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도원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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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단편소설] 회귀선(回歸船) / 신상성 댓글:  조회:351  추천:0  2022-10-31
[단편소설] 1979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회귀선(回歸船) 신상성(申相星)   1        바람이 불었다. 돌개바람이 불 적마다 바람의 끄트머리에선 모래 무덤이 생겼다. 그것은 나지막한 동산도 만들다간 삽시간에 날아가 버리기도 했다.      숨이 답답하고 목구멍이 깔끄럽다. 벌떡 일어났다. 바지 주머니를 더듬어서 편지 나부랭이를 찾아 코를 풀었다. 코는 안 나오고 모래가루만 흩날렸다. 침을 뱉었다. 모래가 섞여 나왔다. 목구멍 근처의 모래는 잘 떨어지지 않았다. 칼칼하다.      여기저기 전우들의 헛기침 소리가 콘셋 벽 위에 그림자로 출렁거렸다.      검은 헝겊을 씌워 보안등을 한 나트랑 휴양지 막사 안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의 그림자들로 날짱거렸다. 담요로 머리를 푹 뒤집어 쓰고 온몸을 돌돌 말았는데도 모래는 코로 귀로 이빨 새로 구멍 난 곳마다 날렵하게 파고 들어와 앉았다.      담배를 하나 물었다. 잠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멀리 바닷물소리가 나들명거린다. 그 소리를 따라 막사 밖으로 나왔다. 돌개바람의 날카로운 앞 이빨이 더욱 날카롭게 파고든다. 콧속이 뻐근해 온다. 뒷골도 다시금 멍멍해진다. 적도 근처의 열대이어서 이곳 해변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다.      그믐달 근처로 조명탄이 올라가 폭죽같이 터졌다. 검은 그믐달도 총탄으로 피빛 구멍이 날 것 같다. 멀리 박격포 소리를 배경으로 M16 소총소리가 자장가로 들렸다. 연막탄과 화염 방사기도 간간히 밤하늘을 색칠한다.      중부 월남, 닌 호아(Ninh Hoa) 지역 혼 헤오(Hon Heo) 산 북반부 하늘이 살벌하게 타오르고 있다. 백마부대 29연대장 이창진 대령이 주도하는 ‘박쥐16호’ 작전이다. 그 총소리 속에는 하사 홍종진 첨병 조장의 M16이나 고참 병장 김철남 부조장의 카빈 소총 소리도 섞여있을 것이다.      홍 하사나 김 병장은 의무병이지만 소총수 보병들과 똑같이 뛴다. 홍 하사는 맹호부대 제1진으로 왔다가 재파월하여 백마부대 제1진으로 다시 왔다. 오로지 전쟁수당으로 돈을 모으기 위해서이다. 1967년 파월 따이한 병장 월급이 54달러였다. 당시 국가공무원 평균 월급이었다. 초급장교 소대장 소위는 거의 우리들의 두 배가 된다. 그는 등 뒤에 구급배낭을 열 십자로 묶고 보병들이 사용하는 M16으로 늘 맨 앞에 자원해 나간다. 용감하다고 할지, 무지하다고 할지, 어쨌든 이 전쟁 자체를 즐기는 것 같다. 살짝 곰보인 그는 육자배기 노래와 구멍난 농담을 혀끝에 물고 다녔다. 때때로 야전막사를 폭탄 같은 폭소로 몰아간다.      고참 김 병장은 노름도 잘 하고 장사도 잘 하고 사랑도 잘 한다. 그래서 나중에 현지 제대하여 월남 처녀와 결혼도 했다.      담배를 두 손으로 감쌌다. 야간의 불빛은 십 리를 간다. 푸르스름하게 번져 올라가는 담배연기 위로 반투명 맑은 유리조각들이 은하계를 쌩쌩 달리고 있었다. 두 쌍의 낙타가 나란히 서 있는 말보로 담배연기를 폐 속 깊이 빨아들였다. 낙타의 눈동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그윽한 것 같다. 그들의 눈은 늘 사막 끝 지평선에 고정되어 있다. 칼날 같은 모래알이 눈알을 파고 들어도 그들은 먼 지구 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전혀 세상을 초월한 눈동자이다. 세상은 잔인한 피 흘림인데 낙타와 은하계는 더없이 평화롭다.      수평선 끝에서부터 달려와 발끝을 간질이는 밤바다, 깊은 파도 소리가 속삭여 왔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진다. 진작 담요를 가지고 나올 걸, 후회했다. 잠 못 이루는 병사들의 그림자 몇 개가 나와 같이 해변을 방황했다.      이번 ‘박쥐16호’ 작전명단에는 내 이름도 올라가 있었지만 연대 의무중대 인사계 할아버지는 내 이름 대신에 왕삼조 상병으로 대체해 놓았다. 내가 필리핀 클라크 미군 병원에서 복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날아간 오른쪽 귀창이 아직 치료 중이기 때문이다. 반 고흐마냥 흰 붕대를 감고 어떻게 작전수행을 하느냐는 인사계의 호통이었다. 흰색 붕대에 까만 구두약을 칠하고 나가면 되지 않느냐고 우겼지만 오히려 나를 엉뚱한 이곳 나트랑 사단 휴양지로 쫓아보냈다. 한밤중 반강제로 앰불런스에 태워 밀었다.      우기와 건기가 갈라지기 시작하는 10월초 중부 월남의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야전에서 저녁 식사용 C 레이숀을 뜯을라 치면 비가 먼저 뜯어놓은 깡통을 치고 들어온다. 밤새 비를 맞으며 매복을 끝내고 일어서는 아침이면 또 언제 그랬냐 싶게 소낙비는 저만큼 달아난다. 가슴까지 차 오르는 빗물 참호 속에서 물에 빠진 참새마냥 몸을 부르르 떨며 아침의 정글 속을 뛰다 보면 어느 새 땡볕이 철모(鐵帽)가 벌겋게 달구어지기 시작한다. 점심 때면 철모에 계란 후라이를 해 먹을 정도로 뜨겁다. 한밤 중의 진흙탕이 한낮에는 뽀얀 먼지로 풀썩인다. 밤낮의 기온 차가 약 20도의 영상 영하 사이를 외마치 장단을 친다.      백마부대 의무병으로 쫓겨 오기까지 나는 몇 군데 교육을 거쳐야 했다. 쫓겨왔다기보다 실은 자원해 온 것이다. 원래는 김포 제1공수특전단 공수요원으로서 대구 의무기지학교로 파견되었다. 의무병 특과교육을 마치고 화천 오음리 월남파병 훈련을 거쳐 이곳 닌호아에 떨어진 것이 8월 한여름이었다. 논산 신병훈련소에서 김포, 대구, 화천을 뽈뽈 기는 쫄병으로 한바퀴 도는데 약 1년 걸린 셈이다. 원적은 1공수 특수요원이지만 월남에는 의무병으로 파견된 것이다.      우리를 태운 미 해군 수송함 1만톤급 ‘쟈이거’(Giger)호가 이곳 나트랑 해안에 접안하자 베트콩들이 기습 공격해 왔다. 시뻘겋고 시꺼먼 해안기지 기둥폭발 모습이 영화 필름마냥 유리창에 비치어 터졌다. 햇병아리 우리들은 요동치는 쟈이거 군함 벽을 휘어잡고 더욱 크게 요동치던 가슴을 쓸어 내렸던 1년 전 기억도 난다. 어느 새 내가 이 지옥 같은 전쟁터를 뛰어다닌지도 한 해가 다 가는 것 같다.      백마부대와 함께 쟈이거를 타고 온 해병 청룡부대 요원들은 우리보다 더 북쪽 후에(Hue) 지역으로 떠나고, 우리는 중부 월남 닌호아에 떨어졌다. 1번 남북도로와 21번 동서도로가 갈라지는 9사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29연대였다. 나트랑의 베트콩들에게 ‘위험한 영접’을 받고 내가 1대대 4중대에 배치되어 겨우 한숨 돌릴 무렵이었다.      한밤중 연병장에 비상 신호탄이 몇 번 터지더니 약 30대의 작전 트럭이 들이닥쳤다. 중무장으로 동 디엔(Dong Dien) 강이 흐르는 닌호아 북쪽 산악지대에 투입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작전이 바로 ‘아름다운 매화 2호 작전’이었다. 그 동안 부대관할 반닌, 반쟈 지역으로 대민작전에 나가 주민들 치료만 하다가 한달 만에 본격적인 전장에 뛰게 된 것이다. 중대 단위 소규모 작전은 김포 공수부대 시절부터 많은 경험을 했지만 사단규모 대작전은 처음이다. 죽음과 공포, 긴장과 불안이 비수 같이 목을 겨누었다. 나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안근호(安根鎬) 제4중대장이 무전기에 대고 아프리카 원시인 같은 언어로 고함을 질러대었다. 본부 상황실 홍상운(洪祥運) 연대장과 작전상황을 암호로 확인해가는 것이다. 라이트를 끈 채 암흑 속을 달리는 트럭 뒤칸 어둠 속에서도 안 대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D 데이 이틀이 지난 10월7일 밤 10시 가까이 되었을까, 21번 도로 연결 쪽 다리를 베트콩이 기습해왔다. 집중사격을 해오는 그들을 여유 있게 응전하며 우리는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사살보다는 생포를 목적으로 안 대위는 맨 앞장 서서 예상 도주계곡을 차단하며 수색작전을 폈다.      이에 앞서 약 5시간 전에 바로 옆 작전지역인 동 슈안(Dong Xuan)의 제10중대 홍종진 하사 부대에서 대민심리전에 나갔던 배태룡 하사와 최정웅 병장이 베트콩들의 기습으로 산화하였다. 그래서 안 대위는 이 지역 베트콩 부대의 최근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생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험준한 혼 헤오 산악과 야밤의 정글 이동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칫하면 오히려 우리가 역 포위를 당한다며 제1대대장 장창호(張滄鎬) 중령이 호통을 쳤다.      “야, 4중대장, 안근호 너 끝까지 내 명령에 불복할 꺼야, 어엉! 지금 늬들 수색조가 모두 11명이야, 한꺼번에 뒈지고 싶어엇! 안 대위 너 내 말 안 들려엇?”      시베리아 호랑이 같은 그의 어금니 가는 목소리가 아예 반말과 함께 무전기 통을 박살낼 것 같았다.      영창 갈 각오를 하고 장 중령과 싸우던 안 대위는 연득없이 쏟아지는 폭우로 결국 그냥 귀대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명의 전우가 쓰러진 그날 밤, 우연하게도 배 하사의 어머니와 최 병장 누이동생의 편지가 나란히 도착되었다. 그 두 장의 편지 위에는 창 밖에 쏟아지는 10월 폭우와 함께 10중대 내무반 동료 전우들의 눈물이 밤새 고였다. 이역만리 머나먼 타국 땅, 우리는 왜 이렇게 하릴없이 시체가 되어가야 하나. 씽씽한 젊은 말 같은 한국 청년들이 왜 남의 나라 땅에 와서 누구를, 무엇을 위하여 죽어가야 하는가. 우습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 다시 총구를 닦고 실탄을 장전하여 어느 정글에선가 뛰면서 죽음과 맞닥뜨려야 한다.   2        바닷소리는 늘 달랐다. 아침 저녁이 달랐고 밤과 낮이 달랐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바다와 육지의 입맞춤 소리가 다를 것이고 사랑의 농도도 다를 것이다. 바다 냄새도 다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바다 속 생명체들의 희로애락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어머! 야시카가 일곱, 여덟, 열…… 열 여섯 개 떨어지네요.”      챠오가 침묵을 깨고 초승달 하늘을 가리켰다. 이런 조명탄 한 개의 제조비가 일제 카메라 ‘야시카’ 값과 맞먹는 약 40달러란다. 한 번 낙하하여 사라지는데 약 15분이다. 조명탄은 땅 위에 기어가는 개미새끼까지 비춰준다. 밀림에서 준동하는 베트콩을 찾아주는 것이다. 이 근방 각 부대 작전 지역에서 이 시간에 떨어지는 것만도 수백 수천 수만 개가 될 것이다. 월남 전역에 떨어지는 숫자는 수억 개, 수억 달러가 공중분해하는 것이다. 1년 열 두 달, 365일 몇 년을 더 떨어뜨려야 하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 미국 죤슨 대통령도, 월남 쿠엔 카오 키 수상도, 월맹군 후치밍(胡志明)도 모른다. 유엔군 웨스트 모얼랜드 사령관도, 따이한 채명신(蔡命新) 사령관도 모른다. 신(神)은 알까? 원숭이는 그의 수첩에 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신(神)이란 정체는 뭔 줄 아세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한마디로 단정해 보세요. 내가 사이공 대학 불문학과에서 배운 것이라곤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또, 그 프랑스 신부 얘기군.”      “아녜요. 나 혼자 터득한 거예요. 웃지 마세요. ‘옷(衣)의 변에 원숭이 신(申)자예요. ‘사람 옷을 입은 원숭이?’ 란 뜻이에요. 아시겠어요?”      챠오의 자학적 캐리커처가 시원했다. 그것은 ‘옷(衣)변이 아니고, 보일 시(示)변’ 이다. 직역하면 ‘원숭이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신(神)이란 원숭이다? 그미의 역설이 자폐증상으로 치닫는 나를 웃기게 했다. 나는 뼈 속까지 드러나도록 통쾌하게 웃었다. 어금니가 뻐근하다. 웃지 말자. 이따금 그미의 이러한 어눌한 미소도 생각났다.      “몇 달 전, 사이공 미군사령부 임시수용소에 가서 내 애인 응 남 비엣 그 사람을 만났어요. 여전히 태연하더군요. 나도 그때 처음으로 그 사람 앞에서 태연해 봤어요. 마지막 말을 하려고 하니 이상하게 착 가라앉아지대요. 언제나 불안해야 할 것은 그쪽인데 오히려 내가 늘 초조해 왔거든요.”      바다는 은밀히 말을 걸어 왔다. 그만한 시간이면 챠오의 목소리는 달려와 고통스런 안식을 주곤 했다. 눈을 감으면 다가서는 박꽃 같은 미소 때문에 나는 늘 도망다녀야 했다. 그미의 이국적인 눈동자는 때로 낙타의 초월한 눈동자같이 보인다.      “이번에는 그 콧수염 홀덴 참모장이 ‘노오’ 했던 모양이지?”      “아네요. 그 미군 참모장은 한 번도 내게 ‘노오’라고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가 서둘러 남 비엣의 석방 확인서에 싸인하려는 것을 내가 ‘노오!’ 했어요. 그 홀덴은 이상하단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놓더군요.”      내가 4중대 의무병으로 처음 배치되고 얼마 후, 나는 부대 근처 반닌 반쟈 마을에 대민심리전 작전에 나갔다. 그 즈음 챠오를 처음 만났다. 아니, 챠오의 어머니를 더 앞서 만났다. 그미의 어머니는 중증 환자였다. 파도를 밀며 번져오는 밤 바다의 짠 냄새가 챠오의 겨드랑이 냄새로 다가왔다. 며칠 전 챠오와 만났을 때 들려준 그의 애인 이야기였다. 뜬금없이 그미가 보고 싶어졌다.      나는 휴양소 막사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미의 집이 있는 반닌 마을에 가고 싶었다. 옷을 주워 입고 탄창의 탄알을 확인한 다음 대검을 빼보았다. 만일을 위해 호신용으로 지니고 가야 한다. 달빛에 번쩍이는 칼날을 보자 나는 그만 포기해 버렸다. 당분간 그미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챠오는 지금 나와 같이 최악의 심리상태일 것이다. 나는 탄띠를 도로 풀어놓고 대검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담요를 머리 위로 뒤집어 썼다. 옆에는 항우같이 코를 골고 자는 녀석의 담요도 벗겨 가지고 다시 나왔다. 망고나무 밑에 앉았다. 남십자성이 이마 위에 떨어졌다. 고향 신마산 뒷산의 무학산 중턱의 공동묘지에 자주 올라 갔었다. 이북 함흥이 고향인 큰아버지 무덤가에 누워서 보던 밤 하늘과 똑같다. 다만 고향에선 남십자성이 이곳보다 더 멀리 보였을 뿐이다. 은하계도 끝이 없고 우주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끝이 있었다. 죽음의 끝이 있다. 우리는 죽음을 수통마냥 항상 곁에 차고 다닌다. 그 죽음도 60kg의 고깃덩이가 수류탄에 벌집이 되든지, 부비츄렙에 걸레가 되어야 하는 끝판이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죠. ‘이번에는 석방하면 안 돼요!’ 미군 측에서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안 되겠다고 했어요. 사이공 촐롱지역, 베트콩의 아지트에서 잡혀온 그는 쓸쓸히 웃더군요. 차라리 잘됐다는 거예요. 그 비웃음 뒤에 도사린 집요한 잔인성! 동족의 얼굴에도 마구 칼질할 수 있는 그의 정당성에 나는 어금니가 떨렸어요. 창살을 암팡지게 쥐고 서 있는 그의 두 눈알은 그냥 악마의 핏빛이고 저주였어요.”      챠오의 애인이었던 응 남 비옛은 이렇게 끝막음이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몰려오는 나트랑 해변을 거닐곤 했다. 무성한 열대 숲에 싸인 해변을 눈부시게 흰 아오자이가 걸었고, 그 옆에는 땀에 전 얼룩 무늬 따이한 전투복이 나란히 걸었다. 밑바닥이 보이는 투명한 바다를 보며 걸었다. 우리는 이 해변을 자주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걷는 것만이 전부였다. 세상에서 그 무엇도 우리 젊음의 그 무엇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아니, 우리는 전쟁터의 단순한 피동태일 뿐이다. 그냥 소모품으로 젊음이 죽어갈 뿐이다. 시체가 되어 갈 뿐이다. 세상은 우리의 청춘을 열외로 제외시키고 있었다.      “쇠사슬 같이 늘 강인했던 비엣이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그때 정말 첨 봤어요.”      고개를 천천히 들며 챠오는 먼 수평선 끝으로 쓰게 웃었다. 세상은 챠오에게 결코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 전쟁은 챠오와 그 애인 청년 베트콩 사이를 도끼질 하고 있었다.      “잘했어. 차라리 잘됐어. 이제 내 인생도 이렇게 끝나가누만, 마지막 부탁이야. 반닌 마을에 한 번만 가줘. 우리 아버지가 아직 그곳에 살아계실 거야. 그는 중얼거렸어요. 철창 새로 불쑥 뻗어 나온 마지막 그의 손을 나는 차마 잡지 못했어요.”      챠오는 영어를 잘했다. 그미를 처음 만났을 때 사이공 대학 불문학과 2학년이었다. 나의 서투른 영어회화가 중간중간에서 끊어지면 그미가 잘 보완해 주었다. 손짓 발짓도 하고 땅에다가 그림도 그렸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절실한 말은 못할 때가 많았다.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정작 사랑한다는 낱말 하나는 아직도 못하고 있었다.      “최소한 마지막 그의 손을 한번쯤 잡아 주려고 했어요. 그러나 그 순간, 촐롱의 그들 아지트에서 울부짖던 그 모녀의 환영이 되살아나 도저히 손을 내밀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나는 반닌 오두막에는 갔어요. 허리가 굽은 그의 아버지는 귀도 멀고, 눈도 멀고, 말도 못하는 칠순의 할아버지였어요. 나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때가 전 액자 속에서 낡은 사진을 한 장 꺼내 왔어요. 다시 한참 들여다보더니 ‘며느리가 이제 왔어......허허.’ 이빨이 다 빠진 웃음이었어요. 공허하게 그러면서 핏줄 쓰이게 터져 나왔어요.”      그미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맑은 구름이 마치 어미 캥거루가 아기 캥거루 손을 맞잡고 춤 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동화책 삽화 같았다.      “나는 그 사진을 빼앗았어요. 귀퉁이가 잘려나간 그 사진은 사이공 대학 입학식 때의 내 사진이었어요. 들릴 듯 말 듯한 며느리란 소릴 듣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어요. ‘이제 나는 내 아들 남 비엣한테 가는 거야, 허허.’ 아들은 총살당했어요. 그는 듣지 못해요. 아들은 베트콩 청년조직 지도자이에요. 그는 몰라요.”      “결국 비엣을 죽인 것은 당신이군요. 당신 빽으로 충분히 다시 살릴 수도 있는 건데.”      나는 안전 장치를 풀었다. 방아쇠만 당기면 연발로 나간다. 우리는 화장실에 갈 때도 총을 가지고 다닌다. 잘 때는 머리에 베고 잔다. 더구나 이런 한적한 야산에선 어느 구석에서 검정 콩알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비상장치를 해두는 것이다. 이따금 지축을 흔드는 박격포 소리만 아니면 전혀 전쟁터라는 것이 실감이 안 난다. 이곳이 응접실에 걸린 한 폭의 열대 풍경화라는 착각이 든다. 나트랑 해변은 열대의 정지된 시간과 벌거벗은 낭만이 연상되는 하외이 외이키키보다 더 아름다운 바닷가이다. 제2의 고향 마산 돗섬 같은 아늑함도 있다.      챠오의 목덜미로부터 반사되어 나가는 한낮의 햇발이 눈부시다. 그미의 몸에선 월남 특유의 오줌냄새가 난다. 그것은 곳곳의 쓰레기장에서 나는 월남민족 고유의 연한 찌릉내다. 갓난아기 궁둥이 냄새 같은 것 말이다. 4중대 한미 합동작전 때, 나에게서 마늘냄새가 난다고 코를 막고 뺑뺑 돌던 윌리암 중위의 엉덩이를 발길로 차 주던 생각도 난다. 윌리암이 한국의 쓰레기장 냄새를 맡으면 우리 민족 고유의 냄새가 날까? 우리가 월남에 투입될 때 타고 온 미 군함 ‘쟈이거’ 식당 구석 짬방통에서는 더 찐한 노랑내가 났었다. 미군에겐 특히 윌리암 같은 백인들에게선 그 노랑내가 심했다. 그 비릿한 오줌내는 이곳 야자 열매 속에서도 났다. 처음엔 구역질 나던 그 야자수 물맛에 익숙해질수록 나는 열대에 전쟁에 죽음에 능숙해 갔다.   3        한국의 세라(世羅)에게선 풀 냄새가 났었다. 뽀트를 타고 춘천 소양호를 거슬러 올라갈 때 그미는 진한 들국화 풀꽃 냄새를 풍겼다. 우리는 얼마나 숱하게 헤어지는 연습을 했던가? 꼭 헤어져야 한다면서도 생각해 보면 헤어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세라 어머니의 반대 같은 건 흔한 세속적인 이유였다. 내가 D대학 데모 주동자로서 전국 수배자인데다가 백수건달에 가난하다는 것이 결혼반대 이유이다. 이런 것은 우리에게 헤어지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로서는 절대적이었다. 어떤 것과도 상쇄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헤어져야 했다. 헤어지고, 헤어지고, 헤어져야 했다.      “고아면 어때요? 또 호적에 그어 있는 ‘빨간색 전과표시 줄’이 무슨 상관이에요. 빨간 줄이 그어진 그 결과보다 그 동기가 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당신이 주동한 6.3사태 한일회담 저자세반대 시위는 당연한 일이에요. 열혈 한국청년 내 애인의 의지였어요. 그리고 다른 동료들을 위해서 당신이 대신 희생한 빨간 줄이 왜 나쁘냔 말이에요. 기 죽지 말아요. 왜 당신은 그런 걸 당당하게 어머니에게 강조하지 못 하느냔 말이에요.”      ‘그러나 세라야! 세상은 결과만 가지고 단정하기 마련이야. 네 홀어머니의 외고집을 세대 차라고만 단정할 수 없어! 세상은 그런 제도권 틀에서 돌아가기도 하니까 말이야’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도로 삼켜 버렸다. 이런 말로 타이른다고 해서 그미가 물러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그런 용감한 행동성이 좋아요. 당신은 늘 행동을 먼저 보여 주었어요. 난 그걸 언제나 친구들에게 자랑해요. 땟국이 흐르는 이론보다 실수할망정 행동을 사랑해요. 그러나 당신은 소심해요. 항상 피해의식 속에 싸여 있어요. 왜 그래야 해요? 그건 자학이에요.”      단 하나의 진실을 위해 세라와 나는 모든 것을 위장해야 했다. 하나의 비밀이 갖는 환희와 고통은 그만큼 한 방황과 피로를 던져왔다. 색안경의 두께와 굴절에 우리는 괴로워했고 누구에게도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에 다시금 생채기를 내곤 했었다. 한국의 세라 얼굴도 생각났다. 망상이 나트랑 해변 파도마냥 두서 없이 밀려왔다 밀려간다.      “맞아요. 내가 비엣을 죽인 거예요. 저도 콧수염 홀덴 참모장 사무실 문을 두드릴 때까지는 단 한 가지 생각만 줄곧 했었어요. 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러나 홀덴이 또 비엣을 석방시켜 주겠다고 먼저 말을 꺼냈을 때, 저는 단정했어요. 석방시켜 주면 그는 또 촐롱 밀림으로 달아날 거예요. 쓸 데 없는 반복이에요. 그에게는 민족이라는 당위성 외에는 아무 것도 눈에 차지 않아요. 아버지도, 아내가 될 애인도, 친구도 없어요. 오직 미제 격퇴, 자본주의 말살, 투쟁! 투쟁! 투쟁! 뿐이에요.”      챠오는 다시 수평선 끝을 응시했다. 아까의 캥거루 모녀 그림이 이제는 말 달리는 백설공주 이미지가 되었다. 그 뒤로 많은 양떼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체포될 적마다 계급이 하나씩 올라가 있더군요. 이번에는 부성장(副省長)급 정치장교가 되어 있었어요. 눈은 더욱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더욱 굳어져 있더군요. 이념이란 무엇일까요? 생명을 착취하는 해골일 뿐이에요. 계급에 대한 투쟁도, 외세에 대한 투쟁도 결국 사람 죽이는 게 일이에요. 그들 집단은 걸핏하면 동족들 목숨도 간단히 끊어버려요. 이웃 캄보디아 킬링 필드 영화 보셨죠?”      챠오는 사이공에 유학하면서 유엔군 사령부에 나가 통 번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일 오후 홀덴 참모장 비서실에서 타자를 치면서 월남군 장교들이 방문하면 통역도 했다. 전쟁 판국에 대학이 유지된다는 것도 우습지만 우익 월남정부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좌익 후치민 당이 활개치고 있다는 것도 실감나지 않았다. 그미는 유엔군 합동참모본부에 나들명 거리는 월남군 사단장급 장성들과 고위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많이 목격했다. 가까운 친척의 더러운 암거래 현장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대개의 주민들은 이 전쟁판에 죽거나 병신이 되어 나가는데도 그들은 밤이면 사이공 탄손 누트 공항 근처 환락가에서 판을 쳤다.      조국 지도자들에 대한 챠오의 절망이 한 남학생을 사모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 독서 서클 리더인 정치학과 남학생 응 남 비엣에게 기울어져 갔다. 그는 단호하고 철저했다. 고위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남북한 민족단결과 통일을 울부짖었다. 그는 이념의 화신이었다. 60년대 한국 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과 비슷했다. 내가 그랬으니까 우습다. 이듬해 그는 총학생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교내에선 좌․우익 학생 간 폭력과 납치도 빈발했다. 심지어 살인 방화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미가 얹혀 살고 있던 고모 집은 사이공 시내 술 도매상 가게였다. 겉으로 보기엔 술병이 가득 찬 가게였지만 뒤뜰은 트레일러 몇 대가 대기할 수 있는 대형 창고였다. 헌병까지 앞세워 컨 보이 하는 암거래 트럭이 수시로 뒤뜰에 들어섰다. 헌병 차가 앞문으로 빠져나가면 이내 뒷문이 닫히고 트럭에 가득찬 미군 PX 화물이 순식간에 분리된다. 찦차는 한 시간 정도면 완전 분해된다. 그 속에는 월남군에 보급이 되어야 할 각종 군수품과 최신 무기들이 가득가득 재여 있었다. 고모부는 그것을 베트콩에게 중계하여 팔아 먹는 것이다. 촐롱의 베트콩 지도자들과 뒷거래 하는 것이다. 포장에 USA가 찍힌 채로 야밤에 정글로 이동된다.      월남군 트럭들이 뒷마당에 서 있는 동안 2층의 밀실에는 미 군표 달러와 피아스타가 교환된다. 고모부가 월남군 별자리들에게 군표 다발을 넘겨주고, 고모부는 다시 그날 밤, 논라를 깊이 눌러 쓴 베트콩 지도자들에게 트럭을 통째로 넘겨주면 몇 배의 피아스타가 고모부 비밀금고 속에 쌓여진다. 그 2층 밀실에는 낮이면 남쪽의 월남군 장성이 앉았던 자리에 밤이면 북쪽의 베트콩 검은 옷이 앉는 것이다. 같은 월남 동족이면서 세 사람의 배반적 함수관계는 전혀 다르다. 얼룩무늬 녹색 군복과 검은 옷과 중개인의 하리한 흰옷이다. 적들끼리 무기를 교환하는 아이러니다.      고모가 지하실 바닥에 금궤를 파묻으면서 나에게 상자에 못을 박는 망치질을 시키기도 했다. 이들에겐 이상적인 이념보다 현실적인 달러가 더 확실하다. 대개의 월남주민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대포 소리를 듣고 나온다. 평생 언제 총소리가 끊어질 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미군도, 월남군도 모른다. 인민군 베트콩 해방전선도 모른다. 싸우다가, 싸우다가 시체가 되어갈 뿐이다. 끝없이 죽어갈 뿐이다. 무지한 시골로 들어갈수록 농민들은 이유 없는 학살을 더 많이 당한다. 농민들은 유엔군에 가담하자니 베트콩의 보복이 잔인하고, 베트콩에게 붙자니 너무 춥고 배고프다.      챠오는 학교를 더 계속할 수가 없었다. 조국이 이렇게 만신창이인데 졸업한다고 해서 무엇 할 것인가? 그 공산주의 혁명이론은 대체 현실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일까? 방학에 고향에 돌아 와 보면 비엣 그 애인의 가슴에 반짝반짝 빛나는 훈장만큼이나 반비례로 마을은 쓰러져가고 있었다. 논밭이 황폐해지고, 집들의 벽과 지붕이 뻥뻥 뚫려 있다. 마을 사람들은 더욱 그악하고 비굴해져 갔다. 갈수록 무기물화, 무기력화 되어 스러져 가는 것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동족의 베트콩에게도 참살 당하고, 유엔군에게도 처형 당해 나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누가 죽어 나갈지 모르고, 저녁에 눈을 감으면 또 누구네 집이 불질러질 지 모른다.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도 급속한 진행형으로 마을이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것만이 분명하다. 원숭이는 여전히 신(神)의 흉내만 낼 것이다. 인간 원숭이들은 그들의 수첩에 무엇을 낙서하고 있는 것일까? 대량학살 폭격기의 탄도와 각도와 거리를 재고 있을까?      챠오의 할아버지는 프랑스와의 독립운동 때 처형 당했고, 아버지는 단지 닌호아 군수라는 이유로 베트콩에 의해 살해된 시체가 마을입구 우물에서 발견되었다. 큰오빠는 캄보디아 후치밍 비밀루트로 해서 월북했다. 지금쯤 아마 월맹군 고위층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 덕분에 혁명 가족으로서 출신성분이 좋기 때문이다. 큰 언니는 캄란에 있는 미군병원 간호원이다. 한 가족이 제각각 공허한 이념의 제물로 희생되었다.      챠오는 대학 뺏지를 단 후 세 번째 고향에 돌아왔을 때, 결국 사이공에 가지 않았고, 비옛이 네 번째 체포되었을 때 일부러 석방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러한 결정적인 이유는 계급투쟁의 실체를 그미가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챠오는 그 애인의 부탁으로 여늬 때같이 촐롱의 산 속으로 소금을 배낭에 메고 올라 갔다. 그때 마침 붙들려 온 몇 명의 포로가 야자나무에 묶여 있었다. 언뜻 보니 사이공 주민 같았다. 학교 앞 어디선가 과일장사를 하는 아주머니 같았다.      ‘야잇! 사끄러웟! 조그만 게 앙칼지긴 네 에미나 너나 독하긴 마찬가지로구나.’      누군가 그들을 심문하는 베트콩 중 한 사람이 대여섯 살 난 소녀를 구둣발로 마구 짓이겼다. 다가가 보니 비옛이었다. 챠오는 그 자리에 주저 앉을 뻔했다. 그 소녀는 이미 실신해 있는 자기의 어머니 머리를 끌어안으며 울고 있었다. 그 어머니 무릎 위에는 또 하나의 갓난애기가 젖이 말라붙은 그 어머니의 가슴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었다. 부슬비가 핏물을 번지고 있었다.      “뭐야! 이 쌍년이 아직도 안 불어? 미국 놈과 붙어먹은 갈보년이 뭐가 부족해서 우리 정보까지 팔아먹어 쌰앙!” 비옛은 허연 짹 나이프로 그 과일장사 아주머니의 코 끝을 찍찍 그어대며 닥달했다. 비옛의 이런 발광은 처음 본다.      “야, 이년아! 너 같은 것들 때문에 이 민족의 통일이 자꾸 늦어지고 있는 거야, 썅! 빨리 안 불어? 네가 미군에게 넘겨준 쪽지가 뭐냔 말이야?”      “나는 쪽지도 없고, 미군을 만난 적도 없어요.”      얼굴이고 가슴이고 검붉은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해 있는 아주머니는 자포자기한 것 같다. 이런 비슷한 현장은 이따금 보아왔지만 갓난애의 피 묻은 열 손가락이 역시 피 칠한 자기 어머니의 젖가슴을 손톱으로 할퀴는 것을 보았을 때 챠오는 새삼 어금니를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다. 챠오가 본능적으로 그 갓난애기 머리를 안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비옛의 구둣발이 그미의 옆구리에도 꽂혔다. 살벌한 그의 눈알도 꽂혀졌다.      “챠오! 넌 또 뭐야, 그 너절한 걸레쪽 같은 인정은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라고! 이 여자가 아직도 그 자본주의 찌꺼기를 못 버리고 있어, 이 한 사람보다 더 많은 인민의 목숨을 생각해 보라구!”      비옛은 보란 듯이 그 아주머니의 누런 얼굴을 칼로 다시 북~ 그었다. 두 쪽으로 깊이 갈라진 세로의 금 속에서는 벌건 피가 배어 나왔다. 다시 가로로 북북 그었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이내 붉은 십자가가 되었다. 챠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그대로 산에서 뛰어내려 왔다. 처음 비옛의 어금 빗기는 무산계급 혁명의 실체를 발견한 것이다. 후치밍의 공산혁명, 마오쩌둥의 계급투쟁, 스탈린의 공산독재 그 단호한 이념의 위악성을 느꼈다. 그러나 챠오가 정독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주의 혁명이론은 분명 이런 게 아니었다.      챠오가 나에게 보여 준 한 장의 남녀 사진 속 비옛은 단정했다. 챠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미소를 머금은 그 얼굴은 그러나 강철같이 준엄한 눈도끼였다. 동양인치고 안면의 굴곡이 심했다. 나폴레옹 같이 깊숙이 들어간 눈두덩은 이질감도 주었다. 비옛이 첫 번째 잡혔을 때, 홀덴 참모장이 챠오에게 보여준 포로 사진이라고 했다. 홀덴은 그 사진 속의 여자가 어쩐지 챠오와 비슷하다며 농담을 했단다. 비슷한 것이 아니라 그 장본인이다. 어쩌면 홀덴이 사이공 CID 첩보대를 통해 이미 챠오의 시원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짐짓 떠보려고 농담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옛 동무들은 사이공 대학 입학 때부터 촐롱 아지트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미로 같은 산악 동굴 후치밍 인민해방군 지하사령부를 반지빠르게 드나들며 혁명이론을 학습하였다. 비옛이 2학년 때 주동한 학내 폭동이 성공하자 그들로부터 첫 번째 ‘청년영웅’ 칭호를 받았단다. 사이공 대학의 동료학우들 학살과 강의실 방화 폭동은 혁명전선 기폭제가 되어 사이공 일대에 잠복해 있던 지방 게릴라들에게도 휘발성이 되었다. 몇 달 간 월남 대통령 궁과 행정부 건물 그리고 군과 경찰청 기지 등을 기습하거나 불 질렀다.      “대체 내가 무엇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응 남 비옛! 그이를 사랑한 건지 그의 이론을 사랑한 건지 몰랐어요. 그 과일장수 아주머니 모녀들에 대한 칼질 현장을 목격했을 때, 나는 큰 모순을 깨달았어요. 절감했어요. 낭비예요, 끝없이 해방! 해방! 해서 어떡하겠다는 거예요. 마을은 점점 피폐해지고 병 들어 가고 있는데 대관절 계급투쟁이 뭐 하는 거예요? 벌써 몇 세기 동안 이 땅에는 이렇게 피 튀김만 해오고 있는 것 아니에요. 나는 그냥 이런 고향 흙 냄새가 좋아요. 하루 하루의 웃음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그냥 소박한 일상적인 햇빛이 좋아요.”      따르륵!       순간, 나는 그미를 반사적으로 넘어뜨렸다.      따르륵!      곁의 바나나 나무를 엄폐 삼아 주위를 살폈다. 순간적이다. 엎드린 채 기어서 야자 숲으로 갔다.      따르륵!      이 순간만 살면 사는 거다. 후딱 갈기고 잽싸게 튀는 게 베트콩들의 고유 전법이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결국 우리에게 잡힌다. 그러나 그들의 명중률은 무서웠다. 따르륵! 하면 곁의 한 두 명은 쓰러지곤 했다. 캄보디아나 라오스 국경선으로 침투하는 하노이 월맹 정규군은 면도날 같이 더 날렵했다. AK 소련제 장총 소리가 근처의 밀림으로 사라져 갔다. 다행히 우리가 목표물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는 풀숲에 다시 나란히 누웠다. 신경초 들풀이 일어섰다가 일제히 오므렸다. 한국에선 화분에 모시는 고급 신경초가 이곳에선 잡초로 천지에 깔려 있다. 그미를 눕혀 놓고 진한 키스를 했다. 그미의 입술에서는 여전한 찌릉내가 났다. 달콤하고 친근한 오줌내다.      “며느리를 따라간다고 좋아하는 비옛의 아버지를 사이공 난민 수용소에 집어넣어 버렸어요. 그 할아버지의 눈빛에는 그이가 손을 흔들며 마지막 바라보던 그 눈빛이 남아 있더군요.”      일순 챠오가 긴장을 했다. 아마 지금쯤 남 비옛은 사이공 월남군 사령부에서 총살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미가 홀덴이 제시한 석방서류에 노오! 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서류 한 장으로 사람의 목숨이 휴지쪽이 되다니, 우습다. 목숨이 우습다. 사랑이 우습다. 넓은 야자열대 잎 위에서 무료하게 흔들리는 햇살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마산 합포만 돗섬에서 누워서 보던 똑 같은 하늘이다. 눈부신 하늘을 보니 현기증이 났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머 진통이 또 시작되나 보군요? 이번 귀 상처는 심한가 봐요. 102 십자성 부대는 아직도 진지구축 중이라, 내부시설이 안돼 있을 텐데요? 이런 중상이면 그냥 귀국하지 그랬어요.“      나는 그때 왜 귀국하지 않았을까? 필리핀까지 후송 갔다가 왜 다시 죽음의 이 전쟁터에 오겠다고 우겼던 것일까? 우습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국으로 귀국해야 할 확실한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아니, 단지 챠오가 있는 곳이라 게 더 솔직하다.   4        “아아, 사랑하는 당신! 나는 열흘 동안이나 꼬박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낮이면 부처님께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고, 밤이면 방문 고리를 열어놓고 기다렸습니다.”      ‘아름다운 매화 1호 작전’ 과 연결된 ‘도깨비 3호 작전’의 하나인 열흘간의 수색 정찰을 끝내고 우리 4중대 소대원들은 무사히 귀대했다. 와와! 그 동안 고국에서 도착된 편지를 각자 찾아 읽느라고 아우성이었다. 편지가 없는 녀석들은 죄 없는 죄를 짓고, 구석에 몰리고, 서너 통이나 손에 쥔 녀석들은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전장에서의 가장 큰 즐거움은 단 두 가지이다. 하나는 C․P에 우편 보따리가 왔다는 것과 또 하나는 PX에 김치나 오징어가 내려왔다는 전갈이다. 어느 순간에 시체가 될지 모르는 전장에서는 두 가지 외에는 전혀 무의미하다.      우리들은 편지만 받으면 접힌 부분이 닳고닳아서 너덜거리도록 반복해 읽는다. 불침번 때도 읽고, 뒷간에 앉아서 똥 누면서도 읽고, 총알이 빗발치는 작전지역에서 사격개시! 직전까지도 읽는다. 그렇게 하여 주변 사람과의 끄나풀을 새삼 확인하는 것이다. 제외 또는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할 수 있고 새삼 모가지가 붙어 있다는 생존감을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엉뚱한 김치는 또한 별 수 없이 코리언이라는 거, 여름날 똥 타는 냄새로 체질화되어 버린 한국인이라는 걸 속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눈물이 많은, 설움이 많은 한민족이라는 거, 김치와 된장은 아직도 버터와 치즈의 작전 명령권 안에 소속되어 있는 약소 민족이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기도 했다.      우리는 김치를 먹는 게 아니라 눈물을 먹었고, 죽어가는 전우들의 한(恨)을 먹었다. 그리고 조국에 남은 그 가족의 오랜 슬픔을 마셔야 했다. 이렇게 태평양 밖으로 나와 보니 국가라는 의미, 민족이라는 의미가 새삼 절감된다. 진작 느끼지 못했던 애국심이랄까, 햇병아리가 어미 닭의 체온을 처음 찡하게 느껴 본다고 할까? 한 뼘 온돌방, 한 걸음 내 땅 덩어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내 몸뚱이의 한 피부 조직 같다.      지금 강성우 병장이 탁자 위에 올라가 극화시켜 가며 읽어주는 편지는 고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반닌의 암자 절에 있는 주지 여승에게서 인편으로 배달된 것이다. 사이공의 월남어 교육대를 나온 강 병장은 월남어로 된 그 여승의 편지내용을 번역해 가며 크게 읽었다. 김희갑 코미디 연기도 보태었다.      “오오오 …… 그대여! 따이한의 전형적인 남썽이여, 그대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제일 첨 일깨워 준 부처이외다. 나에게는 두 개의 부처님이 있습니다. 하나는 저승의 부처님이고 또 하나는 이승의 부처님 이현길 병장입니다.”      “아닙니다요, 강성우 영감님! 그건 번역의 오차입니다욧! 하나는 저승에서의 서방이고 하나는 이승에서의 정부(情夫)입니다 그랴.”      낄낄낄…      강 병장이 감정을 넣을 적마다 큰 냄비를 엎어 놓고 얼씨구! 박자를 넣고 있던 이현길 병장이 손을 들고 일어나 정정을 하자, 숨 죽이고 듣고 있던 동료 중대원들이 또 한 번 목구멍이 보이도록 폭소했다. 그 편지는 이 병장에게 아홉 번째 온 여승의 사랑 고백이었다. 모두들 건성 들떠서 취사병들은 저녁식사를 배식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전우들도 밥 먹을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짐짓 웃고, 짐짓 소리치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 다 정신병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폭소 뒤의 허탈은 작전지역의 소모품들인 우리들을 바닥 모를 공포의 늪에 풍덩풍덩 빠뜨리곤 했다. 사단 인사처 명부에 우리도 일종의 소모품이다. 치약을 다 쓰면 쓰레기 통에 버리듯 누가 죽어 나가면 화장터에 갖다 내동댕이치고 새로운 보충병을 지급받는다.      작전이 없을 때면 우리들은 대민 심리전에 나갔다. 반 트럭에 먹다 남은 쌀이며 의료품 등을 싣고 통신병 의무병 통역병과 함께 2개 분대 정도가 한 조가 되어 나갔다. 반닌, 반쟈 마음을 돌면서 쌀도 나누어 주고, 치료도 해주었다. 주민들은 우리들만 보면 마을 입구까지 쫓아나와 손뼉을 치고 어린애들은 더욱 높이 깡충깡충 뛰었다. 어느 마을을 가나 여인네들과 어린애, 노인들뿐이었다. 이곳에선 16세 정도만 되면 남자들은 모두 징발되어 월남군 아니면 베트콩으로 넘어간다. 일단 끌려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내가 집집마다 돌면서 차례로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치료받던 주민이 베트콩으로 돌변하여 총질하기도 한다. 그래서 의무병들은 적십자 마크의 흰 까운 속에는 비상용 권총을 숨겨 다닌다. 지방 게릴라들이 기습하는 수도 있어서 늘 긴장과 불안을 무전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고 다녀야 했다. 이 마을에서 우핑챠오(武平橋)를 처음 만났다. 그미는 사이공 대학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반닌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 언니는 프랑스 애도 낳고, 깜둥이 애도 낳았어요. 우리 동네엔 일본 애도 있어요. 나는 미국 애랑 한국 애랑 낳을 거예요. 우리는 거창한 이념보다, 이론보다 당장 먹고 사는 현실이 더 절실해요. 한 줌의 쌀, 한 컵의 물이 더 시급합니다. 명분 같은 거, 그건 뜬 구름이에요. 허무맹랑한 구름, 끝없는 이상이며, 끝없는 살육일 뿐이에요.”      암자 절에도 쌀을 갖다 주었다. 거기엔 30대의 싱싱한 여승과 몇 명의 보살들이 절을 지키고 있었다. 이현길 상병은 의식적으로 더 많은 일용품을 몰래 갖다 주었다. 어느 여름날 연득없이 둘은 붙었다. 병장 이현길과 주지 여승은 부처님이 지긋이 내려다보는 법당에서 하오의 정사를 벌인 것이다. 홀랑 벗은 맨 몸으로 열대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육체를 불태웠다. 아무도 몰랐다. 월남도 월맹도 미국도 몰랐다. 소대원들도 전혀 눈치를 못 챘다. 방문을 꼭꼭 닫은 여름날, 대낮에 부처님만 땀을 뻘뻘 흘리며 관전했을 뿐이다.      편지는 계속 되었다.      “이현길 따이한 병사님! 요즘 당신 부대에 비상이 계속되는지 통 나타나지 않는군요. 보고 싶습니다. 당신만 좋다면 나는 이곳을 탈출할 수도 있습니다. 멀리 우리들만 살 수 있는 외국으로 신혼여행 가는 거지요.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국경선을 넘어가는 비밀 루트도 알고 있어요. 이 편지 받는 대로 회답주세요. 좋은 회신 기다립니다. ”      지난 9월3일의 월남 정-부통령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월남 전역은 북쪽에서 내려온 월맹 정규군을 기간으로 지역 베트콩과 지방 게릴라들이 극렬한 파괴작전을 벌였다. 중부 캄보디아 국경선 등 후치밍 비밀 통로로 잠입한 하노이 요원들은 전투에 아주 노련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련한들 유엔군의 충분한 화력과 잘 훈련된 병사 그리고 과학적인 전략에는 월맹군도 오래 가지 못했다. 백마 9사단장 박현식 소장은 닌호아 책임전술 지역에서 ‘아름다운 매화1호 작전’으로 적들을 간단하게 격퇴시켰다. 그의 탁월한 전술에 채명신 사령관이 웨스트 모얼랜드 미 사령관을 대동하여 헬기로 작전현장을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그 정-부통령 선거 이후, 산 속으로 달아났던 베트콩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10월 초부터 재공격해 왔다. 10월22일에는 다시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되기 때문에 주민들을 혼란시키기 위함이다. ‘매화 1호’ 작전으로 심각한 패배를 당한 그들은 더욱 잔인해졌다. 마을을 불 지르고 주민들을 함부로 공개 학살했다. 한국군이나 미군 등 유엔군들에 협조했다는 의심만 가면 그 일가족과 그 마을은 잿더미가 되곤 했다. 그래서 박현식 장군은 다시 ‘아름다운 매화 2호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인사계 할아버지는 군복만 벗으면 시골 청도(靑道) 소장수 같이 텁텁하다. 자기 아들뻘 되는 뚱보 중대장에게 늘 꼿꼿한 차렷! 자세로 엄정하다. 이번 ‘매화 2호’ 작전에 투입되는 연대 의무병들을 막사 앞에 세워놓고 중대장에게 경례엣! 시켰다.      29연대는 백마 사단본부를 호위하는 임무가 있어서 근처 혼 헤오 산에 은둔지를 둔 월맹군 지역 사령부에서는 우리 연대가 늘 표적이 되어 있었다. 또 하나의 임무는 사이공에서 하노이로 이어지는 1번 도로와 주요 병참 보급로인 21번 도로를 방어하는 것이어서 지방 게릴라들과도 자주 충돌한다.      “야, 성혜운 병장! 4중대 본부로 즉시 귀대하라우, 내 말 들려엇! 내가 보낸 연대 앰불런스가 그곳에 곧 도착할꺼야, 알았어? 알았으면 대답해야 할 꺼 아냐? 이 고집불통을… 그저어!”      10월5일부터 시작된 D 데이 이틀이 지났을까, 혼헤오 산에서 전투 중 나는 할아버지 인사계장의 무전기 호출을 받았다. 인근 제10중대 홍 하사 부대에서 전사자가가 두 명이나 발생했다. 민사심리전에 나갔다가 지방 게릴라에게 당한 것이다. 게다가 이번 작전이 쉽게 끝나지 않고 장기전으로 이어질 예상이라 본대 호위가 문제였다. 본대로 돌아가 ‘부대 잔류병’으로 중대를 방어하라는 명령이었다. 각 중대마다 일정한 잔류병을 차출하여 베트콩 기습에 대비시키는 것이다.      결국 인사계장의 예상대로 4중대가 기습을 당했다.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미군 헨리(Henry)포대의 105미리 포탄도 적들을 향해 벌떼처럼 날아갔다. 인사계의 예상이 아니라 칸 호아(Kanh Hoa) 성 정부의 첩보였다. 사단 상황실에서는 혼 헤오 산에서 지휘 중인 홍상운 29연대장을 긴급히 호출했다. 그러나 전 화력을 동원해서 3중 포위로 기습한 베트콩들의 보복작전에 우리 4중대는 그대로 앉아서 역습을 당했다. 내가 쓰러지던 날, 애잔한 가을 햇볕도 지금같이 따뜻했다. 정글 속을 뒹굴며 크고 작은 작전에 휩싸여 다녔지만 그때 같은 참패는 드물었다.      우리들 4중대 잔류병 몇 명은 그 여승의 편지를 다시 꺼내어 읽었다. 그때였다. 푸르륵 꽝 꽝! 엎드려! 니기미, 드르륵! 식당 세면 바닥에 갖다 붙인 귀에서 예사 총소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일순 뚝 그쳤다. 뭐야! 나와 몇 명은 식당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의무실로 내려가는 순간, 아이쿠! 형님! 외곽 보초에 나갔던 강성우 상병이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감싸 쥐고 올라오다가 나를 보자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손가락 사이로 번지는 핏물이 마악 사라져 가는 황혼 빛에 한 송이 장미꽃으로 반사되었다.      뛰어가 그를 일으키려는 순간, 퍽! 돌멩이 같은 게 날카롭게 머리에 꽂히는 충격을 받았다. 뺑 돌면서 넘어졌다. 아! 하필이면 머리를 맞았을까? 결국 이렇게 죽어가는 것일까? 정신을 잃었다.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데… 챠오를 만나야지, 세라도 만나야지 그리고 일용직 목수인 아버지 얼굴도 마지막으로 보아야, 지금 죽으면 안 되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본능적으로 곁의 칼빈 소총을 잡고 일어서려는 다시 몸이 팽 돌아 쓰러졌다. 몸의 평형 감각이 탈감 되었다. 두 팔로 땅을 강하게 짚었다.      엎어진 등 위로 누군가 수 없는 발자국이 떨어졌다. 눈을 떴다. 핏물이 온 얼굴에 엉겨 붙어서 잘 떠지지 않았다. 불그스름하게 막사 외등이 비쳐 드는 연병장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와와! 아프리카 식인종 토인들이 백인을 잡아 놓고 춤 추는 것마냥 베트콩들이 종횡무진으로 날뛰었다. 새까맣게 휩쓸었다. 중대본부, 식당, 의무실은 이미 화염 속에 싸여 있고 보급창, 탄약고 등에선 베트콩들이 새까맣게 달려들어 약탈해 내고 있었다. 미 헨리 포대도 서서히 주저 앉았다. 아니, 미군 헨리 포대원들은 이미 줄행랑을 친 뒤였다. 미군들은 엿차! 하면 무조건 튀는 게 일이다. 따이한은 붙었다 하면 죽기 아니면 뻗기인데 그들은 작전상 후퇴라는 명분으로 우선 도망가고 본다.      이제 내 나이 24살, 칸나 같은 열정의 꽃 같은 청춘이다. 나는 이렇게 맥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일까. 중대 전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처구니없이 기습을 당한 것이다. 나는 엎드린 채 조금씩 기었다. 가슴으로 미지근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관통 부위를 더듬었다. 광대뼈 밑부분 부분에 구멍이 난 것 같다. 갑자기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생살이 찢겨 나간 아픔이다. 어느 녀석의 총알인지 각도가 위로 약간만 올라갔다면 나는 두부 관통으로 즉사했을 것이다. 상황실 샌드 백 모래 방어벽까지 겨우 기었다. 벽에 바싹 붙어서 누웠다. 지혈부터 했다. 웃옷을 찢어서 상처 부위를 질끈 조여 매었다.      그때 뜬금없이 박격포탄이 우박으로 쏟아졌다. 연대본부 51포대의 엄호포격일 것이다. 어네스트죤 불기둥이 하늘을 가르며 까마귀 떼마냥 날아와서 떨어졌다. 졸지에 연병장 곳곳이 곰보가 되었다. 베트콩들은 의외의 집중 강타에 갈팡질팡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다시 혼수 상태로 빠져들게 했다. 죽으면 안 되는데 출혈이 심하다. 그날 장창호 대대장과 티격태격하던 안근호 중대장은 방어 잔류병 지휘 담당으로 나와 같이 산에서 끌려 내려온 것이다. 그러다가 얼러 방망이로 당한 것이다. 안 대위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야, 내가 살아서 연대 상황실에 들어가면 싸악 몰살시키고 말 꺼야! 느기미! 베트콩이 2백 여명이나 집결하도록 CID 정보처고, 사단 수색대고 다들 뭘 했냐 말이야. 벌건 대낮에 베트콩들의 야포 이동도 못 보았느냐 말이야, 느기미! 들려엇! 우리 4중대가 쑥밭이 되었단 말이야, 우리는 전원 옥쇄야, 옥쇄! 알아들엇! 내 들어가면 다 때려죽여 버릴 거야….”      무전기 저쪽은 왕왕대는 기계음만 반복되었다. 안 대위는 연대 상황실에 대고 울부짖었다.      “야앗! 대포를 있는 대로 동원해서 즉시 폭격을 가하라구. 상황은 글렀어. 우린 이미 살기 글렀으니까. 이왕 죽어 가는 몸, 니기미 베트콩들 하고 같이 어깨동무 죽겠다구, 즉시 때렷! 즉시, 즉시, 베트콩들이 한 놈이라도 더 도망치기 전에 즉시 갈기라구, 느기미.“      안 대위는 잔류 중대원과 전원 함께 옥사하여 죽기로 작정했다. 이미 완전 포위되어 어쩔 수 없었다. 헬기로 4중대 현장에 급거 출동한 홍상운 연대장, 박현식 사단장도 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즉시 때릴 순 없었다. 아군 포로 아군을 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무차별, 40여 명의 부하들을 몰살시킬 수 있을 것인가? 비극이다. 이미 쑥밭이 돼 있는 베트콩 수중에선 또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파이어! 결국 박 소장은 피눈물을 떨구며 사격개시! 명령을 내렸고, 끝까지 반대하던 홍 대령은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나중에 들은 소문이다.   5        눈을 떠보니 허연 벽이었다. 머리를 흔들었다. 사변 벽이 허옇게 다가왔다. 나트랑 미군 야전병원이었다. 뒷골이 멍멍해온다. 다행히 헨리 포대의 윌리암 중위가 쓰러진 나를 발견하여 급거 후송 헬기에 태워 보냈기에 망정이니 엿차! 하면 나도 갔다. 윌리암과는 평소에도 친했다. 내가 그에게 태권도 도산형과 유도 낙법도 가르쳐 주었고 그는 나에게 권투를 가르쳐 주었다.      그날 우상호 상병도 갔다. 부상당한 강성우는 대구 동촌 비행장으로 야밤에 실려갔다. 그는 평소에는 시체 운반 책임자였다. 작전지역에서 전사자가 생기면 나트랑 미군 화장터까지 냉동 앰불런스로 호송하는 것이다. 그들의 웃음 소리만 남았다. 비상용으로 위장해 놓은 지하 대피소로 피신한 일부만 살았다. 안근호 중대장은 심한 화상으로 중태란다. 연대 51 지원포가 조금만 늦게 떨어졌더라면 나도 우 상병 일행과 함께 하늘나라로 동행했을 것이다. 이튿날 확인된 전과 보고는 의외였다. 우리 부대원과 미군 헨리 포대원 포함 3십여명이 전사 또는 부상당해 나갔고, 베트콩 쪽은 2개 중대 병력 약 140여명이 걸레가 되어 나갔다.      한국군 51 포대의 퇴로차단 포격에 미처 달아나지 못한 베트콩들은 그대로 에프 킬러를 맞은 셈이다. 잔인하고 징그러운 함몰이다. 안 대위의 전략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미군 일간지 ‘성조지’(星條紙) 첫 표지에선 ‘즉시 때려엇!’ 이라는 영어자막과 함께 안근호 중대장의 얼굴이 표지전면에 확대된 울부짖음으로 보도되었다. 그를 일약 아름다운 매화 2호 작전 ‘월남전영웅’으로 추켜세웠다. 베트콩들과 같이 옥쇄하겠다는 각오로 안 대위와 함께 마지막까지 싸운 부대원들에겐 전부 일계급 특진과 일부는 훈장까지 추서되었다.      나는 나트랑 미군 야전병원을 거쳐 다시 필리핀 수빅만 클라크 병원으로 급송됐다. 분초를 다투는 위급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 베트콩의 검정 콩알이 내 오른쪽 볼을 뚫고 한 바퀴 돌아 코끝에서 멎었다. 그러니까 귓길(耳道)과 콧구멍(鼻道)이 일직선으로 터널을 뚫은 셈이다. 가을 우기로 교차하는 1967년 10월5일부터 약 20여일 간에 걸친 ‘아름다운 매화 2호 작전’ 은 이렇게 마감되었다. 이 작전은 나중에 미 국방성의 세계전사에도 올라가 있으며, 미 육사 전투교재에도 전 과정이 사진과 함께 채택되었다.      클라크 휴게실의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는 ABC 방송 카메라가 지구 곳곳의 현장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 반대와 전국 대학생들의 데모행렬, 미국 워싱톤에서는 킹 목사의 암살과 전국의 흑백분규, 중공 베이징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과 전국 홍위병들의 난동 그리고 아프리카 비아프라의 집단학살과 아사(饑死) 문제 크게 보도되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파리 어느 고급식당에서는 아프리카 빈민 식량지원을 위한 유엔 각국대표의 요리가 총천연색으로 비쳐졌다. 그리고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 열풍과 북한의 남파 간첩 김신조의 124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루트도 보여주었다. 재미있다. 미국 죤슨 대통령의 하노이 북폭 확대결정과 월남군 고위장성들의 대형부정 사건도 폭로되었다. 아마 그 속에는 챠오의 고모부와 연계된 검은 라인도 올라가 있을 것이다.      거의 두 달 동안 필리핀 수빅만에서 어정거렸다. 미군병원 서비스가 한국 A급 조선호텔 대우였다. 간호장교 두어 명이 달려들었다. 홀랑 벗겨서 목욕을 시켜 주기도 했다. 손바닥에 비누를 흠뻑 묻혀서 갓난애 목욕시키듯이 겨드랑이고 불알 밑을 싹싹 씻겨 주었다. 그미들은 상이군인들의 시커먼 물건도 장난감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손가락 끝으로 톡톡 치며 야아, 제법 큰데에? 깔깔 거렸다. 그때 염치없이 발기된 나의 대포에서 허연 물이 터지려는 것을 참느라고 혼났다.      필리핀에서 퇴원하는 날, 나와 몇 명의 상이군인들은 서울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집을 부려서 다시 닌호아로 돌아왔다. 챠오의 곁으로 온 것이다. 폭탄과 포연 속을 뛰어다니지 않으면 뭔가 폭발할 것만 같다. 콱! 뚫어지지 못한 많은 것들이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세라 때문도 챠오 때문도 아니다. 누구 때문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또 전혀 그들 때문인 것도 같다. 모르겠다. 악몽들이 이마를 다시 어지럽힌다.      세라와 나는 이따금 소백산 도솔암 우리 또래의 젊은 스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 처음과 끝은 같은 겁니다. 논어에서는 본말(本末)이라고도 하지요, 처음도 끝이 아니고 끝도 끝이 아니랍니다. 부처 이전에도 우주는 있었고, 부처 이후에도 우주는 그대로 생멸(生滅)을 반복할 뿐입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변하지 않는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있습니까? 성혜운(星慧雲) 씨,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있어요? 없습니다. 우주가 공즉색(空卽色)이고 곧 색즉공입니다. 유는 무이고 무는 유이지요.. 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은 분명 있지요. 빛이 사물에 닿을 때 비로소 색깔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지요. 모든 고뇌는 사소한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욕망은 한이 없고, 한없는 것은 절망입니다.      스님의 투명한 눈동자에 빨려 들어 세라는 불륜의 업보(業報)에 몸을 떨었고, 나는 마네의 인상파 그림 ‘풀밭 위의 점심’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동일 물체도 색깔이 변화된다는 인상주의의 하나였다.      ─ 나는 세라를 겁탈했습니다. 내가 영원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강간했습니다. 밤이면 나는 그미를 강간합니다. 내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그미를 사랑합니다.      천주님! 우리는 세라가 이따금 나가는 동인천 성당에도 갔다. 메리놀 신부에게 1주일간이나 고해성사를 했다. 세라가 4H 클럽, 나의 서클 선배와 나 몰래 한때 동거생활 한 것도 자백했다. 소죄, 대죄를 다 아뢰고, 벌로 받은 천주경을 백 번 외웠지만 우리의 죄는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아침이면 세라와의 몽정 때문에 내 팬티가 끈적하게 젖어 있곤 했다. 우리의 죄악을 다소나마 씻겨주는 것은 바다밖에 없었다. 우리는 밤이면 별빛이 묻어나는 인천 송도 밤바다와 고깃배의 어항불을 지켜 보았고, 낮이면 햇빛이 닳아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침묵과 응시가 전부인 끊어진 바다 공간의 만남만을 부질없이 반추했다.      송도 해변과 마산 합포바다 등 동서남북으로 헤매어 다녔지만 어느 한 곳도 우리 마음을 묶어둘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어디에도 사람들의 공격적인 칼날은 스며 있었고 색안경의 굴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세라를 잊기 위해 노력할수록 불면과 신경쇠약의 거역만이 형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 나무사박다니, 옴 마니 반메 흠, 가나다라마바사아… 으르릉 꽝,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무슨 장군, 앗사야로 꽝! 으핫핫 귀신아 잇! 써억 썩 물러가거라아 잇!      미아리 고개 처녀 무당의 손바닥에서 푸른 대나무 가지가 신기하게 떨었다. 칼춤 추던 박수무당의 길고 넙적한 칼이 내 목을 날캉 눌렀다. 으아악!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나곤 했다. 세라의 어머니는 약수동 터키 대사관 골목길 3층 슬라브 프랑스식 건물에 어울리지 않게 자주 굿을 했다. 세라의 눈에 귀신이 씌인 것이다. 내가 귀신이다. 내가 파월을 자원한 것을 알고 챠오는 약을 먹었다. 학교 앞 여관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주인이 일찍 발견하여 병원에 실려갔기 망정이다.      그미의 왕고집으로 어쩌면 우리가 멀리 달아나 동거할 수도 있었지만 세라 하나만을 위해서 평생을 과부로 수절해 온 그미의 어머니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어머니의 맺힌 한은 죽을 때에도 옷고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 헤어져 버려요. 뭐예요. 이러다가 심장쇠약에 걸리겠어요. 우리가 대체 무슨 죄를 진 거죠. 나는 정략결혼은 싫어요. 당신도 싫어욧! 왜 날 데리고 도망을 못 가는 거죠. 무슨 남자가 그렇게 비겁해요. 세상도 싫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헤어지는 연습을 했다. 세라의 할아버지가 어려서부터 이웃에 사는 외교관 집 막내아들과 예약결혼해 놓았다. 세라가 일곱 살 때였다. 어른들의 언약은 번복할 수 없는 약속으로 굳어져 갔다. 나중에 또 그 막내아들은 독일의 자유대학을 나와 유망한 청년 실업가로 귀국했다. 그래서 세라의 어머니는 그미를 더욱 굵은 쇠사슬로 묶어 버렸다. 그런 약혼녀를 홀리는 나는 분명 악귀일 것이다.      오늘은 정말 헤어지는 거예요. 암, 이틀만에 우리는 또 만났다. 오늘은 정말 헤어지는 거예요, 암……암 정말, 부질없는 이별 연습이다. 우리는 서로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이 땅을 뜨고 싶었다. 어떤 결과든 이제 연습을 끝내고 진짜 이별이 필요했다. 나는 월남 전쟁터를 지원했다. 목숨을 건 도박이다. 단순히 세라를 떠나기 위해서다.      나는 일어나서 어두운 해변을 다시 더듬었다. 어쨌든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우습다. 곧 귀국해야 하지만 한국에 간다고 뭐 뾰쪽한 게 없다. 세라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약수동 달동네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D 대학 학생과에서도 내 이름 세 글자가 아직도 악질 데모 주동자 명단에서 삭제되지 않아 복교가 되지 않는다. 귀국할 이유가 없다. 김철남 병장 같이 나도 이곳에서 현지 제대하여 챠오랑 동거생활이나 해볼까? 모든 것을 잊고 챠오와 있고 싶다. 챠오만 그냥 옆에 있어 준다면 족하다. 그 외의 모든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미에게서 풍기는 찌릉내는 인간의 냄새와 진한 사랑 냄새다. 세라에게서 끝내 태우지 못한 불꽃을 챠오에게서 확실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세 번째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귀창이 날아간 중상 때문에 이번 ‘잔류연장’ 신청서도 거의 불가능할 거라는 예감이 콧 속의 통증보다 더 아프게 저려 온다.   6        그날은 밤늦도록 반닌 반쟈 마을을 순례하고 있었다. 위험했지만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여름 방학으로 사이공에서 고향으로 내려온 챠오는 유창한 영어로 환자들의 병력을 나에게 통역해 주었다. 장염과 심한 부종을 앓고 있는 챠오의 어머니를 치료하고 있을 때, 새까만 옥구슬 같은 두 개의 눈동자로 나에게 당돌하게 요구했다. 월남 땅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된 신병인 나로서 조금 당황했다.      “우리 어머니 치료는 고맙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어떤 경우이든 총질하지 마세요.”      챠오는 황폐되어 가는 마을에 그미의 모든 것을 던지기로 그때쯤 작정한 것 같았다. 촐롱 아지트의 응 남 비옛을 버렸다. 사이공을 버렸다. 유엔군도 월남군도 월맹군도 그리고 애인도 버린 것이다. 오로지 고향 마을 재건과 마을 주민들을 위해 헌신했다. 미군이나 한국군의 실수가 발생하면 가차없이 지적했다. 마을 어디가 폭격을 당하거나 주민 누가 다쳤다 하면 여차 없이 그미가 마을 사람들을 끌고 나와 부대 앞에서 배상 시위를 벌였다.      그러면서도 주민들 누구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면 근처 주둔군 버터 냄새, 김치 냄새, 유엔군들을 초청하여 흰둥이, 껌둥이, 노란둥이를 불러 모았다. 월남 멥쌀 밥 위에 생돼지 고기를 삭힌 뻘건 물 같은 농탕을 손수 소스로 쳐주기도 했다. 챠오는 작은 악마였다. 우습다. 우리는 못 이기는 척 그미가 요구하는 배상금을 몇 배 이상으로 물어주곤 했다.      “비옛의 아버지를 맡겼던 난민 수용소는 아우성이더군요. 살벌해요. 우린 모두는 난파선 같은 배를 타고 있어요. 이따금 나는 그런 악몽을 꿈 꾸어요. 당신과 나, 나와 비옛, 그리고 그 아버지와 홀덴 콧수염 참모장까지도 우리 모두가 말이에요. 때때로 하나의 매듭일 뿐이에요. 이 월남 전체가 하나의 난민 수용소예요. 아니, 이 세상 자체가 난파선 아니에요? 여하튼 그런 건 하등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우리 사랑만 있다면 환경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미의 흰 아오자이가 바람에 날려서 파인애플 나뭇가지에서 나풀거렸다. 그미는 홀랑 벗었다. 수평선 끝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달려와 광휘롭게 터지는 적도의 햇살이 그미의 유방에서 시작하여 허리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우리는 서로를 깊이 들이 마셨다. 대민작전 지원 동안 챠오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서로가 어떤 이유로든 실연 당한 터이기도 하다.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저것 봐요! 하늘과 수평선이 맞닿아 일직선으로 달려 나갔군요. 무한의 평행선에서 일치가 된 거예요. 우린 그 직선 위의 한 점 구름쯤이겠지요. 끊임없이 생멸하는 구름, 그러나 의미 있는 구름이고 싶어요.”      진통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모가지만 잘려서 붕붕 떠 다니는 상실감과 이질감이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사물들이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온다. 머릴 흔들었다. 이런 무방비 야외 상태에서는 선뜻 베트콩이라도 나타난다면 나는 그대로 생포될 것이다. 주둥이와 발톱이 잘린 독수리 같은 나를 그들은 그대로 그들의 정글로 끌고 가든지 귀 한쪽만 잘라 가도 1만 피아스타(1백달러)는 족히 받을 것이다. 내 볼의 흉터를 더듬는 챠오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미의 손끝이 긴장으로 끈적였다. 유두(乳頭)를 앞이빨로 잘근거리던 나는 얼굴을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밤 늦게 귀가한 노동자 아버지가 나에게 몰래 팔 베개를 해주던 깊은 평화와 안식을 준다.      휴양지 나트랑 해변을 돌다가 내가 언제 다시 돌아와 이렇게 앉아 옛일을 회상하고 있었던 건가, 엉덩이가 축축하다. 담요가 솜마냥 물에 젖어 있다. 챠오의 지적과 같이 역시 나는 아직도 자폐증에 갇혀 있는 것일까? 날이 새려면 아직도 멀었다. 총류탄과 조명탄의 파열 빛이 남산의 폭죽마냥 아름답다. 혼헤오 산 ‘박쥐 16호 작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어떤 미친 놈이 예술의 극치를 전쟁 판이라고 했던가, 느기미. 밤바람이 춥다. 나는 담요를 질질 끌면서 막사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튿날 나는 원대 복귀했다. 며칠 후면 나는 귀국선에 오른다. 인사계 할아범은 결국 나의 현지제대를 위한 ‘잔류신청서’를 사단에 아예 올리지 않은 것이다. 또 올라가 보았자 한쪽 귀창이 나간 상이병사인 나를 이곳에 남겨주지 않을 게 뻔하다. 괜히 한번 생떼를 써 본 것이다. 만삭 된 배를 더욱 내밀며 챠오는 울먹였다. 초승달이 대나무 가지 새로 부서지는 부대 앞에서 그미는 기약 없는 다짐을 했다.      “나는 살고 싶어요. 지독하게 살고 싶습니다. 아직은 우리민족 월남인 쿠엔 카오 키 수상이 있고, 내 고향 반닌의 하늘이 있고, 야자수 우거진 마을이 있지 않아요? 그리고 내 어머니, 병들어 누워 있지만 사랑하는 내 어머니가 있어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는 내 이웃과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무엇보다 다시 돌아올 당신을 기다리며 견딜 수 있어요. 아마 3년 아니 30년 그때쯤 우리나라도 전쟁이 끝나고 독립되어 있을 거예요.” 내가 대답했다. “우핑챠오, 반드시 그렇게 될 꺼예요.” 그러나 그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세계와 평화와 우방의 민주주의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으셨던 용감한 한국군 여러분에게 본인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찬사를 주고 싶습니다. 그 동안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최고의 극한 상황을 여러분들은 극복해 주었습니다.”      월남 쿠엔 카오키 수상, 유엔군 웨스트 모얼랜드 사령관, 한국군 채명신 사령관, 백마부대 박현식 사단장 등의 귀국장병 전송행사가 열사(熱砂)의 나트랑 해변에 수 백 명 얼룩무늬 군복으로 물결치게 했다. 처음에 같은 배를 타고 왔던 해병대 청룡 부대원들도 보인다. 죽거나 다친 놈들은 비행기로 귀국하고, 목숨이 붙어 있는 놈들만 이렇게 모래밭에 서 있는 것이다. 매년 약 5만 명이 이런 식으로 교체된다. 이 단순한 숫자 속에는 전사자와 부상자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들에게는 아무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가? 귀국한다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았다. 비사앙! 누가 지금이라도 소리치면 또 긴급 출동해야만 될 것 같은 생각뿐이었다. A 까뮤 ‘이방인’의 주인공이 느끼던 땡볕 같이 그냥 햇빛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뜬금없이 ‘아리랑’이 흘러 퍼졌다. 건성 떠들고 흥청대던 장내가 일순 숙연해졌다. 아아, 이역 만리 남지나 해변에서 듣는 우리의 오랜 민요! 까맣게 잊었던 영혼 저 밑바닥에서 건져 올리는 가락이다. 곁에 쓰러져 가는 전우를 보고도 메말랐던 눈물이 오랜만에 봇물 터졌다. 뜨겁고 굵은 액체가 볼의 흉터를 타고 내렸다. 전쟁터 시체 주위를 서성거렸던 숱한 그림자들 박병헌 상병, 배태룡 하사, 최정웅 병장 그리고 중화상으로 실려간 안근호 대위, 아 그리고 처형된 응 남 비옛 !      또 그리고 백 일병은 뒷골을 다쳐서 백치가 되었다. 자기의 이름도 모르고, ‘과거’를 전혀 몰랐다. 수도육군병원에 부랴부랴 달려간 부모님의 얼굴도 모른다고 했단다. 백치! 망각! 사법고시 준비를 하던 그의 집념과 법조문은 백치같이 웃는 그의 하얀 이빨 새로 날아가 버렸다. 우리 모두의 야망이, 젊음이, 삶이 망각되고, 생채기가 났다. 장내는 참아 내는 울음 소리와 누구에겐지 모를 분노가 질척거렸다. 모래 위에는 또 다른 절망의 바다가 출렁거렸다.      약 1년 전 우리를 태우고 맨 처음 이곳 전쟁터로 데리고 온 군함 쟈이거 호가 다시 ‘회귀선’(回歸船)이 되어 다가왔다. 뱃머리를 돌려 나트랑 외해로 나왔다. 유한 같은 무한의 수평선, 우리는 다시 부산 3부두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점으로 다시 회귀한다. 나는 반닌 마을안쪽 바다를 일부러 보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나는 당신의 한국애만 낳을 거예요. 당신의 아기만… 그리고 반닌 수용소에서 비옛의 아버지를 모셔올 꺼예요. 셋이서 같이 살아갈 겁니다. 아마 언젠가 당신도 다시 돌아오겠지요? 뒤돌아 보지 마세요.”      승선하는 사다리 쪽으로 챠오는 내 등을 자꾸 밀었다. 강보에 싸인 갓난애가 더욱 크게 울었다. 그 보자기 강보는 4중대 전우들이 월남아기 출생기념으로 자기들의 담요 끄트머리를 잘라 모자이크로 만들어 준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 소리치고 있다. 위로 유난히 벌어진 큰 귓바퀴가 분명 내 귀와 같다. 따이한 튀기다. 아기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 모든 것이 파괴되어 사라져 가는 전쟁터 잿더미 속에서 오로지 하나의 생명만이 소리 높이 울고 있었다. 챠오 뒤에 엉거주춤 서 있던 그미의 어머니 아니, 나의 장모는 결국 주저앉아 손으로 땅을 쳐댔다. 나는 아기의 머리도 한번 못 만졌다. 아니, 만질 수 없었다.      “이제 깨달았어요. 내가 사랑한 것은 그이의 껍데기였다는 것을… 그러나 그 진짜 알맹이를 당신이 내 속에서 찾아 주웠어요… 평생의 보물이에요. 그 동안 남의 나라 땅에 와서 고생이 많았어요. 한국에 가면 여기 볼의 상처를 다시 잘 치료해 보세요.”      그미는 웃어 보였다. 환하게 웃어 보이려고 애썼다. 나트랑 해변, 닌호아 전쟁터! 혼헤오 산, 혼 바 산 그리고 반닌 마을을 뒤로 두고 떠난다. 나는 얼굴의 흉터를 아니 심장의 흉터를 안고 원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 다음의 원점은 어디일까. 아니 내 생의 영원한 귀착점은 어디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월남도 월맹도 미군도 나도 모른다. 사람 옷을 입은 원숭이 신(神)은 알까? 전혀 한 여인을 잊기 위해 뛰어든 전쟁터에서 나는 또 한 여인을 잃어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간다. 나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나트랑 파도 소리도 들리고, 챠오의 겨드랑 냄새 같은 바다냄새도 났다. 어린애 울음 소리가 더욱 크게크게 들렸다.   - 끝 -
10    [중편소설] 보은의 끝 / 노인기 댓글:  조회:296  추천:0  2022-10-14
[중편소설] 보은의 끝   노인기      풍성한 버드나무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서 있다. 오후 산들바람은 갈대와 나뭇잎으로 하여금 부드러운 소리를 발하게 하고 그리고 그 소리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감미롭게 들렸다. 하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코발트블루 빛깔로 드리워져 있었고, 하얀 구름은 포메라니안의 귀 같은 모양들을 하고 있었다.      잔디가 짙게 깔린 넓은 마당에는 유독 큰 너도밤나무와 버드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데 버드나무 아래 자작나무로 만든 의자가 마치 밥 로스의 풍경화를 옮겨 놓은 듯 그림 같이 놓여있었다. 지금은 나무와 함께 의자도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리고 있다.      어머니는 의자에 앉을 때 항상 얇은 담요를 챙겨서 목 위까지 올려 덮고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오후를 즐길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엄마! 지금 시간이 이렇게 됐어요.” 하고 알려주어야만 겨우 일어난다. 그러면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하고 분주히 챙겨서 서둘러 들어가신다.      엄마가 의자를 이용하는 경우는 딱 두 경우다. 휴식할 때와 고민거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이용하지 않으신다. 이제는 앉은 자세만 봐도 지금 무슨 일이 있어서 고심하고 있는지, 아니면 휴식을 취하는 중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고민할 때의 자세와 휴식하는 자세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고민이 있을 때는 옆으로 돌아 눕듯이 의자에서 다리를 겹친 다음 자세를 옆으로 돌아 앉아있고, 휴식할 때는 몸을 반듯하게 하여 팔걸이에 팔을 올려놓고는 나름 편안한 자세로 먼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다. 기분이 좋을 때도 혹 근심이 있을 때도 담요는 항상 챙긴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과 내가 몇 살 때인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는데 아마 동생 찰스는 네 살 아니면 다섯 살 겨울로 기억되고 나는 열 살이 채 못된 것 같다. 아니, 열 살 생일 무렵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왜냐하면 생일 케이크에 초를 열 개를 꽂고 불을 한 번에 끄지 못하자 동생이 두 개 정도는 불어주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날은 유독 날씨가 화창했다. 그런 날은 일 년 중 손꼽힐 정도로 좋았다. 그런데 엄마는 의자에서 돌아앉은 채 도무지 자세를 바로 하지 않으셨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 나름 판단하고 중얼거렸다.      다른 날처럼 시간을 알려 주려고 다가갔지만 엄마하고 부를 수가 없었다. 고정된 시선은 미동조차 없었고 무슨 일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표정과 모습은 그때까지만 해도 처음 보았다. 결국, 말을 붙이지 못하고 뒷걸음질 쳐 돌아서 왔다.      그날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의 손길이 여늬 때와는 사뭇 달랐다. 힘겨워 보였고 얼굴은 어디가 많이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에게 조용히 물었다.      “엄마 어디 아파요?”      “아, 아니. 아픈 곳 없어.”      “그럼 왜 돌아앉아 그렇게 오래 있어요? 그리고 저녁도 먹지 않고......”      “점심을 늦게 먹어서 생각이 없었어. 그래서 안 먹은 거야.”      엄마는 다음 날 병원에 다녀왔다. 물론 가족들에게는 병원 다녀온 사실을 말하지 않고 숨겼다. 표정이 많이 어두웠는데 애써 감추려 하는 것이 력력했다. 그리고 며칠 뒤, 엄마와 동생 찰스와 함께 바닷가 백사장으로 공놀이를 갔다. 모래 위를 맨발로 달렸다. 햇살은 물결 위에서 빛나고 서로 공을 던지고 받으며 즐겁게 놀이를 하는데 얼마 못되어 엄마는 지치셨는지 먼저 언덕 위로 올라가셨다.      동생과 나는 바닷물이 물러간 뻘밭에서 조개를 잡으며 놀았다. 아니, 잡는다는 표현보다 땅을 파듯이 뻘을 파고 그 속에 숨어있는 조개를 캐고 놀았다. 물론 얼굴과 옷은 온통 뻘 투성이다. 언덕 위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엄마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앞으로 푹 꼬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공을 잡은 나는 너무 놀라 동생을 재촉하여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는 두 손을 어긋맞게 하여 가슴을 움켜쥐고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엄마~ 왜 그래? 어디가 아픈 거야?” 놀램과 두려움으로 다급하게 흔들어 보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 처음이었다. 부축하여 엠블런스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자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울며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동생을 겨우 진정시키고 밖에서 담당 의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누나, 엄마 많이 아파? 언제 와?” 찰스가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동생을 보자 눈물이 났다.      “병원에 왔으니 괜찮으실 거야.”      애써 동생 앞에서 태연한척했지만 그래도 겁이 났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울고 싶었다. 세 시간이나 지나도록 아무도 말을 걸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동생은 내게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수간호사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는 아무래도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을 알려주었고 쉴 곳을 안내해주겠다며 따라오라고 한다. 침대 여러 개가 놓여있는 입원실이었다.      “여기가 엄마 자리다. 수술받고 오실 때까지 조용히 하고 절대 떠들면 안돼. 알았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동생은 침대에 올라가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많이 놀라고 피곤했나 보다.      다섯 시간이 되도록 엄마가 오지 않자 걱정이 앞섰다. ‘엄마의 병세가 많이 위중해서일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평소 나름 운동도 열심히 하셨는데 괜찮을 거야.’ 하고 스스로 위안해 보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에선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생소한 병원에서의 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고 새벽 녘에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간호사가 곧 엄마가 온다며 급히 깨운다. 동생은 그때까지도 곤히 잠들어있었다. 서둘러 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얼떨결에 깬 동생은 잠시 멍하니 누나인 나를 올려다 보고는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      “아직 병원이야.”      “엄마는?”      “지금 오고 있어.”      “아직도 안 왔어?”      “응.”      잠시 후, 복도는 바퀴 달린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고요를 뚫고 점점 가까워지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선명해진다. 엄마는 환자복으로 입혀졌고, 코에는 산소호흡기 장치로 보이는 녹색의 가느다란 호스 두 개가 콧속으로 들어가 있고, 왼쪽 팔에는 링거 여러개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이런 모습은 생소하여 어린 마음에 말도 못 할 정도로 무섭고 떨렸다. 동생은 다짜고짜 울며 엄마 품에 안기려는 것을 간호사가 겨우 안고 달래서 떼어놓았다.      그날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해 보았다. 언제까지나 곁에 머무를 줄 알았던 엄마도 언젠가는 나와 동생을 남겨두고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슬펐다. 눈물이 났다.      엄마는 눈을 감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가만히 이마에 손을 올려 봐도 아는지 모르는지 기색이라곤 없었다. “엄마~”하고 처음으로 애처롭게 불러 보았다.      잠시 후, 간호사가 짙은 녹색 가운과 수술실 모자와 파란 마스크를 착용한 의사와 함께 왔다. 엄마를 수술한 의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이름을 대며 가족이냐고 묻는다. 많이 불안했다.      ‘네.’하고 대답이 나오지 않아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의사는 속에 형광등이 켜있는 네모진 아크릴판에 여러 장의 까만색 필름을 끼운다. 놀랍게도 학교에서 몇 번 본 것 같은 인체의 뼈의 형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엄마의 X-lay 사진이란다.”      심각한 것 같아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보이는 이쪽이 엄마의 왼쪽 어깨이고, 반대편이 오른쪽이란다. 좌우로 보이는 활모양의 12쌍으로 이루어진 뼈들은 사람의 갈비뼈로 피를 생성하고 외부의 충격에서 폐, 심장 가슴 부위의 장기들을 보호해주는 역할들을 하지. 등 뒤로 에스 자로 약간 굽어서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뼈가 척추란다.”      내가 아직 어린 학생임을 의식해서인지 의사는 비교적 자세하게 부연 설명까지 곁들였다.      “엄마는 어디가 아파요?” 내가 물었다.      “엄마의 아픈 부위는 바로 이 부위다.”      의사가 가리킨 곳은 거의 까만 부분으로 내 눈에는 뼈의 형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가 어디예요?”      “사람의 심장이란다.”      “........”      “엄마는 오래도록 심장의 기능이 좋지 않아 힘들어하셨지. 심장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멈추는 일이 없단다. 우리 몸 곳곳에 혈액을 공급해주는 장기로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그 어떤 장기보다 크단다. 심장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늘 조심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엄마는 이번에 운이 매우 좋았다.”      “그럼, 다음에 또 쓰러질 수도 있어요?”      “안타깝게도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다.”      “다음에 또 쓰러지면 어떡해요?”      막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지푸라기도 붙잡고 싶은 절박함을 처음 느꼈다. 이럴 때 아빠가 계셨으면 큰 힘이 되었을 텐데, 그리고 아빠라면 엄마의 병을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빠를 속으로 불러 보지만 대답이 없다. 엄마로 인해 아빠가 몹시 그립다. 하지만 아빠는 계시지 않는다. 어린 내가 지금 상황을 감당하기란 무척 힘들었다.      “현재로서는 이식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단다.”      이식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했다.      “그럼, 이식을 받으면 완치가 되나요?”      “그럼. 조건이 맞고 건강한 심장이라면 가능하지.”      “대기자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엄마에게도 기회가 주어질까요?”      의사는 잔뜩 희망을 기대하고 있는 나에게 결코 희망적인 말을 할 자신이 없었는지 난처한 표정으로 나의 물음을 대신했다.      “선생님, 이번에 수술을 받았으니까 잘 하면 회복될 수도 있잖아요? 엄마는 몸에 해로운 것은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어요.”      “엄마는 수술로 완치되기는 힘들단다.”      의사는 명확히 하기 위해서 마스크를 턱으로 끌어내리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술은 상당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이식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나 보다. 엄마 앞에도 수많은 대기자가 오늘도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리고 의사는 이번에는 다행히 운이 좋았다고 했지만 또다시 쓰러진다면 그때는....... 순간, 희망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의사라도 더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일까. 간호사에게 보통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시를 내리고는 황급히 사라진다. 나는 그동안 엄마의 아픔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 번도 아프다고 내색한 적이 없었으니까. 의사의 설명을 다 듣고는 병실로 돌아왔다. 엄마는 깨어서 동생과 함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엄마의 팔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아빠는 직업이 소방관이셨다. 청소년 때부터 소방관을 꿈꿔왔었고 그 꿈은 성인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어릴 때부터 체력이 또래 아이들보다 크고 민첩하기까지 하여 운동선수가 되기를 원하셨는데 특히 야구에 소질을 보여 장차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기를 기대하셨다. 처음에는 아빠도 메이저리그를 목표로 어릴 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운동했었다. 적어도 하이스쿨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 꿈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전교생이 단체로 극장에서 영화를 시청할 기회가 주어졌다. 화재(火災)를 다룬 대표적인 재난영화였다. 불조심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 백 마디 말보다 한편의 영상을 선택했나보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그 효과는 매우 컸다.      그날 영화를 관람하는 이는 학생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방관들이 소방제복을 입고 단체로 입장해 같이 시청했다. 신입 소방관들로 몇 주간의 교육과 훈련을 마친 다음 자신들의 삶을 다룬 영상을 시청하는 것은 소방 교육 마지막 시간에 포함되 있었다. 그날 소방관들의 자세는 묵념하듯 엄숙했고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학생들만 있을 때는 시끄럽고 산만했지만 점차 소방관 아저씨들의 진지한 태도에 감동을 받아서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도 숙연한 얼굴로 영화에 집중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작은 불씨, 설계도 대로 시공하지 않아서 결국 전선에 불이 붙었고, 그리고 불은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건물을 집어삼켰다.      비록 영상이지만 소방관들의 눈부신 활약과 희생정신은 청소년들에게 감동과 화재의 심각성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소방대원 모두가 주인공들이었고, 끝끝내 소방대원의 말을 듣지 않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살아나 올 수 없는 불꽃 가운데서 구조를 받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소방대원들의 희생이 따르긴 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과감하게 불 속을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영화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소방대원들을 인솔한 소방대장으로 보이는 분이 무대위로 올라와서 마이크를 잡고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다. 30년 베테랑이었다.      “학생들 영화 잘 봤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더 묻는다. 마지못해 앞줄의 몇몇 학생들과 여선생님 몇 분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너무 감동이 되어서 말이 잘 안 나오나 봅니다. 화면으로나마 우리 소방관들의 수고로움을 조금은 알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소방대장은 영화의 중요한 장면들을 상기시키며 베테랑답게 부연 설명을 이어가다가 어떤 특정한 장면을 떠올리고는 학생들에게 나 같으면 이때 어떻게 대처를 했을까, 하고 질문들을 던진다. 엄숙한 분위기는 금방 누그러지고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나름 진지하게 대답한다. 다행히 엉뚱한 대답으로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말들은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이 결국 재난으로 이어지고 조심할 부분을 조심하지 않으면 끔찍한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영상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깨우쳐주었다.      “학생 여러분들의 진지한 태도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실제로 화재현장은 조금 전 시청한 영상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절박하고 위험합니다. 화면에서도 순식간에 불이 번지듯이 나 한 사람 부주의로 또는 소방대원 같은 경우 나 한 사람 신속하지 못함으로 귀한 생명이 불 가운데 놓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소방 대장의 마지막 인사말에도 생명을 향한 투철한 희생정신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날 그 충격은 아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자신의 인생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심각한 물음이었고, 이 물음에 대해 자신에게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며칠 고민 끝에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메이저리그를 내려놓고 대신 고통 중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던지겠다고 뜻을 정했다. 이런 아들의 확고부동한 신념 앞에서 조부모님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힘든 소방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는 곧바로 소방관 직무를 시작했다.      시카고에서 첫 근무를 시작하였는데 그때 아빠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이글거리는 화염을 뚫고 위험한 곳은 언제나 본인이 앞장서고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현장은 동료를 앞세웠다. 해마다 최우수 소방관으로 선정되니 진급도 그만큼 빨랐다.      시카고에서의 생활이 5년 정도 되어갈 무렵, 한살 적은 엄마와 1년 3개월 정도 만난 다음 그해 가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가 거의 저물어 갈 무렵, 마치 새해 선물처럼 내가 태어났다. 아빠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동생 찰스가 태어났다. 그때는 아빠의 근무처가 뉴욕이었고, 시카고 소방서에서 10년을 근무한 다음 뉴욕 생활은 2년째 접어들었다. 미국에서 제일 큰 도시로 인구가 타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그래서였을까, 확실히 출동하는 횟수도 그만큼 많았다.      7살 크리스마스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아빠의 아침 출근 때, 나와 동생 찰스는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일어나 배웅했다. 엄마 품에 안겨 아직 잠이 덜깨인 듯 눈을 비비며 하품하는 찰스도 아빠가 두 손을 내밀자 얼른 아빠에게 건너갔고, 아빠가 얼굴을 돌려 볼을 가까이하니 침이 잔뜩 묻은 입을 갖다대고는 아빠의 거친 수염 때문인가 금방 엄마에게로 두 팔을 내민다. 그리고 아빠는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공주님, 아빠 올 때까지 엄마하고 동생 잘 데리고 놀아요.”하고 부탁한다.      그날 기쁨에 찬 아빠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귓가에 아른거린다. 몇 번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고 그때마다 엄마와 동생과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날 화재발생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다. 처음엔 큰불이 아니었다. 최초 신고자는 건물에서 약간의 타는 냄새와 연기 정도만 피어나고 불꽃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부하 대원들이 진화에 나섰다. 그런데 진화작업 도중 예기치 못한 곳으로 불이 옮겨 붙으면서 확산되었다. 현장에서 급히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해 SOS 긴급 출동이 내려졌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고 시뻘건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있었다. 화염과 유독가스로 인해 대원들은 진화하는데 여간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두 사람 구조되어 거의 다 빠져 나올 무렵, 2층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동료 소방관의 말을 듣고 아빠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장실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녀를 발견했다. 모녀는 욕조에 들어가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는 이미 연기를 많이 마신 상태로 거의 정신을 잃었다. 모성 본능을 따라 온몸으로 아이를 감싸 안고 떨어지는 불똥을 자신의 등으로 받치고 아이를 감싸 안고 있었다.      아이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먼저 엄마를 둘러메고 겨우 화염을 뚫고 나왔다.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동료들이 곧 건물이 무너질 것 같아 너무 위험하다고 만류한다. 그러나 자신의 딸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저 불길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딸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사람의 강한 만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빠는 다시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아이는 그대로 욕조의 물 속에 있었고, 급히 아이를 안고 돌아서는데 맹렬한 불에 콘크리트와 그 속의 철제와 골조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더미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건물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 그만 가열된 골조가 무게를 견디지 못해 그대로 아빠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끝까지 아이를 품 속에 안고 자신은 뜨겁게 가열된 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불에 달구어진 더미와 그 엄청난 무게에 의해 압사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품 속의 아이는 무사하여 엄마 품으로 돌아갔다.      그날 화재는 소방차에 의해 진압된 것이 아니라 전소로 끝이 났다. 장례는 엄숙히 거행되었고, 대통령도 뉴욕시장도 아빠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 일은 동생 찰스가 두 살 되던 해에 일어났다.      이 후, 엄마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일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병원치료가 지원되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어느 때부터인가 심장의 두근거림이 점점 심해지더니 가슴 가운데로 자주 손이 올라갔다. 결국,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육체까지 병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수술 후 7일이 지나자 식사량도 처음보다 많이 늘었고 움직임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8일째 되는 날, 담당의사는 퇴원해도 괜찮겠다고 오후 회진 때 알려주었다.      “이 같은 수술의 경우 두 주 정도 입원하여 환자의 동태를 충분히 살핀 다음 퇴원해야 되는데 다행히 환자분은 회복이 빠른 편이어서 사흘 정도 조기 퇴원하는 것입니다.”      2주 간격으로 내원하여 검사를 반드시 받을 것을 권하더니 아예 예약날짜와 시간을 그 자리에서 정했다. 퇴원해서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또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게 했다. 특히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당분간 병원에서 지정한 것으로 식단 관리를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다음 외래는 2주 후 오늘로 그러니까 목요일로 해야 되지만 학술회의가 잡혀있어서 그 다음 주 화요일로 정했다.      “2주를 넘겨서 조금 그렇긴 한데, 약 잘 챙겨 드시고 주의할 부분만 조심하시면 괜찮을 겁니다.”      괜찮을 거란 의사의 마지막 말은 마치 경쾌한 음악같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일 뿐 이식을 받지 않고는 결코 회복되지 못한다는 것은 엄마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퇴원하고 2주가 되어갈 무렵 그때까지 엄마는 잘 견뎌 주었다.      물론 동생 찰스도 엄마가 많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예전처럼 매달리거나 떼쓰고 투정 부리는 일은 많이 줄었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자신의 그런 행동들이 엄마를 힘들게 한다는 것쯤은 아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동생과 나는 엄마가 입원한 다음부터 많이 의젓한 느낌이 든다. 엄마가 쓰러지고 아무 말도 못하자 그 두려움과 놀람은 어린 마음에 가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일은 내게도 처음 경험해보는 일로 대단한 충격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오늘이 정확히 퇴원 후 2주가 되는 날이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중간검사를 받아야 하는 날인데 그런데 엄마의 표정이 아침부터 그리 밝지가 못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2주가 고비인 것 같다.      병원에 가기를 권했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오늘 하루를 지내보고 그래도 안 좋으면 병원에 가겠노라고 하신다. 엄마의 고집으로 인해 머리가 아프고 답답하여 심호흡과 헛기침을 했다. 괜히 다툼이라도 할라치면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기도 할 뿐더러 지금 엄마는 환자가 아닌가. 현기증이 나서 어질어질했다.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불었다. 답답했던 가슴이 바람을 맞으니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햇살도 좋았다. 순간,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때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엄마가 앉았던 것처럼 버드나무 아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자작나무 의자에 앉았다. 아니, 이유 없이 찾아온 외로움에 못 이겨 그 의자에 앉았는지도 모르겠다. 의자는 마치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했다. 슬펐다. 눈물이 났다. 괜히 고집 피우시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그때는 어떡할까? 걱정과 고민으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5년째 접어들면서부터 수술받기 전처럼 자주 가슴으로 손이 올라간다. 어느 순간 눈에 튀게 호흡은 거칠어지고 가슴이 죄여오는 고통은 다시금 불안과 함께 통증을 불러온다. 그리고 괴로움을 견디기는 무리다 싶었을까. 결국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엄마의 상태를 본 주치의는 몹시 당황했다.      “왜 빨리 오지 않으셨어요?”      물론 엄마의 변명이나 해명을 들으려고 물은 것은 아니었고, 참고 견딜 것이 따로 있지 이 지경이 되도록 뭐했냐는 다소 원망 어린 의사의 말투였다. 심전도는 예상대로 불규칙적이고 심장은 생각보다 힘이 없었다. 검사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했는지 바로 응급상황을 발동하여 방송으로 알리고 수술에 들어간다. 단순히 통증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다음 날 새벽이 다 되도록 수술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실로 긴 밤이었다. 어쩌면 그때까지 나에게 가장 긴 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입원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 두 번의 큰 수술로 인해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다. 아름답던 얼굴은 윤기와 탄력을 잃어 이전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깨어나는데 거의 하루 정도 걸린 것 같다. 입술은 피와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주름지고 메말라 있어서 핏기라고는 없는 것 같다. 거기에 움푹 들어간 두 눈은 볼 때마다 안타까움만 더하게 한다.      아직 담당 주치의로부터 수술경과에 대해서 듣지 못했다. 답답하다. 간호사에게 물어봐도 전달받은 것이 없으니 달리 할 말이 없을 수밖에.      다음 날 아침 회진 때, 담당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몇 마디 큰소리로 엄마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다. 간호사에게 체크 시트를 가져오게 하고 그 사이 환자 몸에 부착된 의료기기들을 이곳저곳 살펴본다. 체크 시트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언제부터 맥박이 약하게 뛰었어요?” 간호사에게 묻는다.      “수술방에서 올라오면서부터입니다.”      뒤따르던 다른 의사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전문용어로 새로운 처방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바로 시행할 것을 지시하고 병실을 나선다.      거의 종일 엄마는 어찌 된 영문인지 깨어나지 않는다. 오실로스코프 상의 맥박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의 뒤척임은 고사하고 팔다리 손가락도 움직임이라고는 없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자가호흡이 아닌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숨을 쉬고 있었다. 오전에 담당의사의 지시를 받던 의사가 의식이 돌아왔는지 확인차 두어 번 찾아와서 몇 마디 물어보고는 침울한 얼굴을 하고 힘없이 돌아간다.      저녁 무렵, 아침때보다도 더 굳은 얼굴을 하고 담당 의사가 뛰어들어왔다. 수 간호사가 그 뒤를 황급히 따른다.      의사는 차근차근 그리고 또박또박하게 낮에 간호사들이 체크했던 사항들을 물어보았다. 답답하다. 엄마의 손을 잡아보는 것도 또 소리내어 불러 보는 것도 두렵다. 자정이 넘어서는 심장 맥박을 나타내는 모니터의 그라프가 갑자기 빨라지고,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더니 간호사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진다.      어디론가 급히 연락을 취하더니 물어보는 대로 증상을 말하자 곧 다급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고요히 잠들었던 병원 전체를 들쑤시듯 휘감고 흘러나온다.      “코드블루, 코드블루 1001, 코드블루, 코드블루 1001!”      그렇게 방송과 동시에 엄마는 어디론가 옮겨지고 그 자리는 비었다.      벽에 기댄 채 두 다리를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간호사가 찾아와 “괜찮으실 거야.” 하고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을 건네지만 이미 내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열리지 않았다.      방송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옆 침대의 보호자들이 며칠 전에 옆 병실에 입원해있던 할머니도 갑자기 심정지가 왔을 때 지금처럼 똑같은 방송이 나왔는데 결국 숨을 거둔 적이 있었다는 얘기들을 주고 받는다.      ‘아~ 엄마~’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반쯤 튀어나왔다. 결국, 엄마도 잘못되는 것일까? 또다시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그리고 새벽이 되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보조의자에서 피곤에 겨워 나도 모르게 그만 잠이 들었다.      간호사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한다. 잠시 뒤, 비교적 큰 문 입구에 섰는데 안내 푯말도 없었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아까 왔던 사람들이 거의 빠짐없이 모여있는데, 공기는 한없이 무거웠고, 사방은 눈처럼 하얗게 페인팅 되있었다.      큰방은 칸막이가 되어있는데 중간부분은 유리로 되어있어서 내부가 훤히 보였다. 침대가 놓여있었고, 그 위를 하얀 천이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는 입원하면서부터 줄곧 엄마의 아픈 몸을 뉘었던 바로 그 침대였다. 동생과 함께 검은색 옷을 입었다.      동네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오래되고 황량한 교회당이 있는데 주일에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은 아니었다. 십자가 비석이 즐비하게 놓여있는 공동묘지였다. 목사님과 몇 분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분들로 한결같이 검은 옷을 입었는데 여자들은 모자조차 검은색이었다.      십자가 비석 아래 저마다 꽃다발을 놓은 것이 어느 새 수북이 쌓였다. 동생은 오래전부터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던 곰인형을 그 옆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색한 듯 웃는다. 아직 엄마의 부재를 실감 못하는 모양이다. 비로소 눈물이 난다.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바람에 날려 옆에서 있는 동생에게 떨어진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무릎을 꿇어 동생과 눈을 맞춘 다음 천천이 입을 열었다.      “찰스, 내 말 잘 들어. 엄마는 이제 우리에게 올 수가 없어. 다만 네 마음 속에만 머무르실 거야.”      이 말을 듣고 뭔가 깨달았는지 아니면 누나가 울고 있으니까 따라 울었을까, 동생도 곧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지금껏 동생 앞에서 태연한 척했던 나도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엄마의 십자가 비석을 어루만지며 엄마를 부르는데, 그런데 누가 세차게 흔든다. 처음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해서 흔들기에 돌아보니 동생 찰스였다.      “누나, 누나! 일어나.”      “응, 이게 어떻게 된거지? 여기가 어디야?”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꿈이었다.      새벽 녘에 피곤에 지쳐 보조 의자에서 잠깐 잠이 들었을 때 꿈을 꾸었나 보다.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왜 하필 엄마의 장례식 꿈을 꾼 것일까? 혹시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많이 불안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엄마는 회복실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한다.      잠시 후, 엄마를 담당하는 의사가 왔다. 지난 마지막 수술이 후 또 수술을 기대하기란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사실상 힘들다고 한다. 지금의 상태로 생명을 연명하기란 거의 어렵다. 다른 사람의 심장을 이식받지 못하면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다소 절망적인 얘기였다.      처음에는 5년 정도도 예상 못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5년째 접어 들어서는 엄마의 몸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나를 내려다보며 계속 말을 이어간다.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이번 주 안으로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래도......”      힘들다는 말 대신 의사는 한숨과 더불어 절망의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역시 다음 말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의사에게 그래서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하고 물어본다면 결국 의사는 자기 입으로 의사로서 제일 하기 힘든 말을 하게 될 테니까 묻지 않았다. 의사의 가느다랗고 붉은 입술은 거짓이나 농담 같은 말은 내뱉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회복실에서 꼼짝 않고 누워 있는 엄마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빠르게 다가오는 운명의 시간 꿈 속의 장면들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시간은 흘러가고 가슴에 부착된 전기신호기가 점점 약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회복이 늦어 그날은 입원실로 올라오지 못하고 회복실에서 하루를 보냈다. 가끔 링거를 살피는 간호사 외에는 찾는 이가 없다. 엄마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엄마의 코 고는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다시 듣기를 희망한다. 이식 수술도 받아보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마치 넋이 빠지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 온다.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의사는 이번 주말까지라고 했다. 오늘이 목요일 이제 이틀 남았다. 희망은 엄마와의 이생의 끈이 끊어진 것처럼 소멸하여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무겁게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가 되었다. 야속한 강물처럼 머무르는 법이 없다. 16시를 막 넘어가는데 갑자기 흰 가운을 입은 네 명의 의사와 간호사 두 사람이 들어오더니 맥박과 혈압을 체크하고는 빨리 수술실로 옮기는 게 좋겠다고 한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 것일까?      “선생님! 엄마 상태가 많이 안 좋으세요?”      해쓱한 얼굴로 의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의사의 표정이 의외로 밝았다. 아니, 오히려 기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아직 말씀 안 드렸군요. 오늘 오후에 어떤 분이 장기를 어머니께 기증해주셨어요.”      “아 정말요?” 믿어 지지가 않았다. 또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꿈은 아니었다.      “혈액형 및 여러 조건들이 마치 기적같이 엄마와 잘 맞아서 우리 의료진도 많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에서 긴 시간을 기다렸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건강한 모습의 어머니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수술은 잘 되었고 회복실에서 하루 정도 머문 다음 입원실로 올라갔는데 코드블루가 발동되고 일주일 만이었다. 회복이 빨랐다. 의사도 엄마도 같은 일을 두고 역할은 다르지만 동일한 기적을 체험하는 것 같아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퇴원날짜가 다가오자 문득 기증자가 누구인지 또 어떤 연유로 기증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어머니에게까지 이르렀는지 궁금했다. 그 모든 것을 그냥 기적으로 치부하기에는 왠지 사람의 도리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확인해 보니 기증자는 머라이언 클락으로 루이지애나에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누구이며 어떤 사연으로 장기를 기증하고 죽음과 맞바꾸었을까?’ 병원과 장기기증 센터에 수소문해 보았지만 그 어떤 자료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이름과 거주지역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퇴원한 지 6개월이 지나면서 창백했던 얼굴은 정상을 회복했다. 예전처럼 입술도 빨갛게 생기가 돌아 한층 도톰해 보였다.      나는 매일 엄마와 함께 바닷가 옆길을 한 시간 정도 거닌다. 오래 전 셋이서 공놀이를 하던 곳도 지나고 수년 전 가슴을 움켜지며 쓰러졌던 그 자리도 지난다.      여전히 장기를 기증한 사람이 누구인지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엄마가 모처럼 버드나무 아래 자작나무 의자에 앉아 오후의 햇살을 즐긴다. 오늘은 우체부가 조금 늦게 우편물을 전해 준다.      “톰! 오늘은 좀 늦었네요.” 엄마는 오래전부터 우편물을 전달해주는 흑인인 톰 아저씨에게 항상 말을 먼저 건넸다. 더운 여름은 시원한 음료와 함께 쿠키와 베이컨도 잊지 않았다.      “네! 오늘은 우편물이 평소보다 많아서 조금 늦었습니다.” 우편물을 가방에서 찾다가 멈추고 갑자기 엄마를 낯선 사람처럼 한참을 쳐다본다.      “왜요 톰! 뭐가 잘 못 됐어요?”      “아니요. 바실래르! 얼굴이 몰라보게 좋아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떤 우편물이 왔나요?”      “발신인 주소는 적혀있지 않은데 우표 직인이 멀리 루이지애나 직인이 찍혀있는 편지가 한 통 있어요.”      가방에서 우편물을 꺼내어 먼저 살펴보고는 엄마에게 내밀었다.      “네 고마워요.”      모두에게 친절한 톰 아저씨는 아무리 배달업무가 많아도 안부 묻기를 잊지 않았다. 톰 아저씨와 오랜만에 서로 안부를 여쭙고는 천천히 편지를 열어본다.        친애하는 맥밀런 부인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머라이언 클락의 딸 마가렛 프랭키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여서 많이 당황되실 줄 압니다. 어머니 머라이언 클락과 저는 오래 전 뉴욕의 화재사고 때 맥밀런 소방관님의 희생으로 죽음의 불 가운데서 살아난 모녀입니다. 소방관님의 가족들에게 그날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 화재 당시 어머니는 연기와 유독가스를 너무 많이 흡입하여 쉽게 회복이 어려웠고, 화상의 상처가 너무 깊어 오래도록 고생하셨습니다. 그 후, 심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견디다 못해 결국 루이지애나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루이지애나는 어머니의 외가댁으로 어릴 적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당하신 맥밀런 소방관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버릴까봐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화상에 의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회복되었지만 검은 연기와 유독가스에 의한 데미지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오래도록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가 더 이상 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소방관님의 가족들을 뵙기를 희망하셨습니다. 이곳저곳 어렵게 수소문 끝에 겨우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인께서 심장병을 앓고 계셨고 급기야 이식을 받지 않으면 부인 또한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담당의사에게 비밀로 해줄 것을 약속하고 본인의 심장조직과 부인의 조직에 문제는 없는지 검사를 의뢰하셨습니다. 검사결과 기적같이 맞아 주었고 이식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놀라운 결과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야 겨우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은 것 같다고 그리고 훗날 그의 가족들을 만나게 되면 감사의 말씀을 잊지 말라고 하시고 수술실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맥밀런 소방관님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를 꼭 껴안고 불길을 해치며 나오시던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제 가슴에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그 어떤 말이 부인과 자녀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소방관님의 숭고한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부인께서도 소방관님하고의 추억을 고이 간직하며 자녀들과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 마가렛 프랭키        편지를 다 읽은 어머니의 눈이 반짝였다. 눈물이 두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이분들이 또 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셨구나.’      편지를 가슴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슬픈 표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쁜 표정은 더욱 아닌 어쩌면 아빠에 대한 그리움의 표정이었다. 바람은 어머니의 머리칼과 버드나무의 무성한 가지를 헝클어 놓고는 바다 멀리 날아간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옛날 자전거를 처음 배우던 그때 엄마가 뒤에서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던 일이 생각 난다. 동생 찰스는 누나가 타는 두 발 자전거를 자기도 타보겠다고 고집 피우며 자신의 세발자전거는 내팽개쳐버린 일들을 떠올리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나는 지금 그 옛날 어머니가 버드나무 아래 자작나무 의자에 앉아서 오후를 보내던 것처럼 그때를 지나고 딸아이는 그 무렵 내 어린때를 지나고 있다.      어머니는 유치원 수업을 마친 나를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부르며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달려오고, 나도 엄마 하며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간다. 막 안기려는 찰나 “엄마, 엄마 일어나세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요.” 하며 딸아이가 깨우는 것이 아닌가.      석양의 해는 눈이 부시지 않다. 다만 물결 위에서 빛난다. 대서양이 내려다 보이는 푸른 잔디 위 버드나무 아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행복한 꿈은 아직 꾸어 보지 못했다.   - 끝 -
9    [중편소설] 기억(Memory) / 노인기 댓글:  조회:267  추천:0  2022-10-13
[중편소설] 기억(Memory) 노인기      제1부 농촌에서 나고 자란 가족들의 이야기        봄은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더디기만 하다. 우수와 경칩이 지나자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횟수가 조금씩 늘어난다. 계절이 바뀐 것이다. 그것은 여간 민감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한다. 뒤뜰의 넓게 펼쳐진 대나무 숲에 쌓였던 눈은 조금씩 하루가 다르게 자취를 감추다 어느 순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솜이 내려앉은 것처럼 하얗게 덮여있던 눈은 곧 깨어날 목마른 죽순의 갈증을 해소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눈의 무게에 구부러져 있던 가지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기운에 힘입어 곧게 펴져 견고해진다.      마을을 휘돌아 나아가는 천(川)은 얼마 못 가서 또 다른 큰 줄기를 만난다. 그렇게 합쳐진 두 줄기는 남강으로 연하여 내려가다가 결국 남해에 다다른다. 이름 없는 산기슭에서 발원하여 깊은 곳과 얕은 곳을 지나 비로소 대양에 도착한 것이다.   1        사대동 댁의 가슴은 쭈글쭈글하여 탄력이라고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 축 늘어져 젖도 잘 나오지 않은 꼭지를 갓 태어난 핏덩이에게 물리고 있다. 오늘 새벽에 출산했다. 아들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결혼생활 29년간의 긴긴 세월의 마지막 출산이었다. 생존한 자녀로는 일곱 번째요, 모두 합하면 열두 번째였다.      어둠이 짙은 산골의 새벽은 고요 그 자체다. 아직 닭도 울음을 터뜨리기 전으로 어쩌면 하루 가운데 가장 공기가 낮은 때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 난데없이 응애응애 하고 요란한 갓난이 울음소리가 어둠을 뚫고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그날은 닭도 새벽을 알리는 울음을 건너뛰었다. 졸음 중에도 질근질근 되새김질을 멈추지 않는 외양간의 어미소와 함께 새끼도 평소보다 빨리 깨었다. 굳이 동네방네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그 한방의 울음소리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출산 경험이 많은 아낙네들은 울음소리만 들어도 성별을 쉽게 구분했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이 뜨였다. 아낙들이 하나 둘 우물가로 모여든다.      “사대동댁 울음소리 들었나?”(어머니는 사대동이란 동네에서 시집와 태고를 사대동댁이라 부른다)      “하모 그 소리에 잠 다 깼다 아이가.”      “그래 뭐 갔노?”      “아들 같으나?”      “틀림없이 아들이다. 울음소리 안 들어봤나?”      “와 안 들어. 우리 정갑이 날 때 하고 똑같더라.”      “사대동 댁이 이번에는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이번이 아마 우리 동네에서는 제일 노산이지?”      사대동댁은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둘째 딸을 부른다.      “희야! 숙희야, 할아버지에게 시간을 알아오너라.”      동네에서 유일하게 조부께서 시계를 갖고 계셨다. 회중시계로 끈을 길게 하여 언제나 한복 조끼 앞주머니에 넣고 계셨다. 그 당시는 시계 구경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할배, 엄마가 동생 났어예.”      “그래, 뭐낳노?”      “고치라네 예-”      “아이구, 수고했다.”      “시간이 몇십니꺼?”      “04시다.”      “예, 알게심더.”      조부는 매우 연로하셨지만 고치라는 손녀의 말에 안절부절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조부는 전날 불을 끄지 않고 긴장 가운데 조용히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자정을 훌쩍 넘겼고 그 후 4시간이 지난 다음 겨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동네 아낙들이 사대동 댁을 걱정하는 이유는 이전에도 출산하다가 그만 실신하여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숨을 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아 죽은 줄 알고 장례를 준비했을 정도였다. 그러기를 세 번씩이나 되풀이했었다. 모두 출산으로 인함이었다. 그래서 오늘 태어난 갓난이와 바로 위 누나와는 터울이 많이 진다. 그 사이에 세 명의 자녀를 잃은 것이다. 병원도 의사도 약도 없는 곳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죽으면 복이 없이 태어나서 그렇지, 하며 탓을 애매하게 돌렸다.      집안에 아이 난 기쁨도 잠시 과연 이번에는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먼저 세 아이 모두 생존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하며 말을 꺼내기도 부담스럽다.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이름도 짓지 않았다. 이름이 없으니 호적에 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여러 번 앓고 불덩이가 되는 위기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겨우겨우 위기를 넘겼다. 그래도 뭐라고 불러야 했기에 돌림자인 ‘재(在)’를 넣어 ‘영재’라고 불렀다.      물론 성장한 후에 들은 얘기다. 정작 나는 그 이름이 전혀 기억이 없다. 나에게 어릴 적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니 생소하고 의아했다. 듣는 순간, 왠지 지금 이름보다 훨씬 맘에 든다. 가끔 생각하기를 그 이름으로 살았으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삶이었을까? 하고.      어머니는 앞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나를 낳기 전 연거푸 세 번 유산을 하셨다. 나를 잉태했을 때는 건강이 채 회복되기 전이어서 몸 상태는 가히 좋지 못했다. 어머니는 태생적으로 약골이었다. 성장 자체가 아버지하고는 많이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외조부모님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셨다. 쓴 약을 먹이는 게 여간 곤욕스럽지가 못해 어머니가 아이 때 나무에 묶은 다음 강제로 입을 벌려 먹여야만 했다. 너무 어린 탓에 약의 쓴 기운이 종일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힘든 모심기가 끝나고 무더운 여름이 왔다. 농촌에서의 여름은 더위와 파리, 모기, 또 이름 모를 벌레들까지 합세해서 여간 성가신게 아니다. 살갗은 타 들어가 구릿빛으로 변하고 손톱은 언제나 까맣게 이물질이 묻어있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어머니는 또 몸의 이상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임신이었다. 그토록 원치 않는데 또 들어선 것이다.      ‘모든 것이 인력으로 안되는구나.’      아이가 들어선 것을 알고부터 어머니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 것 같다. 큰 바위 꼴 언덕에 올라가 몸을 구르기를 수십 차례도 더했다. 그래도 잘되지 않자 이번에는 둘째 딸에게 하늘 수박(이름은 하늘에 몸은 땅에) 뿌리를 캐오게 했다. 딸은 하늘 수박 뿌리가 무엇인지 알기에는 아직 일렀다. 어머니는 하늘 수박이 있는 곳을 자세하게도 일러준다. 마치 애가 들어서기만 해봐라. 내가 저 뿌리를 달여먹고 어떻게 하고 말 것이다. 하고 작심한 듯 정확하게 자생위치를 알려준다.      “사찰 가는 길에 또비씨네 밭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쭈~욱 가다 보면 좁은 모퉁이 길이 나오지. 돌아서자마자 왼편으로 하늘 수박 넝쿨이 보일 것이다. 그 뿌리를 캐오너라.” 하면서 호미와 낮과 바구니를 쥐어 준다. 그리고 절대로 뿌리를 입에 대지 말 것도 단단히 일러주었다. 위험한 것을 다루기에 아직 일러 신경이 많이 쓰였다.      엄마가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하늘 수박 뿌리를 건넨다. 어머니는 뿌리를 삼베에 넣은 다음 약탕기에 넣고 장시간 달인다. 삼베에 두 개의 나무막대기를 이용하여 즙을 짰다. 뿌리는 무처럼 희나 즙은 진한 갈색을 띠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나왔다. 삼베는 약간 붉은 색으로 탈색되었다. 하얀 사기 사발에 반쯤 담긴 즙은 보기에도 농도가 매우 짙어 보였다. 좋은 약이면 능히 모든 병을 낫게 할 것처럼 보였고, 그러나 그 반대라면 집채만한 황소도 견디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무엇이 그렇게 급한지 채 식기도 전에 단숨에 들이켰다. 얼마나 독했는지 들이키자마자 선 붉은 피와 함께 즉시 우~웤 하고 토해 나왔다. 기진맥진하여 잠시 방안에 드러눕는다. 들이킨 것을 다 겨워 냈음에도 뭐라 표현 못 하게 속이 괴롭다.      ‘하늘 수박 뿌리가 이렇게 독할 줄은 몰랐는데 잘하면 애가 떨어질 수도 있겠다. 처음은 내 몸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렇지 두 번째는 괜찮을 거야.’ 하고 남은 즙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몽땅 둘러 마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전보다 많은 양을 넘겨서인지 괴롭기가 훨씬 더 심했다. 그 일로 어머니는 오래도록 구토에 시달려야만 했다.      후유증은 끈질기게 어머니를 괴롭혔다. 한겨울에도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실패한 것을 알고 태아가 더 자라기 전에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독한 약을 다려 먹기도 했는데 그래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드디어 진주의 한 산부인과를 몰래 다녀왔다.      “이만저만해서 아이를 지우려 합니다.”      “이미 노산이어서 산모까지 위험합니다.”      어머니는 산부인과를 두어 군데 더 들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산모와 뱃속에 든 태아의 생명은 위태위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의 샘 곁에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낯선 아이가 대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세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로 바지는 입지 않고 상의만 입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뭔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은 비록 어린아이지만 나름 심각해 보였고 진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다 샘 곁에 앉아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엄마”하고 달려와서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지금도 자식이 많은데 또 하며 “다른 데로 가거라, 나는 네 엄마가 아니다.” 하고 귀찮은 듯이 밀치려 하였으나 아이는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아니야, 우리 엄마가 맞아. 나는 엄마하고 같이 있을래. 다른데 안 갈 거야.” 하고 또렷하고 간절하게 말했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꿈을 꾼 것이다. 아이가 들어섰을 때마다 꿈을 꾸었지만 그런데 이번 꿈은 전에 꾸었던 것과는 달랐다.      한동안 꿈에 본 아이의 잔상이 또렷하게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낙태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했는데 ‘애를 지워서는 큰일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후, 어머니는 더 이상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는 예정된 날짜에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다. 내가 결혼하고 장성한 다음 누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누님께 물어보았다.      “꿈에 본 애와 태어난 애의 생김새가 어때요?”      “분명 똑같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자주 그 말씀을 하셔서 누님은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나의 조부(祖父)님 얘기를 조금 해야겠다. 할아버지는 1895년에 태어나셨다. 역사적으로 갑오경장이 일어나던 해로 기억된다. 일본에 의해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형제분은 다섯이나 되었다. 모두 남자들이다. 증조부께서 성이 안가(家) 신부를 맞이하여 아들 다섯을 두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안은 여러 성씨 중에 특히 안 씨 하고 잘 어울린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증조부 이후 약 1백5십년도 더 지나왔는데 내가 알기에 안 씨 성을 가진 처자와 결혼한 이는 아직 아무도 없다.      나의 할아버지는 다섯 형제 중 맨 맏이로 태어났다. 미남형에 신장은 꽤 큰 편에 속했다. 그렇다고 농사일을 할 체질은 아니신 듯하다. 젊을 때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농사짓는 일은 확실히 하지 않으셨다. 아마 학교 교육 쪽으로 몸담으신 듯하다. 거의 돌아가실 무렵, 낯선 사람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어머니께 물어보니 할아버지의 제자들이라고 하셨다. 해방되기 전 나라의 안팎 소식을 전해 들을 아무런 매개체가 없던 시절 바깥 활동을 하시는 할아버지 덕에 우리 마을은 그나마 외부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3.1 만세운동,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희생, 일본에 의해 태평양전쟁발발 더 나아가 전 세계가 전쟁으로 몸살을 앓는 소식들을 전했다. 조부께서 3.1 운동에 참여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민족적인 구국운동이 과연 우리 시골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도 지금으로서는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 군청(郡廳)도 일본 사람들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었다.        한 번은 마을에 광 나는 긴 가죽 부츠를 신고 허리에 시퍼런 니뽄도를 찬 순사가 말을 타고 경관들과 함께 등장했다. 머리칼은 모자에 눌린 자국이나 흐트러짐이라곤 없었다. 양 끝이 안으로 말려 들어간 콧수염은 신기할 정도로 윤기가 흘렀다. 콧수염 아래 감춰진 일자형의 꽉 다문 입술이 열리는 순간,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경직되다시피 했다. 처음 있는 일로 마을은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듯 술렁였다.      할머니들은 평소 손자들이 울거나 고집 피우고 떼쓰면 ‘저기 일본군 순사가 우리 아가 잡으러 온다’ 하던 그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다. 호랑이 대용으로 등장한 인물이니 잘 다듬은 콧수염은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두렵기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자기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장으로 보이는 일본 순사는 마을 사람들을 경멸하듯 노려본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친 아이들은 줄행랑을 친다. 어른들도 황급히 자리를 뜨는데 오히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은 별다른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모인 자리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고 ‘장이요’ 할 땐 간간이 탄성도 흘러나왔다.      일본군 대장은 그 소리가 거슬리는 듯 한동안 노인들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무시한 처사라 여긴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일본 순사가 예고도 없이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온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독립군이 마을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일까? 분명 누군가를 잡으러 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동안 마을을 어지럽게 수색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조부님의 둘째 동생 즉 작은할아버지가 오랏줄에 포박된 채 끌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왜? 이유가 뭐냐고? 무슨 연고로? 하며 물을 수도 없었다. 그저 식구들은 눈물을 흘리며 끌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른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긴 하지만 작은할아버지는 소위 독립운동을 할 그런 위인은 아니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을 해본들 통할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는 분을 통해 어렵게 안부를 들을 수 있었는데 며칠 날짜로 사형이 집행된다는 다소 보안에 가까운 내용이 전부였다.      조부님은 몸져누울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물론 당신의 부모님도 생존해 계셨다. 조부님이 심한 충격으로 괴로워하자 아버지가 조용히 할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님, 날짜와 시간, 집행장소를 알아봐 주세요.”      “왜 그러냐?”      “그냥 알아봐 주세요.”      할아버지는 혹시나 동생을 죽음에서 구출할 수만 있다면........ 어쨌든 아들의 말을 따라 다시 한번 지인의 도움으로 날짜와 시간, 집행장소 그리고 이동 경로를 비교적 자세하게 전달받아 아들에게 일러준다.      “무슨 일이냐?” 여전히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닙니다. 아버님-”      조부님은 날짜가 다가오자 연로하신 자신의 부모님께는 말도 못 하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변했다.      한편, 아버지는 며칠 전부터 사형수들의 이동 경로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지점쯤에서 쉬어갈 것도 예상하여 거사를 꾸민다. 물론 혼자였다. 사람이 많으면 발각되기가 그만큼 쉽기 때문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들이 밤을 틈타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 일대 산악지대는 아버지의 나고 자란 곳으로 아무리 밤이라도 손바닥 보듯 훤했다. 죄수들은 포박된 채 일렬로 행군하는데 도망가지 못하게 가마니 같은 것으로 머리를 푹 씌웠다. 사형집행도 머리에 뒤집어쓴 그대로 무릎을 꿇린 다음 니뽄도를 높이 쳐들어 단칼에 목을 향해 내리친다.      ‘군청으로부터 사형장까지는 대략 35리 정도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세 번 정도 쉬었다 갈 것이다.’ 어디쯤에서 실행할 것을 결심하고 나름 만발의 준비를 다 한다.      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와는 사전에 신호를 주고받은 것이 아니었다. 얼굴을 가리고 같은 복장의 죄수들 가운데 자신의 숙부를 찾기란 힘들 것이다. 그것도 달과 별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아버지는 세 번째 휴식 때를 노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휴식 장소는 비교적 마을과 가까워 죄수가 없어진 줄 알면 순사들의 의심과 마을이 괴롭힘을 받을 수 있다. 마지막 휴식 장소는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그만큼 집중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휴식 때는 숫자를 철저히 헤아릴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휴식이 끝나면 바로 사형집행장이므로 조금은 느슨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차 확인 없이 바로 진행되므로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여 굳이 눈에 불을 켜고 숫자를 헤아려야만 할까. 그런저런 이유로 마지막 휴식할 때를 선택했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아버지는 남성 성인이 들어가고도 남을 큰 자루를 제일 먼저 준비했다. 눈에 잘 띄지 않게 색깔도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숲 속에서 조용히 어둠을 기다린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 횃불 두 개가 나타났다. 아직 희미했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진다. 죄수들의 행렬이었다. 횃불은 앞에 두 개, 가운데 하나, 그리고 끝에 두 개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순사들은 도합 15명 정도로 모두 허리에 칼을 두르고 앞에 두 명과 끝에 두 명은 칼 대신 총을 메고 있었다. 나름 빈틈이 없었다. 죄수들은 길이 좁아 일렬로 길게 늘어섰는데 대략 40명 정도였다.      첫 번째 휴식을 알린다. 소피는 길가로 돌아서서 해결했다.      약간 웅성웅성한 틈을 타 덤불 속에서 나지막이 ‘작은아버지, 작은아버지-’ 하고 불러 본다. 물론 순사들은 모두 일본 사람들로 눈치채지 못했다. 참고로 아버지는 변성기를 경험하지 못하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매우 드문 경우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목소리만 들어도 금방 눈치를 챈다.      아니나 다를까. 죄수 중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반응을 한다. 반응이라고 해봤자 귀에 익은 목소리로 인해 고개를 옆으로 두리번 두리번하는 것이 전부이다. ‘분명 내 조카음성인데 잘못 들었나?’ 하는 것 같았다. 이동 중에 죄수는 물론 일본 순사들도 입 밖으로 말을 내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와 밤낮없이 울어대는 풀벌레는 사람의 발길이 가까워지자 뚝 그쳤다. 이따금 우~우~ 하는 짐승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도 한다.      죄수들의 한걸음 한 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내딛는 보폭만큼 죽음이 가까워짐을 알고 있었다. 일본 순사들의 발걸음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사람들은 포박된 채 형장으로 끌려가고는 있지만 사형당할 정도는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색출이 됐는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 혹 밀고에 의함인지? 그들조차도 잘 몰랐다. 심문도 재판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일본 강점기에 억울한 죽음이 어디 한둘일까.      죄수들의 한숨 소리는 탄식처럼 고통스럽다. 산허리를 돌아 난 길은 돌부리가 유난히 많아 걸음을 힘들게 한다. 발이 돌부리에 걸려 꼬꾸라질 듯 심하게 기우뚱거리는 모습은 죄수들을 더욱 처량하게 했다. 그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이라도 하듯 어디선가 소쩍새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린다. 울음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얼마를 갔을까. 평평한 바위가 넓게 둘려있는 곳에서 두 번째 휴식을 알린다. 순사들도 첫 번째보다는 다소 지쳐 보였다. 총을 멘 앞뒤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바위에 걸터앉아 일제히 담배를 피워 문다. 목소리도 제법 크게 들렸다. 아버지는 그 틈을 이용하여 아까와 같이 자신의 숙부를 부른다. 이번에는 확실히 눈치를 채신 것 같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앞에서 열두 번째 정도였다. 체구가 할아버지 형제 가운데 제일 왜소했다.      위치 파악도 끝났다. 마지막 쉼터에서 행동을 개시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세 번째 휴식할 때가 아니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아버지의 심장이 속에서 조용히 떨렸다. 맥박도 빨라지고 어느새 두근거림의 파장도 낙차가 점점 커진다. 마침내 마지막 휴식 장소에 다다른다. 작은할아버지는 조카가 주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일본 순사들도 지쳤는지 아니면 죄수들에 대한 최후의 배려인지 서두르지 않았다. 희롱이나 멸시 혐오 같은 행동도 최대한 자제한다.      작은할아버지는 최대한 산과 인접한 바깥에서 소피를 본다. 그리고 조용히 조카의 이름을 부른다.      “외국아~ 외국아~”      아버지 또한 두 번째 휴식에서 작은아버지를 지목하고는 시선을 한시도 떼지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동생이 일본 순사에게 끌려간 다음부터 잠시도 마음을 놓지 않으셨다. 만일 작은할아버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또한 괴로움에 지쳐 잘못될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리고 느슨한 틈을 타 준비한 큰 자루를 그대로 덮어씌우고 자신의 숙부를 둘러메어 마을 반대편으로 달음질했다. 순식간이었다.      일본 순사가 호각을 불며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숙부를 둘러메고 길도 없는 어두운 산을 넘고 또 넘고 또 넘었다.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뛰었다.      조부께서는 언제 몇 살 때 혼인을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굳이 따져 보면 알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어서 다루지 않겠다.      결혼하고 얼마 못되어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아이가 세 살쯤 될 무렵, 그만 세상을 뜨셨다. 겨우 걸음을 내디딜 정도의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로 말이다. 정확한 사인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홀아비 혼자서 아이를 그것도 갓난이나 다름없는 어린것을 키우기란 몹시 힘들었다. 재혼을 결정하시고 그리고 김씨 성의 처자를 새로 맞이하셨다. 덕망 있는 집안의 자제로 일대 소문이 자자했다. 인물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새로 맞이한 아내에게서 조부님은 아버지를 비롯해 고모 두 분과 작은아버지 세 분이 태어나셨다.      할머니는 홀로 남겨진 아이(큰아버지)를 보며 비록 내가 배앓이를 하여 낳지는 않았지만 내 아들로 반듯하게 키울 것을 결심하셨다. 할아버지와 새 할머니 사이에 첫아이가 태어났는데 바로 나의 아버지가 그 첫 번째였다.      할머니는 자신의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하면 혹 아이(큰아버지)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자신의 첫아들은 막 젖을 떼고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부터 아예 친정으로 보냈다. 이유는 오로지 그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연고로 아버지를 부를 때 ‘외국’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런 훌륭한 분이 나의 할머니인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교육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본 바탕은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으랴. 아쉬운 것은 나는 그런 할머니를 뵙지 못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할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겁고 한편으론 아쉽다.      할머니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하셨다. 오히려 할아버지에게 혼나거나 야단맞은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대개 아버지는 공의요, 어머니는 사랑이다. 라고 하는데 할머니는 오히려 그 반대셨다. 그러나 손자들은 끔찍이 사랑스러워하셨다. 교육 학자들은 어머니가 엄하고 반대로 아버지가 유한 것이 자녀 교육에는 더 낫다고 한다.      이쯤에서 아버지의 여러 형제 중에 작은아버지 한 분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은 ‘환열’로 아버지 형제들은 가운데 ‘환’ 자를 돌림자로 썼다. 작은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조금 남달랐다. 체구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큰 편은 아니지만 그러나 다부지기가 말도 못 했다. 몸이 얼마나 날렵한지 3~4미터는 그냥 뛰어넘었다. 늘 에너지는 샘솟 듯 솟구쳐 잠시도 그냥 있는 적이 없었다.      방앗간을 운영했는데. 물론 지금처럼 전기나 기계로 방아를 찧는 것이 아닌 물을 이용한 방앗간이었다. (말 그대로 자연 친화적이라고 할까.) 그 많은 쌀가마를 사람이 지고 나를 수 없어서 소가 끄는 달구지(구루마)를 이용하여 날랐다. 보통 암소는 수소에 비해 힘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많은 짐을 나르지 못한다. 달구지를 끄는 우리 집 황소는 크기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집안에 여자들은 겁에 질려 얼씬도 못했다. 보통 남자들도 옆에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몸에 손이라도 대려 하면 그대로 들이받았다. 시퍼런 눈동자는 보기에도 무서웠다. 목은 대들보보다도 더 굵었다. 뿔 뒤부터 목덜미를 지나 어깨 위로 길게 뻗은 검붉은 털은 마치 괴물 같았다.      그런데 아무 사람도 겁내지 않던 황소도 유일하게 겁을 내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작은아버지였다. 숙부는 당시 고작 열 살이었다. 한창 개구쟁이 어린이다. 하지만 그가 다가가면 그 큰 덩치가 고개를 돌리고 슬금슬금 눈치를 살핀다. 그 앞에서 집채만한 황소는 마치 순한 양이 되어 그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광경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러던 어느 날, 잘 매어둔 황소가 그만 고삐가 풀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삐도 없는 소를 그것도 무시무시한 황소를 무슨 수로 제어한단 말인가? 동네는 난리가 났듯 비상을 걸어 특히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들은 외출을 삼갈 것을 당부했다. 혹 뿔에 받히기라도 하는 날엔 목숨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급히 작은아들을 찾는다. 우선 황소가 어디쯤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고 방법을 생각했다. 별다른 뾰족한 수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마을 외곽에서 겨우 소를 발견했다. 다행히 아직 사고는 나지 않은 것 같았다. 소는 어딜 갔다 오는지 어슬렁 어슬렁 저 멀리서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길 가운데 사람이 올라가도 될 정도의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작은아버지는 곧장 나무 위로 올라갔다. 점점 소와 가까워진다. 타이밍에 맞춰 뛰어내린 다음, 소가 놀라기도 전에 이미 손은 코뚜레가 되어 단번에 황소를 제압했다. 실로 전광석화 같았다.      그대로 돌아서서 손은 뒤로 하여 코뚜레처럼 황소의 코에 집어넣고 천천히 마을로 들어선다. 말하자면 아이의 등과 황소의 머리는 붙어있다. 졸졸 뒤따르는 집채만한 황소에 비해 아이는 마치 고목나무의 매미 같았다. 코만 잡혔을 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뒤에 안 사실이지만 짐승은 눈 가까이 물체가 있으면 자신보다 크게 보여 얌전해진다)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겨우 열 살 남짓한 소년이 어른조차 엄두도 못 낼 일을 한 것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그렇게 집 나간 황소는 무사히 돌아왔다. 코에 새 고삐를 채운 다음 안전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외양간은 황소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새 짚과 부드러운 풀로 푹신하게 깔아놓았다.      조부께서 오래전부터 품삯을 받고 일하는 사내(머슴)에게 말한다.      “오늘은 생 여물을 주지 말고 따뜻하게 소죽을 끓여 줘라.”      할아버지는 왜 사내에게 소죽을 끓여주게 했을까? 문득 많이 힘들어서 뛰쳐나간 것은 아닐까? 제아무리 황소라 해도 달구지 가득 짐을 싣고 나르기란 무척 힘겨운 일이다. 한바탕 큰 소동을 일으켰지만 그래도 조용히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충직한 일꾼에 대한 할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자녀를 향해 소망 없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 모든 부모는 자녀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 특히 남다른 재능이 엿보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여러 자녀 중 유독 작은아들에게 예사롭다 못해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잘 교육하면 뛰어난 재목감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공부를 시키기로 마음먹고 부친의 명성에 힘입어 특별히 유능한 선생을 모셔다 교육을 받게 했다. 요즘으로 하면 특별 과외 수업이다.      아, 그런데 안타깝게도 작은아버지는 공부에는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몇 달을 지도해본 결과 진척이 거의 없었다. 마치 소귀에 경 읽기였다. 학문의 깨우침도, 뭔가를 알아가는 즐거움도 이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글공부에는 재주가 없음을 확인하는데 그쳤다. 하는 수없이 다 물리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큰 기대를 했건만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부친의 마음은 노여움으로 변했다. 그 노염은 그전의 기대와 사랑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 그때부터 부자지간 간격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모두가 참여하는 제사 자리에도 참석을 허락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두 형제는 특히 씨름에 소질을 보였다. 아버지는 우리 마을과 인근 동네에서는 소문난 장사(壯士)였다. 이미 15세에 맨몸으로 오르기도 힘든 뚱뫼 언덕을 아구까지 가득 채운 쌀가마니(대략 80~120kg)를 지게에 지고 오른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한창 기운이 샘솟듯 할 무렵 17세 약관일 때 동네에서 가장 힘센 장사(壯士)의 지게 짐을 눈여겨보았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 것과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시험 삼아 아버지가 져보았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생각보다 큰 힘 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게를 진 발걸음도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이 광경은 잠시 후, 주변 사람들에 의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새로운 장사가 탄생됨을 알렸다.      마땅히 오락이나 게임이 없던 시절 일 년 중 한 번 개최하는 산청군에서 주체하는 운동회가 그나마 제일 큰 행사였다. 종목으로 마을 대항 줄다리기는 빠지는 법이 없다. 더불어 제일 큰 관심은 뭐니 뭐니 해도 씨름이었다. 지형적으로 산악지대가 대부분으로 그런 환경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연고일까? 과거 씨름장사들이 서부 경남지역에서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두 형제는 마을 대표로 해마다 출전했다. 우승까지는 잘 몰라도 아무튼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다. 한 번은 작은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형수님, 옷 한 벌만 해주세요.”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해드릴게요” 어머니는 아무도 모르게 시동생에게 옷을 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가족 중 누구에게 약간의 언질도 없었다. 그렇다고 메모를 남긴 것은 더욱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 조부모님은 백방으로 사람을 풀어 찾게 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그렇게 작은아버지는 열일곱 살에 부모 형제를 뒤로 하고 고향을 떠났다. 뒤늦게 안 사실은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함께 갔던 친구는 몇 달이 못 되어 귀국했다. 아마 본인이 생각했던 일본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었나 보다.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소식을 전했다. 한국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히로시마에서 정착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반쯤의 일이다. 선천적으로 다부지고 부지런하여 어떤 열악한 환경에 놓여도 걱정할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아무 연고 없는 낯선 이국땅에 홀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조부모님의 근심이 깊어진다.      당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다. 그것은 일본 본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인들은 일본 중에서 주로 히로시마(廣島)에 많이 모여 살았는데 아마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처럼 전화나 우편 등 안부를 전할 만한 통신매체가 전혀 없는 시대였다. 말하자면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내 아들 못 봤소?’ 하는 격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일본의 침략전쟁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만주, 중국 본토, 동남아, 급기야 미국 하와이까지 포탄을 싣고 날아가 정박 중인 미 군함 위에 떨어트렸다. 선전 포고였다. 드디어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서막이 올랐다. 필리핀과 오키나와 동남아 일대와 일본 본토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전쟁은 점점 깊어만 가고 일본 본토를 치지 않고서는 항복을 받아내기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을까. 미국의 폭격이 부쩍 늘었다는 소식은 할아버지에게도 전해졌다. 조부모님의 근심과 걱정이 날로 더해만 간다.      그렇게 수년간 이어진 전쟁은 조금씩 미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다만 전쟁의 당사자인 일본만 모를 뿐! 동맹군이었던 이탈리아와 독일이 차례대로 항복을 선언하고 백기를 들었다. 남은 건 일본으로 역시 패색이 짙어갔다.      그런데 일본은 같은 동맹국과는 민족성 자체가 많은 차이를 보였다. 급기야 가미카제를 조직하여 결전에 임했고 그 항전의 끝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이었다. 전투기 연료인 가솔린을 돌아올 양까지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적진에 도달하는 데까지만 넣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전투기와 함께 적군 군함의 심장부에 포탄처럼 투하되어 산화되었다. 이를테면 자폭이다. 누가 바도 아니 그 시점에서 항복을 선언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데 특이한 것은 천황(일본왕)이 항복하기 전에는 이대로 갈 태세다.      마침내 미국은 어떤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1945년 8월 6일이 되기 약 한 달 전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는 여러 대의 미 공군기가 편대를 이루어 뭔가를 열심히 뿌리고 사라졌다. 경고성 전단으로 일명 삐라였다. 수백만 장이 하늘을 수놓았다.            히로시마 시민에게 고함:          히로시마, 나가사키 시민들은 8월 6일 07시 이전에 50km 밖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날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죽음의 원폭이 투하되는 날입니다.          그날이 임하기 전에 안전하게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1945년 8월 6일 새벽 02시 45분, B-29는 북 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언섬에서 4천백kg의 암호명 ‘리틀보이’를 탑재하고 출격한다.      07시 무렵, B-29는 히로시마 상공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적의 폭격기가 출현했으므로 공습경보가 울렸지만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과연 삐라 내용대로 원자탄이 터질까? 대부분 믿지 않았다. 공습으로 이어질 때는 수백 대의 폭격기가 출현하는데 이번에는 두 대가 상공에 떠다녔기 때문에 당연히 정찰기로 생각했다.      B-29 조종석에서 본 히로시마의 여름 아침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미국군의 공습이 한 번도 없었던 곳이 바로 히로시마였다. 그로부터 1시간 뒤 08시에 고도 약 9천5백미터 상공에서 약 40초 동안 떨어진 다음 5백7십미터 상공에서 폭파되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했다. 말로만 듣던 핵폭탄이다. 경고한 대로 핵폭탄이 터진 것이다. 설마 그런 것이 있겠어? 경고를 무시한 안일함이 화를 키웠다.      인구 34만의 도시는 순식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창공에서 번쩍하는 순간, 수 만 명이 듣지도 보지도 못 한 핵 방사능으로 목숨을 잃었다. 광선을 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실명되었다. 버섯구름은 순식간에 하늘을 캄캄하게 집어삼켰다. 흑암이다. 6천도의 고열은 사람도 태우고 식물도 건물도 모든 것을 태웠다. 열로 인해 강물에 뛰어든 사람은 순식간에 물이 끓어올라 익어버렸다. 짧은 시간에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죽은 것이다. 물론 인류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쑥대밭이 되었다. (쑥대밭은 히로시마 원폭으로 생겨난 말로 원폭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쑥만 무성하게 자라더라 해서)      원자탄의 가공할만한 위력에 설계했던 사람도, 만든 사람도, 그것을 현장에 투하했던 사람도 모두가 놀랐다. 아무도 이렇게까지는 예상을 못 한 것 같다.      미국은 8월 9일 정확히 3일 후, 다시 나가사키에 이번에는 암호명 ‘팻맨’을 같은 기종에 탑재하여 투하했다.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우리나라는 원자탄이 투하된 지 일주일 만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이한다. 우리 힘으로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를 염원했지만 어쨌든 서방의 도움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조부께서도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이 히로시마의 원자탄 투하로 말미암음을 알고는 아연실색했다. ‘왜 하필 히로시마에?’ 아들 생각에 주름진 얼굴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맺힌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한열아 ~’ 신음하듯 부른 아들의 이름은 소리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만 속에서 메아리 되어 사라지고 만다. 히로시마에 그 난리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비록 연락은 닫지 않았으나 생존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작은아들만큼은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폭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더군다나 히로시마는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사는 곳이 아닌가. 아들 또한 히로시마에 있는 줄 알기에.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원폭 앞에서는 하며 아들의 생존에 대한 희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지나고 해가 바뀌고 강물이 연하여 흘러가듯 작은아들을 마음 속에서 내려놓았다. (돌아오지도 못할 자식 붙잡고 있어서 뭣할까.)      그로부터 몇 해가 흘렀다. 이번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또 한 번 전 국토를 피로 물들인다. 1950년 6.25가 발발한 것이다. 북한의 일방적인 무력 남침으로 전 국토는 하루아침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감긴다. 그야말로 남과 북의 이념전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넷째 남동생이 전쟁 중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내몰렸다. 아버지 형제분 중에서 유일하게 내 기억에 없는 분이다. 그래서 함자도 잘 모른다. 들어본 적도 물론 없다. 우리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큰 누님과 큰 형님만 그것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대다수 형제들은 그분이 전사하고 난 뒤에 태어났으므로 잘 알지 못한다.      입대 전에 결혼도 했다. 그러나 자녀를 남기지 못하고 전사했다. 사인은 너무도 원통하고 기가 막혔다. 전투를 마치고 다음 전투를 위해 각자 총기를 손질하는데 반대편에서 총기 손질을 하던 총구에서 그만 격발이 된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총기 오발 사고였다. 격발된 탄알은 그대로 목을 관통하여 손쓸 틈도 없이 즉사했다고 한다.      이 소식은 전사자의 고향에도 통보되어 또 한 번 죽음보다도 더한 슬픔이 온 집안을 휘감았다. 이렇게 조부모님은 전쟁터에서 한 아들을 잃고 또 아들 하나는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벌써 수 년이 흘렀다. 그때의 조부모님의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결혼한 다음 비로소 어릴 때 짧게 뵈었던 나의 조부님이 생각났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내가 태어날 무렵, 조부님은 매우 연로하셨다. 지팡이를 짚지 않으시면 외출을 할 수도 없었다.      큰집(큰아버지 댁) 청 마루에 서면 비교적 먼 곳까지 보인다. 서서 있는 것도 힘겨워 아예 천정에 줄을 매달아 붙잡고 먼 곳을 응시하셨다. 그때는 잘 몰랐다. 그냥 저 너머를 쳐다보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떠나간 자식들이 행여나 저 동구 밖 넘어에서 꼭 올 것만 같은 할아버지의 애타는 기다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365일 항상 대문을 닫지 말고 열어두게 하셨다.      “대문 닫지 마레이.......”      이미 눈물샘은 말랐고 애달픈 마음만 남아 자식에 대한 그리움만 깊어간다. 입은 반쯤 벌린 채 다물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소리도 잘 나오지 않으셨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줄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부르다 부르다 지쳐서였을까?      기력을 다해 줄을 붙든 손은 떨고 있었다. 그날도 기다림에 지친 움푹 들어간 눈은 버스가 머물다간 빈자리를 놓지 않으셨다. 그 모습이 마치 얼마 전 같이 생생하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 사인은 위암으로 밝혀졌다. 그렇다고 위암이 할머니 집안의 유전으로 내려오던 병은 아니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두 아들을 잃었는데 어떻게 부모가 온전할 수 있으랴. 심약함이 극에 달했을 텐데 무슨 병인들 못 찾아올까. 할머니는 두 아들을 잃은 충격에서 끝내 회복되지 못하셨다.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못 되어 몹쓸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 할아버지를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났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의 막내아들은 갓 스물로 20세 약관이었다. 아버지의 맨 나중 동생으로 할머니는 그런 막둥이가 몹시 눈에 밟혔나 보다.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마음은 늦게 태어난 자녀에게 머무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임종의 자리에서도 그런 막내가 많이 걱정되어 특별히 아버지에게      “네 동생을 부탁한다.” 하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      아버지 또한 자기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에      “어머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안심은 시켜드렸지만 그래도 뜻대로 다하지 못함을 인해 늘 마음에 부담으로 간직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번은 아버님이 연세가 많이 드셨을 때 혼잣말처럼 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위암으로 음식을 넘기지 못하셨을 때 마땅히 대체할 것이 없어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는데 혹시 쌀을 물에 불린 다음 곱게 갈아서 밥 대용으로 먹여드렸으면 어땠을까?’      물론 쌀가루가 무슨 약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밥을 대신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해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여러 번 되뇌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해가 바뀌었다. 계절은 다시 돌아 봄이 왔다. 얼어붙었던 대지는 속에서 움을 틔운다. 골짜기를 덮은 눈은 녹아 내(川)를 이루고 땅을 적신다. 꽃이 핀다. 새들은 겨우내 답답했는지 종일 울어댄다. 세월은 그렇게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흘러간다. 머물러 주지 않는다. 또 기다려주는 일도 없다. 집안은 다소 무거운 봄을 맞이했다.      자손들이 여럿 태어났음에도 텅 빈 것 같았다. 전쟁이 끝나고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고향의 풍경은 고즈넉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젊은 신사가 버스에서 내렸다. 함께 내린 사람은 아내와 딸과 아직 어린 아들은 안고 내린 다음 걸리운다. 동네 사람들은 힐끗힐끗 그들을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뚫어지게 쳐다보지만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신사는 동리가 익숙한 듯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고 곧장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집 문 앞에 다다르자 그 집 사람들조차 처음에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금방 누군지 알아보았다.      “한열아!”      “아부지-”      그렇게 늙으신 아버지와 아들은 오래도록 서로 목을 어긋맞게 하고 흐느껴 울었다.      “이제 너를 봤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그랬다. 오래 전 열일곱 살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할아버지의 작은아들이 돌아왔다. 떠날 때의 자신의 나이보다도 더 오랜 무려 18년 만의 일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서 그것도 가족을 거느리고 돌아온 것이다. 꿈 속에서나 나올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오히려 낯선 얼굴이 더 많이 눈에 띈다. 고향을 떠나온 사이에 아버지의 손자 즉 조카들이 많이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당황한다.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다음날 작은아버지는 모친의 산소를 찾았다. 1년 전에 돌아가심을 알고 오열했다. 원통한 듯 모친의 무덤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뒤늦은 후회였다. 그러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아쉽고 억울하고 원통함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괴로움은 살을 찢는 것보다 더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 같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목놓아 불러 보지만 모친은 아무 대답이 없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하루 종일 무덤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저녁이 다되도록 울다 지쳐 그의 실신 상태가 된 것을 동네 청년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부친의 기력이 눈에 띄게 쇠약해지자 자주 고향을 방문하셨다. 나의 조부님은 78세를 일기(一期)로 생을 마감하셨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괴로움이 유독 많은 인생이었다. 첫 번 아내는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났다. 또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도 여럿 두었다. 두 아들을 잃고 그중 한 아들은 전쟁터에서 앞서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또다시 아내를 먼저 보내고 자신은 온전치 못한 몸을 이끌고 뒤에 남았다.      수한(壽限)이 다 됨을 아시고 자녀들과 그 몸에서 나온 자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운명(殞命)하셨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여덟 살이었다. 아직 어려서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죽음을 처음 보았다. 눈이 붓도록 많이 울은 누나가 여전히 슬픈 얼굴로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셔서 다시는 뵐 수 없다.”라고 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말에 비로소 슬퍼졌다.      작은아버지는 원폭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람들의 온갖 멸시와 천대를 다 이기고 살아남으셨다. 그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교포 2세인 작은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이루어 슬하에 1남 2녀를 두셨다. 모두 대학까지 공부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오래 전 나는 혈육 중에 처음으로 히로시마 작은아버지 댁을 방문했다. 감개무량하신지 연세가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의 명소들만 골라서 구경을 시켜주셨다. 도쿄에서 전날 저녁 고속버스를 타고 다음 날 아침 7시 30분 히로시마 터미널에 도착했다. 사촌 누나가 먼저 약속 장소인 시계탑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작은아버지를 만나 간단하게 모닝커피와 빵을 먹은 다음 맨 먼저 원폭이 투하됐던 그 자리를 방문했다. 일명 평화의 공원으로 당시 히로시마 시청 자리였다. 세계평화를 위해 상징적인 의미에서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었다. 기념관을 둘러본 다음 비로소 집으로 향했다. 이틀 후,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신칸센을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사촌 형(사촌 형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서울 우리 집에서 1년을 함께 생활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소개하겠다.)이 배웅을 나왔다. 기쁨보다는 낯설고 먼 이국땅에서 그것도 가장 가까운 혈육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서로 사촌 형제라는 것만 알고 말도 통하지 않아 왠지 모를 안타까움만 가중되었다.      그 만남 이후 지금까지 누나와 형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신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와 같은 해에 일본에서 돌아가셨다.   2        나의 아버지는 18세에 결혼하셨다. 어머니는 그보다 정확하게 한 살 적은 17세였다. 두 분은 음력 섣달 스무하루(12월 21일)로 생일이 같았다. (아버지 1920년생, 어머니 1921년생) 어머니의 친정 즉 외가댁은 옛날부터 대학자 집안으로 농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직 학문을 연구하고 유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하였다.      외조부(外祖父)는 생비량면에서 나고 자란 분이 아니셨다. 원래 한성 즉 서울을 원적으로 두고 있었다.      오래 전 180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발전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변혁을 꾀하셨는데 다만 일본의 힘을 의지하여 변화를 모색하신 것은 아니었다. 당시 뜻을 같이하여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은 근대 역사를 공부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름만 들먹여도 금방 아는 인물들이다. 함께하여 도일(渡日)을 꿈꾸었으나 홀로 계신 모친의 갑작스러운 건강악화로 그만 동행하지 못했다. 이후 일본 사람들의 집중적인 견제가 시작되었고 이는 신변의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여 지금의 생비량면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왜 하필 이곳을 선택하셨는지?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외조부는 당시 드물게 외동으로 태어나셨다. 뒤에 안 사실은 집안이 오래도록 독자로 내려왔는데 외조부 때에 비로소 여러 자녀를 두게 되었다.      여러 형제 중 특이하게 어머니에게만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이유는 글을 깨우치면 단명할 운명이라 하여 외조부께서는 자녀들에게 특히 그 오빠들에게 어머니 앞에서는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조차 금할 정도였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어머니는 스스로 공부를 하고자 했지만 한사코 허락하지 않으셨다.      앞에서 언급했듯 어머니는 17세에 결혼하셨다. 요즘은 있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때 당시는 그 연령(年齡) 때가 거의 보편적이었다. 일본군들이 시집가지 않은 젊은 처자를 늑대처럼 호시탐탐 노리기도 했었고, 또 결혼문화가 지금 하고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어느 날, 문득 내 어린 기억 속의 부모님의 나이를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는 어떻게 아버지와 만나게 되었을까? 하고 강한 궁금증이 생겼다. 사실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궁금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지금처럼 둘이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했을까? 물론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전적으로 부모님이나 아니면 집안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친가와 외가는 거리도 있을뿐더러 만날 일이 그의 없는 집안이었다.      친가는 대대로 농사일이 주업이요, 외가는 대대적인 학자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직접 들은 적은 물론 없었다. 큰 누님도 형님도 알려주는 이가 없다. 아니, 잘 모르는 것 같다. 궁금증은 점점 내 속에서 깊어갔다. 그럴수록 답답함만 가중되었다. 혹시 단서가 될까 하여 희미하지만 옛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안타깝게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이쯤에서 결론을 내렸다. 부모님과 나의 형제들에게는 들은 적이 없다고.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외가댁에 외사촌 형님 즉 어머니의 친정 조카가 아직 생존해 계심을 알았다. 연세가 매우 많았다. 거의 90이 다 되었다. 어머니 둘째 오빠의 아들로 어머니의 친조카였다. 다행히 형님은 총기가 여전하셨고 비교적 자세하게 아니, 자세하다 못해 섬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나게 된 사연은 이러했다. 어머니의 세 오빠 중 둘째 오빠의 올케언니 즉 외숙모님이 자신의 친정어머니께 시누이(나의 어머니)를 소개하고 외숙모님의 친정어머니는 다시 자신의 친정집으로 기별을 넣어 조카들 가운데 특별히 아버지를 소개했다고 한다.      아무튼 복잡하다. 복잡하여 나로서는 들어도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두 분은 서로 만나기 전 다른 데 선을 본 경험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외조부님은 기운이 진하여 어머니가 시집오시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 나의 조부님도 앞에서 살펴봤듯이 훌륭한 분으로 자녀들 또한 혼사를 청탁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머니 또한 외조부님의 명성에 힘입어 농사지으며 고생하는 집보다 공부하며 가르치는 집으로 얼마든지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아홉 남매나 되는 어머니의 형제분들은 어머니가 농사짓는 시골 골짜기로 시집가기를 만류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몸도 약한 데다 지금껏 농사는 근처도 가보지 않아서 행여나 어린 나이에 시집살이로 고생할 것 같아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두 분은 그렇게 만나 결혼했다. 아쉽게도 빛바랜 결혼식 사진 한 장 없다. 사진을 안 찍은 것인지, 아니면 보관을 못 한 것인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얼굴은 서로 결혼하는 당일까지 보지 못했다. 양가 집안 어른들이 보고 마음에 들면 그만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매우 건장하시고 인물도 미남이셨다. 어머니 또한 몸이 약한 것 외에 어디 흠 잡힐 곳이 없었다. 나는 두 분 사이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금부터는 되도록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고자 한다. 시간을 뛰어넘어 왔다 갔다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정신 못 차릴 정도의 혼란을 줘서는 안 되겠다.        시골에서는 집을 새로 지을 일이 거의 없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고 당장 농사와도 시간적으로 겹치다 보니 집을 짓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조부께서는 아버지에게 새집을 지어 분가하게 하셨다. 아버지 어머니의 신혼집이었다. 그곳에서 우리 형제들은 태어나고 자라고 장성한 다음 객지로 떠나올 수 있었다. 결혼하시고 바로 아이가 생기지는 않으신 듯하다. 한동안 아이가 없다가 몇 년이 지난 다음 어머니는 비로소 첫아이를 잉태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달이 차도록 아이가 나오지 않았다. 예정보다 늦게 나왔는데 죽어있었다. 아이가 죽은 채 태어난 것이다. 아직 모든 것에 미흡한 어머니와 아버지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병약함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복용했던 강한 약이 문제가 되었을까? 지금처럼 병원에서 일정하게 태아의 상태를 관찰하고 했으면 아마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리고 2년 후, 어머니는 다시 잉태했다.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출산했다. 딸이었다. 그리고 딸이 네 살 무렵, 어머니는 아들을 출산했다. 아들에 대한 선호(選好)가 남다른 어머니와 조부모님께 큰 위안이 되었다.      어머니는 연이어 또 아들을 출산했다. 생글생글 토실토실 탐스러울 만큼 어여쁜 아이였다. 이름도 있었다. 그러나 생명이 그리 길지가 못했다. 어머니에게 찾아온 너무나 큰 슬픔이었다. 아무 말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산모는 아이가 들어서면서부터 출산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농촌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할 일이 있다.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임신한 몸은 무겁고 힘들다. 또 조심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 적어도 농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아들을 낳았다. 이름도 많이 불렀다. 그러나 아이는 새벽하늘의 별처럼 부모 곁을 떠났다. 어머니는 그 슬픔이 매우 컸는지 나에게도 자주 말씀하셨다. 통통하고 쌩글쌩글 웃는 아이였는데 하고...... (이 부분은 수필 ‘어머니의 사랑’에서 짧게 언급한 적이 있다.)      6. 25가 일어나자 아버지를 비롯한 동네 남자들은 인민군들을 피해 뒷산으로 몸을 숨겼다. 마을에는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만 남았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을 학대한다든지(사회주의 사상을 강요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녀자들에게 몹쓸 짓을 행하는 일들은 다행히 발생하지 않았다. 산 속에 도피한 것이 발각되어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고 줄줄이 붙들려 나왔다. 각 마을에서 끌려 나온 사람들은 학교 운동장으로 집결했다. 젊은 사람들은 교화하여 사회주의 당원이 되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남한 지역에 빨리 공산주의 사상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밤낮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념교육을 실시했다.      전쟁 발발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남한의 전 지역이 낙동강 유역 일부를 제외하고 적의 손아귀에 거의 넘어가다시피 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엔은 한반도가 쉽게 공산화되도록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미국은 일본에서 태평양 사령관으로 복무 중인 맥아더 원수를 급히 파견한다. 전세가 갑자기 불리해지자 북한 인민군들은 남자들을 포로처럼 북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도 동네 사람들과 무더기로 끌려가는데 거창 정도쯤 가고 있었을까, 이때 누군가가 “사대동 어른, 사대동 어른” 하고 같은 마을의 장씨가 강 건너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 같아서 그때마다 “여기 있다. 여기다.” 하고 대답을 했다. (사대동 어른은 어머니의 태고를 높여 아버지를 부르는 말) 아,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잠시 후, 인민군 하나가 잔뜩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독사같이 눈은 불꽃을 뛰었고 입가에도 흡사 독 같은 거품을 물고 있었다. 마치 성난 독사를 보는 것처럼 두려웠다. 소총에 장착된 대검은 햇빛에 반짝였다. 앞에 총자세를 하고 증오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아버지를 노려보며      “방금 누가 대답했어? 소리친 놈이 누구야?”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고 눈동자는 실성한 것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 앞이 깜깜해 온다. ‘내가 그랬소’ 했다가는 이유도 묻지 않고 대검으로 사정없이 찔러 죽일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인민군들은 이번 전쟁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잔혹하게 많이도 죽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위기 속에서 당황한 기색이나 낭패한 표정으로 상대방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셨다.      “조금 전 어떤 사람이 뭐라고 소리치며 지나갔소.” 하고 위기를 모면했다.      인민군은      “잡히기만 해봐라, 확 멱을 따 버릴 거다.” 하고 여전히 살기등등한 기세로 씩씩대며 아버지 앞을 지나갔다. 그는 모퉁이를 돌자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는 듯 온갖 상스런 욕을 퍼붓는다.      만일 옆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 대답했잖아. 누굴 핑계 대고 있어.’ 하고 아버지를 몰아세웠거나 아니면 당황하여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면 그래서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기라도 했으면 ‘야, 요놈이 날 놀렸구나.’하고 가볍게 사람의 목숨을 해(害)했을 것이다.      훗날 아버지도 그때가 많이 당황이 되셨는지 한번 두 번 회고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들을 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만일 그때 아버지에게 위해가 가해졌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인민군은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당국의 지령을 받들어 최대한 사람들을 붙잡아 북으로 옮기는데 도중에 그만 자기 동생을 놓치고 말았다. 동생도 인민군으로 아무리 북한 사람이라도 형제애는 있어서 남하할 때 항상 같이 있었다. 그런데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이에 그만 동생이 없어진 것이다.      동네 장씨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던 그 소리는 바로 인민군 형이 자기 동생을 부르는 소리로 나름 심각하고 애달프게 동생을 찾는 소리였다. 동생도 아니면서 마치 동생인 것처럼 대답을 해댔으니 애타는 남의 심정도 모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나 보다.      인민군들은 이 많은 사람들을 걸어서 북으로 데리고 가기에는 무리였을까? 맥아더에 의해 졸지에 반전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북송을 멈추었다. 그 후 전쟁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밀고 올라갔다가 또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막혀 밀려 내려왔다 또 밀고 올라갔다를 반복하다.      1953년에 비로소 무기한 휴전에 들어간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전쟁의 상처는 너무도 가혹했다. 상흔(傷痕)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녀들이 여럿 태어났다. 마을은 이전처럼 빠르게 복원되었다. 다리도 새로 놓고 길도 넓히고 해서 조금씩 변모해갔다. 그러나 평화로운 고향도 춥고 배고픔은 비켜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노름을 좋아하셨다. 농번기가 끝나거나 비가 내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투전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거친 세계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겨 기별을 넣으려고 아녀자나 딸들이 찾아가면 두려워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서 오기 일쑤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물론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고 들은 체 만 체 뭐 때문에 그러느냐 하고 묻지도 않으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찾으신다면 두말없이 일어나셨다. 그날따라 패가 잘 붙는 날이든 그렇지 않은 날이든 당신의 부모님이 찾으실 때는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쪽 방면에도 남다른 소질을 갖고 계신 듯하다.      보통 노름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나는 지금까지 노름해서 잘됐다는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반해 아버지는 잃는 경우는 거의 없고 상당 부분 돈을 거머쥐었다. (요즘으로 하면 뭐 타짜 정도) 제법 멀리까지 이름이 나 있는 꽤 유명한 타짜였다. 훗날 누나가 알려주기를 어디 어디 논은 아버지가 그거 해서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던 노름을 멀리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도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겨울비였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인해 햇빛은 보이지 않았다. 춥고 음산했다. 금방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그런 환경이나 분위기는 크게 상관이 없으신 듯하다. 날씨만큼이나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 분위기는 오전 이른 시간부터 이어지다가 오후로 넘어갔다. 비는 여름날처럼 굴곡이 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렸다. 그런데 우체부가 난데없이 노름판에 들어와서는 아버지를 찾으신다.      “사대동 어른 계십니까?”      “무슨 일인데 그러오?”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가?” 아버지는 우체부와 눈도 맞추지 않고 오직 화투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이나 행동으로 봐서 우체부가 귀찮은 듯했다.      “어디서 왔소?”       우체부는 편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부산에서 왔는데요.”      “혹시 딸한테서요?”      “아닙니다.”      “그럼 읽어보오.”      우체부는 개봉하여 읽어 내려가다가 중간쯤부터는 소리 내어 읽지 않더니 갑자기       “어르신 큰 아드님의 부산 고등학교 합격통지서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순간, 아버지는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이 굳어있었다. 물론 쥐고 있던 화투장도 자기도 모르게 손에서 떨어졌다. ‘내 아들이 고등학교를 합격했다고?!’ 마치 신음같이 흘러나왔다.      비록 노름판이지만 다들 적잖이 놀란 표정들이다. 고향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요즘으로 하면 외국으로 유학 보내기보다 훨씬 더 힘들고 경사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로소 자녀들이 줄줄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무슨 결심이라도 하셨는지 돈도 다 돌려주고 그 자리에서 미련 없이 박차고 일어나셨다.      그 후, 아버지는 완전히 변했다. 더 이상 화투나 그런 비슷한 것은 다시 손에 쥐지 않으셨다. 그리고 노름판으로의 발길도 뚝 끊었다. 오직 땅을 일구고 하여 온종일 들녘에서 보냈다. 점심도 들에서 먹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그 일은 어스름이 내려올 무렵까지 이어지다가 캄캄할 때 들어오셨다. 귀에 따가운 아내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부모님의 염려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아들의 고등학교 합격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지금처럼 농기계의 도움은 전혀 받지 못했다. 오로지 지게가 전부이다. 그렇게 잡초와 온갖 들풀과 나무들이 무성하던 땅들은 한 뼘씩 한 뼘씩 경작이 가능한 땅으로 변해갔다. 어떤 땅은 마을의 최고 일꾼 최팔용 씨가 논으로 일구다 일구다 포기했던 것을 그래서 사람들이 더더욱 엄두도 못 내던 것을 아버지는 도전하셨다. 마을 사람 모두가 말렸다.      “죽도록 고생만 한다니까, 오죽하면 최 씨가 하다 하다 포기를 다 했을까.” 하며 한결같이 만류하셨다.      막상 시작해보니 최팔용 씨가 포기할 만도 했다. 돌을 깨서 옮기기만 벌써 몇 달째다. 큰 돌은 불을 지펴 달군 다음 함마로 잘게 부수고 지게에 담아 나른다. 돌을 다 빼어낸 그 자리에 이번에는 흙을 채워 넣는다. 무작정 아무 흙이나 채우는 것이 아니라 순서가 있었다. 그렇게 일일이 지게로 흙을 퍼 나른다. 그리고 다음은 냇가에서 물꼬를 터와야만 한다. 물론 양수기를 이용할 수도 없고 또 그런 것은 있지도 않았다. 오직 물길을 새로 만들어 물을 대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땅은 조금씩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변모해가고 점차 기경(起耕)이 되어갔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오직 아버지의 손으로만 일군 논과 밭들은 해마다 기대 이상으로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다. 몇 해가 못 되어 아버지 소유의 논과 밭들이 많이 생겨났다. 마을은 아직도 배고픔과 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가정들이 태반도 더 되었다.      ‘보릿고개’ 농민들은 전년도에 수확한 식량이 거의 바닥나고 보리 수확까지는 몇 달 남은 시기로 대략 음력 4~5월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잠시 후 몰아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굶주림은 1960년까지 이어지다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점차 회복되었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도 여느 집과 다를 바 없었지만 아버지의 강인한 의지로 인해 보릿고개 같은 큰 어려움은 그래도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집에는 품삯을 주며 일하는 사내가 둘이나 있었다.      큰 형님은 부산에서 학업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신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셨다. 아버지는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전날 미리 내일 할 일과 분량을 계획해 놓으시고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아버지의 한결같은 자세는 자녀들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      여러 형제 중에서 가장 늦게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사람들이 그래도 잘 되었다. 작은 형님은 그런 아버지의 교훈과 삶의 지혜는 훗날 사회생활의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작은 형님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내용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이번 글에서는 간략하게 하고 한 권의 책으로 만나기를 기대한다. 나의 수필 ‘지난 기억’에 조금 소개된 적이 있다.)      큰 누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시집가셨다. 큰 누님의 존재는 시간이 많이 지난 이후에 알게 되었다. (큰 조카는 나보다 세 살 많고 둘째는 나와 동갑이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께서 그렇게 애를 갖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셋째 누님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행에 발탁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부산에서 생활했다. 집안의 생필품과 생활용품들은 거의 셋째 누나가 사서 보내주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안방 벽면에 한 번도 시간을 거르는 적이 없는 쾌종 시계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입었던 옷들은 전부 누나가 은행 다니면서 마련해 주셨다.      한 번은 셋째 누나로부터 편지가 왔다. 저녁을 먹고 밥상을 물린 다음 아버지를 비롯해 온 가족이 모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작은 누나가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사연은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잘 생각나지 않지만 먼저 본인의 안부를 간략하게 적어놓았다. 부모 형제들 덕분에 잘 생활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부모님을 안심시켜 주었다. 가족들을 일일이 들먹이며 안부를 물었던 것 같다. 그래도 막냇동생이 제일 생각이 나고 보고 싶다고 했다. 떨어져서 생활하다 보니 집이 그립고 부모 형제가 많이 생각난다는 내용 들로 가득 채워진 것 같다. 모두의 안부를 물은 다음 끝으로 ‘어머니 아버지 몸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하고 끝을 맺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편지를 붙들고 훌쩍훌쩍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도 어린 딸이 멀리서 고생하며 또 가족들의 안부와 부모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것이 무척 마음 아픈 듯 급히 담배를 챙겨서 뒷간으로 향했다.      둘째 누님은 내가 일곱 살 때 같은 군과 면을 주소로 쓰는 동네로 시집가셨다. 아직 산허리의 눈이 채 녹지 않은 이른 봄으로 기억된다. 마당 전체에 멍석이 깔렸다. 나는 그때까지 결혼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필 누나 결혼식이 처음이었다. 많은 손님들로 인해 집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두루마기를 입은 작은할아버지인지 아니면 동네 어르신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분께서 주례를 보셨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신랑 입장을 외친다. 그러자 이몽룡이가 썼던 것과 같은 사모를 쓰고 훤칠한 신랑이 큰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 집으로 걸어 들어왔다. 모인 사람들 중에 제일 키가 컸던 것 같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음은 신부 입장을 외쳤다.      누나의 양쪽 볼에는 빨갛고 동그란 연지곤지가 곱게 붙어있었다. 머리도 곱게 빗어넘기고 거기에 나름 화려하게 장식된 족두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예복하고도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움직임이 어색한 신부의 양옆에는 항상 두 사람이 도와주었다.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구경하고 옆집 담벼락 위를 딛고 올라서서 목을 쭈욱 뺀 사람도 더러 있었다. 몇 차례 서로 큰절을 주고받고 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순서에 따라 예식은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폐백까지 마쳤다. 거의 끝날 무렵 사진 촬영이 기다린다. 거동이 많이 불편한 할아버지도 누군가의 등에 업혀서 참석하셨다.      사진사가 말한다.      “사진 찍을 분 다 모였습니까? 혹시 빠진 분은 없는지 옆으로 돌아보세요.”      다 모인 것 같은데 하고 저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 그런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신부인 누나 외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막내가 보이지 않으니, 얘가 오기 전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하여 모두 기다렸다. 사람들을 풀어 친구들과 놀고 있는 애를 겨우 찾아서 데리고 왔다. 검정 고무신에 앞뒤 구분 없는 바지를 입고 아슬아슬하게 맨 앞줄에 서 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카메라를 노려보면서 말이다. 그렇게 여러 번 플래시가 번쩍번쩍하고 그리고 결혼식은 끝났다. 매형은 3일 정도 우리 집에 머문 다음 누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      문제는 신부를 데리고 가기 전날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동네 청년들이 모두 모여서 매형을 꼼짝 못 하게 한 다음 대여섯 명이 다리 하나씩을 붙잡고 발바닥을 사정없이 패대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 동네 처자를 그렇게 쉽게 데려가도록 우리가 내버려 둘 것 같아 어림없는 소리 그냥은 못 보내줘.’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좋은 날에 비슷한 연배들이 모여 축하하기 위함이고 정겨움의 표시였다. 술상을 내오게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다리를 붙들어 매고 노래를 부르다가도 밑천이 떨어지면 또 붙들어 매어 발바닥이 불이 나게 했다. 그렇게 흥에 겨운 웃음소리와 함께 젓가락 장단에 맞혀 불러대는 노래는 밤 깊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누님은 거의 어머니를 대신해서 나를 키웠다. 가장 기쁜 날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가장 슬픈 날이었다. 그렇게 유년 시절의 추억은 여덟 살 이전 누나가 시집가기 전까지가 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누나들은 말끝마다 나를 보고 ‘조선에 없는 우리 금덩어리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노.’ 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버지께도 무척 슬픈 날이었는지 아무도 없는 데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둘째 누나는 비록 여자라도 큰 일꾼이었다. 남자도 아버지의 성에 차도록 일하기에는 무척 힘들었는데 하지만 누나는 아버지가 놀랄 정도로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비료를 주기도 하고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모든 것에 능숙했다. 하여 여러 자녀 중에 둘째 누나에게만 너무 가혹하게 일을 시킨 것 같아 그것이 못내 미안하고 당신에게는 평생 아픔으로 남은 것 같다.      하루아침에 누나가 없자 집은 공허하고 텅텅 빈 것 같았다. 아마 그것은 내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아니, 남은 식구들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한동안 엄마가 옆에 있어도 많이 힘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우울함을 느꼈다. 그렇게 장난꾸러기이고 천진하고 종일 동네를 싸돌아다니며 까불고 또 장난치고 하던 아이가 갑자기 병이라도 난 것처럼 조용해졌다.      한 번은 아버지께 누나가 너무 보고 싶다고 울며 매달린 적이 있었다. 이해하셨는지 ‘단계’에서 ‘가회’ 방면으로 얼마쯤 가다 보면 ‘꺼꿀’ 이란 동네가 나오는데 거기서 또 얼마를 가다 보면 ‘거동’이란 동네가 나온다. 거기서 네 매형 이름을 대면 사람들이 알려 줄 것이다. 이게 전부였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들로 그쪽으로는 전혀 가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누나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보니 두려움도 사라졌다. ‘단계’까지는 차를 타고 그 다음부터 아버지가 일러 주신대로 물어물어 찾아갔다. 약 10리는 걸어서 간 것 같다. 아무 기별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기 때문에 누나도 무척 놀라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다. 생각지도 않게 막냇동생이 찾아온 그때 그 일은 누님에게도 매우 인상 깊었던지 곧 50년 전의 일이 되는데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누나를 보고 왔어도 한동안 많이 생각이 났다. 이듬 해, 누나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친정집에 왔다. 그런데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갓난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를 보는 순간, 왠지 내가 큰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얼마 후, 부산으로 이사하시고 지금까지 줄곧 부산을 떠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의 기력은 점점 약해져 갔다. 아버지는 그것을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평소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추어(鰌魚)를 잡아다가 푹 고아 드리면 원기를 회복하실까, 냇가로 나가자고 하신다. 그날따라 비가 많이 내렸다. 비옷을 챙겨 입고 장화를 신었다. 그리고 양동이를 손에 들었다. 누나가 있을 때는 두 분이 자주 미꾸리를 잡아다가 할아버지께 드렸다.      한 번은 두 분이 등껍질이 어른 손등 두 개보다도 넓은 자라를 그것도 두 마리나 잡아 오셨다. 자라의 배 부분은 짙은 황갈색을 하고 있었다. 장수하는 대표적인 동물로 크기나 모양새가 상당히 오래돼 보였다. 신기한 듯 동네 친구들이 구경 와서는 감탄해 맞지 않는다. 저녁에 어머니는 두 마리를 별도로 요리하여 할아버지께 올려드렸다.      아버지를 따라 고기를 잡기 위해 냇가로 나가기는 처음이다. 도구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다. 재를 치우기 위해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채 소쿠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물고기를 담을 양동이, 이렇게 챙겨 들고 아버지와 나는 냇가로 향했다. 비는 오지만 그래도 마음은 무척 설레었다.      내가 생각했던 우리 논 저 너머의 냇가는 아니었다. 논과 논 사이에 흐르는 수초 덮인 조그만 농수로였다. 비가 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물은 배로 불어 있었고 물살도 제법 빨랐다. 아버지는 풀숲 입구에 채 소쿠리를 고정하여 붙들고 한쪽 다리로 수초 이곳저곳을 힘껏 밟았다. 그리고 잠시 후 채 소쿠리를 들어 올리자 놀랍게도 물은 빠지고 미꾸리만 남았다. 그렇게 할 때마다 신기할 정도로 많이 잡혔다. 양동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절반을 훌쩍 넘었다. 생각보다 빨리 채워지자 혹시 이번에도 자라가 한 마리쯤 잡혀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가 컸다. 하지만 자라는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를 따라나설 때도 좋았지만 돌아올 때는 더욱 좋았다. 아버지는 잡은 물고기를 능숙하게 손질하시고 어머니는 양념을 준비하여 할아버지 저녁 밥상에 올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추억의 시간은 그 후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다양한 곳으로 견학하고 방문하여 조금이라도 식견을 넓혀주려고 애를 쓰지만 나는 부모님과 그런 기억은 하나도 없다. 대신 연로하신 할아버지를 위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하여 말 없는 교훈과도 같았다.      나는 지금 그 옛날 아버지가 자기 부친의 기력이 조금이라도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를 맞으며 냇가로 갔던 그때를 보내고 있다. 이제 집에는 작은 누나와 작은형만 남았다. 나는 초등학교를 갓 입학할 무렵이고, 형과 누나는 이미 중고등학교 끝 무렵의 고학년이었다.      식사는 항상 두 테이블로 나눠서 했는데 나는 아버지와 겸상을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은 아버지 혼자 드셨는데 여럿이 먹는 상이 점점 비좁아지자 나를 아버지와 함께 자리하게 했다. 그때 처음 식사예절을 배웠던 것 같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먼저 숟가락을 들게 하지 않았다. 또 먹음직한 고기가 올라왔어도 아버지께서 먼저 맛보신 다음 먹을 수 있었다.      방학이 되면 진주에 사는 한 살 아래 사촌 여동생이 가끔 다녀갔다. 동생에게 우리 집은 외갓집으로 아버지는 큰 외삼촌이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동생은 아주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래서 다리가 조금 불편했다. 흔히 외갓집 하면 외할머니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동생에게는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두 분 모두 계시지 않는다. 아버지도 어렸을 때 외가댁에서 성장하여 그 심정을 잘 아시는지 방학이면 외갓집이라고 찾아오는 어린 자신의 조카를 마치 외조부모를 대신이라도 하듯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어머니에게 맛난 것을 준비하게 했다.      이럴 때 아버지는 동생과 겸상을 하시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했다. 놓여있는 반찬의 위치를 동생 편으로 조금 바꾼 다음 “애야! 많이 무레이~”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입술이 떨렸다. 마치 감정이 복받쳐 오르기라도 한 듯 나지막하고 가냘프기까지 했다.      “네, 외삼촌도 많이 드세요.” 총명하고 눈동자가 맑은 어린 여자아이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여러 사람이 식사하는데도 쩝쩝 소리나 달그락하고 수저 부딪치는 소리조차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곁눈질로 힐긋 쳐다보았다. 아, 그런데 아버지의 두 눈에는 큰 이슬방울이 깊게 고여있었다. 자기 여동생의 딸, 곧 어린 조카가 몹시 안타깝고 안쓰러움에 자기도 모르게 그만 눈시울이 젖었나 보다.      큰 형님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결혼하셨다. 형수님은 서울 태생으로 부족함이 없는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셨다. 사진을 먼저 보내주었는데 형수님은 긴 머리에 고운 자태를 뽐내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때까지 누나들만 보다가 이렇게 예쁜 미인은 처음 보았다. 너무 좋았다. 곧 우리 집에 온다는 말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되었다. 시골집이지만 처음 형수님이 서울에서 오신다기에 나름 분주하게 단장을 했다. 오후 막차로 도착 예정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계시고 모두 마중을 나왔다. 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결혼 축하드립니다. 형수님!” 하고 인사했다. 형수님은 아직 많이 어린 시동생의 인사가 인상 깊었는지 지금까지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계셨다.      형님은 서울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경제 발전은 그 변화가 생각보다 빨랐다. 더군다나 서울은 지방 시골하고는 그 격차가 나도 너무 컸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를 보고 형님은 생각이 깊었다. 어머니가 노산으로 어렵게 어렵게 낳은 막내동생을 한 살이라도 빨리 도시에서 성장하게 하자.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 밑에서 지게를 먼저 배우게 될 텐데, 우리 동생만큼은 결코 지게를 지우게 하지 말자. 하고 새로운 꿈을 꾸었다.      내가 9살로 해가 바뀌자 형님은 진주 작은어머니 댁에서 1년 간만 나를 머무르게 했다. 작은어머니는 앞에서 언급했던 한국전쟁에서 전사하신 작은아버지의 미망인으로 자녀는 없었다. 23세에 홀로 되셨는데 재가는 하지 않고 진주에서 학생들을 하숙하며 생활하셨다. 형님은 그곳에다 나를 맡겼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졌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작은어머니도 하숙생 형들도 시골에서 왔다고 놀리는 학교 친구들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괄괄한 성격의 작은어머니는 어지간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셨다.      어린것이 부모와 떨어져 있으니 참 안됐구나, 하는 측은한 마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통증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어머니와 그리고 무조건 내 편이었던 누나들 속에서 항상 발랄하게 생활했던 나로서는 적응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한마디로 이전 환경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한 번은 작은어머니가 담배 심부름을 보냈다. 물론 담배 이름은 말하지 않고 그냥 담배 한 갑 사 가지고 와라, 하고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무심코 담배 가게에서 주는 대로 작은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파고다"였다. "파고다"는 너무 독해서 피우지 않는다고 하셨다. 본인이 피우는 담배가 아님을 알고 어린아이를 향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말들이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무서워서 아무 대꾸도 못 했다. 마치 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세상에 없는 개구쟁이로 천진난만하고 모든 것이 자유로웠는데......      그러나 그렇게 명랑하던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도 심하게 두려움에 떨면서 말이다. 작은어머니와 함께 있기가 겁이 나고 두려워서 학교 다녀온 후 어두워질 때까지 이곳저곳 배회(徘徊)하다가 들어오곤 했다. 물론 집에 빨리 안 들어오고 뭣하고 다니냐며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욱 외곽으로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야단을 심하게 맞은 날은 섭섭하고 서운해서 밤새도록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면 또 무슨 말이 나올까 봐. 어린아이가 엄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는 그 아픔을 작은어머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와 담요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기억으로 거의 1년은 그랬던 것 같다. 평생 흘려야 할 눈물은 그때 거기서 몽땅 쏟았다.      한 번은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종고모) 정남이 아지매하고 또 다른 아지매 두 분이 함께 오셨다. 지나가는 길에 5촌 조카인 내가 보고 싶어서 잠깐 들렸다고 했다. 그런데 나를 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그때는 이유를 잘 몰랐다. 세월이 많이 지난 이후에 비로소 알았다. 아지매는 팔을 걷어붙이고 내 다리와 몸의 이곳저곳을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그러면서 눈물도 함께 흘렸다. 영문도 모른 채 나도 괜히 슬퍼졌다.      하루는 라디오에서 노랫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로 가사가 무척 슬펐다.           꽃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 할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엄마 잃은 가엾은 작은 새 ...........      왠지 나의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져 한동안 노래 제목도 가사도 모르면서 후렴구와 리듬만 흥얼댔다. (그날 라디오를 타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울렸던 가수는 존 바에즈였고 ‘메리 해밀턴’을 그때 처음 들었다. 물론 위 노래는 번안해서 양희은이 부른 ‘아름다운 것들’.      고향의 밤하늘은 은하수가 그림같이 흐르고 별들은 잡힐 듯이 가까이에서 빛난다. 어떤 날은 동전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그런 날은 마치 새끼 별들이 내려온 것처럼 여러 마리의 반딧불이가 고요히 날아다녔다. 손을 내밀어 위에 올려 보았다. 배 끝부분에서 부드러운 녹색 빛이 나왔다. 신기했다. 나의 눈을 과학자같이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렇게 반딧불이는 짧은 시간 어두운 손바닥 위를 신비한 빛깔로 비춰주고는 날개를 펴 날아간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놓지 않았다.      북극 먼 하늘에는 아스라이 별똥별이 사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내 고향! 친구와 함께 별을 헤아리기를 좋아하고 ‘저 푸른 초원 우에’를 신나게 부르던 아이! 그런 아이의 얼굴은 어느 순간 하얗게 질려있었고 깊은 근심이 내려있었다. 어떤 각도에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우울함이 뿌리 깊게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하다가 생겨난 것으로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한 결코 펴질 수는 없었다. 지금도 진주하면 딱히 눈물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해 1년은 9살이 감당하기에 많은 무리가 있었다. 어른들은 간혹 아이의 눈높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와 동등하게 판단하여 질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어린이의 동심(童心)과 순수한 영혼까지 멍들게 하는 것으로 아이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야단을 맞더라도 부모님께 맞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여파가 어찌나 컸던지 지금도 나는 가끔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이유 없이 눈치를 살필 때가 있다. 아마 그때 형성된 일종의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간혹 이런 생각도 가져 본다. 내가 만약 부모님과 함께 정상적으로 생활했다면 아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때까지만이라도 고향에 머물렀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말이다.   3        그렇게 정확히 1년 후 서울로 전학을 왔다. 큰 형님 댁은 아직 조카들이 태어나기 전이어서 말 그대로 신혼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수님께는 이래저래 미안한 부분이 너무 많다. 특히 나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로 인해 제대로 된 신혼생활도 사실 없었다. 오로지 나와 형제들을 위해서 평생을 희생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나는 형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큰 형님댁은 내가 전학 오기 전에 이미 작은 형과 셋째 누나가 먼저와 있었다. 셋째 누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발령을 받아 잠시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매형을 만나 결혼하기에 이른다. 작은형은 시골에서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했다. 농번기에는 일손이 부족하여 아예 학교에 갈 수도 없었다.      이대로 학업을 끝내기에는 아쉽고 더 늦기 전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부에 임했다. 결과는 원하는 대로 잘되지 못했다. 본인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것 같다. 원래부터 기초가 문제였다. 지난 수년간의 부족한 학업을 1년 만에 따라가기란 다소 무리가 되었나 보다.      작은 형은 그렇게 1년을 공부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해군 입대 영장을 받았다. 약 두 달간의 공백기를 남겨두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위해 매일같이 나뭇짐을 넉 짐 혹은 다섯 짐씩 했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부모님께는 입대 날짜가 다가오자 큰 바위골 아래 키 큰 소나무에 기대어 쌓아놓은 나뭇짐 더미가 자신이 그동안 쌓아 놓은 것임을 밝혔다. 그랬다. 작은형은 아버지를 닮아 우리 형제들 가운데 가장 다부졌다. 욕심도 대단했다. 같은 일을 했어도 남보다 못하면 몹시 분해했다. 입대하는 전날까지 고생하실 부모님을 생각해서 산더미 같은 나뭇짐들을 만들어 놓았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내일 첫차를 타고 진해로 가야만 한다.      추운 겨울이었다. 60년 만에 찾아온 추위는 연평도 앞바다가 얼었을 정도로 맹위를 떨쳤다. 어머니는 하필 이렇게 추운 날 아들이 군대를 간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들의 두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시려는 것을 가까스로 위로해드리고 다독여서 겨우겨우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작은 형은 3년간의 긴 해군으로 국방의 임무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2주 후, 소포가 도착했다. 옷과 신발이 들어있었다. 옷 사이에 손바닥 크기의 메모지가 들어있었다. '몸 건강히 훈련 잘 받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간단하게 안부를 보내왔다. 아들의 옷과 신발을 보며 어머니는 또 눈물을 흘렸다.      시골집에는 이제 작은누나만 남았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만 남을 때까지 마지막으로 작은누나가 함께했다. 이제 이글도 이쯤에서 끝을 맺을까 한다.      작은누나가 결혼해서 떠나온 다음은 그야말로 두 분만 남았다. 여러 형제 중에서 마지막까지 부모님의 일을 도왔던 작은누나도 어느새 연로하신 두 분만을 남겨두고 떠나올 때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농촌 생활이 무슨 아파트 생활도 아니고 농사일은 끝이 없는 데다 이제 농사짓기에는 두 분 모두 인생이 매우 깊으셨다.      아버지 어머니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자식들이 모두 장성한 후 독립하여 두 분만 남았을 때 무슨 얘기들을 주고 받았을까? 자녀들 이야기를 했을까? 아니면...... 나는 아직 그때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 잘은 모른다. 오래 전 그때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임자가 시집오는 날, 가마에서 내리는 모습을 곁눈질로 살짝 훔쳐봤소. 다소곳하게 고개 숙인 그때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구려.’      아버지는 뭐 이런 고백을 했을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임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를 어떻게 불렀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첫아들을 당신이 안고 친정에 처음 갔을 때 그때가 많이 생각이 나요.’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께 그런 마음의 고백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고 기를 때 힘들었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잘 참고 견디어 낸 것에 서로 감사와 위로의 말들을 나누었을까? 이 물음은 또 누구에게 여쭤봐야 알 수 있을까? 왠지 아무도 모를 것만 같다. 오직 두 분만이 간직할 뿐!      인생은 자신이 인지하든 아니면 못 하든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온다. 공사현장 옆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낙하물이 떨어져 참변을 당할 수도 있다. 요즘은 뜻하지 않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다행히 건강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지만 내일은 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암울하고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아버지의 인생도 많은 어려움과 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작은할아버지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출할 때 혹 일본군 순사에게 붙잡히기라도 했으면 아버지 또한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외조부님의 명성에 힘입어 보다 나은 집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 또한 조부님의 훌륭하신 인품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처자를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두 분 사이에 여러 사람이 연결되어있어 자칫 성사 확률이 그만큼 낮을 수도 있었다.      혹 두 분 중에 한 분이 다른 곳을 선택했더라면 아마 나와 나의 형제들은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북한 인민군에게 해를 받기라도 했으면 나는 태어날 수 없었다. 또 어머니는 나를 가지기 바로 전에 이미 세 명의 자녀를 잃었다. 그중 두 번은 출산까지 이루어졌었고 한번은 중간에 유산했다. 물론 지우려고 그 어떤 노력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그때까지만 해도 낳으려고 애쓰셨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처지가 바뀌셨는지 이제 낳지 않으시려고 무단하게 노력하셨다.      아이가 들어섰음을 알고 언덕에서 여러 번 구르고 심지어 뛰어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잘되지 않자 이번에는 하늘 수박 뿌리를 달여 먹었다. 처음 들이켰을 때 얼마나 강한지 각혈도 하고 하혈도 했다. 물론 본인도 혼절하다시피 했다. 생각하기를 한 번만 더 먹으면 이번에는 정말 떨어지겠구나 하고 한 번 더 다려 먹었다. 그때 낙태가 되었더라면? 어머니는 의도대로 잘되지 않자 이번에는 산부인과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지우려 했다. 그때 만약 수술대 위에 올라갔었다면 나는, 나는? 물론 햇빛을 보지 못 했을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한 사람이 태어날 확률은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낮은 것 같다. 그것은 마치 기적에 가깝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사람에게 속한 일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제2부 나의 유년시절        진주에서의 1년은 암울함 그 자체였다. 그 외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나는 자연과 더불어 보낸 꽃피는 산골에서의 유년 시절을 좀 더 회상(回想)하고자 한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온 것에 대한 보상심리같이 내 속에서 붙잡고 놓지 않는지도 모른다.      더 어렸을 때는 조부님이 계셨고 조금 성장했을 때는 부모 형제들이 있었다. (물론 함께 나고 자란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아무튼 떠올리는 것마다 추억이고 생각나는 것마다 그리움뿐이다.      그 동안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는데 마치 지난 봄날처럼 하나씩 하나씩 되살아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박꽃은 초가지붕 위에서 달빛을 머금은 듯 흠뻑 취해있다. 그러다 모두가 잠든 밤에 마치 요정같이 하얗게 깨어난다.      산골의 밤하늘은 유독 달과 별들이 선명하게 빛난다. 아이들은 어둡지만 어둡지 않은 그들의 빛 아래서 술래잡기 놀이에 열중이다. 술래인 나는 느티나무에 얼굴을 묻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열 번을 헤아린 다음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복남이네 나뭇짐 사이에서 쉽게 친구 둘을 찾았고, 원길이, 원재의 집 담벼락 아래 볕 짚단 사이에서 기가 막히게 숨어있는 여자아이 둘을 찾았다. 이제 세 사람 정도만 더 찾아내면 술래를 면할 수 있다. 친구 두 명은 술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어디서 숨어있다가 잽싸게 달려와 느티나무에 손을 짚는다. 죽지 않고 살아서 다음번에도 술래를 면한다. 영철이네 오래된 감나무 위에서 팔은 가지처럼 위장하고 머리는 넓은 감잎들 사이에 가린 채 숨어있는 재세와 우리 앞집의 뒷간에 숨어있는 승부를 찾아서 다행히 나는 술래를 면했다.      아, 그런데 아버지께서 찾으신다. 할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기 위해서.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입이 한발은 튀어나온 것 같다.      돌아누우신 할아버지의 다리는 아버지의 팔보다도 더 가늘었다. 많이 어린 막내손자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잠시 후 할아버지는 그만 물러가라고 하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달려갔다. 그러나 친구들은 어느새 다 돌아가고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쁜 마음은 아니었다. 겨우 숨어있는 아이들을 찾아내어 술래를 면하는가 했는데 아버지의 호출이 있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는 아이를 부르면 많이 언짢해 하는지 알면서 왜 굳이 불렀을까? (물론 그 이유도 뒤늦게 알았다.)      어른들을 따라 새벽 녘에 눈을 떴다. 한바탕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하고 목청껏 부르고는 다시 잠이 든다. 어린이가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나 분주하지만 아직 어린 나는 못다 한 꿈나라로의 여행을 마저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능금(사과)을 들고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힘겹게 내디디면서 조용히 건너오셨다. 그리고 나를 찾으신다. 아무 기척이 없자 조반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가 흔들어 깨운다.      “할아버지 오셨다. 빨리 일어나거라.”      어머니의 다소 난감하고 황급한 목소리가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힘겨운 발걸음을 의식한 듯 세차게 흔든다. 여전히 졸린 눈을 비비며 청아래 축담에서 구부리고 앉아 겨우 눈을 뜨고 할아버지를 올려다본다. 사과를 내미셨다.      “먹어 보아라.”      “할아버지, 이따 먹을게요.”      “아니다, 지금 먹도록 해라.”      큰집 손자들 몰래 그래서 이른 시간에 어려운 걸음을 하셨다.      힘겹게 사과를 쥔 할아버지의 손은 앙상한 가지에 얕은 거죽만 덮여있었다. 손등의 반점들이 마치 바둑판의 흑돌처럼 둥글게 둥글게 내려앉아 있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할아버지의 손은 온기라고는 없었다. 내가 한입 베어먹는 것을 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으실 것 같았다. 그래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큰집 사랑채로 향하셨다. 아무리 귀한 사과이지만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리고 노인의 특이하고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먹기가 여간 곤욕스럽지 않았다. 물론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어렸어도 나름 할아버지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혹 눈치를 채신 것은 아닐까?      뻐꾹 뻐꾹!      뻐꾸기 울음소리와 함께 아카시아 향기가 온통 산을 진동시킬 무렵, 들판은 잿빛으로 물들어있다. 겨울의 모진 추위를 견딘 보리는 드디어 결실에 이르렀다. 긴 수염을 한 잿빛 보리가 낫을 기다린다. 보리의 수염은 여간 거칠고 긴 것이 아니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보리와 씨름한 어머니의 얼굴과 걷어붙인 팔은 까끌까끌하기가 말도 못 했다. 온종일 들에서 보낸 식구들이 모이자 집안은 온통 보릿대 향기로 가득 찼다. 어머니는 힘겨운 듯 샘 곁에 놓여있는 볼품없는 박 바가지의 물을 두 번 연거푸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마에 땀을 훔친다. 얼굴은 그을음 앉은 것처럼 검게 타 있었다.      “내일은 너도 들에 나가자, 가서 냉수라도 떠오너라.”      아버지도 힘겨우신지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태양은 전쟁이라도 벌이듯 그 기세가 맹렬했다. 아침부터 노을이 내려올 때까지 지칠 줄을 모른다. 다음 날 아버지는 먼저 들로 나가셨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물을 부지런히 떠다 나른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 새참도 없었다. 오로지 점심이 전부였다. 특별히 아버지께는 막걸리가 반 주전자 정도 허락되었다. 그 외 아무에게도 먹을 것은 주어지지 않고 오직 내가 돌 틈에서 받아오는 냉수가 전부이다. 그런데 그날 처음 보는 돌 틈의 조그마한 샘터는 신기하게도 바닥에서 솟구쳐오르는 용천수였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조그마한 샘 안에는 마치 물의 끓음 같이 뽀글뽀글 바닥의 모래 알갱이를 소용돌이치게 하고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자세히 보니 물이 나오는 곳은 세 군데였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그 샘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의 양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나 보다.      물 한 주전자를 채워놓고는 떨어진 이삭을 주워 모은다.      그렇게 보리 수확을 위해 식구들 전부가 동원되었다. 보리농사가 끝나면 그 자리에 벼를 심을 준비를 해야 되기 때문에 아버지는 초조하고 급했다. 보리타작 중간에 비라도 내리면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강렬하게 내리쬐던 하늘에 옅은 회색 구름이 저 멀리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구름의 색깔은 점점 짙어지고 하늘 가득히 세력을 넓혔다. 더불어 식구들의 손놀림도 빨라진다. 아버지는 나에게 빨리 가서 소를 몰고 오라고 하신다. 그때 우리 집 소는 송아지가 딸린 암소였다. 송아지는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어린 수놈으로 어미 젖을 먹을 때 말고는 마당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송아지는 어린 새끼 때 예뻐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고삐를 단단히 잡고 몰고 간다. 처음으로 소를 몰고 가장 멀리 간 것 같다. 행여나 송아지가 말썽을 피우면 어떡하지, 하고 어린 마음에 많이 긴장했다. 우려했던 대로 송아지는 집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까 잘도 뛰어다닌다. 통제가 되지 않았다. 두 갈래 길이 나오면 꼭 어미와 반대 길로 갔다. 아직 경험이 없는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불러도 보고 소리도 질러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송아지란 놈이 다른 엉뚱한 길로 가고 있으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애타게 불러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잘 가고 있던 어미 소가 갑자기 옆으로 돌아서서 큰 소리로 음메~ 음메~ 하고 두 번 연속해서 부르자 그제야 새끼는 길을 돌아 어미에게로 달려왔다.      며칠간 수확했던 보리를 담은 가마니들을 리어카에 옮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운전하시고 소가 끌었다. 꽤 경사진 오르막길인데도 어미 소는 가볍게 끌고 올라간다. 그날 총 열두 번을 그렇게 반복적으로 날랐다. 금방이라도 내릴 것만 같았던 비는 다행히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내리지 않았다. 비는 다음 날, 모두가 잠든 새벽에 고요하게 내렸다.      이런 날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거의 종일 새끼 꼬는 일을 하신다. 방안은 짚 부스러기와 볕단으로 가득하다. (라디오라도 있었으면 덜 적적하셨을 텐데.)      나는 아직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으로 어머니와 누나가 내게 전부였다.      내가 채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아버지는 내게 소를 몰고 나가서 꼴을 먹여오라고 하셨다. 두려웠다. 소는 아직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크게 보였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큰 덩치에 비해 다행히 온순한 성격을 하고 있어서 어린아이들의 말도 잘 따랐다. 오후 내내 고삐를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 집 송아지는 유달리 활동적이었다. 짐승도 암놈, 수놈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리 뛰고 저리 뛰다 그러다 뒷다리를 허공에 높이 올려 찬다. 온몸을 비틀며 몸부림치듯 하기를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배가 고팠는지 꼴을 먹기에 여념이 없는 어미에게 달려가 세차게 젖을 빨아댄다. 네 개의 젖꼭지를 보지도 않고 순서대로 신기하게 잘도 물어댄다. 밥 먹는 것처럼 새끼의 쩝쩝 소리는 곧 생명의 소리였다. 갓 태어난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어미 소가 가르쳐주었을까? 아니면 주인인 부모님이 혹시 알려주기라도 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광경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또 들은 적도 없다. 생명의 소리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젖을 찾고, 또 찾는 것에는 반드시 그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새끼에게 필요한 영양분 덩어리인 어미젖이 적당한 온도에 맞게 넉넉히 준비되어있다. 새끼는 부지런히 먹기만 하면 된다. 새끼의 할 일은 젖을 열심히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죽순같이 쑥쑥 자라서 몇 달이 채 못되어 털 색깔이 어미와 같게 되고 날뛰는 것도 없이 제법 의젓해진다.      아버지는 나에게 한 번 두 번 소를 몰고 나가서 꼴을 먹이게 하다가 이번에는 아예 동네 큰아이들과 함께 멀리까지 나가서 꼴을 먹이게 하셨다. 학교 다니는 형들과 누나들이 대부분이었다. 친구들은 너무 어려서 아직 소먹이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집에서 멀리까지 나가기는 처음이었다. 몇 차례 반복이 되자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신기하게도 소들은 산봉우리에 해가 질 무렵이면 으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 줄 알고 새끼를 데리고 길가로 내려온다. 그러면 고삐 하여 붙들지 않아도 희한하게 자기 집을 잘도 찾아간다. 나는 아직 소가 길을 잃고 집을 찾아오지 못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거의 항상 소가 먼저 와서 외양간에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를 수차례 오늘도 당연히 소는 집에 와있겠지, 하고 내가 늦게 오면 아버지는 소는 진작 왔는데 넌 뭐 한다고 늦게 오느냐 하고 나무라셨다.      한번은 그날도 소가 조금 먼저 왔다. 아버지는 내가 도착하자 걱정과 놀람이 역력한 눈빛을 하고      “송아지는 어디 있느냐?” 새끼 딸린 어미 소는 새끼를 두고 혼자 오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우리 소는 새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혼자였다. 순간, 경직된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눈앞이 캄캄함을 느끼다 못해 두려웠다. 형과 누나들로부터 한마디씩 꾸중이 이어졌다.      나는 외양간 이곳저곳을 살펴보았고 또 집 뒤편을 돌아봤지만 없었다. 밖으로 뛰어 나가봐도 송아지란 놈은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옆집 소를 따라갔나 하고 가까운 친구 집에 가봐도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만나지 못하고 조용히 들어오는데 두려워서 아버지가 계시는 마루로 가지 못하고 혹시나 해서 외양간에 가보았지만 송아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은 저녁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큰누나에게조차 말을 건네지 못할 정도였다. 태산 같은 걱정을 안고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아침이었다. 기분 나쁜 꿈같은 전날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나의 얼굴은 심히 굳어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식구들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밝았다. 그 어디에도 송아지 잃은 표정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밤새 송아지가 돌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혹시나 하는 초조한 마음으로 외양간에 가보았다. 아, 그런데 수놈 송아지는 언제 왔는지 어미 옆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큰누나, 어떻게 된 거야?” 누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젯밤 10시쯤 아버지와 누나는 어미 소를 몰고 랜턴을 비추며 낮에 소를 먹였던 묵바꼴 골짜기로 향했다. 묵바꼴은 오히려 이웃 마을이 더 가까울 정도로 동네에서 많이 떨어져있었다. 낮에 왔던 길은 칠흑같이 어두워 빛이 없으면 도저히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어미 소는 새끼가 없음을 알았을까. 깊은 골짜기로 들어서자 음메~ 하고 울기 시작했다. 어미 소의 울음은 메아리 되어 산골짜기의 어둠을 뚫고 퍼져나간다. 산속 어딘가에서 자신의 새끼가 두려움에 떨고 있음을 직감이라도 한 듯 어미 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울음도 간절했다. 그러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소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왼편을 향해 음메~ 하고 크게 두 번 울고 반대편을 향해 또 두 번 울었다. 마치 ‘낮에 꼴을 뜯던 데가 여긴가?’ 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허공을 향해서 보다 큰소리로 음메~ 하고 울자 어디선가 염소울음같이 음메~ 하고 나즈막하게 새끼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어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빛이라고는 없는 어두운 저쪽에서 마치 라이트의 불빛같이 짐승 특유의 광선이 두 눈에서 품어져 나왔다. 어미가 한 번 더 울자 새끼도 그제야 울음으로 화답했다.      그런데 새끼가 서 있는 곳은 얕은 계곡 물가였다. 처음엔 물소리 때문에 어미의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어미는 새끼의 냄새를 확인하고는 연거푸 새끼의 얼굴과 몸 이곳저곳을 혓바닥으로 핥기 시작한다.      새끼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어미를 놓쳤을까? 또 어미는 묵바꼴 골짜기에서 집으로 오는 먼 거리 동안 새끼가 없어진 줄을 왜 몰랐을까?      특이한 것은 그날 이후 새끼는 어미 곁을 바짝 붙어 다녔다.      아버지께서 많이 놀라신 것은 근일에 이웃 동네에서 소를 도둑맞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깊은 산 속에 소를 풀어놓고 아이들이 정신없이 노는 틈을 타 도둑들은 눈에 잘 틔지 않는 짙은 나무색 비슷한 옷을 입고는 미리 점찍어 놓은 소를 훔쳐 달아난다는 뭐 그런 말들이 간혹 들리긴 했다.      그렇게 몇 달 집에서 길리운 송아지는 어미 소가 다시 새끼를 가질 무렵 우시장으로 간다.      어머니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새끼를 우시장으로 보내고 나면 그것이 눈에 밟히는지 며칠간 잠을 설쳤다.      나는 아버지께 송아지를 좀 더 있다가 팔면 안 되냐고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지금이 송아지 가격이 그것도 수송아지의 시세가 제일 좋을 때라 안 된다고 하셨다.      나의 울적함을 큰아버지가 아셨는지 갓 태어난 여러 마리의 염소 새끼 가운데 한 마리를 나에게 주셨다.      “잘 한번 키워 봐라.”      몸 색깔이 온통 까만 흑염소로 무척 귀여웠다. 개처럼 목에다 고리하여 줄을 길게 하고는 풀이 많은 곳 가까운 나뭇가지에 줄을 묶은 다음 꼴을 먹이운다. 특이한 것은 집으로 돌아올 때 반드시 염소가 앞에 서고 사람이 뒤따라와야만 발걸음을 옮길까, 만약 그 반대로 사람이 앞장서면 무엇 때문에 그런지 네 다리를 쫘악 펼친 채 버티고 있어서 아무리 끌어당겨도 소용이 없다. 염소 때문에 나의 인내심이 바닥까지 내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처음 염소고집을 목격했다. 같은 초식동물이고 사람에 의해 길드는 소와 염소는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내게 염소가 주어지자 나는 소를 먹이러 갈 때마다 염소에게 줄 넓은 칡잎을 한 아름 두 묶음씩을 따다가 등에 지고 왔다.      한번은 소와 함께 칡잎을 잔뜩 지고 오는데 밭을 매고 오시는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뒤에 오셨는데 앞에 가는 내가 칡잎에 가려 처음에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등에 칡잎을 매고 가는 아이가 누구지? 참 대견하기도 해라’ 하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바로 나였다.      소나기가 언제 내렸는지 기억이 없다. 끔찍하리만큼 찌는 더위는 꺾일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이대로 가면 사람도 짐승도 아직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지 못한 식물들도 말라서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날은 오후부터 하늘 가장자리에서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을 먹는 도중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흘리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가열되었던 대지에 빗줄기가 내려앉는다. 대지는 열기로 인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요란한 비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집어삼켰다. 양철 지붕의 파형 골마다 빗물은 마치 폭포같이 흘러내린다.      잠시 후, 강렬한 밝기의 파란빛이 두 번 하늘로부터 번쩍한다. 번개였다. 어찌나 강한지 아버지의 구릿빛 얼굴은 반사되어 파랗게 되었다.      우루루쾅! 쾅쾅!      천둥소리는 사자의 울부짖음같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날은 아버지의 억센 팔을 베고 이불을 머리까지 올리고 잠이 들었다.      그 무렵, 돼지우리에서는 열세 마리의 새끼 돼지가 새롭게 나왔다. 큰누나와 함께 조용히 우리 너머를 쳐다보는 데 불과 몇 시간 전에 태어나서인지 크기는 어른 주먹 한 개 반 정도였다. 몇 마리인지 한번 헤아려 보라고 한다. 마침 어미는 옆으로 누워 있고 새끼들은 모두 젖을 빨고 있었다. 젖은 두 줄로 나란히 길게 있는데 간격들이 일정해서 여러 마리의 새끼들이 먹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열세 마리나 되다보니 그 중 한두 마리는 이리저리 밀려 젖꼭지를 못 찾을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아직 눈도 뜨지 못했는데도 신기하게 다 찾아갔다.      새끼들은 나면서부터 각자 자기의 젖꼭지가 정해져 있어서 항상 그것만 입에 댄다고 옆에서 누나가 알려주었다. 여러 개 중에서 몇 번째가 내 것하고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정확히 자신의 것을 찾아갈까? 어린 마음에 참 신기하고 놀랍다.      숫자를 헤아려 보니 열세 마리가 정확했다. 그런데 유독 크기가 작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새끼들 가운데서도 눈에 띄게 작았다. 누나에게 제일 늦게 태어난 새끼가 아니냐고 물었다. 누나의 대답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제일 먼저 태어난 녀석이라고 했다.      한동안 새끼들은 어미 곁을 떠나지 않고 거의 종일 젖만 빨아 먹었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호기심이 많은 새끼들은 슬금슬금 우리 밖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새끼 중에서 가장 호기심이 많고 용감해 보이는 녀석 하나가 우리 밖을 한 발짝 정도 나와서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몹시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다가가자 후다닥 어미에게로 뛰어든다. 우리 밖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어미 뒤에서 경계하듯 눈치를 살핀다.      새끼들은 단체로 움직였다. 돼지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협동이 잘 되는 동물인 것 같다. 온몸을 덮고 있는 까만 털은 윤기가 반지르르 흘렀다. 특이하게 꼬리는 모두 꼬여있었고 그 끝은 몸 가운데 유일하게 하얀색을 하고 있었다. 새끼 때는 돼지도 송아지만큼이나 귀여웠다. 송아지도 경계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새끼 돼지는 사람에 대한 경계의 정도가 심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약 2주 정도 지나면 집 구석구석을 몰려다니며 주둥이로 땅을 파고 놀기 시작한다. 그러다 3주 정도 지나면 아버지는 새끼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라고 하신다. 말하자면 중간 점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마리가 비었다. 세어보고 또 세어보고 또 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리가 안 보인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그리 놀라지 않을뿐더러 표정은 마치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는 것 같았다. 조심성 없이 아무 곳이나 마구 뛰어다니던 새끼 한 마리는 화장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결국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게 새끼 돼지들도 송아지처럼 어느 정도 길리운 다음 장에 내다 팔았다.      촌(村)에서는 이렇다 할 수입원이 없다. 요즘은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토질의 유리한 작물들을 골라 재배하므로 상당한 수익을 창출하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모든 것이 열악했다.      고작 짐승을 낳고 길러서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장에 내다 팔아야 겨우 돈을 만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한해 농사지은 곡물들의 매상(수곡수매)이 있을 때 등급에 따라 금액을 계산하여 받는다. 농부들은 낮은 품질의 곡물들은 주로 자신들의 양식으로 남겨두고 윤기 나는 좋은 것들은 매상한다.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땀을 요했다.      아버지는 현대식 농기계의 도움은 전혀 받지 못했다. 물론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년 중 가장 강렬한 태양 아래서 멍석을 총동원하여 도정하지 않은 보리를 넓게 펼친 다음 맨발로 훑으고 지나간다. 일정한 시간으로 뒤집어 골고루 건조하기 위함이었다. 이 작업은 몇 날 며칠동안 이어진다.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으로 보아 아주 어렸을 때로 여겨진다. 너무 어려서 식구들을 따라 들에 가지 못하고 오직 집에만 있었다. 그럴 때는 유일하게 같이 놀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한 살 위의 8촌 형이 있었는데 그와 나는 고조부(高祖父)가 같은 분이었다.      그날도 집 마당에서 땅따먹기 놀이도 하고 샘에 둥둥 떠 있는 수박을 물 속으로 누르면 금방 물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 신기하여 시간 줄도 모르고 놀았다. 정신없이 놀고 있는데 그때 어떤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아무 대답이 없자 연거푸 두 번을 소리친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샘 곁에서 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와 소리쳤다.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런데 뒤를 돌아본 순간, 두렵다 못해 온몸에 소름이 쫘악~ 하고 돋았다. 아마도 사람을 보며 그렇게 당혹하고 놀라기는 처음이었다. 그때 만약 8촌 형이 같이 있지 않았다면 숨이 멎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을 것이다.      한눈에 봐도 걸인(乞人)으로 긴 자루를 힘겹게 메고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는데 한쪽 다리는 의족으로 아무렇게나 잘라 놓은 나무토막이 다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발 모양 비슷한 것도 아닌 그냥 나무를 톱으로 뭉툭하게 잘라 놓은 게 전부다. 물론 바지 속에 감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바지를 입은 듯 다 드러나 있었다. 무릎을 구부르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의족은 허벅지 중간부터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한쪽 손은 갈고리 모양을 한 의수였다. 머리는 긴 장발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 감았는지 기름과 먼지로 떡이 되어있었다. 갈고리 모양을 한 의수도, 남자가 그렇게 긴 머리를 한 것도 그때 처음 보았다. 그 모든 것이 어린 나에게는 공포처럼 다가왔다. 또 얼굴은 여기저기 찢어진 상처를 아무렇게나 꿰매어 놓은 듯 올려다보기가 여간 부담되지 않았다. 두 눈도 한쪽은 나의 눈과 맞추나 다른 한쪽은 전혀 엉뚱한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모습에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바닥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목소리는 가래가 잔뜩 낀 것 같이 낮고 거칠어 듣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쌀이든 보리쌀이든 뭐라도 좀 달라고 한다. 겨우 쌀을 한 바가지 퍼주었다. 잘 몰라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했다간 무슨 위해가 올 것만 같았다. 걸인(乞人)은 상대가 어린아이들이어서 그런지 인사도 없이 갔다. 마치 당연히 받을 것을 받은 것처럼.      걸인(乞人)의 몸은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을까?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들에서 돌아온 형과 누나에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두렵지 않은 듯 돌아오는 대답은 ‘그 사람들은 여럿이 몰려다니면서 간혹 말을 잘 듣지 않는 너 같은 애들을 잡아가기도 한다.’는 다소 황당한 말을 했다. 물론 어린 동생을 골려주려고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그 후, 이상하게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그 시절 몸에 장애를 입은 걸인들이 왜 그렇게 많았을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국가는 전쟁의 여파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데다 경제개발 계획들이 아직 실효를 거두기 전으로 마땅한 일자리가 주어지지 못한 게 아닐까?      그때 그 사람들은 아마 상이용사들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해본다.      나의 유년 시절에 절대 빠지지 않는 친구인 8촌 형은 학년도 같았다. 체구가 그리 크지 않아 자랄 때 한 번도 형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불렀다.      또 한 사람은 두 살 위인 5촌 조카가 있다. 조카이지만 나보다 두 살 위였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조카는 항상 나를 아재라고 부른다. 사촌 큰 형님의 큰아들로 어려서부터 나와는 비교도 안되게 생각이 깊었다. 두 사람과는 추억이 많다. 잘 기억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살며시 떠올려 주기만 하면 새싹이 파릇하게 돋아나듯 솟아날 것만 같다.      작은형이 만들어준 방패연을 들고 뚱뫼 언덕에서 설레는 맘으로 연을 띄웠다. 겨울이면 꽁꽁 언 냇가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종일 썰매를 타고 놀기도 했다. 오후쯤 기온이 올라 얼음이 녹으면 옷은 물에 흠뻑 젖어있다.      사랑방 아궁이에서 소죽을 끓이고 계시는 어머니 곁에 있으면 젖은 옷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행여나 내가 감기라도 들까봐 걱정이셨다. 추운 겨울이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는 그 시간은 따뜻했다.      소죽을 퍼주고는 아궁이 끝에 아직 남아 있는 잔 불씨들을 모아 고구마 몇 뿌리를 묻은 다음 저녁을 먹는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구마는 달달한 것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는 해마다 제비가 찾아왔다. 짚 부스러기에 진흙을 묻혀 처마 바로 아래 높은 벽면에다 짓기 시작한다. 암수가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진흙을 묻혀 나른다. 어느새 집은 완성되었고 그리고 알을 낳는다. 처마와 그의 맞닿아있어 안을 볼 수 없다.      새끼가 부화하고 난 다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암수가 교대로 알을 품는다. 제비는 배와 날개 안쪽을 빼고는 대체로 검다. 몸집이 작은 대신 상대적으로 꼬리가 길고 끝은 특이하게 두 갈래로 나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좁은 둥지에 새끼들로 가득 찼다. 다섯 마리였다. 아직 눈도 뜨지 못했다. 그래도 어미가 다가오면 먹이를 물고 온 줄 알고 먼저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입을 있는 대로 짝짝 벌린다. 새끼들의 입가와 입속은 온통 노란색이다. 암수 두 마리는 잠시 쉴 틈도 없이 계속해서 먹이를 물어 나른다. 새끼들은 조금 전에 받아먹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달라고 소리치고 입을 벌린다. 하지만 어미는 정확하게 먹이를 주는 순서를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옆에서 찢어질 듯이 입을 벌려도 소용이 없다. 어미가 먹이를 구하러 날아가면 언제 그랬다는 듯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조용했다.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난다. 새끼들은 어미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하루가 다르게 몸의 크기와 함께 털 색깔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새끼는 좁은 흙집을 떠나서 높은 창공을 비행한다. 어미를 따라 따뜻한 남쪽 어딘가로 날아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늦은 봄부터 여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제비네 가족에게는 큰 변화였다. 어느 먼 남쪽 나라에서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한 다음 둥지 틀 곳을 선택하고, 그리고 수천 번도 더 진흙을 묻혀 나르고 알을 낳고, 또 일정 기간 품어 부화하고 다섯 마리나 되는 식욕이 왕성한 새끼들을 먹이고, 그중 한 마리도 낙오(落伍) 없이 하늘을 날아올랐다. 이 광경은 해마다 반복되었다. 여러 종류의 새 중에 특별히 친근감이 가는 새이기도 하다.      제비는 이곳에서의 짧은 시간에 비록 몸은 힘들지만 목적을 이루었다.      잠자는 시간 외에 단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 새로 기억된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박씨를 물어다 준 것보다 좋다.      하루는 종일 비가 내렸다. 사람도 짐승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 마당을 가로지른 긴 빨랫줄에 동네 제비는 다 모인 것같이 빽빽하게 앉아 비를 맞고 있다. 그날은 마치 우리 가족들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르게 제비가 아주 낮게 비행할 때가 있다. 얼마나 낮게 나는지 거의 바닥에 닫을 정도였다.      “오늘은 제비가 무척 낮게 나네.”      동네 어른들은 제비가 낮게 나는 것을 보고 곧 비가 온다고 했다. 제비가 낮게 나는 것하고 비하고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하늘은 멀쩡한데.      과연 그러한가. 어른의 말처럼 제비가 낫게 날면 비가 오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다음 날 정오가 막 지날 무렵, 하늘이 꼬물꼬물했다. 순식간에 흐려지더니 아니나 다를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참 신기했다. 제비가 낫게 날면 왜 비가 오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제비가 낫게 날면 비가 올 확률이 높은 줄은 알고 있는데 왜 그런지는 글쎄, 하며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우연히 맞아 들었겠지?’      그 둘의 연관성은 제법 성장한 다음에 알았다.      비구름이 형성되기 전 대기(大氣)의 오묘한 변화가 먼저 일어난다. 그것은 사람의 감각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오히려 조그마한 곤충이나 미생물들이 먼저 눈치를 챈다.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지진이나 해일 같은 큰 자연의 충돌이 있기 전 생물들이 먼저 알고 요동치는 경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은 지축이 흔들려야 비로소 눈치를 채고, 또 쓰나미가 대륙을 덮칠 때까지도 잘 모르다가 그것들이 눈앞에 닥쳐야 비로소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 어찌할 줄을 모른다. 사람은 자연의 변화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더운 여름이면 오전부터 계곡 물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나올 줄 몰랐다. 쑥을 뜯어 돌에 찧은 다음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양쪽 귓구멍을 털어 막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는다. 격렬한 물싸움을 해도 또 몸을 물속에 풍덩~ 하고 잠수를 할 때도 쑥으로 한 귀마개는 아주 유용했다.      높은 기온 탓에 물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부모님은 항상 불안해하셨다. 오죽하면 물가에 내놓은 것 같다는 말을 다 할까. 자녀를 향한 불안한 심경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아직 어린 나에게 쏘는 깊고 위험했다. 물의 깊이가 들쑥날쑥하여 발바닥에 아무것도 닫지 않을 때는 순간 당황하여 공포가 두렵게 몰려온다. 무서운 이야기를 할 때 등장하는 물귀신이 마치 내 발목을 잡고 끌어 내리는 것만 같았다. 물에 가지 않는 경우는 비가 올 때인데 높은 기온 탓에 소나기도 자주 내렸다. 갑자기 내린 비로 인해 친구 집 처마 밑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는데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진다.      잠깐 내리다 마는 소나기가 아닌 것 같았다. ‘옷이 젖는 것을 감수하고 뛰어갈까, 아니면 지나가기를 기다릴까?’ 하고 고민하는데 저 멀리 먹구름의 끝자락은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비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기 드문 자연 광경이었다. 세찬 비를 뿌리는 검은 구름은 거대한 군단을 이끌고 북으로 방향을 돌렸다.      밤하늘은 별로 가득 차 있어서 헤아릴 엄두조차 못 낸다. 그래도 헤아리기를 좋아했다. 유독 밝게 빛나는 것부터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지만 생각보다 많이 못 세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무지개를 쫓던 아이는 어느덧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여러 마을의 낯선 또래 아이들이 모였다.      담임선생님은 연세가 많은 여선생님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로 1학년 봄학기에 가정 방문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 마을을 방문하셨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집 방문이 제일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시던 선생님은 작은형과 작은누나를 기억해 내고는 나와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신기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신다.      어머니는 선생님이 일어나실 무렵 암탉이 품었던 달걀 일곱 개를 손수건에 싸서 건네셨다.      초등학교 1~2학년에게는 우리 밀로 만든 식빵 모양을 한 자르지 않은 덩어리 빵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향긋하고 구수하게 품어져 나오는 빵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로 기억된다. 빵을 실은 트럭이 들어오는 날이면 아이들은 모두 창가로 몰려와 환호성을 질렀다.      “야~ 빵차다!”      대부분 남자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운다. 간혹 여자아이들은 다음 시간까지 조금씩 나눠서 나름 아껴먹기도 하는 것 같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 몰래 훔쳐 먹다가 들켜서 선생님에게 혼나기도 했다.      나도 처음 한두 번은 빵을 학교에서 다 먹고 집에 갔다.      어느 날, 문득 어머니를 보자 이 맛있는 빵을 나 혼자 먹은 것이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는 이 맛있는 빵을 먹어 보지 못하고 나만 먹었구나.’ 어머니는 이런 빵이 있는지도 모르셨다.      그날따라 빵을 실은 트럭이 간절히 기다려졌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선생님께 여쭤보니 차가 고장 나서 이번은 못 온다고 한다.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며칠 후, 트럭이 학교 정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저씨는 분주하게 빵을 내리기 시작한다. 지난번 못 받은 것까지 두 개를 받았다. 나뿐 아니라 친구들 모두 기분이 두 배는 더 좋은 것 같다.      나는 두 개를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가방에 넣었다. 빨리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맛있는 빵을 어머니께 드리고 싶은 마음에 집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치 개선장군의 당당함같이 큰소리로 “엄마~”하고 소리쳤다. 아무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엄마~” 하고 고함치듯 불렀다. 밭에 가셨는지 아무 대답이 없다. 중뫼 밭으로 달려가 보았다. 사람의 허리쯤 자라있는 참깨밭에 하얀 수건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였다.      마음이 급했다. 먼발치에서 “엄마~ ”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아직 듣지 못하셨는지 수건의 변화는 없었다. 더욱 큰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제야 어머니는 허리를 쭈욱 펴고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하시다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신다.      “벌써 학교 다녀왔어?”      해 아래서 김을 매는 게 힘겨우신지 어머니의 코잔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햇빛에 그을린 어머니의 피부와 사철 흙을 만지는 손은 항상 거칠었다. 호미 두 자루를 담은 오래된 대소쿠리를 내가 들으려 하나 한사코 어머니는 내게 주지 않으셨다. 아마 이러한 것을 어린 아들에게 드리우게 하고 싶지 않으셨나 보다. 대신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었다.      집에 와서는 가방 속에 들어있는 빵을 꺼내어 어머니 입에 넣어 드렸다. 조금 먹어 보시고 맛있다며 나에게도 먹으라고 건넨다. 지금처럼 우유를 곁들어 드셨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시골에서 마실 것은 오로지 돌 틈의 냉수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더운 여름 어머니는 닷새마다 열리는 ‘단계’ 장에서 수박을 사서는 머리에 이고 오신다. 집에까지는 십 여리나 떨어져 있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여름이 다 가도록 수박은 두 번 정도 구경했다. 다른 과일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다. 샘 안에 둥둥 띄워서 시원해지기를 기다리고 또 식구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리고 그리고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 준비가 다 되었어도 아버지가 안 계시면 결코 수박에 칼을 대는 일은 없었다.      수박의 겉은 녹색의 푸른 무늬가 선명한데 칼이 반쯤 들어가자 쩍하고 갈라진다. 정확하게 반으로 나뉘자 속이 빨갛게 드러난다. 겉모습만 봐서 상상이 가지 않는다. 까만 씨가 점처럼 군데군데 박혀있었다. 어린 마음에 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부모님과 네 명의 자녀가 있었어도 수박 한 통을 단번에 먹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두세 번에 나눠서 아껴 먹었다. 어머니는 수박의 당도가 높은 빨간 부분은 거의 드시지 않으시고 자녀들을 먹였다. 그리고 자녀들이 먹다 남은 빨간 부분이 조금 남은 수박의 밑부분을 놋수저로 사과 껍질처럼 얇아지도록 박박 긁어 드셨다.      나는 그 옛날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수박의 빨간 부분을 먹게 하고 정작 당신은 껍질만 하염없이 긁어 드시는 모습을 기억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머니는 나를 출산하기 전에 애를 낳다가 잘못되어 혼(魂)이 나간 적이 있었다. 가족들은 장례를 준비했다.      어머니는 죽음을 경험한 이후 나를 출산해서인지 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본인이 과연 살 수 있을까? 막둥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살았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죽음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고 또 누구도 비껴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생각보다 자신이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도 아신 모양이다.      먼저 태어난 자녀들은 모두 자기 앞가림할 정도로 장성했지만 이제 갓 태어난 막내를 생각할 때 마음이 몹시 아팠나 보다.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앞에서 나의 유년 시절을 잠깐 살펴보았다. 오히려 생각나지 않는 부분들이 훨씬 많은데 다 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어머니의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은 교묘하게 이루어졌다.      내가 열 살이 채 못되어 어머니 곁을 떠나서 진주로, 또 진주에서 서울로, 어머니와는 더욱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큰 형님은 공부에 대한 열망(熱望)이 매우 강한 분이었다.      진심으로 동생이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며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생활 가운데서 공부를 위한 물질은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다. 본인이 공부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으셨는지 그 뜻을 자기 자녀보다 동생에게 이루고자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잘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또 필요한 모든 것은 이 형(兄)이 다 알아서 해주마!” 하고 그렇게 갈망(渴望) 하셨는데.....      그런데 나는 그런 형님의 바람대로 잘 따라주지 못했다.      한번은 아버지와 형님이 나의 진로와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한숨을 섞어가면서 밤늦도록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기초가 문제입니다. 따라가기도 벅찰 뿐더러 과외 등 온갖 방법을 시도해봐도 막내는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안타깝다 못해 애타는 형님의 목소리가 잠결에 들려왔다.      이제는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보다도 과연 동생이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봐서 왠지 잘하지 못할 것만 같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또 다른 걱정이었다. 어쩌면 앞의 것보다 훨씬 비중이 높은 문제였다.      아버지도 큰아들이 동생에 대한 기대와 열정을 잘 알기에 시름이 깊어간다. 나는 그때 아버지와 형님이 나로 인해 신경이 온통 곤두서있음을 비록 성인은 아니었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성장하면서 이분들에게 걱정과 염려 등 많은 근심을 끼쳤다. 또 눈물도 흘리게 했다. 뜻대로 잘 좀 따라 주면 좋았을 텐데 잘 따라주지 못한 것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몹시 마음에 걸린다.      사람이 오래도록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천에 옮겨서 막 결실을 보고자 하는데,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한낮 꿈처럼 물거품이 됐을 때 심정이 어떠할까? 말하자면 형님이 바로 그런 상황에 놓여있었다.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신의 막냇동생을 연로하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누구보다도 반듯하게 키워보고 싶었는데........      학년은 깊어가고 기초는 전혀 되어있지 않아 형님의 마음은 급했다. 아직 많이 어린 나는 그런 형님의 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어머니를 떠나온 것이 전부이고 다른 것은 없었다. 이것이 나를 위함인지 아닌지 분간도 서지 않았다. 장래(將來), 그런 것이 아이에게 와 닫을까?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어머니만 아픈 그리움이 되어 눈물방울 끝에 매달려있었다.      그런 형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내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인생의 힘겨운 시기를 맞이할 때 비로소 형님이 생각났다. 나는 아직도 그 옛날 형님이 오로지 동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은 포기하면서까지 헌신하신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앞으로도 왠지 잘 모를 것만 같다.      또 형수님은 1부 말미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두 분의 신혼은 딱 두 달 정도만 허락되었다. 두 달이 지난 다음 작은 형이 공부한다고 1년을 머물렀고, 작은누나도 결혼 전까지 머물렀으며 또 일본 사촌 누나와 형이 모국어(母國語)를 공부하기 위해 각각 1년씩 2년을 연이어 형수님 댁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사이 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이번에는 아버지 사촌 여동생의 아들이 중요한 시험 준비를 위해 또 1년을 형수님에게 신세를 졌다. 형님댁에 거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장성하도록 기거했으며 앞의 열거한 모든 사람과도 함께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모든 것이 안정적인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지방에 사는 조카들이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면서 형수님 댁은 또다시 사람들로 북적였다.      형수님은 지칠 법도 하고 짜증을 낼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일로 한 번도 형님에게 화를 내거나 형님을 난처하게 해본 적이 없었다. 형수님은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그 동안 누리지 못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나는 이런 형수님이 얼마만큼 고단한 삶을 사셨는지 물론 어렸을 때는 잘 알지 못했다.      어느덧 나의 학업도 끝나갈 무렵, 형님은 또 다른 고민에 머리를 움켜쥔다. 바로 나의 진로 즉 사회의 첫발을 어디에 들여놓을 것인가. 이것은 심각한 고민이었다. 과연 어디에 드려놔야 될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미 오래 전에 개척하다시피 걸어가신 형님은 무엇 때문에 첫발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몇 군데를 두드려 봐도 잘되지 않았다.      형님의 사람됨과 근면, 성실함을 앞세워 동생을 추천해봤지만 2~3개월 사람을 써보고는 “제 형은 성실하고 빈틈이 없는 사람인데 동생은 다르네.” 서서히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가 새벽 안개같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시 돌이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소용이 없다. 후회하기에 너무 늦었다. 이미 열차는 떠나가고 지나간 세월은 엎질러진 물처럼 돌이킬 수 없었다.      형님은 나로 인해 몇 번이나 벽에 기대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육신적으로 다 자란 동생을 자꾸 나무랄 수도 없었다. 달래도 보고 얼려도 보고 한 번 입을 여시면 교훈들로 가득했다. 그것은 걱정들로 뒤엉킨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같이 느껴졌다.      나는 한때 술과 담배 등 좋지 않은 것들을 가까이하여 잠시 방황했다. 나로 인해 가족들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형님은 참고 인내하면서 성인이 다된 동생을 최대한 존중해주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공부를 잘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하지만 두 번째 주어진 인생마저 실패하면 다른 것으로 만회할 수도 없을뿐더러 인생이 비참해질 수 있다.”      힘주어 말하는 눈빛은 불꽃이 튀었다. 절박했다. 형님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인력거를 탄 사람과 끄는 사람이 공교롭게도 초등학교 동창으로 똑같이 학교를 다녔어도 한 사람은 성공하여 인력거를 타는 사람이 되고 한 사람은 인력거를 끄는 사람이 되었다.’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느냐? 자주 인용하시던 예화였다.      안타깝게도 형님의 말씀은 부담으로 와닿고 속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계절은 추위의 중심을 향해 가고 있다. 12월의 나뭇가지는 앙상하다. 잎들은 수분이 말라비틀어져 아슬아슬하게 흔들린다. 멀잖아 시베리아의 칼바람이 첫눈을 뿌릴 것만 같다. 나는 잿빛 하늘만큼이나 우울했다.      마치 볼세비키 혁명 전선에 동원된 열아홉 약관의 ‘니나 카렌’의 잿빛 하늘처럼 말이다. 그녀는 자신을 두 광대뼈가 툭 뛰어나오고 키도 그리 크지 않은 볼품없는 외모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래도 두 살 위의 얀센지프로스키를 사랑했다. 얀센이 먼저 니나에게 고백했다. 니나도 키 크고 핸썸한 얀센이 마음에 들었다. 둘은 사랑하다가도 티격태격 의견이 맞지 않아 자주 다투었다. 누구나 처음 연애할 때처럼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해 속상해하기도 하고 때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눈물도 흘렸다. 니나는 자신을 위로해 줄 이는 그래도 얀센지프로스키 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사랑도 바람대로 오래가지 못했다. 제정 러시아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둘을 떼어 놓았다. 니나는 총을 들고 서부 전선으로 내몰렸다. 얀센도 총을 들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전선으로 향한다. 둘은 그 당시 수많은 젊은이 중 하나였다.      니나는 그곳에서 건장한 군인 둘에게 강간당했다. 둘은 니나를 어떻게 할 것을 미리 계획해 놓고 치밀하게 유인했다.      그 이듬해 스물한 살 무렵, 서부 전선은 지루한 공방전이 연일 계속되었다. 아직 어린 여성이 감당하기에 전선은 무리였다.      어느 잿빛 하늘 아래 한방의 총성과 함께 날아온 탄알은 정확히 그녀의 가슴을 관통했다. 죽는 순간까지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얀센을 그리워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니나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허구인지 실화인지 너무도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나와 비슷한 나이의 러시아 소녀 니나의 짧은 인생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마도 그 당시 나의 마음도 학업이 허무하게 끝을 맺고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아 우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집에만 있는 것도 설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너도 이제 성인이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아무도 너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 형님은 사뭇 내가 걱정되는지 온통 염려 섞인 말뿐이었다.      하루아침에 학생의 신분에서 성인으로 바뀌었을 때 왠지 모를 두려움과 부담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니나카렌의 잿빛 하늘처럼 당시 나의 하늘도 우울했다. 구름도 없고 떼를 지어 날아다니던 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황량하기가 사하라 광야 같았다. 어쩌면 한 해를 보낼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은데 갑자기 시간의 끝이 내 앞에 우뚝 선 느낌이었다. 당황했다.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많은 날 가운데 평범한 하루처럼 해(年)를 보내고 또 맞이하고 하지 않았던가.        어머니는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던 바램은 내가 23년이 되도록 이어지다가 스물네 살 여름에 돌아가셨다. 내가 전역을 하고 얼마 되지 않을 시점이었다.      오래도록 치매를 앓고 계시다가 돌아가실 무렵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와 큰형님은 어머니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무셨는지 알아보시고 반가워하시다가 말미에는 그마저도 잃어버렸다.      어머니가 병을 앓았을 당시 병명도 정확히 몰랐다. 그냥 나이 든 노인에게 찾아온다고 해서 노망들었다고 치부해버리기 일쑤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치매였다. 형님은 어머니가 치매로 더 이상 아버지를 내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시고 두 분을 서울로 모시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려운 결단이었다. 아주 잠깐 두 분은 도시생활을 했지만 아버지는 보름도 채 못되어 아파트 생활을 힘겨워하시다가 결국 어머니를 남겨두고 혼자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어머니의 치매는 점점 더 심해저 혼자 집 밖을 나가기가 어려웠다. 식구들 몰래 혼자 나갔다가 집을 찾지 못해 가족들이 찾아 나섰고 이웃 주민들의 도움과 파출소의 도움을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었다.      요즘은 치매로 인한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되어있어 전문가가 환자의 정도를 등급별로 나누어 심할 경우 요양시설이 잘 갖춰진 병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 운영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치매를 앓을 당시는 요양시설이 갖춰진 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치매 환자에 대한 복지제도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집에서 자녀들이 환자를 케어했다. 형수님과 형님은 일정한 요일에 맞추어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드리고 온몸을 깨끗하게 씻겨드렸다. 참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무렵, 적어도 50년을 함께한 남편과 일곱이나 되는 자녀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자녀들에게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생의 마지막 무렵 몹쓸 병으로 인해 자기 몸에서 난 자녀조차 알아보지 못했어도 어머니 돌아가시자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다시는 뵐 수 없고 엄마하고 부를 수도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 실 때의 괴로움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어머니에게 큰아들 즉 형님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만큼 부모님뿐만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비중이 매우 컸던 분이다.      어머니는 평소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신의 큰아들의 품에 안겨서 마지막 눈을 감으셨다. 적어도 어머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행복한 품 속이 아니었을까? 고생되고 힘들었던 삶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어머니 고향인 생비량면의 어느 낮은 산언덕은 어머니의 산소로 적합해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형님은 이곳을 미리 정해 놓았다. 일조량이 매우 좋은 곳으로 앞에는 강물이 유유히 흐른다.      언젠가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시면 어머니 묘 옆에 나란히 안장하기로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한동안 나는 어머니 생각에 눈가가 마르지 않았다.        제3부 불꽃같이 살다 간 나의 작은 형님
8    TV오락프로에서 주은 이야기 댓글:  조회:1130  추천:0  2015-06-19
매주 월요일마다 빼놓지 않고 꼭꼭 감상하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3쟌넬의 프로가 있다. 저녁7시반에 시작하는 프로인데 개업한 지 얼마 안되는 인기오락프로이다. 전국적으로 시청률이 상당히 높다. 한마디로 "도박"오락프로이다. 여덟개의 문이 있는데 문마다 벨이 달려있고 그 벨을 누르면 음악곡이 나오는데 그 제목을 맞추면 상금을 타는 오락프로이다. "도박"은 "도박"인데, 참여자는 맞추면 벌기만 하고 밑지는 게 없는 "도박"오락프로이다. 오락프로 이름은 “開門大吉(개문대길)”이다. 뜻인 즉 "문을 열면 대길하리라"이다. 물론이지, 문만 열면 횡재가 되는데..... 첫번째 문부터 세번째 문까지는 맞추면 각각 1000원씩이고 네번째 문은 2000원, 다섯번째 문부터 일곱번째 문까지는 각각 5천원이고 마지막 여덟번째 문은 10000원이다. 그러니 몽땅 맞추면 인민페로 3만원을 획득하는 셈이다. 그런데 규칙이 있다. 맞추다가 틀리면 이미 벌어놓은 상금은 "0"이 되고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게임이 시작해서 참여자에게 "찬스"의 기회가 한번 주어지는데 참여자가 데리고 온 성원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참여자가 곡의 제목을 맞추면 문이 열리면서 그 노래를 부른 원래의 가수가 나와 그 노래를 부르고 원래의 가수가 현장에 올 형편이 못 되였을 경우에는 원래 가수를 닮은 성대모사가수가 나타나 대신해 그 노래를 부른다. 외모도 성대도 원래의 가수와 너무 신통히 닮아 진짠지 가짠지 관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13억 인구가 모여사는 대가족의 나라라 목소리뿐만 아니라 외모가 닮은 그런 사람들이 많기도 하다. 어제저녁에 그 프로가 있어 감상을 했었는데 보고나서 온밤을 자지 못했다. 어제저녁에 방영된 오락프로에 참여자가 셋이였는데, 프로 진행중에 가담가담 오가는 사회자와 참여자의 이야기중 처음 두 참여자의 인생담이 내내 머리에 교차반복으로 떠돌며 사라지지 않아 오래동안 잠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먼저 그 첫번째 참여자의 인생담을 적어본다. 첫번째 참여자의 이야기 이름은 공상연(孔祥燕). 공자(孔子)의 고향 - 산동성(山東省)곡부(曲阜)에서 온 20대 후반으로 한 두돐 쯤 되는 애 달린 젊은 여인. 공씨가 무대에 등장하자 사회자가 물었다. "오늘저녁 몽상기금(夢想基金)을 마련해서 어디에 쓸 타산인가요?" “우리 부모님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여태껏 산동문밖을 나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이 기금을 마련해서 부모님들을 모시고 수도-북경여행을 조직하려 합니다." 다음으로 공씨의 성원단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성원단으로는 공씨가족의 아기와 남편, 그리고 본가편 남동생과 녀동생 이렇게 넷이였다. 그 녀동생과는 일란성쌍둥이였는지, 외모가 너무도 신통하게 똑같아 같이 세워놓아도 누가 현재 오락프로 참여자인지를 쉽게 가려낼 수 없는 정도였다. 근데, 문제는 쌍둥이자매가 언니는 성이 공씨(孔氏)인데 동생들은 성씨가 강씨(康氏)라는 것이다. 이건 또한 웬 일인가? 사연은 이러했다. 쌍둥이자매가 태어났을 적, 가정경제형편이 몹씨 어려운데다가 산모의 건강형편이 매우 안 좋았다. 그래서 이 쌍둥이를 다 키울 수가 없어 자매중 건강한 편이였던 언니를 다른 마을에 있는 공씨(孔氏)성을 가진 집에 양녀로 보냈다. 그러다가 9살 되였을 때 어느하루,  친척방문으로 어느마을에 놀러갔었는데 공상연은 그 친척집 바깥주인을 "외삼촌", 안주인을 "외숙모(妗子)"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집에 공상연이와 너무도 신통히 닮은 여자애가 있었다. 마을 애들도 아주 신비해했고 공상연도 놀랐다. 그러던 중 어느하루,  "외숙모"가 공상연을 앉혀놓고 인제부터 "외삼촌","외숙모"라 부르지 말고 "아빠","엄마"라고 부르라는것이였다. 바로 자신들이 친부모임을 알려주는 것이였다. 그러나 공상연이는 어린 심령에도 여태껏 9살까지 자기를 애지중지 곱게 잘 키워준 양부모님들의 버림을 받을가봐 그때 그자리에서 "아빠","엄마"를 부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냥 한번도 생부와 생모를 "아빠","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생부는 친딸에게서 "아빠"의 부름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끝내 2001년에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 훗날, 공상연이 자라서 시집을 가고 애기를 낳아 어머니가 되여 아이를 키우면서 차츰 모성애의 감정을 터득하게 되였으며 지난날 생부와 생모의 섭섭했을 심정도 이해하기 시작하였단다. 지금은 생부는 돌아가고 어머님만 혼자 남았는데 이제 더는 어머님마저 한을 품고 사시다가 저 세상에 서럽게 보낼 수가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는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이렇게 중앙텔레비죤 오락프로에 참석하여 "몽상기금"을 마련해 두집 부모들을 모시고 즐거운 북경여행을 조직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자가 물었다. "생부가 세상뜬 후에 한같은 것이 남는건 없나요? "물론, 여한이 깊지요. 왜냐하면 친아빠는 이 세상에 한분 뿐이니깐요." 사회자가 이야기를 듣고나서 한가지 건의를 제기했다. "지금 두집 부모들이 다 각기 집에서 텔레비죤앞에 모여앉아 이 오락프로를 감상하고 있으실 텐데, 한번 이 자리서 이 시각부터 생모를 '엄마'라고 고쳐부르면 안 될까요?" 공상연이는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고쳐부르려고 했었지만 기회가 없었단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각부터 부르려고 하는데 우선, 이때까지 자기를 애지중지 곱게 키워서 시집까지 보내준 양부모님한테 량해를 구하는 말씀부터 전했다. "먼저 우선, 저를 곱게 키워주신 양부모님께 해석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 시각부터 생모를 '어머니'라를 부르려는것은 그 무슨 이제부터는 생모와 더 가깝게 지우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것이 아닙니다. 그 이가 저를 낳지 않으셨다면 전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거니와 이 자리에 나설 수도 없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되여본 오늘에 와서야 모성애란 무엇인가를 점차 느끼게 되였고 더는 이 한몸을 낳아주신 어머니께 한을 품고 여생을 사시다가 저 세상에 가시게 할 수가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양부모께서 널리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사회자와 공상연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성원석에 서있는 쌍둥이자매 강배(康培)는 지나온 언니의 처지가 너무도 불쌍하고 안타까워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여있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일란성쌍둥이 자매이지만 훗날 성장환경이 다르고 성장로정이 각이하다보니 오늘날 쌍둥이자매의 현실환경에도 달라져있다. 언니는 시집가서 애키우는 가정주부가 되였지만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서 회계사로 사업하고 있단다. 이한 현실에 여한같은거는 없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공상연은 이렇게 옹골차게 대답을 주었다. "그 어떤 원망도 한도 없어요. 우리자매가 형제임을 확인된 후에는 우리자매의 정은 그간 함께 자라지 못하고 갈라져서 자란 설음으로 더욱더 두터워졌고 성격기질도 똑같아 인젠 더는 떨어질 수 없는 일심동체가 되였어요. 우리형제는 이제부터 량가집 부모에게 효성을 다 하면서 잃어버린 옛것을 되찾아다 보상받으며 행복한 여생을 보낼것을 다짐하고 있어요." 이날 오락프로에서 공상연은 세번째 문까지 열었으나 네번째 문을 여는데 난관에 봉착해 하는 수 없이 찬스를 신청했다. 다행히 남동생의 도움으로 맞혀서 여행비자 5천원을 마련했다. (글: 2014년 3월 5일)
7    朴貞姬양同窗의 農家를 찾아서 댓글:  조회:2368  추천:6  2015-03-26
    지난 여름 8월중순의 어느 일요일날, 개산툰 선구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남부럽잖게 여유작작하게 잘살고있는 고중때 동창생 박정희양의 초청으로 연변에 있는 부분적 동창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길현광개중학교(延吉縣光開中学校) 72년기 졸업으로 금방 엊그저께 학교문앞을 나온것 같은데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 어느덧 장장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무정한 세월은 그 사이에 우리들의 얼굴에 밭고랑같은 잔주름을 가득 그려놓았고 머리도 듬숙듬숙 희슥희슥하게 칠해놓았으며 슬하에 손자와 손녀를 둔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변신시켜 놓았다.     지난 여름 7월초에 박정희양의 아드님 결혼식을 연길호텔에서 꾸렸었는데 그때 참석한 동창생들을 다시 고향의 농가집으로 모셨던것이다. 손수 두부도 앗고 메돼지고기랑 팔뚝만한 잉어고기랑 준비했던것이다. 상을 차리는 박정희양. 정면에 앉은 분이 박정희양의 남편 오씨이다. 왼쪽 첫번째는 동창생 허몽림(주 종교국에 근무). 왼쪽으로부터 동창생 김명자(용정),장순녀(연길),박정희. 김명자는 개산툰팔프자제중학교에서 교원직으로 정령퇴직한 후 용정시에 이주해 만년을 보내고 있으며 장순녀는 연길에서 사업하다 정령퇴직.  정면 왼쪽으로부터 설야,김장남(연길),허몽림(연길).장순녀,정선옥(연길).  앞줄 오른쪽으로부터 리경철,설야,허몽림,박정희,장순녀. 뒤줄 오른쪽으로부터 리명길,리승모,원영철,정선옥,김신옥,김명자. 리승모와 리경철군과는 학교졸업후 첫상봉이다. 장장 41년... 둘 다 농사질하다가 한국로무를 택했는데 14년만에 방금 귀국했다고 한다.  오후,두만강 제방뚝에서. 정면에 보이는 산은 조선의 산이다. 왼쪽으로부터 김신옥(도문),박정희,장순녀,정선옥,설야,원영철.  원영철이와 함께 두만강반에서. 원영철군은 고중졸업후 참군하였다가 퇴역후 연길감옥에 분배받아 사업하다 금년초에 정령퇴직했음. 학교시절 각별히 가깝게 지낸사이로 자주 그에게 끌려 선구3대 그의 집으로 놀러갔댔는데, 살구철이면 그집 뒤뜨락 살구 먹으러 자주 갔었다.  두만강 제방뚝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멀리 보이는 강이 바로 중조변경의 강 - 두만강이다. 물이 보이는 강 저쪽은 조선땅이고 ... 연길현광개중학교고중제1기졸업사진.(1973.1.7)
6    초중시절의 동창들 사진을 받아보고 댓글:  조회:1637  추천:5  2015-03-26
  왼쪽으로부터 유정극(兪正极), 최명숙(崔明淑), 손진향(孫珍香), 최순옥(崔順玉).    맨앞줄 왼쪽으로부터 첫번째가 최순옥, 네번째가 최명숙, 맨앞줄 오른쪽으로부터 두번째가 유정극, 네번째가 류상모, 중간줄 왼쪽으로부터 다섯번째가 손진향, 맨뒤줄 오른쪽으로부터 다섯번째가 설야. (1970년 12월 11일 길림에서)     어제저녁에 지금 상해에 가있는 동창생 류상모(劉相模)군이 위챗(微信)으로 사진 한장을 보내왔다 (위의 1남3여 합영사진). 로무로 한국에 간 초중 때 동창이 서울에서 한학급 동창들을 만나 찍은 기념사진을 보내왔는데, 받자마자 나한테 전송하는거란다. 사진속 동창들이 누구랑인지 한번 맞춰보란다.     아무리 이리 뜯어보고 저리 훑어봐도 도무지 누가 누군지를 밝혀낼 방법이 없다. 하는 수없이 옛날사진첩에서 초중졸업사진(바로 위의 졸업사진)을 찾아 꺼내놓고 하나하나 차례로 대조하여 훑으며 세밀히 뜯어봤건만 한사람도 알아낼 길이 없다. 장장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보는 동창들의 모습은 인젠 낯설기만 할뿐이다!     길림성 서란현 칠리공사 조선족중학교(吉林省舒蘭縣七里公社朝鲜族中学校)!      꿈에도 잊어본 적 없는 정다운 모교이다.     초중을 졸업하자마자 우리집이 연변의 개산툰(开山屯) 외가집동네로 이주하여 나오다보니 여태껏 그사이 한번도 만나보지를 못한 동창생들이다. 그래서 이 "수험생"은 정답을 쓰지 못하고 그냥 "백지"를 낼 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하는 수없이 부끄러운대로 곧장 류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짜 다 우리 동창들 맞어? 암만 뜯어봐도 하나두 모르겠는데..."     그랬더니 류군이 해답을 주었다.     "왼쪽으로부터 유정극(兪正极), 최명숙(崔明淑), 손진향(孫珍香), 최순옥(崔順玉)!"     "엉???"     기절초풍할 지경이다! 너무도 익숙한 애들 아니더냐?      근데, 얘들을 내가 왜 하나두 못 맞추지?     그저 구석장군만 하던 그런 애들도 아니구 다들 반에서 한다하던 날쌘 애들이였었는데.....     정말 여기 이 나라 중국사람들이 하는 말이 맞긴 맞는가보다.      "歲月不饒人!"     세월 앞에선 강자가 따로 없다더니, 세월이 참으로 무심하기도 하도다! 어쩜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유정극이와 최명숙, 최순옥이는 류군과 한동네 "장지갈"에서 살던 애들이고 손진향만이 "둥지갈"에 사는 애로 그들은 다 한 대대(大隊, 지금의 촌) 애들이였다. 나는 공사마을이다보니 그들과는 다른 대대로 거리가 좀 떨어진 곳에 살고있었다. 그들은 촌에서 꾸리는 학교에서 소학 1년을 다니고 2학년에 진급해서는 7,8리 길을 걸어서 내가 살고있는 공사마을학교에 올리통학하였다.     근데, 사진으로나마 오늘 보니 천만다행스러운것은 그애들이 늙지들을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애들이 그 사이 모두 지치며 어렵게 살아온건 같지를 않고 행복하게 잘들 보내온거 같다. 생각밖으로 옛날 동창들 모습을 보노라니 어제 온밤을 옛날의 그때 그시절 추억의 물결 속에 빠져 헤매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아마, 나이 60을 넘기더니 인제부터는 추억 속에서 살아가는가보다.......
5    울고 웃는 까닭 댓글:  조회:1341  추천:5  2013-06-18
                            울고 웃는 까닭                                                                                설 야                         네가 여지껏 울었던 연고도                         네가 여태껏 웃었던 까닭도                         인제야 비로소 알것 같다 ...                         바로 그때는                         네가 날 죽도록 사랑했기에                         구슬피 울었을 것이요 ...                         또 훗날은                         네가 날 한없이 미워했기에                         눈물 짜며 웃었을 것임을 ...                         어쩌겠냐, 할수 없잖느냐?                         나도 아직은 웃고 울어야 하노니                         너처럼 그냥 울고 웃을 수밖에 ...                         인제부턴 그냥                         네가 웃을 때 나 울고                         내가 울 때 너 웃어다오 ...                         너와 나                         함께 웃고 같이 울며는                         남들마저                         따라 또 웃고 울잖니?!  
4    [수기] 2원 11전 댓글:  조회:1339  추천:9  2012-10-04
내가 소학시절 때의 일이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에 진급하니 《주산(珠算)》이라는 학과목이 불어났다. 그러니 공부하자면 수판이 있어야 했다, 허나, 그때 우리집 형편에서는 수판 살 겨제가 못 되였다.   그때는 온나라가 못 살고 전 국민이 굶주리던 시기라 특히 우리 집 같은 형편에서는 수판을 갖춘다는건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어머니는 고혈압으로 시름시름 앓는 장기환자다 보니 바깥일은 전혀 할수 없으셨고 내 아래로 동생 셋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혼자벌이로 온집 여섯식구가 간신히 살아가는 어려운 처경이였다. 그러니 집에 가서 수판을 사달라는 말도 번져보지 못했다.   그래도 학교 가보며는 주산시간이면 나같은 생활이 구차한 집 몇몇 애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모두 자기의 수판을 마련했었다. 수판이 없는 나는 주산시간이면 매양 옆의 애의 걸 갖고 함께 련습하거나 흑판에 걸어놓은 교수용 큰 수판에 매달려서 배운걸 익히군 하였다. 처음으로 주산을 배우는 나에게는 종이에 연필로 계산하지 않고서도 딸깍딸깍 수판알만 튕겨 놓으면 답을 뽑아내는 그것이 여간만 신기하지 않았다.   ( 나에게도 자기 소유의 수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집에 가서도 마음대로 갖구 놀수 있게..)   난 다른 애들이 갖고 오는 그 수판이 참말로 부러웠다.   그때 우리가 사는 농촌집들에서는 겨울만 되면 집집마다에서 가마니를 짜서 팔아 부업을 했다. 온 가정이 총동원하여 가마니 짜기를 했는데 그래도 그때 형편에서는 그 수입이 짭짤했다. 가마니 한장을 짜서 꿰여 매 파는데 1등에 걸리면 한장에 45전, 2등이면 43전, 말등에 걸리면 39전이 되였다. 그래서 겨울이면 그때의 아이들은 동무집에 놀러가도 추려놓은 벼짚단을 안고 갔다. 그집에 가서 친구와 함께 한편으로 그 조꼬만 손으로 새끼를 꼬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시간을 보냈다.   우리집에서는 어머니가 가마니틀에 앉으셨고 나와 동생 둘이 새끼를 꼬아댔다. 막내도 후에 크면서 역시 새끼를 꼬았다. 어머니가 밥을 짓거나 빨래 씻을 때에는 내가 어머니 대신 가마니틀에 올라 가마니를 짰다. 이렇게 한주일간 짜서 모은걸 아버지가 짬짬이 꿰여 매서는 주말이면 장에 나가 팔아 집살림에 보탬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그 사이 일주일간 짠 가마니를 팔아 장을 보러가게 되였다. 큰장을 보자면 우리가 사는 마을서도 20여리 떨어진 평안이라는 역전시가지로 가야했다. 그때는 교통이 발달이 안 되여서 그 먼길을 도보로 다녀와야 했다. 먼길이라 어머니께서는 나더러 아버지 길동무해서 함께 다녀오라고 하셨다. 아버지도 나와 함께 같이 가줬으면 하는 바램이였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 조건부를 하나 걸었다. 함께 가며는 꼭 내가 사달라는 걸 사주셔야 한다고... 아버지께서는 눈을 끔뻑해 보이시며 이내 응하셨다.   가는 길에서 아버지는 내가 조르는대로 재미있는 구수한 옛말들을 들려 주시였다. 한 컬레가 끝나면 또 다른 옛말을 이어 대시면서...   아버지께는 그때 정말로 옛말도 많으셨다. 저녁에 집에서 우리 형제들이 새끼 꼴때도 아버지는 한쪽으로 가마니를 꿰 매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시였었다.   가는 길에서 옛말 한컬레가 끝나면 아버지는 이따금씩 네가 오늘 바라는 조건부가 무엇이냐고 물으시였다. 그러나 나는 감히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수판을 사달라는 말은 차마 입밖에 꺼내지 못 했다. 이윽고 우리 부자는 시가지에 도착하였다.   보아야 할 장을 다 보고나니 아버지께서는 날 데리고 식품진렬매대로 향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기껏해야 개눈깔사탕알이나 과자부스러기쯤으로 사달라는걸로 이 아들을 착각하셨던 것이다. 나는 애틋한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아버지의 옷깃을 부여잡고 다시 학용품매대로 이끌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이 아들을 대견스레 내려다 보시더니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를 띄우시였다.   아버지의 그한 표정을 보는 순간, 나에게는 용기가 불뚝 머리를 쳐들었고 얼마간 자신심도 생겼다. 학용품 매대에 이르자 난 첫 눈길에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수판을 발견했다. 새까만 비닐박막으로 만든 윤기도는 깜찍한 수판이 대뜸 한눈에 안겨왔다. 드디여 아버지께서는 내가 바라는것이 뭐냐고 물으셨다. 나는 이내 용기를 내서 주저없이 매대안에 진렬해 놓은 수판을 가리켰다. 가격표를 보니 2원 11전이라고 매겨져 있었다.   2원 11전, 이는 우리 가정 경제형편에서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였다. 돼지고기 한근에 80전씩 하는 그때 세월에 이 돈에다 조금만 보태면 돼지고기 서근은 살수 있었다. 돼지고기 서근이면 우리 온집 식구가 적어도 일주일간은 때마다 돼지고기국을 먹을 수가 있다. 이윽고 가격표를 보시던 아버지는 믿음이 가지 않으셨는지 판매원처녀한테 물으니 여전히 변함없는 2원 11전이다.   그러던 아버지께서 판매원 처녀더러 그 수판을 보자고 하시였다. 판매원 처녀가 꺼내주는 그 수판을 받아쥐는 순간, 내 손은 마치 금덩이에라도 닿은듯 격정으로 떨리였다. 반들반들한 새까아만 비닐박막틀, 진주같은 까마반드르르한 수판알, 그 알들을 튕겨보는 순간, 인젠 이 수판을 내 손에서 절때 놓칠수 없음을 절감했다.   내가 그토록 제정신이 없을 지경으로 수판에 황홀해있자 아버지께서는 호주머니에서 무겁게 돈주머니를 꺼내셨다. 장 보고 남은 얼마 되지 않은 돈에서, 이제 앞으로 가정생활에 보탬을 해야할 비상금액에서 아버지는 드디여 1원짜리 빨간 지페 한장과 50전짜리 두장, 그리고 5전짜리 엽전 한개와 2전짜리, 1전짜리 엽전을 각각 두개를 골라 값을 치르셨다. 어쩐지 그때의 아버지의 모든 행동이 너무도 비장해보였다.    (인젠 나에게도 자기의 수판이 있게 되였다!)   허나, 그때의 나의 기쁨이란 그 무엇이라 이루다 형용할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내내 수판을 꺼내들고 수판알을 튕기며 갖구 놀았다.. 아버지께서도 가끔씩 나의 손에서 수판을 넘겨받아서는 딸깍딸깍 튕겨보시였다. 이윽고 우리 부자는 드디여 집에 당도하였다. 그날밤, 어머니는 아버지와 크게 다투시였다.   당신 왜 그리 우둔하냐구요? 어쩌면 애가 사달라는거면 다 살수 있냐구요? 우리집 형편에 어디 그걸 살 겨제가 되였냐구요? 앞으로 우리 온집 식구는 입을 달아매겠냐구요? ... ...   나도 어머니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난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시는걸 그때 처음 보았다. 2원 11전 때문에... 그 개도 안 먹는 돈 2원 11전 때문에...                *           *         *   그때로부터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몰라보게 변했다. 지금은 세상 부럼없이 살고 있다. 그때의 소학생이던 내가 인젠 애 아버지가 되여 쉰고개에 올라 섰고 내 자식인 울 이쁜 연이도 지금은 북방 대도회지 어느 대학의 2학년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있다.   언제나 이 아들이 자라는 걸 하냥 말씀없이 묵묵히 대견스레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십여년전에 이미 저 세상 고혼이 되셨고 어머님도 일흔 둘의 할머니로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계신다. 지금도 가끔 가다 내가 어머님과 그때 이야기를 꺼내면 어머님은 전혀 기억이 없어하신다. 그냥 자네는 아버지 닮아 기억력이 대단하다고만 하실 뿐이다.   어려웠던 그 시절, 비록 고생스러웠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그냥 행복했던 추억으로 가끔씩 머리에 떠오르는것이 무슨 연고일까? ...                                                                                                                                      (2005년 12월 13일 )
3    《모모리》 댓글:  조회:1725  추천:6  2012-10-01
[연이의 이야기3] 《모모리》   우리 연이가 태여나서 돐이 다가오자 말을 번지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하는 부름소리같은건 날 따라 발음이 제법 똑똑했다. 그것이 엄마 아빠가 된 우리 부부에게는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조렇게 조꼬만 앵두입에서도 어떻게 말이란게 다 만들어져 흘러 나올가?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주말이면 우리부부는 애를 데리고 거리구경을 나간다. 그때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연이보담 좀 더 큰 다른집 애들이 제엄마 아빠하고 이것저것 사달라고 졸라대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것이 그땐 나에게 무척 부럽기만 했다. 언제면 우리 연이도 저 애들만큼 커서 요거 사달라 조거 사달라하는 날이 올가하고 기다려지는 마음이였다.   그때 우리 세식구는 아침이면 제각기 자기일터로, 유아원으로 갈라져있다가 저녁때가 되면 한자리에 단란히 모이는데 저녁을 지어먹고 나서는 우리 부부는 늘 화투놀이를 했다. 둘만이 노는 놀음이였건만 어쩜 그땐 그리도 재미있었던지?   처음에는 돈내기를 하다가 결국 승부가 나봐야 다 제집돈 먹기라 마지막에는 내가 딴 돈도 고스란히 아내한테 바쳐야 하니 재미가 적어져 후에는 아예 벌칙주기를 했다.   벌칙주기로는 손목치기(아내가 이기면 식지와 중지 두개를 사용하고 내가 이기면 반드시 식지 하나만을 사용하여 쳐야 했음),물마시기,베개이기, 종이꼬리 달기,장판닦기,주말빨래씻기,하여튼 자꾸만 한쪽으로 창조해서 만들다보니 그 류형은 무수히 많았다.   놀음에는 내가 좀 엉터리쓰는 고질이 있어 늘 속임수를 썼건만 어쩐지 열에 여덟은 내가 그냥 벌칙을 당한걸로 기억난다. 고놈의 화투장에도 령기가 스몄는지 번마다 내가 번지면 늘 빈깍지가 나오지 않으면 뒤통수를 쳤고 아내가 번질때면 불깃불깃한《관》통이 아니면 《약》이 나거나 《단》이 나오군 하였다. 아마도 내가 하두나 엉터리를 쓰니깐 하늘이 내린《천벌》이였을 것이다.   우리가 놀이를 시작하면 어린 연이도 끼여들어서 함께 놀겠다고 《성화》를 부리군 한다. 그럴때면 우리는 이미 번져서 쓸모없는 빈깍지같은 것들을 연이의 손에 쥐여준다. 그러면 우리연이도 어른들을 본따서 저혼자 화투장을 치고는 뭐라 중얼거리면 놀군한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였다. 그날도 저녁상을 물리고 우리 부부가 마주앉아 화투놀이에 여념없는데 얼결에 우리가 쥐여준 화투장을 갖고놀던 연이가 그 무슨 《모모리》,《잇싸리》하면서 우리가 난생 알아듣지 못하는 해괴한 이름을 부르며 노는 소리가 얼핏 귀에 들려왔다.   처음에는 무주의상태로 별 생각없이 지내 듣다가 반복되는 소리에 순간 무엇인가 불쑥 나의 뇌리를 쳐오는것이 있었다.   《연이야, 이게 뭐지?》   놀던 화투놀이를 잠간 멈추고 연이손에 쥐여져있는 《명월》을 가리키며 물으니 《모모리》하고 또렷또렷 대답하는것이였다.   《명월이~》하고 발음을 시정시켜주니 나의 입을 따라하는 연이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발음은 여전히 《모모리》다. 다른 패를 가리키며 물으니 그건 묵묵부답이다.   그러던 연이가 갑자기 널려있는 화투장들속에서 《흑싸리》무깍지 한장을 골라 뽑아쥐더니 《잇싸리,잇싸리!》하는 것이였다.   《그건 흑싸리다.흑~싸~리~》 《잇~싸~리~》   다시 여러번 반복적으로 교정시켜 주어도 의연히 그《모모리》고《잇싸리》다.   어떻게 되여서 그애 귀에는《명월》이가 《모모리》로, 《흑싸리》가 《잇싸리》로 들릴가? 정말 재미있고 신기했었다.   발육시기의 초기단계에 처해있는 유아의 청각기관과 발음기관으로서는 아마 이렇게 밖에 안 들리고 따라 그렇게 발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것이다.   우리 연이가 어른들이 배워주지도 않은 화투장 이름을 자기로 《귀동냥》해서 자체로 두가지 꽃이름을 장악하고 있었다는데서 나는 무척 놀랐다. 비록 발음은 안 되여서 자기로의 독창적인 유아식 언어라지만 모종 사물에 대한 기억의 잠재력이 엿보였던것이다.   《어허,우리 연이 용~타!》 《우리 연이 진짜 대단해!》   우리 부부는 어린것이 너무 기특해 놀던 화투를 뿌리치고 연해연방 애를 서로 빼앗으며 애의 볼에다 키스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그래서 그후부터 우리 부부는 짬짬이 시간나는대로 심심하면 우리 연이에 대한 《화투교육》을 《가강》하기 시작했다. 《화투교육》을 통해서 애의 사물에 대한 분류,식별능력과 연이 나름대로라도 이름을 장악해내는 기억능력을 발굴해내고 키워내는것이 총적목표였다.   이렇게 시작한것이 그후 약 반년이 지나자 과연 마흔여덟장의 화투장들을 열두개 달에 따라 나누는데 익숙했고 부르는 명칭도 굳어진 《연이식 언어》로 몽땅 장악했으며 둘만이 놀던 우리부부 화투놀이에 어린 놀음군이 하나 더 불어 인젠 화투대오가 셋이 되였던것이다.   어쨌든 그때 우리 연이가 열두달 화투장 이름들중 받침없는 음절의 명칭은 다 제대로 정확히 번졌으나 받침글자로 된 이름들에는 연이식 나름대로의 이름들이 다 따로 있었댔던 것이다.   어떤 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연이가 마치 그 어느 외국이나 다른 별나라서 온 《손님》같기두 하였다. 같은 화투장도 나나 아내는 《명월》이나 《흑싸리》로 부르지만 우리 연이는 《모모리》혹은 《잇싸리》라고 불렀으니깐... 지금도 무의식간에 가끔씩 그때의 그 일들을 떠 올릴 때면 혼자서 즐겁게 웃을 때가 많다.
2    객지생활 댓글:  조회:1247  추천:7  2012-09-24
 연이의 이야기 2 객지생활 우리 연이가 태여나서 방금 여덟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그때,향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우리부부가 사업상 전근이 되여 현성에 올라오게 되였다. 농촌에 있다가 시가지로 올라오니 모든것이 편리하고 우월했다. 그런데 연이로 인해 우린 골치아픈 문제거리가 생겼다. 글쎄, 애가 죽기내기로 탁아소에 가기를 싫어하는게 아닌가? 태여나서부터 줄곧 외할머니 손에서 금지옥엽마냥 애지중지 곱게 자라다나니《집체호생활》엔 애가 딱 질색을 느끼였던 것이다. 아침에 안가겠다는것을 안해가 억다짐으로 둘쳐업고서 탁아소 구들에 풀어놓으면 어린것은 제어미 다리에 매달려 한사코 안떨어지겠다고 악을 쓰며 울어제끼는데 그런 애를 안해는 강다짐으로 떼서 밀어맡기고는 부랴부랴 밖으로 뛰쳐나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간신히 출근을 한다. 탁아소 보육원 할머니가 그토록 우리 연이에게 로 보살펴 주면서 어린것의 환심을 얻어 안착을 시키려 갖은 노력을 다 했건만 내내 효험이 없었다. 여느집 애들 같으면 처음 며칠은 떼질쓰다가도 후에는 차차 일없다고들 하는데 우리 애는 일주일이 지났어도 내내 그 본새였다. 이런 애를 두고 우리 부부는 정말 속상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다고 장모님을 다시 우리집으로 모셔올 수도 없는 사정이였다. 그때까지도 장인이 퇴직전이다보니 이런 타산같은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였다. 우리가 이렇게 애 때문에 성화를 받고 있을 때, 장모님이 애가 보고프다며 보따리를 가득해 이고서 토요일 날 저녁차로 올라오시였다. 우리가 시가지로 올라온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였다. 외할머니가 들어서시자 연이는 너무도 즐거워서 마치 실성한 애처럼 방안을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며 기뻐야단이였다. 외할머니가 구들에 올라오시기 바쁘게 품에 안기여서는 우리 둘을 가리키며 당장 가라고 손을 내젓는다. 뜻인즉 자기는 인젠 외할머니와 함께 있겠다, 탁아소에는 인젠 안간다는 것이다. 우리 셋은 애가 노는것이 너무도 희한해서 서로를 쳐다보며 즐겁게 웃었다. 이윽고 여기저기 애의 얼굴을 깐깐히 뜯어보시던 장모님이 애가 왜 이리도 몹시 축갔느냐고 가슴아파하며 우리를 나무람하셨다. 애가 내내 탁아소 가는 일로 성화를 부리다나니 그사이 애가 확실이 올 때만 얼굴이 해쓱해졌고 건강상태가 훨씬 못해졌다. 하여 우리는 그사이 애의 정황을 장모님께 낱낱이 말씀올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리 머리를 짜도 좋은 방도가 나오질 않았다. 나중에 장모님이 정 안되면 몸소 애를 데려다 좀더 클 때까지 키우다 보내시겠다고 하시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아직 말도 채 번지지 못하는 애에게 너 외할머니 따라 가겠느냐고 물으니 애는 그 말뜻을 알아듣고는 아내와 내쪽을 번갈아 빤히 쳐다보다가 그래도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는것이였다. 우리 부부는 그저 허구픈 웃음을 웃고 말았다. 제 부모 떨어지기는 싫은데 그래도 탁아소에 가지않기 위해서는 외할머니집에라도 따라가《객지생활》을 하겠다는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어딘가 쓰리고 섭섭했다. 실은 아직은 너무나 애어린 우리 살점을 때이르게 우리 몸에서 떼여놓기가 싫었던것이다. 그러나 애의 건강을 위해서는 하는수 없이 그렇게 하는것으로 우리 셋은 림시 합의를 보았다. 만약 외할머니가 떠날 때 역까지 나가서도 애가 우리를 떨어져 기어이 제 외할머니 따라가려 하면 애를 보내고 그렇지 못할 때는 그만 두는것으로 락착을 지었다. 이튿날 아침, 장모는 떠나시게 되였다. 외할머니 인젠 가신다, 넌 어쩌겠냐고 하니 애는 울음를 터뜨리며 얼른 제 외할머니 등에 달려가 없힌다. 이제 역에 나가 보자며 우리 부부는 하회를 기다렸다. 마음속으로는 그냥 애가 제발 가지않기만을 바랬다. ... ... 역에 이르렀다. 렬차가 들어섰다. 손님들이 내리고 오른다. 인젠 장모님이 오를 차례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차에 오르는데 애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 다 올라 차 우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도 애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렇다고 얼굴에서 즐거워하는 기색은 읽을 수 없었고 어딘가 당황해하는 빛만이 여전히 력력했다... 《일없겠소.인젠 둘이 날래 들어가오.》 장모님은 우리를 어서 들어가라고 재촉하시고는 이내 안으로 들어가시였다. 《뿡---!》 기적소리와 함께 문이 닫기고 차는 서서히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움직이는 차를 따라 함께 달리면서 차창안을 들여다보며 애를 찾았다. 그러나 붐비는 사람들속에서 우린 종시 애를 찾지 못했다. 어느새, 렬차는 저 멀리 달려가 산굽이를 에돌더니 구름같은 하얀 연기만 산기슭에 남기고는 사라져버렸다. 이윽고 우리가 제정신에 돌아왔을 때, 텅빈 플래트홈안에는 우리 둘만 남아있었다. 바보같은 우리 둘은 서로 쳐다보며 그저 어이없이 웃고만 말았다. 안해의 얼굴에선 또 다시 닭똥같은 두 줄기의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의 기분도 썩 좋지는 않았다. 따라 코마루가 찡해나며 눈확이 달아오름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 ... 그날 밤,우리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 밤에 애는 떼질이나 쓰지 않는지?...)                                                                                (2004. 3. 5)
1    고고성을 울리던 날 댓글:  조회:1293  추천:5  2012-09-23
  [연이의 이야기1]                   ◈ 고고성을 울리던 날 ◈ 설야    연이가 태여나서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때였다.     방금 설겆이를 끝내고 아내하고  둘이서 우리 귀염둥이 - 연이를 가운데 놓고 감상을 하고있는데 지방병원의 오원장선생님이 현 부유보건소서 오신 손님 세분을 모시고 우리집을 찾아 주시였다. 산모와 유아의 건강상태 검진을 목적으로 다녀 오셨는데 그중 년세가 지긋해 보이는 분은 사십대 중반의  중년부인으로 안경을 건 말쑥한 스타일이였고  다른 두분은 이십대를 갓 넘길가 말가한 애젊은 처녀 간호원들이였다.    오원장선생님은 내가 근무하는 한 학교 동사자의 부인으로서 우리와는 앞뒤집으로 평소에 허물없이 가까이 보내는 사이였다.    상호간에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구들에 올라 우선 애에게로 다가가 내려다 보시던 손님들은 하나같이 입들을 딱 벌리셨다.            그이들은 혀를 끌끌 차며 애기를 보고 또 우리 부부를 번갈아 훑어보며 무척들 놀라셨다.    체중을 다니 4.3키로라는 수치가 나왔다.    지금의 체중이 이러할진대 사흘전 방금 태여났을 적에는 적어도 4.5키로는 훨씬 넘겼을거라는 한결같은 결론이다.        오원장 선생님이 곁에서 께끼였다.    그때까지도  아내는 해산뒤끝의 하혈이 멎지않아 링겔주사를 맞는 중이였고  얼굴색은 하얗다 못해 파리하고 해쓱했었다.    워낙 수집은 아내라  뭐라 께끼줄은 모르고 그냥 얼굴에 얇은 미소만 띄울 뿐  가타부타 응대할줄을 모른다. 그냥 그때마다 눈에는 이슬이 맺혀 애써 자신을 억제할 뿐이다.     아마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현실이 꿈같이 느껴져  맺혀진 행복의 눈물이였을 것이리라...     실은 나자신도 그 순간, 그날 일들이 다시 떠오르며 가슴이 뭉클해났고 등쌀엔 소름이 끼쳐왔던것이다.    이미 지나간 그날 일들을 다시는 화제에 담아 떠올리기가 싫었다.    하마트면 현숙하고 꽃같은 내 아내를 잃을번 하였고 에미없는 애를 혼자서 키워야 할 기막힌 신세로 될번하지 않았던가?    우리 부부의 난감한 표정을 눈치챈 오원장 선생님이 우릴 대신해 그날의 정경을 손님들께 이야길 해드렸다.    정말로 그날의 일들은 지금 생각만해도 몸서리친다.     ... ... ...        그때로부터 사흘전 날에 있은 일이다.    여름 방학때인지라 우리 부부는 늘 아침식사를 늦게야 했다. 부채살같은 해살이 어느 새 우리집 남창으로 해서 집안을 환히 비쳐들어왔다.  그날 아침에 밥상에 마주 앉아 술질하던 아내가 갑자기 아래배에 동통이 느껴진다며 수저를 놓는것이였다.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당금 어머니로 될 기쁨으로 아내의 얼굴에는 희열의 빛이 어렸지만 어딘가 당황해하는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난  다급히 요를 펴 아내를 부축해 조심히 눕혀놓은 다음에 철길 건너 장모님댁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장모님댁에서도 그때 역시 식사중이였다.    내가 사연을 여쭈자 장모님은 이내 산파 모시러 바당을 내려 섰다.    장모님이 이미 며칠전에 부근에서 유명하기로 이름있다는 산파를 미리 물색해 두셨다는것이였다.    나는 잠모님이 떠나자 그길로 되돌아 즉시 내집으로 달려왔다.    집에 들어서니 아내의 동통은 더더욱 심했고 얼굴에선 진땀이 송골송골  내돋치고 있었다.       아내는 억지로 웃어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이였다.    나한데 시집와서 거의 삼년이 되도록 언제 한번 앓아도 아프다는 내색을 낼줄  모르는 여자다.    이때, 마당에서 인기척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림과 동시에 장모님이 들어서고 그 뒤로 쉰고개를 넘었을가 말가하는 한족 로파가 따라 들어왔다.    장모님이 산파에게 우리 부부를 인사시켰다. 보니 민간에서 업여로 품삯을 받으며 애낳이를 돕는 민간 산파였다.방금까지도 긴장하던 분위기던것이 산파가 곁에 나타나자 마음속으로 차츰 안정이 되여갔다.    인젠 산파도 있고 장모님도 계시고 하니 난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아무리 같이 사는 아내가 해산을 한다지마는 여성들이 모여하는 일이라 그 자리에 내가 있기는 어딘가 좀 무어했다.    그런데 산파도 장모님도 그 무슨 예감같은걸 느꼈는지 날 못 떠나게 했다.    아내의 동통은 더더욱 심해갔고 장모님과 산파는 산모곁에서 분주히 돌아쳤다. 나만은 그냥 꿔온 보리자루마냥 한켠에 우두커니 서서 바질바질 속만 태웠다.    아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그때의 그 모양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인가, 완전히 사람잡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어쨌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지고 다지고 또 다졌다.    시간은 흘러 인젠 거의 두시간이 지났건만 산모는 출산을 못한다.    그사이 산모나 곁의 사람들이나 모두가 다 같이 땀벌창이 되였고 그때의 아내의 얼굴은 더욱 말이 아니였다.    인젠  기진맥진하여 지칠대로 지쳤건만 아내는 그래도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산파의 요구에 응해 합작을 했다.    난 그때 처음으로 아내의 그 외유내강한 기질에 놀랐고 또다시 절실히 탄복을 했다.     드디여 바라고 바라던 출산이 되였다.   애가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나자 우리들은 그때에야 비로소 한결같이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장모님이 실망하는 기색이였다.    나도  어딘가 좀 서운했다. 나는 내내 꼭 사내애일 것이라구 굳게 믿어오고 있던 터였다.    아내가 임신이 되였을 무렵에 난 꿈에 굉장히 큰호랑이 한마리가 내집 바당으로 들어서는 태몽을 꾸었고  아내가 만삭이 되였을 적에도 보는 사람들마다  다들 뛸데 없는 아들놈이라고 점 찍으며 장담들을 해 오는걸 들어왔던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우리 아내가 몸이 하두나 굉장하기에 꼭 쌍둥일것이라 예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었댔다.    (차라리 오랍누이 쌍둥이라도 태여나면 얼마나 좋을가? 한쌍의 비둘기처럼 재밌게 키워보겠으리...)    이런 상상을 한적도 한두번만이 아니였었다 ...     헌데, 그 뒤에 끝내 예견치도 못했던 이외의 일이 발생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방금까지도 애의 고고성을 듣고는 어머니로 된 긍지감에 얼굴에 행복의 미소를 띄우던 아내가 갑자기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바르르 떨더니 그만 지각을 잃고 까무러치는것이 아닌가?    산모가 잘못 되니 우는 애는 언제 돌볼 겨를이 없었다.    애는 한쪽에 밀쳐놓고 우리는 또 다시 다그쳐 산모 구원에 달라 붙었다.    아무리 우리 셋이 달려들어 사지를 주물러 주며 부르고 불렀어도 아내는 깨여나질 못했다.    순간, 가슴속에서 널장같은 그 무엇이 덜컹 내려앉는것 같더니 이어 불길한 예감부터 가슴을 엄습해왔다.    이렇게 기다릴 수만 없다!    나는 이내 뛰쳐나가 병원으로 줄달음쳤다.    그때는 온 나라가 못사는 세월이라 집에 전화기 한대도 없을 때였다. 3리길도 넘는 그 먼 병원길을 난 그때 누구 정신에  달려갔다 왔는지를 지금도 모른다.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집에 들어서니 아내는 의연히 개복을 못했다.    의사선생님이 아무리 여기 저기에 침을 꽂고 방법을 대였어도 여전히 반응이 없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의사선생님이 들어선지도 한시간이 너머 흘렀다.    산모는 여전히 쇼크상태로 반응이 없다.    우리들은 긴장할 대로 긴장해 숨이 한줌만해 있었고 의사 선생님의 얼굴에도 인젠 어딘가 당황한 빛이 어리며 실망의 기색이 력력히 내비쳤다.    이윽고 이번엔 의사선생님이 성냥개비만큼 굵다란 동침을 뽑아들더니 산모의 발바닥 중간부위를 겨냥하는 것이였다.    의사선생님의 손도 어딘가 모르게 저으기 약간  떨리였다.    마지막 최후수단의 구급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만약에 이 에서 반응을 보이지 못하면 모든 희망은 물거품으로 되고마는 판이다!    숨막힐듯 극도로 긴장된 집안 분위기는 이제 불꽃이 닿기라도 하면 당금 폭발할 지경으로 팽팽했고 온 집안엔 그냥 사람들의 숨소리들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였다.    침대를 꽂자 이윽고 산모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약간 움찍거리고 목젖이 미약하게 동증을 보였다.    따라서 후~ 하고 막혔던 긴 날숨을 내 쉬던 끝에 이어 비명같은 외마디 소릴 지르더니 우리들의 부름소리에 가까스로 천천히 눈을 뜨는 것이였다.    천당의 문어구까지 갔던 아내가 또 다시 되돌아 우리곁으로 돌아온것이다!    끝내, 기적이 탄생한것이다!          어느새 모여왔는지 마당에는 고마운 이웃분들이 물샐틈없이 찾아들 와 꽉 차있었고 부근에 있는 형제와 친척분들도 소문듣고 어느새 집안에  들어와 울며불며 고락을 함께 하다가 너도나도 뒤질세라 의사선생님의 손을 붙잡고 연해연방 고마움을 표했다.    기적같은  아내의 환생으로 사람들은 격동의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였고 돌같이 굳을 때로 굳었던 내 언 가슴도 이때에야 비로소 녹기 시작하며 눈굽이 젖어드는것이였다.    아내는 이내 완전히 의식을 회복해왔고 주위에 모여선 사람들을  둘러 보고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서 의뭉스러워하는 눈길를 보이다 피곤기를  보이며 또 다시 조용히 눈을 감는것이였다.    산모가 눈을 감자 사람들은 또 다시 화뜰 놀랬다.    ... ... ...       간맥을 짚어보시더니 의사선생님이 땀을 씻으며 인젠 모두 시름들 놓으라고 말씀하셨다.       장모님의 넉두리에 사람들은 더더욱 서로 붙잡고 흐느꼈다.    이윽고 그 누구인가가 그때까지도 한쪽에 밀치여 꼼짝않고 누워있는 갓난애를  안아다 산모곁에 조심히 눕혀 놓았다.    애도 제 엄마의 어려운 경지를 알았었는지 내내 울지않고 조용했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다투어 애기를 구경하며 혀들을  끌끌 찼다.         ... ...    이야기는 이로서 끝났다.    만약 그때에 일이 달리 번져졌더라면 지금의 내 처지는 어떡했을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등곬이 오싹해난다.    난 그래서 그후에  살아오면서 아무리 그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쳐도 쉽지않았던 내 소중한 가족을 생각하면 이 세상 두려운것이 없었고 온몸에선 언제나 무궁한 힘이 충천하군 했다.                         정말로 쉽지 않게 얻어진 내가족이다!    그때는 순간적으로 딸인걸로 섭섭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댔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털끝만치도 없다.    내내 총명하고 이쁜 내딸이 대견스럽기만 하고 행복한 내 가족이 이 세상 제일 자랑스럽기만 하다.                                                                                                                200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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