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은 중국에 살고있는 한민족으로 대개 조선시대말부터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형성된 역사가 짧기에 여기서 잃어버린 역사얘기를 하게 되면 대부분 조선족지식인들이나 역사학가들은 실소를 금할수 없을것이다. 백여년밖에 안되는 조선족역사에 그 무슨 비밀같은것이 있으며 잃어버린것이 있을소냐고...
역사는 예전에나 지금이나 잃어버리고 고쳐지고 망각되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중국조선족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을가?
1931년은 조선족의 역사에서 아니 중국 나아가서 세계의 역사에 큰 변화가 있은 해였다.
1931년 중국은 동북의 만주국통치를 승인하면서 일본에 동북을 빼앗기고 만다. 동북을 강점한 일본은 바로 중국 동북의 길림성 조선접경지대의 백두산일대에서 맹활약하던 조선독립군(조선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군대로 잠시 지칭하며 당시 이 군사력의 정확한 명칭은 모른다)을 첫 타겟으로 삼는다.
사실 1931년전까지 동북은 중국땅이어서 일본은 영사관의 병력과 당지 경찰력등 으로는 조선독립군을 제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31년이전의 조선독립세력은 이미 중국조선 접경지역에서 이십여년간 발전을 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가졌던것이다. 그 예로 최서해 강경애 등 당시 프로레타리아 계열의 작가들을 보면 모두 중국땅으로 이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검열로 다만 중국땅을 생존과 기회의 땅으로 묘사하였지만 실제는 중국 백두산일대에는 조선의 독립투사들이 대거 포진하여 있었다.
그중에는 파산된 농민도 있었겠지만 땅과 집을 팔고 구국운동을 하려는 조선의 의로운 사대부 귀족과 의인들도 많았었다. 하여 연변과 동북에는 그당시 애국지사들이 세운 학교가 많았었고 ...그 예로 윤동주는 심지어 기독교계열의 학교를 용정에서 다니며 애국주의를 전수받았다.
1931년은 중국조선족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해였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그냥 일본의 동북강점으로 나온다. 조선족의 역사에서 백두산 일대에서 총칼을 갈며 광복을 꿈구는 피끓는 인생들을 그냥 별 볼일 없는 사람들로 취급하고 있을때 중국공산당은 당시 그렇게 보지 않았다.
중국역사에서의 항일연군은 곧 조선독립군과의 연합을 의미한다.
정사에서는 지금 그 누구도 당시 조선독립군의 세력이 어떠했는가가 나오질 않는다.
다만 중국공산당의 주요영도하에서의 항일연군의 활동이 부각될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역사적환경하에서의 피치못할 사정으로 해석되지만 결코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될 역사이다.
조선독립군의 군사세력은 당시 동북에서 으뜸가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 사실을 잘 아는 중국공산당은 조선독립군에 연합제의를 한다. 그 당시 중공은 중국전역에서 국민당에게 잔혹하게 탄압을 당해 겨우 수만명이 정강산에 오를때라 동북지역은 군사력과 당조직이 상대적으로 약해있었다. 일설로 양정우가 동북으로 올때에도 단신으로 왔었다. 그만큼 동북의 중공의 조직과 군사력은 약했다.
1931년 일본의 동북강점이후 연변일대 조선독립군에게 있어서 중국공산당과의 연합유혹은 컸다. 다만 조선독립군은 성분이 복잡했는데 독립군중 젊은 축들은 소련사회주의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나이가 있는 일부는 서방민주주의혁명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대체로 소련의 혁명성공을 인정하는 편이었으며 소련이 이끄는 국제공산당과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국제공산당은 조선독립군의 현 병력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소련접경지대로 이동하여 세력보전하라고 조선독립군에 제의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조선독립군이 중국경내에 남아서 같이 항일연군을 성립하여 일제와 싸울것을 요구하였다.
1932년, 일제는 동북강점을 마치고 백두산일대의 조선독립군에 대한 정벌을 준비한다. 조선독립군은 연변과 동북 각지에 산재하여 있는 독립군 우두머리들을 모아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회의를 연다. 즉 소련으로 갈것인가 아니면 중국에 남아서 유격전을 할것인가?
이 고위층 회의가 반역자 혹은 간자에 의하여 일본군에 알려지며 조선독립군의 각 지대의 중대장들과 수령들이 포위를 당해 전부 희생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어랑촌13용사가 나타나게 된 전말이다...
어랑촌 13용사는 사실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유격지대의 유격대원들의 희생이 아니고 동북일대 조선독립군 영수들의 마지막 울부짖음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김구를 말하고 이승만을 알지만 이들을 모른다...
어랑촌13용사는 유격대원으로 포장이 되었으며 그들의 이름도 사적도 전부 허구로 되어있으며 심지어 이 사건이 발생된 시점도 전부 허구로 되어있다.
우두머리들을 전부 잃은 조선독립군은 일부분은 소련으로 들어갔으며 (김일성) 일부분은 중국공산당과 합병하여 항일연군을 이루었다.
후에 이들의 대부분은(일설에 6개사단 6만명이라고 함) 김일성을 따라 조선군으로 편입되었으며 나중에 조선전쟁에서 대부분이 사라졌을것으로 믿는다 ㅠㅠ
하여 오늘날에 와서 백두산조선독립군의 역사는 영원히 미제로 남아있으며 전부 김일성주석(그당시 나이가 십대)이 한 일로 역사를 쓰게 되었다...
1957년에 조선에서 사람이 와서(옛조선독립군으로 추측이 된다) 어랑촌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적을 묻는다...
이때에서야 중국에서는 이부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이들의 이름을 복구하려 했으나 이미 이십여년이 흘렀는지라 어려웠다. 문화대혁명을 겪은후에야 비로소 연변에 어랑촌13용사의 기념비가 세워진다. 그러나 그중의 인물들은 이젠 더는 알수 없었으며 심지어 살아있는 사람이 용사에 들어가고저 하는 일이 발생했다.
역사는 똑똑히 적은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중공의 유격대와 유격대원이 었다면 그렇게까지 수십년간 방치할수도 없었으며 죽은뒤에도 사적이 모호한 일들이 일어났다는것은 상상할수도 없다.
오늘날에 우리가 보는 어랑촌13용사는 일개인의 서술에 의하여 역사를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가공이 되고 흐트러진것이지만 역사의 진면모는 그자리에 있었으며 지나간 역사는 결코 고쳐지지 않을것이다.
이제 백년이 다 돼가는 이 시점.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그걸 증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마 우리의 후대들은 지금 역사책으로 전해져오는 어랑촌13용사이야기를 알고 믿으며 자랄것이다.
우리의 조선족역사는 이렇게 영원히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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