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집을 뛰쳐나가다
밸김에 집을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갈데가 없었다. 생각하던
끝에 나는 연길 이모네 집으로 갔다. 이모와 이모부는 모두 연
변대학의 교수인데 슬하에 자식 넷을 두고있었다. 자식들이 다
커서 한 구들 넘칠 지경이였는데 그중에는 신체가 허약하여 늘
약을 달고있는 환자도 있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앓는 자식의 병
시중을 드느라고 무척 바삐 보냈다. 그런데 나까지 찾아들어 페
를 끼치니 미안하기 그지없다. 하여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없나고
궁리하는데 사촌동생이 뜨개를 도와달라고 청구했다. 나는 대뜸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만한 일이라도 할게 생겼으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나는 낮에는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걔가 뜨다만 뜨개감을 들
고 부리나케 떠나갔다. 때론 밤 11시까지 뜨개를 떴다. 몇시간
내처 뜨개질을 하고나면 손목이 시큰해나고 목이 뻣뻣해났다.
그래도 이모네가 나를 받아주어서 고마왔고 또 이렇게라도 그들
을 도와줄수 있는것이 다행스럽고 기뻤다.
이모네 집에서 두달 가량 공부를 하고 여름방학이 되자 나는
학교에 가 시험을 치르고 집중수업도 받았다.
집중수업을 마친후 나는 새롭게 갈 곳을 찾으려 했다. 환자
가 있는 이모네 집에는 더 머물러있기 어려웠던것이다. 바로 이
때 두 사촌동생도 큰이모네 집으로 놀러 간다고 했다. 큰이모네
집은 화룡시의 한 시골에 있었다. 자식들이 모두 외지에 가있으
니 조용하여 공부하기가 좋을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따라가기
로 하였다.
우리는 곧 길을 떠났다. 렬차를 타고 팔가자에서 내린 우리
는 큰이모네 집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가없이 펼쳐진 논밭, 졸
졸 흐르는 개울물, 울퉁불퉁한 달구지길, 거무칙칙한 초가집
들… 모든것이 낯설면서도 정다와보이였다.
나는 공부를 많이 할 욕심으로 책을 많이 가지고 떠났다. 게
다가 사촌동생들의 짐까지 놓다보니 휠체어에 엉뎅이를 들이밀
기조차 어려웠다. 사촌동생들이 휠체어를 밀면서 약 30리 길을
걸어서야 큰이모네 집에 이르렀다.
기별없이 온 우리들을 보고 큰이모네는 놀라와하면서도 무
척 반갑게 맞아주었다. 말 그대로 큰이모네 집은 조용하였다. 사
촌동생들은 며칠 놀다가 돌아갔다. 집에는 큰이모와 큰이모부
그리고 그 집 막내딸밖에 없었다. 막내딸은 나보다 서너살 아래
인데 시내로 일하러 가려다가 내가 가니 동무해주느라고 물러앉
았다.
며칠후에 큰이모는 우리 집으로 떠났다. 나의 언니가 결혼식
을 하기에 도우러 간것이였다. 하나밖에 없는 언니의 결혼식에
나도 꼭 참가하고싶었지만 그렇게 할수 없는것이 실로 맹랑하고
유감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런것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나한
테는 학업이 위주였다. 나는 이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으면 남의 부담거리로 되지 않으려는 동생의 마음을 언니가 얼
마든지 리해하리라고 믿었다.
조용한 환경속에서 나는 공부를 실속있게 해나갔다. 학교에
서 지정해준 참고서적들도 마음껏 볼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게
다가 시골사람들은 도시사람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소박하고 인
정이 많아 나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듯싶었다. 나와 아무런 관
계가 없는 마을사람들도 나를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특히
사돈집에서는 약간 색다른 음식이 있어도 나한테 보내주군 하
였다.
하루는 큰이모부가 큰사돈네 집에 갔다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여기 물고기는 흙냄새가 난다고 했다.
이튿날아침, 물고기료리를 할 때 나는 책에서 본 방법대로
식초, 사탕가루, 술을 적당히 넣고 끓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흙냄새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담백하고 쫄깃쫄깃한것이 실로 별
맛이였다. 큰이모부는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온 마을에 다니
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보니 책은 확실히 훌륭한 스승이
였다.
조용하고도 안정된 환경속에서 공부를 할수 있어 너무나 기
뻤는데 갑자기 마을에 홍수가 진다고 란리였다. 며칠 련속 큰비
가 내리더니 도처에서 물사태가 터지고 다리가 끊어지고 길이
차단되였다. 큰이모네 집근처에는 저수지가 있었다. 이대로 계
속 비가 내리면 저수지수문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이모네 집뿐만아니라 온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된다는것이였다.
그러니 경보가 울리면 곧 근처의 산으로 피난가야 한다고 했다.
란리라도 이런 란리가 어디에 있을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에 마을에서 기별이 왔다. 저수지수
문을 곧 열어놓으니 빨리 산에 오르라는것이였다. 하늘에서는
계속 비가 내리고있었다. 큰이모부는 급히 소수레를 메우고는
빨리 중요한 물건들을 실으라고 재촉했다. 큰이모네 작은딸은
텔레비죤과 같은 기물들을 싣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나는 한보따리나 되는 책이 근심되였다. 하여 사촌동생더러 빨리 책꾸레미
를 소수레에 실어달라고 하였다. 사촌동생은 소수레에 귀중한
기물들도 다 싣지 못하겠는데 그까짓 책은 싣지 말자고 하였다.
나는 내가 앉지 못하더라도 책만은 꼭 실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사촌동생은 내키지 않아하면서도 할수없이 실어주었다.
소수레에 올망졸망 걷어싣고 산에 오르니 날이 훤히 밝기 시
작하였다. 산이라야 평지보다 좀 높아 언덕이라고 하는편이 더
적합할것 같았다. 주위는 온통 강냉이밭이였다. 우리는 비를 맞
아 물자루가 된채 산언덕에 서있었다.
약 세시간 가량 기다렸는데 홍수경보가 해제되였다. 나는 소
수레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산에 올랐다가 다시 돌아오니 집
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나는 책꾸레미를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슨 큰 인물이 되
겠다고 책꾸레미를 가지고 피난갔다왔는지 나로서도 모를 일이
였다. 이 일은 사촌동생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지금
도 나를 만날 때마다 그는 늘 이 일을 떠올리군 한다.
피난소동이 있은후 얼마 안되여 큰이모가 우리 집에서 혼사
를 끝내고 돌아왔다. 그는 나를 보자 푸념질하였다.
“어이구, 넌 언제면 언니처럼 너울 쓰고 시집을 가겠느냐?
너 언니는 정말 행복하겠더라. 신랑이 시체옷들을 한 트렁크나 사
왔던데 죽을 때까지 입어도 다 못 입겠더라. 그런데 너는 한평생
치마도 못 입어보고 변변한 신발도 못 신어보게 생겼으니 얼마
나 원통하겠느냐.”
큰이모는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것을 누리지 못하는것 같아
가슴 아파하지만 나는 종래로 먹고 입는데 신경을 쓴적이 없었
다. 잘 먹고 잘 입는 생활이 싫어서가 아니다. 나에게는 그럴 시
간도 없거니와 조건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란 추구
가 있어야 하며 그에 앞서 우선 자급자족할수 있는 떳떳한 인간이 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때문에 나한테는 홀로서기가 급선무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엇서서 많은 고생을 겪었고 또 주위의 여론압력을 이겨나온것도
바로 나의 이 홀로서기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홀로서기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싶을 때가 많았
다. 이집저집 떠돌아다닌다는것이 정말 구차한 일이였다.그렇다고 아버지한테 큰소리를 쳐놓고 불과 몇달이 안되여 집으로 돌아간다는것은 더구나 안되는일이였다.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지 어머니한테 편지를 썼더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이만큼 오래 갈라져있었으니 아버지의 성질도
가라앉았을것이라고 했다.
큰이모네 집을 떠나기 전날, 나는 큰이모네 집앞에 나앉아
넓은 논밭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지금
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한번 점검해보았다. 도대체 내가 정말 옳
은짓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아버지와 근 20년 엇서서 하지 말라
는 공부를 기어이 하면서 주위사람들까지 피곤하게 만든것이 정
말 잘한노릇인지…
이제 또 집으로 돌아가면 어떤 봉변을 당해야 할지 근심이
태산같았다. 학업은 계속할수 있을지, 학업을 끝내면 소원대로
일자리를 얻을수 있을지 모든것이 미결이였다.
앞을 내다볼수 없는 나는 그래도 어머니의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마음 먹었다. 이튿날 차에 오른 나는 집과 거리가 가까와 질수록 마음이 불안해 졌다.심지어 작은 역에서 머무는 시간도 더길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난다.그래도 시간의 바퀴는 붙들어 맬수는 없는 법 결국에는 집에 도착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