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주별, 동주로, 동주숲...
“넑직한 이마, 곱게 뻗은 콧날, 시원스런 눈매, 길지도 둥글지도 않은 얼굴, 굳게 다문 입술, 탐스러운 귀, 후리후리하면서도 다부지게 균형이 잡힌 몸매, 맵시있는 걸음, 봄바람이 이는듯한 미소”(정병욱). 나의 동문선배이자 오빠같고 애인같은 사람 윤동주, 오늘밤 먹구름진 이곳에 약간의 바람이 일더니 그이의 별이 떴다.
천문학에서는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을 별이라 하는데, 지구대기 밀도 차에 의한 굴절률이 달라 별빛이 상하좌우로 굴절돼 우리 눈에 반짝이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별자리는 약 5천년전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밤하늘 별들의 형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데서 유래했다. 고대 바빌로니아 - 이집트의 천문학은 그리스로 전해져 별자리이름에 그리스신화 속의 신·영웅, 동물들의 이름이 더해졌다. 지난 1922년 국제천문연맹 총회에서는 천구상 적경과 적위에 평행인 선으로 경계를 정했는데 이것이 현재 쓰이는 별자리다. 도심에서는 볼 수 있는 별이 그리 많지 않지만 샛별이라 불리는 비너스가 초생달과 어우러질 때면 잊고 지내던 뭔가를 깨우고 마음 한 켠이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맑게 씻겨진 듯 반짝이는 별을 바라볼 때면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나의 윤동주. 오늘밤, 간간히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흘러가는 구름사이로 아슬히 보이는 저 별은 아마도 나의 “동주별”인가 싶다.
그이와 동문인 나는 그이처럼 기숙사생, 기숙사생인 나는 그이처럼 별을 헤었다. 연세대학교 유학시절, 밤이 깊으면 기숙사언덕 그이가 누볐을 그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아슬히 먼곳의 별을 자주 바라보군 하였다. 나는 눈꽃별, 너는 동주별하면서 애인놀이를 하던 날도 있었다. 어떤 날에는, 자신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이 이름석자 들어간 윤동주장학생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되물었고, 어떤 날엔 조선족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그러다 또 어떤 날엔 조선족유학생으로서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묻곤 하였다. 암흑하고 척박한 절망과 치욕의 시대에, 그이가 했던 방황과 고민들은 모두 민족을 위한, 민족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시인이라는 슬픈 천명을 안고 살다가 동이 틀 그 무렵에 빛 한줄기 보지 못하고 결국 그렇게... 그렇게 맑고 순수한 영혼하나를 지상에 남겨놓고 간 나의 당신. 나는 하늘가에 가장 아슬히 먼곳에 있을 듯한 별을 동주별이라 이름지어 그이의 그 무엇이라도 되고싶었다. 그이의 별을 하염없이 그리는 사람, 그이 그림자 하나 꼭 안고 흘러가는 강물, 하다못해 새벽달이 뜨기전까지만이라도 동무해 줄 바람에 서성거리는 저 나무가지...나는 그렇게 그 무엇이라도 되고싶었다. 그리고, 그리하여,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홀로 남아 어머니가 그리운 날에도 기숙사언덕 그 어딘가쯤에 떠있을 동주별을 찾아헤맸었다. 나는 홀로 많이 울었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다...
2009년 3월, 나는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가던” 그의 고향 동문후배가 되었다. 4년을 하루와 같이 걸었던 백양로는 나의 “동주로”이다. “무악학사 - 청송대 - 언더우드동상 - 백양로 - 중앙도서관 - 그이의 기숙사 핀슨홀 - 윤동주시비 - <마>의언덕”. 매일 오전 기숙사에서 나와 청송대를 지나 백양로를 가로질러 마의 언덕을 오르는 강의실로 다니기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마의 언덕을 얘기해보자면 처음엔 경사가 완만하니 누구든 한 달음에 오를수 있으리 만만히들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길이 끝나는가 싶으면 다시 이어지고 한숨 좀 돌렸다 싶으면 이내 언덕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으니 말이다. 나는 그 길을 동주로라고 불러댔다. 길을 지그시 내려다보고있는 윤동주시비때문이기도 하고 길을 쉬어가는데 ≪서시≫만큼 매력적인 동무도 없다 싶어서 말이다. 마의 언덕에서 볼수 있는 그의 보금자리이자 시작(詩作)의 산실인 기숙사의 천장이 낮은 다락방, 연세동산의 산길, 산밑 잔디밭, 청송대의 소리길... 이 모든것은 그이의 아련한 눈길과 여린 소리가 어린 곳이었고 그이 시의 만상의 원천이었다. 동주로의 터널을 지나 언더우드동상 앞을 즐겨 걸으며 시를 쓰곤 했을 그이는 이 동주로를 누비면서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 주옥같은 시들을 써냈다.
그리고 동주로의 서쪽에 시비를 마주하고 있는 건물 - 핀슨관. 지나간 것들이 그리운 지금, 모교에 설립 된 윤동주기념관은 그이가 연희전문시절 머물렀던 기숙사 핀슨관 205호에 마련돼있는데 그이가 남겨놓은 많은 자취들을 모아놓고있다. 이곳에 비치된 방명록에 기록된 글에는 학우들의 시와 글이 남아있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정서가 보인다. “21세기의 거친 흐름 속에 어쩔 수 없이 휘말리면서도 무언지 자꾸만 그립습니다”, “당신 바라보듯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없이 살겠노라고”, “이 땅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 그리고 꿈을 꾼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져만 가는 듯 하여 마음이 아프지만 다만 당신이 있었기에, 그런 인간정신의 고귀한 가치를 지녔기에 저 또한 당신의 후배요, 작은 꿈의 소유자로 힘을 얻습니다”... 기념관에 갔다가 나도 한줄 남겼었다. “제가 감히 당신의 정신을 기립니다...”
그리고나서 나는 동주로를 가로질러 청송대(聽松臺)에 자란 풀꽃을 씹어보기도 하면서 이곳에서 소나무 소리와 함께 고전을 읽으며 슬픈 시들을 썼을 그이를 되뇌이었다. 시들어가는 들꽃 한송이, 못생긴 바위 하나, 앙상한 겨울나무 한그루, 가지를 타는 외로운 다람쥐 한마리, 마구 떨어져 밟히고마는 낙엽... 그이의 가녀린 손길과 선한 눈빛이 어려있을 청송대를 내가 “동주숲”이라고 기리는 이유는 아마도, 칠흙같은 장막이 드리운 그 시기 감옥으로 마구 끌려가는 동기들과 첩자라고 고백하는 후배들, 그리고 침묵을 지키는 교수님들을 마주한 그 민족수난의 척박한 시대에 살면서 그럼에도 꿈꾸고, 사랑하고, 살고싶었던 또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읊조렸던 그이의 맑고 순수한 영혼때문이 아닐까. 밤이면 밤마다 바람소리에 나무잎 철렁이는 소리만 가득한 이 숲, 별 하나 안보이는 이 응달에서 그는 끊임없이 희망의 빛을 찾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던 민주화운동시기에도 동주숲은 언제나 변함없는 저 한결같은 소나무처럼 비탄에 빠져있던 문학인들까지도 품었었다...
윤동주, 어찌보면 그는 승패를 겨루는 싸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모두가 앞다퉈 조선과 일본의 편을 가를 때, 인간이 인간에게 칼을 겨눠야만 했던 한 시대를 슬퍼했던 사람이었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아꼈지만, 그 한마디가 무척이나 다정한 사람이었으면서도, 그가 뱉은 말들은 모두 아팠다. 그런 삶속에서 그는 이따금 희망을 얘기하였고 그 누구보다도 깊은 마음으로 세상을 앞서 본 사람이었다.
오늘에도 먹구름진 이곳에는 약간의 바람이 일더니 그이의 별이 떴다. 나의 동주별, 동주로, 동주숲... 삶을 아파하며 스스로를 담금질한 그이를 향한, 그이를 기리는 모든 맘들이 한뼘씩 한뼘씩 더 자라나는 동트는 새벽이다...
류설화
2014.12.22.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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