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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작약꽃 - 소야
2019년 07월 11일 14시 19분  조회:476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소야 
 
작약꽃
 
1
 
 
금이는 페달에 더욱 힘을 가했다.
 
이른봄이라 날씨는 아직 쌀쌀한 기운을 걷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달리는 자전거 속도에 바람은 더욱 거세여진다. 세찬 바람을 맞받아 달리는 그녀의 핑크색 옷자락과 뒤로 밀려가는 파란 스카프는 서로 어우러져 빨간 바탕에 파란 무늬가 돋힌 한장의 단풍잎이 허공에 떠있는 듯 싶었다. 내내 앞만 주시하면서 부지런히 두 발을 움직여가는 금이는 가끔 핸들을 잡았던 한쪽 손으로 옆구리를 만져보며 잠이 덜 깬 어린 딸애의 손이 자기 허리를 꽁꽁 감고 있는가를 확인했다. 두툼한 등산복으로 몸을 감싸고 목수건으로 얼굴까지 동이고는 자전거 짐받이에 앉아 몸을 그녀의 뒤잔등에 밀착시킨 딸애의 모습은 마치 늦가을의 비탈밭에 힘겹게 서 있는 외로운 옥수수대에 아스라하게 매달려있는 작은 옥수수이삭과도 흡사했다.
 
남들이 단잠에서 채 깨지도 않았을 이른아침에 금이는 여섯살 난 딸애를 싣고 작은 시가지중심을 향해 한적한 거리를 꿰질러 부지런히 달리고 있다. 마치 시가지 속 어딘가에 소중한 그 무엇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듯 말이다.
 
“우리 자은이 자는거야?”
 
한참을 달리다가 금이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짐받이에 앉아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딸애는 야무지게 대답해왔다.
 
“아니.”
 
“엄마 꽉 잡어.”
 
“알았어.”
 
“그렇지. 엄만 자은이가 최고야.”
 
“나도 엄마 최고!”
 
이처럼 살벌한 환경에서도 두 모녀는 살갑게 서로를 보듬고 있다.
 
반시간 실히 달려서야 시가지 도심에 들어섰다. 거리에 행인들이 가담가담 보였고 차량들도 하나 둘 나타났다. 금이는 부풀어나는 인파와 덮쳐오는 차량 사이를 꿰질러 간신히 시병원에 다달았다. 
 
그녀는 얼른 딸애를 안아내리고 자전거를 한쪽에 세워놓은 후 딸애의 얼굴까지 올리감았던 목수건을 풀어주고 두터운 등산복도 벗겼다. 자주색 작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고 금세 피여나는 분꽃마냥 생긋 웃는 딸애의 모습을 보고서야 그녀는 시름을 놓인듯 “휴―” 한숨을 내쉬였다.
 
금이는 딸애의 손을 잡고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룩거리며 병원에 들어섰다. 짧은 한쪽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몸이 반나마 그쪽으로 휘뚱휘뚱 기울어져 무척 힘에 부쳐보였지만 백합처럼 하얗고 깨끗한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찰찰 흐르고 있었다.
 
병원 안은 아직도 작은 바늘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듯 고즈넉했다. 안내 카운터에서 당직 간호원이 물 맞은 병아리마냥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그들은 엘리베터를 타고 810호 병실에 들어섰다.
 
겨릅대같이 여윈 송장 같은 바깥로인이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었는데 하얀 이불이 그의 목까지 푹 덮여있었다. 금이가 머리를 살짝 숙여 인사를 드리자 옆에서 한참 핸드폰과 씨름하던 로인의 딸인듯 며느린듯 한 40대의 녀자가 이제야 왔다는 뜻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못마땅한듯 그녀를 향해 눈살을 꼿꼿이 세웠다.
 
“애가 깨여나지 못해서요.”
 
금이는 묻지 않는 일을 조심스럽게 해석했다.
 
“됐어요. 근데 애를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요?”
 
몸집이 실팍한 것만큼 목소리도 남자음성마냥 굵직하였다. 검불 같은 머리를 손으로 대충 쥐여묶는 그의 고구마빵처럼 퉁퉁 부어오른 얼굴은 표정관리가 전혀 없었다.
 
“그건 걱정말아요. 좀 지나면 유치원에 데려다주시는 분이 올 겁니다.”
 
그제야 그 녀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널려있던 소지품들을 가방에 와락와락 챙겨넣고 나가더니 다시 들어와서 늙은 중이 념불을 외우듯 주절주절 늘여놓았다.
 
“8시에 점적주사가 있고 10시에는 휠체어에 모시고 심전도검사를 하세요. 그리고 침대보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자주 검사를 하구요. 수시로 혈압과 열이 정상인가를 체크하세요!” 
 
“알겠습니다.”
 
그 녀자는 잠든 듯한 로인을 흘끔 건너다보더니 쌩하니 바람을 일구며 나가버렸다.
 
점적주사시간이 아직도 두시간이나 있다.
 
금이는 애를 문가의 걸상에 앉혀놓고 그림책을 꺼내서 쥐여주고는 재빨리 간병인 옷을 바꿔입은 후 로인의 침대가로 다가갔다.
 
살이 다 빠진 누르께한 얼굴에서 금이는 로인의 앞길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아냈다.
 
“로인님, 식사를 하셔야지요? 뭘 드실래요?”
 
로인은 눈도 뜨지 않고 머리만 가로 흔들었다.
 
“뭐라도 드셔야지요.”
 
로인은 가타부타 말없이 그냥 눈을 감고 있었다. 
 
금이는 호주머니에서 잔돈을 찾아들고 병원식당으로 내려갔다. 가족의 부탁은 없었지만 그래도 로인한테 뭘 대접시켜야 할 것 같았다. 이른아침이여서 식당 안은 조용하였다. 음식카운터에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러가지 죽 외 빵이 있었다. 금이는 노란 좁쌀미음 한그릇과 애에게 먹일 빵 두개를 사가지고 올라왔다. 
 
금이가 병실에 들어서자 딸애는 뭐가 겁났던지 쪼르르 달려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다.
 
“괜찮아, 할아버지가 아프신 거야. 우리 자은이 착한 애지?”
 
그제야 자은이는 도로 걸상에 가 앉더니 엄마가 내미는 빵을 받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삼켰다. 
 
그녀는 사온 죽그릇을 들고 로인의 침대로 다가갔다.
 
“로인님!”
 
로인의 태도는 조금 변함이 없었다. 
 
“한술만 넘기세요. 안 그러면 치료해도 효험 없는 걸 아시죠?”
 
금이가 직성스럽게 권하자 로인은 할 수 없다는듯 가까스로 눈을 떴다. 
 
금이가 죽그릇을 들고 애원하는듯 서 있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던지 로인은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괜찮아요. 그냥 누워계셔요.”
 
금이는 조심스레 로인을 만류하고는 죽을 한술 떠 로인의 입가로 가져갔다. 로인은 간신히 받아물더니 한참 애를 쓰다가 겨우겨우 넘겼다. 금이가 또 한술을 가져갔다. 이렇게 다섯 숟가락을 넘기고 로인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알았어요. 참 애쓰셨어요. 그럼 잠간 쉬였다가 또 드세요.”
 
금이는 죽그릇을 잘 봉하여 상자에 넣어두고 대야에 따뜻한 물을 떠왔다. 몸을 휘우청거리다 보니 그때마다 대야의 물이 철렁거리며 쏟아져내려 한쪽 바지가랭이가 다 젖어버렸다.
 
“로인님 씻을까요?”
 
로인이 머리를 끄덕이자 금이는 수건을 적셔서 로인의 얼굴부터 시작하여 몸까지 닦은 후 손과 발도 깨끗이 닦아드렸다. 씻고 나서인지 아니면 미음 몇숟가락 드셔서인지 로인은 정신이 드는듯 감았던 눈을 뜨고 마치 오랜만에 깊은 잠에서 깨여난 사람마냥 주위를 두리번거리였다. 그러다가 말없이 문가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자은이를 바라보더니 다시 금이한테 눈길을 돌렸다. 
 
금이는 비록 다리를 절어 걸음걸이가 심하게 휘청거렸지만 일솜씨만은 야무지고 잽쌌다. 잠간새 병실청소까지 다 마쳤다. 창문을 반쯤 열어 공기도 바꾸고 로인의 침대보에 누기가 가득 차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까지 바꿔 깔고 나니 8시가 거의 되여갔다.
 
노크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상엽이 할머니가 오셨나 보다.”
 
금이가 딸애에게 속삭이듯 말하자 딸애가 오똑 일어나 살며시 문을 열었다.
 
회색코드에 안경을 건 상엽이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잊지 않고 오셨네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금이는 너무도 고마워서 눈물이 막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감사는 무슨 감사요. 그래 할 만하기는 한 거요?”
 
환자를 건너다보며 소곤거리는 할머니는 겉모습과는 달리 퍽 온화하고 자상했다. 
 
“그럼요. 그만한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고 자신 있게 속삭이는 금이를 보고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시더니 시름을 놓았다는듯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다리가 불편하다니깐 가족에서 대번에 꺼리더군. 그래서 내가 시켜보지도 않고 나무라다간 후회할 거라구 했지. 허허, 로인이 퇴원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걸릴 것 같구먼. 자은이 걱정은 말고 일자리가 생겼을 때 몇푼이라도 벌어두게.”
 
그리고는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자은이를 데리고 부랴부랴 병실을 나갔다.
 
금이에게는 참 은인 같은 고마운 분이다. 할머니의 손자 상엽이는 자은이와 같은 유치원에 다니고 한 책상에 앉는다. 
 
어느 날 유치원에서 ‘6•1’절을 맞으면서 부모님과 함께 ‘신문꾸리기’시합을 하였다. 
 
활동이 시작되자 다른 어머니들은 모두 애와 척척 합작을 해가는데 상엽이는 할머니 땜에 조급한 나머지 짜증에 투정까지 부렸다. 
 
손자의 성화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할머니를 본 금이는 말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다른 그림재간을 갖고 있는 그녀에게 유아작품 쯤은 얕은 내를 건늬는 격이였다.
 
“상엽이라 했지? 자은이 친구 맞지?”
 
“네.” 
 
울상이 된 상엽이는 작은 눈에 간절함을 가득 담은 채 애원에 찬 눈길로 말똥말똥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짝궁해볼가 잉?”
 
“네!” 
 
금이가 섬겨주는 크레용으로 색칠해나가는 상엽이는 점점 신이 났다.
 
상엽이와 자은이의 작품은 명절을 맞는 어린이들의 즐거운 모습을 서로 다른 내용으로 보여주었는데 그들 둘의 작품이 그 시합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애들은 좋아서 손벽을 치며 퐁퐁 뛰였고 상엽이 할머니는 감사한 나머지 눈굽을 찍었다. 
 
상엽이 할머니는 금이와 가까이 지내면서 금이의 가정형편을 알게 된 후로 적잖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지금 이 간병일도 상엽이 할머니가 소개한 것이였다. 심한 장애자이지만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를 할머니는 늘 동정해왔다. 불구자 몸에 어린애까지 달리고 보니 취직은 힘들고 경제기초가 없어 개체업도 엄두를 못내는 형편이라 날마다 여기저기 뛰여다니며 막벌이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만 얼굴에 항상 웃음을 달고 있는 그 모습에 상엽이 할머니도 마음이 녹아들군 하였다.
 
로인의 점적주사도 끝나고 여러가지 검사도 끝났다.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로인은 그냥 움직일 념을 않았다. 금이는 로인 곁에 다가앉았다.
 
“로인님 제가 책을 읽어드릴까요?”
 
로인이 머리를 끄덕이며 입가에 알릴락말락 느슨한 미소를 흘리자 금이는 《법률과 생활》잡지를 뒤적이다가 〈황혼의 사랑〉이야기를 내리읽었다. 서로 가족을 잃어 슬픔으로 나날을 보내던 두 로인이 새롭게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였다.
 
“재미있어요? 또 읽어드릴까요?”
 
로인은 또 머리를 끄덕였다. 내내 굳어져있던 얼굴이 좀씩 풀리기 시작했다. 자주 눈을 뜨고 금이를 쳐다보기도 하고 병실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물도 찾고 미음도 좀씩 더 드시군 하였다.
 
저녁시간이 이슥해지자 그 남자음성녀자가 병실에 들어섰다. 어디 찜찜한데라도 있기나 한듯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녀자는 흠잡을 데가 없음을 확인하자 말없이 지갑을 열어 50원짜리 지페를 꺼내 금이 앞에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금이는 두 손을 내밀어 조심스레 돈을 받았다.
 
간병비는 보통 경우에 따라 하루에 80원 100원이지만 금이는 불구자라는 조건으로 정상인들보다 늘 적게 받군 했다. 하지만 금이는 한번도 이런 걸 따진 적이 없었다. 아니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하루하루 생계가 힘들고 또 거동도 불편한 자기한테 일을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뿐이였다.
 
상엽이 할머니가 이 시간 쯤이면 밖에서 애를 데리고 기다릴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금이는 느직느직 간병인 옷을 벗고 자기 옷을 바꿔입었다. 그리고 갖고왔던 책들도 하나하나 가방에 집어넣었다. 남성음녀자는 금이가 챙기는 책을 흘끔 보더니 또 아니꼬운 눈길을 보냈다. 아마도 책을 보면서 시간을 때웠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금이가 문을 나갈 때까지도 그 남성음녀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금이는 서운한 마음으로 휘적휘적 다리를 움직이며 병실문을 나섰다.
 
“휴― 래일은 또 무슨 일을 해야지?”
 
병원을 나서며 금이는 넉두리하듯 중얼거렸다.
 
석달째 집세가 밀렸고 자은이의 유치원생활비를 낼 시간도 바득바득 다가온다. 자은이가 감기로 앓는 바람에 꽁꽁 모아두었던 집세가 몽땅 날아났었다. 남들이 다 쓰고 사는 아빠트 같은 건 제쳐놓고 애가 먹고 싶어하는 피자라도 마음껏 먹이고 애가 배우고 싶어하는 피아노연주를 배우게 하는 것이 금이의 소망이였다.
 
머리를 푹 떨구고 아픈 다리를 휘젓는 금이의 걸음은 더욱 느려졌다.
 
“래일 다시 오라는 말 안했나 보네 쯔쯔…”
 
자은이를 데리고 밖에서 기다리던 상엽이 할머니가 그녀의 기색을 살펴보더니 근심어린 소리로 말했다.
 
금이는 “네.” 하고 대답하려다가 인차 표정을 바꾸고 “기다려봐야지요.”하며 웃어보였다. 
 
상엽이 할머니와 갈라져 짙어지는 땅거미를 등지고 그녀는 자은이를 자전거에 앉힌 후 귀로에 올랐다.
 
“우리 자은이, 오늘 유치원에서 재미있었어?”
 
“네!” 
 
자은이는 뭐가 신났는지 캐득캐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딸 뭐가 이렇게 신났을가?”
 
“선생님은 내가 노래를 잘 불렀다고 짱이라고 했어요.”
 
“그럼, 엄마도 우리 자은이가 항상 짱이야!”
 
“상엽이는 피아노를 잘 쳤다구 선생님이 칭찬했어요. 자은이도 이제 파아노를 배우면 상엽이보다 잘 칠 거야.”
 
자은이 입에서 요새는 부쩍 피아노소리가 흘러나오는 바람에 금이의 마음은 알싸했다. 그것은 엄두도 못낼 꿈에 불과한 일이지만 금이는 어린 딸애의 그 천진한 마음속에 응어리가 맺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제 엄마가 돈 많이 벌어 우리 자은이한테 피아노도 사주고 피아노 공부도 시킬 거야.”
 
딸애의 짝짝하는 손벽소리가 하루 일에 지쳐버린 그녀에게 새 힘을 충전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금이는 애를 유치원에 보내고 부근의 위생저가락 공장에 찾아갔다. 출근시간이 되지 않은 공장 울안은 아직도 조용하였다. 금이는 이전에도 일거리가 없으면 늘 여기를 찾아와 일감을 얻어가군 했다. 저가락 한모씩 좁다란 종이봉투에 밀어넣는 일은 종일 집에 붙박혀서 부지런히 해도 고작 10원벌이였다. 그마저도 공장직원들이 월급 이외의 돈벌이를 하느라고 너도나도 다투어 찾는 바람에 이 일감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일감 맡으러 왔나?”
 
마당을 쓸고 있던 로경리가 웃으며 금이를 맞아주었다. 금이의 가긍한 처지를 잘 알고 있는지라 늘 금이한테 일거리가 있으면 더 많이 주고 먼저 주군 하는 로경리다. 
 
“일감 있어요?” 
 
로경리의 환히 웃는 얼굴을 바라보는 금이의 얼굴에 한가닥 희망이 서렸다.
 
“있네. 직원들이 오기 전에 얼른 가져가게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금이는 짐받이에 한키 넘게 일감을 싣고 자전거에 올랐다. 페달을 돌리는 금이의 모습은 마치 작은 개미가 큰 먹이를 힘겹게 굴려가는 듯싶었다. 금이가 집에 도착해 일을 막 시작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상엽이 할머니 전화번호가 떴다.
 
“네. 할머니…”
 
“자은이 엄마, 금방 그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도 와서 환자를 봐달라는구만.”
 
“아, 그러세요? 근데 어쩌죠? 제가 오늘 일감을 맡아왔는데…”
 
“또 그 몇푼도 안되는 저가락포장을 하려구?”
 
“그렇긴 한데요. 이걸 오늘 내로 해서 가져가야 합니다.”
 
“먼저 돈 되는 일하고 나중에 하게나.”
 
“안돼요. 신용을 지켜야지요.”
 
“착하기두… 쯔쯔… 내 다시 전화할게 기다려봐.”
 
금이의 고집을 알고 있는 터라 상엽이 할머니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래일이라도 오라는구만, 허허. 하루새 로인한테 점수를 많이 땄구만. 그 로인이 기어코 자네를 요구한다는구만. 하여튼 자은이 에미 착실함은 알아줘야 한다니깐.”
 
이튿날부터 금이는 다시 간병일을 시작했다. 금이가 하도 직성으로 로인을 간호한 덕분으로 열흘이 지나니 절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얘기도 할 수 있었으며 화장실 출입도 했고 보름 만에 퇴원을 하게 되였다.
 
퇴원하는 날 그 녀자는 태도가 많이 바뀌였다. 수고했다는 말도 했고 간병비도 80원으로 계산해주었으며 감사하다는 의미로 100원을 더 얹어주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보기는 처음이였다. 그녀는 더없이 흥분되였다. 그녀는 손에 돈을 꼭 쥐고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는 자은이의 예쁜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며 살풋이 웃었다.
 
 
2
 
 
이튿날 아침 자은이를 유치원에 바래주며 오늘 피자를 사주마고 약속을 한 금이는 자전거페달을 밟으며 또 저가락공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은행에 들려 전날에 받은 간병비를 저금하려다가 길가의 전주대에 식모를 찾는 광고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금이는 자전거에서 내려 다가가 그 집 지점을 확인했다. 
 
금이가 부랴부랴 찾아간 곳은 으슥한 골목에 자리잡은 작은 오락방이였다.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딸가닥소리와 진하게 풍기는 매캐한 담배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워날 지경이였다. 머뭇거리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니 남녀가 끼리끼리 모여앉아 마작판을 벌이고 있었다. 담배연기가 보얀 속에 마작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녀의 귀를 더욱 어지럽혔다. 
 
방안에 들어서서 어정쩡하니 서 있는 금이를 뚱뚱한 털보남자가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며 다가왔다. 
 
“저기… 밥하는 사람을 구한다기에…”
 
“그렇다만…”
 
몸집과 달리 유난히 작은 눈을 가슴츠레 뜨고 애매한 대답을 하면서 금이의 아래우를 신경질적으로 훑어보던 털보의 음흉한 눈길이 그녀의 하얀 얼굴에 와 꽂혔다. 
 
“음식은 물론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홀린듯 금이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던 털보남자는 알 수 없는 미지근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럼 하루만 해보라구. 품삯은 20원이야.”
 
금이는 그 털보남자의 눈길이 찜찜해났지만 몇시간 만 버티면 20원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냥 흘러버렸다. 
 
금이가 머리를 끄덕이자 털보는 그녀를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할 일들을 렬거하였다.
 
털보가 나가자 그녀는 얼른 옷을 벗어제끼고 채소부터 다듬기 시작했다. 반찬 두가지에 김치 한가지 그리고 국 한가지, 메뉴는 간단했다. 
 
금이가 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점심준비를 마치고 나니 아직도 한시간이나 남아있었다. 그 시간을 그냥 보낼 금이가 아니였다. 금이는 주방의 널린 그릇들을 씻고 닦고 하며 정리를 시작하였다. 잠간새 지저분한 주방이 깔끔한 모습으로 바뀌였다. 
 
한참후 털보가 들어오더니 깔끔해진 주방을 둘러보며 머리를 끄덕이였다.
 
“손부리가 야무지구만. 마작방 바닥두 마저 닦아주구려.”
 
금이는 털보가 시키는 대로 마작방에 들어가 구석구석의 먼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먼지가 보얗게 쌓인 모서리마다 걸레맛을 본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금이가 불편한 다리를 질질 끌며 걸레질에 여념이 없는데 어디선가 담배꽁초가 날아와 금이의 머리에 맞혔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금이가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주어들고 머리를 들자 키들거리며 힐끔거리는 일부 사내들의 눈길이 기분 잡치게 금이한테 쏟아졌다.
 
“사람한테 담배꽁초를 던지면 어떡합니까?”
 
금이는 몸을 오똑 일으키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방안의 모든 시선이 금세 금이한테 쏠렸다.
 
“어, 이제 보니 얼굴이 꽤나 하사하게 생긴 녀자였구만. 그 얼굴로 이런 청소를 하지 않아두 할 일이 많을 건데.”
 
“오늘 돈 딴 니가 저 녀자한테 선심을 쓰려무나. 너무 비싸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하하…”
 
마작군들은 서로 언거번거 치고 박으며 킬킬댔다.
 
금이는 갑자기 몽둥이에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듯 뗑해났다.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곳에 서 있는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마치 아득한 벌판에서 길 잃은 한마리 어린 양이 자기의 작은  몸뚱이를 어디로 옮겨가야 할지 갈팡질팡 헤매고 있는 듯했다. 
 
“멀쩡하니 뭐하고 있는 거여? 점심차려야지.”
 
털보가 돼지 멱따는 소리로 웨쳐서야 금이는 정신을 차리고 휘뚱거리며 겨우 주방으로 몸을 피했다. 
 
금이는 밥상을 차려놓고 그들을 피해 주방으로 들어와버렸다. 
 
밖에서 그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저 녀자가 왜 여기에 있지?”
 
누군가 금이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마씨 슈퍼집 외동딸이네. 한때는 귀하디 귀한 공주였잖아.”
 
“슈퍼에 큰 화재사고가 나는 바람에 인명사고로 부모들이 다 돌아가고 숱한 재산을 잃고 빚에 살던 집까지 날아났다네.” 
 
“그럼 저 녀자가 그때 그 마가네 그림 잘 그려 소문난 외동딸이란 말인가?”
 
“듣자니 사위놈도 그 일이 있은 후 어디로 튀였다던데.”
 
“당연한거지. 재산 넘보고 데릴사위로 들어간 놈이 빈털터리 됐는데 뭘 보고 물앉아있겠어?” 
 
“화재는 사위가 저지르고 보험금 챙겨가지고 어디론가 튀였다던데요.”
 
“귀하디 귀하신 공주님이 인젠 돈이 퍽 필요한가 보네.” 
 
“그때 서너살 되는 딸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래.”
 
마작판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금이는 더는 그들이 지껄여대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인정사정 몰라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야속했다. 아무리 세상이 야박하고 무심하다지만 이렇게 남의 아픈 상처에 지독하게 소금을 뿌릴 수가 있단 말인가. 금이는 당장 뛰쳐나가 그들과 시비라도 캐고 싶었지만 그냥 주방구석에 주저앉아 소리없이 눈물만 쏟을 뿐이였다.
 
3년 전 온 시가지를 들썽한 화재사고에 가산을 탕진하고 혈육까지 잃은 뒤 남편까지 종적을 감추었다. 하지만 금이는 지금껏 이 모든 것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아픈 기억들을 지우려고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버렸는데 오늘 느닷없이 뒤집힐 줄이야… 
 
마작쪽을 휘젓는 소리가 또다시 귀를 어지럽힌다. 그것은 마작소리가 아니라 금이의 하나밖에 없는 심장을 도려내려는 소리같이 들려왔다.
 
금이는 머리에 벌둥지가 터진듯 윙윙해났고 갑자기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겨우 설겆이를 마치고 떠날 차비를 서두르는데 털보가 들어오더니 주방문을 닫아버렸다. 털보는 하루 일당으로 말한 대로 20원을 내밀었다. 금이가 말없이 받아 챙겨넣고 막 나가려는데 갑자기 털보가 뒤에서 금이를 껴안았다. 
 
“이대로 가면 섭섭하지, 흐흐흐.”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역겹게 얼굴에 덮쳐왔다. 뒤이어 우악스런 손이 금이의 가슴를 헤집으려 들었다. 금이가 죽기내기로 몸부림을 치자 털보는 더욱 힘을 주며 금이를 끌어안았다.
 
“안 놓으면 소리칠래요!”
 
금이의 그 한마디에 털보는 생각을 바꾸었는지 감았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서 100원짜리 지페를 꺼내보이며 구슬리기 시작하였다. 
 
“돈이 필요하다며?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품삯은 고작 20원을 쥐여주고도 그 따위 짓엔 100원씩나 내흔드는 징글스런 상판대기를 보니 막 역겨워났다. 
 
금이는 호주머니에 넣었던 20원마저 털보의 얼굴에 홱 뿌려던지고 비칠비칠 마작방을 빠져나왔다.
 
“미련한 년…”
 
털보의 욕지거리가 금이의 뒤통수를 아프게 때렸다.
 
간신히 자전거를 잡았지만 마치 몇년간의 시달림을 받은듯 다리맥이 풀려 자전거에 오를 기운도 없었다. 맥없이 자전거를 밀고 거리를 방황하는 금이의 얼굴에 차가운 바람이 후려친다.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픈 다리가 감각을 잃은 듯싶었다. 
 
갑자기 자은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오늘 자은이한테 피자를 사주자고 약속했지.”
 
딸 생각을 하자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금이는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딸애의 배시시 웃는 얼굴과 피자가 엇갈아 떠올랐다.
 
금이가 피자집에 들려 피자를 예약하고 돈을 치르려고 가방을 뒤지자 돈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싶었다. 금이는 급히 가방을 거꾸로 들고 안의 물건들을 와그르르 쏟아내고 털고 또 털어보았다. 하지만 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보름동안 간병일로 번 뼈돈이 어디로 통채로 사라져버렸다. 금이는 피자집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웬 일이세요? 괜찮으세요?”
 
피자집 주인이 금이의 얼굴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다가와서 부축하였다. 
 
“괜찮습니다. 미안합니다.”
 
금이는 간신히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그녀는 길바닥 여기저기에 눈길을 쏟았다. 하지만 금이가 찾는 돈이 보일 리가 없었다. 행여나 요행을 바라면서 그 마작방으로 찾아갔다. 한참 머뭇거리던 금이는 문 앞에서 다시 돌아서고 말았다.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게 뻔한 일인데 굳이 이곳에서 또다시 자신을 괴롭혀가며 싱갱이질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다시 자전거를 돌렸다. 
 
갑자기 전신의 맥이 풀리면서 숨이 가빠졌다. 이어 눈앞이 흐릿해나더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금이는 자전거를 길옆에 세워놓고 쪼크리고 앉아서 쑤시듯 아파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지나가던 행인이 잔등을 두드려주며 물었다. 
 
“병원에 모실까요?”
 
언제부터였던지 금이는 가끔씩 이상한 아픔에 시달렸다. 이럴 때면 이렇게 한참씩 앉아서 숨을 돌리군 하였다. 금이가 괜찮다고 고집스레 손사래를 저어서야 손님은 별수 없다는듯 자리를 떴다.
 
숨을 돌리고 나니 자은이의 얼굴이 또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며 다시 일어났다. 자은이가 기다릴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썰렁한 유치원문 앞에 자은이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홀로 서 있는 딸애를 보자 금이의 다지고 다져졌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자전거를 버리고 휘청거리며 다가가 딸애의 가냘픈 몸을 끌어안았다.
 
“우리 자은이 엄마를 오래 기다리고 있었구나. 미안해.”
 
“조금 추웠어.”
 
딸애는 울먹거리며 금이의 품에 안겼다.
 
“가자, 엄마가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줄게.”
 
금이는 딸애를 안아 자건거 뒤에 앉히고 집으로 향했다. 딸애한테 사주지 못한 피자가 눈에 삼삼히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힘겹게 밟는 페달에서 찌걱찌걱 소리가 유난히 구슬프게 들려왔다.
 
 
3
 
 
어느덧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긋지긋한 고달픔 속에서 흘러가버렸다.
 
그 사이의 눈물겨운 삶은 금이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었고 수많은 사연들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강한 마음을 키우게 하였다. 한푼 두푼 힘들게 모여지는 돈액수를 감지하며 금이는 자신이 꾸고 있는 꿈이 아직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이튿날 금이는 애를 유치원에 보내고 또 저가락공장에 찾아갔다. 
 
로경리가 금이를 보자마자 호주머니에서 일군 찾는 광고를 넘겨주었다.
 
씌여진 번호에 따라 버튼을 눌러가는 금이의 얼굴에 또 한가닥의 미소가 어렸다. 
 
“가정부를 요구하세요?”
 
“네. 애도 보고 가정일도 도울 수 있는 분을 찾습니다.”
 
젊은 녀자의 목소리가 폰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금이가 약속장소에 나타나자 젊은 녀자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의 아래우를 깐깐히 훑어보았다. 길이가 같지 않은 두 다리는 량쪽으로 심하게 휘였고 그로 인해 핑크색 웃옷깃이 한쪽이 들리고 한쪽이 처져있었는데 그 모습은 그냥 보기만 해도 곁사람이 막 불편해날 지경이였다.
 
“가정일을 해보았나요?” 
 
걱정에 가득 찬 눈길을 보내는 젊은 녀자는 말투가 퍽 례의스러웠다.
 
“못해봤지만 할 수 있습니다.”
 
금이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젊은 녀자는 다시 련락드리겠다고 뒤를 달았다. 
 
이런 일을 한두번 겪는 게 아니였다. 
 
“저기요, 저를 못 믿어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오늘 하루만 시켜주세오. 맘에 안 드시면 월급 안 줘도 괜찮습니다.”
 
“아줌마 몸이 걱정되서 그러는 겁니다.”
 
솔직함이 엿보이는 젊은 녀자의 말에서 그녀는 고마움이 느껴졌다. 
 
“이래 봐두 일은 잘할 수 있습니다. 간병일도 식모일도 해봤습니다.”
 
금이의 당찬 말에서였던지 아니면 간절함이 그득한 마음을 읽어서였던지 젊은 녀자는 드디여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머리를 끄덕였다.
 
젊은 녀자의 집은 한신아빠트구역이였다.
 
집안은 꽤 널직하였으나 장식은 소박했다. 금이가 들어서자 젊은 녀자는 객실 여기저기에 널려있던 애 놀이감들을 부랴부랴 주어모았다. 그러면서 얼굴에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애도 보고 가정일도 하려면 퍽 힘들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 만이라도 괜찮습니다.”
 
서로의 솔직함에 두 녀자는 편안함을 느꼈고 말없는 웃음 속에 진실함이 흘렀다. 
 
“아침 8시에 애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저녁 3시반에 데려오면 됩니다. 그 사이 집청소와 빨래들을 하실 수 있겠어요?”
 
“알겠습니다. 얼마든지요.”
 
며칠이라도 좋았다. 아니 단 하루라고 좋았다.
 
이튿날부터 금이는 젊은 녀자의 집의 가정부로 되였다. 금이는 젊은 녀주인한테서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함을 느꼈다. 
 
젊은 녀자는 시 실험중학교 어문교원이였다. 그는 금이한테 자기를 주선생이라고 부르면 된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금이가 주선생님 집에 들어서니 주선생은 잠옷 바람에 한창 애한테 밥을 먹이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금이는 얼른 옷을 벗고 손을 깨끗이 씻은 후 주선생님 대신 애한테 밥을 먹여주었다.
 
“얼른 출근하세요, 애는 제가 유치원에 데려갈게요.”
 
“그럼 수고해주세요.”
 
금이가 애한테 밥을 먹이는 사이에 주선생님은 간단하게 얼굴을 다듬고는 부랴부랴 출근했다. 
 
금이는 애한테 밥을 다 먹이자 세수를 시키고 머리도 곱게 따준 후 유치원에 데려갔다. 집에 돌아오자 금이는 주방청소부터 시작했다. 먼저 식기들을 씻어서 정연하게 얹어놓은 다음 바닥들을 말끔히 닦아놓았다. 주방청소가 끝나자 객실청소를 시작했다. 구석구석에 널려있는 옷가지들을 정리해 옷궤에 넣어주고 탁자 우에 널려있는 책들을 정리했다. 탁자 우에는 컴퓨터와 무슨 자료 같은 것이 어문교과서와 함께 놓여져있었는데 교과서에는 여기저기에 줄을 긋고 깨알같은 글들이 가득 씌여져있었다. 보니 교수준비를 하고 그만 교과서를 잊고 두고 간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그 교과서를 가져다주어야 할 것 같아서 금이는 얼른 교과서를 자기 가방에 넣고 휘뚱거리며 계단을 내려가서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철컥”하는 소리에 내려서 보니 사슬이 벗겨졌던 것이다. 다시 씌워가지고 가려면 늦을 것 같았다. 금이는 자전거를 거리의 한쪽에 세워놓고 택시를 타고 실험중학교로 찾아가면서 주선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종시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별수없이 금이는 아픈 다리를 휘청거리며 교과서 앞장에 씌여진 이름을 대고 주선생을 찾아 학교에 들어갔다. 금이가 금방 현관문 앞에 이르렀는데 주선생이 쫓기는 사람처럼 황급히 뛰여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얼른 교과서를 내밀자 주선생은 마치 오랜만에 친정어머니를 만난듯 기쁨에 겨워 어쩔 바를 몰라했다.
 
“감사해요. 감사해요. 다음 시간에 공개교수를 하는데 그만 깜박하고…”
 
자기 머리에 가벼운 주먹을 안기는 주선생은 연신 감사하다고 곱씹었다. 
 
“잘 봐요, 빠뜨린 게 없는지.”
 
“네. 없습니다. 감사해요.” 
 
주선생은 또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누가 부르기라도 하듯 부랴부랴 교사 안으로 뛰여들어갔다. 
 
금이는 얼른 학교대문을 나왔다. 한신아빠트까지 걷자면 시간이 적잖게 걸리고 힘에 부칠 수도 있지만 금이는 한차례 어려운 겨룸에서 승부한 장군마냥 뿌듯하기만 했다. 걸음마저 휘뚱거리는 보잘 것없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였다는 그 자체가 금이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였다. 남들은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쉽게 갈 수 있는 거리지만 금이는 반시간도 넘어 걸어서야 주인집에 도착했다. 힘들게 걸어오느라 온몸은 땀벌창이 되였지만 꿀물을 마신듯 마음은 즐거웠다. 하다만 객실청소에 빨래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새 애를 데려올 시간이 되였다. 
 
금이는 옷을 꿰지르고 부랴부랴 계단을 내려 자전거를 타고 유치원으로 달려가 아이를 데려왔다. 
 
애는 엄마 없이 텅 빈 집에 들어서자 칭얼대기 시작하였다. 
 
“엄마는요? 엄마한테 갈래요.”
 
낯선 사람이라 애는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엄마 곧 올 거니깐 우리 그림을 그리며 기다리는 게 어때?”
 
금이는 가방에서 얼른 종이와 연필을 꺼내놓고 그림을 그렸다. 병아리, 토끼, 거부기…
 
“나도 그릴래.”
 
말없이 보고만 있던 애는 언제 떼질을 부렸냐 싶게 그림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금이가 여러가지 동물들을 그려주고 텔레비죤에 애들이 좋아하는 《뽀로로》프로를 켜놓았다. 애는 그림에 정신이 팔려 금이의 말을 고분고분 잘도 들었다. 
 
주선생님은 제시간에 퇴근해왔다. 집안을 둘러보던 주선생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사이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셨네요. 고마워요.”
 
주선생님의 웃음을 보자 금이는 시름이 놓였다. 그가 옷을 주어입고 떠날 차비를 하자 주선생님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많이 힘드실 텐데 식사라두 하고 가셔야지요.”
 
금이는 밥을 먹은 것보다 배가 더 불러왔다. 이젠 할 일을 끝냈으니 그도 가서 딸을 챙겨야 하였다. 겨우 뿌리치고 나오는데 주선생이 문을 열고 소리쳤다.
 
“래일도 그 시간에 오실 수 있겠어요?”
 
“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대답을 보냈다. 같은 일을 해도 대접이 다르다. “래일 또 오세요.” 해도 좋아서 날 것만 같은데 “오실 수 있어요?” 꼬박꼬박 존대말을 붙일 뿐만 아니라 권리까지 자기한테 양보하는 주선생이 마치 천사같이 느껴지면서 자신의 몸값이 갑자기 오르는 듯싶어지고 자신감도 팍팍 생겼다.
 
 
4
 
 
애를 싣고 페달을 부지런히 밟으며 귀가하는 금이는 여느 때 같으면 지쳐서 쓰러질 듯했건만 오늘은 웬지 명절날 하늘 높이 떠있는 고무풍선마냥 마음도 붕 떠있었다.
 
“엄마, 오늘 신났어?”
 
금이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어린 딸도 덩달아 좋아했다.
 
“그럼.” 
 
“돈 많이 번 거야?”
 
“돈두 벌구 이쁜 선생도 만났지.”
 
“우리 선생만큼 이뻤어?”
 
“그럼 선생들은 다 이쁜 거야, 선생들 엄청 힘드니깐 말 잘들어야 해. 알았지?”
 
“알았어.”
 
이튿날 금이는 전날보다 또 더 일찍 도착하였다. 그때까지 주선생은 아침밥도 먹지 못했고 눈까지 팅팅 부은 걸 보니 아마도 밤을 새며 또 무슨 자료를 쓴 것 같았다. 금이는 주선생도 아이를 데리고 홀로 사는 모습이 자기의 처지와 비슷함을 의식하며 마음이 아련히 젖어왔다. 
 
“제가 간단히 아침 차릴게요. 출근 준비하세요.”
 
“아침 먹을 시간 없어요. 출근해야 해요. 애한테 아침 챙겨주세요.”
 
주선생님은 부랴부랴 얼굴을 대충 문지르고 웃옷과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다시 들어와 금이한테 물었다.
 
“깜빡 잊었네요. 한 학교 선생의 부탁인데 청소 도우미 한집 더 해줄 수 있겠어요?”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금이는 주선생의 마음을 감내하며 눈시울이 젖어올랐다. 
 
이런 일은 매일 하는 것이 아니였다. 다행히도 어떤 집은 한주일에 한번 또 어떤 집은 한주일에 두번씩 요구했기에 주선생네의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다른 집의 일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주선생의 소개로 한꺼번에 여러 집 일을 장기적으로 맡게 되였다.
 
며칠후 금이는 종전처럼 주선생네 일을 끝내고 주선생이 소개한 염선생네 집으로 청소하러 갔다. 주선생처럼 애를 데리고 출근한다는 염선생네 집도 주선생네 집과 같은 모습이였다. 여기저기 책들이 널리고 애 옷이 꿍져있었다. 금이는 하나하나 닦고 정리하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침실청소를 하게 되였다. 침실벽과 침대 사이에 손이 나들 수 없는 작은 쯤이 있었다. 들여다보니 지저분하게 뭐가 가득 쌓여있었다. 손을 넣을 수 없자 금이는 플라스틱 비자루에 걸레를 감아 밀어놓고 쓰레기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다시 깨끗한 걸레를 넣어 먼지를 말끔히 닦아낸 후 쓰레기를 버리려고 주어담는 순간 금이의 눈앞이 반짝 빛났다. 다시 눈여겨보니 굵직한 황금목걸이가 쓰레기 속에 섞여있었다. 얼핏 봐도 몇만원은 쉬이 갈 것 같았다. 갑자기 온몸에 긴장이 쫙 배면서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을 해댔다. 
 
2년전 집세가 껑충 뛰여오르는 바람에 시가지 밖 교외로 집을 옮기면서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을 어쩔 수 없이 싼 값으로 처리하던 아픈 추억이 머리를 헤집었다. 어쩜 아버지의 목걸이가 다시 돌아온 거 아닐가 하는 착각도 뒤따랐다. 그녀는 목걸이를 두 손에 받쳐들고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손에 꼭 쥐고 가슴에 대여보기도 하고 목에 걸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아버지 것이 아니였다. 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를 버리고 목걸이를 깨끗이 닦아 다시 화장대 앞에 고스란히 놓아두었다.
 
청소를 거의 마쳤는데 전화에서 낯선 녀자의 독촉이 성화같았다. 
 
“아니 왜 아직도 안 옵니까?”
 
“인차 갑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독촉전화가 몇번째로 걸려오는지 몰랐다. 금이는 염선생네 집청소를 깨끗이 마무리하고 나서 부랴부랴 자전거를 타고 낯선 녀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어지러운 골목길을 에돌아 도착한 곳은 작은 단층집이였는데 집에 들어서니 대낮부터 녀자 넷이 자리를 틀고 앉아서 트럼프를 치고 있었다. 그중 주인인 듯한 녀자가 금이를 맞았다. 얼굴은 요염하게 화장을 했고 깊게 패인 블라우스에 허벅다리가 거의 다 드러나있었으며 긴 손톱은 진한 매니큐어에 가리워있었다.
 
“아줌마 왜 이제야 와요?”
 
“선약이 있어서요. 미안합니다.”
 
“돈을 더 주겠다는데 선약은 무슨. 돈을 벌려면 머리가 팽팽 돌아야지요.”
 
그리고는 천정을 쳐다보며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내여 웃어댔다.
 
사지가 펀펀한 녀자가 대낮에 집에서 트럼프치기를 하면서 사람을 불러일 으키는 꼴에 눈이 시려났다. 갑자기 힘이 빠지는 듯하였다. 금이가 주방에서 아니꼬운 눈길을 흘리는데 저들끼리 주고받는 소리가 그의 귀속을 파고 들었다.
 
“아니 왜 저런 녀자를 불러? 바람이 불면 넘어질가 무섭다야.”
 
트럼프장을 나누던 나이 지긋한 녀자가 눈알을 굴리며 선코를 뗐다.
 
“언니 몰라서 그래. 소문 못 들었어요? 저래 보여두 일솜씨만은 재다잖아요. 음식도 잘하구요. 그보다두 삯전 따지지 않구 그냥 주는 대로 받는대요.” 
 
주인녀자가 엄청난 빅뉴스를 방송하듯 얄팍한 눈가죽을 판들거리며 신비스레 주어섬겼다.
 
“그래? 그럼 우리도 불러야 되겠다야, 세월이 참 좋긴 좋다. 우리 녀자들 발바닥에 털이 돋게 생겼구나. 하하하.”
 
그들이 언거번거 지껄여대는 소리를 들으며 금이는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돈이 필요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이처럼 파렴치한 삶을 사는 녀자들의 돈을 벌고 싶지 않았고 아까운 정력을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소모할 수가 없었다. 
 
“저기요, 저 갑자기 일이 생겼어요. 오늘 일할 수 없게 됐어요.”
 
금이가 막 문을 나가려는데 주인녀자가 막아나섰다.
 
“나, 돈 많아요. 돈 많이 줄게요. 걱정말아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올리뻗쳤다. 돈을 내걸고 하는 인간모욕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끝내 품삯 더 주겠다며 지꿎게도 구슬리는 주인녀자를 뿌리치고 나와버렸다. 격분한 나머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어느덧 석달이 되였다. 주선생은 금이를 자은이엄마라고 불렀고 애는 금이를 그림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금이는 날마다 애를 데려오면 금이가 올 시간까지 그림그리기를 가르쳤는데 애는 제법 빨리 배워냈다. 주선생은 처음에 그냥 애하고 장난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 애가 작은 병아리를 여러가지 모양으로 그린 것을 발견하고 무척 관심이 생겼다.
 
“윤지, 이거 우리 윤지 그린 거 맞아?” 
 
“응, 내가 그렸어.” 
 
천진한 애는 머루알 같은 눈을 깜박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비록 간단한 그림이지만 연필 쥘 줄도 모르던 세돐짜리 애가 오려대는 품이 제법 장난이 아니였다. 
 
이튿날 주선생은 금이를 불렀다.
 
“자은이 엄마, 그림그리기를 배운적 있어요?”
 
“네. 어릴 때부터 결혼 전까지 그냥 그림학원에 다니였어요.”
 
“아, 그러셨구나.”
 
“바로 윤지 유치원 부근에 친정 부모님 집이 오래동안 비여있는데 애들이 끝나는 시간부터 선생들 퇴근시간까지 윤지 같은 애들을 대상해서 그림그리기를 가르쳐보세요.”
 
주선생의 말에 금이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하지만 금이는 도로 표정을 바꾸었다.
 
“감사합니다만 저한테 아직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사실 그림보습반을 꾸린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고 또한 한마디로 결정할 일이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림종이와 연필 같은 건 애들 자체로 해결한다 하더라도 집세와 그림그리기에 필요한 비품준비에 자금이 적잖게 수요될 게 뻔한 일이였다. 
 
“집은 몇년 비여있던 거라 조금만 청소하면 걱정 안해두 되구요. 흑판과 책상 같은 것들은 가능하게 학교에서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학부형들을 동원해 될수록 자은이 엄마한테 부담을 주지 않게끔 제가 노력해볼게요.”
 
그때로부터 금이의 일상은 주선생 덕분에 매일 고정된듯 질서 있게 돌아갔다. 아침 6시면 자전거에 애를 태우고 출근길에 오르고 두시간정도 돌아쳐 주선생네 일을 마무리했다. 그다음은 시간이 자라는 대로 이 집 저 집 다니며 청소를 하다가 3시반부터는 선생들이 퇴근하는 시간까지 애들을 봐주며 그림공부를 가르쳤다. 작은 미술학원에 애들도 하나 둘 불어났다. 주선생의 연줄로 주선생네 학교 교원자녀들이 거의다 온 것 같았다. 
 
온종일 팽이처럼 돌아치고 나면 다리가 쑤시듯 아프고 몸은 피곤에 절어들지만 금이는 학원에 온 애들을 위해 그림가르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는 날마다 이를 악물고 버텨갔다. 만약 이 정도로 계속 나간다면 자은이한테 피아노도 사줄 것 같았다. 자은이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고운 목청을 뽑으며 생긋 웃는 모습을 떠올리고 나면 하냥 마음이 즐겁기만 하였다. 아득히 먼 꿈으로 느껴지던 것이 야금야금 눈앞에 현실로 박두하는 듯한 느낌으로 그녀는 또다시 힘을 얻군 하였다.
 
 
5
 
 
주선생네 가사일을 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였다.
 
자은이는 주선생의 소개로 부근의 소학교에 입학했다.
 
금이는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일에 전념했고 하루같이 애들의 미술수업을 해주었지만 돈이 생각대로 쉽게 모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금이는 또 두 로인을 목욕시키는 일까지 맡아했다. 
 
늙은이를 목욕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엄청 힘들었고 심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였다. 거동이 불편한 로인들이다 보니 그녀의 작은 힘으로 로인의 몸을 받쳐주어야 했고 살집이 없는 몸을 문지르는 자체가 무리였다. 처진 피부가 여기저기로 밀려다녀 도무지 때를 밀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안깐힘을 써서 목욕을 시키고 나면 눈앞에 별찌가 날아다녔고 몸이 휘청거려 항상 벽에 몸을 기대고 한참을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하루는 금이가 두 로인을 목욕시키고 잠간 숨을 돌리려는데 청소를 해달라는 전화가 왔다. 금이는 숨도 돌릴새도 없이 부랴부랴 층계를 내려갔다. 갑자기 눈앞이 까매지면서 계단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금이는 억지로 란간을 잡고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간신히 한층한층 내려오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끝내 출입문어구에 쓰러지고 말았다.
 
금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병원응급실에 옮겨진 뒤였다. 병실에서 간호원들이 분주히 오갔고 이따금 환자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금이의 팔에는 점적주사바늘이 꽂혀있었고 맑은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져 금이의 혈관에 흘러들고 있었다. 금이는 자기가 어떻게 되여 여기로 왔으며 누가 자기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이때 금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자은이 어머니, 어디세요? 유치원에서 애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깜박했네요.”
 
금이는 절로 손에 꽂혀있는 주사바늘을 빼버리고 얼이 나간 사람마냥 황급히 병실을 뛰쳐나갔다. 간호사들도 어쩔 새 없이 뛰여나가는 금이를 눈이 휘둥그래서 멍하니 바라볼 뿐이였다.
 
금이가 허겁지겁 유치원으로 달려가 애를 데리고 주선생네 집에 도착하자 주선생도 이어 퇴근해왔다.
 
금이의 파리해진 얼굴을 보던 주선생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자은이 어머니 어디가 많아 아파보이는데요?”
 
“아니 괜찮습니다. 급히 오다 보니 숨이 좀 차서 그런 겁니다. 미안합니다. 저녁밥을 지어놓지 못했습니다.”
 
“그런 건 걱정마세요. 정말 괜찮으세요?” 
 
주선생은 근심어린 눈으로 금이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정말 괜찮습니다.” 
 
금이가 웃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여 보여서야 주선생이 조금 시름을 놓는 표정이였다.
 
“그럼 얼른 가보세요. 자은이가 기다리겠어요. 그리고 래일은 주말인데 푹 쉬세요.”
 
“네. 선생도 휴식 잘하세요.”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금이는 마치 자기가 낮에 황당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아찔한 장면들이 영화필림마냥 눈앞에 오갔다. 하지만 그녀는 하루밤 푹 자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을 하며 래일 해야 할 일을 머리속으로 더듬어보았다.
 
밥을 먹고 숙제를 하려던 자은이가 느닷없이 쫑알거렸다.
 
“엄마, 오늘 선생님이 내가 피아노를 잘 친다고 칭찬해주었어요.”
 
“그래? 울 자은이 용쿠나. 인젠 선생님 칭찬까지 다 받구.”
 
“엄마, 근데 피아노 언제 쯤 사주나? 자은이 피아노 갖고 싶은데.” 
 
딸애의 말똥하니 쳐다보는 눈길을 피하며 금이는 무거운 머리를 끄덕이였다.
 
“이제 봄이 와 꽃이 곱게 피여날 때면 엄마가 자은이한테 피아노 사줄 거야.”
 
“그럼 꽃이 피기를 기다려야겠네.”
 
자은이는 신나서 짤깍짤깍 손벽을 쳐댔다.
 
금이는 이제 봄이 오면 일체를 불구하고 자은이한테 꼭 피아노를 사주리라 결심했다. 그녀는 자기가 자은이의 존재로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숙명처럼 자신을 꽁꽁 묶어놓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자은이를 빼고는 자신의 삶의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6
 
 
층집너머로 아스랗게 바라보이는 멀리 산릉선에 희끗희끗 보이던 눈들도 사라지고 훈훈한 공기가 남쪽으로부터 봄을 몰고 오며 지긋지긋한 겨울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사이 주선생네 애와 학원의 애들도 거의 다 학교에 들어갔다. 금이가 꾸리고 있는 미술학습반도 예전과 다름없이 아이들로 북적거렸고 금이 역시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바삐 돌아쳤다. 그녀는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미술학습반 외 가사일을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해빛이 찬연한 어느 휴식날 금이는 자은이를 데리고 악기상점을 찾아갔다. 악기상점 안에는 별의별 악기가 자리가 모자라게 진렬되여있었다. 제일 눈에 띄우는 곳에 사람의 얼굴까지 환이 비치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피아노가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피아노를 보자 금이는 심장이 저도 모르게 거세게 높뜀을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을 위해 금이는 이 몇년간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왔는지 모른다. 지금 이 시각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아, 피아노!”
 
자은이는 피아노를 보자 달려가 작은 손으로 피아노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이달 월급까지 받으면 독일제피아노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세차게 설레이면서 가슴이 뿌듯해났다.
 
“이제 한달 후면 엄마가 자은이한테 이 피아노 사줄 거야.”
 
“정말?”
 
금이는 반짝이는 자은이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확에서 소리없이 뜨거운 것이 솟구쳐올라왔지만 딸애는 보지 못했다.
 
드디여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루하게도 흘러갔다.
 
로임을 타서 모조리 저금통장에 채워넣고 난 금이는 더없이 격동되였다. 몇번이나 저금통장을 들여다보고 또 보았는지 모른다. 
 
“래일 피아노 사러 가야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녀는 생각할수록 꿈만 같았다. 곁에서 쌕쌕거리며 자고 있는 딸애를 내려다보노라니 또 눈굽이 젖어들었다. 하루만 지나면 집에 반짝거리는 피아노가 들어올 것을 생각하니 종시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 궁싯 저리 궁싯하던 금이는 드디여 잠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잤는지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랴부랴 문을 열었는데 뜻밖에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자은이 아빠가 문밖에 서 있었다. 취기가 어린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고 금이를 쏘아보는 꼴이 심상치 않았다. 
 
“자은이를 데려가야겠어.” 
 
금이는 와뜰 놀랐다.
 
“자은이를 데려가다니요? 갑자기 애를 왜 데려간다는 거예요?”
 
금이가 온 힘을 다하여 자은이 아빠를 문밖으로 밀어냈으나 자은이 아빠는 가냘픈 금이를 확 밀어제끼고 막무가내로 뛰여들어왔다. 
 
“이제 와서 무슨 렴치로 애를 데려 가겠다는 건가요? 안돼요. 절대로!”
 
“내 새끼를 내가 데려가겠다는데 렴치라니? 애를 고생시키며 자래울 거면 차라리 내가 데려다 잘 먹이고 잘 입히며 자래우는 게 나을 거야.”
 
“안돼요. 래일 자은이한테 피아노를 사주기로 했어요. 자은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기나 하세요?”
 
“피아노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당신 이 주제에 피아노가 가당한가? 오늘 자은이를 꼭 데려갈 거야.”
 
자은이 아빠는 죽기내기로 자기한테 달려드는 금이를 억센 손아귀로 밀쳐버리고 단잠에 빠져있는 자은이를 둘쳐업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안돼요, 자은아― 자은아―”
 
금이가 밖으로 부리나케 쫓아나갔지만 자은이와 아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허겁지겁 어둠 속을 헤집으며 달리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으악.”
 
갑자기 숨을 톺을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났고 칼로 가슴을 찌르듯 심하게 아파났다. 멀리 자은이가 아빠의 등에 업혀 가고 있는 모습이 다시 나타났지만 그녀는 더는 부를 수가 없었다. 소리가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고 맴돌아치기만 하였다. 극심한 통증 땜에 가슴을 움켜잡으니 더는 숨이 나오지 않았다. 눈앞으로 수많은 불찌가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하나의 불덩이로 되여 그녀의 목구멍을 틀어막아 버렸다. 눈앞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나중에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그녀는 속으로 간신히 되뇌였다.
 
‘자― 은― 아, 피아노 사러 가자했는데 아빠같이 가버리면 어― 떡― 하― 니…’

출처:<<도라지>>2018년 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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