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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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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15 드디여 독립하다 댓글:  조회:943  추천:0  2014-03-25
15   드디여 독립하다   “돈 봉투” 사건후 나는 이집에서 오래 머무룰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였다.그렇다고 당장 집을 나올수는 없는 것이다.물론 생각은 불붙듯 하지만. 나는 버틸만할 때까지 버텨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어느날 주방에 하수도가 메여버렸다.설걷이를 하던 나는 구정물을 어머니더러 변소에 버려달라고 하였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노발대발이다.무슨 일이든 자기절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한테 심부름을 시킨다고 그런데 자기절로도 할만한 일을해야 하지 않겠는가?변소는 주방칸을 나가 복도에 있는데 너무 높아서 성한 사람도 드나들기 힘든 형편이다.그런데 나보고 그리로 구정물을 버리라고 하니 어디 될말인가? 나는 집을 나올때가 되였다고 느껴졌다.아침에 출근해서 청가를 맞고 나온 나는 연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이모님을 모셔올 예산이였던 것이다.이모님이 곁에 있어줘야 짐을 가지고 집을 나올수 있지 나혼자라면 절대로 짐같은것 챙기지도 못할것이였다. 저녁에 이모님과 같이 집에 들어선 나는 밥을 먹을 념도 하지 않고 덮던 이부자리와 입던 옷들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차를 불러 싣고는 곧추 친구의 집으로 향하였다. 옛날부터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잘 아시는 이모는 별로 말리지도 않는다.이모님의 앞인지라 아버지는 내가 하는대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다 보지도 않는 것이였다. 모든것이 순리로웠다.세집도 찾아놓지 못한 나는 이튿날부터 국경절 련휴식인지라 집을 찾기에 나섰다.이틀동안 헤매던 끝에 친구의 도움으로 약7,8평방되는 집을 맡을수 있었다. 집은 조건이 말이 아니였지만 문만 열면 친구네 원집에 닿을수 있어 처녀의 몸으로 혼자있기에는 그래도 안전할것 같았다. 불을 지핀다음 한번 싹 닦아내고 내짐을 챙겨놓으니 집같은 느낌이 난다.썰렁하기는 하지만 나에게만 속하는 공간이 생겨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련휴식후 출근첫날 어머니는 나에게 필요되는 가장집물들을 챙겨왔다.전기밥가마며 전기 솥 그리고 칼도마 사발까지 구전하기도 하다. 나의 독신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그때 사무실에 일이 너무 많았던것으로 기억된다.그래서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에 늦게 돌아올때가 많았다.저녁 9.10시경에 돌아오면 불을 지피기가 제일 싫었다.그래서 주인집 아버님이 내가 퇴근하기전에 종종 지펴주군 하였다.정말 얼마나 고맙던지. 주인집에서는 음식도 자주 내다주군하였다.하지만 홀로 있으니 밥맛도 잊어진다.그래서 때를 거르기가 일쑤였다.어머니가 달걀을 두근사다줬는데 어느때 까지도 먹지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건강관리를 못한다고 집으로 들어가잔다.하지만 나는 먹지못하고 자지못하고 해서 힘들기는 하지만 마음이 편하니 그걸로 대단히 만족을 느꼈다.다시는 아버지의 눈빛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30년동안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생활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 난다.
38    14 오매에도 갈망하던 출근길 댓글:  조회:1051  추천:0  2013-11-28
14   오매에도 갈망하던 출근길    이튿날 나는 어머니와 함께 고마운 기자분을 따라 그 회사에 갔다. 일할수 없는 놈이라 비서처에 안배되였다.인사과에 나이 지긋한 과장님은 오는 사람마다 여차여차 수준이 높다고 자칭하는데 정작 일을 시켜 보면 졸장부더라며 제대로 시키는 일을 할수 있을지 지켜보아야겠단다. 나는 온갖 정력과 재능을 다 바쳐 본때있게 일을 잘하리라 속으로 다지였다. 난생 처음 근사한 일자리를 얻어 첫출근을 하는지라 마음은 날아갈것만 같았다. 꿈은 바로 여기서 부터 시작되는것이다. 나는 돈이야 벌건 못벌건 출근한다는 자체가 너무 신이 나서 어쩔줄 몰랐다.매일 즐겁기 그지 없었다.                          . 어느덧 한달이 지나 월급을 타는날이 되였다. 나는 갓 입사하였기 때문에 회사에서 제일 낮은 월금을 받았지만 난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제대로 된 월금인지라 가슴이 설레이기만 하였다. 그리 투툼하지도 않은 돈봉투는 무겁게만 느껴진다.사람이 없는틈을 타서 헤고 또 헤여보는데 도저히 맞게 헤여지질 않는다.이봉투를 아버지한테 드려서 점수를 따려는 생각을 하니 웃음주머니가 저절로 흔들거린다. 아버지는 몇십년동안 어쩌고 저쩌고 혼만 내주었지만  이제 이 돈봉투만 쥐여주면 모든것이 눈녹듯 녹아버릴 것이다.세상에 돈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라고. 나는 퇴근길에 먼저 시장에 들렸다.얇은 돈뭉치로 온 집식구들의 선물을 사려니 모자랄것 같아 차라리 한상 차려 식구들을 대접하는 것이 더 나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바리바리 사가지고 집에 이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써 퇴근하여 와 있다.낮에 내가 미리 알렸던 것이다.오늘 저녁에 내가 한상 차린다고.기쁨은 나누어야 배로되는 법이니까..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나 셋이서 지지고 볶고 난리를 하는데 아버지께서 정지칸에 나오시더니 찬장에서 묵은 채를 한접시 내려놓고는 약주를 드시는 것이였다 이러는 아버지가 못마땅하게 느껴진 어머니는 채가 금방 다 되니 좀만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이였다.하지만 아버지는 듣는척도 하지 않는다.나는 또 연출이 시작되는 구나하고 생각하였다.. 아버지가  우리와 식사를 함께 하지않으니 나는 기쁜날에 기쁘다는 말한마디 못하고 우리들끼리 대충먹고 일어나 버렸다. 저녁을 먹고 나머지 돈을 어머니한테 주니 아버지한테 드리라고 손질한다. 나는 두려워서 콩당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간신히 돈봉투를 아버지의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내가 정지간에 기여나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필요없다”하면서 돈봉투를 도로 내던지는 것이였다. 나는 무한한 모욕감을 느꼈다.온몸에 찬기운이 돌고 눈물이 욱 치밀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37    13 귀인은 지척에도 있었다 댓글:  조회:1201  추천:0  2013-11-25
13   귀인은 지척에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란 사람은 남들처럼 씽씽 걸을수 없는것만 빼고는 괜찮은 놈이라고 느껴지는데 어쩐지 살면서 보면 무슨 일이든지 풀리는것이 없다.귀인이 없어서 인가?아니면 복이 없어서 인가?어쨌든 매 한발자국 내디디는데 너무 힘들다. 어머니는 내가 소띠라서 뒤늦게 뜬단다.정말 그럴가?늦게 라도 떳으면 좋겠는데. 졸업식을 한 이튿날 나는 연길 공원거리에 있는 한 이라고 쓴 단위를 찾아갔다. 이단위의 지도자도 장애인인데 복장을 잘하여 자기가 치부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같은 지체장애인들을 취직시켜 그당시 이름을 널리알리고 있었다.그의 사적은 전주 뿐만아니라 중앙텔레비죤 제2채널 경제뉴스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반공실에 들어가니 한 아줌마가 나를 알은체를 하는 것이였다. 내가 찾아온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그는 서랍에서 웬 용지를 가져다 주면서 요구사항에 따라 적으라는 것이였다.그리고는 자기 사무가 바쁜지 아니면 내가 등기표를 적는데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그러는지 한마디도 하지않았다.나는 어쩐지 몇해전에 북경장애인복리기금회에 갔던 그 기분이 났다. 장애인의 집이라면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져야 되겠는데 복도에 휄체어가 몇대 세워져 있는것 빼고는 다른 기관과 별다른 점이 없다. 내가 등기표를 대충적고 나오려는데 그 아줌마가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리라는 것이였다. 또 그 소리다.아무데를 가나 다 그 기다리라는 소리다.에서도 나를 쓰려고 하지 않는데 다른데야 더 가봤자 헛물을 켤것만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못내고 이모네 집에서 머무르며 천천히 대책을 강구해 보려고 하였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설마 정말로 밥벌어먹을 곳을 못찾으랴! 이모네 식구들의 옷들을 뜨면서 이방법 저방법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날 어머니께서 전화가 왔다.연변일보사 오기활선냉님이 나를 한 사영기업에 배치해 놓았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였다.드디여 살길이 나진 것이다.나는 나에게 살길을 찾아준 오기활선생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내가 오기자를 알게 된것은 1989년도였다. 그때 그는 연변 일보사 도문시주재기자로 있었다. 그전해에 그는 주환경보호국 에 갔다가 어머니를 소개받고 취재하러 왔었다. 그 기회에 어머 니는 열심히 공부만 하고있는 딸을 취직시켜달라고 오기자에게 청들었던것이다. 1989년 9월의 어느날, 점심을 먹고 나 혼자 집에 있는데 갑 자기 노크소리가 났다. “계십니까?” 남성의 웅글진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나는 인차 문을 열었다. 키가 훤칠한분이 다른 사람과 함께 들어섰다. “오기활이라고 합니다. 연변일보사 도문주재기자입니다. 그 리고 이분은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기자구요.” 나는 얼른 “어머니께서 방금 출근하셨는데요.”라고 말하면 서 의아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어머니를 찾아온것이 아니라 최원이를 보러 왔소.” 온돌에 올라앉은 오기자는 좀 바삐 보내다나니 인제야 왔다 며 미안한 기색을 지었다. 처음으로 기자를 만나는 나는 어쩐지 긴장해지기만 했다. 그 러자 오기자는 한담하듯 이것저것 구속없이 화제를 꺼냈다. 이 윽고 오기자는 내가 자습의 길을 걸어온 과정을 자세히 적어서 달라고 했다. 두서가 맞지 않아도 괜찮으니 하고싶은 말을 몽땅 적어보라고 했다. 이튿날부터 나는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생각나는대로 적 었는데 원고지로 36장이나 되였다. 약속대로 일주일후에 오기자는 내가 쓴 글을 보러 왔다. 두 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썼는데도 오기자는 아주 감동적으로 읽어 가는것이였다. 그 표정만 보아도 오기자가 나의 신상에 무척 관 심을 가지고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그후 오선생님은 나와 면목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이야기를 나눈듯하였다.오선생님은 그들에게서 나에대한 료해를 더 깊게 함으로써 나와 아버지사이는 특별하고도 어찌할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되였다. 오선생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그는 여러모로 노력하여 드디여 이 개인회사에 취직히켜주었던것이다. 이번 취직으로 인하여 나는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 하여 아이도 낳고 전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활을 할수있게 되였다.다시말해서 나의 생활이 천지개벽을 일으킨것이다.그러니 단순히 고맙다는 말한마디로 오선생님에게 대한 감사한 마음이 다 표달이 될까?어림도 없다. 내가 글방을 꾸려 홀로서기에 성공한뒤 해마다 방송, 신문, 집지,텔레비방송등 보도매체의 기자분들이 다녀갔지만 그들은 모두 나한테서 필요한 소재를 얻은뒤 돌아가면 그만인테 오선생님은 줄골 지켜보아왔다.그들내외는 내가 잘되면 같이 기뻐하고 내가 힘들어 하면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군 하였다. 1995년 남편이 큰 사고를 빚어내여 우리가족이 심한 궁지에 빠져 들어갔을 때도 오선생님은 한달음에 달려와 돈 50원을 내놓으면서 무사히 바쁜고비를 넘으라고 고무해 주는것이였다. 그때 돈 50원이면 지금 500원과 마찬가지였으니.단돈 10원도 없어서 공포에 질리고 있던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큰 돈이였다고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내가 오선생님 내외를 면목을 안지 올해로 20년이 된다.나는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 청시하기를 좋아한다.그동안 나는 그들에게서 지혜를 얻어 굽은길을 얼마나 적게 걸었는지 모른다.오선생님내외는 참으로 나의 귀인이다.나는 그들과 같은 스승이 있어 너무나 행운스럽다.나와 같은 장애인들에게는 이러한 스승이 참으로 필요하다. 떄문에 나는 사회여러분야의 유명인사들은 모두 동원되여 장애인들의 참된 길동무가 되여주었으면 좋겠다.그때되면 아마 하루하루가 다 우리장애임들의 명절로 될것이다. 출근하라는 소리에 나는 날듯이 기뻤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가지고 렬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버지의 눈치부터 살폈다. 아버지는 내가 기자의 소개로 취직을 한다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36    12 떳떳한 대학교졸업생으로 댓글:  조회:1078  추천:0  2013-11-18
12   떳떳한 대학교졸업생으로   취직 실패를 겪은 나는 더는 어찌해볼 엄두도 못내였다. 그동안 아버지는 아무말 없으시다가1990년 양력설날 누구의 초청을 받고 나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돌아와서는  “너 올해 졸업을 하겠지?”하고 묻는 것이였다. “녜.”나는 숨을 죽이고 간신히 대답하였다. “그럼 너 어떻게 할 예산이야?나는 인젠 네가 60살될때까지 먹을 걸 다 장만해 주었다.네가 몇살이야.서른살까지 먹여주었으면 됐지,어느때까지 시발해줘야 하는데?너를 낳아 키우느라고 그래.병치료 해주느라고 그래, 거기에다 대학교를 다니느라고 그래. 대학도 하나도 아닌 두세개씩 다녔으니 난 인제 너한테 할만큼 했다.넌 나한테 원이 없을거다.그러니 올해 7월에 졸업하면 너갈데를 가라. 졸업증서를 타는 즉시로 넌 다시는 내집에 발을 들여못놓는다.난 이젠 너만 봐도 질리니깐.나도 좀 살자.몇해 마음 편안히 살다가 죽으련다.너 내 죽어도 오지말라. 울지도 말고. 내죽은 다음에 산소에 올 필요도 없다.응.필요없다.다 필요없어.”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손을 허공예 휘휘 내젖는다. 나는 아버지가 이미 이렇게 불호령을 내린이상 정말로 내 살길을 찾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공부를 시켜주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학비를 다 대주어 졸업을 하게 되였으니 또 무슨 말을 할수있겠는가?졸업을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취직을 해야지. 정 안되면 자기절로 무슨 업을 하던지. 방법을 대야 한다.더는 부모들한테 의탁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해 7월 나는 졸업시험을 치러 연변대학에 갔다. 5년동안 천신만고로 이번 마지막 시험을 치면 오매에도 갈망하던 대학졸업생이 되는데 나의 마음은 추호도 가볍지 않다.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았을 때는 세상을 다 독차지 한것처럼 가슴이 설레이여 밤잠마저 설쳤는데 졸업을 한다해도 나의 생활이 달라지는것이 하나도 없으니 도리여 근심거리만 늘어났다. 그전 같으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밥을 얻어 먹어도 미안한 감은 있어도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는데 인제는 아버지가 졸업증을 타는 동시에 집으로 못들어간다는 호령을 내린 실정.내 앞에는 당장 생존문제를 해결해야 할 큰 과제가 놓여있었다.하지만 이 문제는 하루 이틀시간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만큼 나는 졸업식을 마치고 보자고 마음먹었다. 졸업식날 숙소를 나와보니 간밤에 비가 내려져 있었다.비물에 젖혀있는 계단을 간신히 올라 연변대학 구락부에 들어서니 안에는 졸업식에 참가하러온 학생들로 법석이고있었다.모두들 즐거운 모습들이였다. 얼마후 졸업식이 시작되였다. 하지만 나는 착잡한 생각에만 잠겨있다보니 졸업식이 어떻게 진척되는지도 잘 모르고있었다. 갑자기 나의 뒤줄에 앉은 한 학생이 나의 어깨를 툭 치며 “좋 겠소. 교장선생님이 당신을 칭찬하는구만. 얼마나 큰 영광이요!” 라고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제야 나는 주석대를 바라보며 귀 를 기울이였다. 교장선생님은 내가 장장 5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강의에 참가하고 번마다 시험을 잘 치러 우수한 성적을 따 냈으며 연변대학의 4000여명 학생들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었다 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것이였다. 우리 반 동학들도 원만하게 끝을 보았다며 동감이라는듯 나 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였다. 사실 다들 내가 5년 동안 고생을 많 이 했으리라고 여기지만 도대체 어떤 풍상고초를 겪어왔고 얼마 나 힘들었는지는 누구도 모르고있었다. 한편 남들이 긍정하는 성적으로 대학교를 떳떳하게 졸업 한다고 생각하니 쓰거운 열물이 달콤한 꿀로 변하는듯싶었다.  
35    11. 정보소에 취직 댓글:  조회:1039  추천:0  2013-11-14
  정보소에 취직   이때 편직물공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집에 편직기계를 하나 사놓았는데 함께 옷을 짜서 팔아보자고 했다. 기술은 자기가 책임지겠으니 나는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편직일이 쉽지 않다는것을 뻔히 알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아닌지라 쾌히 받아들이였다. 조심스레 아버지한테 여쭈었더니 순순히 허락하였다. 폭풍이 지난 뒤여서인지 아버지 는 몰라보게 조용해졌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나는 하늘의 흰구름처럼 마음이 가벼 웠다. 새 생활이 시작되는것 같았다. 이튿날부터 친구의 집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낮에는 친구가 옷을 짜고 밤에는 내가 옷을 짰 다. 기계를 세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도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 일하는것이 소원이였다. 그런 데 낮에 온 하루 책을 보고나면 피곤해서 죽을 지경인데 밤에 또 일을 하자니 몹시 힘들었다. 게다가 편직일은 정력이 많이 드는 일이기에 자칫하면 흠집이 생기기에 정신을 가다듬어 짜야 했다. 아니나다를가 이틀동안 정성들여 짰는데 잘못 짰다고 친구 는 여간만 서운해하지 않았다. 특히 꽃무늬를 짤 때에는 한코 를 틀리게 짜도 안된다는것이였다. 이틀동안 짠 옷들이 어느 하 나 흠집이 없는것이 없었다. 나는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왜 이렇 게 무능한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였다. 그렇게 열심히 짜느라 애 썼는데도 정품 하나 못 만들어냈으니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이 일이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것 같았다. 더는 그친구한테 방애를 주지 말고 접어두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찾아가 나의 생각을 털어놓았다.그도 고민을 많이 하였던지라 별로 말리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며칠동안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돌아보았다. 혹시 사람을 쓰는 광고라도 붙은것이 있지 않나 거리의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던중 한 낡은 집에 붙인 광고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정보소에서 정보원을 모집한 다는 광고였다. 별다른 요구는 없고 한어를 잘하면 된다고 했다. 특히 신체조건을 내걸지 않은것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 나는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어 알아보라고 하였다. 과연 장애 인이라도 괜찮으니 지식이 있으면 받아들인다는것이였다. 나는 날듯이 기뻤다. 드디여 오늘과 같은 날을 보게되여서 참말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앞길이 망망하니 죽고싶은 생각만 하였었는데 정말로 죽었더라면 큰일 날번하였다. 그때까지 돈이라곤 벌어보지 못한 나는 이번 취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이튿날 어머니의 단위의 차를 내가지고 길을 떠났다.주숙을 해야하니 어머니는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또 챙겨서 짐이 너무나 많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것 처럼 세간집물까지 챙겨놓았기 때문이다. 반자동차를 싣고 떠나는데 나는 집에 대한 미련은 꼬물만치도 없다. 난생처음 “일하러” 외지로 떠나는  마음은 설레이기만 한다. 자동차는 강기슭의 길을 따라 질주하였다. 내가 창밖을 내다 보니 구름한점 없는 하늘은 무지 파랗고 해빛은 찬연하였다. 푸른산이 비껴있는 강물은 한폭의 수채화 마냥 아름다웠다..길량쪽에는 코스모스가 곱게 피였는데 바람에 하느작거린다.초가을 바람이 얼굴을 스쳐지나는데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나는 이 모든 아름다운 경물이 다 나를 위해 축복하느라고 마련되여있는것 같았다. 약 40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날것 같던 기분 은 진소재지에 들어서면서부터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진소재지 에는 큰길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비포장도로여서 자동차가 한번 지나가면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정보소에 이르니 경리가 마 중나와있었다. 내가 둘러보니 정보소라야 벽돌로 된 농가집 한 채, 문가에는 간판도 걸려있지 않아 사람이 마중나오지 않으면 찾을수조차 없었다. 차에서 내려 경리를 따라 집에 들어서니 약 20평방메터 되는 방에 책상 하나와 걸상 몇개가 놓여있었다. 어머니가 이런데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가고 물었더니 경리는 자료수집을 하는데 나와 같이 조선어와 한어에 능숙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경 리는 인젠 인재가 있어 일을 제대로 해나갈수 있게 되였다며 기 뻐했다. 그 말에 나는 드디여 쓸모있는 사람이 되였다고 생각하 였다. 기분이 금시 붕— 뜨는것만 같았다. 조건은 나빠도 일만 할수 있으면 좋았다. 월급은 한달에 500원인데 먼저 예약금 500원을 내야 한다고 했다. 예약 금을 내야 한다는 소리에 어머니는 주춤거리였다. 한평생 좋은 단위에서 사업해온 어머니는 이처럼 보잘것없는 정보소, 간판도 걸지 않은 단위가 눈에 찰리 만무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 기회를 포기할수 없었다. 내 성화에 못이겨 어머니는 예약금을 내고말았다. 숙소는 정보소에서 약 100메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한 농가 의 웃방을 세맡은것이였는데 벌써 한 처녀가 들어있었다. 거기 에 내 짐까지 들여놓으니 공간이 별로 남지 않아 잠자리가 비좁 을것 같았다. 어머니는 마음에 들지 않아 혀를 끌끌 찼다. 나는 그래도 괜 찮으니 여기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하겠다고 하였다. 어머니를 돌 려보내고나니 어쩐지 마음이 허전해졌다. 이튿날 나는 일찌기 일어나 밥을 지어먹은후 깨끗하게 차려 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출근하였다. 그제야 나는 이 작은 정보소에 젊은이 들이 여럿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일은 그들이 수집해온 정보들을 문자로 적어서 정리하 는것이였다. 정해주는 책상에 마주앉아 일을 시작하려니 아직은 아무 정보도 들어온것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나니 경리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 들은 한담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정 보소의 내막을 알게 되자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정보소가 세워 진지 1년이 넘도록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것이였다. 그들 이 낸 예약금으로 출장나가 수집했다는 정보는 아무데도 쓸데없 는것들이였다. 이를 어쩌나? 돈을 벌기는 고사하고 되려 500원의 예약금을 떼우게 생겼으니 어떻게 한담? 그렇다고 짐을 가득 챙겨가지고 왔는데 하루도 못 있고 돌아갈수는 없었다. 나는 사회에 진출하 는 첫시작부터 이런 일을 당할줄은 몰랐다. 진퇴량난이 된 나는 좀더 묵으면서 상황을 지켜보려 했다. 경리는 뭘 하느라고 바삐 도는지 코도 내밀지 않았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니 함께 들어있던 처녀가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이젠 더는 이곳에 있을 가치가 없으니 일찌감치 좋은 일 자리를 찾아 떠나겠다는것이였다. 나의 마음은 더구나 허전해졌 다. 그 처녀는 팔다리가 성하니 아무데로 가나 제 밥벌이를 착실 히 할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 경리가 몹시 괘씸해났다. 사업이 이 꼴이면 차라리 인원모집이나 하지 말거지, 별로 크게 할것처럼 사람을 모집해 와서는 이런 궁지에 처넣다니! 이튿날부터 나는 매일 할 일은 없지만  꼬박꼬박 출근하였다. 경리가 뭐 라고 흠집을 잡으며 월급을 주지 않을가봐 두려웠던것이다. 추 석을 앞두고 경리는 출장간다고 어디로 가버렸다. 안해와 자식 까지 다 데리고 가는품이 꼭 어디로 도망가는것 같았다. 하지만 설마 그러지야 않겠지 하고 내버려두었다. 경리가 없으니 다른 젊은이들도 다 가버리고 나 혼자만 빈집을 지키게 되였다. 하늘은 높고 해볕은 따갑다. 사위는 조용한데 나 혼자 빈집 에 앉아있노라니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손에 책을 쥐고 들여다 보려 해도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수 없었다. 주숙집에 돌아와보 니 경리의 누나가 와서 저녁을 짓고있었다. 경리가 가면서 나를 누나한테 부탁한 모양이였다. 그런것을 보면 나를 두고 도망간 것은 아닌것 같았다. 그런데 일주일, 열흘 지어 보름이 지나도 경리네 내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누나도 소식을 전혀 모르 고있었다. 그동안 집에서 가져온 쌀도 다 거덜이 나고 돈도 떨어지게 되였다. 급해맞은 나는 별수없이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 머니는 곧 단위의 차를 가지고 나를 데리러 왔다. 일하러 간다고 그럴듯하게 집을 떠났는데 불과 한달만에 월급은 고사하고 예약 금마저 떼우고 이 모양 이 꼴로 돌아가게 되니 아버지보고 또 뭐 라고 말해야 할가?! 나는 생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났다. 눈을 질끈 감고 집에 들어가니 생각밖으로 아버지는 아무 말 도 없었다. 속으로는 아마 나를 아무짝에도 못쓸 년이라고 코웃 을 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대로 예약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온것이 가슴 아팠다. 어머니는 그까짓걸 잃어버린 셈 치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교 훈을 섭취하고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다.  다행이 경리한테 주었던 예약금도 후에 한 착한분의 도움으로 받아왔다.  
34    10 리혼서류 댓글:  조회:1008  추천:0  2013-11-13
10   리혼서류   북경에서 돌아와 렬차에서 내리자 어머니는 빨리 집으로 가 자고 잡아 끌었다. 내가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집으로 들어 가니 아버지는 또 화를 내며 길길이 뛰였다. 다투던 끝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리혼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어머니와 나는 생활필수품만 챙겨가지고 이튿날 어머니의 사무 실로 옮겨갔다. 사무실에서 살림을 한다는것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사무실에 주방시설이 없으니 때시걱을 끓이는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옷을 씻기도 불편하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나보고 공부만 잘하면 되니 다른건 관계치 말라고 했다. 어머니 단위의 사람들도 령도로부터 일반직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를 도와나섰다. 침대를 가져다주는 사람, 칼판을 만들 어주는 사람… 누구 하나 비웃는 사람이 없이 다들 리해해주고 지지해주었다. 그들은 나보고 공부하는것은 죄가 아니라고 하면 서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꼭 공부를 잘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들의 다함없는 지지를 받으면서 나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였다.  학교 에서 정해준 《레미제라블》(悲惨世界),《외제니와 그랑데》(欧叶妮与 葛朗台),《홍루몽》(红楼梦),《사세동당》(四世同堂) 등 몇십권에 달하는 국내외명작들을 통독하였다. 좋은 작품들은 나의 견식을 넓혀주었을뿐더러 수양을 높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나는 은근히 아버지를 걱정하였다. 한손밖에 없는 아버 지가 때시걱을 제대로 끓여자시기나 하는지… 나와 어머니는 동 생이 아버지를 좀 도와주기를 은근히 바랐는데 웬걸, 동생은 늘 우리한테로 와 함께 식사를 하군 하였다. 언니는 결혼하여 따로 살림을 하기에 아버지를 돕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근심은 하면서도 한번 좀 혼쭐이 나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웬만한 일에는 동네가 시끄럽다고 양보만 하던 어머니 가 이번엔 큰 결심을 내리고 집을 나온것이였다. 자식의 전도를 위하여 자기의 안락한 생활을 서슴없이 버리고 나온 어머니의 그 마음에 나는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가정에서의 세대주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마치 배의 선장처림 옳바른 방향으로 자기 가족들을 이끌어나가야 하는데 세대주라고 모두 그런 능력을 가지고있는것은 결코 아니였다. 물론 그 아버지에 그 딸인지라 나는 웬간해서는 무릎을 꿇 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때문에 리혼한다는데도 물러서지 않았으니 나의 고집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아버지가 계속 고집을 꺾지 않자 석달후에 어머니는 법원에 가 기소장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나보고 기소문을 쓰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리혼해야 하는 리유를 두장에 꽉 박아 썼다. 하지만 나의 기분은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부모의 리혼서 류를 쓰는 자식이 있다면 나를 빼고 또 어디에 있을가? 실로 한 심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튿날 어머니는 기소장을 가지고 법원으로 갔다. 법원에서 는 인차 리혼신청을 접수하였다. 어머니는 그날 저녁으로 아버지 를 찾아가 리혼서류를 내보이였다. 리혼서류를 본 아버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번져질줄을 몰랐던지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며칠후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 마주앉게 되였다. 이모네들도 와있었다. 어머니는 긴 말이 없이 두가지 요구를 제기했 다. 첫째로는 나를 계속 공부시키는 것이고 둘째로는 어머니가 출 장을 마음대로 다니게 해달라는것이였다. 이 두가지만 동의하면 다시 들어와 살림을 하겠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출장을 다니는데 불만이 컸던것이다. 그 당시 환경보호국에서 유일한 고급공정사였던 어머니는 새로운 연구과제가 있으면 늘 단위의 기술일군들을 이끌고 출장 다녀야 했다. 그때면 어머니는 늘 난처해하였다. 출장을 가자니 아버지가 화를 내고 가지 않자니 일에 지장이 있었던것이다. 언제나 안해와 자식들 앞에서 최고통치자였던 아버지가 이 두가지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양보할수 있을가? 아무리 따 져보아도 불가능할것 같았다. 이날 어머니는  퍽 늦어서야 돌아왔다. 어떻게 되였는 가고 물었더니 이모네가 집중공격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그 두가지 조건을 다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정말 상상도 못할 결과 였다. 하지만 나는 믿기 어려웠다. 계속 행패질로 나와 어머니를 다스려온 아버지인데 말로 받아들인다고 실제행동에 옮 길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어머니가 큰마음 먹고 집에서 뛰쳐나왔는데 이제 다시 들어 갔다가 아버지가 그간의 복수를 더 잔인한 수단으로 하는 날이 면 더 처참해질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보고 아버지의 몇 마디 감언리설에 넘어가지 말고 좀더 생각해보자고 하였다. 어 머니는 괜찮을것이라며 한번만 더 믿어보자고 했다. 이모들앞에 서 굳게 다짐하였는데 쉽게 실언할수 있겠는가? 내가 공 부하는것을 아버지가 동의했는데 또 무슨 리유로 계속 갈라져 살겠는가고 했다.하여 어머니가 먼저 집에 들어가고 나는 두달 동안 어머니의 사무실에 더 머물러있으면서 열심 히 공부하고 시험까지 본 다음 집에 가기로 하였다. 공부하 는 동안 될수록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내가 연변대학에 가서 시험도 치고 수업도 받은후 집에 돌아 오니 아버지는 약속대로 더는 내가 공부하는것을 반대하지 않았 다. 하지만 나는 속이 여전히 편안하지 않았다. 집을 나설 때는 자기절로 독립하리라 다지며 나갔는데 또 원모습대로 기여들어 왔으니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  
33    9. 장애인복리기금회를 찾아서 댓글:  조회:1056  추천:0  2013-11-11
 장애인복리기금회를 찾아서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났다.일년이 되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가만 놓아둘가? 용서하지 않으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용서를하든 안하든 어머니는 기어이 집으로 돌아오란다. 어머니의 말을 종래로 거역해본적이 없는 나는 먼저 집에 돌아가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유관부문을 찾아가 일자리를 해결해보리라 마음먹었다.지방에서는 여태껏 기다리라고만 하니 이번에는 상급에 찾아가 보리라. 몇해전에 나는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장애인들을 위한 잡지 을 주문해본적이 있었다.이잡지를 통하여 나는 전국장애자기금회라는 부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고 또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들을 위하여 어떠한 정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란주대학에 계시는 谷祖刚교수님도 북경에 가면 늘 유관되는 자료들을 보내주군 하였다.나는 이런 자료들을 통하여 당과 중앙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느끼게 되였는데 유감스러운것은 좋은 정책은 우리 지방에까지 실행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났다. 하여 나는 직접 북경에 있는 장애인 복리기금회에 찾아가볼 생각이 났다.혹시 기금회에서 학비라도 대주어 학업을 순조롭게 마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만 되면 아버지께서도 할말이 없게 되지 않겠는가.어쨌든 하던 공부는 끝마쳐야 되겠는데 아버지께서 너무도 반대하니 계속 피해다니기도 힘들고 또 맞서서 싸우자니 나도 두려움부터 앞서는 것이였다.지프라기라도 잡아야 할 처지이니 백분의 일의 희망밖에 없다 해도 노력은 해봐야 하는것이다.나는 내 생각이 옳든 그르든 어머니와 상의 해봐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항상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지지해주는 어머니는 나의 원을 꺼주는 셈치고 그것도 같이 길을 떠나자고 한다.나혼자 떠나 보내고는 도저히 시름을 놓을수 없단다.마침 어머니의 단위에서 북경에 볼일이 생겼는데 어머니보고 갔다오라고 하였단다.단위에서도 어머니를 봐주어 일부러 보내는 것이였다.참 고마운 분들이였다. 그해 8월22일 때는 무더위가 지속되는 한여름인지라 기치안에는 말못할 지경이지만 겨우 참아서 북경역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7시경이 되였다.그때는 북경직행이 없어서 아침에 천진에서 내려서 온 하루 돌다가 다시 저녁차를 타고 북경에 온것이다. 이튿날 아침식사를 마친후 어머니가 함께 따라나서려는것을 내가 극구 말렸다. 하여 어머니는 단위의 일을 보러 떠나고 나 혼자 휠체어를 타고 건국문외대로에 있는 전국장애인복리기금 회로 찾아갔다. 나는 국가급장애인복리기금회인만큼 으리으리한 큰 빌딩에 서 사무를 볼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뜻밖에도 아주 평범한 사 합원(四合院)이였다. 키가 훤칠한 40대의 남성이 나를 접대실로 안내하였다. 나는 그가 내가 찾아온 사연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려니 했다. 그런데 그는 앉을념도 없이 서랍에서 등록표를 꺼내주면서 요구 사항을 자세히 적어넣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훌 나가버렸다. 내가 등록표를 들여다보니 여태까지 무수히 써왔던 등록표 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성명, 년령, 민족, 성별외에 찾아온 사람 의 원적, 현재 살고있는 지역 등을 적는 란이 많았다. 이 등록표 에서 찾아온 리유를 쓰는 란이 제일 중요하겠지만 공간이 어찌 나 작은지 몇마디 밖에 써넣을수 없었다. 나는 열심히 다 적어놓고 조용히 기다렸다. 한시간쯤 지났을 때 아까 그 사무원이 들어오며 물었다. “다 적었습니까?” “네.” 그는 내가 적은 등록표를 대충 훑어보더니 무슨 일로 그 먼 곳에서 찾아왔는가고 물었다. 인제야 속마음을 풀어놓을수 있겠 다싶어 말머리를 떼려는데 그 사람은 시간이 바쁘다면서 간추려 서 이야기하라고 했다. 나의 마음은 대뜸 얼어드는것 같았다. 자 세하게 준비해두었던 말들을 한마디도 못하고 생활이 곤난해서 왔으니 좀 도와달라는 말만 겨우 하였다. 그는 나의 아래우를 눈여겨 살펴보았다. 나는 그의 반응만 살피였다. 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다. “젊은이, 생활이 어렵다는건 리해되지만 전국에 동무보다 더 곤난한 사람이 몇백만명이나 되오. 만약 그들이 다 동무처럼 북 경으로 찾아온다면 무슨 판국이 되겠소. 문제가 있으면 될수록 지방에서 해결해야 하오. 내가 글쪽지를 써줄테니 돌아가서 본 지방의 령도를 찾아가오.”말을 마치고 나가더니 얼마 안지나 그가 다시 들어올때는 손에 편지봉투를 쥐고 있었다. 그는 그봉투를 나한테 넘겨 주면서 그것을 시 령도들 한테 보여주면 나의 곤난을 해결해줄것이란다. 나는 더 말하고싶지 않았다. 나는 속에서 무엇이 울걱 올리미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감사하다는 말을 간단히 남려놓고 나와 버렸다. 불이나케 려관에 돌아온 나는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수가 없었다 저녁무렵에 어머니는 단위일을 다 보고 돌아왔다. 그는 울 어서 팅팅 부은 나의 얼굴을 보더니 대뜸 나를 안아주면서 달래 였다. “일이 되든 안되든 시원히 와서 네 속을 풀었으면 됐다. 전국 에 너 같은 장애인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어떻게 일이 소원대로 되겠느냐? 괜찮다. 어쨌든 어머니가 있는 한 입을 근심, 먹을 근 심을 할 필요가 없으니 하던 공부나 마저 해놓고보자. 애를 쓰느 라면 일이 풀릴 때가 있겠지. 우리 돌아가자. 공부를 열심히 해 서 졸업증부터 따놓고보자. 응?” 온 하루 기분이 잡쳐 우울해있던 나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약간 기분이 개운해지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의 말대로 돌아가서 하던 공부나 끝마치고 다시 보자. 누구에게도 의탁할것이 없이 자기절로 일어서야 한다. 한편 나는 이젠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할 필요성을 그 어느때 보다도 긴박하게 느꼈다.
32    8 시골 아주버니네 집 댓글:  조회:1301  추천:0  2013-11-06
8 시골 아주버니네 집   어느덧 넉달이 지나 학교에서 수업통지서가 왔다. 나는 아쉬 운 마음으로 “쑈왕”네 집을 떠나 연길로 갔다. 연길 이모네 집에 머무르며 시험도 치르고 집중수업도 마친 나는 또 갈 곳이 궁해 졌다. 그러던 어느날, 이모네 집에 5촌아주버니가 찾아왔다. 그는 나의 어머니의 4촌동생이였는데 옛날부터 가까이 지내다보니 정분이 깊었다. 그는 비록 지식이 적고 농촌에서 평생을 보낸분 이지만 사리가 밝고 동정심이 강하였다. 그는 우리 집에 오면 늘 나를 여러모로 배려해주군 하였다. 나의 상황을 알게 된 그 아주버니는 나더러 자기 집으로 놀 러 오라고 했다. 농촌은 산 좋고 물 좋고 공기가 좋으니 소풍도 할겸 한번 오라는것이였다. 가뜩이나 갈 곳이 없어 고민이던 나 는 눈앞이 환해지는것 같았다. 며칠후, 나는 어머니한테 알리고 길을 떠났다. 휠체어를 갖 고 화룡시 팔가자역에 이른 나는 서성진 모 촌에 있다는 아주버 니네 집으로 향했다. 길이 울퉁불퉁하여 책 한꾸레미를 실은채 휠체어를 타고 간다는것이 아주 힘들었다. 때는 2월 중순이라 날씨가 꽤 추웠지만 나는 땀에 옷이 흠뻑 젖어들었다. 한참 휠체어를 몰고 가는데 해란강이 앞을 가로막 았다. 스스로 강뚝을 오를수 없게 된 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 다리는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나저제나하고 기다려도 사람 의 그림자조차 언뜰거리지 않았다. 오래동안 움직이지 않고 기 다렸더니 땀에 젖었던 옷이 차거워지면서 온몸이 선뜩해났다. 문득 저쪽에서 손잡이뜨락또르소리가 “퉁퉁퉁…” 들려왔다. 나는 은인이라도 만난듯 그들을 향해 마구 손을 저었다. 손잡이뜨락또르에 있던 두 사람은 인차 차에서 뛰여내려 나 한테로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한족이였다. 내가 해란강을 건너 가려 한다고 하니 제꺽 내가 앉은 휠체어를 밀어서 강뚝에 올랐 다. 두 농민은 내가 강을 건너는것이 근심스러웠던지 아예 강 맞 은켠 큰길까지 밀어다주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고마와 그들한테 연신 인사를 올렸다. 그들은 이제도 20여리를 더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갈길을 다그 쳤다. 해가 짧기에 자칫하다간 어둡기전에 찾아들어갈것 같지 못했다. 나는 두손으로 내처 휠체어를 몰았다. 둬시간 지나서 한 마 을이 앞에 나타났다. 드디여 안도의 숨이 나왔다. 마침 한 농민 이 마주오기에 물어보았더니 그만 그 마을을 지나왔다고 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나를 의아스럽게 바라보던 그 농민 은 뉘 집을 찾는가고 물었다. 내가 이름을 대니 그는 아주버니와 아주 익숙한 사이라면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였다. 촌사람 들은 성실하고 열정적이여서 참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 농민아 저씨를 따라 한참 휠체어를 몰아서야 웬 기와집앞에 이르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주버니는 집에 없고 아주머니와 두 녀동 생이 있었다. 사실 나는 아주머니와는 면목이 있지만 두 녀동생 과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멀리 시가지에서 왔다고 나를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아주버니가 돌아왔다. 아주버니는 인차 나에게 웃방을 내주면서 공부를 잘하라고 하였다. 나는 시름이 훌 놓이였다. 잠시나마 마음놓고 공부를 할수 있는것만으로도 만족이였다. 아주버니네는 대가정이였다. 아들 넷에 딸이 둘이였다. 가정 을 이룬 두 아들내외에 손자 셋 그리고 아직 성가하지 않은 딸 둘, 중학교에 다니는 막내아들, 나까지 합쳐 십여명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는 실로 굉장했다. 숨막히게 갑갑한 환경속에서 자란 나는 처음에는 아주버니 네 집의 왁자지껄하는 분위기에 잘 적응되지 못했다. 하지만 시 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이들의 화기애애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속 에 푹 빠져버렸다. 모내기철이 되였다. 아주버니네는 그 많은 식구들이 아침 일 찍부터 일제히 논에 나가 일하고 저녁늦게야 돌아왔다. 나는 어 려서부터 농촌에서는 모내기철에 고양이손도 빌려쓴다는 말을 들어왔는데 아주버니네 집에 와서야 그 뜻을 실감하게 되였다. 이 바쁜 철에 나는 공부를 한다고 그냥 앉아만 있을수 없었 다. 나는 바깥일을 할수 없으니 집안일을 하겠다고 자진해나섰 다. 설겆이는 물이 못 나게 할수 있으니깐. 아주머니는 미안해하 면서도 드바쁜 농망기인지라 승낙하였다. 이튿날부터 설겆이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끼니마다 먹는 반 찬은 한두가지이지만 식구가 하도 많으니 씻어야 할 그릇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하나하나 깨끗이 씻어서 차곡차곡 찬장에 얹 어놓고 찬장유리와 장판까지 알른알른하게 닦아놓았다. 그리고 는 집안 구석구석까지 싹싹 뒤지며 잘 정리해놓았다. 놀랍게도 양말짝들만 해도 큰 대야에 넘어났다. 나는 그것들을 깨끗이 씻 어서 짝을 무어 널어놓았다. 아주머니는 시집도 가지 않은 내가 집안일을 너무 잘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집에서도 늘 해 온 일이지만 의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나도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부심이 뿌듯이 안겨왔다. 아주머니가 칭찬할수록 나는 더 잘하려고 애썼다. 게다가 다 큰 처녀가 공부를 한답시고 남의 집에 와 페를 끼치는것이 미안 하여 무엇이든 더 돕고만싶었다. 마침 아주버니네 큰딸이 두달후에 결혼을 하는데 혼수품을 제대로 장만하지 못하여 아주머니와 큰딸이 여간만 속을 태우고 있는것이 아니였다. 큰딸은 뜨개질을 할줄 몰라서 남들이 다 가 져가는 꽃방석 하나도 뜨지 못했다고 하는것이였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서니 6촌동생은 더없이 기뻐했 다. 며칠후 6촌동생이 실과 뜨개바늘 그리고 견본을 가져왔다. 그런데 막상 뜨개감을 잡으니 공부를 제대로 할수 없어서 큰 걱 정이였다.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할수는 없을가고 고민하던 끝에 좋은 방 법을 생각해냈다. 내가 하는 공부는 한어전공이니 대부분 외우 는것이였다. 나는 교과서를 펼쳐놓고 중점부분에 밑줄을 그은후 뜨개질을 하는 한편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외웠다. 나는 꾸준히 손을 놀려 뜨개작품을 하나하나 완성하였다. 아 주버니네 집식구들은 물론 동네사람들도 나의 뜨개솜씨를 아낌 없이 칭찬해주었다. 그러자 생각밖으로 뜨개감이 많이 늘어났 다. 이미 시작한것을 다 뜨기도전에 벌써 그다음 일거리가 기다 리고있었다. 혼수품을 다 뜨니 또 세타를 떠달라고 했다. 나는 매일 하던 설겆이를 동생들한테 맡기고 뜨개질에만 전념하였다. 아주버니네 집에 넉달 머물러있는 동안 방석 세개, 베개 하 나, 세타 일곱개를 떴는데 마지막 세타는 채 뜨지 못하여 집에까 지 가지고 와서 다 뜬 다음 우편으로 부쳐보냈다. 나는 어렸을때 익힌 뜨개재간이 이렇게 은을 낼줄은 몰랐다. 한편 나는 공부도 열심히 하여 그해에 있은 고대한어시험에 서 반급의 1등이라는 성적을 올렸다. 참 사람이란 마음만 먹으 면 못해낼 일이 없는가보다. 그동안 나는 아주버니네 식구들과 두터운 감정을 쌓았다. 촌 수를 따지면 그들은 나의 5촌 아주버니와 아주머니, 6촌 오빠와 동생들이지만 전혀 거리감이 없이 가깝게 지냈다. 아주버니 집에서  넉달동안 긴장하고도 바쁘게 보냈지만 나의 일생에서 아름다운 추억들을 남기였다. 나는 아주버니와 그의 식구들 한테 한평생 감사를 드리고 싶다.나의 일생에서 제일 바뿐고비를 그집에서 보내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꼈으며 어려운 시기를 순리롭게 넘길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아주버니네 식구들은 몽땅 연길에 이사왔는데 아들딸은 모두 몇십만원 심지어 몇 백만원 장사로 되였지만 옛날에 그 소박하고 따뜻한 품성만은 그대로이다. 유감스러운것은 아주버니가 작년에 간암으로 세상을 뜬것이다.생전에 두번 찾아뵙기는 하였지만 좀만 더 앉아계셨더라면 나의 이글을 읽을수 있었겠는데 참 아쉽기 그지없다.
31    7 “쑈왕”네 집에 머물다 댓글:  조회:1378  추천:0  2013-11-04
7 “쑈왕”네 집에 머물다   요즈음 나에 대한 아버지의 감독이 더 심해진것 같았다. 사 업에 일관적으로 열중하는 아버지는 종래로 출근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요 며칠은 어쩐지 중도에 자꾸 집 에 들리군 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출근하면 책을 꺼내놓고 공부 했는데 아버지가 어느때 들이닥칠지 몰라 늘 간이 콩알만해있었 다. 책을 보면서도 바깥동정에 신경을 쓰군 하였다. 아버지가 현 관문을 열기만 하면 제꺽 책을 치워야 했다. 한집에서 한가마밥 을 먹으며 이런 비밀을 얼마동안 지킬수 있을지… 아니나다를가 아버지는 언녕 눈치를 채고있었다. 그는 내가 어디에 책을 감추고있는것까지 다 알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내가 바깥화장실에 갔다오니 복도에 화분통이 깨여져 널 려있었다. 아버지가 냅다 뿌린것이 틀림없었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가슴을 조이는데 아버지가 재가 가득 담긴 그릇을 들고 주 방에서 나오는것이였다. 나의 책을 태워버린것이 분명했다.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혀를 홀 랑 내밀어보이였다. 모든것이 탄로났다는 뜻이였다. 재를 버리고 돌아온 아버지는 아침 내내 말이 없었다. 아버 지가 출근한 뒤 나는 어머니한테 물었다. “책이 많이 없어졌어요. 어떻게 할가요?” “그래도 하던 공부야 마쳐야지. 책은 내가 연변대학에 가 사 오면 되니까 너의 결심에 달렸다. 어쨌든 공부는 한 시기이다.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너만 결심이 있으면 나는 끝까지 지 지해줄거다. 어쩔래? 계속 할래, 그만둘래?” “공부는 그냥 하고싶은데 아버지가 너무 못살게 구니 정말 힘들어요.” 나는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괜찮을거다. 사람이 사느라면 별일을 다 겪기 마련인데 이 만한 곤난은 아무것도 아니다. 결심만 있으면 두려울게 없다.” “그래도 나는 이젠 더는 이렇게 보내기 싫어요. 공부해도 집 에서 하지 않고 다른데로 갈거예요.” “너 이 몸을 해가지고 가기는 어디로 간단 말이냐? 아버지가 욕하든 말든 너는 그저 죽었다 하고 대꾸도 하지 말고 네가 할 공부만 하거라.” 어머니는 역시 그 말씀이였다. “공부를 하자면 마음이 편안해야 하는데 이 집에서는 그게 불가능한 일이니 어쩔수 없지요.” “글쎄, 정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거라. 맞받아 엇서기보다 피 하는것이 방법일수도 있으니 네가 먼저 어디에 가서 자리를 잡 거라. 생활비는 내가 대줄테니…” 어머니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한쪽은 이길수 없는 남편이고 한쪽은 사랑하는 딸이니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사실 어머니도 내가 공부를 해서 출세하기를 바라서가 아니였다. 단지 딸이 하 도 하고싶어하기에 부모로서 자식의 원을 꺼주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의 지지가 있으니 나는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어 디로 갈지 목적지는 없었지만 나는 먼저 책을 한꾸레미 싸가지 고 근심에 찬 어머니의 얼굴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집을 나섰다. 초가을의 하늘은 한없이 높고 푸르렀다. 재글재글한 해볕도 아주 따스하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에 태여나기는 하였지만 나의 신세는 너무나도 가냘팠다. 잘못 태여나 별 고생을 다한다 는 생각에 설음이 울컥 갈마들었다. 안신처를 찾지 못해 망설이던 나는 한 친구의 집으로 향했 다. 그녀는 왕려영이라고 부르는 한족친구였는데 내가 13살 때 면목을 익혀서 이날이때까지 사귀여오던 친구였다.그는 비록 민족은 다르지만 마음이 착해 늘 나를 도와주군 하였다. 그녀도 나처럼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경하여 걸어다니는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의 어머니도 나를 언제나 자기 딸처럼 살뜰하게 대해주었다. 마침 “쑈왕”과 그의 어머니가 집에 있었다. “쑈왕”은 두 녀동 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질대에서 사업하였는데 해마다 봄이 되면 탐사하러 나갔다가 추운 겨울이 되여야 돌아 오군 하였다. 내가 책꾸레미를 가지고 들어선것을 보자 “쑈왕”의 어머니 가 관심조로 물었다. “책을 우리 집에 두는것은 별문제인데 몸둘데는 있냐?” “연길에 있는 사촌오빠네 집으로 가려 해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정처없이 떠나가려는 내가 못내 걱정스러웠던지 “쑈왕”의 어머니는 한참이나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몸이 불편한데 그리로 어떻게 가겠느냐. 네가 꺼리지 않 는다면 우리 집에 머물러있거라.” 순간 나는 눈물이 나도록 고마왔다. 사실 말이 친척집이라지 만 거동이 불편한 내가 어디에 간들 눈치밥을 먹지 않겠는가. 나 는 눈물을 머금은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나는 곧 공중전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나의 말을 듣고 어머니도 시름을 놓을수 있게 되였다며 아주 기뻐하였다. 이튿날, 어머니는 나의 옷가지들을 챙겨가지고 찾아왔다. 그리 고 생활비도 “쑈왕”의 어머니한테 드리였다. “쑈왕”의 어머니는 딸과 마찬가지로 나를 잘 돌봐주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이 고마운분앞에서 드디여 참고참았던 눈물을 쏟고말았다. 똑같은 장애인딸을 둔 두 어머 니는 오래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많이 다녀 익숙해진 “쑈왕”의 집이라 마음이 편하였다. 밥을 먹고나면 다들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느라고 인차 집을 나섰다. 그러면 나는 곧 책상에 마주앉아 책을 펼쳐들었다. “쑈왕”의 어머니는 그 당시 가두주임이였는데 매일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쑈왕”의 어머니는 나의 학습에 지 장을 줄가봐 나를 제일 안방에서 공부하게 했으며 누구도 얼씬 하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친척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쑈왕”의 어머니는 학교를 몇년 다니지 못한분이였다. 하지 만 그는 지식의 힘을 잘 알고있었다. 평소에 내가 아버지에게 쫓 겨나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면 그는 언제나 나보고 장애인자식 을 키우자면 얼마나 속이 타는지 모른다며 아버지를 리해하라고 일깨워주군 하였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끝까지 해야 한다고 격 려해주었다. 추운 겨울이 되였다. “쑈왕”네 집은 지질대의 주택구역에 있 었는데 몇십호 되는 주민들이 단 하나의 공동변소를 사용하고있 었다. 게다가 집집마다 하수도시설이 없다보니 더러운 물을 모 두 공동변소에 버리군 하였다. 하여 변소출입구에는 두터운 얼 음이 깔려 아주 조심스레 걸어다녀야 했다. 나에게는 매일 그 변 소를 드나드는 일이 큰 난제였다. 어느날 아침, “쑈왕”의 어머니는 변소에 갔다오더니 나보고 다시는 그 변소로 가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면서 마당 한구 석에 간이변소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나는 이런 고마운분들을 위해서라도 공부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밀물처 럼 갈마들었다. 나는 지금도 “쑈왕”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쑈왕”의 어머니 와 사이 좋게 지낸다. 2011년 6월에 “쑈왕”의 어머니는 환갑잔 치를 치렀다. 20여년전보다 훨씬 늙어보이는 “쑈왕”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가슴이 무척 아팠다. 마음씨 착한 “쑈왕” 의 어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계셨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 고 또 바랐다.
30    6 집중수업 댓글:  조회:1252  추천:0  2013-10-31
6 집중수업   나에게 있어서 1년에 두번씩 받는 집중수업은 간고하면서도 제일 유쾌한 시간이였다. 주숙은 마음대로 정하였는데 나는 이모네 집에 들기도 하고 연변대학 기숙사에 들기도 했다. 기숙사에 들면 거리가 가까운 건 좋은데 너무 추운것이 탈이였다. 아침 6시경에 일어나면 나 는 지팽이소리에 다른 학생들이 깨여날가봐 숨을 죽이고 살금살 금 걸어나왔다. 세면실에 가서 대충 고양이세수를 하고 치솔질 을 하지만 물이 너무 차서 이발이 떨어져나가는것만 같았다. 다른 학생들은 보이라실에 가서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떠다 가 따뜻하게 씻을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그들한 테 부탁하면 물론 도와나서겠지만 나는 이런것까지 그들한테 부 담을 주고싶지 않았다. 세수하느라고 얼어든 손은 아침에 친구 들이 떠다주는 죽사발에 대고 녹이였다.  아침에는 학교로 올라가는 길이 가파로와 별수없이 그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저녁에 내려올 때는 나절로 내려왔다. 친구들 이 길이 가파로와 위험하다며 함께 내려가자고 해도 나는 번마 다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수업후였다. 남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제일 마지막에 교실에서 나온 나는 인차 휠체어에 올랐다. 나는 브레이크가 고 장난줄도 모르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가파로운 언덕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휠체어가 쏜살같이 미끄러져내려가는 것이였 다. 아무리 급정거하려 해도 도무지 정차할수가 없었다. 학교문 을 나서면 곧 큰길이였다. 급해맞은 나는 방향을 확 돌리며 길녘 의 가로수 한그루를 꽉 잡았다. 순간 나는 가로수밑에 떨어지고 휠체어는 저만치 뿌리워나갔다. 책이며 지팽이며 모두 뿌리워나 가 여기저기에 널려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너무 놀라 혀를 끌끌 찼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나 휠체어에 오른 나는 스스로도 섬찍해났다. 큰 사고가 생기지 않은것만 해도 실로 천 만다행이였다. 이모네 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수업은 멀리 북대구역에 있 는 연길시교원연수학교에서 진행하였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돌 아오는 길에 웬 일인지 휠체어가 무겁기 그지없었다. 안깐힘을 다 써서 휠체어를 움직여갔건만 바퀴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영 문을 몰라 돌아보는데 뒤에서 오던 두 군인이 바퀴에 바람이 없 다고 알려주는것이였다. 그제야 고무바퀴를 손으로 눌러보니 물렁물렁했다.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휘둘러보아도 수리부간판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이때 그 두 군인은 자전거수리부를 찾아주겠다며 선뜻이 휠 체어를 밀어주는것이였다. 때는 한겨울이라 날씨가 아주 매서웠다. 원 래 추위를 잘 타는 나는 움직이지 않으니 온몸이 얼어들어 덜덜 떨리였다. 두 군인은 나를 밀고 한 골목길에 자리잡은 자전거수리부앞 까지 갔다. 수리부아저씨는 내 휠체어를 보더니 단순히 바람을 넣어 풀릴 문제가 아니라며 고무바퀴를 아예 벗겨보는것이였다. 아니나다를가 구멍이 두개나 나있었다. 수리부아저씨가 바퀴를 땜질하는 사이에 두 군인은 나를 난 로옆에 앉혀 몸을 녹이게 하였다. 그리고는 난로우에 놓인 물주 전자의 뜨거운 물까지 따라주는것이였다. 순간 나는 가슴이 후 끈후끈해났다. 휠체어를 다 손질하자 두 군인은 내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을 새도 없이 수리비를 대신 지불해주었다. 나는 그들의 소행이 너 무도 고마와 이름과 주소를 물었다. 나의 극성에 그들은 이름과 주소는 알려주면서도 절대 부대에 알리지 말라고 거듭 부탁하 는것이였다. 그후 나는 그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보냈다. 그들 과 같은 착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다는것이 나와 같은 장애인 에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나는 무슨 복을 타고난 사람인지 어디에 가나 늘 이렇게 고마운분들을 만 나 어려운 고비를 넘기군 하였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나의 머리 속에서는 늘 살고싶은 마음이 죽고싶은 마음을 눌러버리군 하 였다. 학교에서도 나의 사정을 알고 될수록 편리를 도모해주려고 애썼다. 나한테는 층계를 오르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학교에서 는 나를 고려해 우리 반 교실을 늘 아래층에 배치해주었다. 한번 은 학교에서 배치해준 교실이 대문 가까이에 있어 너무 춥다고 우리 반 학생들이 학교측에 제기하였다. 학교에서는 인차 우리 반을 다른 교실로 옮겨가게 하였다. 휴식시간이거나 다른 시간 을 타 옮겨가면 좋으련만 수업을 시작하려다가 불시로 옮겨가는 바람에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영향을 끼치기 싫어 그 자리에 있 다가 다음 시간에 옮겨가려 하였다. 그런데 한 학생이 달려와 선생님이 강의를 하지 않고 나를 기다린다고 알렸다. 나는 급해났지만 내가 자리를 옮기려면 한 참 시간이 걸리기에 나를 기다리지 말고 빨리 수업을 시작하라 고 선생님한테 전달하게 하였다. 새로 배치받은 교실에 이른 내 가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몇십쌍의 눈길이 일제히 나한테 로 쏠리였다. 나는 지팽이를 짚고 겨우 걷는 나의 모습을 그 많은 학생들 에게 보이게 된것이 더없이 원통스러웠다.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목에 둘렀던 목수건으로 얼굴을 가 리우고 한시간 동안 내내 울었다. 물론 선생님의 강의도 제대로 듣지 못하였다. 휴식시간이 되자 나의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위로의 말을 건 넸다. 전 반 학생들이 다 당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데 당신의 모습을 보고 웃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그는 평소에 나와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면서 나의 심정을 얼마간 리해하고있는 친구였다. 하긴 그랬다. 신체장애가 무슨 수치라고 내가 이렇게 남들앞에 내 모습을 드러내기 꺼려해야 하는가. 내가 아무리 남들한테 걷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 써도 그들은 벌써 나의 상황을 다 알고있는데… 단지 그들은 나 의 자존심을 건드릴가봐 내색을 하지 않고있다는것을 내가 모르 고있을뿐이였다. 대학교 2학년 첫 학기의 어느 습작시간에 있은 일이다. 선생 님은 초상묘사를 한 작문을 짓게 하였는데 서로 익숙히 지내는 한 반 친구를 생동하게 묘사하라는것이였다. 한 학생은 작문을 재빨리 써서 선생님한테 바치였다. 선생님 은 직접 검사하지 않고 그 학생더러 자기 작문을 전 반 학생들앞 에서 읽게 하였다. 일어서는것을 보니 화룡에서 온 학생이였다. 평소에 나는 그와 한번도 말을 건네본적이 없었다. 그는 작문을 읽기전에 당사자의 허락없이 이 글을 써서 미안하다고 량해부터 구하였다. 나는 누구를 썼길래 저렇게 신비하게 서두를 떼는것일가고 궁금해했다. 그런데 그가 읽는 내용을 들으니 나를 상 대로 묘사한것이였다.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나의 옷단장이며 머리모양이며 걷는 모습 지어는 내가 층계를 오를 때의 자세까지 세심하게 관찰하였던것이다. 비록 장애인이면서도 계속 학습을 견지하는 나한테서 감동을 받았다 는 내용의 글이였지만 어쩌면 내가 그토록 나의 모습을 감추려 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너무나 상세하게 알만큼 다 알 고있었던것이다. 그가 작문을 다 읽자 모두들 교실이 떠나갈듯 박수갈채를 보내주었다. 그때까지 습작선생님은 내가 장애인인줄을 모르고있었다. 그번 작문을 통해 알게 되였다며 너무 장하다고 나를 연신 칭찬 하는것이였다. 일주일씩 수업을 하면서도 내가 장애인인줄을 모 르는 선생님은 습작선생님뿐이 아니였다. 그날 점심, 연길에 있는 한 학생이 나를 보고 기어이 자기 집 으로 가자고 이끌었다. 나는 거동이 불편해서 가지 않겠다고 고 집을 부렸다. 그런데 그녀는 벌써 부모님한테 말해놓았기에 음 식을 해놓고 기다린다는것이였다. 나는 별수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추운 겨울이라 바깥에는 북 풍이 윙윙 휘몰아쳤다. 간신히 휠체어를 타고 그녀의 집에 들어 서니 따뜻한 화기가 온몸을 휩쌌다. 그의 부모님은 명태국을 뜨 끈뜨끈하게 끓여놓고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나를 맞이하며 온돌에 앉히고는 밥상을 차려주었다. 나는 그날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맛있는 명태국을 먹는것 같았다. 얼었던 몸도 대번에 녹아내리는것 같았다. 이튿날 오전수업을 마치고 교실에 혼자 앉아있는데 점심식 사하러 갔던 조선어문선생님이 황급히 들어오시더니 나한테로 다가와 이것저것 관심조로 물었다. “어떻게 되여 다리를 못쓰게 됐어요?” “소아마비에 걸려 두다리를 다 못씁니다. 허리도 잘 쓰지 못 하기에 오래 앉아있기도 힘듭니다.” “아 참, 아까운 사람인데… 쯧쯧. 그런데 난 왜 이때까지 못 알아봤을가?” “내색을 하지 않으니 모를수 밖에요. 무슨 큰 자랑거리도 아 닌데 드러내놓고 다니겠습니까?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데요?” “내가 오늘 출판사에 있는 친구네 집에 갔다가 들었어요. 어 제 학생도 그 집에 갔댔다면서?” “녜?” 그제야 나는 그 동창생의 아버지가 출판사에서 일을 본다는 걸 알았다. 선생님은 장애인이라고 위축받지 말고 꼭 공부를 잘해서 사 회에 유용한 사람이 되라고 고무격려해주었다. 나는 공부를 하 면서도 내가 공부하는 일로 집에 불화도 많고 나 자신도 퍽 고생 스러우니 마음이 흔들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하지만 이 순 간 배움의 결의를 더 굳건히 다지게 되였다.
29    5 시체장애가 무슨 수치라고 댓글:  조회:1040  추천:0  2013-10-29
5   시체장애가 무슨 수치라고   나는 혼자 집에 들어갈 용기가 없어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 머니는 몇달만에 만난 딸을 아주 반가와하며 맞았다. 나는 아버 지가 계시는데 집으로 들어가도 괜찮은가고 물었다. “괜찮을거야. 미우나 고우나 친딸인데 무슨 원쑤라고 끝없이 미워하겠냐. 넌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니깐 너무 걱정하지 말어 라. 알겠니?” 어머니가 나를 달래주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어머니와 함께 집에 이르니 아무도 없었 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앉아있는데 한참 지나서 아버지가 들 어섰다. 나는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심장이 쿵쿵 뛰였다. 아버지는 나를 보더니 단번에 불을 토했다. “왜 왔느냐? 너를 곱다고 받아주는 집이 없더냐? 너 자기절 로 살면서 대학공부를 얼마든지 한다더니 왜 돌아왔느냐? 그 꼬 락서니를 해가지고 대학교에 드나드는것이 부끄럽지도 않더냐? 가라! 빨리 나가라! 너 같은놈을 곱다할 사람이 많을테니까! 어 서 나가라는데 못 들었냐? 나는 너만 보면 눈에서 불이 인다!” 어머니는 옆에서 급히 아버지를 말렸다. “여보, 이러지 말아요. 걔가 가면 어데로 가겠어요?” “걷어치우오! 당신이 다 이렇게 만들어놓았소. 당신도 썩 물 러가오. 꼴보기 싫으니깐!” 나는 집에서 나와 휠체어에 앉았다. 집안에서 아버지가 고래 고래 소리지르며 어머니를 욕하는 말이 계속 들렸다. 울분이 한가슴 가득 치밀어올랐다. 더는 참아서는 안되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큰 죄를 범했다고 이렇게 쫓겨나야 하는가? 내가 뭐 나라의 법을 위반했는가? 아니면 집식구들의 얼굴에 먹칠을 했는가? 단지 나이 먹도록 취직도 못하고 시집도 못 가고 계속 부모곁을 떠나지 못한것밖에는 다른 죄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내탓인가? 누구는 뭐 자기노릇을 하기 싫 어서 이러는줄 아는가? 난 그 누구보다도 직업을 빨리 찾고 가정 도 일구어 이놈의 지옥 같은 집을 언녕 뛰쳐나가고싶었다. 그런 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그렇다고 집에서 내쫓으 면 뭐가 달라지는데? 자기 피를 타고난 딸이 뭐 남이라도 되는 건가?! 나는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올라 견딜수 없었다. 나는 집 안에 대고 난생처음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렇게 책임을 지지 않을거면 낳기는 왜 낳았어요? 차라리 죽여버릴거지… 나를 이 꼴로 키워놓고 무슨 큰일이라도 했다고 이 난리인가요?! 내가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것만 해도 좋은줄 알 아야지요. 내가 원해서 이 꼴이 된것도 아닌데 신체장애가 뭐 수 치인가요? 뭐 곱다고 하는 집이 있으면 가라구요? 당신이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놓고 누구한테 떠미는건가요? 나를 내쫓 고 어디 콱 잘살아보라구요!” 나는 너무도 화가 나서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어머니는 급기야 끌신을 신고 달려나와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니 떠들지 말라고 했다. 동네가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어머니는 자 꾸 말렸다. 내가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서 온몸을 바르르 떠는것 을 보고 어머니는 너무도 놀라 근처의 의사를 불러왔다. 다행히 별일이 없었다. 의사는 안정을 취하면 괜찮을것이라고 했다. 나는 집에 들어가 누웠다. 아버지도 더는 아무 말 없었다. 아무튼 한고비는 넘긴 셈이였다. 이튿날 아버지는 출근하면서 “너 공부는 절대 못한다. 학비 를 일전도 대주지 못하겠으니 그런줄 알아라.”라고 말하였다. 그 러니 남의 눈때문에 밥은 먹여주지만 공부는 안된다는것이였다. 나는 그저 잠자코 앉아만 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건 절대 아니였다. 나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 대로 학업만은 포기할수 없었다.  
28    4. 집을 뛰쳐나가다 댓글:  조회:1059  추천:0  2013-10-25
4. 집을 뛰쳐나가다   밸김에 집을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갈데가 없었다. 생각하던 끝에 나는 연길 이모네 집으로 갔다. 이모와 이모부는 모두 연 변대학의 교수인데 슬하에 자식 넷을 두고있었다. 자식들이 다 커서 한 구들 넘칠 지경이였는데 그중에는 신체가 허약하여 늘 약을 달고있는 환자도 있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앓는 자식의 병 시중을 드느라고 무척 바삐 보냈다. 그런데 나까지 찾아들어 페 를 끼치니 미안하기 그지없다. 하여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없나고 궁리하는데 사촌동생이 뜨개를 도와달라고 청구했다. 나는 대뜸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만한 일이라도 할게 생겼으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나는 낮에는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걔가 뜨다만 뜨개감을 들 고 부리나케 떠나갔다. 때론 밤 11시까지 뜨개를 떴다. 몇시간 내처 뜨개질을 하고나면 손목이 시큰해나고 목이 뻣뻣해났다. 그래도 이모네가 나를 받아주어서 고마왔고 또 이렇게라도 그들 을 도와줄수 있는것이 다행스럽고 기뻤다. 이모네 집에서 두달 가량 공부를 하고 여름방학이 되자 나는 학교에 가 시험을 치르고 집중수업도 받았다. 집중수업을 마친후 나는 새롭게 갈 곳을 찾으려 했다. 환자 가 있는 이모네 집에는 더 머물러있기 어려웠던것이다. 바로 이 때 두 사촌동생도 큰이모네 집으로 놀러 간다고 했다. 큰이모네 집은 화룡시의 한 시골에 있었다. 자식들이 모두 외지에 가있으 니 조용하여 공부하기가 좋을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따라가기 로 하였다. 우리는 곧 길을 떠났다. 렬차를 타고 팔가자에서 내린 우리 는 큰이모네 집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가없이 펼쳐진 논밭, 졸 졸 흐르는 개울물, 울퉁불퉁한 달구지길, 거무칙칙한 초가집 들… 모든것이 낯설면서도 정다와보이였다. 나는 공부를 많이 할 욕심으로 책을 많이 가지고 떠났다. 게 다가 사촌동생들의 짐까지 놓다보니 휠체어에 엉뎅이를 들이밀 기조차 어려웠다. 사촌동생들이 휠체어를 밀면서 약 30리 길을 걸어서야 큰이모네 집에 이르렀다. 기별없이 온 우리들을 보고 큰이모네는 놀라와하면서도 무 척 반갑게 맞아주었다. 말 그대로 큰이모네 집은 조용하였다. 사 촌동생들은 며칠 놀다가 돌아갔다. 집에는 큰이모와 큰이모부 그리고 그 집 막내딸밖에 없었다. 막내딸은 나보다 서너살 아래 인데 시내로 일하러 가려다가 내가 가니 동무해주느라고 물러앉 았다. 며칠후에 큰이모는 우리 집으로 떠났다. 나의 언니가 결혼식 을 하기에 도우러 간것이였다. 하나밖에 없는 언니의 결혼식에 나도 꼭 참가하고싶었지만 그렇게 할수 없는것이 실로 맹랑하고 유감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런것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나한 테는 학업이 위주였다. 나는 이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으면 남의 부담거리로 되지 않으려는 동생의 마음을 언니가 얼 마든지 리해하리라고 믿었다. 조용한 환경속에서 나는 공부를 실속있게 해나갔다. 학교에 서 지정해준 참고서적들도 마음껏 볼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게 다가 시골사람들은 도시사람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소박하고 인 정이 많아 나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듯싶었다. 나와 아무런 관 계가 없는 마을사람들도 나를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특히 사돈집에서는 약간 색다른 음식이 있어도 나한테 보내주군 하 였다. 하루는 큰이모부가 큰사돈네 집에 갔다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왔다. 그러면서 여기 물고기는 흙냄새가 난다고 했다. 이튿날아침, 물고기료리를 할 때 나는 책에서 본 방법대로 식초, 사탕가루, 술을 적당히 넣고 끓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흙냄새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담백하고 쫄깃쫄깃한것이 실로 별 맛이였다. 큰이모부는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온 마을에 다니 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보니 책은 확실히 훌륭한 스승이 였다. 조용하고도 안정된 환경속에서 공부를 할수 있어 너무나 기 뻤는데 갑자기 마을에 홍수가 진다고 란리였다. 며칠 련속 큰비 가 내리더니 도처에서 물사태가 터지고 다리가 끊어지고 길이 차단되였다. 큰이모네 집근처에는 저수지가 있었다. 이대로 계 속 비가 내리면 저수지수문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이모네 집뿐만아니라 온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된다는것이였다. 그러니 경보가 울리면 곧 근처의 산으로 피난가야 한다고 했다. 란리라도 이런 란리가 어디에 있을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에 마을에서 기별이 왔다. 저수지수 문을 곧 열어놓으니 빨리 산에 오르라는것이였다. 하늘에서는 계속 비가 내리고있었다. 큰이모부는 급히 소수레를 메우고는 빨리 중요한 물건들을 실으라고 재촉했다. 큰이모네 작은딸은 텔레비죤과 같은 기물들을 싣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나는 한보따리나 되는 책이 근심되였다. 하여 사촌동생더러 빨리 책꾸레미 를 소수레에 실어달라고 하였다. 사촌동생은 소수레에 귀중한 기물들도 다 싣지 못하겠는데 그까짓 책은 싣지 말자고 하였다. 나는 내가 앉지 못하더라도 책만은 꼭 실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사촌동생은 내키지 않아하면서도 할수없이 실어주었다. 소수레에 올망졸망 걷어싣고 산에 오르니 날이 훤히 밝기 시 작하였다. 산이라야 평지보다 좀 높아 언덕이라고 하는편이 더 적합할것 같았다. 주위는 온통 강냉이밭이였다. 우리는 비를 맞 아 물자루가 된채 산언덕에 서있었다. 약 세시간 가량 기다렸는데 홍수경보가 해제되였다. 나는 소 수레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산에 올랐다가 다시 돌아오니 집 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나는 책꾸레미를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슨 큰 인물이 되 겠다고 책꾸레미를 가지고 피난갔다왔는지 나로서도 모를 일이 였다. 이 일은 사촌동생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지금 도 나를 만날 때마다 그는 늘 이 일을 떠올리군 한다. 피난소동이 있은후 얼마 안되여 큰이모가 우리 집에서 혼사 를 끝내고 돌아왔다. 그는 나를 보자 푸념질하였다. “어이구, 넌 언제면 언니처럼 너울 쓰고 시집을 가겠느냐? 너 언니는 정말 행복하겠더라. 신랑이 시체옷들을 한 트렁크나 사 왔던데 죽을 때까지 입어도 다 못 입겠더라. 그런데 너는 한평생 치마도 못 입어보고 변변한 신발도 못 신어보게 생겼으니 얼마 나 원통하겠느냐.” 큰이모는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것을 누리지 못하는것 같아 가슴 아파하지만 나는 종래로 먹고 입는데 신경을 쓴적이 없었 다. 잘 먹고 잘 입는 생활이 싫어서가 아니다. 나에게는 그럴 시 간도 없거니와 조건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란 추구 가 있어야 하며 그에 앞서 우선 자급자족할수 있는 떳떳한 인간이 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때문에 나한테는 홀로서기가 급선무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엇서서 많은 고생을 겪었고 또 주위의 여론압력을 이겨나온것도 바로 나의 이 홀로서기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홀로서기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싶을 때가 많았 다. 이집저집 떠돌아다닌다는것이 정말 구차한 일이였다.그렇다고 아버지한테 큰소리를 쳐놓고 불과 몇달이 안되여 집으로 돌아간다는것은 더구나 안되는일이였다.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지 어머니한테 편지를 썼더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이만큼 오래 갈라져있었으니 아버지의 성질도 가라앉았을것이라고 했다. 큰이모네 집을 떠나기 전날, 나는 큰이모네 집앞에 나앉아 넓은 논밭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지금 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한번 점검해보았다. 도대체 내가 정말 옳 은짓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아버지와 근 20년 엇서서 하지 말라 는 공부를 기어이 하면서 주위사람들까지 피곤하게 만든것이 정 말 잘한노릇인지… 이제 또 집으로 돌아가면 어떤 봉변을 당해야 할지 근심이 태산같았다. 학업은 계속할수 있을지, 학업을 끝내면 소원대로 일자리를 얻을수 있을지 모든것이 미결이였다. 앞을 내다볼수 없는 나는 그래도 어머니의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마음 먹었다. 이튿날 차에 오른 나는 집과 거리가 가까와 질수록 마음이 불안해 졌다.심지어 작은 역에서 머무는 시간도 더길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난다.그래도 시간의 바퀴는 붙들어 맬수는 없는 법 결국에는 집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27    3 아버지한테 남긴 쪽지 댓글:  조회:1013  추천:0  2013-10-24
3    아버지한테 남긴 쪽지   연변대학 성인고등교육학원에 붙은지 1년이 지났는지라 나 는 인젠 시름놓고 수업을 받을수 있었고 다른 활동에도 참가할 수 있게 되였다.그런데 연길까지 가는것이 문제가 되였다.처음에 어머니는 내가 기차에 오르지 못할가봐 단위의 찌프차를 동원하여 갔었다,편리하기는 하지만 눈치가 보였다.그리고 이후 최저한도로 졸업할때까지 열번은 갔다왔다 하여야 하겠는데 어떻게 그냥 단위의 찦프차를 동원하겠는가?나는 절로 차에 오르고 내리는 훈련을 하여 홀로 다닐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보름가량 집중수업를 끝내고 나는 기차역에 나왔다.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광장에서 한참 멍하니 앉아있다가 차표부터 끊어 놓았다.다음 짐붙이고 화물을 운반하는 차를 따라 홈에 나갔다.모든 기차는 연길역에 약 8분가량 멈추는데 그동안 장애인차를 짐바곤에 갔다놓고 다시 걸어서 객 바곤에 오를만 한지 걱정이였다. 기차가 홈에 들어서니 가슴부터 떨리였다.나는 짐바곤까지 차를 타고 가서 운반공 아저씨들 한테 장애인차를 맡기고 부랴부랴 객 바곤에 왔다.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 오를수가 없었다. 겨우 사람들이 다 올랐다 싶어 막 기여 오르려는데 또 한무리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였다.너무도 급해 지팽이도 집지 못하고 차에 책가방과 지팽이를 올려 뿌리고 네발로 기여오르는데 뒤에 사람들은 참지 못하여 나의 옆으로 나의 손까지 밟으며 오르는 것이였다.나는 밀치여 몸도 가늠하기 힘들었다.차장이 보다못해 밀치는 사람들을 말리고 해서야 나는 겨우 기여 오를수 있었다.머리가 다 흥크러지고 손과 무릅은 흙투성이 되였다.그런 꼴을 보기 안스러웠던지 사람들은 “걷기 힘든데 집에 가만 있을 것이지 뭐하러 자꾸 쏘다니는지.”한다. 나는 설음이 북받쳐 코마루가 찡해났다.누구는 다니기 싶어 다니는가?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는 싫고 또 남의 부담은 되기싫어 이고생을 하는것이지 . 집에 와보니 넉달동안 상해에 진수를 갔던 어머니께서 돌아와 있었다.그런데 집안분위가 말이아니였다.잠자코 들어보니 아버지는 그간 못한 분풀이를 어머니와 하던 중이였다. 내가 들어가자 아버지는 총뿌리를 나한테 돌리는 것이였다. “너 시험치러 간다 해놓고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느냐?” “시험을 치고 면접시험도 봐야 하니깐요.” 사실 아버지는 내가 면접시험을 보고 오는줄을 번연히 알면 서도 트집을 잡느라고 나한테 걸고드는것이였다. 그리고는 몇달 전에 허락없이 김치를 담근 일이며 배를 남한테 판 일이며 두루 두루해서 한나절이나 고함지르며 난리를 피워댔다. 나는 이것으로 끝난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5월에 학교에서 학비를 내라는 통지가 왔다. 아버지는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고 딱 잘라말하는것이였다. 나도 배심이 생겼다. 그까짓 많지도 않는 학비때문에 사람을 못살게 구는 아버지가 너무도 괘씸했던것이다. 나는 아버지보고 나절로 대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나도 이런 배짱이 어 디에서 나왔는지 알수 없었다. 그런데 정작 돈을 벌자고 하니 그렇게 쉽지 않았다. 팔다리 가 성한 사람은 아무 일을 해도 괜찮겠지만 두다리를 제대로 쓰 지 못하는 나는 할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싶이 하였다. 나는 돈 200원을 벌기 위해 머리를 쓰지 않을수 없었다. 생각하던 끝에 나는 유치원을 꾸리기로 작심하였다. 유치원을 꾸리려면 다른 유치원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색이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 다. 나에게 있는 재간이라면 외국어밖에 없으니 외국어유치원 을 꾸리기로 하였다. 마침 한 친구가 나서서 함께 이 일을 진척 시켰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순풍에 돛단 격이 아니였다. 광고를 적 지 않게 써서 거리에 붙였지만 물어보는 사람은 있어도 아이를 맡기겠다는 사람은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장소가 없어서 친구의 세집에 유치원을 꾸렸는데 방안이 좁은것은 둘째 치고 시설이 초라하기짝이 없으니 누가 감히 아이를 맡기겠는 가? 이렇게 되여 유치원을 꾸리는 일은 인차 무산되고말았다.  나는 또 문구공장의 공책을 매는 일에 달라붙었다. 한권 꿰매면 5전씩 버는데 꾸준히 하면200원은 벌수 있을것 같았다. 공책을 꿰매면서 자꾸 바늘로 손끝을 찔러 피가 나왔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고 이 일을 견지 하였다. 무슨 일을 해서든지 학비는 꼭 벌어야 하기때문이였다. 이럴즈음에 아버지가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미리 해두었던 나 의 숙제책을 어디다 버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아버지는 늘 내가 없는 사이에 나의 물건들을 들추어보군 하였다. 무엇을 가져가도 말 한마디 없었다. 나는 이러다가 다른 책들마저 잃어버릴것 같은 위구심이 들 었다. 나에게 있어서 책은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는 녀자로 서 이날이때까지 연지곤지를 발라본적이 없었다. 옷도 대수 입 을것이 있으면 되였다. 먹는것도 별로 추구하지 않았다. 그저 있 는대로 먹고 쓰면 되였다. 하지만 책에 대한 나의 애착은 각별했다. 나는 돈만 있으면 책을 샀다. 한번은 이모가 우리 집에 왔다가 나의 옷이 초라한걸 보고 돈을 주면서 옷을 한벌 사입으라고 하였다. 이모가 돌아가 자 나는 그길로 서점에 가서 욕심나는 책들을 샀다. 서점의 일군 들은 모두 나를 알고있었다. 그들은 내가 책을 살 때면 늘 곱게 포장하여 나의 휠체어에까지 들어다주군 하였다. 사고싶은 책이 있으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사야 시 름을 놓았다. 하여 나한테는 책이 퍼그나 많았다. 나는 이런 책 들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였다. 나는 인차 나의 모든 책들을 친구 의 집에 가져다 보관시켰다. 아버지는 나의 책이 없어진것을 보고 당장 가져오라고 호통 쳤다. 3일내에 가져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 았다. 그리고는 나의 휠체어열쇠도 몰수해갔다. 단단히 족칠 태 세였다. 그간 좀 누그러들었던 아버지가 왜 또 이러는지 나로서 도 알수 없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집에서 공부할것 같지 않았다. 공부 를 매일 해도 모자라겠는데 이렇게 싸움만 하다간 일을 그르칠 것 같았다. 하는수없이 나는 집을 떠날 생각을 하였다.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고집불통인 아버지를 설복할수 없고 또 한편으로는 견정불이한 나를 그만두라고 할수 없으니 내가 하는대로 내버려두는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였기에 집을 나간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선택이였다. 하지만 공부를 해야겠는데 집에 서는 할수 없으니 후에 어떻게 될지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발등 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봐야 했다. 어머니도 어디에 거처할데가 있을지 찾아보라고 했다. 나는 먼저 친구를 시켜 휠체어자물쇠를 마스고 빼내오게 하 였다. 휠체어는 나의 “다리”이니깐 그것이 없으면 아무데도 가 기 힘들었다. 그리고는 아버지한테 글쪽지를 한장 남겨놓았다. “아버지, 이때까지 키워준 은정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입니 다. 이젠 나도 다 컸으니 나의 일을 나절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제 훌륭한 사람이 되여 찾아올테니 내가 없어도 찾지 마세요. 안녕히 계셔요!”
26    2 입학 통지서 댓글:  조회:1228  추천:0  2013-10-21
二. 2   입학 통지서   지망을 순조롭게 썼으니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였다. 나는 매일 밤 12시까지 공부하고도 이튿날 어뜩새벽이면 벌떡 일어 나 미리 준비해두었던 종이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책을 가지 고 나오면 아버지가 뭐라고 할가봐 나는 매일 외워야 할것들을 종이에 적어놓군 하였다. 청명이 지났지만 아침날씨는 퍼그나 싸늘하였다. 종이를 오 래동안 들고있으면 손이 시려났다. 약 세시간 동안 외우다가 아 침밥을 먹으러 들어가면 아버지는 벌써 출근하고 집에 없었다. 그때 아버지는 공장장직을 맡고있어서 바삐 보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시험치기로 마음 먹었다. 대학에 입학할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서뿔리 알렸다가 도리여 일을 망칠가봐 두 려웠던것이다. 나는 시험공부가 바쁘다보니 모든 일을 제쳐놓았 다. 심지어 옷도 어머니가 씻어주었다. 어머니는 내가 맨날 한다 는 공부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여 하루는 시험을 쳐보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정치문제를 물었다. 하지만 나는 정치시간에 선생 님의 강의를 알아듣기 힘들어 포기하다싶이 하던중이였다. 내가 대답을 못하자 어머니는 어이없어했다. “공부는 어느 과목이나 다 골고루 해야지 이렇게 한 과목씩 전페를 하면 어떻게 시험을 잘 칠수 있겠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선생님의 강의도 알아듣기 힘든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나는 안달아났다. “지금부터라도 리해되든 안되든 외워라. 외우느라면 리해가 될거다. 다문 얼마간이라도 외워서 점수를 약간이라도 올려야지 백지를 내서야 되겠느냐?” 정치과는 교과서가 3개였지만 문답련습집을 보니 250페지 나 되였다. 이제 시험칠 날자는 한달도 채 남지 않았다. 어떻게 한담? 리 해도 못하면서 무작정 외우자니 기가 막혔다. 그래도 무슨 방법 이 있는가. 결사전을 벌리는수 밖에… 나는 매일 외우고 또 외웠다. 먼저 외운걸 잊어버릴가봐 하 루에도 두세번씩 곱씹어 외웠고 며칠에 한번씩 이미 외운걸 잊 지 않았나 검사해보았다. 약 20일 동안 정신없이 외웠더니 련습집 한권을 처음부터 마 지막까지 줄줄 외울수 있게 되였고 따라서 내용도 스스로 알려지는것이였 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그 말이 그른데 없었다. 시사문제는 몇백개나 되는데 도저히 외울수가 없었다. 어머 니는 시험에서 1점이라도 더 따야 한다면서 약 20문제로 간추려 주었다. 나는 그것만 줄줄 외워두었다. 공부는 이만하면 비슷하게 된것 같은데 아버지 몰래 어떻게 시험치러 갈지 걱정스러웠다. 시험장소는 우리 집과 약 2리 가 량 떨어져있었다. 아버지가 출근한 다음 걸어가느라면 늦어질 것이다. 늦으면 시험장에 들어도 못 가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가? 나는 죽도록 공부를 하고 시험도 치지 못할가봐 걱정되 여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웬걸, 시험날자를 이틀 앞두고 아버지가 출장을 떠났 다. 정말 하늘이 돕는듯싶었다. 어쩌면 이런 우연도 있을수 있단 말인가? 드디여 시험치는 날이 되였다. 나는 아침 3시에 일어나 중요 한 문제만 골라 다시한번 훑어보았다. 이어 아침밥을 먹고 동생 의 자전거에 앉아 시험장으로 갔다. 모든것이 아주 순조로왔다. 오전에 어문시험을 쳤는데 느낌이 괜찮았다. 시험을 치고 나오니 어머니가 점심을 사가지고 기다리고있 었다. 나는 점심시간에 오후에 칠 과목을 좀 복습하려고 학교 마당의 구석진 곳에 앉아 밥을 먹었다. 이때 동생이 다가오더니 얼음과자 한 주머니를 나한테 넘 겨주고 가버렸다. 동생은 비록 다른 애들처럼 “누나, 시험 잘 봐 요.”라든가 “힘내요.”라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 방식 대로 성의를 표시하였다. 오후에는 력사시험을 쳤다. 아침에 복습했던 내용이 두루 나 온것 같아 마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다 치고 나와 다른 사람과 답을 맞춰보니 다른것이 많았다. 그 사람은 이번까지 대학입시 를 세번 쳤는데 실력이 이만저만이 아닌것 같았다. 나는 생각하면 할수록 나의 답이 틀린것 같았다. 그러자 속 이 바질바질 타들어가는것만 같았다. 다른 수험생들은 다 가고 복도에 나 혼자 서서 동생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험을 잘못 쳤다 고 생각하니  절망한나머지 온몸의 맥이 탁 풀리였다. 이윽하여 동생이 복도에 나타났다. 동생이 시험을 어떻게 쳤 는가고 물어보기도전에 나는 눈물을 꽉 쏟고말았다. 그러자 동 생은 “울긴 왜 울어요? 래일 잘 치면 되겠는데…”라고 위안해주 었다. 시험을 잘 치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어머니를 대하겠는 가. 그렇게 많은 곤난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시험지 한장으 로 전도를 망친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져내리는것만 같았다. 동생의 자전거에 앉아 집으로 돌아온 나는 퇴근하여 돌아온 어머니를 보고 또 눈물부터 흘렸다. 나는 아무래도 대학교에 붙 지 못하겠는데 래일 시험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생떼를 썼다. “오늘 시험을 잘못 쳤으면 래일 시험을 더 잘 쳐서 미봉하면 되는거지 시험을 치지 않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쨌든 괜찮 으니까 이 단설기를 먹고 우리 단위에 가 래일 칠 과목들을 잘 복습하거라.” 어머니는 위엄있게 말하면서 특별히 나를 위해 산 단설기를 넘겨주었다. 단설기는 내가 제일 즐겨먹는 음식이였다. 하지만 이날따라 목이 꽉 막혀 넘어가지 않았다. 이때 옆집아주머니가 찰떡을 사들고 들어왔다. 그는 눈물범 벅이 된 나의 얼굴을 닦아주면서 나의 두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 하였다. “공든 탑이 무너지겠소? 최원이가 얼마나 애쓰고 공부를 했 다구. 나는 최원이가 꼭 대학에 붙을거라고 믿소. 자, 찰떡을 사 왔는데 빨리 먹고 힘내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바싹 갈마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믿어주는데 내가 락심하고 앉아있어서야 되겠는가? 저녁을 대충 먹고 나는 어머니의 사무실에 가 밤늦게까지 공 부를 하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학과목의 시험은 모두 괜찮게 친 것 같았다. 한달쯤 지나서 시건설당안관의 유아저씨가 입학통지서를 가지고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그제야 내가 대학시험에 참가한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속으로는 몹시 불쾌했으련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아저씨를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두 사 람은 오랜만에 만났는지라 간단한 반찬을 놓고 술을 마시기 시 작하였다. 입학통지서를 받은 나는 드디여 성공했다는 생각에 몹시 기 뻤지만 감히 표달할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처리할지, 내가 도대체 이 학교에 다닐수 있을지 미결이기에 마음이 초조하기만 했다. 술상을 인차 물릴것 같지 않아 나는 친구와 함께 영화구경하 러 갔다. 오랜만에 가지는 문화생활이였다. 그동안 공부를 하느 라고 모든것을 전페하다싶이 하고 지내왔던것이다. 저녁늦게 집으로 돌아와보니 유아저씨는 돌아가고 집식구 들은 모두 자고있었다. 나도 “폭풍”이 불겠으면 불어치라는 식 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아저씨와 술을 마시며 오랫동안의 회포를 풀었던 아버지가 그날저녁 밤중에 이선염으로 입원할줄이야. 나는 내가 몰래 대학시험을 쳐서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병나지 않았나 싶어 너무 미안해 죽을것만 같았다. 두달이 지나서야 아버지는 완쾌되어 퇴원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태도가 많이 변했다.기고만장 하던 기백은 온데간데 없이 살아지고 전보다 퍽 온화하고 따스해 보였다 인생공부를 많이 한것같아 보였다.그런 아버지를 보고 나는 제발 이대로만 유지해졌으면 하고 속으로 바랐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는 장애인 삼륜차를 사줄테니까 대학에가 공부를 하라는 것이였다. 드디여 나는 오매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되여 대학에 가 공부할수 있게 되였다.나는 너무도 좋아 몇일동안 잠을잘수가 없었다.  개학이 되였다.하지만 나는 장애인이라는 신분을 밝힐수없어 집중수업를 받으러 학교에 가지 못하였다.나는 학교에서 발급한 교재를 가지고 자습하여야 한다. 첫학기에 두개과목을 급제하여야 명년에 한어전업에 넘어갈수 있었다. 대학교 과목을 자습한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내용이 많은 것도 있겠지만 어떤것은 도무지 리해가 안되여 공부를 할수가 없다.  1983년도에 나는 문학지식을 좀 배워야 하겠는데 대학에 갈수 없으니 북경언어문학대학에 지망한적이 있었다.이는 3년제였는데 순 자습대학이였다. 그리고82년도에 과학기술관에서 영어를 중급까지 배운다음 좀 더 배워야하겠다고 생각하고 북경제2외국어대학의 영어함수를 일년간 하였었다. 그후 아버지한테서”너 대학을 몇개를 다니느냐”하고 욕하는 바람에 중간에 그만 두었지만 그때 나는 벌써 자습의 쓴맛을 보았던것이다. 다행이 나는 무슨일이나 끝을 보아야 하는 끈질긴 근성을 갖고 있었다. 모든일은 하면 된다. 이를 악물고 넉달동안 분투했더니 순리롭게 시험을 넘길수 있었다.그리고 한어전업에 가겠다고 언녕 신청을 해놓았다. 학교측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줄 모르지만 후에 들을라니 나의 전업바꾸는 문제때문에 성교육청에 열대번은 다녀왔다고 하였다.그렇게 애쓴덕에 나는 이듬해 순리롭게 한어전업에 갈수있었다.
25    二 1.특수한 수업 댓글:  조회:1287  추천:2  2013-10-15
二    특수한 수업.   음력설이 다가오자 학교에서는 20일간 방학하였다. 나는 이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매일 죽어라고 외워댔다. 그러면서도 먼저 외운걸 잊어버릴가봐 반복적으로 외우고 또 외웠다. 스무 날이란 시간은 저도 모르게 지나가고 개학이 되였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신심이 생긴 나는 이제 새 학기에는 더 열심히 해서 꼭 대학에 붙으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런데 개학 첫날 내가 학교에 가니 복습반을 책임진 선생님이 나보고 더는 오지 말라고 했다. 그 리유인즉 복습반은 대학지망생들을 배워 주는 곳이지 지식보급반이 아니라는것이였다. 실로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 그날 수업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머니를 보자 설음이 북받쳐올라 울음을 터뜨리였다. 한참 울고나니 좀 개운 해지는것 같았다. “얘, 이젠 어떻게 할거야?” 어머니가 근심조로 물었다. “계속 가야지요. 오지 말란다고 하던 공부를 그만둘수야 없 지 않아요? 중도에서 그만둘거면 차라리 시작도 하지 않았을거 예요. 인젠 시험기일도 가까와오는데 아직도 못 배운것이 많으 니 어떤 방법을 대서든지 강의를 들어야 해요. 래일부터는 교실 밖에서 방청하겠어요. 교실안에서 공부하는걸 허락하지 않으면 밖에서 듣는거야 말을 못하겠죠.” “너 정말 고생을 하는구나.” 어머니는 가슴이 아픈지 한숨을 내쉬였다. “괜찮아요.” 이튿날 나는 솜옷, 솜신, 목도리 그리고 장갑에 이르기까지 전신무장을 하고 손전지를 가지고 평소보다 더 일찌기 학교로 갔다. 2월 중순이여서 날씨가 무척 추웠다. 특히 아침, 저녁에는 더욱 매서웠다. 옷을 가득 꿍져입으니 몸이 무거워서 걷기가 곱절 힘들었다. 나는 학생들이 드나드는 중간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옆문으로 들 어가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갔다. 수업이 시작되자 나는 살금살금 걸어나와 교실문밖의 창문 가에 기대여섰다. 교실의 창문으로 밝은 불빛이 새여나왔다. 뜻 밖에도 선생님의 말소리가 아주 똑똑히 들리였다. 나는 한손으로는 책을 펼쳐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손전지를 비추며 선생님의 강의를 명심해 들었다. 90분의 강의가 끝나면 10분이란 휴식시간이 있었다. 휴식시 간이 되기전에 나는 살금살금 원래 숨어있던 곳에 가 숨어버렸 다. 두번째 시간이 시작되면 나는 또 기여나왔다. 두다리가 아파 서 견딜수 없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오느라고 한시간 반, 첫번째 수업을 듣느라고 한시간 반, 이제 또 선채로 두번째 수업을 들을 라니 다리가 아프지 않을수 있겠는가? 이제 수업을 다 듣고 또 한시간 반 걸어서 집까지 가느라면 지쳐서 쓰러지지나 않을지 근심스러웠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리라 작심하였다. 첫날 방청 은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두번째날에도 무사했는데 당직 을 서는 할아버지가 올라와본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어두컴컴 한 복도에 서서 강의를 듣는것을 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가버렸 다. 나는 그가 복습반 선생님들한테 고발하지 않을지 은근히 걱 정되였다. 아니나다를가 세번째날에 내가 한창 선생님의 강의에 정신 을 팔고있는데 복습반의 왕선생님이 다가와 나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는 아주 낮으면서도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너 지금 뭘 하고있는거야?” “……” “너 왜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느냐? 다른 사람들이 알면 뭐라 고 하겠니? 이때까지 너희 사정을 봐서 학비도 받지 않고 수업을 받게 했으면 만족을 느껴야지 이렇게 우리와 엇서면 어떻게 하 냐? 우리 이 복습반은 승학률을 높여야 하기에 너처럼 중학교공 부를 제대로 못한 애때문에 다른 애들한테 영향을 주면 안되는 거야. 이만한 도리는 알 사람이 왜 자기 생각만 하고 남의 사정 을 봐주지 않니?” “……” 왕선생님은 성이 나서 내앞에서 왔다갔다했다. 나는 아무 대 꾸도 하지 않았다. 때론 함구무언이 열마디 말보다 나을 때가 있 었다. 얼마후 왕선생님은 안되겠는지 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 하였다. “좋다. 그럼 며칠 지나 복습반에서 시험을 치겠는데 그 시험 에 통과하면 계속 와 강의를 듣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나를 원 망하지 말고 강의 듣는것을 그만두거라. 알겠니?” 나는 제꺽 머리를 끄덕이였다. 시험에 통과되든 안되든 며칠 이라도 강의를 먼저 듣고볼판이였다.나는 그때 가서 강의를 듣지 못 하게 되면 다시 방법을 대리라 속궁리를 하였다. 그 이튿날 학교에 갔더니 학생들은 왜 학교에 오지 않았느냐 고 너나없이 물었다. 평소에는 나와 별로 말도 없던 애들이 나한 테 이토록 관심을 보일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리유를 간단 하게 말했더니 다들 무척 격분해하였다. 이제 정말 강의를 못 듣 게 하면 교육국으로 찾아가라는것이였다. “장애인으로서 지식을 배워서 출로를 찾겠다는데 그것도 리 해하지 못하고 다른 애들한테 영향을 줄가봐 그런다는건 다 당 치않은 소리야.” 애들은 이렇게 떠들어댔다. 이렇게 되자 나는 마음이 더욱 든든해졌다. 나는 아무튼 허 락을 받았으니 먼저 공부를 하다가 시험을 치고 다시 보자고 격 분해하는 애들을 달래였다. 그런데 열흘이 지나도 시험을 치지 않았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데 한달이 지나도 감감무 소식이였다. 그리고 그 왕선생님은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그제 야 나는 팽팽하게 조였던 마음의 탕개를 훌 풀어치웠다. 4월의 어느날,《연변일보》에 연변대학 성인고등학부 학생 모집광고가 실렸다. 벌써 시험등록시간이 된것이다. 나는 긴장 해났다. 혹시 붙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근심스러웠다. 그리 고 신체조건이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것이 큰 고민거리였다. 어머니는 희망이 있든없든 대담하게 시험을 치라고 했다. 길 고 짜른건 대봐야 한다는것이였다. 이튿날 나는 한아빠트에서 살고있는 두 친구의 자전거에 앉 아 시교원연수학교로 등록하러 갔다. 그동안 줄곧 나를 자전거 에 앉히고 학교까지 데려다준 그들은 내가 시험을 잘 쳐서 대학 에 붙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야 그들도 고생한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시교원연수학교에 들어가 어디에서 등록하는가고 물어보려 는데 옆칸에서 웬 키 큰 남자가 나오더니 “어? 이 새기 왔구만. 뭘 하러 왔소?” 하고 알은체를 했다. 별로 면목이 없었지만 그분이 난처해할가봐 나는 고개를 끄 덕여 인사를 하면서 “성인고등학부 입시등록을 하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열정적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내가 그를 따라 사무실에 들어서니 그분은 사무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한테 나를 인사시키면서 공부를 잘하니 잘 봐주라고 부탁하는것이였다. 그 는 내가 시과학기술관에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하는것을 보았다 고 했다. 의력이 어찌나 강한지 시과학기술관의 인원들도 모두 나를 어지간히 칭찬하지 않더라면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좀 쑥스러웠지만 듣기는 싫지 않았다. 이런 칭찬은 내 가 시과학기술관에서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해서부터 늘 들어오 던 말이다. 사람들은 나를 대단하다고 감탄하지만 나는 별로 특 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응당 이렇게 해야 한다 고 생각했을뿐이였다. “그래 시험준비를 잘했소?” 맞은켠에 앉은분이 나한테 물었다. “잘했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나는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럼 한번 용감하게 쳐보오. 만약 합격되지 못하면 명년에 내가 텔레비죤대학에 보내주겠소. 동무의 신체상황이 학생모집 조건에 부합되지 않지만 우리가 학교측과 교섭하여 해결할테니 근심하지 마오. 교육사업일군으로서 동무처럼 공부하려고 애쓰 는 사람을 지지하지 않으면 누구를 지지하겠소?” 그분은 인차 등록용지 한장을 내앞에 내밀었다. 나는 등록용지에 요구대로 적은 다음 그분한테 바치고는 고 맙게 인사하고 교원연수학교를 나왔다. 나는 마치 큰일을 해놓 은것처럼 가슴이 후련해났다. 함께 갔던 친구들의 자전거에 앉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머 니가 퇴근해 돌아오자 이 소식부터 알리였다. 어머니는 너무도 기뻐서 대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우리 딸 정말 장하구나…” 그런데 당시 연변대학 성인고등학부에서는 전 주 여러 중소 학교 교원을 상대로 학생을 모집하였기에 나에게 알맞는 적당한 학부를 선택할수 없었다. 나는 문학과 번역에 관한 지식을 배워 야 하기에 한어학부거나 중문학부에 지망해야 하지만 교원이 아 니기에 이런 학부를 지망할수 없었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정 치학부밖에 지망할수 없었고 또 국가간부여야 하며 2년 이상의 사업경력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교원연수학교의 선생님들은 나보고 먼저 정치학부에 입학한 후 일년후에 한어학부로 옮기라고 알려주었다. 대학생으로 되는 것이 꿈에도 그리던 소원이였던 나는 신체상황을 감추더라도 대 학교에 가고싶었다. 어머니한테 이런 상황을 알려드렸더니 어머니는 “무슨 방법 을 대서라도 알맞는 신분을 만들어내야지. 내가 어떻게 해볼테 니 넌 공부만 해라. 아무 근심도 하지 말고…” 하고 통쾌하게 말 했다. 어머니는 생각하던 끝에 내가 어렸을 때 상해에서 수술치료 를 받고 돌아오면서 도움을 받은적이 있는 그 아저씨를 찾아갔 다. 유치관이라고 부르는 이 아저씨는 지금 시건설당안관에서 관장직을 맡고있었던것이다. 어머니한테서 사연을 들은  아저씨는 쾌히 증명서를 떼주 었다. 아저씨는 내가 장애인으로서 지식을 배워 혼자힘으로 일 어서겠다고 애쓰는것이 기특하다면서 만약 책임을 추궁하면 자 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더라는것이였다. 얼마나 고마운분 인가. 이렇게 되여 나는 고등학교지망서에 떳떳하게 자기 이름을 적어넣을수 있게 되였다. 이것은 아마 나만이 겪을수 있는 “특 혜”일것이다.
24    대학입시복습반 댓글:  조회:1225  추천:0  2013-10-14
 대학입시복습반   나는 자기의 실력을 점검해 볼겸 소설을 하나 번역해볼 생각을 하였다.  과학기술관에는 외국어도서자료실이 있는데  일어로 된 책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일본의 저명한 작가들이 쓴 작품집도 적지않았다. 나는 이 도서자료실을 통해 일본의 문화를 알게 되였고 좋은 문학작품들도 많이 접촉할수 있게 되였다. 노심초사끝에 나는  “나는 두살 입이다.”라는 제목의 일어소설을 골랐다. 9만여자 되는 이 소설을 나는 한달만에 조선어로 다 번역하 였다. 그런데 수정하면서 보니 어쩐지 원작을 읽을 때처럼 그렇 게 신나지 않았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한 친구에게 나의 번역작품을 보이였다. 친구에게 읽은후의 느낌을 말해달라고 했더니 그는 빙그레 웃으 면서 겨우 다 읽었다고 하였다. 괜찮기는 한데 원문의 뜻을 그대 로 나타내는데만 너무 치중하다보니 문학적색채가 짙지 못하다 고 했다.그는 번역은 재창작이기에 뜻만 그대로 나타내서는 안된다 고 하였다. 그의 말에서 계발을 받은 나는 다시 수정하였다. 나는 품을 들여 번역한 작품을 그대로 처박아두기 아까와 투고하기로 작심하였다. 나는 어느 잡지사에 보낼가고 궁리하다 가《도라지》잡지사에 보내였다. 이 잡지사에 문창남이라고 하는 수필작가가 계셨는데 나는 그의 수필을 대단히 즐겨 보았다.수필집까지 사서 외울 정도로 좋아하였다.그런데 원고를 보낸지 몇달이 지나도 종무소식이였다. 기다리다 못해 문의편지를 써보냈더니 문창남선생께서 그런 원고를 받은적이 없다는 회답이 왔다.그러면서 그는 맥을 버리지 말고 좋은 작품을 번역하면 꼭 보내달라는 부탁도 잊지않았다.원고가 분실되여 몹시 아쉬웠지만 힘이 되는 회답편지를 받고나니 그래도 기뻤다. 그해 음력설에 연길의 둘째이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 으로 놀러 왔다. 둘째이모는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는데 아는것도 많고 나에 대한 관심도 극진했 다. 그는 나를 보고 요즈음 뭘 하고있는가고 관심조로 물었다. 내가 외국어공부를 하고있다는것을 안 둘째이모는 참 잘한 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면서 사람은 꼭 자기의 취향에 따라 뭐든 지 자꾸 배워야 한다고 했다. 내가 번역을 해보니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번 역을 하자면 먼저 자기 민족 언어부터 잘 배워야 한다고 알려주 었다. 자기 민족 언어에 능숙하지 않고 어떻게 번역을 잘할수 있 는가고 하면서 연변대학에 성인고등학부가 있는데 한번 시험쳐 보라고 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내가 대학교공부를 할수 있을가? 둘째이모 는 주밋거리는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면서 번역을 하려면 문 과공부를 해야 하기에 한어학부를 지망하면 좋을거라고 하였다. 듣고보니 옳은 말이였다. 그러면 나도 대학생으로 될수 있다 는 말이 아닌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해났다. 얼마나 가고싶 던 대학교인가?! 대학생을 하늘처럼 높이 우러러보던 나는 여직 껏 나 같은 사람은 대학교와는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가고만 여 겼는데 이제 노력만 하면 오매에도 바라던 대학생으로 된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둘째이모는 장애인이 대학교에 가기가 필경은 쉽지 않기에 여차여차하게 준비하라고 상세히 알려주었다. 마침 외국어강습반에서 영어와 일어를 배운터라 인제는 본 격적으로 초고중 문과교과서를 놓고 공부하면 되였다. 그런데 중학교에 다니지 않은 내가 선생님의 가르침도 없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통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누구의 도움 이 없이 순 자습으로 공부한다는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불보 듯 뻔한 일이였다. 때마침 도문시제2고급중학교에서 복습반을 꾸리였다. 대학 시험에서 락방된 학생들을 다시 1년 동안 공부시켜 이듬해 대학 시험에 응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어머니보고 빨리 가서 신청하라고 졸라댔다. 어머니는 학교에 찾아가 나의 사정을 상세히 말하고 도와주기를 바랐다. 학교의 선생님들은 나의 소행이 기특하다면서 무료로 복습반에 보내라고 했다. 어머니는 너무도 감동되여 나의 손을 꼭 잡고 “그래도 이 세 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 학교에서 너를 동정하여 학비도 받지 않는데 꼭 공부를 잘해야 한다. 선생님들의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꼭 열심히 해야 한다.” 하고 의미심장 하게 말하였다. 나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어떻게 차례진 학습기회 인데 되는대로 대하겠는가? 절대 그럴수가 없었다. 이제 아버지의 허락을 받으면 되였다. 이번에는 어찌된 영문 인지 별로 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닥 벼르지 않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는데 뜻밖에도 마음대로 하라는것이였다. 모든것이 순조로왔다. 나는 날듯이 기뻤다. 9월 20일에 나는 필요한 책들을 한 가방 챙겨메고 학교로 향 하였다. 복습반은 제2고급중학교의 선생님들이 퇴근후에 과외 시간을 리용하여 수업을 하기에 저녁 5시 반에 시작하였다. 한 시간 반을 걸어가야 하기에 나는 3시부터 떠나야 했다. 떡구유처 럼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한걸음한걸음 힘겹게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하여 2층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고나면 온몸 이 땀에 흠뻑 젖군 했다. 지팽이를 땅에 내려놓고 책을 꺼내놓으 려니 두손이 바르르 떨리였다. 갈증이 나서 물을 실컷 마셨으면 좋으련만 물 마실 곳도 없었다. (참자. 모든것을 참아야 해.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는 이만한 곤난을 꼭 이겨내야 한다.) 복습반의 수업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진척되였다. 학과목을 따 라잡으려니 진땀이 날 지경이였다. 강의를 한마디라도 빠뜨릴가 봐 눈을 크게 뜨고 도정신해서 들었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할 내 용이 많았다. 필기도 따라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휴식시간에 옆에 앉은 학생의 필기책을 빌려다가 제때에 보충하군 하였다. 90분 강의를 두번 듣고나면 밤 8시 30분이 되였다. 나는 걸 음이 더디다보니 항상 마지막에 혼자 학교마당에 남아있을 때가 많았다. 전등불도 없는 캄캄한 밤에 사람 하나 없는 넓다란 학교 운동장을 걸어지나가기란 여간만 무섭지 않았다. 바람이 나무잎을 스치는 소리가 자꾸 사람의 발자국소리로 들 려 겁이 나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혹시 고양이나 개가 지나가 도 놀라서 울음이 나올 지경이였다. 학교마당을 나와 또 한시간 반을 걸어야 나는 집에 도착할수 있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정말 힘들어서 죽을것만 같았다. 내가 어망결에 동생을 보고 매일 저녁 시꺼먼 학교운동장을 걸어나오는것이 아주 두렵다고 말했더니 동생은 아버지 몰래 매 일 저녁 마중을 나왔다. 내가 아버지한테 들키면 안된다고 말리 는데도 동생은 괜찮다면서 계속 마중나왔다. 나는 반가우면서도 또한 걱정되였다. 동생의 공부에 지장될가봐 걱정되였고 아버지 한테 욕볼가봐 걱정되였다. 욕을 먹는것쯤은 괜찮지만 복습반에 다니는것을 그만두라고 하는 날이면 큰일이였다. 마중나온 동생은 내가 걷는것이 너무도 더디니 막 업고 걸음 을 다그쳤다. 동생의 등에 업힌 나는 나 같은 누나를 만나 고생 하는 동생이 불쌍하여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것을 걷잡을수 없었다. 누나로서 동생을 돌봐줄 대신 항상 동생의 보살핌을 받 아왔다.  때론 이렇게 넘려해주는 동생이 차라리 동생이 아니고 오빠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오빠라면 덜 미안하겠는데… 이러는 동생이 있어 나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였다. 동생은 아버지가 알면 욕할가봐 집에 거의 이르면 나를 내려 놓고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일찍이 집으로 들어가면 아버지의 의심을 사게 되기에 시간을 맞추어 들어가야 했다. 어떻게 할가? 어디에서 공부를 좀 하다가 집으로 가면 좋으련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거리 량옆을 참빗질하던 나는 문득 어머니의 단위에 눈 길이 멎었다. 어머니의 단위는 우리 집과 큰길을 하나 사이두고 있었다. 거기에서 좀 공부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것이 좋을듯싶 었다. 살펴보니 현관문은 잠겨져있지 않았다. 나는 문앞의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갔다. 네댓평방메터 밖에 안되는 현관에는 희미한 가로등불빛이 비껴 들고있었다. 책을 꺼내 펼쳐보니 글을 얼마든지 볼수 있었다. 앉 을 자리도 없는지라 나는 줄곧 서서 가로등불빛을 빌어 배운것 들을 복습하였다. 한참 서서 공부하느라면 다리와 지팽이를 짚 은 두어깨가 아파났다. 하지만 공부는 잘되였다. 옛날에는 모두 기름등잔밑에서 공부했다고 하지 않는가. 아마 사람이란 간고한 환경에도 곧잘 적응하는것 같았다. 밤 11시가 되자 이튿날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하여 집 으로 돌아간다. 내가 집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가면 집식구들은 모두 잠에 빠져 누구도 모르고있다. 나는 자리에 누웠지만 잠 이 오지 않는다. 낮에 공부한 내용과 가로등불밑에서 외웠던 내 용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머리속으로 한번 훑어본다. 지 칠대로 지친 나는 채 훑어보기도전에 잠에 곯아떨어진다. 복습반에서 공부하는 사이에 드바쁜 스케줄에 습관되였고 또 많은 친구들을 사귀였다. 처음엔 의아한 눈길로 나를 보던 학 생들이 얼마간 지나자 나를 지지해주고 도와나섰다. 내가 사는 아빠트에도 나와 같이 복습반에 다니는 녀학생이 둘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걷기 힘들어하는것을 보고 학교에 다 니는것을 도와나섰다. 그들은 저녁을 먹기 바쁘게 우리 집으로 와 나를 자전거짐받이에 싣고 학교로 간다. 수업이 끝나면 또 자 전거에 앉혀서 어머니 단위까지 실어다준다. 그러면 나는 거 기에서 밤 11시까지 공부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매일 변함없 는 일과였다. 이렇게 되자 동생이 더는 마중오지 않아도 되였다. 추운 겨울의 어느날, 눈까지 펑펑 쏟아지는데 공교롭게도 한 아빠트에 있는 애들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혼자서 돌아가야 하 는 나는 근심이 태산같았다. 눈길에서 뒹굴며 두시간 넘게 걸어 집에 거의 도착하는데 어 머니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최원아, 인제야 여기까지 왔니? 너무 늦었으니깐 내가 업어 주마.” 어머니는 초저녁 잠이 많은 사람이였다. 저녁술을 놓기 바쁘 게 잠들어버리는 어머니는 내가 저녁에 어떻게 고생하며 다니는 지를 잘 몰랐다. 하지만 밤중에는 꼭꼭 일어나 내가 돌아왔는가 를 보고서야 시름놓고 다시 주무셨다. 이날 잠결에 깨여난 어머 니는 내가 보이지 않자 이렇게 급히 달려나왔던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떻게 나를 업겠는가. 동생도 업기 힘들어 하는 판인데… 나를 업으려면 맨몸만 업으면 되는것이 아니라 묵직한 책가방과 쌍지팽이도 들어야 하기에 요령이 없이 뚝심만 으로는 안되였다. 그래서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어머니는 기어이 나를 업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숨이 턱에 닿아 나를 내려놓았 다. 이렇게 몇번 되풀이해서야 집에 이르렀다. 함께 들어가면 또 아버지가 뭐라고 할가봐 어머니가 먼저 들어간후 내가 들어갔 다. 눈길에서 몇시간 헤매고난 나는 허기가 차고 온몸의 맥이 탁 풀려 마치 눈처럼 녹아버릴것만 같았다. 눈이 오거나 비가 내리 는 날에는 학교로 가지 않아도 되겠건만 수업을 한시간도 빼놓 지 않으려니 이렇게도 힘들었다. 다른 애들은 이미 다 배웠기에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련습문 제를 풀면서 기초를 더 잘 다지면 되지만 나는 처음으로 배우는 것이여서 품을 몇곱절 더 들여야 했다. 9월부터 복습반에 다니기 시작해서 이듬해 6월에 전국성인 고등학교입학시험에 참가해야 하기에 시름놓고 잘 시간도 없었 다. 집에서 공부하다가도 너무 피곤하면 깊은 잠에 곯아떨어질 가봐 두손을 이마밑에 고이고 엎드려서 잠시동안 휴식을 취했 다. 약 20분이 지나면 이마에 눌린 손이 저려나 저절로 깨여났 다. 그렇게 쪽잠을 자고 깨여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젊어서인 지 웬간히 힘들어서는 얼마든지 견뎌낼수 있었다. 이래서 젊음 이 좋은가보다. 때론 공부할 내용은 많은데 정력이 집중되지 않아 머리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계획적으로 여러가지 학과목을 번갈아 공부하면서 의식적으로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동안 지나니 정력집중이 점차 잘되였고 나중엔 누가 불러도 듣지 못 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집중력을 키우니 공부가 잘되여갔다. 공부를 할수록 재미났 고 시간이 모자랐다. 어려서부터 해온 집안일은 늘 친구들과 함께 했다. 평소에는 괜찮은데 석탄깨기와 나무패기는 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친구들 의 도움을 받군 하였다. 어쨌든 아버지가 하라는 일은 에누리없 이 해놓고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아주 바쁘게 보냈지만 마음 은 편안하였다. 매일 잘 자지 못하고 때시걱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긴장하 게 보냈더니 늘 입술에 물집이 생기고 뒤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일주일 혹은 보름에 한번씩 뒤를 보니 늘 혈변을 보게 되였다. 뒤를 본 다음에는 눈앞이 아찔해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벽 을 짚고 겨우 일어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너무 우둔한것 같았다. 공부를 하는것 도 살기 위해서인데 그렇게도 몸을 아낄줄 몰랐으니… 어머니는 공부밖에 모르는 딸이 걱정되여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치료를 받아보라고 했지만 나는 전부 귀등으로 흘려보냈다. “근심하지 말아요. 죽지 않아요.” “어이구, 죽었으면 좋겠다. 한번 실컷 울고 말게. 사람 말을 이렇게 듣지 않으니… 내 너때문에 속 타서 지레 죽고말겠다.” 어머니의 사랑푸념은 늘 노래소리같이 들리였다. 첫 학기의 긴장한 학습을 거쳐 나는 많은것을 배웠다. 문맹 으로부터 단번에 지식인으로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시 험을 잘 치려면 아직도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외워야 할것이 너무 많아 짜증이 날 정도였다
23    일어강습반에서 사귄 친구들 댓글:  조회:1068  추천:1  2013-10-09
 일어강습반에서 사귄 친구들   영어클래스에 반장님은 늘 나를 의력이 강하다고 칭찬해주었다.무슨 일이나 완강한 의력으로 견지 한다면 못해낼일이 없다면서 영어클래스가 끝난귀에 일어클래스가 있으니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는 것이였다.나는 힘들어서 생각이 없었지만 너무도 권하니 한번들어 보기로 하였다. 일어강습반에도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영어강습반처럼 80명까지는 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60세가 되는 로인이였는데 일본 도꾜대학에서 동 방문학과를 배우고 귀국한후 줄곧 중학교에서 일어교원으로 사 업한분이였다. 반장은 나를 선생님한테 소개시켜주었다. 선생님 은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상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 이 강습반은 전문 일어로 강의하고 학생들도 일어만 사용하게 되여있는데 괜찮겠어요?” “녜. 괜찮습니다.” “래일 일어로 질문해도 되겠어요?” 선생님은 한수 더 떴다. “녜. 물어보세요.” 나는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알았다는듯 머리를 끄덕이고는 수업을 시작하였 다. 나는 눈이 데꾼해졌다. 가슴이 후둑후둑 뛰기 시작하였다. 다 들 일어수준이 이렇게 높으려니 생각지도 못했다. 래일 선생님 이 나한테 물으면 나도 이들처럼 대답할수 있을가? 생각하면 생 각할수록 긴장해졌다. 반장은 이 반의 학생들은 모두 이 선생님한테서 배우면서 고 급반까지 올라왔기에 일어수준이 상당하다고 하면서 나더러 집 에 돌아가 준비를 잘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집에서는 요즈음 복새통이였다. 아버지의 단위에서 층집을 한채 분여받았는데 워낙 불길이 잘 들지 않는 집이라 기 술자를 청해다 다시 온돌을 놓느라고 야단법석이였다. 어머니와 나는 그 기술자들을 대접하느라 기진맥진할 지경이였다. 아침밥 을 먹고 설겆이를 마치면 얼마 안 가 또 점심준비를 해야 했다. 손 님들이 점심식사를 다하면 설겆이를 혼자 다 하고 또 저녁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이처럼 바삐 보내면서도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머리속으로 끊임없이 하였다. 나는 할일을 볼이나게 해놓고 강의 받으러 갔다.  선생님은 말대로 수업을 시작하자 나한테 질문을 들이댔다. 그날 날씨에 대한 물음이였다. 나는 꺽꺽거리지 않고 류창하게 대답하였다. 교실안이 술렁이는 듯싶었다. 수업이 끝나자 반장은 참 잘 대답했다고 나를 칭찬하면서 계 속 열심히 일어강습반에 다니라고 했다. 선생님도 만족해하는 표정이였다. 두가지 언어공부를 마치 고 저녁 8시가 넘어 집에 들어서니 집안은 수라장이였다. 손님 들은 금방 식사를 끝내고 나갔는지 밥상과 온돌에 음식그릇들이 지저분 하게 널려있었다. 나는 저녁밥을 먹을 새도 없이 그릇들을 깨끗 하게 씻어놓았다. 나는 마치 전쟁을 치르는상싶었다. 이튿날 새집에서 온돌을 말리느라고 밤새 불을 때고 늦게 돌아온 아버지는 나를 매섭게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였다. “요즈음 집일이 이렇게 바쁜데 공부하러 가지 않으면 안되 냐? 넌 왜 그렇게 눈치가 없니? 네가 그렇게 공부를 해서 무슨 큰 벼슬을 하겠다구… 나 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무엇이라고 잘 못 말했다가는 아예 공부하러 다니지 말라고 할가봐 두려웠던것 이다. 사실 나는 할것을 다해놓고 공부하러 갔는데도 아버지는 늘 불만이였다. 다행스러운것은 이쯤해서 끝나고 공부하러 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온돌을 수리하고 이사를 하니 시과학기술관과의 거리가 더 가까와져서 좋았다. 일어강습반의 공부는 점점 재미가 났다. 처음에는 집에서 회 화준비를 많이 해야 수업시간에 일어로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는데 약 보름이 지나니 전에 외워두었던 단어들이 줄줄 잇달아 떠오르면서 다른 학생들처럼 회화를 할수 있게 되였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모두 진보가 빠르다면서 나를 칭찬해주었다. 나도 신이 나서 더 잘해보려고 노력에 박차를 가하였다. 회화를 잘하려면 자꾸 말해야 했다. 나는 될수록이면 일찍 학교에 가 학생들과 일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수업후에도 선 생님과 일어로 대화를 하거나 모르는것을 묻군 하였다. 우리 반에는 시공안국 예심과 과장직을 맡고있는분이 있었 다. 성이 송가이기에 모두들 송과장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어공 부를 어찌도 열심히 하는지 그가 있는 중급반에서 제일 잘한다 고 하였다. 그는 일어회화를 배우기 위하여 우리 회화반에 왔다. 하루는 내가 수업시간보다 10분 앞당겨 강습반에 가니 송과 장이 벌써 교실에 와있었다. 그가 우리 반에 온지 며칠이 되지만 나는 인사말 한마디도 건네보지 못하였다. 공안복을 입어서인지 괜히 엄숙해지면서 그와 거리감을 가지게 되는것이였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것을 보고 내옆에 가까이 와앉으면서 자 기소개부터 하였다. 그리고는 매일 수업이 끝난후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회화련습을 하는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알고보니 그가 늘 회화를 할수 있는 짝을 뭇기 위하여 일본말을 잘하는 사 람을 소개해달라고 선생님한테 청들었는데 나를 소개해주더라 는것이였다. 나도 회화를 할 사람이 있기를 바라던차라 쾌히 응낙하였다. 그날부터 우리는 좋은 길동무로 되였다. 공안제복때문에 가까이 하기 어려운줄 알았는데 지내고보니 아주 상냥하고 부지런하며 지식도 많고 또 따라배울만한 노력가였다. 그는 수업이 끝나면 내 가방부터 메고 천천히 걸었다. 내가 걸음이 그렇게 더딘데도 그는 조급해하지 않고 말없이 따라주었 다. 그는 내가 집으로 들어가는것을 보고서야 돌아가군 하였다. 물론 일어회화도 쉴새없이 주고받았다. 길림대학 법률계를 나온 그는 아는것도 많았다. 하여 그가 나한테서 일어회화를 배 운다기보다 내가 그한테서 더 많은것을 배우고있었다. 우리들의 일어회화실력은 재빨리 제고되였다. 우리 반에는 또 시문공단에서 사업하는 동무가 있었다. 그는 무용배우였는데 성이 최가이기에 모두들 “사이상”이라고 불렀 다. 그는 여느 배우와는 달리 춤을 추는데보다 일어공부에 더 집 착하고있었다. 우리 셋은 늘 짝이 되여 일어로 회화를 나누군 하 였다. 어느 일요일날이였다. 우리는 송선생의 제의로 강변공원에 가 회화련습을 하기로 하였다. “사이상”은 오전 여덟시도 되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왔다. 나는 22살이 되도록 한번 도 강변에 가본적이 없었기에 강변공원으로 간다니 너무나도 신 이 났다. “사이상”의 자전거짐받이에 앉아 강변에 가니 송선생은 벌 써 와 긴의자에 앉아있었다. 주변을 휘둘러보니 한폭의 아름다 운 수채화가 한눈에 안겨왔다. 나는 두만강변이 이렇게 아름다 운줄을 몰랐다. 나는 “야! 멋있어. 정말 멋있어!” 하고 연신 감탄해마지않았다. 송선생과 “사이상”은 말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 었다. 이곳에서 태여나 자란 사람이 두만강을 지척에 두고 여직 껏 한번도 와보지 못했다는것이 리해가 안되는 모양이였다. 그날 우리는 아름다운 강변공원에서 일어회화도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도 많이 주고받았다. 그후 나는 강변공원에 대한 느낌으로 작문을 썼는데 선생님 은 무척 잘 썼다고 칭찬하였다.
22    외래어사전으로 만난 귀인 댓글:  조회:1198  추천:0  2013-10-08
 외래어사전으로 만난 귀인   나는 방송강좌에 따라 영어공부를 좀 했기에 영어강습반에 가서도 그렇게 힘든줄을 몰랐다. 하여 매일 영어공부외에 일어 공부도 견지하였다. 일어수준이 높아지자 나는 우리 나라에서 출판하는 일어잡지인《인민중국》을 주문하여 보면서 모르는 단 어들은 자전을 뒤져 알고 지냈다. 자전을 너무 뒤지니 익숙해져 서 나중엔 척 펼치면 찾는 부수(部首)가 나오군 했다. 나 자신도 신기 할 정도였다. 저녁에는 반도체라지오로 청력훈련을 진행하였다. 한국국제 방송국에서는 저녁 6시부터 7시까지 한국어방송, 7시부터 9시 까지 일어방송, 9시부터 10시까지 중국어방송, 10시부터 11시 까지 영어방송을 하였다. 매개 언어방송의 첫 20분은 그날 뉴스 를 방송하였다. 뉴스내용은 전부 똑같기에 먼저 한국어로 뉴스 를 방송할 때 자세히 듣고 그다음 다른 언어로 방송할 때에는 그 말의 내용을 련계시키면서 들었다. 몇달이 지나자 웬간한 말은 다 알아들을수 있게 되였다. 그런데 일어외래어사전이 없어서 일어공부를 더 심도있게 하는데 저애가 되였다. 어떻게 하면 외래어사전을 구할수 있을 가? 한동안 궁리하던 나는《중국청년보》를 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신문에서 본 그분은 당시 요꼬하마대학에서 연수하고있는 중이였는데 고홍(顾红)이라는 필명으로 일본견문을 써서《중국 청년보》에 실었다. 나는 그가 쓴 문장들을 여러편 읽어보았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생동하게 쓴 그의 견문들을 읽노라면 마치 일본에 직접 가보는듯싶었다. 나는 이분의 도움을 받으면 되겠다싶어 그에게 편지를 써보 냈다. 나는 나의 상황을 간단하게 언급한후 외래어사전이 없어 서 무척 애를 먹고있으니 한권 보내주면 책값을 꼭 보내드리겠 다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런데 퍼그나 기다려도 종무소식이였 다. 나는 어느새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두달이 지난 어느날, 문득 배달원아저씨가 우표를 가득 붙인 편지를 가져왔다. 뜨락에서 라이라크꽃향기를 맡고있던 나는 얼 른 편지를 받아들었다. 바로 요꼬하마에서 온 편지였다. 나는 너 무도 반가와 편지를 뜯는 손이 막 떨리기까지 했다. 편지는 좀 갈긴 필체로 써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몇번 읽어보니 내용이 알리였다. 고홍은 그의 필명이고 본명은 곡조강(谷祖纲)이였다. 이분은 란주대학 지질지리학부의 교수로서 요꼬하마대학에 가 2년 동 안 연수하고 다음달에 중국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내가 고홍이 라는 필명을 썼기에 편지를 늦게 받아서 회답이 늦어졌다고 미 안해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귀국준비에 바쁘기에 얼마후에 귀국 하면 꼭 내가 요구하는 사전을 보내주겠으니 장애인이라고 위축 받지 말고 공부를 잘하여 성공하기 바란다고 고무격려하였다. 편지와 함께 사진도 동봉하였다. 사진속의 그분은 머리가 희 슥희슥한것이 아버지의 나이와 비슷해보이였다. 나는 곡조강선 생님의 편지를 받고 얼마나 큰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며칠후에 한 친구가 일어외래어사전을 들고 찾아왔다. 어디에서 샀는가고 물었더니 신화서점에서 샀다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코앞에서 구할수 있는것을 그렇게 속태우며 멀리에서 구하느라고 애쓰다 니… 아무튼 오매에도 구하고싶었던 책을 샀으니 기분이 무척 좋 았다. 이튿날 나는 인차 곡선생님한테 편지를 써서 사려던 책을 샀으니 그 멀리에서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알렸다. 그런데 나의 편지를 못 받았는지 두달후 곡선생님은 귀국하자 말 그대로 외 래어사전을 보내왔다. 나는 뜨거운 감사편지를 써보냈다. 그후 곡선생님은 해마다 몇번씩 편지를 보내오면서 고무격려해주었다. 곡선생님은 항상 나를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모양이였다. 북경에 회의하러 간 틈 을 타서 중국복리기금회에 들려 기금회에서 자료들을 얻어서는 나한테 보내주면서 우리 나라에서는 장애인들을 줄곧 관심하고 있으니 맥을 버리지 말고 꼭 견지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우리들은 몇해동안 편지거래를 하면서도 한번도 만나본적 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1986년 여름, 곡선생님은 대경에 서 열린 지질연구회의에 참가했다가 돌아갈 때 멀리 에돌아 우 리 집으로 나를 만나러 왔던것이다. 가석하게도 나는 그때 큰이 모네 집에 가있었기에 곡선생님을 만나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그분이 너무도 고마와 떠나갈 때 검정귀버섯을 한 근 사보냈다. 그랬더니 그는 돌아가자 그곳 특산인 원추리나물 을 보내왔다.그리고 가을의 란주는 아름답고 풍성하니 꼭 한번 놀러오라고 하는것이였다.그후 나는 공부가 바쁘고 생활도 바쁘고 하니 련계를 못하다가 결혼한후에 결혼소식과 결혼사진을 동봉하여 보내주었다.그는 너무도 기뻐하며 꼭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편지를 써보내 왔다.하지만 내가 생활에 쪼들리다 보니 끝내는 련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곡선생님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실로 귀중한 사람이였다. 아무때나 기회가 되면 꼭 그를 만나러 가려고 생각한다.  
21    영어강습반에서 댓글:  조회:1040  추천:0  2013-09-25
영어강습반에서   가방 뜨는 일은 일본에서 주문이 들어오지 않으니 몇달이 안되여 해산되고말았다. 어머니는 차라리 잘됐다고 했다. 그리고는 여 러곳에 수소문하여 영어강습반을 찾아놓았다. 인제는 아무 생각 도 하지 말고 본격적으로 영어공부를 하라고 했다. 내가 쓴 일어편지를 본후 어머니는 내가 외국어를 배울수 있 겠다고 느껴졌던지 내가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겠다면 극구 말 리였다. 6월 1일에 영어강습반을 시작하니 그전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나는 련 며칠 벼르기만 하다가 하루를 앞두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시과학기술관에서 영어강습반을 조직하는데 나 영 어를 배우고싶어요. 허락해주세요.” 겨우 이 몇마디를 하는 동안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해났다. 잠자코 있던 아버지는 생각밖에도 “그래 네 발로 다닐만하 겠니? 이전처럼 남한테 업혀다니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가거 라.”라고 하였다. 벼락같은 호령이 떨어질가봐 주저했는데 너무 도 쉽게 대답하니 정말 아버지가 하는 말이 옳은지 의심이 갈 정 도였다. 나는 너무도 기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윽하여 아버지가 출근하자 나는 어머니를 향해 “만세!” 하고 소리높이 웨쳤다. 이렇게 쉽사리 허락받을줄 알았더면 련 며칠 벼르며 잠 마저 설치지 않아도 되였을텐데…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던 아버지가 무슨 생각에 허락을 하 였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이젠 공부만 잘하면 되였다. 이튿 날 오후 3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기에 나는 점심을 먹자 집을 나 섰다. 우리 집에서 시과학기술관까지의 거리가 멀지는 않았지만 포장길이 아니여서 걷기가 아주 힘들었다. 간신히 시과 학기술관에 도착해보니 교실은 5층에 있었다. 층계로 5층까지 오르는데 약 20분이 걸렸다. 나는 보통사람들과 달리 층계를 오 를 때 정면으로 오르지 못하고 뒤걸음으로 올라가야 했다. 교실에 들어서니 한 사람도 없었다. 한동안 지나자 사람들이 륙속 들어섰다. 대부분은 중년들이였다. 이들은 모두 공정사시 험이거나 의사시험, 회계사시험 등 직함시험을 보기 위하여 영 어공부하러 온것이였다. 강습반 학원은 80여명이나 되였다. 선생님은 30대의 젊은이 였는데 영어를 아주 잘했다. 정말 부러웠다. (내가 선생님처럼 영어를 잘하려면 얼마나 공부해야 할가?) 나는 저으기 조급해나기까지 했다. 영어강습반에 다니니 학교에 다니는듯한감이 나서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서로 면목이 없어서 서먹서먹했지만 여러날 이 지나니 서로 친숙해져서 인사도 나누고 모르는것을 서로 묻 기도 하였다. 다들 나한테 신경을 쓰는것 같았다. 왜 다리가 그 렇게 되였는가고 묻는 사람도 있고 힘들어서 어떻게 다니겠는가 고 관심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반장은 관심이 더 지극했다. 반장은 나이가 꽤 되여보이는분인데 어느 단위의 과장직을 맡고 있었다. 직함시험을 치기 위하여 영어공부를 하는데 나이가 있 어 퍼그나 힘들어했다. 그는 나에게 무슨 곤난이 없냐고 묻기도 하고 층계를 오르내릴 때면 업어주겠다고 등을 들이밀기도 하였 다. 그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거절하군 하였다. 아버지와의 약속 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실 걸어다니기가 힘든건 더 말할것도 없었다. 특히 비가 오거나 바람이 씽씽 불어칠 때면 걸어가는것이 아니라 기여갈 지경이였다.  때론 흙물에 넘어져 온몸을 적시기까지 했다. 학교에 가다가 이런 변을 당하면 진퇴량난이였다. 수업시간이 늦을가봐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가기도 어려웠고 그런대로 학교에 가기도 힘들었다. 혹시 지나가는 사람들이 측 은한 눈길로 바라보면 정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고싶었다. 하지만 조련찮게 마련한 학습기회인것 만큼 이를 악물고 이 런 어려움을 하나하나 이겨나가면서 영어클래스에서 일년반동안 단 한번도 수업에 빠진적이 없이 우수한 성적으로 끝마쳤다.  
20    처음으로 잡은 일 댓글:  조회:940  추천:0  2013-09-22
  처음으로 잡은 일   그맘때 나의 동창생들은 대학교 혹은 중등전문학교에 입학 한 애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본지방 기업소에 취직하였다. 심지 어 나와 같은 장애인들도 모두 복리성기업소에 취직하였는데 나 만은 감감 모르고있었다. 이는 나에게 있어서 큰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몹시 부러웠다. 한달 꼬박 출근하여 타는 로임 이 고작 19원 밖에 안되였지만 이는 로동의 대가로서 삶의 동력 이다. 내가 지금 천신만고를 이겨가며 공부하는것도취직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놈의 취직은 항상 나와 거리를 두고 있으니 고민이 아닐수 없었다. 가두판사처에서 장애인조사를 진행하자 나는 일거리를 얻어 달라고 청구하였다. 가두판사처의 사업일군은 나보고 기다리라 고 하였다. 그런데 이제나저제나하고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나의 초조한 마음을 헤아린 어머니는 좋은 말로 달래였다. “너무 급해 말고 네 공부나 잘해라. 일은 늙을 때까지 할수 있지만 공부는 해야 할 때에 해야 하느니라. 공부를 하면 좋은 직업을 얻을수 있을지도 모르니 끝까지 견지하거라.” 어머니의 말씀이 아주 지당했지만 주위환경에 따라 덩달아 들떠지는것이 사람의 마음이였다. 나는 힘들게 마음을 가라앉히 고 계속 외국어공부를 해나갔다. 일년후의 어느날, 가두판사처 주임이 찾아와서 뜨개를 뜰줄 아는가고 물었다. 내가 안다고 하니 시에서 장애인들의 취직문 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공공장을 꾸렸다고 하면서 출근하라 고 했다. 순간 나는 날듯이 기뻤다. 공장이 좀 멀리 떨어져있기에 이튿날 나는 도시락을 싸가지 고 갔다. 어둑스레한 집안에 들어서니 한 아주머니가 나를 맞아 주었다. 커다란 온돌에는 20~30명 되는 아낙네들이 모여앉아 웃고 떠들면서 코바늘로 뭔가를 뜨고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견본을 놓고 굵직한 종이실로 가방을 뜨는 일이였다. 제품은 모 두 일본에 수출한다고 했다. 가방꽃무늬의 난이도에 따라 수공비가 정해지는데 나는 비 교적 쉬운 무늬를 맡았다. 하나를 다 뜨면 겨우 2원 50전을 벌수 있었다. 나는 일감을 손에 쥐였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외국어 공부를 어떻게 견지할것인가만 생각하였다. 특히 영어강좌는 빼 놓을수 없는 내용이였다. 나는 반도체라지오를 일터에 가져다놓고 강좌를 들으면서 영어공부를 하려고 작심하였다. 집에 돌아와 나의 생각을 어머 니한테 말했더니 돈은 안 벌어도 괜찮으니 공부에 지장을 주지 말라고 했다. 이튿날부터 나는 반도체라지오를 일터에 가져다놓 고 영어강좌를 명심해 들었다. 아낙네들은 손을 부리나케 놀리 면서 빨리 떠서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득바득 애쓰는데 난 어 김없이 영어강좌를 들으니 자연히 그들의 웃음거리로 되였다. 하지만 나는 남들이야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다보 니 나는 한달만에야 가방 하나를 겨우 떴다. 월급 타는 날 나는 단돈 2원 50전을 받았다. 이는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탄 월급 이였다. 돈을 받아쥔 나는 만감이 교차되였다. 그래도 출근하니 가분은 날것만 같았다. 직장에 나와 또래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일도 하고 영어공부도 하는것이 정말 신났다. 나한테서 공부를 배운적이 있는 그 장애인친구도 마침 이 뜨 개공장에서 함께 일하게 되였다. 그는 이미 시집을 가서 아주 힘 겹게 살아가고있었다. 그도 장애인인지라 걸음걸이가 힘겨웠지 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출근해서 가방을 떴다. 남편도 한쪽 다 리, 한쪽 팔을 잘 못쓰는 장애인이라고 했다. 모 복리성기업소에 취직하여 일하고있지만 두 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어려울지 보지 않아도 눈앞에 훤히 안겨오는것 같았다. 그 애의 생활모습을 통하여 나의 미래를 엿보는것 같아 나는 더럭 겁이 났다. 그때쯤 가도 판사처에서 복장강습반을 꾸린다니 등록하고 참가하였다.강습반이 끝나는 날 반사처의 주임은 나더러 꼭 배운재간으로 복장점을 꾸려 자립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였다. 그런데 나는 평생 글로 벌어먹야할 팔자인지 무엇이든 배우는데는 별 문제없는데 일을 하려면 어찌나 굼뜬지 복장 점을 꾸렸으면 밥먹고 죽벌이도 할것같지 못하였다. 나와 같이 배운 다른 장애인들은 너나없이 복장점을 꾸려 돈을 퍽퍽 벌어들이는데 나만은 안된다. 이러다가는 정말 무용지물이 되지않겠는가고 근심을 했더니 어머니는 근심하지말고 공부나 잘하란다. 역시 나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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