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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기억(Memory) / 노인기
2022년 10월 13일 12시 12분  조회:182  추천:0  작성자: 설야

[중편소설]

기억(Memory)

노인기


     제1부 농촌에서 나고 자란 가족들의 이야기

 

     봄은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더디기만 하다. 우수와 경칩이 지나자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횟수가 조금씩 늘어난다. 계절이 바뀐 것이다. 그것은 여간 민감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한다. 뒤뜰의 넓게 펼쳐진 대나무 숲에 쌓였던 눈은 조금씩 하루가 다르게 자취를 감추다 어느 순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솜이 내려앉은 것처럼 하얗게 덮여있던 눈은 곧 깨어날 목마른 죽순의 갈증을 해소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눈의 무게에 구부러져 있던 가지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기운에 힘입어 곧게 펴져 견고해진다.

     마을을 휘돌아 나아가는 천(川)은 얼마 못 가서 또 다른 큰 줄기를 만난다. 그렇게 합쳐진 두 줄기는 남강으로 연하여 내려가다가 결국 남해에 다다른다. 이름 없는 산기슭에서 발원하여 깊은 곳과 얕은 곳을 지나 비로소 대양에 도착한 것이다.

 

1

 

     사대동 댁의 가슴은 쭈글쭈글하여 탄력이라고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 축 늘어져 젖도 잘 나오지 않은 꼭지를 갓 태어난 핏덩이에게 물리고 있다. 오늘 새벽에 출산했다. 아들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결혼생활 29년간의 긴긴 세월의 마지막 출산이었다. 생존한 자녀로는 일곱 번째요, 모두 합하면 열두 번째였다.

     어둠이 짙은 산골의 새벽은 고요 그 자체다. 아직 닭도 울음을 터뜨리기 전으로 어쩌면 하루 가운데 가장 공기가 낮은 때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가운데 난데없이 응애응애 하고 요란한 갓난이 울음소리가 어둠을 뚫고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그날은 닭도 새벽을 알리는 울음을 건너뛰었다. 졸음 중에도 질근질근 되새김질을 멈추지 않는 외양간의 어미소와 함께 새끼도 평소보다 빨리 깨었다. 굳이 동네방네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그 한방의 울음소리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출산 경험이 많은 아낙네들은 울음소리만 들어도 성별을 쉽게 구분했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이 뜨였다. 아낙들이 하나 둘 우물가로 모여든다.
     “사대동댁 울음소리 들었나?”(어머니는 사대동이란 동네에서 시집와 태고를 사대동댁이라 부른다)

     “하모 그 소리에 잠 다 깼다 아이가.”

     “그래 뭐 갔노?”

     “아들 같으나?”

     “틀림없이 아들이다. 울음소리 안 들어봤나?”

     “와 안 들어. 우리 정갑이 날 때 하고 똑같더라.”

     “사대동 댁이 이번에는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이번이 아마 우리 동네에서는 제일 노산이지?”

     사대동댁은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둘째 딸을 부른다.

     “희야! 숙희야, 할아버지에게 시간을 알아오너라.”
     동네에서 유일하게 조부께서 시계를 갖고 계셨다. 회중시계로 끈을 길게 하여 언제나 한복 조끼 앞주머니에 넣고 계셨다. 그 당시는 시계 구경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할배, 엄마가 동생 났어예.”

     “그래, 뭐낳노?”

     “고치라네 예-”

     “아이구, 수고했다.”

     “시간이 몇십니꺼?”

     “04시다.”

     “예, 알게심더.”

     조부는 매우 연로하셨지만 고치라는 손녀의 말에 안절부절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조부는 전날 불을 끄지 않고 긴장 가운데 조용히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자정을 훌쩍 넘겼고 그 후 4시간이 지난 다음 겨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동네 아낙들이 사대동 댁을 걱정하는 이유는 이전에도 출산하다가 그만 실신하여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숨을 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아 죽은 줄 알고 장례를 준비했을 정도였다. 그러기를 세 번씩이나 되풀이했었다. 모두 출산으로 인함이었다. 그래서 오늘 태어난 갓난이와 바로 위 누나와는 터울이 많이 진다. 그 사이에 세 명의 자녀를 잃은 것이다. 병원도 의사도 약도 없는 곳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죽으면 복이 없이 태어나서 그렇지, 하며 탓을 애매하게 돌렸다.

     집안에 아이 난 기쁨도 잠시 과연 이번에는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먼저 세 아이 모두 생존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하며 말을 꺼내기도 부담스럽다.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이름도 짓지 않았다. 이름이 없으니 호적에 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여러 번 앓고 불덩이가 되는 위기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겨우겨우 위기를 넘겼다. 그래도 뭐라고 불러야 했기에 돌림자인 ‘재(在)’를 넣어 ‘영재’라고 불렀다.

     물론 성장한 후에 들은 얘기다. 정작 나는 그 이름이 전혀 기억이 없다. 나에게 어릴 적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니 생소하고 의아했다. 듣는 순간, 왠지 지금 이름보다 훨씬 맘에 든다. 가끔 생각하기를 그 이름으로 살았으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삶이었을까? 하고.

     어머니는 앞에서 잠깐 얘기했듯이 나를 낳기 전 연거푸 세 번 유산을 하셨다. 나를 잉태했을 때는 건강이 채 회복되기 전이어서 몸 상태는 가히 좋지 못했다. 어머니는 태생적으로 약골이었다. 성장 자체가 아버지하고는 많이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외조부모님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셨다. 쓴 약을 먹이는 게 여간 곤욕스럽지가 못해 어머니가 아이 때 나무에 묶은 다음 강제로 입을 벌려 먹여야만 했다. 너무 어린 탓에 약의 쓴 기운이 종일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힘든 모심기가 끝나고 무더운 여름이 왔다. 농촌에서의 여름은 더위와 파리, 모기, 또 이름 모를 벌레들까지 합세해서 여간 성가신게 아니다. 살갗은 타 들어가 구릿빛으로 변하고 손톱은 언제나 까맣게 이물질이 묻어있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어머니는 또 몸의 이상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임신이었다. 그토록 원치 않는데 또 들어선 것이다.
     ‘모든 것이 인력으로 안되는구나.’
     아이가 들어선 것을 알고부터 어머니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 것 같다. 큰 바위 꼴 언덕에 올라가 몸을 구르기를 수십 차례도 더했다. 그래도 잘되지 않자 이번에는 둘째 딸에게 하늘 수박(이름은 하늘에 몸은 땅에) 뿌리를 캐오게 했다. 딸은 하늘 수박 뿌리가 무엇인지 알기에는 아직 일렀다. 어머니는 하늘 수박이 있는 곳을 자세하게도 일러준다. 마치 애가 들어서기만 해봐라. 내가 저 뿌리를 달여먹고 어떻게 하고 말 것이다. 하고 작심한 듯 정확하게 자생위치를 알려준다.

     “사찰 가는 길에 또비씨네 밭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쭈~욱 가다 보면 좁은 모퉁이 길이 나오지. 돌아서자마자 왼편으로 하늘 수박 넝쿨이 보일 것이다. 그 뿌리를 캐오너라.” 하면서 호미와 낮과 바구니를 쥐어 준다. 그리고 절대로 뿌리를 입에 대지 말 것도 단단히 일러주었다. 위험한 것을 다루기에 아직 일러 신경이 많이 쓰였다.
     엄마가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하늘 수박 뿌리를 건넨다. 어머니는 뿌리를 삼베에 넣은 다음 약탕기에 넣고 장시간 달인다. 삼베에 두 개의 나무막대기를 이용하여 즙을 짰다. 뿌리는 무처럼 희나 즙은 진한 갈색을 띠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나왔다. 삼베는 약간 붉은 색으로 탈색되었다. 하얀 사기 사발에 반쯤 담긴 즙은 보기에도 농도가 매우 짙어 보였다. 좋은 약이면 능히 모든 병을 낫게 할 것처럼 보였고, 그러나 그 반대라면 집채만한 황소도 견디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무엇이 그렇게 급한지 채 식기도 전에 단숨에 들이켰다. 얼마나 독했는지 들이키자마자 선 붉은 피와 함께 즉시 우~웤 하고 토해 나왔다. 기진맥진하여 잠시 방안에 드러눕는다. 들이킨 것을 다 겨워 냈음에도 뭐라 표현 못 하게 속이 괴롭다.
     ‘하늘 수박 뿌리가 이렇게 독할 줄은 몰랐는데 잘하면 애가 떨어질 수도 있겠다. 처음은 내 몸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렇지 두 번째는 괜찮을 거야.’ 하고 남은 즙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몽땅 둘러 마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전보다 많은 양을 넘겨서인지 괴롭기가 훨씬 더 심했다. 그 일로 어머니는 오래도록 구토에 시달려야만 했다.
     후유증은 끈질기게 어머니를 괴롭혔다. 한겨울에도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실패한 것을 알고 태아가 더 자라기 전에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독한 약을 다려 먹기도 했는데 그래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드디어 진주의 한 산부인과를 몰래 다녀왔다.

     “이만저만해서 아이를 지우려 합니다.”

     “이미 노산이어서 산모까지 위험합니다.”
     어머니는 산부인과를 두어 군데 더 들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산모와 뱃속에 든 태아의 생명은 위태위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의 샘 곁에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낯선 아이가 대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세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로 바지는 입지 않고 상의만 입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뭔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은 비록 어린아이지만 나름 심각해 보였고 진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다 샘 곁에 앉아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엄마”하고 달려와서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지금도 자식이 많은데 또 하며 “다른 데로 가거라, 나는 네 엄마가 아니다.” 하고 귀찮은 듯이 밀치려 하였으나 아이는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아니야, 우리 엄마가 맞아. 나는 엄마하고 같이 있을래. 다른데 안 갈 거야.” 하고 또렷하고 간절하게 말했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꿈을 꾼 것이다. 아이가 들어섰을 때마다 꿈을 꾸었지만 그런데 이번 꿈은 전에 꾸었던 것과는 달랐다.

     한동안 꿈에 본 아이의 잔상이 또렷하게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낙태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했는데 ‘애를 지워서는 큰일 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후, 어머니는 더 이상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는 예정된 날짜에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다. 내가 결혼하고 장성한 다음 누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누님께 물어보았다.

     “꿈에 본 애와 태어난 애의 생김새가 어때요?”

     “분명 똑같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자주 그 말씀을 하셔서 누님은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나의 조부(祖父)님 얘기를 조금 해야겠다. 할아버지는 1895년에 태어나셨다. 역사적으로 갑오경장이 일어나던 해로 기억된다. 일본에 의해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형제분은 다섯이나 되었다. 모두 남자들이다. 증조부께서 성이 안가(家) 신부를 맞이하여 아들 다섯을 두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안은 여러 성씨 중에 특히 안 씨 하고 잘 어울린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증조부 이후 약 1백5십년도 더 지나왔는데 내가 알기에 안 씨 성을 가진 처자와 결혼한 이는 아직 아무도 없다.

     나의 할아버지는 다섯 형제 중 맨 맏이로 태어났다. 미남형에 신장은 꽤 큰 편에 속했다. 그렇다고 농사일을 할 체질은 아니신 듯하다. 젊을 때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농사짓는 일은 확실히 하지 않으셨다. 아마 학교 교육 쪽으로 몸담으신 듯하다. 거의 돌아가실 무렵, 낯선 사람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어머니께 물어보니 할아버지의 제자들이라고 하셨다. 해방되기 전 나라의 안팎 소식을 전해 들을 아무런 매개체가 없던 시절 바깥 활동을 하시는 할아버지 덕에 우리 마을은 그나마 외부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3.1 만세운동,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희생, 일본에 의해 태평양전쟁발발 더 나아가 전 세계가 전쟁으로 몸살을 앓는 소식들을 전했다. 조부께서 3.1 운동에 참여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민족적인 구국운동이 과연 우리 시골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도 지금으로서는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 군청(郡廳)도 일본 사람들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었다.

 

     한 번은 마을에 광 나는 긴 가죽 부츠를 신고 허리에 시퍼런 니뽄도를 찬 순사가 말을 타고 경관들과 함께 등장했다. 머리칼은 모자에 눌린 자국이나 흐트러짐이라곤 없었다. 양 끝이 안으로 말려 들어간 콧수염은 신기할 정도로 윤기가 흘렀다. 콧수염 아래 감춰진 일자형의 꽉 다문 입술이 열리는 순간,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경직되다시피 했다. 처음 있는 일로 마을은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듯 술렁였다.

     할머니들은 평소 손자들이 울거나 고집 피우고 떼쓰면 ‘저기 일본군 순사가 우리 아가 잡으러 온다’ 하던 그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다. 호랑이 대용으로 등장한 인물이니 잘 다듬은 콧수염은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두렵기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자기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장으로 보이는 일본 순사는 마을 사람들을 경멸하듯 노려본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친 아이들은 줄행랑을 친다. 어른들도 황급히 자리를 뜨는데 오히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은 별다른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모인 자리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고 ‘장이요’ 할 땐 간간이 탄성도 흘러나왔다.

     일본군 대장은 그 소리가 거슬리는 듯 한동안 노인들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무시한 처사라 여긴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일본 순사가 예고도 없이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온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독립군이 마을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일까? 분명 누군가를 잡으러 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동안 마을을 어지럽게 수색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조부님의 둘째 동생 즉 작은할아버지가 오랏줄에 포박된 채 끌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왜? 이유가 뭐냐고? 무슨 연고로? 하며 물을 수도 없었다. 그저 식구들은 눈물을 흘리며 끌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른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긴 하지만 작은할아버지는 소위 독립운동을 할 그런 위인은 아니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을 해본들 통할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는 분을 통해 어렵게 안부를 들을 수 있었는데 며칠 날짜로 사형이 집행된다는 다소 보안에 가까운 내용이 전부였다.
     조부님은 몸져누울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물론 당신의 부모님도 생존해 계셨다. 조부님이 심한 충격으로 괴로워하자 아버지가 조용히 할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님, 날짜와 시간, 집행장소를 알아봐 주세요.”

     “왜 그러냐?”

     “그냥 알아봐 주세요.”

     할아버지는 혹시나 동생을 죽음에서 구출할 수만 있다면........ 어쨌든 아들의 말을 따라 다시 한번 지인의 도움으로 날짜와 시간, 집행장소 그리고 이동 경로를 비교적 자세하게 전달받아 아들에게 일러준다.

     “무슨 일이냐?” 여전히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닙니다. 아버님-”

     조부님은 날짜가 다가오자 연로하신 자신의 부모님께는 말도 못 하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변했다.

     한편, 아버지는 며칠 전부터 사형수들의 이동 경로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지점쯤에서 쉬어갈 것도 예상하여 거사를 꾸민다. 물론 혼자였다. 사람이 많으면 발각되기가 그만큼 쉽기 때문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들이 밤을 틈타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 일대 산악지대는 아버지의 나고 자란 곳으로 아무리 밤이라도 손바닥 보듯 훤했다. 죄수들은 포박된 채 일렬로 행군하는데 도망가지 못하게 가마니 같은 것으로 머리를 푹 씌웠다. 사형집행도 머리에 뒤집어쓴 그대로 무릎을 꿇린 다음 니뽄도를 높이 쳐들어 단칼에 목을 향해 내리친다.
     ‘군청으로부터 사형장까지는 대략 35리 정도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세 번 정도 쉬었다 갈 것이다.’ 어디쯤에서 실행할 것을 결심하고 나름 만발의 준비를 다 한다.
     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와는 사전에 신호를 주고받은 것이 아니었다. 얼굴을 가리고 같은 복장의 죄수들 가운데 자신의 숙부를 찾기란 힘들 것이다. 그것도 달과 별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아버지는 세 번째 휴식 때를 노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휴식 장소는 비교적 마을과 가까워 죄수가 없어진 줄 알면 순사들의 의심과 마을이 괴롭힘을 받을 수 있다. 마지막 휴식 장소는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그만큼 집중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와 두 번째 휴식 때는 숫자를 철저히 헤아릴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휴식이 끝나면 바로 사형집행장이므로 조금은 느슨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차 확인 없이 바로 진행되므로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여 굳이 눈에 불을 켜고 숫자를 헤아려야만 할까. 그런저런 이유로 마지막 휴식할 때를 선택했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아버지는 남성 성인이 들어가고도 남을 큰 자루를 제일 먼저 준비했다. 눈에 잘 띄지 않게 색깔도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숲 속에서 조용히 어둠을 기다린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 횃불 두 개가 나타났다. 아직 희미했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진다. 죄수들의 행렬이었다. 횃불은 앞에 두 개, 가운데 하나, 그리고 끝에 두 개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순사들은 도합 15명 정도로 모두 허리에 칼을 두르고 앞에 두 명과 끝에 두 명은 칼 대신 총을 메고 있었다. 나름 빈틈이 없었다. 죄수들은 길이 좁아 일렬로 길게 늘어섰는데 대략 40명 정도였다.
     첫 번째 휴식을 알린다. 소피는 길가로 돌아서서 해결했다.

     약간 웅성웅성한 틈을 타 덤불 속에서 나지막이 ‘작은아버지, 작은아버지-’ 하고 불러 본다. 물론 순사들은 모두 일본 사람들로 눈치채지 못했다. 참고로 아버지는 변성기를 경험하지 못하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매우 드문 경우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목소리만 들어도 금방 눈치를 챈다.

     아니나 다를까. 죄수 중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반응을 한다. 반응이라고 해봤자 귀에 익은 목소리로 인해 고개를 옆으로 두리번 두리번하는 것이 전부이다. ‘분명 내 조카음성인데 잘못 들었나?’ 하는 것 같았다. 이동 중에 죄수는 물론 일본 순사들도 입 밖으로 말을 내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와 밤낮없이 울어대는 풀벌레는 사람의 발길이 가까워지자 뚝 그쳤다. 이따금 우~우~ 하는 짐승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도 한다.

     죄수들의 한걸음 한 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내딛는 보폭만큼 죽음이 가까워짐을 알고 있었다. 일본 순사들의 발걸음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사람들은 포박된 채 형장으로 끌려가고는 있지만 사형당할 정도는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색출이 됐는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 혹 밀고에 의함인지? 그들조차도 잘 몰랐다. 심문도 재판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일본 강점기에 억울한 죽음이 어디 한둘일까.

     죄수들의 한숨 소리는 탄식처럼 고통스럽다. 산허리를 돌아 난 길은 돌부리가 유난히 많아 걸음을 힘들게 한다. 발이 돌부리에 걸려 꼬꾸라질 듯 심하게 기우뚱거리는 모습은 죄수들을 더욱 처량하게 했다. 그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이라도 하듯 어디선가 소쩍새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린다. 울음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얼마를 갔을까. 평평한 바위가 넓게 둘려있는 곳에서 두 번째 휴식을 알린다. 순사들도 첫 번째보다는 다소 지쳐 보였다. 총을 멘 앞뒤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바위에 걸터앉아 일제히 담배를 피워 문다. 목소리도 제법 크게 들렸다. 아버지는 그 틈을 이용하여 아까와 같이 자신의 숙부를 부른다. 이번에는 확실히 눈치를 채신 것 같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앞에서 열두 번째 정도였다. 체구가 할아버지 형제 가운데 제일 왜소했다.

     위치 파악도 끝났다. 마지막 쉼터에서 행동을 개시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세 번째 휴식할 때가 아니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아버지의 심장이 속에서 조용히 떨렸다. 맥박도 빨라지고 어느새 두근거림의 파장도 낙차가 점점 커진다. 마침내 마지막 휴식 장소에 다다른다. 작은할아버지는 조카가 주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일본 순사들도 지쳤는지 아니면 죄수들에 대한 최후의 배려인지 서두르지 않았다. 희롱이나 멸시 혐오 같은 행동도 최대한 자제한다.

     작은할아버지는 최대한 산과 인접한 바깥에서 소피를 본다. 그리고 조용히 조카의 이름을 부른다.
     “외국아~ 외국아~”
     아버지 또한 두 번째 휴식에서 작은아버지를 지목하고는 시선을 한시도 떼지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동생이 일본 순사에게 끌려간 다음부터 잠시도 마음을 놓지 않으셨다. 만일 작은할아버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또한 괴로움에 지쳐 잘못될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리고 느슨한 틈을 타 준비한 큰 자루를 그대로 덮어씌우고 자신의 숙부를 둘러메어 마을 반대편으로 달음질했다. 순식간이었다.

     일본 순사가 호각을 불며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숙부를 둘러메고 길도 없는 어두운 산을 넘고 또 넘고 또 넘었다.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뛰었다.

     조부께서는 언제 몇 살 때 혼인을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굳이 따져 보면 알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어서 다루지 않겠다.

     결혼하고 얼마 못되어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아이가 세 살쯤 될 무렵, 그만 세상을 뜨셨다. 겨우 걸음을 내디딜 정도의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로 말이다. 정확한 사인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홀아비 혼자서 아이를 그것도 갓난이나 다름없는 어린것을 키우기란 몹시 힘들었다. 재혼을 결정하시고 그리고 김씨 성의 처자를 새로 맞이하셨다. 덕망 있는 집안의 자제로 일대 소문이 자자했다. 인물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새로 맞이한 아내에게서 조부님은 아버지를 비롯해 고모 두 분과 작은아버지 세 분이 태어나셨다.

     할머니는 홀로 남겨진 아이(큰아버지)를 보며 비록 내가 배앓이를 하여 낳지는 않았지만 내 아들로 반듯하게 키울 것을 결심하셨다. 할아버지와 새 할머니 사이에 첫아이가 태어났는데 바로 나의 아버지가 그 첫 번째였다.

     할머니는 자신의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하면 혹 아이(큰아버지)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자신의 첫아들은 막 젖을 떼고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부터 아예 친정으로 보냈다. 이유는 오로지 그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연고로 아버지를 부를 때 ‘외국’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런 훌륭한 분이 나의 할머니인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교육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본 바탕은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으랴. 아쉬운 것은 나는 그런 할머니를 뵙지 못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할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 옛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겁고 한편으론 아쉽다.

     할머니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하셨다. 오히려 할아버지에게 혼나거나 야단맞은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대개 아버지는 공의요, 어머니는 사랑이다. 라고 하는데 할머니는 오히려 그 반대셨다. 그러나 손자들은 끔찍이 사랑스러워하셨다. 교육 학자들은 어머니가 엄하고 반대로 아버지가 유한 것이 자녀 교육에는 더 낫다고 한다.

     이쯤에서 아버지의 여러 형제 중에 작은아버지 한 분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은 ‘환열’로 아버지 형제들은 가운데 ‘환’ 자를 돌림자로 썼다. 작은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조금 남달랐다. 체구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큰 편은 아니지만 그러나 다부지기가 말도 못 했다. 몸이 얼마나 날렵한지 3~4미터는 그냥 뛰어넘었다. 늘 에너지는 샘솟 듯 솟구쳐 잠시도 그냥 있는 적이 없었다.

     방앗간을 운영했는데. 물론 지금처럼 전기나 기계로 방아를 찧는 것이 아닌 물을 이용한 방앗간이었다. (말 그대로 자연 친화적이라고 할까.) 그 많은 쌀가마를 사람이 지고 나를 수 없어서 소가 끄는 달구지(구루마)를 이용하여 날랐다. 보통 암소는 수소에 비해 힘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많은 짐을 나르지 못한다. 달구지를 끄는 우리 집 황소는 크기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집안에 여자들은 겁에 질려 얼씬도 못했다. 보통 남자들도 옆에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몸에 손이라도 대려 하면 그대로 들이받았다. 시퍼런 눈동자는 보기에도 무서웠다. 목은 대들보보다도 더 굵었다. 뿔 뒤부터 목덜미를 지나 어깨 위로 길게 뻗은 검붉은 털은 마치 괴물 같았다.
     그런데 아무 사람도 겁내지 않던 황소도 유일하게 겁을 내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작은아버지였다. 숙부는 당시 고작 열 살이었다. 한창 개구쟁이 어린이다. 하지만 그가 다가가면 그 큰 덩치가 고개를 돌리고 슬금슬금 눈치를 살핀다. 그 앞에서 집채만한 황소는 마치 순한 양이 되어 그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광경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러던 어느 날, 잘 매어둔 황소가 그만 고삐가 풀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삐도 없는 소를 그것도 무시무시한 황소를 무슨 수로 제어한단 말인가? 동네는 난리가 났듯 비상을 걸어 특히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들은 외출을 삼갈 것을 당부했다. 혹 뿔에 받히기라도 하는 날엔 목숨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급히 작은아들을 찾는다. 우선 황소가 어디쯤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고 방법을 생각했다. 별다른 뾰족한 수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마을 외곽에서 겨우 소를 발견했다. 다행히 아직 사고는 나지 않은 것 같았다. 소는 어딜 갔다 오는지 어슬렁 어슬렁 저 멀리서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길 가운데 사람이 올라가도 될 정도의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작은아버지는 곧장 나무 위로 올라갔다. 점점 소와 가까워진다. 타이밍에 맞춰 뛰어내린 다음, 소가 놀라기도 전에 이미 손은 코뚜레가 되어 단번에 황소를 제압했다. 실로 전광석화 같았다.

     그대로 돌아서서 손은 뒤로 하여 코뚜레처럼 황소의 코에 집어넣고 천천히 마을로 들어선다. 말하자면 아이의 등과 황소의 머리는 붙어있다. 졸졸 뒤따르는 집채만한 황소에 비해 아이는 마치 고목나무의 매미 같았다. 코만 잡혔을 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뒤에 안 사실이지만 짐승은 눈 가까이 물체가 있으면 자신보다 크게 보여 얌전해진다)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겨우 열 살 남짓한 소년이 어른조차 엄두도 못 낼 일을 한 것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그렇게 집 나간 황소는 무사히 돌아왔다. 코에 새 고삐를 채운 다음 안전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외양간은 황소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새 짚과 부드러운 풀로 푹신하게 깔아놓았다.

     조부께서 오래전부터 품삯을 받고 일하는 사내(머슴)에게 말한다.

     “오늘은 생 여물을 주지 말고 따뜻하게 소죽을 끓여 줘라.”

     할아버지는 왜 사내에게 소죽을 끓여주게 했을까? 문득 많이 힘들어서 뛰쳐나간 것은 아닐까? 제아무리 황소라 해도 달구지 가득 짐을 싣고 나르기란 무척 힘겨운 일이다. 한바탕 큰 소동을 일으켰지만 그래도 조용히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충직한 일꾼에 대한 할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진다.

     자녀를 향해 소망 없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 모든 부모는 자녀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 특히 남다른 재능이 엿보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여러 자녀 중 유독 작은아들에게 예사롭다 못해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잘 교육하면 뛰어난 재목감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공부를 시키기로 마음먹고 부친의 명성에 힘입어 특별히 유능한 선생을 모셔다 교육을 받게 했다. 요즘으로 하면 특별 과외 수업이다.

     아, 그런데 안타깝게도 작은아버지는 공부에는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몇 달을 지도해본 결과 진척이 거의 없었다. 마치 소귀에 경 읽기였다. 학문의 깨우침도, 뭔가를 알아가는 즐거움도 이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글공부에는 재주가 없음을 확인하는데 그쳤다. 하는 수없이 다 물리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큰 기대를 했건만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부친의 마음은 노여움으로 변했다. 그 노염은 그전의 기대와 사랑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 그때부터 부자지간 간격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모두가 참여하는 제사 자리에도 참석을 허락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두 형제는 특히 씨름에 소질을 보였다. 아버지는 우리 마을과 인근 동네에서는 소문난 장사(壯士)였다. 이미 15세에 맨몸으로 오르기도 힘든 뚱뫼 언덕을 아구까지 가득 채운 쌀가마니(대략 80~120kg)를 지게에 지고 오른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한창 기운이 샘솟듯 할 무렵 17세 약관일 때 동네에서 가장 힘센 장사(壯士)의 지게 짐을 눈여겨보았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 것과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났다. 보통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시험 삼아 아버지가 져보았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생각보다 큰 힘 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게를 진 발걸음도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이 광경은 잠시 후, 주변 사람들에 의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새로운 장사가 탄생됨을 알렸다.

     마땅히 오락이나 게임이 없던 시절 일 년 중 한 번 개최하는 산청군에서 주체하는 운동회가 그나마 제일 큰 행사였다. 종목으로 마을 대항 줄다리기는 빠지는 법이 없다. 더불어 제일 큰 관심은 뭐니 뭐니 해도 씨름이었다. 지형적으로 산악지대가 대부분으로 그런 환경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연고일까? 과거 씨름장사들이 서부 경남지역에서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두 형제는 마을 대표로 해마다 출전했다. 우승까지는 잘 몰라도 아무튼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다. 한 번은 작은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형수님, 옷 한 벌만 해주세요.”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해드릴게요” 어머니는 아무도 모르게 시동생에게 옷을 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가족 중 누구에게 약간의 언질도 없었다. 그렇다고 메모를 남긴 것은 더욱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 조부모님은 백방으로 사람을 풀어 찾게 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그렇게 작은아버지는 열일곱 살에 부모 형제를 뒤로 하고 고향을 떠났다. 뒤늦게 안 사실은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함께 갔던 친구는 몇 달이 못 되어 귀국했다. 아마 본인이 생각했던 일본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었나 보다.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소식을 전했다. 한국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히로시마에서 정착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반쯤의 일이다. 선천적으로 다부지고 부지런하여 어떤 열악한 환경에 놓여도 걱정할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아무 연고 없는 낯선 이국땅에 홀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조부모님의 근심이 깊어진다.

     당시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다. 그것은 일본 본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인들은 일본 중에서 주로 히로시마(廣島)에 많이 모여 살았는데 아마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처럼 전화나 우편 등 안부를 전할 만한 통신매체가 전혀 없는 시대였다. 말하자면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내 아들 못 봤소?’ 하는 격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일본의 침략전쟁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만주, 중국 본토, 동남아, 급기야 미국 하와이까지 포탄을 싣고 날아가 정박 중인 미 군함 위에 떨어트렸다. 선전 포고였다. 드디어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서막이 올랐다. 필리핀과 오키나와 동남아 일대와 일본 본토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전쟁은 점점 깊어만 가고 일본 본토를 치지 않고서는 항복을 받아내기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을까. 미국의 폭격이 부쩍 늘었다는 소식은 할아버지에게도 전해졌다. 조부모님의 근심과 걱정이 날로 더해만 간다.

     그렇게 수년간 이어진 전쟁은 조금씩 미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다만 전쟁의 당사자인 일본만 모를 뿐! 동맹군이었던 이탈리아와 독일이 차례대로 항복을 선언하고 백기를 들었다. 남은 건 일본으로 역시 패색이 짙어갔다.

     그런데 일본은 같은 동맹국과는 민족성 자체가 많은 차이를 보였다. 급기야 가미카제를 조직하여 결전에 임했고 그 항전의 끝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이었다. 전투기 연료인 가솔린을 돌아올 양까지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적진에 도달하는 데까지만 넣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전투기와 함께 적군 군함의 심장부에 포탄처럼 투하되어 산화되었다. 이를테면 자폭이다. 누가 바도 아니 그 시점에서 항복을 선언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데 특이한 것은 천황(일본왕)이 항복하기 전에는 이대로 갈 태세다.

     마침내 미국은 어떤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1945년 8월 6일이 되기 약 한 달 전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는 여러 대의 미 공군기가 편대를 이루어 뭔가를 열심히 뿌리고 사라졌다. 경고성 전단으로 일명 삐라였다. 수백만 장이 하늘을 수놓았다.

 

         히로시마 시민에게 고함:

         히로시마, 나가사키 시민들은 8월 6일 07시 이전에 50km 밖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날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죽음의 원폭이 투하되는 날입니다.

         그날이 임하기 전에 안전하게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1945년 8월 6일 새벽 02시 45분, B-29는 북 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언섬에서 4천백kg의 암호명 ‘리틀보이’를 탑재하고 출격한다.
     07시 무렵, B-29는 히로시마 상공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적의 폭격기가 출현했으므로 공습경보가 울렸지만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과연 삐라 내용대로 원자탄이 터질까? 대부분 믿지 않았다. 공습으로 이어질 때는 수백 대의 폭격기가 출현하는데 이번에는 두 대가 상공에 떠다녔기 때문에 당연히 정찰기로 생각했다.

     B-29 조종석에서 본 히로시마의 여름 아침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미국군의 공습이 한 번도 없었던 곳이 바로 히로시마였다. 그로부터 1시간 뒤 08시에 고도 약 9천5백미터 상공에서 약 40초 동안 떨어진 다음 5백7십미터 상공에서 폭파되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섬광이 번쩍했다. 말로만 듣던 핵폭탄이다. 경고한 대로 핵폭탄이 터진 것이다. 설마 그런 것이 있겠어? 경고를 무시한 안일함이 화를 키웠다.

     인구 34만의 도시는 순식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창공에서 번쩍하는 순간, 수 만 명이 듣지도 보지도 못 한 핵 방사능으로 목숨을 잃었다. 광선을 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실명되었다. 버섯구름은 순식간에 하늘을 캄캄하게 집어삼켰다. 흑암이다. 6천도의 고열은 사람도 태우고 식물도 건물도 모든 것을 태웠다. 열로 인해 강물에 뛰어든 사람은 순식간에 물이 끓어올라 익어버렸다. 짧은 시간에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죽은 것이다. 물론 인류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쑥대밭이 되었다. (쑥대밭은 히로시마 원폭으로 생겨난 말로 원폭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쑥만 무성하게 자라더라 해서)

     원자탄의 가공할만한 위력에 설계했던 사람도, 만든 사람도, 그것을 현장에 투하했던 사람도 모두가 놀랐다. 아무도 이렇게까지는 예상을 못 한 것 같다.
     미국은 8월 9일 정확히 3일 후, 다시 나가사키에 이번에는 암호명 ‘팻맨’을 같은 기종에 탑재하여 투하했다.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우리나라는 원자탄이 투하된 지 일주일 만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이한다. 우리 힘으로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를 염원했지만 어쨌든 서방의 도움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조부께서도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이 히로시마의 원자탄 투하로 말미암음을 알고는 아연실색했다. ‘왜 하필 히로시마에?’ 아들 생각에 주름진 얼굴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맺힌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한열아 ~’ 신음하듯 부른 아들의 이름은 소리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만 속에서 메아리 되어 사라지고 만다. 히로시마에 그 난리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비록 연락은 닫지 않았으나 생존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작은아들만큼은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폭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더군다나 히로시마는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사는 곳이 아닌가. 아들 또한 히로시마에 있는 줄 알기에.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원폭 앞에서는 하며 아들의 생존에 대한 희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지나고 해가 바뀌고 강물이 연하여 흘러가듯 작은아들을 마음 속에서 내려놓았다. (돌아오지도 못할 자식 붙잡고 있어서 뭣할까.)

     그로부터 몇 해가 흘렀다. 이번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또 한 번 전 국토를 피로 물들인다. 1950년 6.25가 발발한 것이다. 북한의 일방적인 무력 남침으로 전 국토는 하루아침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감긴다. 그야말로 남과 북의 이념전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넷째 남동생이 전쟁 중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내몰렸다. 아버지 형제분 중에서 유일하게 내 기억에 없는 분이다. 그래서 함자도 잘 모른다. 들어본 적도 물론 없다. 우리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큰 누님과 큰 형님만 그것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대다수 형제들은 그분이 전사하고 난 뒤에 태어났으므로 잘 알지 못한다.

     입대 전에 결혼도 했다. 그러나 자녀를 남기지 못하고 전사했다. 사인은 너무도 원통하고 기가 막혔다. 전투를 마치고 다음 전투를 위해 각자 총기를 손질하는데 반대편에서 총기 손질을 하던 총구에서 그만 격발이 된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총기 오발 사고였다. 격발된 탄알은 그대로 목을 관통하여 손쓸 틈도 없이 즉사했다고 한다.

     이 소식은 전사자의 고향에도 통보되어 또 한 번 죽음보다도 더한 슬픔이 온 집안을 휘감았다. 이렇게 조부모님은 전쟁터에서 한 아들을 잃고 또 아들 하나는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벌써 수 년이 흘렀다. 그때의 조부모님의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결혼한 다음 비로소 어릴 때 짧게 뵈었던 나의 조부님이 생각났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내가 태어날 무렵, 조부님은 매우 연로하셨다. 지팡이를 짚지 않으시면 외출을 할 수도 없었다.

     큰집(큰아버지 댁) 청 마루에 서면 비교적 먼 곳까지 보인다. 서서 있는 것도 힘겨워 아예 천정에 줄을 매달아 붙잡고 먼 곳을 응시하셨다. 그때는 잘 몰랐다. 그냥 저 너머를 쳐다보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떠나간 자식들이 행여나 저 동구 밖 넘어에서 꼭 올 것만 같은 할아버지의 애타는 기다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365일 항상 대문을 닫지 말고 열어두게 하셨다.

     “대문 닫지 마레이.......”

     이미 눈물샘은 말랐고 애달픈 마음만 남아 자식에 대한 그리움만 깊어간다. 입은 반쯤 벌린 채 다물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소리도 잘 나오지 않으셨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줄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부르다 부르다 지쳐서였을까?

     기력을 다해 줄을 붙든 손은 떨고 있었다. 그날도 기다림에 지친 움푹 들어간 눈은 버스가 머물다간 빈자리를 놓지 않으셨다. 그 모습이 마치 얼마 전 같이 생생하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 사인은 위암으로 밝혀졌다. 그렇다고 위암이 할머니 집안의 유전으로 내려오던 병은 아니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두 아들을 잃었는데 어떻게 부모가 온전할 수 있으랴. 심약함이 극에 달했을 텐데 무슨 병인들 못 찾아올까. 할머니는 두 아들을 잃은 충격에서 끝내 회복되지 못하셨다.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못 되어 몹쓸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 할아버지를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났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의 막내아들은 갓 스물로 20세 약관이었다. 아버지의 맨 나중 동생으로 할머니는 그런 막둥이가 몹시 눈에 밟혔나 보다.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마음은 늦게 태어난 자녀에게 머무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임종의 자리에서도 그런 막내가 많이 걱정되어 특별히 아버지에게

     “네 동생을 부탁한다.” 하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

     아버지 또한 자기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에

     “어머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안심은 시켜드렸지만 그래도 뜻대로 다하지 못함을 인해 늘 마음에 부담으로 간직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번은 아버님이 연세가 많이 드셨을 때 혼잣말처럼 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위암으로 음식을 넘기지 못하셨을 때 마땅히 대체할 것이 없어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는데 혹시 쌀을 물에 불린 다음 곱게 갈아서 밥 대용으로 먹여드렸으면 어땠을까?’
     물론 쌀가루가 무슨 약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밥을 대신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해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여러 번 되뇌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해가 바뀌었다. 계절은 다시 돌아 봄이 왔다. 얼어붙었던 대지는 속에서 움을 틔운다. 골짜기를 덮은 눈은 녹아 내(川)를 이루고 땅을 적신다. 꽃이 핀다. 새들은 겨우내 답답했는지 종일 울어댄다. 세월은 그렇게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흘러간다. 머물러 주지 않는다. 또 기다려주는 일도 없다. 집안은 다소 무거운 봄을 맞이했다.

     자손들이 여럿 태어났음에도 텅 빈 것 같았다. 전쟁이 끝나고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고향의 풍경은 고즈넉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젊은 신사가 버스에서 내렸다. 함께 내린 사람은 아내와 딸과 아직 어린 아들은 안고 내린 다음 걸리운다. 동네 사람들은 힐끗힐끗 그들을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뚫어지게 쳐다보지만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신사는 동리가 익숙한 듯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고 곧장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집 문 앞에 다다르자 그 집 사람들조차 처음에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금방 누군지 알아보았다.

     “한열아!”

     “아부지-”

     그렇게 늙으신 아버지와 아들은 오래도록 서로 목을 어긋맞게 하고 흐느껴 울었다.

     “이제 너를 봤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그랬다. 오래 전 열일곱 살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할아버지의 작은아들이 돌아왔다. 떠날 때의 자신의 나이보다도 더 오랜 무려 18년 만의 일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서 그것도 가족을 거느리고 돌아온 것이다. 꿈 속에서나 나올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오히려 낯선 얼굴이 더 많이 눈에 띈다. 고향을 떠나온 사이에 아버지의 손자 즉 조카들이 많이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당황한다.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다음날 작은아버지는 모친의 산소를 찾았다. 1년 전에 돌아가심을 알고 오열했다. 원통한 듯 모친의 무덤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뒤늦은 후회였다. 그러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아쉽고 억울하고 원통함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괴로움은 살을 찢는 것보다 더했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 같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목놓아 불러 보지만 모친은 아무 대답이 없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하루 종일 무덤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저녁이 다되도록 울다 지쳐 그의 실신 상태가 된 것을 동네 청년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부친의 기력이 눈에 띄게 쇠약해지자 자주 고향을 방문하셨다. 나의 조부님은 78세를 일기(一期)로 생을 마감하셨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괴로움이 유독 많은 인생이었다. 첫 번 아내는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났다. 또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도 여럿 두었다. 두 아들을 잃고 그중 한 아들은 전쟁터에서 앞서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또다시 아내를 먼저 보내고 자신은 온전치 못한 몸을 이끌고 뒤에 남았다.

     수한(壽限)이 다 됨을 아시고 자녀들과 그 몸에서 나온 자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운명(殞命)하셨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여덟 살이었다. 아직 어려서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죽음을 처음 보았다. 눈이 붓도록 많이 울은 누나가 여전히 슬픈 얼굴로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셔서 다시는 뵐 수 없다.”라고 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말에 비로소 슬퍼졌다.

     작은아버지는 원폭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람들의 온갖 멸시와 천대를 다 이기고 살아남으셨다. 그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교포 2세인 작은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이루어 슬하에 1남 2녀를 두셨다. 모두 대학까지 공부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오래 전 나는 혈육 중에 처음으로 히로시마 작은아버지 댁을 방문했다. 감개무량하신지 연세가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의 명소들만 골라서 구경을 시켜주셨다. 도쿄에서 전날 저녁 고속버스를 타고 다음 날 아침 7시 30분 히로시마 터미널에 도착했다. 사촌 누나가 먼저 약속 장소인 시계탑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작은아버지를 만나 간단하게 모닝커피와 빵을 먹은 다음 맨 먼저 원폭이 투하됐던 그 자리를 방문했다. 일명 평화의 공원으로 당시 히로시마 시청 자리였다. 세계평화를 위해 상징적인 의미에서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었다. 기념관을 둘러본 다음 비로소 집으로 향했다. 이틀 후,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신칸센을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사촌 형(사촌 형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서울 우리 집에서 1년을 함께 생활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소개하겠다.)이 배웅을 나왔다. 기쁨보다는 낯설고 먼 이국땅에서 그것도 가장 가까운 혈육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서로 사촌 형제라는 것만 알고 말도 통하지 않아 왠지 모를 안타까움만 가중되었다.

     그 만남 이후 지금까지 누나와 형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신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와 같은 해에 일본에서 돌아가셨다.

 

2

 

     나의 아버지는 18세에 결혼하셨다. 어머니는 그보다 정확하게 한 살 적은 17세였다. 두 분은 음력 섣달 스무하루(12월 21일)로 생일이 같았다. (아버지 1920년생, 어머니 1921년생) 어머니의 친정 즉 외가댁은 옛날부터 대학자 집안으로 농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직 학문을 연구하고 유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하였다.

     외조부(外祖父)는 생비량면에서 나고 자란 분이 아니셨다. 원래 한성 즉 서울을 원적으로 두고 있었다.
     오래 전 180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발전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변혁을 꾀하셨는데 다만 일본의 힘을 의지하여 변화를 모색하신 것은 아니었다. 당시 뜻을 같이하여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은 근대 역사를 공부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름만 들먹여도 금방 아는 인물들이다. 함께하여 도일(渡日)을 꿈꾸었으나 홀로 계신 모친의 갑작스러운 건강악화로 그만 동행하지 못했다. 이후 일본 사람들의 집중적인 견제가 시작되었고 이는 신변의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여 지금의 생비량면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왜 하필 이곳을 선택하셨는지?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외조부는 당시 드물게 외동으로 태어나셨다. 뒤에 안 사실은 집안이 오래도록 독자로 내려왔는데 외조부 때에 비로소 여러 자녀를 두게 되었다.

     여러 형제 중 특이하게 어머니에게만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이유는 글을 깨우치면 단명할 운명이라 하여 외조부께서는 자녀들에게 특히 그 오빠들에게 어머니 앞에서는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조차 금할 정도였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어머니는 스스로 공부를 하고자 했지만 한사코 허락하지 않으셨다.

     앞에서 언급했듯 어머니는 17세에 결혼하셨다. 요즘은 있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때 당시는 그 연령(年齡) 때가 거의 보편적이었다. 일본군들이 시집가지 않은 젊은 처자를 늑대처럼 호시탐탐 노리기도 했었고, 또 결혼문화가 지금 하고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어느 날, 문득 내 어린 기억 속의 부모님의 나이를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는 어떻게 아버지와 만나게 되었을까? 하고 강한 궁금증이 생겼다. 사실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궁금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지금처럼 둘이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했을까? 물론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전적으로 부모님이나 아니면 집안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친가와 외가는 거리도 있을뿐더러 만날 일이 그의 없는 집안이었다.

     친가는 대대로 농사일이 주업이요, 외가는 대대적인 학자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직접 들은 적은 물론 없었다. 큰 누님도 형님도 알려주는 이가 없다. 아니, 잘 모르는 것 같다. 궁금증은 점점 내 속에서 깊어갔다. 그럴수록 답답함만 가중되었다. 혹시 단서가 될까 하여 희미하지만 옛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안타깝게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이쯤에서 결론을 내렸다. 부모님과 나의 형제들에게는 들은 적이 없다고.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외가댁에 외사촌 형님 즉 어머니의 친정 조카가 아직 생존해 계심을 알았다. 연세가 매우 많았다. 거의 90이 다 되었다. 어머니 둘째 오빠의 아들로 어머니의 친조카였다. 다행히 형님은 총기가 여전하셨고 비교적 자세하게 아니, 자세하다 못해 섬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나게 된 사연은 이러했다. 어머니의 세 오빠 중 둘째 오빠의 올케언니 즉 외숙모님이 자신의 친정어머니께 시누이(나의 어머니)를 소개하고 외숙모님의 친정어머니는 다시 자신의 친정집으로 기별을 넣어 조카들 가운데 특별히 아버지를 소개했다고 한다.

     아무튼 복잡하다. 복잡하여 나로서는 들어도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두 분은 서로 만나기 전 다른 데 선을 본 경험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외조부님은 기운이 진하여 어머니가 시집오시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 나의 조부님도 앞에서 살펴봤듯이 훌륭한 분으로 자녀들 또한 혼사를 청탁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머니 또한 외조부님의 명성에 힘입어 농사지으며 고생하는 집보다 공부하며 가르치는 집으로 얼마든지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아홉 남매나 되는 어머니의 형제분들은 어머니가 농사짓는 시골 골짜기로 시집가기를 만류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몸도 약한 데다 지금껏 농사는 근처도 가보지 않아서 행여나 어린 나이에 시집살이로 고생할 것 같아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두 분은 그렇게 만나 결혼했다. 아쉽게도 빛바랜 결혼식 사진 한 장 없다. 사진을 안 찍은 것인지, 아니면 보관을 못 한 것인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얼굴은 서로 결혼하는 당일까지 보지 못했다. 양가 집안 어른들이 보고 마음에 들면 그만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매우 건장하시고 인물도 미남이셨다. 어머니 또한 몸이 약한 것 외에 어디 흠 잡힐 곳이 없었다. 나는 두 분 사이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금부터는 되도록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고자 한다. 시간을 뛰어넘어 왔다 갔다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정신 못 차릴 정도의 혼란을 줘서는 안 되겠다.

 

     시골에서는 집을 새로 지을 일이 거의 없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고 당장 농사와도 시간적으로 겹치다 보니 집을 짓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조부께서는 아버지에게 새집을 지어 분가하게 하셨다. 아버지 어머니의 신혼집이었다. 그곳에서 우리 형제들은 태어나고 자라고 장성한 다음 객지로 떠나올 수 있었다. 결혼하시고 바로 아이가 생기지는 않으신 듯하다. 한동안 아이가 없다가 몇 년이 지난 다음 어머니는 비로소 첫아이를 잉태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달이 차도록 아이가 나오지 않았다. 예정보다 늦게 나왔는데 죽어있었다. 아이가 죽은 채 태어난 것이다. 아직 모든 것에 미흡한 어머니와 아버지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병약함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복용했던 강한 약이 문제가 되었을까? 지금처럼 병원에서 일정하게 태아의 상태를 관찰하고 했으면 아마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리고 2년 후, 어머니는 다시 잉태했다.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출산했다. 딸이었다. 그리고 딸이 네 살 무렵, 어머니는 아들을 출산했다. 아들에 대한 선호(選好)가 남다른 어머니와 조부모님께 큰 위안이 되었다.

     어머니는 연이어 또 아들을 출산했다. 생글생글 토실토실 탐스러울 만큼 어여쁜 아이였다. 이름도 있었다. 그러나 생명이 그리 길지가 못했다. 어머니에게 찾아온 너무나 큰 슬픔이었다. 아무 말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산모는 아이가 들어서면서부터 출산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농촌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할 일이 있다.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임신한 몸은 무겁고 힘들다. 또 조심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 적어도 농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아들을 낳았다. 이름도 많이 불렀다. 그러나 아이는 새벽하늘의 별처럼 부모 곁을 떠났다. 어머니는 그 슬픔이 매우 컸는지 나에게도 자주 말씀하셨다. 통통하고 쌩글쌩글 웃는 아이였는데 하고...... (이 부분은 수필 ‘어머니의 사랑’에서 짧게 언급한 적이 있다.)
     6. 25가 일어나자 아버지를 비롯한 동네 남자들은 인민군들을 피해 뒷산으로 몸을 숨겼다. 마을에는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만 남았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을 학대한다든지(사회주의 사상을 강요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녀자들에게 몹쓸 짓을 행하는 일들은 다행히 발생하지 않았다. 산 속에 도피한 것이 발각되어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고 줄줄이 붙들려 나왔다. 각 마을에서 끌려 나온 사람들은 학교 운동장으로 집결했다. 젊은 사람들은 교화하여 사회주의 당원이 되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남한 지역에 빨리 공산주의 사상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밤낮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념교육을 실시했다.
     전쟁 발발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남한의 전 지역이 낙동강 유역 일부를 제외하고 적의 손아귀에 거의 넘어가다시피 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엔은 한반도가 쉽게 공산화되도록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미국은 일본에서 태평양 사령관으로 복무 중인 맥아더 원수를 급히 파견한다. 전세가 갑자기 불리해지자 북한 인민군들은 남자들을 포로처럼 북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도 동네 사람들과 무더기로 끌려가는데 거창 정도쯤 가고 있었을까, 이때 누군가가 “사대동 어른, 사대동 어른” 하고 같은 마을의 장씨가 강 건너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 같아서 그때마다 “여기 있다. 여기다.” 하고 대답을 했다. (사대동 어른은 어머니의 태고를 높여 아버지를 부르는 말) 아,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잠시 후, 인민군 하나가 잔뜩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독사같이 눈은 불꽃을 뛰었고 입가에도 흡사 독 같은 거품을 물고 있었다. 마치 성난 독사를 보는 것처럼 두려웠다. 소총에 장착된 대검은 햇빛에 반짝였다. 앞에 총자세를 하고 증오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아버지를 노려보며

     “방금 누가 대답했어? 소리친 놈이 누구야?”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고 눈동자는 실성한 것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 앞이 깜깜해 온다. ‘내가 그랬소’ 했다가는 이유도 묻지 않고 대검으로 사정없이 찔러 죽일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인민군들은 이번 전쟁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잔혹하게 많이도 죽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위기 속에서 당황한 기색이나 낭패한 표정으로 상대방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으셨다.

     “조금 전 어떤 사람이 뭐라고 소리치며 지나갔소.” 하고 위기를 모면했다.
     인민군은

     “잡히기만 해봐라, 확 멱을 따 버릴 거다.” 하고 여전히 살기등등한 기세로 씩씩대며 아버지 앞을 지나갔다. 그는 모퉁이를 돌자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는 듯 온갖 상스런 욕을 퍼붓는다.
     만일 옆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 대답했잖아. 누굴 핑계 대고 있어.’ 하고 아버지를 몰아세웠거나 아니면 당황하여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면 그래서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기라도 했으면 ‘야, 요놈이 날 놀렸구나.’하고 가볍게 사람의 목숨을 해(害)했을 것이다.
     훗날 아버지도 그때가 많이 당황이 되셨는지 한번 두 번 회고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들을 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만일 그때 아버지에게 위해가 가해졌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인민군은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당국의 지령을 받들어 최대한 사람들을 붙잡아 북으로 옮기는데 도중에 그만 자기 동생을 놓치고 말았다. 동생도 인민군으로 아무리 북한 사람이라도 형제애는 있어서 남하할 때 항상 같이 있었다. 그런데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이에 그만 동생이 없어진 것이다.
     동네 장씨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던 그 소리는 바로 인민군 형이 자기 동생을 부르는 소리로 나름 심각하고 애달프게 동생을 찾는 소리였다. 동생도 아니면서 마치 동생인 것처럼 대답을 해댔으니 애타는 남의 심정도 모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나 보다.

     인민군들은 이 많은 사람들을 걸어서 북으로 데리고 가기에는 무리였을까? 맥아더에 의해 졸지에 반전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북송을 멈추었다. 그 후 전쟁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밀고 올라갔다가 또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막혀 밀려 내려왔다 또 밀고 올라갔다를 반복하다.
     1953년에 비로소 무기한 휴전에 들어간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전쟁의 상처는 너무도 가혹했다. 상흔(傷痕)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녀들이 여럿 태어났다. 마을은 이전처럼 빠르게 복원되었다. 다리도 새로 놓고 길도 넓히고 해서 조금씩 변모해갔다. 그러나 평화로운 고향도 춥고 배고픔은 비켜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노름을 좋아하셨다. 농번기가 끝나거나 비가 내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투전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거친 세계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겨 기별을 넣으려고 아녀자나 딸들이 찾아가면 두려워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서 오기 일쑤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물론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고 들은 체 만 체 뭐 때문에 그러느냐 하고 묻지도 않으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찾으신다면 두말없이 일어나셨다. 그날따라 패가 잘 붙는 날이든 그렇지 않은 날이든 당신의 부모님이 찾으실 때는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쪽 방면에도 남다른 소질을 갖고 계신 듯하다.

     보통 노름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나는 지금까지 노름해서 잘됐다는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반해 아버지는 잃는 경우는 거의 없고 상당 부분 돈을 거머쥐었다. (요즘으로 하면 뭐 타짜 정도) 제법 멀리까지 이름이 나 있는 꽤 유명한 타짜였다. 훗날 누나가 알려주기를 어디 어디 논은 아버지가 그거 해서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던 노름을 멀리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도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겨울비였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인해 햇빛은 보이지 않았다. 춥고 음산했다. 금방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그런 환경이나 분위기는 크게 상관이 없으신 듯하다. 날씨만큼이나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 분위기는 오전 이른 시간부터 이어지다가 오후로 넘어갔다. 비는 여름날처럼 굴곡이 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렸다. 그런데 우체부가 난데없이 노름판에 들어와서는 아버지를 찾으신다.

     “사대동 어른 계십니까?”

     “무슨 일인데 그러오?”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가?” 아버지는 우체부와 눈도 맞추지 않고 오직 화투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이나 행동으로 봐서 우체부가 귀찮은 듯했다.

     “어디서 왔소?” 
     우체부는 편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부산에서 왔는데요.”

     “혹시 딸한테서요?”

     “아닙니다.”

     “그럼 읽어보오.”

     우체부는 개봉하여 읽어 내려가다가 중간쯤부터는 소리 내어 읽지 않더니 갑자기 
     “어르신 큰 아드님의 부산 고등학교 합격통지서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순간, 아버지는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몸이 굳어있었다. 물론 쥐고 있던 화투장도 자기도 모르게 손에서 떨어졌다. ‘내 아들이 고등학교를 합격했다고?!’ 마치 신음같이 흘러나왔다.

     비록 노름판이지만 다들 적잖이 놀란 표정들이다. 고향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요즘으로 하면 외국으로 유학 보내기보다 훨씬 더 힘들고 경사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로소 자녀들이 줄줄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무슨 결심이라도 하셨는지 돈도 다 돌려주고 그 자리에서 미련 없이 박차고 일어나셨다.

     그 후, 아버지는 완전히 변했다. 더 이상 화투나 그런 비슷한 것은 다시 손에 쥐지 않으셨다. 그리고 노름판으로의 발길도 뚝 끊었다. 오직 땅을 일구고 하여 온종일 들녘에서 보냈다. 점심도 들에서 먹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그 일은 어스름이 내려올 무렵까지 이어지다가 캄캄할 때 들어오셨다. 귀에 따가운 아내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부모님의 염려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아들의 고등학교 합격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지금처럼 농기계의 도움은 전혀 받지 못했다. 오로지 지게가 전부이다. 그렇게 잡초와 온갖 들풀과 나무들이 무성하던 땅들은 한 뼘씩 한 뼘씩 경작이 가능한 땅으로 변해갔다. 어떤 땅은 마을의 최고 일꾼 최팔용 씨가 논으로 일구다 일구다 포기했던 것을 그래서 사람들이 더더욱 엄두도 못 내던 것을 아버지는 도전하셨다. 마을 사람 모두가 말렸다.

     “죽도록 고생만 한다니까, 오죽하면 최 씨가 하다 하다 포기를 다 했을까.” 하며 한결같이 만류하셨다.
     막상 시작해보니 최팔용 씨가 포기할 만도 했다. 돌을 깨서 옮기기만 벌써 몇 달째다. 큰 돌은 불을 지펴 달군 다음 함마로 잘게 부수고 지게에 담아 나른다. 돌을 다 빼어낸 그 자리에 이번에는 흙을 채워 넣는다. 무작정 아무 흙이나 채우는 것이 아니라 순서가 있었다. 그렇게 일일이 지게로 흙을 퍼 나른다. 그리고 다음은 냇가에서 물꼬를 터와야만 한다. 물론 양수기를 이용할 수도 없고 또 그런 것은 있지도 않았다. 오직 물길을 새로 만들어 물을 대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땅은 조금씩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변모해가고 점차 기경(起耕)이 되어갔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오직 아버지의 손으로만 일군 논과 밭들은 해마다 기대 이상으로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다. 몇 해가 못 되어 아버지 소유의 논과 밭들이 많이 생겨났다. 마을은 아직도 배고픔과 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가정들이 태반도 더 되었다.

     ‘보릿고개’ 농민들은 전년도에 수확한 식량이 거의 바닥나고 보리 수확까지는 몇 달 남은 시기로 대략 음력 4~5월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잠시 후 몰아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굶주림은 1960년까지 이어지다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점차 회복되었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도 여느 집과 다를 바 없었지만 아버지의 강인한 의지로 인해 보릿고개 같은 큰 어려움은 그래도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집에는 품삯을 주며 일하는 사내가 둘이나 있었다.

     큰 형님은 부산에서 학업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신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셨다. 아버지는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전날 미리 내일 할 일과 분량을 계획해 놓으시고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아버지의 한결같은 자세는 자녀들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

     여러 형제 중에서 가장 늦게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사람들이 그래도 잘 되었다. 작은 형님은 그런 아버지의 교훈과 삶의 지혜는 훗날 사회생활의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작은 형님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내용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이번 글에서는 간략하게 하고 한 권의 책으로 만나기를 기대한다. 나의 수필 ‘지난 기억’에 조금 소개된 적이 있다.)

     큰 누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시집가셨다. 큰 누님의 존재는 시간이 많이 지난 이후에 알게 되었다. (큰 조카는 나보다 세 살 많고 둘째는 나와 동갑이다. 어떻게 보면 어머니께서 그렇게 애를 갖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셋째 누님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행에 발탁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부산에서 생활했다. 집안의 생필품과 생활용품들은 거의 셋째 누나가 사서 보내주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안방 벽면에 한 번도 시간을 거르는 적이 없는 쾌종 시계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입었던 옷들은 전부 누나가 은행 다니면서 마련해 주셨다.

     한 번은 셋째 누나로부터 편지가 왔다. 저녁을 먹고 밥상을 물린 다음 아버지를 비롯해 온 가족이 모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작은 누나가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사연은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잘 생각나지 않지만 먼저 본인의 안부를 간략하게 적어놓았다. 부모 형제들 덕분에 잘 생활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부모님을 안심시켜 주었다. 가족들을 일일이 들먹이며 안부를 물었던 것 같다. 그래도 막냇동생이 제일 생각이 나고 보고 싶다고 했다. 떨어져서 생활하다 보니 집이 그립고 부모 형제가 많이 생각난다는 내용 들로 가득 채워진 것 같다. 모두의 안부를 물은 다음 끝으로 ‘어머니 아버지 몸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하고 끝을 맺었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편지를 붙들고 훌쩍훌쩍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도 어린 딸이 멀리서 고생하며 또 가족들의 안부와 부모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것이 무척 마음 아픈 듯 급히 담배를 챙겨서 뒷간으로 향했다.

     둘째 누님은 내가 일곱 살 때 같은 군과 면을 주소로 쓰는 동네로 시집가셨다. 아직 산허리의 눈이 채 녹지 않은 이른 봄으로 기억된다. 마당 전체에 멍석이 깔렸다. 나는 그때까지 결혼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필 누나 결혼식이 처음이었다. 많은 손님들로 인해 집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두루마기를 입은 작은할아버지인지 아니면 동네 어르신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분께서 주례를 보셨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신랑 입장을 외친다. 그러자 이몽룡이가 썼던 것과 같은 사모를 쓰고 훤칠한 신랑이 큰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 집으로 걸어 들어왔다. 모인 사람들 중에 제일 키가 컸던 것 같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음은 신부 입장을 외쳤다.

     누나의 양쪽 볼에는 빨갛고 동그란 연지곤지가 곱게 붙어있었다. 머리도 곱게 빗어넘기고 거기에 나름 화려하게 장식된 족두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예복하고도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움직임이 어색한 신부의 양옆에는 항상 두 사람이 도와주었다.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구경하고 옆집 담벼락 위를 딛고 올라서서 목을 쭈욱 뺀 사람도 더러 있었다. 몇 차례 서로 큰절을 주고받고 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순서에 따라 예식은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폐백까지 마쳤다. 거의 끝날 무렵 사진 촬영이 기다린다. 거동이 많이 불편한 할아버지도 누군가의 등에 업혀서 참석하셨다.

     사진사가 말한다.
     “사진 찍을 분 다 모였습니까? 혹시 빠진 분은 없는지 옆으로 돌아보세요.”
     다 모인 것 같은데 하고 저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 그런데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신부인 누나 외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막내가 보이지 않으니, 얘가 오기 전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하여 모두 기다렸다. 사람들을 풀어 친구들과 놀고 있는 애를 겨우 찾아서 데리고 왔다. 검정 고무신에 앞뒤 구분 없는 바지를 입고 아슬아슬하게 맨 앞줄에 서 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카메라를 노려보면서 말이다. 그렇게 여러 번 플래시가 번쩍번쩍하고 그리고 결혼식은 끝났다. 매형은 3일 정도 우리 집에 머문 다음 누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

     문제는 신부를 데리고 가기 전날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동네 청년들이 모두 모여서 매형을 꼼짝 못 하게 한 다음 대여섯 명이 다리 하나씩을 붙잡고 발바닥을 사정없이 패대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 동네 처자를 그렇게 쉽게 데려가도록 우리가 내버려 둘 것 같아 어림없는 소리 그냥은 못 보내줘.’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좋은 날에 비슷한 연배들이 모여 축하하기 위함이고 정겨움의 표시였다. 술상을 내오게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다리를 붙들어 매고 노래를 부르다가도 밑천이 떨어지면 또 붙들어 매어 발바닥이 불이 나게 했다. 그렇게 흥에 겨운 웃음소리와 함께 젓가락 장단에 맞혀 불러대는 노래는 밤 깊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누님은 거의 어머니를 대신해서 나를 키웠다. 가장 기쁜 날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가장 슬픈 날이었다. 그렇게 유년 시절의 추억은 여덟 살 이전 누나가 시집가기 전까지가 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누나들은 말끝마다 나를 보고 ‘조선에 없는 우리 금덩어리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노.’ 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버지께도 무척 슬픈 날이었는지 아무도 없는 데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둘째 누나는 비록 여자라도 큰 일꾼이었다. 남자도 아버지의 성에 차도록 일하기에는 무척 힘들었는데 하지만 누나는 아버지가 놀랄 정도로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비료를 주기도 하고 특별히 가르치지 않아도 모든 것에 능숙했다. 하여 여러 자녀 중에 둘째 누나에게만 너무 가혹하게 일을 시킨 것 같아 그것이 못내 미안하고 당신에게는 평생 아픔으로 남은 것 같다.

     하루아침에 누나가 없자 집은 공허하고 텅텅 빈 것 같았다. 아마 그것은 내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아니, 남은 식구들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한동안 엄마가 옆에 있어도 많이 힘들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우울함을 느꼈다. 그렇게 장난꾸러기이고 천진하고 종일 동네를 싸돌아다니며 까불고 또 장난치고 하던 아이가 갑자기 병이라도 난 것처럼 조용해졌다.

     한 번은 아버지께 누나가 너무 보고 싶다고 울며 매달린 적이 있었다. 이해하셨는지 ‘단계’에서 ‘가회’ 방면으로 얼마쯤 가다 보면 ‘꺼꿀’ 이란 동네가 나오는데 거기서 또 얼마를 가다 보면 ‘거동’이란 동네가 나온다. 거기서 네 매형 이름을 대면 사람들이 알려 줄 것이다. 이게 전부였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들로 그쪽으로는 전혀 가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누나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보니 두려움도 사라졌다. ‘단계’까지는 차를 타고 그 다음부터 아버지가 일러 주신대로 물어물어 찾아갔다. 약 10리는 걸어서 간 것 같다. 아무 기별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기 때문에 누나도 무척 놀라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다. 생각지도 않게 막냇동생이 찾아온 그때 그 일은 누님에게도 매우 인상 깊었던지 곧 50년 전의 일이 되는데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누나를 보고 왔어도 한동안 많이 생각이 났다. 이듬 해, 누나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친정집에 왔다. 그런데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갓난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를 보는 순간, 왠지 내가 큰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얼마 후, 부산으로 이사하시고 지금까지 줄곧 부산을 떠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의 기력은 점점 약해져 갔다. 아버지는 그것을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평소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추어(鰌魚)를 잡아다가 푹 고아 드리면 원기를 회복하실까, 냇가로 나가자고 하신다. 그날따라 비가 많이 내렸다. 비옷을 챙겨 입고 장화를 신었다. 그리고 양동이를 손에 들었다. 누나가 있을 때는 두 분이 자주 미꾸리를 잡아다가 할아버지께 드렸다.

     한 번은 두 분이 등껍질이 어른 손등 두 개보다도 넓은 자라를 그것도 두 마리나 잡아 오셨다. 자라의 배 부분은 짙은 황갈색을 하고 있었다. 장수하는 대표적인 동물로 크기나 모양새가 상당히 오래돼 보였다. 신기한 듯 동네 친구들이 구경 와서는 감탄해 맞지 않는다. 저녁에 어머니는 두 마리를 별도로 요리하여 할아버지께 올려드렸다.

     아버지를 따라 고기를 잡기 위해 냇가로 나가기는 처음이다. 도구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다. 재를 치우기 위해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채 소쿠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물고기를 담을 양동이, 이렇게 챙겨 들고 아버지와 나는 냇가로 향했다. 비는 오지만 그래도 마음은 무척 설레었다.

     내가 생각했던 우리 논 저 너머의 냇가는 아니었다. 논과 논 사이에 흐르는 수초 덮인 조그만 농수로였다. 비가 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물은 배로 불어 있었고 물살도 제법 빨랐다. 아버지는 풀숲 입구에 채 소쿠리를 고정하여 붙들고 한쪽 다리로 수초 이곳저곳을 힘껏 밟았다. 그리고 잠시 후 채 소쿠리를 들어 올리자 놀랍게도 물은 빠지고 미꾸리만 남았다. 그렇게 할 때마다 신기할 정도로 많이 잡혔다. 양동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절반을 훌쩍 넘었다. 생각보다 빨리 채워지자 혹시 이번에도 자라가 한 마리쯤 잡혀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가 컸다. 하지만 자라는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를 따라나설 때도 좋았지만 돌아올 때는 더욱 좋았다. 아버지는 잡은 물고기를 능숙하게 손질하시고 어머니는 양념을 준비하여 할아버지 저녁 밥상에 올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추억의 시간은 그 후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다양한 곳으로 견학하고 방문하여 조금이라도 식견을 넓혀주려고 애를 쓰지만 나는 부모님과 그런 기억은 하나도 없다. 대신 연로하신 할아버지를 위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하여 말 없는 교훈과도 같았다.

     나는 지금 그 옛날 아버지가 자기 부친의 기력이 조금이라도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를 맞으며 냇가로 갔던 그때를 보내고 있다. 이제 집에는 작은 누나와 작은형만 남았다. 나는 초등학교를 갓 입학할 무렵이고, 형과 누나는 이미 중고등학교 끝 무렵의 고학년이었다.

     식사는 항상 두 테이블로 나눠서 했는데 나는 아버지와 겸상을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은 아버지 혼자 드셨는데 여럿이 먹는 상이 점점 비좁아지자 나를 아버지와 함께 자리하게 했다. 그때 처음 식사예절을 배웠던 것 같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먼저 숟가락을 들게 하지 않았다. 또 먹음직한 고기가 올라왔어도 아버지께서 먼저 맛보신 다음 먹을 수 있었다.

     방학이 되면 진주에 사는 한 살 아래 사촌 여동생이 가끔 다녀갔다. 동생에게 우리 집은 외갓집으로 아버지는 큰 외삼촌이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동생은 아주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래서 다리가 조금 불편했다. 흔히 외갓집 하면 외할머니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동생에게는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두 분 모두 계시지 않는다. 아버지도 어렸을 때 외가댁에서 성장하여 그 심정을 잘 아시는지 방학이면 외갓집이라고 찾아오는 어린 자신의 조카를 마치 외조부모를 대신이라도 하듯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어머니에게 맛난 것을 준비하게 했다.

     이럴 때 아버지는 동생과 겸상을 하시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했다. 놓여있는 반찬의 위치를 동생 편으로 조금 바꾼 다음 “애야! 많이 무레이~”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입술이 떨렸다. 마치 감정이 복받쳐 오르기라도 한 듯 나지막하고 가냘프기까지 했다.

     “네, 외삼촌도 많이 드세요.” 총명하고 눈동자가 맑은 어린 여자아이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여러 사람이 식사하는데도 쩝쩝 소리나 달그락하고 수저 부딪치는 소리조차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곁눈질로 힐긋 쳐다보았다. 아, 그런데 아버지의 두 눈에는 큰 이슬방울이 깊게 고여있었다. 자기 여동생의 딸, 곧 어린 조카가 몹시 안타깝고 안쓰러움에 자기도 모르게 그만 눈시울이 젖었나 보다.

     큰 형님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결혼하셨다. 형수님은 서울 태생으로 부족함이 없는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셨다. 사진을 먼저 보내주었는데 형수님은 긴 머리에 고운 자태를 뽐내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때까지 누나들만 보다가 이렇게 예쁜 미인은 처음 보았다. 너무 좋았다. 곧 우리 집에 온다는 말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되었다. 시골집이지만 처음 형수님이 서울에서 오신다기에 나름 분주하게 단장을 했다. 오후 막차로 도착 예정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계시고 모두 마중을 나왔다. 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결혼 축하드립니다. 형수님!” 하고 인사했다. 형수님은 아직 많이 어린 시동생의 인사가 인상 깊었는지 지금까지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계셨다.

     형님은 서울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경제 발전은 그 변화가 생각보다 빨랐다. 더군다나 서울은 지방 시골하고는 그 격차가 나도 너무 컸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를 보고 형님은 생각이 깊었다. 어머니가 노산으로 어렵게 어렵게 낳은 막내동생을 한 살이라도 빨리 도시에서 성장하게 하자.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 밑에서 지게를 먼저 배우게 될 텐데, 우리 동생만큼은 결코 지게를 지우게 하지 말자. 하고 새로운 꿈을 꾸었다.

     내가 9살로 해가 바뀌자 형님은 진주 작은어머니 댁에서 1년 간만 나를 머무르게 했다. 작은어머니는 앞에서 언급했던 한국전쟁에서 전사하신 작은아버지의 미망인으로 자녀는 없었다. 23세에 홀로 되셨는데 재가는 하지 않고 진주에서 학생들을 하숙하며 생활하셨다. 형님은 그곳에다 나를 맡겼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졌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작은어머니도 하숙생 형들도 시골에서 왔다고 놀리는 학교 친구들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괄괄한 성격의 작은어머니는 어지간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셨다.

     어린것이 부모와 떨어져 있으니 참 안됐구나, 하는 측은한 마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통증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어머니와 그리고 무조건 내 편이었던 누나들 속에서 항상 발랄하게 생활했던 나로서는 적응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한마디로 이전 환경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한 번은 작은어머니가 담배 심부름을 보냈다. 물론 담배 이름은 말하지 않고 그냥 담배 한 갑 사 가지고 와라, 하고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무심코 담배 가게에서 주는 대로 작은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파고다"였다. "파고다"는 너무 독해서 피우지 않는다고 하셨다. 본인이 피우는 담배가 아님을 알고 어린아이를 향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말들이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무서워서 아무 대꾸도 못 했다. 마치 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세상에 없는 개구쟁이로 천진난만하고 모든 것이 자유로웠는데......
     그러나 그렇게 명랑하던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도 심하게 두려움에 떨면서 말이다. 작은어머니와 함께 있기가 겁이 나고 두려워서 학교 다녀온 후 어두워질 때까지 이곳저곳 배회(徘徊)하다가 들어오곤 했다. 물론 집에 빨리 안 들어오고 뭣하고 다니냐며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욱 외곽으로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야단을 심하게 맞은 날은 섭섭하고 서운해서 밤새도록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면 또 무슨 말이 나올까 봐. 어린아이가 엄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는 그 아픔을 작은어머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와 담요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기억으로 거의 1년은 그랬던 것 같다. 평생 흘려야 할 눈물은 그때 거기서 몽땅 쏟았다.

     한 번은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종고모) 정남이 아지매하고 또 다른 아지매 두 분이 함께 오셨다. 지나가는 길에 5촌 조카인 내가 보고 싶어서 잠깐 들렸다고 했다. 그런데 나를 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그때는 이유를 잘 몰랐다. 세월이 많이 지난 이후에 비로소 알았다. 아지매는 팔을 걷어붙이고 내 다리와 몸의 이곳저곳을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그러면서 눈물도 함께 흘렸다. 영문도 모른 채 나도 괜히 슬퍼졌다.

     하루는 라디오에서 노랫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로 가사가 무척 슬펐다. 

         꽃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 할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엄마 잃은 가엾은 작은 새 ...........

     왠지 나의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져 한동안 노래 제목도 가사도 모르면서 후렴구와 리듬만 흥얼댔다. (그날 라디오를 타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울렸던 가수는 존 바에즈였고 ‘메리 해밀턴’을 그때 처음 들었다. 물론 위 노래는 번안해서 양희은이 부른 ‘아름다운 것들’.

     고향의 밤하늘은 은하수가 그림같이 흐르고 별들은 잡힐 듯이 가까이에서 빛난다. 어떤 날은 동전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그런 날은 마치 새끼 별들이 내려온 것처럼 여러 마리의 반딧불이가 고요히 날아다녔다. 손을 내밀어 위에 올려 보았다. 배 끝부분에서 부드러운 녹색 빛이 나왔다. 신기했다. 나의 눈을 과학자같이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렇게 반딧불이는 짧은 시간 어두운 손바닥 위를 신비한 빛깔로 비춰주고는 날개를 펴 날아간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놓지 않았다.

     북극 먼 하늘에는 아스라이 별똥별이 사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내 고향! 친구와 함께 별을 헤아리기를 좋아하고 ‘저 푸른 초원 우에’를 신나게 부르던 아이! 그런 아이의 얼굴은 어느 순간 하얗게 질려있었고 깊은 근심이 내려있었다. 어떤 각도에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우울함이 뿌리 깊게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하다가 생겨난 것으로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한 결코 펴질 수는 없었다. 지금도 진주하면 딱히 눈물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해 1년은 9살이 감당하기에 많은 무리가 있었다. 어른들은 간혹 아이의 눈높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와 동등하게 판단하여 질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어린이의 동심(童心)과 순수한 영혼까지 멍들게 하는 것으로 아이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야단을 맞더라도 부모님께 맞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여파가 어찌나 컸던지 지금도 나는 가끔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이유 없이 눈치를 살필 때가 있다. 아마 그때 형성된 일종의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간혹 이런 생각도 가져 본다. 내가 만약 부모님과 함께 정상적으로 생활했다면 아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때까지만이라도 고향에 머물렀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말이다.

 

3

 

     그렇게 정확히 1년 후 서울로 전학을 왔다. 큰 형님 댁은 아직 조카들이 태어나기 전이어서 말 그대로 신혼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수님께는 이래저래 미안한 부분이 너무 많다. 특히 나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로 인해 제대로 된 신혼생활도 사실 없었다. 오로지 나와 형제들을 위해서 평생을 희생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나는 형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큰 형님댁은 내가 전학 오기 전에 이미 작은 형과 셋째 누나가 먼저와 있었다. 셋째 누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발령을 받아 잠시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매형을 만나 결혼하기에 이른다. 작은형은 시골에서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했다. 농번기에는 일손이 부족하여 아예 학교에 갈 수도 없었다.

     이대로 학업을 끝내기에는 아쉽고 더 늦기 전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부에 임했다. 결과는 원하는 대로 잘되지 못했다. 본인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것 같다. 원래부터 기초가 문제였다. 지난 수년간의 부족한 학업을 1년 만에 따라가기란 다소 무리가 되었나 보다.

     작은 형은 그렇게 1년을 공부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해군 입대 영장을 받았다. 약 두 달간의 공백기를 남겨두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위해 매일같이 나뭇짐을 넉 짐 혹은 다섯 짐씩 했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부모님께는 입대 날짜가 다가오자 큰 바위골 아래 키 큰 소나무에 기대어 쌓아놓은 나뭇짐 더미가 자신이 그동안 쌓아 놓은 것임을 밝혔다. 그랬다. 작은형은 아버지를 닮아 우리 형제들 가운데 가장 다부졌다. 욕심도 대단했다. 같은 일을 했어도 남보다 못하면 몹시 분해했다. 입대하는 전날까지 고생하실 부모님을 생각해서 산더미 같은 나뭇짐들을 만들어 놓았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내일 첫차를 타고 진해로 가야만 한다.
     추운 겨울이었다. 60년 만에 찾아온 추위는 연평도 앞바다가 얼었을 정도로 맹위를 떨쳤다. 어머니는 하필 이렇게 추운 날 아들이 군대를 간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들의 두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으시려는 것을 가까스로 위로해드리고 다독여서 겨우겨우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작은 형은 3년간의 긴 해군으로 국방의 임무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2주 후, 소포가 도착했다. 옷과 신발이 들어있었다. 옷 사이에 손바닥 크기의 메모지가 들어있었다. '몸 건강히 훈련 잘 받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간단하게 안부를 보내왔다. 아들의 옷과 신발을 보며 어머니는 또 눈물을 흘렸다.

     시골집에는 이제 작은누나만 남았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만 남을 때까지 마지막으로 작은누나가 함께했다. 이제 이글도 이쯤에서 끝을 맺을까 한다.

     작은누나가 결혼해서 떠나온 다음은 그야말로 두 분만 남았다. 여러 형제 중에서 마지막까지 부모님의 일을 도왔던 작은누나도 어느새 연로하신 두 분만을 남겨두고 떠나올 때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농촌 생활이 무슨 아파트 생활도 아니고 농사일은 끝이 없는 데다 이제 농사짓기에는 두 분 모두 인생이 매우 깊으셨다.

     아버지 어머니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자식들이 모두 장성한 후 독립하여 두 분만 남았을 때 무슨 얘기들을 주고 받았을까? 자녀들 이야기를 했을까? 아니면...... 나는 아직 그때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 잘은 모른다. 오래 전 그때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임자가 시집오는 날, 가마에서 내리는 모습을 곁눈질로 살짝 훔쳐봤소. 다소곳하게 고개 숙인 그때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구려.’
     아버지는 뭐 이런 고백을 했을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임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를 어떻게 불렀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첫아들을 당신이 안고 친정에 처음 갔을 때 그때가 많이 생각이 나요.’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께 그런 마음의 고백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고 기를 때 힘들었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잘 참고 견디어 낸 것에 서로 감사와 위로의 말들을 나누었을까? 이 물음은 또 누구에게 여쭤봐야 알 수 있을까? 왠지 아무도 모를 것만 같다. 오직 두 분만이 간직할 뿐!

     인생은 자신이 인지하든 아니면 못 하든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온다. 공사현장 옆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낙하물이 떨어져 참변을 당할 수도 있다. 요즘은 뜻하지 않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다행히 건강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지만 내일은 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암울하고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아버지의 인생도 많은 어려움과 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작은할아버지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출할 때 혹 일본군 순사에게 붙잡히기라도 했으면 아버지 또한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외조부님의 명성에 힘입어 보다 나은 집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 또한 조부님의 훌륭하신 인품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처자를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두 분 사이에 여러 사람이 연결되어있어 자칫 성사 확률이 그만큼 낮을 수도 있었다.

     혹 두 분 중에 한 분이 다른 곳을 선택했더라면 아마 나와 나의 형제들은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북한 인민군에게 해를 받기라도 했으면 나는 태어날 수 없었다. 또 어머니는 나를 가지기 바로 전에 이미 세 명의 자녀를 잃었다. 그중 두 번은 출산까지 이루어졌었고 한번은 중간에 유산했다. 물론 지우려고 그 어떤 노력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그때까지만 해도 낳으려고 애쓰셨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처지가 바뀌셨는지 이제 낳지 않으시려고 무단하게 노력하셨다.

     아이가 들어섰음을 알고 언덕에서 여러 번 구르고 심지어 뛰어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잘되지 않자 이번에는 하늘 수박 뿌리를 달여 먹었다. 처음 들이켰을 때 얼마나 강한지 각혈도 하고 하혈도 했다. 물론 본인도 혼절하다시피 했다. 생각하기를 한 번만 더 먹으면 이번에는 정말 떨어지겠구나 하고 한 번 더 다려 먹었다. 그때 낙태가 되었더라면? 어머니는 의도대로 잘되지 않자 이번에는 산부인과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지우려 했다. 그때 만약 수술대 위에 올라갔었다면 나는, 나는? 물론 햇빛을 보지 못 했을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한 사람이 태어날 확률은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낮은 것 같다. 그것은 마치 기적에 가깝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사람에게 속한 일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제2부 나의 유년시절
 

     진주에서의 1년은 암울함 그 자체였다. 그 외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나는 자연과 더불어 보낸 꽃피는 산골에서의 유년 시절을 좀 더 회상(回想)하고자 한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온 것에 대한 보상심리같이 내 속에서 붙잡고 놓지 않는지도 모른다.

     더 어렸을 때는 조부님이 계셨고 조금 성장했을 때는 부모 형제들이 있었다. (물론 함께 나고 자란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아무튼 떠올리는 것마다 추억이고 생각나는 것마다 그리움뿐이다.

     그 동안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는데 마치 지난 봄날처럼 하나씩 하나씩 되살아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박꽃은 초가지붕 위에서 달빛을 머금은 듯 흠뻑 취해있다. 그러다 모두가 잠든 밤에 마치 요정같이 하얗게 깨어난다.

     산골의 밤하늘은 유독 달과 별들이 선명하게 빛난다. 아이들은 어둡지만 어둡지 않은 그들의 빛 아래서 술래잡기 놀이에 열중이다. 술래인 나는 느티나무에 얼굴을 묻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열 번을 헤아린 다음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복남이네 나뭇짐 사이에서 쉽게 친구 둘을 찾았고, 원길이, 원재의 집 담벼락 아래 볕 짚단 사이에서 기가 막히게 숨어있는 여자아이 둘을 찾았다. 이제 세 사람 정도만 더 찾아내면 술래를 면할 수 있다. 친구 두 명은 술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어디서 숨어있다가 잽싸게 달려와 느티나무에 손을 짚는다. 죽지 않고 살아서 다음번에도 술래를 면한다. 영철이네 오래된 감나무 위에서 팔은 가지처럼 위장하고 머리는 넓은 감잎들 사이에 가린 채 숨어있는 재세와 우리 앞집의 뒷간에 숨어있는 승부를 찾아서 다행히 나는 술래를 면했다.
     아, 그런데 아버지께서 찾으신다. 할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기 위해서.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입이 한발은 튀어나온 것 같다.
     돌아누우신 할아버지의 다리는 아버지의 팔보다도 더 가늘었다. 많이 어린 막내손자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잠시 후 할아버지는 그만 물러가라고 하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달려갔다. 그러나 친구들은 어느새 다 돌아가고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쁜 마음은 아니었다. 겨우 숨어있는 아이들을 찾아내어 술래를 면하는가 했는데 아버지의 호출이 있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는 아이를 부르면 많이 언짢해 하는지 알면서 왜 굳이 불렀을까? (물론 그 이유도 뒤늦게 알았다.)

     어른들을 따라 새벽 녘에 눈을 떴다. 한바탕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하고 목청껏 부르고는 다시 잠이 든다. 어린이가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나 분주하지만 아직 어린 나는 못다 한 꿈나라로의 여행을 마저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능금(사과)을 들고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힘겹게 내디디면서 조용히 건너오셨다. 그리고 나를 찾으신다. 아무 기척이 없자 조반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가 흔들어 깨운다.

     “할아버지 오셨다. 빨리 일어나거라.”
     어머니의 다소 난감하고 황급한 목소리가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힘겨운 발걸음을 의식한 듯 세차게 흔든다. 여전히 졸린 눈을 비비며 청아래 축담에서 구부리고 앉아 겨우 눈을 뜨고 할아버지를 올려다본다. 사과를 내미셨다.

     “먹어 보아라.”

     “할아버지, 이따 먹을게요.”

     “아니다, 지금 먹도록 해라.”

     큰집 손자들 몰래 그래서 이른 시간에 어려운 걸음을 하셨다.

     힘겹게 사과를 쥔 할아버지의 손은 앙상한 가지에 얕은 거죽만 덮여있었다. 손등의 반점들이 마치 바둑판의 흑돌처럼 둥글게 둥글게 내려앉아 있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할아버지의 손은 온기라고는 없었다. 내가 한입 베어먹는 것을 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으실 것 같았다. 그래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큰집 사랑채로 향하셨다. 아무리 귀한 사과이지만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리고 노인의 특이하고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먹기가 여간 곤욕스럽지 않았다. 물론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어렸어도 나름 할아버지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혹 눈치를 채신 것은 아닐까?

     뻐꾹 뻐꾹!
     뻐꾸기 울음소리와 함께 아카시아 향기가 온통 산을 진동시킬 무렵, 들판은 잿빛으로 물들어있다. 겨울의 모진 추위를 견딘 보리는 드디어 결실에 이르렀다. 긴 수염을 한 잿빛 보리가 낫을 기다린다. 보리의 수염은 여간 거칠고 긴 것이 아니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보리와 씨름한 어머니의 얼굴과 걷어붙인 팔은 까끌까끌하기가 말도 못 했다. 온종일 들에서 보낸 식구들이 모이자 집안은 온통 보릿대 향기로 가득 찼다. 어머니는 힘겨운 듯 샘 곁에 놓여있는 볼품없는 박 바가지의 물을 두 번 연거푸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마에 땀을 훔친다. 얼굴은 그을음 앉은 것처럼 검게 타 있었다.

     “내일은 너도 들에 나가자, 가서 냉수라도 떠오너라.”

     아버지도 힘겨우신지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태양은 전쟁이라도 벌이듯 그 기세가 맹렬했다. 아침부터 노을이 내려올 때까지 지칠 줄을 모른다. 다음 날 아버지는 먼저 들로 나가셨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물을 부지런히 떠다 나른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 새참도 없었다. 오로지 점심이 전부였다. 특별히 아버지께는 막걸리가 반 주전자 정도 허락되었다. 그 외 아무에게도 먹을 것은 주어지지 않고 오직 내가 돌 틈에서 받아오는 냉수가 전부이다. 그런데 그날 처음 보는 돌 틈의 조그마한 샘터는 신기하게도 바닥에서 솟구쳐오르는 용천수였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조그마한 샘 안에는 마치 물의 끓음 같이 뽀글뽀글 바닥의 모래 알갱이를 소용돌이치게 하고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자세히 보니 물이 나오는 곳은 세 군데였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그 샘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의 양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나 보다.

     물 한 주전자를 채워놓고는 떨어진 이삭을 주워 모은다.

     그렇게 보리 수확을 위해 식구들 전부가 동원되었다. 보리농사가 끝나면 그 자리에 벼를 심을 준비를 해야 되기 때문에 아버지는 초조하고 급했다. 보리타작 중간에 비라도 내리면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강렬하게 내리쬐던 하늘에 옅은 회색 구름이 저 멀리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구름의 색깔은 점점 짙어지고 하늘 가득히 세력을 넓혔다. 더불어 식구들의 손놀림도 빨라진다. 아버지는 나에게 빨리 가서 소를 몰고 오라고 하신다. 그때 우리 집 소는 송아지가 딸린 암소였다. 송아지는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아주 어린 수놈으로 어미 젖을 먹을 때 말고는 마당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송아지는 어린 새끼 때 예뻐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고삐를 단단히 잡고 몰고 간다. 처음으로 소를 몰고 가장 멀리 간 것 같다. 행여나 송아지가 말썽을 피우면 어떡하지, 하고 어린 마음에 많이 긴장했다. 우려했던 대로 송아지는 집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까 잘도 뛰어다닌다. 통제가 되지 않았다. 두 갈래 길이 나오면 꼭 어미와 반대 길로 갔다. 아직 경험이 없는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불러도 보고 소리도 질러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송아지란 놈이 다른 엉뚱한 길로 가고 있으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애타게 불러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잘 가고 있던 어미 소가 갑자기 옆으로 돌아서서 큰 소리로 음메~ 음메~ 하고 두 번 연속해서 부르자 그제야 새끼는 길을 돌아 어미에게로 달려왔다.

     며칠간 수확했던 보리를 담은 가마니들을 리어카에 옮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운전하시고 소가 끌었다. 꽤 경사진 오르막길인데도 어미 소는 가볍게 끌고 올라간다. 그날 총 열두 번을 그렇게 반복적으로 날랐다. 금방이라도 내릴 것만 같았던 비는 다행히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내리지 않았다. 비는 다음 날, 모두가 잠든 새벽에 고요하게 내렸다.

     이런 날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거의 종일 새끼 꼬는 일을 하신다. 방안은 짚 부스러기와 볕단으로 가득하다. (라디오라도 있었으면 덜 적적하셨을 텐데.)

     나는 아직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으로 어머니와 누나가 내게 전부였다.

     내가 채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아버지는 내게 소를 몰고 나가서 꼴을 먹여오라고 하셨다. 두려웠다. 소는 아직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크게 보였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큰 덩치에 비해 다행히 온순한 성격을 하고 있어서 어린아이들의 말도 잘 따랐다. 오후 내내 고삐를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 집 송아지는 유달리 활동적이었다. 짐승도 암놈, 수놈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리 뛰고 저리 뛰다 그러다 뒷다리를 허공에 높이 올려 찬다. 온몸을 비틀며 몸부림치듯 하기를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배가 고팠는지 꼴을 먹기에 여념이 없는 어미에게 달려가 세차게 젖을 빨아댄다. 네 개의 젖꼭지를 보지도 않고 순서대로 신기하게 잘도 물어댄다. 밥 먹는 것처럼 새끼의 쩝쩝 소리는 곧 생명의 소리였다. 갓 태어난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어미 소가 가르쳐주었을까? 아니면 주인인 부모님이 혹시 알려주기라도 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광경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또 들은 적도 없다. 생명의 소리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젖을 찾고, 또 찾는 것에는 반드시 그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새끼에게 필요한 영양분 덩어리인 어미젖이 적당한 온도에 맞게 넉넉히 준비되어있다. 새끼는 부지런히 먹기만 하면 된다. 새끼의 할 일은 젖을 열심히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죽순같이 쑥쑥 자라서 몇 달이 채 못되어 털 색깔이 어미와 같게 되고 날뛰는 것도 없이 제법 의젓해진다.

     아버지는 나에게 한 번 두 번 소를 몰고 나가서 꼴을 먹이게 하다가 이번에는 아예 동네 큰아이들과 함께 멀리까지 나가서 꼴을 먹이게 하셨다. 학교 다니는 형들과 누나들이 대부분이었다. 친구들은 너무 어려서 아직 소먹이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집에서 멀리까지 나가기는 처음이었다. 몇 차례 반복이 되자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신기하게도 소들은 산봉우리에 해가 질 무렵이면 으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 줄 알고 새끼를 데리고 길가로 내려온다. 그러면 고삐 하여 붙들지 않아도 희한하게 자기 집을 잘도 찾아간다. 나는 아직 소가 길을 잃고 집을 찾아오지 못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거의 항상 소가 먼저 와서 외양간에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를 수차례 오늘도 당연히 소는 집에 와있겠지, 하고 내가 늦게 오면 아버지는 소는 진작 왔는데 넌 뭐 한다고 늦게 오느냐 하고 나무라셨다.

     한번은 그날도 소가 조금 먼저 왔다. 아버지는 내가 도착하자 걱정과 놀람이 역력한 눈빛을 하고

     “송아지는 어디 있느냐?” 새끼 딸린 어미 소는 새끼를 두고 혼자 오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우리 소는 새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혼자였다. 순간, 경직된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눈앞이 캄캄함을 느끼다 못해 두려웠다. 형과 누나들로부터 한마디씩 꾸중이 이어졌다.

     나는 외양간 이곳저곳을 살펴보았고 또 집 뒤편을 돌아봤지만 없었다. 밖으로 뛰어 나가봐도 송아지란 놈은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옆집 소를 따라갔나 하고 가까운 친구 집에 가봐도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만나지 못하고 조용히 들어오는데 두려워서 아버지가 계시는 마루로 가지 못하고 혹시나 해서 외양간에 가보았지만 송아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은 저녁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큰누나에게조차 말을 건네지 못할 정도였다. 태산 같은 걱정을 안고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아침이었다. 기분 나쁜 꿈같은 전날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나의 얼굴은 심히 굳어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식구들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밝았다. 그 어디에도 송아지 잃은 표정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밤새 송아지가 돌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혹시나 하는 초조한 마음으로 외양간에 가보았다. 아, 그런데 수놈 송아지는 언제 왔는지 어미 옆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큰누나, 어떻게 된 거야?” 누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젯밤 10시쯤 아버지와 누나는 어미 소를 몰고 랜턴을 비추며 낮에 소를 먹였던 묵바꼴 골짜기로 향했다. 묵바꼴은 오히려 이웃 마을이 더 가까울 정도로 동네에서 많이 떨어져있었다. 낮에 왔던 길은 칠흑같이 어두워 빛이 없으면 도저히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어미 소는 새끼가 없음을 알았을까. 깊은 골짜기로 들어서자 음메~ 하고 울기 시작했다. 어미 소의 울음은 메아리 되어 산골짜기의 어둠을 뚫고 퍼져나간다. 산속 어딘가에서 자신의 새끼가 두려움에 떨고 있음을 직감이라도 한 듯 어미 소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울음도 간절했다. 그러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소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왼편을 향해 음메~ 하고 크게 두 번 울고 반대편을 향해 또 두 번 울었다. 마치 ‘낮에 꼴을 뜯던 데가 여긴가?’ 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허공을 향해서 보다 큰소리로 음메~ 하고 울자 어디선가 염소울음같이 음메~ 하고 나즈막하게 새끼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어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빛이라고는 없는 어두운 저쪽에서 마치 라이트의 불빛같이 짐승 특유의 광선이 두 눈에서 품어져 나왔다. 어미가 한 번 더 울자 새끼도 그제야 울음으로 화답했다.

     그런데 새끼가 서 있는 곳은 얕은 계곡 물가였다. 처음엔 물소리 때문에 어미의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어미는 새끼의 냄새를 확인하고는 연거푸 새끼의 얼굴과 몸 이곳저곳을 혓바닥으로 핥기 시작한다.

     새끼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어미를 놓쳤을까? 또 어미는 묵바꼴 골짜기에서 집으로 오는 먼 거리 동안 새끼가 없어진 줄을 왜 몰랐을까?

     특이한 것은 그날 이후 새끼는 어미 곁을 바짝 붙어 다녔다.

     아버지께서 많이 놀라신 것은 근일에 이웃 동네에서 소를 도둑맞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깊은 산 속에 소를 풀어놓고 아이들이 정신없이 노는 틈을 타 도둑들은 눈에 잘 틔지 않는 짙은 나무색 비슷한 옷을 입고는 미리 점찍어 놓은 소를 훔쳐 달아난다는 뭐 그런 말들이 간혹 들리긴 했다.

     그렇게 몇 달 집에서 길리운 송아지는 어미 소가 다시 새끼를 가질 무렵 우시장으로 간다.

     어머니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새끼를 우시장으로 보내고 나면 그것이 눈에 밟히는지 며칠간 잠을 설쳤다.

     나는 아버지께 송아지를 좀 더 있다가 팔면 안 되냐고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지금이 송아지 가격이 그것도 수송아지의 시세가 제일 좋을 때라 안 된다고 하셨다.

     나의 울적함을 큰아버지가 아셨는지 갓 태어난 여러 마리의 염소 새끼 가운데 한 마리를 나에게 주셨다.

     “잘 한번 키워 봐라.”

     몸 색깔이 온통 까만 흑염소로 무척 귀여웠다. 개처럼 목에다 고리하여 줄을 길게 하고는 풀이 많은 곳 가까운 나뭇가지에 줄을 묶은 다음 꼴을 먹이운다. 특이한 것은 집으로 돌아올 때 반드시 염소가 앞에 서고 사람이 뒤따라와야만 발걸음을 옮길까, 만약 그 반대로 사람이 앞장서면 무엇 때문에 그런지 네 다리를 쫘악 펼친 채 버티고 있어서 아무리 끌어당겨도 소용이 없다. 염소 때문에 나의 인내심이 바닥까지 내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처음 염소고집을 목격했다. 같은 초식동물이고 사람에 의해 길드는 소와 염소는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내게 염소가 주어지자 나는 소를 먹이러 갈 때마다 염소에게 줄 넓은 칡잎을 한 아름 두 묶음씩을 따다가 등에 지고 왔다.
     한번은 소와 함께 칡잎을 잔뜩 지고 오는데 밭을 매고 오시는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뒤에 오셨는데 앞에 가는 내가 칡잎에 가려 처음에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등에 칡잎을 매고 가는 아이가 누구지? 참 대견하기도 해라’ 하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바로 나였다.

     소나기가 언제 내렸는지 기억이 없다. 끔찍하리만큼 찌는 더위는 꺾일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이대로 가면 사람도 짐승도 아직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지 못한 식물들도 말라서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날은 오후부터 하늘 가장자리에서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을 먹는 도중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흘리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가열되었던 대지에 빗줄기가 내려앉는다. 대지는 열기로 인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요란한 비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집어삼켰다. 양철 지붕의 파형 골마다 빗물은 마치 폭포같이 흘러내린다.

     잠시 후, 강렬한 밝기의 파란빛이 두 번 하늘로부터 번쩍한다. 번개였다. 어찌나 강한지 아버지의 구릿빛 얼굴은 반사되어 파랗게 되었다.

     우루루쾅! 쾅쾅!
     천둥소리는 사자의 울부짖음같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날은 아버지의 억센 팔을 베고 이불을 머리까지 올리고 잠이 들었다.

     그 무렵, 돼지우리에서는 열세 마리의 새끼 돼지가 새롭게 나왔다. 큰누나와 함께 조용히 우리 너머를 쳐다보는 데 불과 몇 시간 전에 태어나서인지 크기는 어른 주먹 한 개 반 정도였다. 몇 마리인지 한번 헤아려 보라고 한다. 마침 어미는 옆으로 누워 있고 새끼들은 모두 젖을 빨고 있었다. 젖은 두 줄로 나란히 길게 있는데 간격들이 일정해서 여러 마리의 새끼들이 먹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열세 마리나 되다보니 그 중 한두 마리는 이리저리 밀려 젖꼭지를 못 찾을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아직 눈도 뜨지 못했는데도 신기하게 다 찾아갔다.

     새끼들은 나면서부터 각자 자기의 젖꼭지가 정해져 있어서 항상 그것만 입에 댄다고 옆에서 누나가 알려주었다. 여러 개 중에서 몇 번째가 내 것하고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정확히 자신의 것을 찾아갈까? 어린 마음에 참 신기하고 놀랍다.

     숫자를 헤아려 보니 열세 마리가 정확했다. 그런데 유독 크기가 작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새끼들 가운데서도 눈에 띄게 작았다. 누나에게 제일 늦게 태어난 새끼가 아니냐고 물었다. 누나의 대답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제일 먼저 태어난 녀석이라고 했다.

     한동안 새끼들은 어미 곁을 떠나지 않고 거의 종일 젖만 빨아 먹었다.

     태어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호기심이 많은 새끼들은 슬금슬금 우리 밖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새끼 중에서 가장 호기심이 많고 용감해 보이는 녀석 하나가 우리 밖을 한 발짝 정도 나와서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몹시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다가가자 후다닥 어미에게로 뛰어든다. 우리 밖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어미 뒤에서 경계하듯 눈치를 살핀다.

     새끼들은 단체로 움직였다. 돼지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협동이 잘 되는 동물인 것 같다. 온몸을 덮고 있는 까만 털은 윤기가 반지르르 흘렀다. 특이하게 꼬리는 모두 꼬여있었고 그 끝은 몸 가운데 유일하게 하얀색을 하고 있었다. 새끼 때는 돼지도 송아지만큼이나 귀여웠다. 송아지도 경계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새끼 돼지는 사람에 대한 경계의 정도가 심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약 2주 정도 지나면 집 구석구석을 몰려다니며 주둥이로 땅을 파고 놀기 시작한다. 그러다 3주 정도 지나면 아버지는 새끼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라고 하신다. 말하자면 중간 점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마리가 비었다. 세어보고 또 세어보고 또 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리가 안 보인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그리 놀라지 않을뿐더러 표정은 마치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는 것 같았다. 조심성 없이 아무 곳이나 마구 뛰어다니던 새끼 한 마리는 화장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결국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게 새끼 돼지들도 송아지처럼 어느 정도 길리운 다음 장에 내다 팔았다.

     촌(村)에서는 이렇다 할 수입원이 없다. 요즘은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토질의 유리한 작물들을 골라 재배하므로 상당한 수익을 창출하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모든 것이 열악했다.

     고작 짐승을 낳고 길러서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장에 내다 팔아야 겨우 돈을 만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한해 농사지은 곡물들의 매상(수곡수매)이 있을 때 등급에 따라 금액을 계산하여 받는다. 농부들은 낮은 품질의 곡물들은 주로 자신들의 양식으로 남겨두고 윤기 나는 좋은 것들은 매상한다.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땀을 요했다.

     아버지는 현대식 농기계의 도움은 전혀 받지 못했다. 물론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년 중 가장 강렬한 태양 아래서 멍석을 총동원하여 도정하지 않은 보리를 넓게 펼친 다음 맨발로 훑으고 지나간다. 일정한 시간으로 뒤집어 골고루 건조하기 위함이었다. 이 작업은 몇 날 며칠동안 이어진다.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으로 보아 아주 어렸을 때로 여겨진다. 너무 어려서 식구들을 따라 들에 가지 못하고 오직 집에만 있었다. 그럴 때는 유일하게 같이 놀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한 살 위의 8촌 형이 있었는데 그와 나는 고조부(高祖父)가 같은 분이었다.

     그날도 집 마당에서 땅따먹기 놀이도 하고 샘에 둥둥 떠 있는 수박을 물 속으로 누르면 금방 물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 신기하여 시간 줄도 모르고 놀았다. 정신없이 놀고 있는데 그때 어떤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아무 대답이 없자 연거푸 두 번을 소리친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샘 곁에서 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와 소리쳤다.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런데 뒤를 돌아본 순간, 두렵다 못해 온몸에 소름이 쫘악~ 하고 돋았다. 아마도 사람을 보며 그렇게 당혹하고 놀라기는 처음이었다. 그때 만약 8촌 형이 같이 있지 않았다면 숨이 멎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을 것이다.

     한눈에 봐도 걸인(乞人)으로 긴 자루를 힘겹게 메고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는데 한쪽 다리는 의족으로 아무렇게나 잘라 놓은 나무토막이 다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발 모양 비슷한 것도 아닌 그냥 나무를 톱으로 뭉툭하게 잘라 놓은 게 전부다. 물론 바지 속에 감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바지를 입은 듯 다 드러나 있었다. 무릎을 구부르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의족은 허벅지 중간부터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한쪽 손은 갈고리 모양을 한 의수였다. 머리는 긴 장발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 감았는지 기름과 먼지로 떡이 되어있었다. 갈고리 모양을 한 의수도, 남자가 그렇게 긴 머리를 한 것도 그때 처음 보았다. 그 모든 것이 어린 나에게는 공포처럼 다가왔다. 또 얼굴은 여기저기 찢어진 상처를 아무렇게나 꿰매어 놓은 듯 올려다보기가 여간 부담되지 않았다. 두 눈도 한쪽은 나의 눈과 맞추나 다른 한쪽은 전혀 엉뚱한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모습에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바닥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목소리는 가래가 잔뜩 낀 것 같이 낮고 거칠어 듣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쌀이든 보리쌀이든 뭐라도 좀 달라고 한다. 겨우 쌀을 한 바가지 퍼주었다. 잘 몰라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했다간 무슨 위해가 올 것만 같았다. 걸인(乞人)은 상대가 어린아이들이어서 그런지 인사도 없이 갔다. 마치 당연히 받을 것을 받은 것처럼.

     걸인(乞人)의 몸은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을까?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들에서 돌아온 형과 누나에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두렵지 않은 듯 돌아오는 대답은 ‘그 사람들은 여럿이 몰려다니면서 간혹 말을 잘 듣지 않는 너 같은 애들을 잡아가기도 한다.’는 다소 황당한 말을 했다. 물론 어린 동생을 골려주려고 장난으로 한 말이었다. 그 후, 이상하게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그 시절 몸에 장애를 입은 걸인들이 왜 그렇게 많았을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국가는 전쟁의 여파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데다 경제개발 계획들이 아직 실효를 거두기 전으로 마땅한 일자리가 주어지지 못한 게 아닐까?

     그때 그 사람들은 아마 상이용사들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해본다.

     나의 유년 시절에 절대 빠지지 않는 친구인 8촌 형은 학년도 같았다. 체구가 그리 크지 않아 자랄 때 한 번도 형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불렀다.
     또 한 사람은 두 살 위인 5촌 조카가 있다. 조카이지만 나보다 두 살 위였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조카는 항상 나를 아재라고 부른다. 사촌 큰 형님의 큰아들로 어려서부터 나와는 비교도 안되게 생각이 깊었다. 두 사람과는 추억이 많다. 잘 기억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살며시 떠올려 주기만 하면 새싹이 파릇하게 돋아나듯 솟아날 것만 같다.

     작은형이 만들어준 방패연을 들고 뚱뫼 언덕에서 설레는 맘으로 연을 띄웠다. 겨울이면 꽁꽁 언 냇가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종일 썰매를 타고 놀기도 했다. 오후쯤 기온이 올라 얼음이 녹으면 옷은 물에 흠뻑 젖어있다.

     사랑방 아궁이에서 소죽을 끓이고 계시는 어머니 곁에 있으면 젖은 옷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행여나 내가 감기라도 들까봐 걱정이셨다. 추운 겨울이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는 그 시간은 따뜻했다.

     소죽을 퍼주고는 아궁이 끝에 아직 남아 있는 잔 불씨들을 모아 고구마 몇 뿌리를 묻은 다음 저녁을 먹는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구마는 달달한 것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는 해마다 제비가 찾아왔다. 짚 부스러기에 진흙을 묻혀 처마 바로 아래 높은 벽면에다 짓기 시작한다. 암수가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진흙을 묻혀 나른다. 어느새 집은 완성되었고 그리고 알을 낳는다. 처마와 그의 맞닿아있어 안을 볼 수 없다.

     새끼가 부화하고 난 다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암수가 교대로 알을 품는다. 제비는 배와 날개 안쪽을 빼고는 대체로 검다. 몸집이 작은 대신 상대적으로 꼬리가 길고 끝은 특이하게 두 갈래로 나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좁은 둥지에 새끼들로 가득 찼다. 다섯 마리였다. 아직 눈도 뜨지 못했다. 그래도 어미가 다가오면 먹이를 물고 온 줄 알고 먼저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입을 있는 대로 짝짝 벌린다. 새끼들의 입가와 입속은 온통 노란색이다. 암수 두 마리는 잠시 쉴 틈도 없이 계속해서 먹이를 물어 나른다. 새끼들은 조금 전에 받아먹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달라고 소리치고 입을 벌린다. 하지만 어미는 정확하게 먹이를 주는 순서를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옆에서 찢어질 듯이 입을 벌려도 소용이 없다. 어미가 먹이를 구하러 날아가면 언제 그랬다는 듯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조용했다.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난다. 새끼들은 어미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하루가 다르게 몸의 크기와 함께 털 색깔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새끼는 좁은 흙집을 떠나서 높은 창공을 비행한다. 어미를 따라 따뜻한 남쪽 어딘가로 날아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늦은 봄부터 여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제비네 가족에게는 큰 변화였다. 어느 먼 남쪽 나라에서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한 다음 둥지 틀 곳을 선택하고, 그리고 수천 번도 더 진흙을 묻혀 나르고 알을 낳고, 또 일정 기간 품어 부화하고 다섯 마리나 되는 식욕이 왕성한 새끼들을 먹이고, 그중 한 마리도 낙오(落伍) 없이 하늘을 날아올랐다. 이 광경은 해마다 반복되었다. 여러 종류의 새 중에 특별히 친근감이 가는 새이기도 하다.

     제비는 이곳에서의 짧은 시간에 비록 몸은 힘들지만 목적을 이루었다.

     잠자는 시간 외에 단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 새로 기억된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박씨를 물어다 준 것보다 좋다.

     하루는 종일 비가 내렸다. 사람도 짐승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 마당을 가로지른 긴 빨랫줄에 동네 제비는 다 모인 것같이 빽빽하게 앉아 비를 맞고 있다. 그날은 마치 우리 가족들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르게 제비가 아주 낮게 비행할 때가 있다. 얼마나 낮게 나는지 거의 바닥에 닫을 정도였다.

     “오늘은 제비가 무척 낮게 나네.”

     동네 어른들은 제비가 낮게 나는 것을 보고 곧 비가 온다고 했다. 제비가 낮게 나는 것하고 비하고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하늘은 멀쩡한데.

     과연 그러한가. 어른의 말처럼 제비가 낫게 날면 비가 오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다음 날 정오가 막 지날 무렵, 하늘이 꼬물꼬물했다. 순식간에 흐려지더니 아니나 다를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참 신기했다. 제비가 낫게 날면 왜 비가 오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제비가 낫게 날면 비가 올 확률이 높은 줄은 알고 있는데 왜 그런지는 글쎄, 하며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우연히 맞아 들었겠지?’

     그 둘의 연관성은 제법 성장한 다음에 알았다.

     비구름이 형성되기 전 대기(大氣)의 오묘한 변화가 먼저 일어난다. 그것은 사람의 감각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오히려 조그마한 곤충이나 미생물들이 먼저 눈치를 챈다.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지진이나 해일 같은 큰 자연의 충돌이 있기 전 생물들이 먼저 알고 요동치는 경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은 지축이 흔들려야 비로소 눈치를 채고, 또 쓰나미가 대륙을 덮칠 때까지도 잘 모르다가 그것들이 눈앞에 닥쳐야 비로소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 어찌할 줄을 모른다. 사람은 자연의 변화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더운 여름이면 오전부터 계곡 물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나올 줄 몰랐다. 쑥을 뜯어 돌에 찧은 다음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양쪽 귓구멍을 털어 막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는다. 격렬한 물싸움을 해도 또 몸을 물속에 풍덩~ 하고 잠수를 할 때도 쑥으로 한 귀마개는 아주 유용했다.
     높은 기온 탓에 물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부모님은 항상 불안해하셨다. 오죽하면 물가에 내놓은 것 같다는 말을 다 할까. 자녀를 향한 불안한 심경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아직 어린 나에게 쏘는 깊고 위험했다. 물의 깊이가 들쑥날쑥하여 발바닥에 아무것도 닫지 않을 때는 순간 당황하여 공포가 두렵게 몰려온다. 무서운 이야기를 할 때 등장하는 물귀신이 마치 내 발목을 잡고 끌어 내리는 것만 같았다. 물에 가지 않는 경우는 비가 올 때인데 높은 기온 탓에 소나기도 자주 내렸다. 갑자기 내린 비로 인해 친구 집 처마 밑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는데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진다.

     잠깐 내리다 마는 소나기가 아닌 것 같았다. ‘옷이 젖는 것을 감수하고 뛰어갈까, 아니면 지나가기를 기다릴까?’ 하고 고민하는데 저 멀리 먹구름의 끝자락은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비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기 드문 자연 광경이었다. 세찬 비를 뿌리는 검은 구름은 거대한 군단을 이끌고 북으로 방향을 돌렸다.

     밤하늘은 별로 가득 차 있어서 헤아릴 엄두조차 못 낸다. 그래도 헤아리기를 좋아했다. 유독 밝게 빛나는 것부터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지만 생각보다 많이 못 세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무지개를 쫓던 아이는 어느덧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여러 마을의 낯선 또래 아이들이 모였다.

     담임선생님은 연세가 많은 여선생님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로 1학년 봄학기에 가정 방문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 마을을 방문하셨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집 방문이 제일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시던 선생님은 작은형과 작은누나를 기억해 내고는 나와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신기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신다.

     어머니는 선생님이 일어나실 무렵 암탉이 품었던 달걀 일곱 개를 손수건에 싸서 건네셨다.

     초등학교 1~2학년에게는 우리 밀로 만든 식빵 모양을 한 자르지 않은 덩어리 빵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향긋하고 구수하게 품어져 나오는 빵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로 기억된다. 빵을 실은 트럭이 들어오는 날이면 아이들은 모두 창가로 몰려와 환호성을 질렀다.

     “야~ 빵차다!”

     대부분 남자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운다. 간혹 여자아이들은 다음 시간까지 조금씩 나눠서 나름 아껴먹기도 하는 것 같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 몰래 훔쳐 먹다가 들켜서 선생님에게 혼나기도 했다.

     나도 처음 한두 번은 빵을 학교에서 다 먹고 집에 갔다.

     어느 날, 문득 어머니를 보자 이 맛있는 빵을 나 혼자 먹은 것이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는 이 맛있는 빵을 먹어 보지 못하고 나만 먹었구나.’ 어머니는 이런 빵이 있는지도 모르셨다.

     그날따라 빵을 실은 트럭이 간절히 기다려졌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선생님께 여쭤보니 차가 고장 나서 이번은 못 온다고 한다.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며칠 후, 트럭이 학교 정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저씨는 분주하게 빵을 내리기 시작한다. 지난번 못 받은 것까지 두 개를 받았다. 나뿐 아니라 친구들 모두 기분이 두 배는 더 좋은 것 같다.

     나는 두 개를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가방에 넣었다. 빨리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맛있는 빵을 어머니께 드리고 싶은 마음에 집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치 개선장군의 당당함같이 큰소리로 “엄마~”하고 소리쳤다. 아무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엄마~” 하고 고함치듯 불렀다. 밭에 가셨는지 아무 대답이 없다. 중뫼 밭으로 달려가 보았다. 사람의 허리쯤 자라있는 참깨밭에 하얀 수건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였다.

     마음이 급했다. 먼발치에서 “엄마~ ”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아직 듣지 못하셨는지 수건의 변화는 없었다. 더욱 큰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제야 어머니는 허리를 쭈욱 펴고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하시다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신다.

     “벌써 학교 다녀왔어?”

     해 아래서 김을 매는 게 힘겨우신지 어머니의 코잔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햇빛에 그을린 어머니의 피부와 사철 흙을 만지는 손은 항상 거칠었다. 호미 두 자루를 담은 오래된 대소쿠리를 내가 들으려 하나 한사코 어머니는 내게 주지 않으셨다. 아마 이러한 것을 어린 아들에게 드리우게 하고 싶지 않으셨나 보다. 대신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었다.

     집에 와서는 가방 속에 들어있는 빵을 꺼내어 어머니 입에 넣어 드렸다. 조금 먹어 보시고 맛있다며 나에게도 먹으라고 건넨다. 지금처럼 우유를 곁들어 드셨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시골에서 마실 것은 오로지 돌 틈의 냉수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더운 여름 어머니는 닷새마다 열리는 ‘단계’ 장에서 수박을 사서는 머리에 이고 오신다. 집에까지는 십 여리나 떨어져 있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여름이 다 가도록 수박은 두 번 정도 구경했다. 다른 과일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다. 샘 안에 둥둥 띄워서 시원해지기를 기다리고 또 식구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리고 그리고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 준비가 다 되었어도 아버지가 안 계시면 결코 수박에 칼을 대는 일은 없었다.
     수박의 겉은 녹색의 푸른 무늬가 선명한데 칼이 반쯤 들어가자 쩍하고 갈라진다. 정확하게 반으로 나뉘자 속이 빨갛게 드러난다. 겉모습만 봐서 상상이 가지 않는다. 까만 씨가 점처럼 군데군데 박혀있었다. 어린 마음에 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부모님과 네 명의 자녀가 있었어도 수박 한 통을 단번에 먹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두세 번에 나눠서 아껴 먹었다. 어머니는 수박의 당도가 높은 빨간 부분은 거의 드시지 않으시고 자녀들을 먹였다. 그리고 자녀들이 먹다 남은 빨간 부분이 조금 남은 수박의 밑부분을 놋수저로 사과 껍질처럼 얇아지도록 박박 긁어 드셨다.

     나는 그 옛날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수박의 빨간 부분을 먹게 하고 정작 당신은 껍질만 하염없이 긁어 드시는 모습을 기억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머니는 나를 출산하기 전에 애를 낳다가 잘못되어 혼(魂)이 나간 적이 있었다. 가족들은 장례를 준비했다.

     어머니는 죽음을 경험한 이후 나를 출산해서인지 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본인이 과연 살 수 있을까? 막둥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살았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죽음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고 또 누구도 비껴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생각보다 자신이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도 아신 모양이다.

     먼저 태어난 자녀들은 모두 자기 앞가림할 정도로 장성했지만 이제 갓 태어난 막내를 생각할 때 마음이 몹시 아팠나 보다.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앞에서 나의 유년 시절을 잠깐 살펴보았다. 오히려 생각나지 않는 부분들이 훨씬 많은데 다 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어머니의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은 교묘하게 이루어졌다.

     내가 열 살이 채 못되어 어머니 곁을 떠나서 진주로, 또 진주에서 서울로, 어머니와는 더욱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큰 형님은 공부에 대한 열망(熱望)이 매우 강한 분이었다.

     진심으로 동생이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며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생활 가운데서 공부를 위한 물질은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다. 본인이 공부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으셨는지 그 뜻을 자기 자녀보다 동생에게 이루고자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잘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또 필요한 모든 것은 이 형(兄)이 다 알아서 해주마!” 하고 그렇게 갈망(渴望) 하셨는데.....

     그런데 나는 그런 형님의 바람대로 잘 따라주지 못했다.

     한번은 아버지와 형님이 나의 진로와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한숨을 섞어가면서 밤늦도록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기초가 문제입니다. 따라가기도 벅찰 뿐더러 과외 등 온갖 방법을 시도해봐도 막내는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안타깝다 못해 애타는 형님의 목소리가 잠결에 들려왔다.

     이제는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보다도 과연 동생이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봐서 왠지 잘하지 못할 것만 같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또 다른 걱정이었다. 어쩌면 앞의 것보다 훨씬 비중이 높은 문제였다.

     아버지도 큰아들이 동생에 대한 기대와 열정을 잘 알기에 시름이 깊어간다. 나는 그때 아버지와 형님이 나로 인해 신경이 온통 곤두서있음을 비록 성인은 아니었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성장하면서 이분들에게 걱정과 염려 등 많은 근심을 끼쳤다. 또 눈물도 흘리게 했다. 뜻대로 잘 좀 따라 주면 좋았을 텐데 잘 따라주지 못한 것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몹시 마음에 걸린다.

     사람이 오래도록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천에 옮겨서 막 결실을 보고자 하는데,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한낮 꿈처럼 물거품이 됐을 때 심정이 어떠할까? 말하자면 형님이 바로 그런 상황에 놓여있었다.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신의 막냇동생을 연로하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누구보다도 반듯하게 키워보고 싶었는데........

     학년은 깊어가고 기초는 전혀 되어있지 않아 형님의 마음은 급했다. 아직 많이 어린 나는 그런 형님의 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어머니를 떠나온 것이 전부이고 다른 것은 없었다. 이것이 나를 위함인지 아닌지 분간도 서지 않았다. 장래(將來), 그런 것이 아이에게 와 닫을까?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어머니만 아픈 그리움이 되어 눈물방울 끝에 매달려있었다.

     그런 형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내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인생의 힘겨운 시기를 맞이할 때 비로소 형님이 생각났다. 나는 아직도 그 옛날 형님이 오로지 동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은 포기하면서까지 헌신하신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앞으로도 왠지 잘 모를 것만 같다.

     또 형수님은 1부 말미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두 분의 신혼은 딱 두 달 정도만 허락되었다. 두 달이 지난 다음 작은 형이 공부한다고 1년을 머물렀고, 작은누나도 결혼 전까지 머물렀으며 또 일본 사촌 누나와 형이 모국어(母國語)를 공부하기 위해 각각 1년씩 2년을 연이어 형수님 댁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사이 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이번에는 아버지 사촌 여동생의 아들이 중요한 시험 준비를 위해 또 1년을 형수님에게 신세를 졌다. 형님댁에 거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장성하도록 기거했으며 앞의 열거한 모든 사람과도 함께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모든 것이 안정적인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지방에 사는 조카들이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면서 형수님 댁은 또다시 사람들로 북적였다.

     형수님은 지칠 법도 하고 짜증을 낼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일로 한 번도 형님에게 화를 내거나 형님을 난처하게 해본 적이 없었다. 형수님은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그 동안 누리지 못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나는 이런 형수님이 얼마만큼 고단한 삶을 사셨는지 물론 어렸을 때는 잘 알지 못했다.

     어느덧 나의 학업도 끝나갈 무렵, 형님은 또 다른 고민에 머리를 움켜쥔다. 바로 나의 진로 즉 사회의 첫발을 어디에 들여놓을 것인가. 이것은 심각한 고민이었다. 과연 어디에 드려놔야 될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미 오래 전에 개척하다시피 걸어가신 형님은 무엇 때문에 첫발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몇 군데를 두드려 봐도 잘되지 않았다.

     형님의 사람됨과 근면, 성실함을 앞세워 동생을 추천해봤지만 2~3개월 사람을 써보고는 “제 형은 성실하고 빈틈이 없는 사람인데 동생은 다르네.” 서서히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가 새벽 안개같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시 돌이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소용이 없다. 후회하기에 너무 늦었다. 이미 열차는 떠나가고 지나간 세월은 엎질러진 물처럼 돌이킬 수 없었다.

     형님은 나로 인해 몇 번이나 벽에 기대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육신적으로 다 자란 동생을 자꾸 나무랄 수도 없었다. 달래도 보고 얼려도 보고 한 번 입을 여시면 교훈들로 가득했다. 그것은 걱정들로 뒤엉킨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같이 느껴졌다.

     나는 한때 술과 담배 등 좋지 않은 것들을 가까이하여 잠시 방황했다. 나로 인해 가족들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형님은 참고 인내하면서 성인이 다된 동생을 최대한 존중해주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공부를 잘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하지만 두 번째 주어진 인생마저 실패하면 다른 것으로 만회할 수도 없을뿐더러 인생이 비참해질 수 있다.”

     힘주어 말하는 눈빛은 불꽃이 튀었다. 절박했다. 형님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인력거를 탄 사람과 끄는 사람이 공교롭게도 초등학교 동창으로 똑같이 학교를 다녔어도 한 사람은 성공하여 인력거를 타는 사람이 되고 한 사람은 인력거를 끄는 사람이 되었다.’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느냐? 자주 인용하시던 예화였다.

     안타깝게도 형님의 말씀은 부담으로 와닿고 속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계절은 추위의 중심을 향해 가고 있다. 12월의 나뭇가지는 앙상하다. 잎들은 수분이 말라비틀어져 아슬아슬하게 흔들린다. 멀잖아 시베리아의 칼바람이 첫눈을 뿌릴 것만 같다. 나는 잿빛 하늘만큼이나 우울했다.

     마치 볼세비키 혁명 전선에 동원된 열아홉 약관의 ‘니나 카렌’의 잿빛 하늘처럼 말이다. 그녀는 자신을 두 광대뼈가 툭 뛰어나오고 키도 그리 크지 않은 볼품없는 외모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래도 두 살 위의 얀센지프로스키를 사랑했다. 얀센이 먼저 니나에게 고백했다. 니나도 키 크고 핸썸한 얀센이 마음에 들었다. 둘은 사랑하다가도 티격태격 의견이 맞지 않아 자주 다투었다. 누구나 처음 연애할 때처럼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해 속상해하기도 하고 때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눈물도 흘렸다. 니나는 자신을 위로해 줄 이는 그래도 얀센지프로스키 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사랑도 바람대로 오래가지 못했다. 제정 러시아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둘을 떼어 놓았다. 니나는 총을 들고 서부 전선으로 내몰렸다. 얀센도 총을 들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전선으로 향한다. 둘은 그 당시 수많은 젊은이 중 하나였다.

     니나는 그곳에서 건장한 군인 둘에게 강간당했다. 둘은 니나를 어떻게 할 것을 미리 계획해 놓고 치밀하게 유인했다.

     그 이듬해 스물한 살 무렵, 서부 전선은 지루한 공방전이 연일 계속되었다. 아직 어린 여성이 감당하기에 전선은 무리였다.

     어느 잿빛 하늘 아래 한방의 총성과 함께 날아온 탄알은 정확히 그녀의 가슴을 관통했다. 죽는 순간까지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얀센을 그리워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니나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허구인지 실화인지 너무도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나와 비슷한 나이의 러시아 소녀 니나의 짧은 인생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마도 그 당시 나의 마음도 학업이 허무하게 끝을 맺고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아 우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집에만 있는 것도 설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너도 이제 성인이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아무도 너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 형님은 사뭇 내가 걱정되는지 온통 염려 섞인 말뿐이었다.

     하루아침에 학생의 신분에서 성인으로 바뀌었을 때 왠지 모를 두려움과 부담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니나카렌의 잿빛 하늘처럼 당시 나의 하늘도 우울했다. 구름도 없고 떼를 지어 날아다니던 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황량하기가 사하라 광야 같았다. 어쩌면 한 해를 보낼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은데 갑자기 시간의 끝이 내 앞에 우뚝 선 느낌이었다. 당황했다.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많은 날 가운데 평범한 하루처럼 해(年)를 보내고 또 맞이하고 하지 않았던가.

 

     어머니는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던 바램은 내가 23년이 되도록 이어지다가 스물네 살 여름에 돌아가셨다. 내가 전역을 하고 얼마 되지 않을 시점이었다.

     오래도록 치매를 앓고 계시다가 돌아가실 무렵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와 큰형님은 어머니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무셨는지 알아보시고 반가워하시다가 말미에는 그마저도 잃어버렸다.

     어머니가 병을 앓았을 당시 병명도 정확히 몰랐다. 그냥 나이 든 노인에게 찾아온다고 해서 노망들었다고 치부해버리기 일쑤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치매였다. 형님은 어머니가 치매로 더 이상 아버지를 내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시고 두 분을 서울로 모시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려운 결단이었다. 아주 잠깐 두 분은 도시생활을 했지만 아버지는 보름도 채 못되어 아파트 생활을 힘겨워하시다가 결국 어머니를 남겨두고 혼자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어머니의 치매는 점점 더 심해저 혼자 집 밖을 나가기가 어려웠다. 식구들 몰래 혼자 나갔다가 집을 찾지 못해 가족들이 찾아 나섰고 이웃 주민들의 도움과 파출소의 도움을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었다.

     요즘은 치매로 인한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되어있어 전문가가 환자의 정도를 등급별로 나누어 심할 경우 요양시설이 잘 갖춰진 병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 운영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치매를 앓을 당시는 요양시설이 갖춰진 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치매 환자에 대한 복지제도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집에서 자녀들이 환자를 케어했다. 형수님과 형님은 일정한 요일에 맞추어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드리고 온몸을 깨끗하게 씻겨드렸다. 참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무렵, 적어도 50년을 함께한 남편과 일곱이나 되는 자녀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자녀들에게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생의 마지막 무렵 몹쓸 병으로 인해 자기 몸에서 난 자녀조차 알아보지 못했어도 어머니 돌아가시자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다시는 뵐 수 없고 엄마하고 부를 수도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 실 때의 괴로움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어머니에게 큰아들 즉 형님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만큼 부모님뿐만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비중이 매우 컸던 분이다.

     어머니는 평소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신의 큰아들의 품에 안겨서 마지막 눈을 감으셨다. 적어도 어머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행복한 품 속이 아니었을까? 고생되고 힘들었던 삶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어머니 고향인 생비량면의 어느 낮은 산언덕은 어머니의 산소로 적합해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형님은 이곳을 미리 정해 놓았다. 일조량이 매우 좋은 곳으로 앞에는 강물이 유유히 흐른다.

     언젠가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시면 어머니 묘 옆에 나란히 안장하기로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한동안 나는 어머니 생각에 눈가가 마르지 않았다.
 

     제3부 불꽃같이 살다 간 나의 작은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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