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흥사단(흥민통)에서 주최하는 제14회 동북아 청소년친선문화제의 일원으로 추천되였다는 소식을 접해서부터 마음은 설레임으로 벅차오르기 시작하였으며 떠날 림박이 되니 잠을 이룰수 없었다. 언제부터 가보고싶은 몇몇 유적지를 직접 가볼수 있다는것도 그렇지만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헌신하는 지성인들을 만나서 며칠동안 함께 할수 있겠다는데서 더 마음이 설레여왔었다. 대련으로 향한 열여덟시간의 기나긴 야간렬차를 타서 고생스러웠지만 이제 곧 생소한 얼굴들을 만날수 있다는 기대감에 피곤도 물러가는것 같았다. 도착하여 보니 우리 흑룡강 일행이 제일 늦어서 죄송한 마음이였으나 어찌나 친절하게 맞이하여 주는지 모든것은 그때 순간이였었다.
의사는 갔어도 정신은 영원하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행 90명은 두대의 대형뻐스에 탑승하여 려순으로 향발하였다. 력사에서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려순감옥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려순감옥은 려순시외곽에 자리하고있었는데 옛건물 그대로 잘 보존되여 있었는데 우리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보고있어 사람들로 북적이였다. 가이드의 해설을 들으면서 감옥을 둘러보노라니 침략자들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저도 모르게 두주먹이 불끈 쥐여지는건 어쩔수 없었다. 비록 일행의 발걸음소리가 들렸지만 어쩐지 나의 귀가에서는 침략자들에게 비인간적인 학대와 고문을 당하면서 내는 신음소리가 들리는것만 같았다.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의사는 내가 살고있는 흑룡강 할빈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히로부미를 격살하였고 또 려순감옥에서 순국했다는건 익히 알고있었지만 정작 안중근의사가 갇혀있던 감방과 순국한 자리에 섰을 때의 감정은 무어라 형언할수 없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침략의 원흉 이또히로부미를 격살한 그 정신은 참으로 고매하여 세세대대로 이어받아야 할것이며 찬미해야 할것이다. 그외에도 신채호선생님과 이회영선생의 사진앞에서도 마음은 너무도 무거워 났으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서슴없이, 아낌없이 바친 그들의 정신이야말로 참으로 고상하고 숭고함을 다시한번 심절하게 느끼게 하였다. 비록 의사들은 갔지만 그들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들의 귀감으로 되여 새겨져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하노라니 다소 위안이 들었지만 침략자들의 만행은 비록 력사이지만 잊을수 없으며 다시는 있어서는 않될것이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 보고싶어”
단동은 조선의 신의주와 마주한 도시로서 푸르른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거니노라면 조선을 지척에서 바라볼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대형유람선에 올라 압록강을 돌게 되였는데 조선쪽으로 가까이 갔을 때 모두 함께 목청을 돋우어 “안녕하세요?”. “건강하세요”하고 크게 웨쳤었다. 그 소리에 강저쪽 언덕에서 일하던 조선의 일군들이 손을 저어 답례를 보내왔었다. 홀연 우리 일행중에서 “어마나, 나 보고싶어”하는 외마디 웨침소리가 들려왔었는데 그 웨침소리는 울먹이는 웨침소리였기에 목을 메우며 짧게 들려왔었다. 그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말그대로 온몸이 떨려나면서 저도 모르게 눈확이 뜨거워남을 어쩔수가 없었다. 동족애란 무엇인가하는 가장 적절한 답을 얻어보는 순간이 아닐수 없었다. 비록 한번도 본적이 없고 말도 건네본적이 없지만 한마디 인사에 간단히 손저어 답례하였지만 그속에서 우리의 피는 같은 피임을 너무도 똑똑히 실감하는 순간이였다.
끊어진 압록강단동철교를 걸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이제 어느날인가는 저 끊어졌던 단동철교가 진정으로 이어져서 서울에서 렬차에 앉으면 당날로 신의주를 거쳐 단동으로 와서 다시 세계로 나가는 그날이 올것이라 믿고싶었다. 뿐만아니라 이제 다시는 울먹이면서 그리움에 휩싸여 보고싶다는 말을 하지 않게 그리고 보고싶으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볼수 있는 세계화의 시대가 펼쳐질것이리라 믿고 싶었으며 우리들에 의해 실현되게 하여 더는 후대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력사책이나 사극을 통하여 리성계가 위화도에서 네가지 불가를 빌미로 료동정벌을 포기하고 회군하여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웠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작 위화도를 바라보니 감회가 깊었으며 그때 만약 리성계가 료동정벌에 나섰으면 어떻게 되였을가, 또 료동정벌에서 승리하였다면 과연 어떻게 되였을가 하는 생각을 해보노라니 력사도 순간에 의하여 좌우지 되며 그로하여 영원이라는것이 결정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동양의 피라미드
고중조선어문교과서에 풍기재선생이 쓴 “피라미드가 주는 계시”라는 글이 있어 학생들에게 교수해준적이 있었는데 그 글의 피라미드는 애급의 피라미드를 말한것이였다. 허나 집안시에서 만난 장수왕릉은 비록 애급의 피라미드와는 비길수 없겠으나 그 규모와 크기는 정말 혀를 두르지 않을수 없었다. 말그대로 동양의 피라미드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 피라미드앞에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잠간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으며 영원한 삶이란 있을수 없고 죽음 또한 영생할수 없지 않을가 생각해보면서 왜 자신의 무덤에 대하여 그렇듯 신경을 써왔을가 하는 의문도 가져보지 않을수 없었다.
광활한 료동땅을 메주밟듯 달리던 광개토태왕의 비와 릉앞에서는 자연 머리가 숙어졌으며 요즘 한국 TV에서 방송하는 “광개토태왕”을 머리에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였다. 자랑찬 력사를 후대들에게 널리 알리는것은 미룰수 없는 책임을 다시 느끼게 하는 순간이였다.
5호릉의 벽화는 몇천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여 있었는데 벽화로 당시의 사회를 알아볼수 있어 좋았으며 어쩌면 오늘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보존될수 있게 한 당시 인민들의 지혜에 자연 머리가 숙여지면서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환도산성을 둘러보면서 천연요새를 리용한 당시 인민들의 지혜와 슬기에 감복하였으며 각양각색의 무덤떼앞에서는 한때는 천하를 호령하면서 말을 타고 광활한 지역을 누비였을 이름모를 사람들로하여 숙연해지는 마음을 달랠길 없었다.
장백산에 울려퍼진 친선의 멜로디
전날까지도 화창하던 날씨였으나 우리가 통화에서 이도백하로 향발하는 야간렬차에 올랐을때부터 하늘은 흐릿하여 오기 시작하였으며 이도백하에 내린 이른 아침에는 비가 좀 내렸을뿐만 아니라 날씨 역시 흐릿하여 모두가 장백산천지를 볼수 있을가 하는 걱정뿐이였다. 우리가 정작 장백산에 들어서니 무정한 하늘은 비를 퍼붓기 시작하여 끝내는 장백산천지를 볼수 있는 행운을 가지지 못하고 말았다. 허나 일행 모두가 민족의 성산 장백산에 온것만으로도 장백산의 정기를 듬뿍 받아서인지 명랑한 기분이였다.
장백산 민속촌에서의 하루밤은 참으로 뜻깊은 하루밤이였으며 내내 이어지지 못하는 아쉬움만 그들먹이 고여왔었다. 제14회 동북아 청소년친선문화제 중한 친선예술축제는 밤늦도록 장백산에 울려퍼졌었는데 통일을 갈망하는 단막극이나 답사기간의 일정을 일축하여 표현하는 장끼표현, 활발하고 명랑한 십대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노래와 춤은 정말 보는 이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였으며 감동을 그들먹이 실어주었다. 우리 일행외의 투숙객들도 모여와 구경했으니 그 정경은 구태여 더 설명하지 않아도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축제의 평심으로 참여한것도 나의 일생에서는 잊을수 없는 일이다. 밤늦어 잠자리에 들었으나 좀체로 잠들수 없었다. 이제 어느날인가는 세계화의 길로 나가 더는 국계에 구애없이 우리 모두가 늘 한자라에 모였으면 하는 바램이였으며 그날이 어서빨리 오기를 두손모아 기원하였다.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도문에서 봉오동골짜기로 향할때부터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흥분되여 왔었다. 홍범도장군이 봉오동골짜기에서 일본놈들을 너무도 멋지게 족치여 지금까지도 전설같이 전해내려오고있기때문이였다. 봉오동골짜기는 산세가 험해서 매복하여 족치기는 참으로 좋은 곳이였다. 봉오동골짜기에 서있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귀전에서 돌격의 함성소리와 총소리가 울려오는 느낌이였으며 마음은 흥분으로 들뜨기도 하였다.
룡정에서 찾아본 “3,13”독립의사릉은 찾는 순간부터 무거워나는 마음이였다. 모두가 묵념으로 시작하였으며 오래동안 그자리에서 떠날념을 못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자신을 바친 의사들이 너무도 거룩하게 안겨왔었다.
우리 교육의 발상지인 서전서숙, 명동학교, 대성중학교를 돌아보면서 어디가나 교육을 중시하고 교육을 우선시한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과 소팔아 자식공부시킨다는 미담을 그대로 느낄수 있어 좋았다. 명동촌에서 우리 민족의 저항시인 윤동주생가를 찾았는데 시인이 동년을 보낸 발자취를 더듬어볼수 있어 참으로 감회가 깊었다.
룡정의 일송정에 올라 60리 평강벌과 세전벌, 유유히 흘러가는 해란강을 바라보는 마음은 시원하기에 앞서 무거워났다. 그제날 선구자들은 여기서 밀회를 가지고 행복한 앞날을 그리였으니 말이다. 비록 “선구자의 노래”를 어렴풋하게 기억하여 조금은 부끄러웠으나 일행이 합창으로 부르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마지막날 연변대학예술학원에서 있은 조별미션답사는 참으로 의의있고 뜻깊었다. 매조별로 자신들이 다녀온곳을 소개하고 또 자신들이 느낀점을 간략하여 설명하였는데 소조를 대표하여 설명하는 학생들 모두가 조리있고 줌점이 명확하여 탄복이 가지 않을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우리의 교육을 반성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은 많은 개혁을 해오면서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아직도 학생들의 능력배양은 말에 그치고있을뿐 현실적으로는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있다 해야 할것이다. 이제 우리의 학생들도 한국학생못지 않게 능력을 가진 학생으로 배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순간이였다.
8월12일 이제 우리들이 헤여져야 할 시간은 드디여 다가오고야 말았다. 생각같아서는 시간이 멈추어버렸으면 좋으련만 시간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나 가장 공평한 법이니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수가 없었다. 결국 아쉽지만 헤여져야만 했다. 서로 손잡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였으며 억지로 웃음은 지었지만 목은 갈려있었다. 그러다 어느 누구인가 흐느끼기 시작하였으며 결국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인간이란 만남과 헤여짐속에서 사는것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건만 헤여져야 하는 순간만큼은 너무도 사람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것이여서 어쩔수가 없었다. 인연이란 한번 만나고 일생동안 그리움속에서 살기도 하고 또 한번도 만나지 않고 영원히 그리움속에서 산다고 하는데 우리의 만남과 인연은 영원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나는 굳게 믿는다. 피는 물보다 진한것이다. 우리 모두가 단군의 후손으로서 우리의 몸에서는 같은 피가 끓고있으니 언젠가는 또 만날것이며 만나면 또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갈것이리라. 그리고 우리 모두 동북아 평화와 통일을 위하는데 한몫할것임은 의심하지 않을것이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 하는 순간에도 7박8일을 함께 하였던 한국의 학생들과 학자분들이 눈앞에 삼삼히 밟혀온다. 민족의 어제를 잊지 말고 후대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필요성을 안고 동분서주하면서 또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성인들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가 되여 나아갈것이다. 90여명을 인솔하느라고 항상 학생들과 한마음이 되여 앞뒤로 뛰여다니던 이현정부장님과 김도현간사님, 그리고 매사에서 항상 꼼꼼히 챙겨주시던 류종열대표님, 통일부장관과 차관직을 지니셨지만 항상 무람없이 대해주시던 리봉조대표님, 항상 유머와 재치로 이야기를 리드해가는 정용상교수님, 비상한 기억력으로 민족의 발자취를 정통한 노성태선생님, 어디가나 정경을 꼼꼼히 렌즈에 담던 리종각교수님 그외의 모든 분들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 이제 어느날인가 또 존경스러운 분들과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한때를 만들어보길 기원하는 마음이다. 그날까지 부디 지성인들 모두가 건강하게 보내길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이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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