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사전으로 만난 귀인
나는 방송강좌에 따라 영어공부를 좀 했기에 영어강습반에
가서도 그렇게 힘든줄을 몰랐다. 하여 매일 영어공부외에 일어
공부도 견지하였다. 일어수준이 높아지자 나는 우리 나라에서
출판하는 일어잡지인《인민중국》을 주문하여 보면서 모르는 단
어들은 자전을 뒤져 알고 지냈다. 자전을 너무 뒤지니 익숙해져
서 나중엔 척 펼치면 찾는 부수(部首)가 나오군 했다. 나 자신도 신기
할 정도였다.
저녁에는 반도체라지오로 청력훈련을 진행하였다. 한국국제
방송국에서는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한국어방송, 7시부터 9시
까지 일어방송, 9시부터 10시까지 중국어방송, 10시부터 11시
까지 영어방송을 하였다. 매개 언어방송의 첫 20분은 그날 뉴스
를 방송하였다. 뉴스내용은 전부 똑같기에 먼저 한국어로 뉴스
를 방송할 때 자세히 듣고 그다음 다른 언어로 방송할 때에는 그
말의 내용을 련계시키면서 들었다. 몇달이 지나자 웬간한 말은
다 알아들을수 있게 되였다.
그런데 일어외래어사전이 없어서 일어공부를 더 심도있게
하는데 저애가 되였다. 어떻게 하면 외래어사전을 구할수 있을
가? 한동안 궁리하던 나는《중국청년보》를 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신문에서 본 그분은 당시 요꼬하마대학에서 연수하고있는
중이였는데 고홍(顾红)이라는 필명으로 일본견문을 써서《중국
청년보》에 실었다. 나는 그가 쓴 문장들을 여러편 읽어보았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생동하게 쓴 그의 견문들을 읽노라면 마치
일본에 직접 가보는듯싶었다.
나는 이분의 도움을 받으면 되겠다싶어 그에게 편지를 써보
냈다. 나는 나의 상황을 간단하게 언급한후 외래어사전이 없어
서 무척 애를 먹고있으니 한권 보내주면 책값을 꼭 보내드리겠
다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런데 퍼그나 기다려도 종무소식이였
다. 나는 어느새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두달이 지난 어느날, 문득 배달원아저씨가 우표를 가득 붙인
편지를 가져왔다. 뜨락에서 라이라크꽃향기를 맡고있던 나는 얼
른 편지를 받아들었다. 바로 요꼬하마에서 온 편지였다. 나는 너
무도 반가와 편지를 뜯는 손이 막 떨리기까지 했다. 편지는 좀
갈긴 필체로 써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몇번 읽어보니 내용이
알리였다.
고홍은 그의 필명이고 본명은 곡조강(谷祖纲)이였다. 이분은
란주대학 지질지리학부의 교수로서 요꼬하마대학에 가 2년 동
안 연수하고 다음달에 중국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내가 고홍이
라는 필명을 썼기에 편지를 늦게 받아서 회답이 늦어졌다고 미
안해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귀국준비에 바쁘기에 얼마후에 귀국
하면 꼭 내가 요구하는 사전을 보내주겠으니 장애인이라고 위축
받지 말고 공부를 잘하여 성공하기 바란다고 고무격려하였다.
편지와 함께 사진도 동봉하였다. 사진속의 그분은 머리가 희
슥희슥한것이 아버지의 나이와 비슷해보이였다. 나는 곡조강선
생님의 편지를 받고 얼마나 큰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며칠후에 한 친구가 일어외래어사전을 들고 찾아왔다. 어디에서 샀는가고 물었더니 신화서점에서 샀다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코앞에서 구할수 있는것을 그렇게 속태우며 멀리에서 구하느라고 애쓰다
니…
아무튼 오매에도 구하고싶었던 책을 샀으니 기분이 무척 좋
았다. 이튿날 나는 인차 곡선생님한테 편지를 써서 사려던 책을
샀으니 그 멀리에서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알렸다. 그런데 나의
편지를 못 받았는지 두달후 곡선생님은 귀국하자 말 그대로 외
래어사전을 보내왔다.
나는 뜨거운 감사편지를 써보냈다. 그후 곡선생님은 해마다
몇번씩 편지를 보내오면서 고무격려해주었다. 곡선생님은 항상
나를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모양이였다. 북경에 회의하러 간 틈
을 타서 중국복리기금회에 들려 기금회에서 자료들을 얻어서는
나한테 보내주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장애인들을 줄곧 관심하고
있으니 맥을 버리지 말고 꼭 견지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우리들은 몇해동안 편지거래를 하면서도 한번도 만나본적
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1986년 여름, 곡선생님은 대경에
서 열린 지질연구회의에 참가했다가 돌아갈 때 멀리 에돌아 우
리 집으로 나를 만나러 왔던것이다. 가석하게도 나는 그때 큰이
모네 집에 가있었기에 곡선생님을 만나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그분이 너무도 고마와 떠나갈 때 검정귀버섯을 한
근 사보냈다. 그랬더니 그는 돌아가자 그곳 특산인 원추리나물
을 보내왔다.그리고 가을의 란주는 아름답고 풍성하니 꼭 한번 놀러오라고 하는것이였다.그후 나는 공부가 바쁘고 생활도 바쁘고 하니 련계를 못하다가 결혼한후에 결혼소식과 결혼사진을 동봉하여 보내주었다.그는 너무도 기뻐하며 꼭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편지를 써보내 왔다.하지만 내가 생활에 쪼들리다 보니 끝내는 련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곡선생님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실로 귀중한 사람이였다. 아무때나 기회가 되면 꼭 그를 만나러 가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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