승의지를 보인 그의 결단은 중국 공산당 100년의 대업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평가이다. 시진핑 주석의 등장은 중국의 세계화와 맞물려 있다. 그는 경제성장을 통해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세계 질서의 중심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추구하려는 시대정신을 대표하고 있다. '일대일로' '인류운명공동체' 등은 이제 중국이 세계의 책임있는 중심이라는 선언을 담고 있다. 그것이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이상이다. 그는 어린 시절 량자허(梁家河)촌 하방(下放)을 통해 고난의 역사를 체화(體化)한 지도자이다. 네번째는 철저한 교육과 학습이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려면 소년시절 부터 당의 역사와 사상, 지도자들의 어록 등을 철저히 학습해야 한다. 또 매년 1600명을 선발해 교육하는 중앙당교를 비롯한 각급 교육기관들이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한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 100년간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란만장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고 있다. 미중 갈등과 반중국 세력의 도전 등 많은 어려움들이 그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것이다. 과거에 혁명 선배들이 보여준 열정이 후대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이 세계 평화와 번영의 중심이 되기를 기대한다. 필자/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한겨레신문 기자와 청와대 정치국장을 거쳐 영남매일신문 회장과 2018평창동계올림픽 민간단체협의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일본 외무성 초청 시즈오카현립대 초빙교수, 중국 외교부 초청 칭화대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와 국기원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동북아신문
144    돼지목에 진주목걸이 댓글:  조회:1242  추천:0  2021-06-08
글 궁금이 · 방송 전금화           “요즘엔 다들 휴대폰으로 찍어서 화보에 쓸 사진을 건지기 힘듭디다.”     어느 화보사 기자의 말이다. 신매체시대라 휴대폰으로 찍어서 심지어 후기 가공도 필요없이 현장에서 올리면 기사가 되는 세월이다. 그러다보니 카메라가 찬밥 신세가 되고 중무장의 촬영기도 서서히 실내 스튜디오에만 자리하고 있다.      “일반인도 그냥 휴대폰 하나로 틱톡을 잘만 만들어가고 있구만은 웬 설비타령입니까.”     신매체시대에는 수치가 영웅을 낳는다. 어마어마한 건물까지 갖춘 거물급 매체든 오막살이 집에서 컴퓨터 하나에 마이크만 올려놓은 개인 매체든 똑같이 결과로 승부한다. 아무리 화질이 좋고 발음이 표준적이고 내용이 긍정적일지라도 보고 듣는 사람이 없으면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매체가 어떻게 발전하더라도 기준이라는 건 없어지지 않는다. 신매체가 웬만한 사진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하여 고화질을 요구하는 화보에서도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는 일이다. 굶어죽지 않으니 영양가를 따지지 말라는 말과 같다. 먹고 사는 건 최저선일 뿐이고 잘먹고 잘사는 게 모든 생명체의 일관한 목표이고 당연한 요구이다.      지금은 설비가 발달하여 고급 사진기로도 TV기준의 촬영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이 체적도 작고 가벼운 간이 설비를 갖고 다닌다. 그런데 아직도 항간에서는 어깨에 멘 둔팍한 촬영기를 들이대야 정규 매체로 인식한다. 사유의 관성이다.     송충은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송충이 어느날 나는 왜 평생 뾰족하고 딱딱한 솔잎만 먹어야 하냐며 반란을 일으켜서 갈잎을 먹으면 죽어버린다. 산에 가면 산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 하고 자리를 보고 발을 펴라는 것도 바로 이 도리다. 오기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닭알로 바위를 백년을 쳐봐야 천년을 깨진다.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면 머리도 숙여야 되고 큰일을 념두에 뒀다면 작은 양보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밖에서 혹시라도 시비가 붙으면 그냥 잘못했다고 넘어가세요. 의미없는 시비에 승부를 걸만한 가치도 리유도 없습니다.”     선배의 조언이다. 보복운전을 하는 차량을 만나면 그래 니가 잘났다고 양보하고 지하철에서 발을 좀 밟혔다고 노발대발하지 말라는 얘기다.      얼마전에 상해 대중교통 환승역에서 젊은 녀성이 발뒤꿈치를 좀 밟히웠다고 경찰을 부르고 구급차를 호출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구급차와 경찰이 도착했는데도 자기는 아버지를 기다려야 된다며 시간을 지연시켜 공공자원을 랑비했다. 결국 현장 감식 결과 이 녀성의 발꿈치는 껍질 하나 벗겨지지 않았고 부어오르는 일은 더욱이 없어서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대중교통에서 흔히 발생하는 극히 일상적인 현상임에도 난리부르스를 추면서 아버지까지 불러낸 이 크지 못하는 녀아는 경찰과 의료인의 허구픈 웃음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꼭두각시극을 총망히 마무리해야 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북경 현지 할머니가 버스에서 외지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었다. 썩을 외지인이 북경에 밥을 구걸하러 와서 무슨 잘난척 하느냐는 기가 막힌 우월성 발언을 했다. 정말 누워서 침뱉기다. 이런 차별시 발언을 하는 자체가 저소질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기준은 사람이 정하지만 지키는 사람에 따라 결과를 달리 한다. 주말에 산책을 나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복도에서 연기냄새가 난다. 누가 복도에서 담배를 피웠구나 싶으며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일이 그렇게 되려니 그랬는지 이날따라 엘리베이터가 늦게 와서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내내 연기냄새가 나더니 결국 중간의 어느 층에서 그 발원지를 발견했다. 창가에 통졸임통을 놓고 재떨이로 사용했나 본데 그 안에서 연기가 어구를 꽉 채우며 올라오고 있었다. 누가 담배불을 끄지 않은 채 그 안에 던져버렸나보다.      그게 계속 타다가 불길로 번져 화재로 이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아까운대로 손에 들었던 생수병의 물을 부어서 끄기는 했는데 나중에 병에 남은 물을 마시려니 연기냄새가 배여서 그냥 버렸다. 북경시 금연규정에 따르면 지붕이 있는 곳은 실내로 인정돼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되여 있다. 복도도 엄연히 실내고 공공장소인데 담배를 피웠으면 뒤처리라도 깔끔하게 할 일이지 참 리기적인 처사다. 자기 집에 연기가 차는 건 싫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복도는 괜찮다는 건 어떤 심리일가.     세계는 넓고 인간은 다양하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43    오늘도 한시에 취해본다 댓글:  조회:1265  추천:0  2021-04-23
오늘도 한시에 취해본다 □ 김춘식 나는 글을 쓰는 짬짬이 머리도 쉴겸 해서 몇해 전 중고서점에서 산 후 둬번밖에 읽지 않았던 《우리 한시 삼백수:칠언절구편》을 다시한번 훑었다. 비록 말 타고 꽃구경하는 식으로 읽긴 했지만 그래도 새로이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퍼그나 많았고 감회도 깊었다. 전에도 두보, 리백 등의 시를 비롯하여 《당시 3백수》는 어려서부터 익히 알고 있지만 우리 선조들이 지은 한시를 접하기는 한국에 들어가서 처음이다. 가끔 신문들에 실리는 한시들을 감상하면서 한시에 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문에 실린 것을 하나둘 오려 모으던 데로부터 한시에 관한 책을 두루 사놓고 부지런히 탐독했다. 나에게 있어 한시는 매우 어렵다. 한국에서 쓰는 한자에 익숙하지 않으니 한시가 어려운 것도 당연하고 설사 한자를 잘 안다 하여도 한시는 수천년에 걸쳐 만들어진 복잡한 형식과 특유의 표현기법 때문에 어려운편이다. 그래서 한시를 제대로 리해하려고 여러 면으로 탐구도 해보았다. 그만큼 어렵기도 하지만 그 읽는 맛, 보는 맛에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시 읽기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울 때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옛시만이 가진 감성이나 그 시대의 지식을 잘 모르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하기에 한시를 그대로 적어놓은 것보다는 번역문도 따르고 해설도 붙어있는 책을 즐기는편인데 《우리 한시 삼백수: 5언절구편》과 《우리 한시 삼백수:7언절구편》 등은 내 취미에 딱 맞는 책이다. 당시 삼백수가 당조 때의 수십만수의 시중에서 그 정수라고 할 만한 것들을 묶었듯 이 두권의 책도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한민족의 5언절구와 7언절구중 알맹이라 할 만한 시를 각각 삼백수 뽑고 이를 풀이했다 《우리 한시 삼백수: 7언절구편》에서는 삼국부터 근대까지 우리 7언절구 백미 삼백수를 가리고 사랑과 인간을 비롯하여 존재와 자연, 달관과 탄식, 풍자와 해학 등 일곱마디의 좁은 행간 안에 녹아있는 우리네 인생사를 오롯이 펼쳐냈다. 한시는 읽을수록 맛이 있다. 이런 한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큰 공감과 감동을 준다. 읽다 보면 한시는 우리들의 생활과 거리가 결코 멀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한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랑만을 이야기한다. 그중의 단연 으뜸은 일상의 한 순간에서 얻은 빛나는 깨달음이다. 살고 살아 감내해야 인생의 의미가 조금씩 보이듯 한시는 보고 또 보며 곱씹을 때 그 의미가 새롭다 김병연의 , 황진이의 등은 모두 내가 즐겨 읊는 한시들이다. 그리고 언녕 한시 하나에 꽂혔다. 바로 한시중 송별시의 최고작이라 일컫는 고려 때의 시인 정지상이 지은 이다 “비 갠 긴 언덕에는 풀빛이 짙은데 남포에서 님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언제나 다 마를 것인가 리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는데.” 읊을 때마다 전률이 이는 최고의 작품으로 나도 살면서 이런 작품 하나만 써낼 수 있다면 평생 후회 없는 삶이 되지 않을가 싶다. 한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짬짬이 하나하나의 시를 천천히 읽어내려가다 보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한시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게 된다. 사랑과 우정, 죽음, 자연, 려행, 일상과 현실 등은 우리 한시의 가장 보편적인 소재들이다. 무작정 어렵다고 생각하며 외면하기 이전에 천천히 한시를 읽다 보면 천년의 세월을 함께 나누어 그들의 삶을 함께 주억거리게 된다. 내가 이렇게 한시 공부에 열을 올리니 주위로부터 리해할 수 없다는 눈치를 많이 보내온다. 나이 60이 넘어 그런 것을 배워 뭘 하느냐다. 배우기도 어렵거니와 배워봤자 어디에 써먹지도 못할 것을 가지고 말이다. 더구나 젊은이들도 배우기 어려워하고 꺼려하는 한시니깐. 늙은 나이에 무슨 한시타령일가 싶겠지. 하지만 나는 이것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내가 즐기는 것이면 그리고 의의 있는 것이라면 꼭 해내고픈 마음이다. 그리고 내 나이가 어때서, 이제야 ‘신중년’에 들어섰는데. 나도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을 즐기며 잊고 살던 랑만을 되찾고 싶다. 연변일보 
142    욕구와 행복 댓글:  조회:1276  추천:0  2021-04-09
욕구란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저 바라는 일을 말한다. 욕구는 건강적 욕구, 물질적 욕구, 정신적 욕구로 구분할 수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행복이란 욕구가 충족되여 충분한 만족감과 기쁨을 느끼며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한다. 욕구와 행복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욕구가 없으면 행복을 론할 수 없고 욕구는 행복의 전제조건이다. 건강과 물질 그리고 정신적 욕구(추구)는 행복의 3대 요소이다. 이것은 삼각형의 온정성과 마찬가지로 어느 하나의 요소도 없어서는 안되며 그렇지 않으면 행복이란 삼각형은 파괴된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란 행복삼각형의 온정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행복삼각형 함수의 최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더욱더 수학화(데이터화)한다면 ‘행복가치=건강가치+물질가치+정신가치’이다. 더욱 큰 욕구를 추구하고 더욱 큰 행복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욕구의 추구가 있어야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동력이 생기며 동력이 생기면 전진하고 발전하게 된다. 우리 인류는 더욱 큰 욕구를 추구하고 더욱 큰 행복을 바라면서 우리 사회는 고도로 발달하고 문명한 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건강은 행복의 근본조건이다. 병원에 입원하여 신음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부유하여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건강적 추구는 행복의 한개 요소로서 제창해야 한다.  우리는 신체적 건강을 추구해야 하는 동시에 건강한 심리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정신적 건강’도 추구해야 한다. 정신상에서 장기적으로 부진하고 활기가 없으면 신체상의 기능에 영향을 주며 질병을 초래하기도 한다. 물질은 행복의 기본조건이다.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중국의 위대한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 등소평 동지도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은 재물 즉 돈을 수요한다. 더 많은 돈을 수요하는 목적은 더 많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이다. 물질적 추구는 행복의 한개 요소로서 좋은 일이지만 자신과 사회의 실정에 맞게 추구해야 하며 도를 넘지 말아야 한다.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원래보다 더 불행해질 수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즐겨 들었던 는 이 도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어부가 금붕어를 놓아주자 금붕어는 약속 대로 어부 로부인의 많은 소망을 만족시켜주었지만 어부 로부인이 줄곧 만족을 하지 않자 결국 금붕어는 어부 로부인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가져갔고 어부 로부인은 원래의 가난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부유해졌다 가난해지는 상대적인 락차 때문에 어부 로부인은 원래보다 더 많은 불행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제 손으로 벌어먹고 살아야 편안하다는 속담이 있다. 자기 실정에 맞지 않은 지나친 물질적 추구는 분수에 넘치는 욕심과 목표 및 비교 때문에 잘살수록 상대적 빈곤을 느끼며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남을 해치고 나라의 리익을 해치며  부화타락에 빠지고 사회기풍을 흐리우고 심지어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다. 강소성 련수현교통국당위 부서기였던 왕문성은 자기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기형적인 불균형 심리가 나로 하여금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범죄의)  길로 가게 하였다. 능력을 놓고 말하면 나는 그들(교통국 관할하의 일부 사장을 말함)보다 못지 않는데 나의 수입은 그들에 비하여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담론할 가치조차 없었으며  결국 심리적 평형을 상실하여 사탕폭탄의 유혹에 빠지게 되였다.” 우리는 물질적 추구를 해야 하는 동시에 정신적 추구도 해야 한다. 남보다 꼭 잘살아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남보다 못지 않게 살면 되지.’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게 좋을 듯싶다. 심지어 남보다 좀 못살아도 숭고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많은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건강하고 한계와 도를 넘지 않는 물질가치를 추구하면서 숭고하고 고상한 정신가치를 추구하고 창조하고 무제한으로 발전시켜 행복의 경지에 달해야 한다.  숭고한 정신적 가치의 추구는 한계가 없다. 평시에 아껴먹고 아껴쓴 돈을 빈곤과 교육사업에 선뜻 기부하는 사람, ‘랑랑 18세’에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편벽한 산골에 내려와 30여년간 후대의 교육사업에 종사한 ‘어머니’, 외국의 우월한 대우를 버리고 조국의 품에 돌아와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 조국이 수요할 때 개인의 안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만민의 행복을 위하여 선뜻 나서는 생명의 수호신… 얼마나 고상한 정신적 추구이고 정신적 가치이며 끝없는 행복인가? 우리 다같이 서로 손잡고 우리 나라를 국민이 건강하고 장수하고, 물질이 고도로 풍부하고 부강하고 민주적이고 문명한 사회주의 강국으로 건설하는 신성한 사업에 이바지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행복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인생은 한번 왔다 두번다시 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맡겨진 인생을 고상하고 숭고한 사업에 이바지하여 충실한 인생, 후회 없는 인생, 값진 인생, 빛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최대의 행복을 창조해나가자.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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