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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안휘에서 온 장서의 댓글:  조회:114  추천:2  2025-01-13
장서의는 안휘성 부양의 농촌에서 심천으로 일하러 온 50대의 사나이다. 중등키에 까만 눈섭을 가진 그런대로 봐줄만한 인물을 가졌는데 보통말보다는 혀를 꼬부라뜨리는 안휘의 지방말을 더 많이 하여 그가 하는 어떤 말들은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여러곳을 전전긍긍하였는데 강소성, 절강성 그리고 녕파 등지의 공사장에서 페인트공질도 하였다 한다. 심천에 와서도 개인이 꾸리는 화훼회사에서 일하다가 보스의 눈에 나서 잘리게 되였는데 그 자신은 맞같지 않아서 그만뒀다고 하지만 그때 그와 함께 일하다가 후에 또 한회사에서 정원사일을 하는 호남에서 온 주주길의 말에 따르면 제앞의 일을 깔끔하게 하지 못하여 잘렸다고 한다. 장서의가 심천으로 오기전에 그의 안해가 먼저 와서 지금의 회사에 취직하게 되였는데 회사의 제조부부장이 녀동생남편이라 남보다는 쉽게 회사에 입사할수 있었다. 장서의 또한 화훼회사에서 잘리게 되자 동서간이 되는 제조부부장과 청을 들어 회사의 정원사로 취직하게 되였던것이다. 그후 부장동서의 덕분으로 장서의의 아들 딸 모두가 회사에 입사하였으며 사위는 입사 2년도 채않되여 계장으로 승진하였으니 부장동서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안휘의 농촌마을에서 온 장서의는 순박한 면도 가지고있지만 또 어딘가 어리숙하기도 하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말주머니를 풀어헤치고 어떤 말이든 숨김없이 말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로 누님둘에 아래로 녀동생 둘, 그러니까 누님들과 녀동생들 사이에서 그가 태여나게 되였는데 부모들은 대를 이어갈 아들이라고 어려서부터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귀염을 받으며 자라나 한족남자들 거의 모두가 가마목일을 잘하는데 비해 그는 전혀 할줄을 몰랐다. 그가 할줄 안다고 자랑할만한것이라면 밀국수(挂面)를 삶는것과 땅콩을 기름에 볶는것이였는데 그것도 간혹 안해나 딸이 퇴근이 늦을 때면 제딴에는 잘하느라고 솜씨를 보이군 하는데 그의 그런 솜씨를 안해와 딸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밀국수를 한가마 삶아놓으면 안해가 한오리만 먹어보고는 이게 돼지죽이지 사람이 먹을것이냐고 호통치면서 이후로 밀국수를 삶겠으면 네혼자 먹을만큼만 해서 먹으라고 한단다. 그뒤로 안해와 딸은 잔업으로 퇴근이 늦어지는 날에는 집부근에서 사서먹고 귀가하군 하였다. 그들이야 그러건말건 장서의는 자기가 갖고있는 한가지 재주 – 밀국수를 삶고 땅콩을 기를에 볶아서는 술두냥까지 곁들여서 맛난 저녁식사를 치르군 한다고 한다. 그가 낯에 웃음기 하나 띠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할때면 모두가 호탕하게 웃으며 슬슬 놀려주거나 직접 대놓고 이 머저리야, 그 나이에 밥도 할줄 몰라?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장서의는 개의치않고 정색해서 나 어릴 때 부모님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자라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든 라고 하면서 어딘가 득의양양해하는 표정까지 지었다. 회사에서는 한해에 두세번정도로 사회공익성활동(义工)을 조직하는데 이를테면 삼림공원이나 바다가를 찾아가서 널린 쓰레기를 줏는것이다. 사회공익성활동인만큼 회사에서는 회사원들이 자원적으로 참가하게 하였는데 활동에 참가하는 회사원들은 모두 20대들이였다. 장서의는 회사벽보란에 공익활동통지가 나붙으면 그자리로 상관부서를 찿아가서 등록할뿐만아니라 꼭 참여하게 해달라고 사정까지 하여 지금껏 회사에 입사하여 한번도 공익성활동에 빠진적이 없다. 회사에서는 매번 활동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빨간색 모자에 글을 박아 나눠주는데 장서의는 그 모자를 그날뿐만아니라 그후 회사울안에서 화초를 가꿀 때도 쓰고 하여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였다. 회사에서는 해마다 추석명절이면 대형문예야회를 조직하군 하였는데 그날도 공익활동의 하나로 자원적으로 걸상옮기기, 장소정리, 장소청결 등을 하였다. 장서의는 이 활동에도 번마다 선참으로 등록하고 밤늦게까지 로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날도 글이 박힌 빨간색 모자를 나눠주었기에 장서의는 그 모자를 쓰고 신나게 돌아쳤으며 그후로도 그 모자를 오래도록 쓰고 다녔으며 그러는 그를 보는 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회사공회에서는 한해에 한두차례 등산활동을 조직하는데 대형버스 세대에 만원이였다. 공회에서 조직하는 활동인만큼 격식을 차려 글이 박힌 기 발도 마련하고 반팔적삼도 통일적으로 주문하여 나눠주었다. 장서의는 이 활동에도 선참으로 등록하고 참가하였을뿐만아니라 공회글이 박힌 기발을 자청하여 자기가 들고 산을 오르고 내리였다. 이런 장서의를 두고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이름을 달아 부르게 되였는데 누가 처음으로 지어서 불렀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기발하고 묘하였는바 한입두입 회사내에 인차 퍼져 모두가 원이름대신 새로 지은 이름을 부르는데 습관되여 갔다. 장서의는 한어로 张西仪인데 그음에 따라 脏兮兮로 새로이 불려졌다. 脏兮兮는 실은 더럽고 어지럽다는 뜻으로서 그에 대한 멸시와 모욕이였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으며 너희들 짖겠으면 짖어라 어르신은 어르신대로 간다는 격이여서 모두가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대신 脏兮兮라 스스럼없이 부르는데 익숙해져갔다. 회사에는 실내외를 청소하는 청결공들이 있는데 모두가 녀성들이였다, 청결공들도 짱시이라는 이름대신 짱시시라고 부르기 좋아하였으며 참대비자루를 자르거나 무거운것을 들거나 등 자질구레한 일들은 장서의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그는 번마다 거절하지 않고 잘도 도와나섰으며 그들과 어울려 잡담하기를 즐겼을뿐만아니라 회사울안 귀퉁이에다가 몇포기 심은 채소도 아까워하지 않고 통이 크게 따다가 그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그가 회사울안 한모퉁이에 어떤 채소를 얼마나 심었는지 누구도 알지못하고있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허나 그는 만나는 사람과마다 자기가 심은 채소가 여차여차 왕성하게 잘 자라고있다고 자랑하군 하였으며 얼마후에는 자람새가 좋은 채소를 누군가가 다 따갔다고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를 두고 모두가 허구픈 웃음을 웃을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호주머니에 지갑이란걸 넣고 다녀본적이 없다. 호주머니에 고작 아침사먹을 돈 20원쯤 넣고 다니였기에 급하게 돈쓸 일이 생기면안해를 찾아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서 꾸어야 했다. 그런 사정을 알고 회사의 운전기사가 한번은 그가 당장에서 월급카드를 내놓는다면 고급음료수 한병을 사주겠노라고 도전장을 던지자 장서의는 어물쩍하게도 림기응변책을 대여 모두가 웃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침에 옷을 갈아입고 오다보니 깜빡하여 지갑을 소지하지 못하였으니 래일 출근하는 길로 보여주겠으나 음료수는 필요없다는것이였다. 이튿날 출근한 운전기사는 전날의 일을 감감 잊고있었으나 장서의는 출근하자 운전기사를 찾아가서 지갑과 월급카드를 꺼내 그의 코밑에 대고 흔들어 보였으며 또 천원은 훨씬 넘어보이는 백원짜리 지페도 꺼내서 흔들어 보였다. 그가 그렇듯 정색하고 득의양양해하자 운전기사는 그가 마다하는것도 음료수를 사주었다고 한다, 며칠후 짱씨씨의 호주머니에는 또 아침밥을 사먹을 돈이 10원이나 20원 밖에 없었다.  회사규모가 크고 그에 따라 울안도 크기에 각종 수목과 꽃나무 그리고 잔디밭이 있어 정원사를 채용하고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면 각종 수목과 꽃나무를 가꾸고 전지하며 자라나는 잔디를 기계로 깎는것이다. 공원이나 명승지의 정원사라면 차원이 높아야겠지만 회사울안의 정원사인것만큼 가쯘하게 가꾸면 되였다. 헌데 짱시시는 그것도 만족스럽게 못하여 눈에 뜨일 정도였다. 일을 한시간도 안되게서 하다가는 헝겊으로 눈을 싸맨 당나귀가 석마를 돌리듯 회사울안을 돌고 돌아다니다가는 또 잠간 일하다 다른 사람들이 밖에서 작업하는데를 찾아 구경하군 하였다. 총무에서 그의 작업태도를 언녕 보아냈지만 그의 동서가 부장이라 한두번 타이르는척 하다가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회사에서는 보안일군들의 단련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철봉대를 만들고 가끔 롱구시합도 하였다. 보안일군들이 농구시합을 하면서부터 짱시시의 몸단련도 시작되였다. 전에 철봉대를 만져도 못본 그였지만 틈만나면 철봉대에 붙어있다보니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짓듯이 철봉에 매달려 몸돌리기 ,턱걸이 등 철봉을 자유자재로 할수 있었으며 멀리서도 농구공을 던져 그물안에 넣을수 있었다. 그의 몸단련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하다가도 잔디밭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꺼꾸로 서기-도립(倒立), 거꾸로 서서 손으로 걷기 등도 련습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거꾸로 서기는 2분에서 5분까지 견지할수 있었으며 꺼꾸로 서서 걷기는 3미터에서 5미터까지 갈수 있었다. 이렇게 그의 재간이 늘어나자 그는 여럿이 모여서 휴식하는것이 보이면 하기 좋아했는데 자기의 재간을 자랑해보려는것이였다. 다른이들 역시 그의 아들또래 아이들까지 그를 만나면 씨씨 또리 라이거베 하고 말을 걸군 하였는데 그때면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흔쾌히 꺼꾸로서기와 꺼꾸로 서서 걷기를 하군 하였으며 구경하는 이들은 박수까지 쳐대면서 호우,호우 하고 춰주군 하였는데 그러면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군 하였다. 년말회식때였다. 모두들 술한잔 얼근하게 마시고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짱시시시와 마주치게 되였다. 이때 누군가 짱시시 보고 라이거 라고 하자 뒤따라 나오던 이들도 이구동성으로 라이거,라이거 하기에 이르렀다 실은 회식은 음식점에서 한지라 음식점 밖은 콘크리트 바닥이고 하루의 열기가 그대로 슴배여 있어 가마목못지 않게 뜨끈뜨끈하였다. 그래도 짱시시는 개의치 않고 흔쾌히 얼굴에 웃음까지 띄우면서 하루동안 열기를 확확 내뿜고 있는 콘크리트바닥에 머리를 대고 꺼꾸로 서기를 하였는데 머리가 뜨거워 인차 다리를 내리우고 말았다 원숭이가 부리는 재롱을 구경하듯 빙 둘러서서 구경하던 이들이 이번에도 박수까지 쳐가면서 호우를 련발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인건 더 말할것도 없었다 일본으로부터 회사총경리가 새로 부임되여 오면서 회사내부에 큰 인사변동이 생기에 되였는데 짱시시에게도 그 자신마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변화가 생기게 되였다. 제일 큰 변동으로는 부장으로 있던 그의 동서가 이번 회사내 인사변동에서 부총경리로 발탁되여 회사내 2인자로 권리를 틀어쥐게 되였다. 인사변동정황이 회사내에 공시문으로 공포되여 일반 회사원들마저 다 알게 되면서부터 짱시시(张兮兮)라 부르던 별호가 차츰차츰 적게 들리다가 어느날부터인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게 되였으며 대신 로짱(老张)이란 호칭이 생겨나 짱시시를 대신하게 되였다. 만날때마다 시도때도 없이 거꾸로서기를 권유하던 이들도 그를 만나면 얼굴에 웃음을 바르고 로짱이라고 정중히 불렀으며 무겁거나 힘들고 어지러운 일이 있을때마다 짱시시를 부르면서 곧잘 청들던 청결공아낙네들도 온 얼굴에 해시시 웃음을 바르면서 짱따거라고 불렀을뿐만아니라 더는 그에게 그런 일을 청들지 않았다. 처음에 짱시시가 로짱으로 짱따거로 호칭이 바뀌였지만 장서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기나 한듯이  개의치 않았을뿐만아니라 전대로 변함이 없었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여럿이 모여 앉아있는 자리에서 엊저녁 부총경리인 동서와 술한잔 했다는둥 자기한테 변속자전거를 선물로 주더라는둥 함께 심천공원으로 놀러갔댔다는둥 등의 자랑을 누구 묻지도 않는데 곧잘했으며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하였다 그의 그런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처음에는 얼굴이 굳어졌다가 인차 얼굴에 웃음을 게바르군 하였으며 그럴수록 장서의는 신이 나서 때론 손짓발짓까지 해대면서 열을 올리군 하였다. 음력설에 회사에서는 두주일간 방학을 하게 되였는데 회사대문을 지킬 보안일군이 모자라게 되였다. 그사이 출근은 두배의 돈을 주지만 고향으로 가고픈 보안일군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였다 전같으면 장서의를 념두에 두고 생각지도 않았겠지만 혹 생각했다 할지라도 보안일군도 아닌 그를 그동안 채용하는걸 유관책임자가 동의할리 만무할것이였다. 허나 이번에는 방학사이 보안일군이 모자라자 보안대장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이가 바로 장서의였다. 그는 가정성원 모두가 와있으니 고향으로 갈리 만무하고 또 부총경리의 동서간이니 유관책임자가 동의안할리가 없을것이니깐. 결국 장서의는 매일 두배의 돈을 받으면서  두주일 방학기간 회사대문을 지키게되여 돈도 벌고 틈틈히 철봉과 도립을 마음대로 할수 있어 실로 말그대로 누이좋고 매부좋았으며 꿩먹고 알먹고 둥지털어 불때는 격이 되였다. 음력설이 지나 출근이 시작되여 얼마 안지나서 장서의에게는 모두가 눈이 둥그래질 변화가 생기게 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소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었는데 자기 이름석자도 써놓으면 오리가 똥물을 갈기고 헤집어놓은것처럼 뒤죽박죽이 되여 겨우 알아볼 지경이였으며 회사공고란에 나붙는 공시문도 대강 뜻이나 겨우 알아보는 정도였다. 그런 그가 직원으로부터 일약 조장으로 승진하게 되였던것이다. 조장직이 회사내에서는 제일 말단직이지만 모두가 조장으로 되는게 아니고 자기가 되고싶어 되는것은 더구나 아니였다. 비록 말단직이지만 직원보다 월급을 5백원이상 더 받으니 조장으로 승진한 장서의가 부럽지 않을수가 없었다 .조장으로 승진한 장서의는 더는 짱씨씨가 아닌 로짱, 짱따거로 불리웠으며 그의 어깨 또한 전보다 더 넓어진듯 해보였다. 실로 한사람이 출세하면 그 집의 개와 돼지도 따라서 살찐다는 말이 바로 이런걸 두고 한말이 아닌가 싶다                                                                
64    하는 일에 전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댓글:  조회:86  추천:0  2025-01-13
우연한 기회에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로인”을 읽어보게 되였다. 짧은 한편의 수필이지만 여름날의 잔잔한 보슬비가 옷속까지 스며들며 적셔주듯 마음속까지 잔잔한 감동이 여울져오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나”는 퇴근길에 길가에서 방망이 깎는 로인을 만나 방망이 한벌을 깎아달라고 부탁한다. 로인이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것 같아 흥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로인이 퉁명스럽게 나와서 흥정을 포기하고 잘 깎아달라고만 부탁하고 만다. 로인은 처음에는 방망이를 빨리 깎는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면서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다 된것같아 달라고 했으나 못들은척 대꾸가 없이 그냥 깎기만 한다. 타야할 차시간이 림박하여 초조해난 “내”가 그만 달라고 하자 로인은 버럭 화를 내면서 끓을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밥이 되냐며 안팔겠다고까지 한다. 별수없이 “내”가 체념하자 로인은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방망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계속 할 일에 열중한다. 타야 할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타야 하는 “나”는 로인을 상도덕(商道德)도 모르는 무뚝뚝한 로인이라고 원망하게 된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안해는 방망이가 배가 부르지도 약하지도 않게 맞춤하고 이쁘게 잘 깎았다면서 이렇게 잘 깎은 방망이를 만나기 조련찮다고 한다. 안해의 말을 듣고 비로서 로인을 원망했던 자신을 뉘우치며 다음 일요일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면서 진심으로 사과라도 하려고 로인을 찾아갔으나 그 자리에는 로인이 없어 아쉬움만 가득 남는다.   길가에 앉아 방망이를 깎는 로인이라면 우리 모두에게 낯선 풍경이 아니다. 방망이 한벌을 깎아야 돈이 얼마 되지도 않겠지만 로인은 혼신을 다해 정성스럽게 깎는다. 배가 부르지도 약하지도 않고 맞춤하게 그리고 이쁘게 깎았다.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것이 로인의 상도덕이라면 합당할것 같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하는 일에 전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로인이다. 참으로 돋보이고 존경스러운 로인장이다.   일전에 연변텔레비죤위성방송에서 화면석소장가 정려화씨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역시 잔잔한 감동을 불러오는 이야기였다. 화면석수장도 좋지만 그보다는 그림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그가 나이 40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그것도 돌에다가 여러가지 동물들을 위주로 화초들을 그렸다는것이며 모두가 살아숨쉬는듯이 생동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혀를 두르게 하고있다. 물론 농후한 흥취와 애호가 뒤받침하였겠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하는 일에 전심하고 최선을 다한 결과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내가 사는 동네 입구에는 음식점들이 서로 겨루기라도 할듯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지나다니면서 눈여겨 보노라니 어떤 음식점은 숱한 돈을 팔면서 장식하고 폭죽을 터치우면서 요란하게 개업해서 두달후면 문을 닫고 양도를 한다는 딱지를 붙이고 만다. 그런가하면 어떤 음식점은 십여년이나 주인이 바뀌지 않고 쭉 문을 열고있으며 매일 호황을 이루고있다. 물론 음식업은 위치나 노하우가 비결이겠지만 그에 앞서 하는 일에 전심하고 최선을 다해야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세상의 그 어떤 일이든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오직 피타는 노력이 동반되였을 때만이 예기한 목적에 이를수 있을것이다. 피타는 노력은 곧 마음을 가다듬고 최선을 다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도리를 깨우쳐준 방망이를 깎던 로인이 고맙고 존경스럽다.  
63    소산에 다녀오다 댓글:  조회:84  추천:0  2025-01-13
2016년 국경절 련휴때 우리 나라5악중의 하나인 남악 형산을 톺아 그정상까지 올랐댔다. 형산은 호남성형양에 있는데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5악인만큼 비록 산세가 험준하여 힘에 부쳤으나 정상에서 밑을 굽어보는 순간만큼은 가슴 뿌듯한 순간이였다. 형산의 정상에서 일몰과 일출을 보려고 풍막과 생활도구들을 꿍져메고 힘겹게 톺아오르는 이들을 보면서 내심 탄복하기도 하였다. 형산을  답파해도 련휴가 남았기에 호남땅을 밟은 바에는 소산으로 가서 모주석의 생가를 방문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소산으로 향발하게 되였다. 소산을 향해 떠나는 순간부터 나는 이름할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면서 몇십년전의 일들이 밀물이 밀려오듯 줄줄이 떠오르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드는건 나로서도 억제할수가 없었다. 아마도 소학교2학년때라고 기억된다. 그때 비록 시골학교였지만 전교문예경연을 조직하게 되였는데 우리 학급에서는 노래도 있고 춤도 있는 가무를 내놓게 되였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그때 그 노래가사와 곡이 그대로 기억에 생생하다. “기차는 달려요. 소산으로 달려요. 산을 넘고 강건너 소산으로 달려요. 해빛은 찬란히 창을 비추고 차칸안은 들끓어요. 참말 들끓어요. 장족할아버지 해금타고 신강누나 춤추고 몽고족아저씨 노래불러요. 노래소리 웃음소리 그칠줄 몰라요.” 보다싶이 각 민족인민들이 기차타고 모주석의 고향인 소산으로 가면서  즐거운 심정과 들끓는 장면을 보여주고있다. 당시 우리 학급에는 20명이 채않되는 학생들이였는데 전원이 참가하였다. 한켠에 다섯씩 10명 학생은 종이박스로 만든 둥근 기차바퀴를 돌리고 나머지 학생들은 각양각색의 민족복장을 차려입고 차칸에서 춤추고 노래불렀다. 특히 장족할아버지, 신강누나, 몽고족아저씨 차림을 하고 해금타고 춤추고 노래부르는 이들이 있고 또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치고 춤추는 이들이 있어 관객들의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당연히 1등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어린 가슴에 소산으로 다녀오고픈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다.사실 나뿐만아니라 중국인이라면 전국인민의 태양이며 위인인 모주석의 생가를 가보고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였을것이다. 허나 호남성까지는 거리가 너무도 멀어서 가슴속에 념원으로만 남겨둘수밖에 없었다. 몇해전 남방으로 옮겨와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생각한것이 여건이 허락되면 어릴 때 출연했던 장면을 되새기면서 소산에 한번 다녀오리라는것이였는데 이제 그 소망을 현실로 이루게 되였으니 그 마음을 뭐라 표현했으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흥분에 들떠 소산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가는 내내 그 노래를 수도없이 흥얼거리였다.     소산충의 모주석생가는 어릴때부터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아오던것과 같았지만 직접 발을 들여놓고 보는 순간만큼은 숙연해지는 마음이였다. 집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집앞이 논으로 된 생가는 아늑하고 조용했을거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산수가 좋다는 느낌이였다. 방방곡곡에서 구름처럼 몰려온 방문객이 인산인해에 장사진을 이루었며 시종 비비적거리면서 밀려다녀야 했기에 사진한장 기념으로 남기지 못하는것이 큰 유감으로 남았다. 국경련휴인것도 있겠지만 위인은 영원히 인민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으며 인민들은 영원히 위인을 기리고있음을 알수 있었다,  모주석의 생가는 1929년 국민당정부에 의하여 몰수당하여 파괴당한것을 1950년 원모습대로 복원하였으며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국무원에서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하였고 1997년 중공중앙선전부에서는 전국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명명하였다. 1983년6월27일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등소평동지가 “모택동동지생가(毛泽东同志故居)”라는 친필제사를 써주었다.  모주석의 어린 시절 부모님들을 도와 곡식이랑 말리웠다는 집옆 마당에 서있노라니 어느 책에서 본 한토막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주석은 어릴 때부터 이웃이나 어려움에 처한 동네사람들을 즐겨 도왔다고 한다.  1910년 가을, 당시 17세인 모주석은 호남상향 현립동산고등소학당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집떠나 50리 밖에 가서 공부하게 되였다. 집떠나기전 그는 시한수를 써서 아버지의 장부책에 끼워놓아 작별인사로 하였는데 길이길이 후세에 전해지고있다.    이 아들은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니    배워서 이름 날리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    뼈를 묻을 곳은 고향뿐만 아니거늘    인생 그 어디엔들 청산이 없으랴.                                                  일본인 사이고우 다까모리의 시를 고쳐서 쓴 시지만 17세 소년의 가슴에 품은 웅대한 포부와 장한 뜻 그리고 그 씩씩한 기개가 읽을수록 가슴에 와닿으면서 감동에 젖어들게 한다. 방문객이 많아  밀쳐댔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잠간 사색의 늪에서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그렇듯 웅대한 포부와 장한  뜻이 있었기에 집을 떠나게 되였으며 끝내는 큰 뜻을 현실로 이루어 만민의 대구성으로 인민의 마음속 태양으로 되였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하여 아쉬운대로 귀로에 올라야 했다.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모주석의 생가를 다시 우러르면서 이제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방문하면서 기념사진도 꼭 남길것이리라고 나름 소원을 만들어보았다.
62    잊혀지지 않는 민병훈련 댓글:  조회:74  추천:0  2025-01-13
티비로 드라마를 시청할 때면 나는 전투편을 즐겨보는데 그러는 나를 두고 모두들 리해않된다는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젓기도 한다. 내가 전쟁하는 드라마를 즐겨본다해서 참군한적이 있거나 더우기 전투에 참가 해본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40년전의 민병훈련이 잊혀지지 않고 생생히 떠오르면서 가끔 추억속에 묻힐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때 년대에는 마을을 단위로 민병조직이 있었는데 민병조직이란 한마디로 간단히 말한다면 생산로동을 탈리하지 않는 무장조직을 말한다. 이를테면 농촌에서 농사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 전제하에서 청년들로 조직된 무장조직이다. 무장조직이라 하여 항상 무기를 지니는것은 아니고 유사시에 쓸수 있도록 무기를 촌정부 무기고에 보관하고있었다. 생산로동을 리탈하지 않는만큼 일년농사일이 다 끝나고 음력설까지 쇠고나서 봄철일이 시작되기전에 한달에 가까운 시간을 리용하여 민병훈련이란걸 진행하는것으로  민병들의 자질을 높였다. 민병훈련은 향정부의 비준을 거쳐 향무장부에서 책임지고 조직하였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약 130여가구가 살았었는데 청년들이 백여명에 가까워 한개 련대로 편성되였으며 한개 생산대를 한개 패로 세개 생산대에 세개 패로 편성되였었다. 무기는 보총 60자루, 돌격총(카빙총)9자루, 기관총6정이 있었다. 모두가 전쟁에 나갔던 무기들이지만 제때에 기름을 치고 보수하여 녹이 쓸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민병훈련동원대회가 있고 총을 분여받은 이튿날부터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8리 상거한 향소재지에 집결하여 훈련을 받았다. 훈련내용은 대렬짓기로부터 전술훈련, 무기해부 및 원상복귀하기, 실탄훈련 등으로 이어졌다. 음력설이 지나 봄을 눈앞에 두고있으나 날씨가 제법 맵짰지만 종일 총을 메고 대렬짓기를 하다보면 땀이 흥건히 배여 나왔다. 간혹 앉아 쉬다가도 갑작스레 집합호각을 불면 총을 메고 달려가 렬을 짓고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전술훈련은 쾌속전진과 포복전진, 돌격 등인데 새끼줄을 가로세로 쳐놓아 가시철조망을 대체하였으며 적진이 앞에 있다고 가상하고 조별로 나뉘여 포복전진으로 가시철조망을 넘어서 엄페물을 찾아 적진을 살펴보다가 돌격하였는데 교관이 전과정을 지켜보고 점수를 매기였다. 무기해부와 원상복귀하기는 실내훈련이였는데 교관이 여러가지 총과 수류탄, 폭파약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한후 보총과 돌격총을 모두가 보는데서 해부하고 다시 원래대로 맞추고 우리더러 해보게 하였다. 비록 간단한것 같았지만 거기에도 순서가 있는지라 참답게 배워야 빠른 시간내에 해부하고 맞출수 있었다. 마지막 훈련내용은 모두가 제일 기다리던 실탄훈련이였는데 사격은 80메터,120메터 사격거리로 두번에 나누어 진행하였으며 탄알은 매번 10발씩이였고 수류탄은 한사람당10개씩이였다. 80메터 사격거리는 사격판이 보이지만 120메터 사격거리는 사격판이 아물아물거려 잘 보이지가 않았으며 눈을 크게 오래동안 뜨고있으니까 눈물이 나와서 더 보이지 않았다. 요구도 80메터 사격거리에서는 요구가 높았지만 120메터 사격거리에서는 사격판만 맞추어도 합격으로 인정해주었으니 백메터 넘는 사격거리에서는 명중하기 어렵다는걸 알수 있었다. 사격에서 관건은 3점일선(3点一线)을 지키면서 묘준이 되면 숨을 몰아쉬고 방아쇠를 살짝 당겨서 조그마한 공간도 없애고 다시 숨을 죽인후 방아쇠를 천천히 당겨서 발포한다는걸 그때 배워서 실천해보았었다. 수류탄은 안전을 고려하여 평지에서가 아니라 언덕밑에 내리던지고 명령에 따라 도랑에 납작 엎드렸으니까 10개를 줴뿌렸지만 어떻게 터졌는지 몰랐다. 교관이 수류탄뿌리는 자세나 행동을 보고 점수를 매기였으니까 함부로 일어나서 볼수도 없었다. 그렇게 20여일간의 민병훈련이 끝나면 과거급제하고 금의환향이나 하듯이, 큰일이나 하고 개선하듯이 마을로 돌아와 총을 바치면 다시 농사일을 해야 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전업군인이 아닌 민병훈련이지만 많은걸 배웠으며 특히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헤쳐나가는 정신을 배운것이 제일 값지다고 생각해본다. 나는 오늘도 티비를 켜고 “대청산을 피로 물들이다”란 전쟁편을 시청하고있다. 잊혀지지 않는 그때 그 시절의 민병훈련을 떠올리면서  
61    깔개가 없으면 습기가 올라온다 댓글:  조회:2106  추천:0  2014-09-01
(흑룡강신문=하얼빈) 큰 범위는 제쳐두고라도 지방의 “장”자를 가진 령도간부들의 순위를 놓고보면 농촌마을의 지서, 촌장이 제일 말등석임은 틀림이 없다. 비록 제일 말등석을 차지한 지서, 촌장이지만 전에는 마을과 그 마을에 사는 촌민들을 위하여 불철주야로 뛰여다니면서 로고를 아끼지 않고 많은 일들을 하였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지서, 촌장들이 몸에 치유할수 없는 병을 갖고도 불평불만이 없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혀를 내두르지 않을수 없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대가를 따지지 않았으며 그 직을 맡았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것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일해왔던것이다. 공신이란 바로 그들을 두고 하는 말이면 어떨가.   이제 사회가 발전하면서 많은것이 달라져가기 시작하였는바 제일 말등석에 쪽걸상을 가지고 앉은 한 마을의 지서, 촌장의 로고를 알아주기 시작하여 몇년전부터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일년동안의 수고비를 년말이면 괜찮게 지불해주어 그런대로 위안이 되고 또 일하는 지부서기나 촌장도 그런대로 자신들의 로고를 알아주니 힘을 갖게 된다고 할수 있다. 또한 현재 비여가는 마을을 지켜가면서 새농촌건설의 선두에서 땀흘리며 달리고있는 이가 바로 지서, 촌장들이니 그들의 로고를 알아주는것은 천만 무방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외나들이와 더불어 연해도시로의 진출로 우리의 조선족사회가 흔들리고있으며 우리의 조선족농촌마을들이 비여가고있는 현실쯤을 지금 조선족사회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비여가는 마을을 지키면서 마을을 알뜰하게 꾸려나가는것은 자못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으며 이런 일들을 하고있는 이들의 가슴에 마땅히 꽃다발을 달아주어야 한다. 여기서 물론 말등석에 쪽걸상을 놓고 앉은 우리의 지서, 촌장들이 선두로 나서고 자신을 바쳐가고있어 다소라도 위안이 되여가고있으며 또한 앞날이 기대되기도 한다. 헌데 살펴보면 말등석에 쪽걸상을 놓고 힘다하는 지서, 촌장들의 뒤에 쪽걸상도 없이 쪼크리고 앉았지만 소리없이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촌로년협회 회장들이다. 이제 어느 마을이나 찾아보면 젊은이는 지체자나 장애자를 제외하고는 근본 찾아볼수 없으며 중년이나 장년들도 쌀에 뉘격이고 오직 늙은이들뿐이다. 전에는 마을마다 청년조직이 있어 마을에 생기가 넘친것은 두말할것 없고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젊은이들이 힘차게 밀고나갈수 있어 참으로 든든하였다. 허나 이제 늙은이들뿐인 마을에서 그런대로 마을을 지키고 또 마을을 꾸리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나가는 조직이 곧 로인협회인데 그 조직을 맡아 선두에 서서 모든 일들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 바로 로인협회 회장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서, 촌장까지는 말등석의 위치에 놓고 쪽걸상이라도 주면서 로고를 알아주지만 로인협회 회장만은 위치도 없고 로고도 말로만 진행되니 어딘가 서운한 느낌이다. 물론 지금까지 그 마을에서 평생을 살면서 잔뼈를 굳히고 갖은 풍상고초를 겪어온 분들이라 칭찬이나 로고를 따지는 일 없이 오직 마을을 위한다는 그 한곬으로 마음을 쏟고있으니 참으로 감격할 일이 아닐수 없지만 경제사회이니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들의 로고를 알아준다면 어떨가? 그러면 그들도 그것이 자각이 되고 동력이 되여 더 열의를 쏟을것이며 비여가는 우리 마을들을 더 잘 보살필수 있을것이다.   자고로 한 사회나 한 단체를 이끌자면 사람마다의 위치가 달라야 함은 의심할바 없는 일이며 또 그 위치에 의하여 순위가 결정되는것이다. 푹신한 의자로부터 쪽걸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앉을수 있다는것은 보기 좋으나 깔개도 없이 앉은 사람은 보기 좋을수가 없다. 물론 순위가 없으니 걸상은 바라지 않지만 깔개쯤이라도 주어 습기가 올라오지 않게 해주면 좋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깔개가 없이 앉으니 습기가 올라오고 그 습기가 오래되면 앉을수 없을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년세가 있어가지고도 한마음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위하여 헌신하는 로인협회도 돌봐야겠지만 그 선두에 서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일정한 대가가 차례진다면 힘이 되고 열이 될것이다. 마치 습기가 올라오지 않는 깔개에 앉은듯이 말이다. 흑룡강신문 2014년 8월 29일자
60    생각을 바꾸면 거리가 줄어든다 댓글:  조회:2296  추천:1  2014-06-18
중한수교 20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조선족들에게나 한국사람들에게 더는 한국이나 중국이 생소한 느낌을 주지 않으며 우리들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다녀왔고 현재 몇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기에 체류하고있다. 한민족으로서 짧지 않은 20년동안 서로 래왕하고 또 20년동안 함께 해왔다면 이제는 거의 한집식구나 다름없이 되여야겠지만 아직도 갈등과 불신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봐야 할것이다. 물론 20년 세월을 지나오면서 서로의 사이가 많이 개선되였다고 할수는 있지만 아직도 때로는 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가슴을 아프게 하고있다. 어쩌면 그 주요 원인이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자기만의 옛생각을 그대로 가지고있는데서 비롯된것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모두가 알고있는 일이지만 간단히 실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피부로 느껴서 알겠지만 한국사람들은 현재 우리가 사는데 비하면 정말 피곤하게 산다고 할수 있다. 날이 밝기 바쁘게 집을 나서면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건 아주 정상적이니깐. 아침일찍 출근시간과 저녁 열한시가 넘어 퇴근시간때에 지하철을 리용해보면 그 시간대에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비고있으며 차안은 발디딜 틈조차 없다. 우리 여기서는 그 시간대면 아마 집에서 편안히 누워 텔레비죤을 보거나 아니면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또는 달콤한 꿈나라에 들어갔을것이다.    필자도 한국에 갔던김에 한국생활을 피부로 체험해보려는 생각으로 식당에서 일해보았는데 한국식당일이 힘든 원인의 하나가 한국사람들은 낮술을 마시지 않고 식사만 하기에 상 하나를 차지하고 식사하는 시간이 길어서 20분, 빠르면 십분이면 되니깐 손님들이 륜번으로 쉴새없이 들이닥치니 당연히 식당일군들이 힘들수밖에 없는것이다. 우리 여기서는 점심시간도 상에 앉으면 짧아서 한시간, 길면 두시간씩 술상을 벌리고 저녁에는 아예 퍼더버리고 앉아서 서너시간씩 술을 마시는건 희한한 일이 아닌 아주 례사로운 일로 되고있지 않는가.    지난 여름 한국에서 연수하는 기간에 여수세계박람회에 가보게 되였는데 때는 삼복무더위라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날 어찌하다보니 자동판매기가 있는 그늘밑에서 두분 한국분들가운데 끼여 땀을 들이면서 담배쉼을 하게 되였는데 그들은 자동판매기에서 랭커피 두개를 뽑아 여유작작하게 나누어 마시면서 나는 근본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연수기간 우리의 학습과 생활을 책임진 분들이여서 막연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면목있는 사이였다. 우리 여기라면 금방 면목을 알아서 인사를 나눈 사람이 곁에 있다면 먼저 그분에게부터 드리고 다시 자신들의 차지가 될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실례들은 많고도 많다. 생활의 이구석 저구석에서 우리의 생활과 비교해보면서 우리들의 생각을 하나하나 바꾸어야지 않을가. 혹 어떤 이들은 왜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가고 질문할수도 있는데 문제는 우리가 부를 창출하기 위하여 한국이라는 곳에 정착하고있기때문이다. 우리 말 속담에 “산에 가면 산노래, 들에 가면 들노래”라는 말이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갔으면 마땅히 그들의 생활방식과 그들의 사고를 생각하고 따라야 할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내키지 않는 면이 많을수 있지만 생각을 바꾸지 않을수록 일하고 생활하는 자신이 엄청 피곤해질것이고 스트레스는 쌓이고 쌓이게 될것이며 그런것들이 종당에는 자신을 불리해지게 하거나 화근을 불러오게 될것이다.    한국인들 역시 우리 조선족들이 너무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한국에 간것이 아니라 좀더 잘살아보려는 생각으로, 또 한민족으로서 언어와 생활습관의 동질성으로 한국행을 했다는 생각을 해주고 어지럽고 힘든 일, 3D업종에는 우리 조선족들이 한몫 해줘서 고맙게 여긴다면 서로의 거리는 훨씬 줄어들것이다. 한국인들도 40대까지의 젊은 층들은 중국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있지만 40대후반의 년세있는 세대들은 아직도 낡은 관념을 채 가시지 못하고있는것을 필자도 직접 목격했다.    환경에 적응할줄 아는 사람만이 살아남을수 있다 하여 적자생존이란 말이 생겼는데 살아남으려면 마땅히 그 환경에 적응하여야 할것이다. 그 환경에 적응하는것은 스스로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적응하게끔 부추켜주는것도 빼놓을수 없는것이다. 우리 조선족들이 생각을 바꿀 때 한국인들 역시 다른 시각으로 보고 생각한다면 서로의 거리는 훨씬 줄어들것이며 어느날인가는 서로의 사이가 무람없이 될것이리라 믿고싶은 마음이다. 해란강닷컴 2014,6,17.
59    높이 서서 멀리 바라보자 댓글:  조회:2401  추천:1  2014-05-13
우리말 속담에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 뜻인즉 십년이 지나면 변하지 않는것이 없다는것이다. 지금 음미해보면 이 속담은 그제날 락후하여 변화가 느린 사회배경에서 만들어진것이기에 현재는 근근히 표현에 그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모든것이 전자에 의해 정보로 처리되는 현대사회는 일년이라도 강산이 변해가고있다면 가장 적절할것 같다. 말그대로 일사천리로 발전하는 사회다보니 자고깨여나도 느껴지는건 오로지 변화뿐이다. 작은 도시도 일년만 지나면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가고있으며 층집은 말그대로 땅을 차고 수풀처럼 일어나 사람들의 눈을 뒤집히게 하고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6, 7층짜리 아빠트였었는데 요즘은 20여층짜리 고층아빠트가 어깨겨룸을 하면서 일어서고있으니 그 변화를 한입으로 다 표현할수 없다. 거기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엄두조차 못내던 자가용이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 우리 모두에게 한낱 평범한 일로 다가서고있다. 수풀처럼 일어나는 층집도, 날따라 늘어가는 물매미 자가용도 좋지만 그로 하여 가장 힘든 일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길에 나서는 일이다. 애초에 층집을 지을 때는 서로가 한치의 땅도 양보없이 짓다보니 중심거리를 제외한 골목길들은 그제날의 길넓이대로 늘이지 않게 되였는데 그당시까지만도 그런대로 행인들의 통행에 괜찮았었다. 헌데 여기저기 층집들이 수풀처럼 일어나고 도시인구의 증장과 더불어 또 차들이 늘어나면서 그 좁은 길은 미여질 지경으로 되였기에 문밖을 나서서 도보로 일보러 다니자면 촌각도 헛눈길을 팔지 말고 신경을 고도로 도사려야 하는데 피로한건 둘째로 심신이 괴로워서 사맥이 나른해지지 않을수 없다. 더우기 차가 많아지면서 중심거리 곳곳에 붉은 등과 푸른 등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감시카메라까지 안장하다보니 차주들은 될수록 골목길을 리용하려고 하는데 그로하여 좁은 골목길은 말그대로 미여질 지경이여서 때로는 도보로도 발을 옮겨딛기가 힘들다. 어린애가 있는 집들은 항상 걱정과 불안속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맞이한다. 애초에 집을 지을 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람도 차도 불어나 상상외로 시끌벅적할것이라는 생각을 했더라면 그 당시로서는 좀 내키지 않는 생각일지라도 길을 넓히면서 집을 지었을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차를 운전하는 사람도 길을 가는 사람도 힘들지 않을것이다. 문제는 코앞만 보고 좀 더 앞을 내다보는 장원한 타산이 없었기때문이 아닐가 생각한다. 현재 거의 모두가 아빠트에서 생활하고있는데 제일 밑층에서의 감수와 제일 높은 층에서의 감수는 확연히 다를것이다. 낮은 층은 오르기는 쉬워도 갑갑하고 보이는것이란 오직 맞은편 아빠트의 같은 층밖에 없을것이지만 높은 층일수록 비록 오르기는 힘들어도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가슴이 탁 트이면서 거뜬한 감을 줄것이며 앞을 내다보면 시내를 벗어나 저멀리 산등성이까지 볼수 있다. 그러고보면 힘이 들더라도 높은 층에서 저멀리 산등성이까지 바라볼수 있는 즐거움속에서 사는것을 더 선호할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지혜와 너무도 흡사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집을 지을 때 길을 넒히는데 내놓는 땅이 비록 아까울지라도 내여놓는다면 길을 번듯이 넓히면서 아빠트를 지을것인데 그러면 시간이 지나 사람과 차가 늘어난다고 할지라도 시원스런 길에서 활보하면서 다닐수 있을것인즉 앞을 내다본 명지한 처사가 아닐수 없다. 그 당시 아깝다고 내여놓지 않고 그런대로 집을 짓다보니 몇년이 지난 지금 초가집도 아닌 아빠트를 허물수도 없는 딱한 처지여서 결국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힘에 부치지 않을수 없다. 낮은데 서서 코앞만 내다보기보다는 높은데 서서 멀리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가. 낮은데서 내다보았자 코앞만 볼것이지만 높은데 서서 바라보면 멀리 내다볼수 있을것이며 그 바라보는 즐거움은 멀지 않아 현실로 다가올것이고 그 다가온 현실은 그렇듯 가슴뿌듯할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 어떤 일에서나 높은데 서서 멀리 바라보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면 되돌릴수 없는 후회는 적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해란강닷컴  
58    개는 어디까지나 개이다 댓글:  조회:2871  추천:1  2014-05-08
일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참으로 감을 잡을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구역아빠트에서 있은 일이다. 7층에 거주하는 집에서 10년도 더 넘어되게 개를 길러왔는데 이제 그 개도 나이를 먹은 탓에 로쇠해져서 수염도 흰 수염이 나면서 얼굴이 모두 희여졌을뿐만아니라 그에 따라 운신도 버거워 7층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려면 힘에 부쳐 헐떡이면서 몇번씩 쉬여야 한단다. 하여 이제는 개도 스스로 힘에 겨운것이 알리자 아예 7층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고 집에 죽치고 누워있는데 하루 세끼를 쏘세지와 햄버거로 “대접”하는가 하면 목욕까지 시켜주면서 그 정성이 너무나 지극하여 보는 사람들이 보기가 민망할 정도라고 한다. 옆사람들이 가져다 버리든지 아니면 처리하라고 하면 펄펄 뛰면서 화를 낸다고 하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하긴 개도 생명을 가졌고 또 오랜 시간동안 기르면서 정들었으니 다소 리해는 되지만 그렇듯 정성을 다하는데는 어딘가 썩 내키지는 않는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개를 제일 천한 짐승으로 생각해왔으며 제일 천한것과 속된것을 말할 때면 의례 개에 비유하여 말하였는바 우리 말 속담에도 개와 관련한 속담들이 많고도 많으며 우화들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전부터 개를 기르는것은 집지킴을 시키기 위한것이고 그러다 다 자라면 잡아먹기도 하기 위해서였다. 너무 멀리는 몰라도 지난세기 70년대부터 90년대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개를 키워서 잡아먹거나 개를 사서 잡아먹는 등 추렴들을 자주 하였으며 또 그것을 모두가 함께 모여 즐겁게 보내는 시간으로 간주하였었다.   헌데 언제인가부터 서양의 물이 들어오면서 개에 대한 관념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는바 우리가 전에는 보지도 못하였던 앙증맞거나 혹은 괴상하게 생긴 개들이 높은 몸값으로 우리의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였으며 또 그것을 일종 자랑으로 혹은 부의 상징으로 간주하기까지 하고있다. 길을 가다가도, 강변로를 산책하다가도, 아침시장을 돌 때도 개를 안고 다니거나 개의 목에 맨 줄을 쥐고 어깨를 살리고 으쓱해서 다니는 사람들을 너무나 쉽게 볼수 있다. 그러는 그들이 자신들이 아주 대단해보일거라 생각하는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개털을 풀풀 날리고 또 이리저리 쏘다니며 걸어가던 개가 아무곳에나 마구 변을 보아 다른 사람들의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준다는것은 아예 생각해보는것 같지 않다.   언젠가 한국 TV에서 본 이야기인데 한 가정부녀가 개의 옷을 각양각색으로 백벌이나 갖추어놓고 하루에도 몇번씩 갈아입히면서 거기에다 신까지 받쳐 신기는것을 보고 그 개가 분명 개였지만 그 순간만은 정말 개인지 의심할 지경이였다. 한것은 너무도 분에 넘치는 사람대접을 그것도 고급대접을 받고있으니 말이다. 확실히 현재 애완견들은 사람이상의 대접을 받고있는것만은 사실이다.   언젠가 TV에서 본데 의하면 아프리카를 비롯한 빈민구의 어린이들은 하루에 고작 한끼도 먹지 못하고있으며 단돈 몇십원이 없어 약을 먹지 못하여 실명되고있거나 목숨을 잃어가고있다. 그들에게 만약 지금 애완견의 하루 이틀 먹이에 들어가는 돈만 준다면 아마도 큰 도움이 될수 있을것이다.   자신의 생활이 넉넉하여 그리고 자신의 취미가 그러하여 개를 기르는데 남의 잔치상에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는격으로 참여할 일은 아니겠지만 개가 아무리 령리한들 개는 어디까지나 개이지 필경 사람은 아니지 않을가 생각한다. 물론 관습의 차이는 있겠지만 개에게 너무 고급대접을 하거나 정성을 다하는것은 좀처럼 리해가 가지 않는다.   개에게 그렇듯 고급대접을 하고 정성을 쏟을 때 한번쯤 생각해보는것도 좋지 않을가. 나의 부모님께, 나의 형제에게, 나의 친척들에게, 나의 친구들에게, 나의 동료들에게, 나의 이웃에게 그만큼한 친절과 정성을 베풀어보았는지를 말이다. 만약 나와 관계되는 모든 주위사람들에게 항상 감사해하면서 친절과 정성을 베푼다면 말그대로 정많은 사람이 될것이며 그와 함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정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될것임은 더 말치 않아도 될것이다.   그렇다 하여 개를 너무 천하게 굴거나 기르지 말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개는 어디까지나 개인만큼 개로서의 대접을 받으면 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해란강닷컴
57    다른 누가 아닌 우리가 해야 한다 댓글:  조회:2023  추천:3  2014-04-21
대학입시를 코앞에 두고 어떻게 하면 조선어문성적이 제고될수 있겠는가 물어오는 학생들이 있는데 성적이 올라가지 않아 속을 태우는 그들의 안타까운 마음은 리해할수 있지만 그렇게 물어오는데는 말그대로 코막고 답답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선어문성적이 낮은 학생들 대부분이 우리 말로 된 단어의 기본 뜻을 알지 못하고있으며 그 단어의 뜻을 몰라 물어오게 되는데 해석하면 듣기 싫은 말이지만 소귀에 해금타고 소귀에 경읽기라고 하면 가장 적합할것 같다. 허나 그 말뜻을 한어로 바꾸어서 해석해주면 인차 깨우치는 그들이다. 허나 한어로 깨우친들 무엇하랴. 조선어문은 필경 우리 말로 된 조선어문이지 한어로 된 한어문이 아님에랴. 그러다보니 우리 글로 된 과외독서는 아예 하지도 않아 단어장악량이 너무도 적기에 작문이라고 지어보았자 너무도 메말라 읽을멋이라고는 없다. 하니 어찌 단시일내에 조선어문성적을 제고시킬수 있겠는가.   현재 우리 조선족학교들의 현황을 보면 소학교든 중학교든 교정에서 학생들 거의 모두가 한어로 일상대화를 하고있으며 또 그렇게 한어로 대화를 하는걸 아주 정상적인 일로 혹은 자랑으로 간주하고있다. 특히 고중같은 학년을 본다면 조선어문을 제외하고 거의 한어로 혹은 한어와 조선어를 병용으로 사용하여 교수하는 사례가 많기에 한어로 접촉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있는 현실이다. 거기에 현재 대학을 졸업한 조선족청년들은 교직에 몸담으려 하지 않다보니 한족청년들이 우리의 교육현장에 참여하는 수가 날따라 늘어나고있는 실정인데 그들은 일색 한어로 교수하고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학생들이 우리의 언어와 문자로 표달할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이제 조선어문시간이 가장 유일한 표달시간으로 되고있다.   학교마다 한족교원들이 십여명씩 되고 또 나날이 늘어나는 추세이다보니 학교의 대소형회의나 활동에서 우리 말이 아닌 한어가 늘어나고있으며 학급의 주제반회의나 문오활동도 살펴보면 우리 말보다는 한어가 더 많은 비례를 차지해가고있다. 때로는 이게 조선족학교가 옳은가싶을 정도로 얼떠름해질 때도 있으면서 그 뒤끝은 서운한 마음이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며 씁쓸해지는건 어쩔수 없다.   개혁개방 30여년, 중한수교 20년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대이동이 생기면서 우리의 언어문자와 전통문화를 어떻게 지켜나갈것인가가 큰 문제로 대두하고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하여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과 지성인들이 우리 민족 언어문자를 살리고 전통문화를 이어가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힘을 고스란히 바쳐오고있는 미거가 우리들의 마음을 흥분하게 하고있다.   우리 민족 언어문자를 지켜가고 전통문화를 어어가는 가장 전초적인 진지가 바로 우리의 교육임은 누구나 자인하는 일이다. 하다면 우리 민족 언어문자와 전통문화를 지켜가는 우리의 교육은 구경 무슨 일을 해야 할가? 간혹 웅변대회나 랑독랑송대회, 전통문화에 대한 강의로 우리 민족 언어문자와 전통문화를 지켜나가는데 한몫 했다고 한다면 너무 간단하면서도 과분한 평가가 아닐가 생각한다. 언어문자의 정확한 사용과 활용은 한두번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며 한두번의 강의로 전통문화가 계승발전되는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세계화의 길에서 우리 민족 언어문자를 살리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려면 지속적인 노력은 물론 보편화, 보급화가 되여야 할것이다.   보편화, 보급화가 되여야 할 전초기지인 우리의 교육현장이 말짱 한어로 된다면 어찌 언어문자를 살리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서 자기의 역할을 했다고 할수 있겠는가? 민족의 언어문자가 소실되고 전통문화가 잊혀져간다면 그 대부분의 책임을 우리 교육이 짊어져야 할것이다. 하다면 이제 우리는 더는 다른 누구를 믿거나 다른 누구에게 의탁하지 말고 우리가 바로 이 일을 해야 함을 심심히 느끼고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해나가야 할것이다. 한어도 잘해야 하겠지만 민족의 언어문자도 잘하게끔 조건과 기회를 마련하여주어 자라나는 후대들이 진정 우리 말과 글에 깃든 향기를 느끼게 하여야 할것이며 전통문화로부터 조상들의 얼을 느끼고 숭배할수 있게 하여야 할것이다. 다른 누가 해아 하는 일이 아니고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자각하고 우리의 교육이 진정으로 우리의 언어문자를 살리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기름진 터전이 되게 하여야 할것이다. 해란강닷컴  
56    모순되는 현실 댓글:  조회:2233  추천:2  2014-04-09
애초에 친척방문, 약장사로 시작되였던 한국나들이가 중한수교를 맞이하면서 물고가 트이였다가 이제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이하면서 더는 신비하게 느껴지지 않고있다. 현재 50만명도 더 되는 조선족이 작은 한국땅에서 북적이고있는데 앞으로 점점 더 불어날 추세를 보이고있는것만은 부정할수 없는 현실이다.   20여년의 한국나들이를 돌이켜보면 실로 말그대로 희와 비가 그대로 깔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전에는 엄두도 못내고 꿈도 못꾸면서 그저 그림 같았던 한국으로만 생각하였댔지만 정작 물고가 트이자 가려고 서슴없이 밀항선에 올랐다가 지금까지도 종무소식인 사람들, 꼭 가고싶은 마음으로 숱한 빚을 내면서 시도하였다가 결국 사기당하여 자결한 사람들, 위장결혼이란 허울로 가정을 산산쪼각낸 사람들, 과로와 과음으로 한국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위험한 현장일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실로 이루 다 라렬하기가 힘들며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파오고있다.   한국나들이로 우리는 너무도 많은것을 지불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너도나도 한국나들이란 이 길목에서 북적대다보니 우리의 선조들이 피땀으로 일구어온 땅은 주인을 잃어가고있으며 조선족농촌마을은 비여가고있다. 이제 십년, 이십년후의 조선족농촌마을의 상태는 어떻게 될지 그려보기조차 무섭다.   전에는 그렇듯 단란하고 오붓하던 가정이 리산의 아픔을 겪게 되였으며 부부정이 좋아 잉꼬부부라는 말을 들으면서 남들의 부러움을 자아내던 부부도 하루아침에 남남이 되는 리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우리의 주변에서 심심찮게 찾아볼수 있다. 리산과 가정의 파탄은 결국 아이에게 아물수 없는 상처를 주고있는데 어려서부터 부모와 갈라져있은 요즘의 아이들은 이제는 현실에 습관되여서인지 그리움도 진하지 않을뿐만아니라 부모들의 리혼도 무감각으로 받아들이면서 오직 자신의 뒤바라지만 책임져주면 상관이 없다는 태도이니 그들의 성장을 책임진 학교가 모든 역할을 하자니 힘에 겨울뿐이다.   간혹 기한이 되여 한국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천방백계로 다시 한국행을 시도하고있으며 아직도 한국행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환률로 보면 한국의 로임상황이 그렇게 좋은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서 벌기보다는 낫다는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긴 한국나들이가 있었기에 도시에 아빠트를 살수 있었고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할수 있었으며 떵떵거리며 살아갈수도 있는것이다.   사회도 가정도 모두가 돌아와서 내 마을, 내 가정을 지키면서 그 옛날처럼 오손도손 살아가기를 바라는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있는 오늘의 현실이며 또 앞으로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마을에 돌아가서 농기계를 구전히 갖추고 농사일을 해도 벌이가 그렇게 나쁜것만은 아니겠건만 그런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도시에 들어와서 식당이나 기타 업종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이 더 많은것이 현실이다. 도시로 들어와서 하나의 업을 하려면 말그대로 쉽지만은 않기때문이다. 우선 자신의 경영능력과 독특한 비법이 있어야 할것이며 사회인맥관계도 좋아야 할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힘과 밑천에만 의지한다면 결국 문을 닫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일단 영업을 시작하면 대여섯 부문에서 달려와 이런저런 세금을 요구하니 웬만해서는 당해내기가 힘든게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곳에서 하는 일도 한국에서 일하는만큼 아니면 좀 적은 로임이라도 받는다면 그리고 무슨 일이든 하려고만 한다면, 여러부문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지지해준다면, 모든 일에서 공정적이고 밝아진다면 아마도 귀국하는 행렬이 늘어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최소한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는 한국행을 시도하지는 않을것이다.   중한수교의 해가 깊어갈수록 한국으로의 조선족이동은 더 자유로와지는 반면 지불해야 할 대가도 더 커질것이다. 현실적인 모순의 격차가 줄어든다면 잃는것보다는 얻는것이 더 많을것이며 우리 조선족사회도 더 밝아질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란강닷컴 4월 7일자  
55    의무와 임무 댓글:  조회:2173  추천:2  2014-04-04
 의무와 임무를 사전에서는 분명하게 해석하고있다. 이를테면 의무는 사회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보아 반드시 실행하거나 지켜야 하는것을 말한다면 임무는 맡아서 해야 할 과업 또는 맡겨진 일을 말한다. 사전해석에서는 의무와 임무의 차이를 알기 쉽게 뚜렷하게 밝혀놓았건만 우리의 생활에서는 의무와 임무의 차이를 딱히 리해하지 못하고 혼동하고있으며 그 혼동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앞에 아름답지 못한 풍경들이 출연되고있다. 지난 겨울의 어느날 저녁에 있은 일이다. 강변광장에 나가 건강체조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였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중의원옆 십자로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것이였다. 멀리서 볼 때는 몇몇이 둘러서던것이 내가 그곳에 다달았을 때는 이미 말그대로 사람들로 겹겹이 바자를 치고있어 발을 들여놓을 틈도 머리를 기웃거려 볼 틈도 없었다. 지나치면서 나이가 듬직하고 점잖아 보이는 분에게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모여들었냐고 물었더니 아무 일도 아닌데 경찰이 불이 번쩍번쩍하는 사이렌차를 세워놓고 서있으니 모두 무슨 일이 있냐 모여든것이 저런다는것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그자리에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그 자리에 겹겹이 사람바자를 둘러친 사람들 모두가 무슨 일이 있나 호기심으로 구경거리를 만나서 구경하고싶어 모여섰다는것인데 그것이 더욱 사람을 어이없게 만들면서 서글퍼지게 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제날 내가 농촌에서 보낸 동년시절은 지지리도 가난한 시기였기에 정말 구경거리가 없었다. 하여 일단 마을에 싸움이 나거나 장사군이 와도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무리지어 쓸어가고 쓸어오군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허구픈 일이 아닐수 없다. 그때는 지지리도 가난하여 사람들의 사상의식과 정신의식이 너무나 차하였기에 우매할수밖에 없었다. 허나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고 또 자고 일어나도 눈에 뜨이는 변화를 가져오고있는 오늘날에도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목을 빼들고 몰켜서있는 사람들이 있다는건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고보니 자연 의무와 임무에 대하여 다시 새삼스럽게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다. 살아가면서 단순히 의무와 임무의 차이를 리해하는데만 그치지 말고 실제행동에 옮긴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좀 더 밝고 따뜻해지지는 않을가 생각해본다. 특히 사회인으로서의 우리 모두가 도덕적범주나 행동에서 반드시 실행하고 지켜나간다면 우리 모두의 자질제고는 보다 높은 차원에 이를것임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문제는 맡겨진 일은 그런대로 해나가는데 도덕적범주나 행동에서 반드시 실행하고 지켜가야 하는것이 잘 되지 못하고있다. 하기에 교통사고로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도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지 팔을 걷어올리고 구원의 손길을 주는 사람은 적거나 없으며 환경보호일군들이 땀을 흘리면서 잔디밭이나 화원을 꾸려놓아도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무참이 밟아놓는 일은 심심찮게 볼수 있으며 분명 쓰레기적치장소나 쓰레기상자가 있건만 너무도 태연하게 아무곳에나 버리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찾아볼수 있으며 가래침을 아무곳에나 뱉거나 담배꽁초를 아무곳에나 버리는 일은 이젠 자연스러운 일처럼 안겨오고있는 현실이다. 이러루한 일들은 찾아보고 렬거하자면 정말 너무도 흔한 일이여서 말하는 자체가 부끄러워난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맡겨진 일을 제때에 참답게 완성해야 할뿐만아니라 반드시 실행하거나 지켜야 할 일도 잊어서는 않된다. 문제는 도덕적범주나 행동에서 반드시 실행하거나 지켜야 할 일은 고도의 자각성을 요구하는데 만약 그 자각성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우리 모두의 자질은 보다 높은 차원에 이른것일진대 그러면 곧바로 문명한 사회, 조화로운 사회는 이루어질것이며 참으로 살맛나는 세상을 꾸려갈수 있을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세계인 모두가 진정으로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나라로 동방에 우뚝 설것임은 의심치 않아도 될것이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부여되는 의무를 참답게 수행해보자.
54    자각성과 적극성의 원심은 마음이다 댓글:  조회:1866  추천:0  2014-03-28
 저녁을 먹고 때로는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볼라면 강변의 광장에서 천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정연하게 줄을 서서 음악에 맞추어 체조를 하는 광경을 볼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운동이 되랴 싶은 의문의 마음과 더불어 어쩌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같이 정연하고 일치하게 할수 있을가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날부터인가는 나도 그속에 합류하여 곡에 맞추어 체조를 해보고싶은 충동을 억누늘길 없어 끝내는 그 대오에 가담하게 되였는데 너무도 예상밖이였었다. 문제는 흥겨운 곡에 맞추어 체조를 하니 마음이 즐거웠을뿐만아니라 체조 또한 팔, 다리, 허리 등 온몸을 다 움직일수 있어 너무도 거뿐하고 상쾌하였다. 그렇게 재미를 붙이다보니 하루 일상에서 빼놓을수 없는 일과가 되여 저녁밥술을 놓기 바쁘게 강변광장으로 달려가군 하였다. 나못지 않게 모두가 그렇게 열정적이였었는데 추운 겨울이여도 저녁마다 천명가까이 광장을 꽉 메우군 하여 참으로 보기좋은 풍경이였다. 지난번 이 겨울잡아 두번째로 내린 눈은 하루종일 내리다보니 발목을 넘어서게 내렸었다. 그날 나는 (오늘 저녁에는 눈이 이렇게 많이 내렸는데 체조를 할수 있을가?)하는 의문을 지워버리지 못한채 미심쩍은 마음으로 강변광장에 갔었다. 헌데 이게 웬 일이란 말인가? 강변광장은 언제 눈이 내렸나싶을 정도로 말끔히 치워져 있었으며 전날만은 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몇백명의 사람들이 체조시간을 기다리고있는것이였다. 알고보니 모두가 자각적으로 눈치는 도구를 가지고 와서 적극적으로 눈을 말끔히 쳐버렸던것이다. 그날 체조하는 내내 체조대오를 두고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건 어쩔수 없었다. 천여명 가까이 참가하지만 거의 모두가 시간을 맞추어 오고 간혹 늦어진 사람들은 조용히 다가와서 줄에 끼여들며 그 누구도 줄을 바로 서라고 지휘를 하지 않아도 자각적으로 줄을 똑바로 맞추어 서서 곡에 맞추어 정연하게 체조를 한다. 그 넓은 광장에 여러개의 방대로 나뉘여 체조를 진행하면서 어느 방대든 령솔자가 없지만 모두가 그렇듯 자각적으로 줄을 맞추어 적극적으로 동작을 일치하게 하고있는 광경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왜서일가? 저녁식사후 몸에 알맞는 운동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닿았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양잰썬초”라는 운동이 마음도 흥겹고 몸도 거뜬하게 하니 모두가 자연 거기에 빨려들어가게 되면서 거기에 대한 적극성과 자각성이 생겨난것이다. 우리들은 무슨 일을 하나 자각성과 적극성이 있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어떤 일에서나 자각성과 적극성의 역할이 자못 중요하며 일을 진척시키는 동력이 되거나 일의 성공여부를 결정하기때문이다. 헌데 때로는 자각성과 적극성이 없거나 모자라는 경우에 부딪치게 되는데 따지고 보면 그 일에 대하여 마음에 닿지 못했기때문이다. 마음에 닿지 않고 억지로 마지못해 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 일에 대한 자각성은 물론 적극성도 있을리가 만무할것이다. 그렇다하여 살아가면서 마음에 닿고 마음에 싶은 일만 하자고 해서는 않된다. 관건은 어떤 일이든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마음에 닿을수 있게 될것인즉 마음에 닿게 되면  자연 그 일에 대한 자각성과 적극성도 생겨날것이며 자각성과 적극성이 생기면 그 일의 성공여부도 가히 짐작해보거나 그려볼수 있을것이다. 한마디로 어떤 일을 시킬 때면 억지로 내리먹이기보다는 우선 대방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끔 잘 설득한다면 그 일은 차질없이 잘 될것이다.  또 어떤 일을 해야 할 때는 우선 마음으로 생각해보아야 할것이며 내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좀전과 달라질수 있을것이니 그러면 마음으로 생각해본것인즉 자연 자각성과 적극성이 생겨날것이기에 일을 해도 힘들지 않을것이며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굳건히 자리잡게 될것이다. 모든 일들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자각성과 적극성이 생길것인바 그러면 즐거움속에서 일을 할수 있을것이다.  
53    뉴스는 생활반영이여야 한다 댓글:  조회:1870  추천:1  2014-03-21
텔레비죤이 금방 보급되기 시작하던 80년대초반까지만 해도 텔레비죤방송국이 지금처럼 많지 않아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채널시청이 위주였었지만 디지털시대에 들어선 지금은 중앙으로부터 성, 시, 지어는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텔레비죤방송국이 있어 하루종일 텔레비죤을 마주하고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절목이 다채롭다. 어느 텔레비죤방송국이든지 하루 방송중 그렇게 다채로운 절목중에서도  뉴스방송을 최우선으로 하고있으며 또 최우선으로 하기에 뉴스방송은 하루방송중에서도 황금시간대에 방송하고있다. 저녁뉴스시청순서를 보면 중앙, 성, 시, 지방의 순서로 할수 있는데 모두 자기가 살고있는 지방의 뉴스도 중앙못지 않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청하게 된다. 원인은 아주 간단한바 지방뉴스는 그 지방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기때문이다. 헌데 지방의 뉴스방송을 보면 뉴스인지 아니면 령도들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다니는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루뉴스방송이 십여분되는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령도들이 어디를 내려가서 무엇을 했다는 보도로서 그들이 아니면 뉴스방송을 할수 없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바로 그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련휴일이 끼우면 지방의 뉴스방송도 쉬는것이니 정말 령도들이 없으면 뉴스방송을 못하는것이 사실이 되였다. 어느 지방에서나 령도들이 무슨 일을 하고있다는것이 중요한 일임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그 지방에서 무슨 일을 중요시하고있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으며 또 그들의 실제사업을 알아볼수 있는것이다. 허나 하루 뉴스중 필경 그것만이 꼭 방송해야 하는 뉴스는 결코 아닐것이다. 생활가운데는 너무도 새로운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있으며 백성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수 있고 또 그들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는 일들이 수없이 많을것이다. 허나 그런것들이 모두 망각되고 오직 령도들이 하는 일만 나오니 뉴스가 진정 백성들의 생활을 반영했다고 할수 없다. 언젠가 심수에 있는 동생네 집에 갔다가 그 지방 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송하는 뉴스를 시청하게 되였다. 뉴스중 한 어린아이가 호텔옆을 지나던중 호텔벽에 붙어있던 타일이 떨어지면서 공교롭게도 어린아이의 머리를 빗쳐놓아 아이가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사건이 방송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기자가 사건처리에 잇따른 취재를 진행하여 방송하겠다고 하였다. 이튿날 나는 그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였을가 하는 궁금증으로 뉴스방송시간에 맞추어 텔리비죤앞에 앉았었는데 아니나 다를가 호텔측에서 아이의 입원치료비와 정신손해비에 대한 부담을 지게 되였다는 사건처리결과에 대한 방송이 있었다. 참으로 마음에 닿는 뉴스였으며 모두가 관심을 돌리고 모두가 기다려지는 방송시간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비록 내가 사는 지방이 아니였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지방의 뉴스방송을 어김없이 시청하였는데 항상 백성들의 생활에 다가서서 실제를 반영하는것이였다. 우리들의 생활주변을 둘러보면 매일 뉴스로 보도할만한 일들은 많고도 많다. 하루하루를 참으로 곤난하게 살고있는 빈곤한 가정, 중소학교학생들이 등하교하는 좁은 길이 돌멩이투성이에다가 차가 꽉 들어막여 항상 신경을 도사려야 하는 상황, 좁은 골목길에 로점상들이 줄지어 서있어 다니기 불편한 상황, 상가들에서 하루종일 쉬지않고 노래를 틀어놓는데 볼륨이 높아 소음투성이인 주택구의 상황, 거리에서 판매삐라를 산발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거리가 아수라장으로 되는 상황 …  일일이 렬거할수 없지만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고있는 일로서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일들이 아닐수 없다. 이렇게 우리의 주변생활에서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일들을 뉴스에 방송하고 또 그것을 처리한다면 모두가 찬사를 아끼지 않을것임은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하루 뉴스방송중 령도들이 한 일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중점적인것을 골라 방송한다면 백성들은 자기가 살고있는 곳에서 요즘 어떤 일들을 중요시하고있다는것을 알것이므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령도들이 한 일들을 방송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에 보다 접근하여 그들의 생활을 반영하고 해결해준 일들을 방송한다면 진정 마음에 닿는 뉴스가 될것이며 휴일이 없이 항상 보도거리가 있는 뉴스가 될것이다. 한마디로 뉴스는 백성들의 생활반영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52    선거다운 선거여야 한다 댓글:  조회:2110  추천:2  2014-03-13
우리 나라의 헌법에는 공민이라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권리를 향수할수 있다고 명백히 규정하고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민이 되기전부터 학교문에 발을 들여놓으면 선거를 하거나 선거되여보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립장이 되기도 한다. 내 기억에는 소학교다닐 때부터 나는 학기말이 되면 3호학생을 선거하거나 선거되여보았다. 그러다 공민이 되니 나라의 헌법에서 제정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권리를 당당하게 향수할수 있게 되였다. 지금도 사업터에서 우수를 뽑거나 직함평의를 할 때에는 무기명투표의 방식으로 선거를 하는데 이제는 선거가 우리의 일상에서 빼놓을수 없는 하나로 되여 늘 함께 한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것 같다. 하다보니 우리의 머리속에는 선거, 특히 무기명투표의 방식으로 하는 선거는 가장 투명하고 공평하다고 생각하여왔으며 또 생각하고있다. 내가 살고있는 곳에서는 지방인민대표대회가 열린다고 한달전부터 선민구에 따른 선민을 확정하면서 열기를 달구었었다. 그러다 며칠전에는 선민증을 내여주면서 선거장소에 가서 선거를 하여야 한다고 하는것이였다. 할 일들이 태산같이 쌓여있었지만 붉은 공인까지 박힌 선민증을 보니 어딘가 엄숙한 감이 들어 모든 일을 제쳐놓고 선거장소로 달려갔다. 선거장소에는 붉은 프랑카드가 걸려있었으며 붉은 투표함에 정복을 한 사업일군들까지 있어 제법 숙연한 감을 주었다. 헌데 문제는 투표였다. 투표용지에는 세사람의 이름이 박혀 있었는데 왜서 그 세사람의 이름이 그 용지에 씌여져서 투표를 기다리는지 알수가 없었다. 어떤 절차를 밟아 올라온걸 내가 무관심하여 몰랐다하고 이 세사람중 누구를 투표해야 하는가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헌데 그것 역시 문제였다. 거기에 씌여있는 세사람들이 남자인지 녀자인지 또 어느 단위에서 사업하고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맡아보는지 전혀 알지 못하니 관심을 가질래야 가질수가 없었다. 그때 앞사람들로부터 “첫사람에게는 ×를 치고 두번째사람과 세번째사람에게는 √를 치면 된다”는 말이 전달되여 왔다. 왜서 앞사람에게는 불동의의 표를 치고 뒤 두사람에게는 찬성의 표를 쳐야 하는지 알수 없었지만 어서 돌아가야겠기에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하고야 말았다. 돌아오면서부터 지금까지 내내 음식을 먹다가 파리를 삼킨듯 께름직하기만 하면서 그 세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가 생각해보게 되며 또 그들중 두사람이 인민대표인데 진정 인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줄수 있을가를 두고 고민해보게 된다. 물론 나의 고민이 아무런 힘도 효과도 없다는것을 알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선거를 두고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인민대표대회는 인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을 청취하고 심의채택하는 회의라고 생각한다. 하다면 그 회의에 참석하는 대표는 마땅히 인민들의 신뢰를 한몸에 안고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문제들을 반영하여 해결할수 있게끔 노력해야 할것이다. 그런 인민대표로 되려면 최저로 선거하는 장소에 나타나 얼굴쯤은 보여주면서 인민대표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어떻게 리행하겠다는 발언쯤은 한다든지 아니면 그들에 대한 략력이라도 간단히 써서 붙여놓는다면 선거하는 우리들도 조금은 선거다운 선거를 하는 기분이고 느낌일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인지도 또 이제 인민대표로 되여 어떤 일들을 반영하고 해결받을 타산인지도 모르고 그저 무작정 선거하는 선거는 선거하기 위한 선거이지 진정한 선거로 될수 없다. 선거는 선거하는 사람도 참답게 대해야하겠지만 선거받는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진지하게 대해야 할것이다. 선거가 진지하지 못하고 참답지 못한 선거다운 선거가 아니니 그 선거된 사람이 이제 진정 대표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할수 있을가가 자못 걱정돼온다. 우리는 늘 모든 사업에서 실속을 따지고 가짜를 배격하며 허위와 가식을 버리자고 말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민의 진정한 권리를 행사하는 선거에서 눈감고 야웅하는 식의 선거를 하니 리해가 가지 않는다. 모든 일에서 참답고 진실해야 하겠지만 선거는 더욱 진지하고 엄숙하고 참답게 하여 공민으로서의 진정한 권리를 행사하는 동시에 그 결과도 진정 모두가 바라는데로 가도록 하여야 할것이다.  
51    생각하기 나름 댓글:  조회:1977  추천:3  2014-03-12
“나름”이란 단어를 사전에서는 “제각기 자기 식대로의것”이라고 해석했는데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한다면 “생각하기에 따라”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싶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생각하기에 따라 삶이 달라질수 있게 된다. 아래에 적는 이야기는 비록 평범한 이야기지만 나의 가슴을 한없이 울렁이게 하였다.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르는 동생이 있는데 안해와 함께 작은 음식점을 차리고있다. 음식점이 내가 출퇴근하는 길옆에 자리하고있는지라 틈이 나는대로 들려볼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그들 부부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고 반겨주어 참으로 고마웠다. 음식상 네개를 놓은 음식점이라 복무원도 필요없이 부부가 함께 손을 맞추어 돌아치는데 손님이 많은 날에는 매상고가 그런대로 괜찮지만 때로는 하루동안 한두상의 손님밖에 맞이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허나 그들 부부는 늘 웃으면서 손님이 뜸할 때면 잠간 쉬여라고 서로의 등을 밀어주면서 보살펴주군 하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하루 수입이 돈 많은 사람들의 하루 용돈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걸로 고민하지 않고 부부가 서로 배려하는 즐거움속에서 살아가고있다. “돈은 얼마 벌지 못해도 우리가 함께 한다는 자체가 행복이고 즐거움이기에 피곤하지 않습니다”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하는 동생의 꾸밈없는 말이였다. 언젠가 퇴근길에 본 일이다. 내가 출퇴근하는 길량켠아빠트의 외벽을 같은 색의 도료로 칠하는 공정이 시작되였는데 그날 내가 그곳을 지날 때는 바로 점심시간이였다. 그때 도료칠하는 일을 맡은 부부가 밖에서 밥상을 마주하고 식사하고있었는데 오전내내 층집에서 바줄타기로 일하다보니 옷이나 얼굴에 도료가 꾀죄죄하게 게발려있었지만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었는지 그모양 그대로였다. 큰국수사발만큼한 비닐그릇에 담긴 밥우에 멀겋게 볶은 양배추를 얹어놓고 식사하는 부부는 온얼굴에 웃음을 담고 그렇듯 즐겁게 담소하면서 맛난 식사를 하고있었는데 나는 가다가도 몇번이고 그 전경을 뒤돌아보군 하였다. 보면 볼수록 그들이 부럽기만 하였다. 지난 여름 한국외국어대학 용인글로벌캠퍼스에 가서 연수할 때 있은 일이다. 용인글로벌캠퍼스는 용인의 왕산골에 자리하고있었는데 참으로 그림속같은 전경이였다. 나는 매일 아침일찍 맞은켠의 교정을 가로지나 등산을 하군 하였는데 그림같은 풍경은 참으로 매혹적이여서 기분은 이루형언할수 없었다. 헌데 하산할 때마다 교정의 잔디밭에서 더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같은 전경을 목격할줄이야.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 량주가 잔디밭에 보자기를 펴고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아침식사를 하고있었는데 상추로 곱게 쌈을 싸서는 서로의 입에 넣어주고 다시 풋고추를 장에 찍어 드시고는 서로 마주보면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의 느낌은 말그대로 울렁임 자체였다면 가장 적절할것 같다. 잔디밭우의 신선한 공기속에서 하는 아침식사가 맛나기도 하였겠지만 그보다는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더 젊어지게 할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매일 아침마다 하산할 때면 그림같은 그 전경을 보이지 않을때까지 몇번이고 뒤돌아보군 하였다. 지난 여름 학교의 잔디밭과 화단을 정리하면서 목격한 일이다. 벽밑의 갈라진 틈서리에 국화꽃 한송이가 피여나 있었는데 화단과는 외진 틈서리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 그 꽃이 나의 눈길을 끌기에는 너무나 족하였다. 벽밑의 틈서리다보니 화단보다는 흙히 충족하지 못하여 화단의 꽃에 비하면 좀은 왜소하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불평없이 꽃을 피워문 그 모습이 너무나 대견스럽고 장해보여 다시다시 바라보지 않을수 없었다. 정상인이라면 살아가면서 생각을 가져보지 않을수 없다. 생각을 가지는것은 정상이지만 어떤 생각을 어떻게 가지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또 그 결과도 달라질것이다. 요즘같은 세월에 일상에 부대끼면서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살기싫고 죽을만큼 힘들수도 있는데 이때 생각을 돌린다면 마음은 비온뒤의 맑게 개인 날처럼 될것이지만 외곬으로만 생각한다면 결국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게 될것이다. 벽틈서리에 날려간 꽃씨도 아무런 원망없이 꽃을 피워무는데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쉽게 말하면 모두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건 같겠지만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에 따라 사는 방법과 질도 달라질수 있다는것인데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면 가장 적절할것 같다. “생각이 바뀌면 마음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면 모든것이 바뀌여진다”는 말의 참뜻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50    한복의 의미 댓글:  조회:2042  추천:1  2014-01-06
지난 8월말의 어느날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일본에서 사업하는 제자의 결혼식사회를 보게 되였다. 그날 사회때 새로 맞춘 하늘색 한복을 입고 나섰더니 모두들 한결같이 참 보기좋다고 입을 모았었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기분은 날듯이 좋아졌으며 다시한번 한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기까지 하였다. 그러노라니 어쩌면 자신이 진정 백의겨레의 일원이 된 느낌이여서 설레여오는 가슴을 억제할수 없었다. 한복이라면 그저 우리 백의겨레가 입는 전통적인 의상쯤으로 알았지 그 기원이나 멋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하여서는 크게 생각을 가져보지 못하였기에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른 연기자들이나 대형활동때 남녀가 입은 한복을 볼 때마다 한복을 입으니 참 보기좋구나 하는 생각밖에 해보지 못하였다. 지난 여름방학 한국재외동포재단의 요청으로 한국외국어대학 용인글로벌 캠퍼스에서 두주일간 연수를 받으면서 한복에 대하여 똑똑히 알게 되였으며 그 진정한 의미도 나름대로 가슴으로 느끼였었다. 첫날수업은 시인이고 한국문화연대 대표인 고경희교수님의 “조선어교육의 중요성”이라는 강의였는데 고경희교수님은 고운 한복차림으로 강단에 나서서 참으로 의색적이였으며 보는 느낌이 너무나 푸근하고 정다웠었다. 고경희교수님은 자신은 일년사계절 한복을 입고 나서고있으며 한복만해도 보통의상과 같이 여러벌씩 된다고 하였다. 특히 출국할 때면 꼭 한복을 입고 나서는걸 잊지 않고있으며 그것도 여러벌씩 준비하여 갖고 가서는 자주 갈아입는다는것이다. 이는 자신이 자랑찬 한민족임을 과시하고 또 자랑찬 한민족이 된 자호와 긍지를 가슴뿌듯이 느낀다고 하였다. 그렇듯 화려한 미사려구가 아닌 말이였지만 고교수님의 페부에서 우러러나오는 진솔한 감정이 담긴 말을 듣는 순간 다시한번  님을 우러러 보게 되였으며 그 말이 여운이 되여 오래도록 가슴에서 메아리로 되여와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순간도 귀가에 쟁쟁히 울려오고있다. 연수중 전라북도 전주의 한옥마을을 참관하고 한옥마을에서 하루밤 체류하면서 체험생활을 하게 되였는데 그중 가장 인상깊은 일이라면 한복을 입는 방법과 자세를 배우고 직접 체험한 일이다. 그날 나는 강사님의 부름으로 연수생들앞에 나서서 한복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량반들이 쓰던 갓과 정자관을 쓰고 나서는 행운을 가지기까지 하였었다. 물론 그런 복색차림으로 나선 나는 평소와는 다른 나였기에 연수자일행들의 포복절도를 자아냈지만 난 그 순간이 어쩌면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으며 지어 행복하기까지 하였고 또 그런 복색으로 당장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기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참으로 잊을수 없는 순간이여서 지금도 잊을수 없는 그날의 장면을 찍은 사진을 자주 보군 한다. 한복은 력사를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시기에 기원하였으며 그로부터 오랜 시기를 거치면서 생활의 편리에 따라 개량되였다. 지금의 한복은 생활의 편리에 따라 많이 개량되였지만 전과 같이 가볍고 입기 편리한 특점은 여전히 변함없다. 특히 계절에 따라 색상과 원단이 다를뿐 평민이든 대통령이든 모두 같은 한복을 입는다는것이 한복으로서의 특점이라고 할수도 있다. 한복은 지금까지 우리 백의겨레만의 복장으로서 입으면 반듯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을 주고있다. 귀국하기전에 서울 동대문시장을 돌아보게 되였는데 촘촘히 들어앉은 가게마다 각양한 옷을 전시한 광경이 눈길을 끌었으며 더우기 손님을 깍듯이 대하는 태도는 시장을 나오는 내내 즐거운 마음이 되게 하였다. 동대문지하철을 리용하려고 역에 들어서니 한복전문 매점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눈이 부시게 화려한 원단들이 눈길을 끌고 발목을 잡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거기다 온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친절하고도 자상하게 원단과 한복의 종류를 설명하는 사장아저씨의 모습은 너무나 보기 좋았다. 연수에서 한복을 알게 되였고 또 한복에 갓과 정자관을 쓴 잊을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 있는데다 원단 또한 너무도 좋아 결국은 하늘색 한복 한벌을 맞추기에 이르게 되였다. 비록 옛식이 아닌 개량한복이지만 색상이 우아하고 또 가볍고 입기 편하여 새로 맞춘 한복을 입어보는 순간 실로 말그대로 날듯한 기분이였으며 이름할수 없는 심정이였다. 집에 돌아와 한복을 옷장에 정히 걸어놓으면서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복은 우리 민족 고유의 민족복장으로서 한복에는 민족의 넋과 얼이 그대로 슴배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한복을 모르고 한복을 잊는다면 결국 민족의 뿌리를 모르고 민족의 정신을 잊는다는것과 다름이 없을것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슬기롭고 지혜로운 민족이다. 한복자락을 날리면서 일제의 통치에 맞섰고 한복자락을 날리면서 구국의 길에 나섰으며 한점 후회없이 젊은 청춘을 바쳤었다. 또한 한복자락을 날리면서 남부녀대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살길을 찾아 여기 만주로 건너와 삶의 터전을 닦고 이제는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여 자신의 삶을 떳떳이 영위해나가고있다. 지금도 단오명절이나 추석명절 그리고 큰 행사나 모임, 환갑잔치나 결혼잔치때면 남녀로소가 한복을 입고 어울려 즐거움을 나누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며 타민족의 부러움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한복은 이렇듯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서 우리 민족과 함께 해왔으며 또 지금도 함께 해오고있다. 나는 오늘도 옷장에 정히 걸려있는 한복을 보면서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한복을 입는것도 좋지만 우리 민족의 넋과 얼을 잊지 않을것이며 더우기 우리 말과 우리 글을 가르치는 신성한 사업을 하는 나로서는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우리 말과 글은 물론 우리 민족전통문화도 옳바로 전수하여 그들이 계승발전시키게 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복을 입어도 떳떳할것이며 또 한복을 입은 나를 보고 모두가 보기 좋다고 칭찬한다면 진정 마음으로 부끄럼없이 받아들일수 있을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복을 입는 나로서의 진정한 의미가 될것이다.
49    비빔국수, 비빔정 댓글:  조회:1955  추천:0  2013-12-30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국수라면 그저 달콤새콤하면서도 시원한 육수에 꾸미를 얹어 먹는것으로 생각하였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가보고 지금 우리가 먹는 국수외에도 콩국수, 비빔국수, 김치말이국수 … 등 국수는 국수지만 재료와 먹는 방법에 따라 다름을 알게 되였다. 지난 여름 한국에 갔다가 한국생활을 피부로 느껴보려는 생각으로 며칠간 일하게 되였는데 때는 불볕무더위라 나의 힘에 알맞는 일이 주방설거지일것 같아 결국 주방설거지 일을 해보게 되였었다. 내가 일한 곳은 서울 신도림역에 붙은 디큐브백화점안에 있는 “사리원소반”이라는 한식집이였다. “사리원소반”은 3대째 이어오는 음시점으로서 일찍 황해도 사리원에서 남편의 병치료를 위하여 갖가지 과일양념에 소고기를 재웠다가 불고기로 대접하여 좋은 효과를 보았던 비방으로 물려온 음식점이였는데 불고기와 랭면이 위주였는바 랭면은 물랭면과 비빔랭면이였다. 처음에 물랭면, 비빔랭면하니 어리둥절하였었는데 물랭면이란 바로 육수에 꾸미를 얹어 먹는것이고 비빔랭면은 잘게 다진 소고기, 고추가루 등 양념으로 육수가 없이 말아먹는 국수였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10까지 열두시간동안 수없이 쏟아지는 그릇들을 가시고 다시 그것을 크기와 용도에 따라 분류해서 지정된 곳에 가져다놓는 외에도 불고기에 쓰이는 불판을 닦아서 공급하는 작업이 바로 설거지였다. 더우기 한식집이라 밑반찬으로 나가는 작은 재털이같은 그릇들과 크고작은 물컵들이 얼마인지 헤아릴수가 없어 한두패가 식사를 마치고 나가도 그릇들은 무더기로 쏟아져나왔었다. 게다가 백화점안의 음식점이라 쇼핑을 하다가 들어오기에 때와 시간이 없이 손님이 들이닥쳐 편히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면 그래도 매상고가 올랐다고 부장님이 일당에 팁을 올려주는데 그때면 하루의 피곤은 저만치 물러가고 걸음도 가벼이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주방안에는 주방장을 실장님으로 부주방장을 과장님으로, 밑반찬을 장만하는 녀성을 찬모로, 밥을 장만하는 사람을 밥모로 불렀었는데 내가 일하였던 “사리원소반”에는 실장, 과장외에도 실장보조로 일하는 젊은이가 더 있었다. 일하러 간 첫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담배쉼을 할 때 나는 중국에서 왔으며 체험삼아 해보려 한다고 하였더니 그 젊은이가 나를 찬찬히 보는데 그 눈길이 싫지 않았으며 어딘가 푸근하고 정겨웁기까지 하였었다. 그렇게 하루이틀 지나 알게 되였는데 그 젊은이의 이름은 김정연으로서 어릴때 목단강에서 살았었고 후에 청도에서 자랐으며 지금은 국적을 한국으로 옮긴 상태였었다. 식당의 일이란 손님이 들이닥칠 때도 바삐 돌아쳐야 하지만 하루일을 마무리하는 마지막정리가 더 힘들었다. 그때면 자기앞의 일을 깨끗하게 해놓아 이튿날 아침 아무런 지장없이 일할수 있게 해놓아야 하는데 짧은 시간 많은 일을 해야 하였다. 손님들이 떼를 지어 들이닥쳐 씻은 그릇들을 미처 옮기지 못할 때면 정연씨가 다가와서는 말없이 그릇들을 옮겨주었으며 퇴근전 마지막정리는 한번도 빼놓지 않고 나의 곁으로 다가와서 일을 도와주군 하여 제때에 깔끔하게 마무리할수 있어 항상 고마운 마음이였다. 내가 고맙다는 인사말을 할때마다 그는 그저 정다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씩 웃는데 그치군 하였다. 그날은 일요일날이라 오후 두시가 넘어서도 손님이 그치지 않아 담배한대 피워볼 사이없이 바삐돌아치고있는데 정연씨가 나의 곁으로 다가와서 “내가 잠시 일을 해줄테니 어서 이 국수를 뒤칸으로 가지고 가서 잡수세요”라고 말하며 비빔국수가 그들먹이 담긴 큼직한 국수사발을 내 앞으로 내미는것이였다. 언제부터 비빔국수가 어떤 맛일가 궁금했던 나는 얼결에 국수사발을 받아들고 뒤칸으로 가 국수를 비비고  가득 집어들었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목이 꺽 메여오면서 눈굽이 젖어드는걸 어쩔수가 없었다. 내 나라에서, 내 집에서 국수한그릇에 돈이 얼마랴만 이곳에서는 매일 눈요기로만 하던 국수가 아닌가. 헌데 그 국수를 같은 동포인 정연씨가 나에게 진심을 담아 권한것이다. 그렇듯 힘들게 일해도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건만 정연씨는 항상 날 도와주고 그렇듯 많은 랭면을 팔아도 누구하나 맛보란 말이 없었건만 정연씨는 나에게 권하지 않았는가. 한국인도 같은 동포이지만 정연씨는 동포이면서도 같은 조국에서 태여난 형제였기에 항상 함께 할수 있었다. 비빔국수는 비록 갖가지 양념에 비벼먹는 국수지만 국수의 참맛을 알수 있었다. 내가 한국이라는 곳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어울려 보낼 때 그속에서 정연씨는 나에게 참된 인간애와 형제의 정을 그대로 주어 감동을 먹게 하였으며 진정한 정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정연씨가 권한 비빔국수를 먹으면서 나와 정연씨가 맺은 정은 비빔정이라는 생각을 가져보았으며 그 정을 영원히 간직하리라 다지였다.
48    기회는 잡을줄도 만들줄도 알아야 한다 댓글:  조회:2226  추천:0  2013-12-30
지난달 무더운 여름을 맞아 강변에 위치한 문화광장에서 “화허”맥주제의 뒤를 이어 “쉐화”맥주제가 열렸었는데 두 맥주제가 근 이십여일동안 열린것 같다. 거리로 나설때마다 홍보가 요란스럽기에 저녁을 먹고 산보도 하는겸 천천히 걸어서 강변문화광장에 가보니 생각과는 엄청 규모가 크고 사람들 또한 발디딜 틈이 없이 꽉 들어찼었다. 사람들도 벅적이는데다 줄지어 늘여놓은 포장마차에 들어앉아 양꼬치에 맥주를 느긋하게 마시면서 즐겁게 담소하는 사람들이 이채롭게 눈에 띄였으며 거기다 겨끔내기로 자기들의 양꼬치와 독특한 음식을 소개하면서 손님의 발목을 잡기에 여념이 없는 장사군들 또한 땀동이를 쏟고있었다. 포장마차들과 좀 떨어진 곳에서는 문예공연과 곁들여 맥주마시기 시합도 끼워넣으면서 열을 올리고있어 말그대로 축제의 분위기를 그대로여서 그저 서있기만 해도 축제의 일원이 된 기분이였다. 그런 와중에도 자기도 모르게 포장마차에서 양꼬치구이나 다른 음식들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을 눈빗질해보게 되였다. 이 가운데 혹 우리 민족도 전통음식을 자랑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헌데 한족은 물론 몽고옷차림을 한 몽고족이나 신강옷차람을 한 위글족은 한눈에 안겨왔었지만 한복차림을 한 우리 민족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수 없어 다시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첫집부터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한족, 몽골족, 위글족들이 양꼬치구이나 자기들의 특색인 빵을 굽어파는 모습만 보일뿐 우리 민족은 보이지 않았으며 우리 민족이 보이지 않으니 우리의 전통음식도 보일리 만무하였다. 그러노라니 자기도 모르게 한국TV에서 저녁마다 방송하는 “6시 내 고향”이 머리에 떠오르는건 어쩔수 없었다. “6시 내 고향”을 보면 마을마다, 곳마다 모두 자기들의 특산을 자랑하는 축제를 열고있는데 사계절마다 모두 자기 고장의 특산이 나름대로 있을것이니 한국전역에는 말그대로 사계절 모두 축제가 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렇게 열리는 축제는 자기 고장의 특산에 대한 자랑과 홍보일것이니 앞으로 밝은 전망을 약속하는 마당이라고 하는것이 가장 적절할것이다. 처음에 나도 그런 매일과 같이 열리는 축제를 보면서 어딘가 리해가 가지 않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앞을 내다보면서 밝은 전망을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수 없었다. 사람들이 비록 어디에서 무엇이 나고 어느 고장이 산좋고 물좋은 고장이며 어느 집 음식이 맛좋다는건 대충 알고있으나 속속들이 그렇게 세세히 아는 사람들은 필경 소수에 지나지 않을것이니 축제를 열어 홍보를 하는것은 자못 필요하지 않을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내 고장의 특산물이나 나만이 가지고있는 음식만드는 노하우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일수 있을것이니 즐거운 결과를 가져올것은 불보듯 뻔할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맥주축제의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마당에 우리 민족 전통복장을 입고 나서서 내 고장이나 내 고장의 특산물, 나만의 음식만드는 노하우를 선보인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볼수 없는것이 너무도 마음아파왔었다. 우리 모두 살아가면서 좋은 기회가 너무 적고 또 그런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고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하기 나름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가만히 앉아서 기회를 기다린다면 말그대로 기회가 적거나, 없을수 있거나 또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을수 있을것이지만 하냥 성공을 념두에 두고 사색한다면 기회는 잡을수 있을것이며 또 만들수도 있을것이다. 문제는 기회에 대한 인식을 옳게 가지는것이며 또 기회를 잡을줄 알고 만들줄 아는것이 곧 성공으로 향하는 디딤돌이 된다는 리념을 똑똑히 세워야 할것이다. 자기 고장이나 자기의 노하우를 자랑하려면 차례지는 기회를 잡을줄도 알아야 하지만 자기절로 기회를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것이다. 그 어디서든 축제가  열린다면 달려가서 자리를 잡고 홍보하기에 나서야 할것이며 또 자기절로 축제를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널리 알릴수도 있지 않을가? 남의 뒤를 따라간다는 생각을 없애고 남의 선진적인 리념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우리도 이제부터 한국의 축제를 우리의 고장에 접목시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생각해보게 된다.
47    자신심은 열쇠 댓글:  조회:2032  추천:1  2013-12-23
저녁식사를 마치고 강변로를 따라 산책하는것은 몇년전부터 시작하여 거의 매일이다싶이 견지한 일이다보니 나로 말하면 굳어진 습관이 되였다고 할수 있다. 지난해 여름이라고 기억된다. 그날도 나름대로의 생각에 골몰하면서 강변로를 따라 산책하노라니 강변광장에서 몇백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줄을 맞추어 울려나오는 신바람난 곡에 따라 체조춤을 추고있는 정경이 그대로 한눈에 안겨왔었다. 체조춤을 추고있는 그들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하기에 가까이 가서 구경하게 되였는데 그순간 참으로 좋은 운동이구나 하는 생각이 갈마드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나는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역시 강변로를 산책하다가는 다시 강변광장에 가서 체조춤을 추는 대오를 멍하니 바라보았으며 바라보면 볼수록 마음이 끌려가는건 주체할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 바라보면서 가진 생각이라면 나도 저속에 합류하여 추면 될수 있을가 하는 생각이였는데 비록 그런 생각을 가져보았지만 감히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며칠동안 내내 지켜보면서 나도 추면 될수 있을가 하는 생각을 거듭하기에 머무르고 말았었다. 그렇게 며칠 지나서 하루는 집을 나설 때부터 오늘은 나도 그 대오에  합류하여 단련을 시작하리라는 생각을 단단히 먹고 그대로 행동에 옮기게 되였는데 하루이틀은 처음 시작하는 일이여서 생소하고 어색하였으며 좀은 힘에 부쳤지만 진지하고도 참답게 배우노라니 차츰 동작도 익숙해지기 시작하였을뿐만아니라 생소하거나 어색한감은 꼬물만큼도 없었으며 오히려 하루 일상중 마지막으로 반드시 마쳐야 할 일과로 여기게 되였으며 내가 서야 할 자리가 어느 한곳에 당연히 있는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지금까지 체조춤을 매일이다싶이 견지하고있는데 춤을 추면서 자연 우리들의 생활과 련계시켜보게 되는건 어쩔수 없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고많은 일에 봉착하게 되는데 때로는 어떤 일에 자신도  참여하고싶거나 또 참여하여 아주 한번 멋지게 해보고싶은 마음이 생겨날 때가 있다. 허나 선뜻이 손을 대거나 몸을 담을 때는 너무도 적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인소가 작용하겠지만 주요하게는 자신심의 결여가 큰 작용을 일으키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자신심을 사전에서는 “어떤 일을 해낼수 있거나 꼭 이루리라고 스스로 굳게 믿는 마음”이라고 풀이하고있는데 나는 여기서 “나도 할수 있다”, “나도 될수 있다”라는 말로 나름대로 풀이하고싶다. 헌데 우리는 어떤 일에서 그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아 하고싶지만 선뜻 “나도 할수 있다”, “나도 될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자세대신 “나도 할수 있을가?”, “나도 될수 있을가?”라는 의문을 앞세우기에 용기보다는 주저심이 먼저 작간을 부림으로써 결국 선뜻이 나서지 못하게 되는데 그건 때로는 자기에게 차례지는 다시오기 힘든 더없이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리는데까지 이르게 하기도 한다. 결국 다 지나간다음, 다시는 돌아올수 없을 때에야 후회하게 되는데 일생에 후회약만큼은 없다는것도 그때에 가서야 심절히 깨닫게 된다. 그런들 결국 행차뒤 나발이고 다 쑤어놓은 죽인데 어쩌랴. 문제는 어떤 일이든 자신의 앞에 놓였을 때 그 일이 자신에게 합당한가 또는 자신에게 리로운가를 먼저 판단해본다음 그 일이 확실히 자신에게 합당할뿐만아니라 리로울 일이라면 더는 우유부단하\지말고 인차 행동에 옮겨야 할것이다. 물론 그러자면 자신심이 있어야 할것인바 자신심이 있다면 그건 곧바로 그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진것이라 할수 있다. 문열쇠를 가졌다면 들어가는데는 어려움이 없을것이 아니겠는가? 체조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며칠동안 우유부단하다 결국 행동에 옮기게 되였는데 그건 늦게나마 자신심이 생겼기때문이며 그 자신심은 결국 체조춤을 출수 있는 열쇠를 가진것이다. 늦게나마도 자신심이 생긴것이 다행이지만 첫날 체조춤을 보면서 참 좋은 운동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행동에 옮겼더라면 하루라도 더 일찍 체조춤대오에 가담하여 더 즐겁게 건강을 위했지 않았을가 생각해보게 되며 체조춤이라는 기회는 다행히 스쳐지나는 기회가 아니였기에 잡을수 있었다는 생각도 함께 해본다. 이제 어떤 일에서든 자신심을 가질것이리라 다져본다. 그것은 그 일을 할수 있는 열쇠를 가지는것이기때문이다.     
46    뿌리가 든든해야 건실하게 자랄수 있다 댓글:  조회:2104  추천:2  2013-12-23
얼마전에 있은 중소학생문체예술절의 검열식에서 중소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우리 민족복장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은 참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더우기 소학교학부모들이 민족복장에 상모를 돌리는 모습은 마음이 즐겁기에 앞서 감동과 격정으로 부풀어오르기까지 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상모돌리기는 우리 민족전통문화로서 오늘날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생소할수도 있다. 헌데 학부형들이 잊혀져가는 민족전통문화를 아이들앞에서 재현하니 어찌 감동을 먹지 않겠는가. 전에 우리가 자랄 때는 마을마다 청년활동실에 선전대가 있어 대대로 내려운 우리 민족문화를 접할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떠나가고보니 그런 일도 호랑이 담배피우던 옛일로 되여버린지 오래다. 하다보니 우리의 자라나는 후대들은 우리 민족문화를 접할수가 없기에 민족복장에 장고춤만 고유한 민족문화인줄로만 착각하고있게 된다. 그런중에서도 다행스러운것은 우리의 학교들에서 학생들의 능력발전과 민족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킬것을 념두에 두고 사물놀이, 상모춤, 장고춤 등을 배워주고있을뿐만아니라 해마다 예술절, 운동회 등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여 고유한 민족문화를 선보이고있어 삼복염천에 얼음물을 마신듯 거뜬해나는 마음이다. 내가 살고있는 시의 민족종교사무국과 조선족문화관에서는 해마다 음력설을 맞이하여 조선족음력설맞이 문예야회를 조직하고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널리 선보이고있어 매년 음력설림박이면 자연히 문예야회가 기다려지는 마음이다. 내가 몸담고있는 학교에서도 지금까지 한국으로부터 선물받은 사물놀이기구를 가지고 사물놀이활동을 진행하고있는데 네가지 타악기가 어울려 울리는 소리를 들을때마다 귀맛이 좋은건 물론 우리 민족문화가 잊혀지지 않고 전해내려가고있다는데서 더 즐거워나는 마음이다. 지난해 내가 몸담고있는 학교에서는 건교65주년 경축행사를 가지였었는데 학생들의 문예공연은 수준급의 가무단공연보다 못지 않아 모두의 혀를 끌끌 차게 하였으며 공연내내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끊기지 않았었다. 특히 학생들의 북춤과 장고춤, 상모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무용이여서 전반공연을 클라이막스로 끌어올렸을뿐만아니라 가슴에 감동을 그들먹이 부어주었다. 우리는 간혹 길을 가다가도 “아리랑”이나 “노들강변”노래가 들려오면 자기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된다. 왜서일가? 바로 우리 민족의 애창곡이자 대대로 전해내려온 민요가락이기때문이다. 헌데 문제는 이런 민족전통문화가 날따라 잊혀져가고있다는것에 가슴이 아프지만 멀리 흩어져 살면서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지성인들이 있어 조금은 위안이 된다. 허나 몇몇 지성인들의 노력으로는 힘겹지 않을수 없다. 우리의 민족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서 가장 주도적역할을 해야 할 부문이 바로 우리의 학교가 아닌가 생각한다. 배움에 어섯눈을 뜨고있는 소학생이나 한창 학구욕으로 끓어번지고있는 중학생들에게 고유한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전수하여 그들이 대대로 전해내려온 우리 민족의 문화를 알게 한다면 우리의 민족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이리라 믿는다. 그 어떤 식물이나 모두 뿌리를 가지고있음은 모두가 알고있는 일이며 뿌리가 건실하지 못하거나 썩는다면 그 식물이 건실하게 자라지 못하거나 죽는다는 도리쯤은 삼척동자도 알수 있는 일이다. 오직 뿌리가 땅속에 깊숙이 묻혀서 든든하게 자리를 잡는다면 더말할나위없이 건실하게 자랄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족전통문화를 한그루의 나무로 생각한다고 할 때 우리의 중소학교나 기층의 문화관은 바로 민족전통문화라는 나무의 뿌리라고 생각하는것이 합당할것 같다. 우리의 중소학교나 문화관에서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전수하고 계승발양시킨다면 우리의 민족전통문화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푸르르게 그 빛을 발할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중소학교나 문화관들에서는 우리 민족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보다 다양한 활동에서 체현시키기를 바라며 유관부문들에서도 물심량면으로 적극적인 지지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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