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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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의 문학꿈2
2013년 06월 27일 08시 33분  조회:1953  추천:2  작성자: 홍천룡
그때 그 시절의 문학꿈

홍천룡

2


지난 세기 80년대는 중국에서 개혁개방의 봄철이라고 할수 있었다. 산곡간의 잔얼음이 녹아내리고 평야의 만물이 소생하고 화단의 백화가 만발하는 춘삼월이였다. 특히 우리의 문단은 그 가운데서도 잔설속의 진달래였다. 50년대에 “우파”모자를 쓰고 내내 “흙”속에 파묻겼던 원로 시인과 작가들, “문화대혁명”에 “명”을 잘리운 중견 시인과 작가들이 이 시기에 다시 모든 걸 툭툭 털고 일어나 붓대를 되찾아쥐였다. 그들의 붓끝에서 메새의 지저귐이 다시 울렸고 가슴속에 맺혔던 울화가 곡성으로 터졌고 사랑의 희비극이 눈물로 흘러내렸다… 광야의 모래불에서 문화의 고갈을 이기지 못해 갈증이 심했던 우리 민족독자들에게 퐁퐁 솟구치는 샘물을 바가지짝으로 푹푹 퍼주었다. 그래서 만민이 문학작품을 보고 만민이 만천하에 감격의 눈물을 휘뿌리는 “문학부흥”시기가 초래되였다. 그 “문학부흥”시기에 그 호시절에 나는 20대후반의 젊은 나이에 젊은 패기로 조선족문단의 최고원지−”연변문예”잡지사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일종 그 어떤 사명감으로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눅잦히지 못하고 들어섰다.
출근해서 몇 달은 붕- 떠서 돌아쳤다. 리상각주필님을 따라서 흑룡강의 목단강, 상지, 할빈, 탕원, 가목사, 화천 등지를 한바퀴 빙 돌았고 장지민과 김호근주임님을 따라 룡정, 화룡, 왕청, 도문, 훈춘 등 지방도 한바퀴 빙 돌았다. 현시에 내려가면 선전문화부문의 지도일군들이 맞아주었고 향진에 가면 당위서기들이 배동했고 어느 과외작가의 집에 찾아들면 닭을 잡는다 두부를 앗는다 하는 최고대잡을 받군 했었다. 그들의 그 열정에 마음도 녹아나고 몸도 녹아날수 밖에 없었다. 그 열정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편집사업을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였다. 헌데 정작 들뜨는 정서를 가라앉히고 편집에 달라붙자고 하니 말못할 고충과 내놓고 해결하지 못할 난제들이 한두가지 아니였다. 금방 들어온 후배로서 말단 편집인 나에게 차려진 첫 과업은 매일 투고되여 한아름씩 들어오는 원고였다. 눈이 아홉이 되여 밤잠을 자지 않고 본다 해도 근본 다 보아낼수 없는 원고더미였다. 그다음 난제는 나의 주변에는 나와 수시로 련계를 취할수 있는 기성작가군이 형성되지 못했기에 발표에 통과시킬만한 작품을 편집할 수가 없는것이였다. 편집부소설조내에는 모두 다섯명이였는데 어떤 편집은 원로작가들을 맡고 어떤 편집은 청년작가들을 책임지고 어떤 편집은 녀성작가들을 대상하고있었다. 둬어달은 그럭저럭 한편도 편집하지 못하고 원고더미와 씨름했다. 투고되여 오는 원고가운데는 별의별 글들이 다 있었다. 몇십만자씩 되는 장편도 있었고 몇백자도 안되는 통신보도와 같은 손바닥만한 글도 있었다. 그런데 내눈에도 쓸만한 작품이 보이질 않았다. 당시 초학자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심각하게 느꼈다. 열정은 높았으나 필력은 여물지 못했었다.
하루는 소설가 림원춘선생님이 작품 한편을 가지고 와서 남주길선생님께 맡기셨다. 남선생님이 그걸 보신다음 나를 부르셨다.
“천룡이, 이걸 좀 한번 해보오. 내 생각에는 작품도 괜찮고 또한 천룡의 풍격과도 맞는 것 같소. 이름있는 작가의 작품이래서 주눅이 들지 말고 고칠건 고치고 빼버릴건 빼버리면서 대담하게 해보오.”
“예!”
그때는 정말 남선생님이 눈물나게 고마웠었다. 그러면서 근심이 앞서기도 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 누구의 글에도 손을 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 남의 글에 손을 대게 된 작품이 저명한 소설가의 작품이여서 손이 떨리기도 했다. 처음 편집하는 작품이라 잘해보리라 마음먹으면서 우선 두세번 읽어보았다. 슈제트의 째임새나 인물부각, 정서흐름, 세절묘사에 이르기까지 흠 잡을데 없는 작품이라고 인정되면서 일부 빼버려도 좋을 곳이 있다고 인정되였다. 나는 조심스레 사전을 찾아가며 편집했다. 그때는 작자가 직접 쓴 원고에 대고 철필로 지우고 가필하면서 편집할 때였다. 나는 철필을 안쓰고 먼저 연필로 가필했던것이다. 그러면 잘못 되여도 원문에 손상없이 지우고 다시 보면서 수개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렇게 연필로 편집한 것을 주임께 바치고 주임이 그걸 주필실에 넘겼다. 나는 저으기 긴장되는 심정으로 통과여부를 기다렸다. 당시 편집부에서는 “3심제”(三审制)를 실시했는데 아주 엄격했다. 일심에서 “챵비”(枪毙:심사에서 떨어진 작품을 이렇게 한어로 비유했음)당하는 작품은 헤아릴수 없이 많았고 2심에서 떨어진 작품도 많았다. 관건은 주필심사관이였는데 까리까리한 작품은 대개 거기까지 허덕지덕 올라갔다가는 좌르르 미끌어져 내려올 때가 많았다. 그러면 작자도 허탈감에 빠지고 그걸 편집한 편집도 멋적은 기분에 빠지군 했다. 한편의 작품을 발표시키기 위해 정말 편집들도 심혈을 아끼지 않았던것이다. 어떤 작품은 몇번씩, 지어 수십번씩 수개시키면서 겨우 그곳까지 올라갔는데 여지없이 “챵비”를 맞군 했다. 이름있는 작가의 작품들도 락자없이 떨어지는 것이 많았다. 들어오는 작품은 많고 발표원지는 제한되여있고 또한 사회의 각계 각층의 독자들과 지명인사들이 잡지에 대한 요구가 높았기 때문에 그렇게 “무정”할 수밖에 없었던것이다.
며칠후 주필님이 그 작품을 가지고 들어와서 내 책상우에 놓으며 느긋한 미소를 지으셨다.
“작품도 괜찮고 편집도 잘되였구만. 이 연필로 가필한 부분을 깨끗이 지우고 다시 정식으로 해서 올려보내오.”
나는 안도의 숨이 활 나가며 기분이 상쾌해졌다. 나의 첫 편집임무가 완성된 셈이다. 그 작품이 발표된다음 림원춘선생님이 저녁식사나 함께 나누자며 우리를 부르셨다. 남주길선생님이 일이 있어 못오시고 나와 최홍일씨가 선생님네 댁을 찾아갔다. 내 기억에는 지금의 신화서점자리인 것 같은데 길녘의 단층줄집에서 맨 앞줄 제일 동쪽집인 것 같았다. 옛날 내가 공신 “웅덩개마을”에서 개구쟁이로 홀랑거릴 때 딱친구 동엽의 아버지가 시인이였다. 백여호넘는 그 큰 마을에서 그 집이 제일 으리으리했던것이다. 뜨락에는 앵두나무도 있었고 기이화초도 울긋불긋 자라고있었다. 동엽이를 따라 그 집에 들어가 놀면서 보면 집안에 없는 것이 없었다. 라지오, 손풍금, 재봉침… 다른건 몰라도 그 당시 연길시내에 손풍금이 있는 집이 몇집이나 되였을가! 서재에 들어가보면 벽을 꽉 메운 책들이 정말 대단했었다. 후에야 나는 동엽의 아버지가 다름 아닌 우리 문단에서 일찍부터 명성을 떨쳤던 “설인”선생님이시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인상이 있어서 대개 저명한 작가나 시인이면 저택이 큼찍하고 서재도 으리으리할것이라고 추측했었다. 헌데 림선생님네 집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나의 추측이 빗나갔음을 감지했다. 밖에서 외면으로 볼 때는 좀 높직이 올라앉은 주택인 것 같았는데 정작 문안에 들어서니 집안은 푹 꺼져있었다. 지은지 일정한 년한이 지났음을 말해준다. 실내는 기껏해야 이십여평방메터쯤 되는 통칸방이였는데 미닫이로 아래웃방을 갈라놓고있었다. (아, 이런 곳에서 숱한 작품을 써내셨구나) 하는 감수가 차분히 젖어들면서 나는 집안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성격이 소탈한 림선생님이 우리들과 야, 자 하며 술잔을 나누시여 기분이 둥글어졌고 우리도 흔쾌하게 마시며 문학과 창작에 대해 갑론을박 하느라 밤이 깊어가는줄 몰랐었다…
그 작품은 그해 “연변문예”문학상에 당선되였고 후에 “전국우수단편소설상”까지 받게 되였다. 그 작품이 다름 아닌 “몽당치마”였다. “몽당치마”를 편집하고 나서 나에게는 편집사업도 잘해낼수 있겠다는 신심이 생겼다. 관건은 인재를 발굴해내는것이다. 많은 인재를 발견해내고 그들을 잘 인도해야만 그들에게서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올것이고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와야 나의 편집사업도 원만하게 해나갈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며칠 품을 들여 한쪽 구석에 무져진 원고더미를 정리했다. 투고된지 오랜 원고부터 쭉 내리 훑었다. 첫 서너페지를 훑어보아 “싹수”가 파랗게 보이는 원고면 쑥 뽑아놓고 처음부터 “싹수”가 노랗게 보이는 원고면 아예 구석쪽에다 처넣었다. 그렇게 고른 원고가 40여편 되였다. 그 가운데서 다시 더 “체질”하여 20여편 골라잡았다. 나는 그걸 가방에 넣어가지고 선생이 아이들네 집 “가정방문”하듯 한집한집 찾아떠났다. 안도현만보에 가서 차경순네 집을 찾았고 두만강을 굽이굽이 에돌아 오르다가 강녘에 자리잡은 부유향 하마령에 가서 윤희언을 찾았고 평강벌 투도에 가서 리태근을 찾았고 도문시에 가서 송호석을 찾았다…그렇게 20여집을 돌면서 어떤 집에 가서는 하루밤, 어떤 집에 가서는 이틀밤, 어떤 집에 가서는 사흘밤씩 자면서 수개시켰고 다시 쓰게 했다. 며칠후에 그 수개시킨 20편작품이 다시 나한테로 날아왔다. 나는 그 가운데서 다시 추리고 선정해서 10편을 골라잡고 다시 또 수개시켰다. 두번째로 날아온 수개원고부터는 수개의견대로 미끈하게 빠진 작품은 남겨두고 그렇게 되지 못한 작품은 반복적으로 수개시켰다. 어떤 작품은 세번만에, 어떤 작품은 네번만에… 제일 많이 수개시킨 작품은 김극민의 “박씨부인”이란 작품이였는데 내 기억에는 아마 일여덟번 수개시킨 것 같다. 맨나중에 김극민선생님이 머나먼 부유 한끝에서 달려와 나한테 수개원고를 맡기면서 이런 말로 뒤끝을 사렸다.
“두손 바짝 들었소. 되든 안되든 인젠 홍선생께 맡기겠소.”
그러면서 선자리로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고 눌러앉힌다음 나는 상세하게 그 수개원고를 본다음 또다시 수개시켰다…그렇게 반복적으로 수개시키고 다듬은 열편의 처녀작으로 나는 그해(1983년) “연변문예”잡지 제9기에다 “신인작자소설묶음”을 내왔다. 그 가운데서 서너편이 주필관을 넘지 못하고 “챵비”를 당한 외에 대부분이 그 “묶음”란에 나갔다. 그 “묶음”의 편자의 말에다 나는 이렇게 썼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국화만발한 황금의 구월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몇몇 문학신인들이 《처녀지》를 개간하여 지은 《오곡》으로 여러분께 《햇밥》을 지어드리고저 《신인작자소설묶음》이라는 《상》을 차렸습니다.
여러분들과 초면이거나 아직 익숙하지 못한 그들은 갖가지 《음식》을 정성껏 갖춰놓고 인사를 나누잡니다. 이 《상》엔 각자의 부동한 생활체험으로부터 공장생활을 반영한것도 있고 농촌생활을 보여준것도 있으며 인민교원의 뜨거운 사랑을 구가했는가 하면 오늘날 대학생들의 순결한 애정을 노래하기도 했으며 가정생활의 인정흐름도 썼기에 그야말로 하얀 이밥에 노란 기장밥, 모두부에 토실토실 터지는 감자들이며를 소담하게 차려놓은 우리 민족의 팔각소반을 방불케 합니다. 구미는 돋구는데 구경 그 맛이 어떠한지 여러분께서 검식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상》을 차리면서 우리는 또한 문학을 지향하려는 청년동무들에게 한마디 하고싶습니다. 문학의 길에서 《처녀지》를 개간하자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 고생속에서 삶의 희열을 느낄수 있고 청춘의 희망을 꽃피울수 있지 않을가요? 그대들이 지은 《햇밥》은 언제쯤 가서 맛볼는지요?…
그 신인작자작품들중 제일 많이 수개시켰던 김극민의 “박씨부인”이 그해 “연변문예문학상”을 탔던것이다.
“신인작자소설묶음”이 나간다음 사회적반향은 아주 강렬했다. 특히 농촌독자들과 농촌의 문학애호가들에게 준 영향은 아주 컸다. 그 시기는 연변의 문학부흥시기였다. 당시 연변의 유일한 문학지인《연변문예》가 금방 복간되였고 길림의 《대중문예》와 통화의 《장백산》잡지가 금방 창간되였을 때였다. 《연변문예》가 매기에 7-8만부씩 나갔으니까 전 중국조선족을 대상하여 19명에 한부씩 돌아가게 발행된 셈이였으니 대단했던것이다. 당시 전 중국적으로도 그처럼 발행비률이 높은 잡지는 없었다. 문화소양이 높은 우리 민족의 자랑찬 과시가 아닐수 없었다. 농촌에 가보면 젊은이 셋 가운데서 한 사람쯤은 문학도라고 자칭했을 정도였다. 처녀들도 문학청년이라면 다른 눈길로 흠모의 정을 보내군 했었다. 그러니 모든 과외작자들이 “신인작자소설묶음”에 주의를 돌리게 된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알았는지 하루에도 나의 앞으로 수십편씩 되는 작품들과 편지들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신인작자소설묶음”같은 절목란을 될수록 많이 개설하여 자기네와 같은 신인작자들의 처녀작을 많이 실어달라는 요구를 강렬하게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강렬한 요구는 만족될 수가 없었다. “연변문예”잡지가 신인들만 위한 원지가 아니였다. 기성작가들의 성숙된 원고도 다 실어주지 못하는 실정에서 미숙한 원고들을 “특수우대”하여 내줄수는 없었다. 기성작가들과 신인작자들의 수준차이는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있었다. 신인작자로서 처녀작을 한편 발표한다는 것이 정말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었다. 한편 발표하면 그 사람의 인생행로를 바꿔놓는 계기로도 되군 했었다. 작품발표가 이처럼 어려우니 적지 않은 열혈청년들이 문학창작이라는 이 “용광로”에 뛰여들었다가도 너무 뜨겁다고 나와버린다. 그들 가운데는 천부적인 창작기질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허지만 별수 없었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재목”을 안타깝게 바라 볼 뿐이였다. 개산툰에 윤가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나를 부지런히 찾아다녔었다. 올 때마다 글을 서너편씩 써가지고 와서는 봐달고 간청하군 했다. 써가지고 온 글들은 정말 농촌벽보란에다나 낼수 있는 “좋은 사람 좋은 일”같은 “표양신”들이였다. 처음에는 대강 보는척 하다가 무뚝뚝하게 “작품이 안됐다”는 한마디로 돌려보내군 했었다. 그런데도 며칠에 한번씩 끈질기게 찾아다녔다. 구차한 살림에 차비를 팔며 다니는 그 갸륵한 열정에 저으기 감화되여 점차 상세하게 봐주며 내심하게 일깨워주군 했다. 그러는 가운데서 그의 필력도 눈에 뜨이게 늘어났고 습작수준도 많이 제고되였다. 나중에는 어물쩍한 글을 써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될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그한테 걸어보게 되였다. 그는 나의 손에서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 편집되여 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야, 나의 글도 한번 좀 활자로 인쇄되여 나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그 순진한 얼굴에 비껴지는 동경심이 나를 자극했다. 어찌나 한편쯤은 발표되도록 도와주자! 드디여 그는 발표할 가망이 보이는 글을 써왔다. 나는 그를 붙잡고 이래저래 반복적으로 수개시켰다. 그도 발표할 가망이 보인다는 소리에 부쩍 힘이 솟구쳐서 이틀이 멀다하게 개산툰으로부터 연길로 오르내리며 나의 수개의견을 “성지”처럼 받들고 이렇게 뜯어고치라면 이렇게 뜯어고치고 저렇게 뜯어고치라면 저렇게 뜯어고치면서 수개에 집념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정리하고 편집해놓은다음 다시 읽어보니 여전히 미타한 점들이 많았다. 그래서 다시 또 수개시켰더니 그는 가타부타 한마디 불평도 없이 집으로 가지고 가서 다시 수개해왔다. 그것을 내가 좀 더 가필한다음 정식으로 주임께 올려보냈다. 주임도 그것이 애타게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지라 별 의견없이 주필실로 넘겼다. 그 작품의 “운명”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안타깝기만 했다. 윤씨는 며칠에 한번씩 와서 물어보지 않으면 편지로 소식을 탐문하기도 했다. 무엇이 그를 문학에 그처럼 “미치”게 하였을가? 만약 그가 그 어느 한 녀자한테 그처럼 집념했으면 그 녀자가 나중에 몸을 풀고 마음도 바치지 않고서는 견디여 내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일종 무슨 힘이였을가? 지금까지 인류개명사에서는 정신적으로 신앙의 힘이 제일 막강했다고 한다. 문학도 인간의 생활본질을 보여주는 정신적예술인것만큼 그 힘이 막강할것이다. 문제는 그 힘을 어떻게 키워주겠는가에 달렸다. 곁에 앉아 풍구로 바람을 불어주면 불길이 더 세차게 타번질것이고 높이 서서 바가지짝으로 물을 퍼부으면 불길이 사그라질것이다.
둬어달 목이 빠지게 기다린 뒤에야 그 작품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였다. 이러저러한 미숙한 점들이 보여 발표하기에는 곤난하다는것이였다. 나는 기분이 크게 상했다. 내가 이런 기분인데 작자본인한테 알리면 얼마나 큰 정신적 타격이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편지로 알릴가 하다가 그만 두고 한번 왔다가라고 기별을 띄웠다. 기별을 받자마자 그는 달려왔다. 그 어떤 좋은 소식이라도 있겠거니 해서 희색이 만면해서 들어섰다. 나는 그의 원고를 슬며시 가방에 집어넣고 그를 데리고 맥주점으로 갔다. 맥주를 마시면서 문학창작에 대해 론했고 그의 창작수준이 제고된 점에 대해 많이 긍정해주었고 부족되는 점도 지적해주었다. 나중에 그의 원고를 내놓고 주필관을 넘지 못한 원인을 분석해주었다. 원고를 내놓는 순간부터 그의 낯색은 변했고 입이 꾹 다물어졌다. 갈라질 때 대문밖으로 나서며 돌아지던 그가 고개를 휙 돌렸다. 순간, 눈가에 맺힌 이슬이 오후 해빛에 반사되여 반짝이였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은 나의 심정은 무겁기만 했다. 원고를 보자고 펼쳤지만 원고의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밀어놓고 신문을 펼쳐들었다. 신문의 내용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문도 와락 뿌리치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리고 사색에 잠겼다. 그의 작품이 그래 발표될 수준에 도달못했단 말인가? 물론 옥에도 티가 있을라니 졸작이든 명작이든 내놓고 흠을 꼬집어내려면 이래저래 다 꼬집어낼수 있는것이다. 아무리 반복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도 초학자로서 그의 작품은 발표될 수준에까지는 이르렀다고 인정되였다. 그렇다면 나의 편집이 미진해서 주필관을 넘지 못했을가? 원래의 초고와 수십번 수개를 거친 원고를 대비해보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까리까리한 작품이 우리 편집부, 우리 소설조, 나의 손에서만 얼마나 많이 떨어져 나갔던가! 그 많은 작품을 다 실어줄수 있는가? 우리의 잡지편폭으로… 그래서 나는 한동안 고민하게 되였다. 어떻게 하면?…
그후 윤씨는 편집부로 발길을 딱 끊었다. 그동안 뻔질나게 다니며 나를 “시끄럽게” 굴었던 정이 있어서인지 나는 그가 그리워졌다. 그래서 편지를 띄웠다. 뭘하고 있는지, 글이라도 쓰고있는지… 일개 이름없는 문학도를 잊지 않고 생각해주셔서 고맙다고 인차 회답이 왔다. 그는 자기가 문학할 “재목”이 될만한 사람인지 의심이 든다면서 책도 보기 싫고 글도 쓰기 싫어져서 꾸벅꾸벅 일만 하고있다는것이다. 열정도 있었고 문학적기질도 있는 젊은 초학자가 이렇게 가라앉는구나! 그렇게 가라앉는 초학자가 어찌 윤씨 한사람뿐이랴!
사람들은 고달프고 지루한 일을 농사에다 비기군 한다. “자식농사”요 하면 자식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준다. 문학창작도 가끔 농사질에다 비유할 때가 많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뇌력로동”이다. 허지만 농부의 농사질과 뚜렷하게 다른 점이라면 “도박성질”이 있는것이다. 농부의 농사는 잘하든 못하든 가을에 가서 좋든 나쁘든 일정한 수확이 다 있는것이지만 문학창작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한평생 글을 써도 성공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한두편 쓰고 만방에 명성을 떨치고 만금낟가리에 올라앉는다. 얼마나 불공평한가! 헌데 그 불공평한데 매력이 있었다. 마치도 복권뽑기에 한사람이 5백만원에 당첨되였다 하니 수천수만이 골이 터질 듯 복권뽑기에 나서듯이… 중국의 고전소설 “삼국연의”가 수백년을 내려오면서 얼마나 많은 독자들의 매력을 끌었고 얼마나 많은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불러일으켰고 얼마나 많은 평론가들의 “밥통”을 해결해주었는지 모른다. 라관중이 지금까지 살아계신다면 원고료를 얼마나 탈수 있었을가? 어느 한 유명한 가수는 노래 한곡 부르고 20만원씩 챙겨넣는다고 한다. 그것도 소득세를 제하고 말이다. 불공평한들 어찌하랴! 만천하가 공인해주는 “매력”임에야! 의견이 있으면 하느님상전에다나 드릴수 밖에 없다. 우리의 문학창작도 그런 매력에 유혹되여 하는 문자예술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런 예술적인 매력이 너무나 적다. 무엇이나 많으면 매력이 상실된다. 적은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할수 없는 남다른 “공”이 닦아져야 하고 남에게 있을수 없는 천부적인 기질이 갖춰져야 한다. 때문에 많은 문학도들이 문학창작에 열광을 보이다가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다. 거기에는 해도 안될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해도 될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문제는 해도 될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것이다. 아깝지 않은가! 그 속에 만약 “라관중”이 될만한 사람이 한명 있었는데 우리가 놓쳐버렸다면 그것은 수백년 력사에 “죄”를 짓는것이다. 일반적으로 초학자들은 서너편씩 써보고는 나앉을 때가 많다. “공”을 닦기전이 가장 관건적인 시각인데 그 시각에 한편씩 발표해주어 “기”를 돋구어주면 천부적인 기질이 갖춰진 사람이라면 크게 룡트림질 하며 솟아날수 있는것이다. 그것이 그 몇년간 내가 편집사업을 하면서 더듬어 본 객관적법칙성이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사람들이 “공”을 닦기전에 한편씩 발표하도록 해줄수 있겠는가? 그러자면 그들만이 마음대로 춤출수 있는 무대를 열어줘야 했다. 어떻게? 초학자원지를 개척해야 한다. 나는 이 문제를 심중하게 고려한 끝에 편집부지도부에 제기했다.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생각은 좋은데 맨손으로 어떻게? 그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슨 일을 하자면 돈이 있어야 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정부재정에서는 계획외에 일전한푼도 주지 않을것이고 단위의 돈도 예산내의 돈이기에 마음대로 쓸수 없는 돈이였다. 자금문제를 내놓고도 수두룩한 문제들이 제기되였다. 원지가 출판물이기에 해당부문의 허가수속을 밟아야 하는것이고 편집실이 따로 나와야 하고 편집일군을 따로 배치해야 했다. 해당부문에 자문해보니 내부인쇄준인증(准印证)수속을 밟으면 출판물은 인쇄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다음 문제는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기에 달린것이다. 나는 국가의 돈, 단위의 돈 일전한푼 쓰지 않고 “문학창작, 번역통신학부”와 통신생들의 원지인 “개간지”잡지를 꾸릴 방안(초안)을 작성해낸다음 과외초학자들의 의견도 들어보았고 기성작가들의 고견도 들어보았다. 모두들 대찬성이였고 이러저러한 수정안도 가첨해주었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실제문제들도 적지 않게 제기해주었다. 그 의견을 종합하고 참작하면서 “방안”을 다시 수개한다음 지도부에 바쳤다. 지도부에서 반복적으로 검토하고 나중에 문련당조(당시 작가협회는 문련에 귀속되여있었음)에 지시를 청했다. 문련당조의 비준지시가 떨어지자 나는 인차 소설조에서 나왔다. 편집부에서 강장희선생님을 보내주었고 문련에서 장원희동무를 보내주었다. 셋이서 “통신학부”와 “개간지”편집실을 구성했고 층계옆 작고 비좁은 타자실에 우리의 사무실이 “더부살이”로 들어앉게 되였다. 나는 총책임자로서 완전탈리였고 강선생님은 본직 실무인 총무사업을 하면서 반탈리로 나를 돕게 되였고 장동무도 본직실무인 문서와 타자사업을 하면서 반탈리로 학부의 재정관리를 맡게 되였다. 재정관리이래 돈 일전도 없었다. “더부살이”세간기구래 내가 쓰던 책상과 걸상이였다. 전화도 없었다. 나의 책상과 걸상을 타자실로 옮겨놓고 셋이서 실내청소를 간단히 한다음 당금 해야 할 일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다. 토론이 끝나자 셋이서 불고기점(강선생님이 불고기를 즐겨하셨음)에 가서 내돈으로 학부의 설립과 “개간지”의 창간을 위한 축하연을 검소하나 화기있게 베풀었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처녀지”에 첫 삽을 박으면서 “개간”에 들어붙었다. 편집부와 문련의 각 협회책임자들이 근심어린 눈길로 우리를 지켜보고있었다. 저게 될가? 우리는 “통신생모집잠정규례”를 찍어서 발포하는 한편 해당부문을 찾아다니며 해당수속을 밟았다. 며칠이 지나도 반응이 즘즘했다. 벌써 어떤 사람들은 지금 손을 떼도 늦지 않다며 진심으로 권장하기도 했다. 호미난방이 되기전에 말이다.
나는 선동원이 되려고 원정의 길에 나섰다. 각 현시 문화관과 문련을 찾아다니며 작가, 시인, 문학보도원선생님을 찾아서 동원해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에서 특히 화룡현의 고 현규동선생님, 룡정의 고 황병락선생님, 김재권선생님, 도문의 고 정몽호선생님, 왕청의 고 김학선생님, 고 박철선생님, 권중철선생님 등 선배님과 문우들이 헌신적으로 도와나섰다. 그 가운데서 화룡행은 아주 감동적이였다. 현규동선생님이 문학도들을 불러다 놓고 선동모임을 조직해주었다. 그 모임에서 나는 열변을 토했다.
화룡역에서 현선생님의 전송을 받으며 뻐스에 오른 나는 겨우 비집고 자리를 찾아앉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상황이여서 뻐스는 늘 만원이였던것이다. 달리는 뻐스안에서 뒤좌석에 앉은 청년 서넛이 서로 주고받는 말이 나의 귀맛을 당겼다.
“야, 저 아래 동성에서는 리짬장(站长)이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문학활동도 재밋게 한다더라.”
“그게 정말이야? 그럼 이번 걸음에 한번 들려보자꾸나.”
“새가이(처녀애)들두 있다니?”
“임마를 봐라, 문학공부를 하겠다는 눔새끼 색시사냥부터 하자구 드네. 엉큼한 녀석!”
“흐흐흐!”
……
나는 몸을 슬쩍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굴들이 불그스레 하고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들이였다.
“거 참, 좋은 일을 하고있구만. 나도 동무네들과 같이 가보면 안될가?”
내가 이렇게 청을 드니 그들은 덩둘해서 나를 눈여겨보는것이였다. 그중 한 젊은이가 나를 알아보고 벌떡 일어섰다.
“아니 이게… 혹시 소설을 쓰시는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제가 잡지에 나온 사진에서 본것 같은데…”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차안이 부산하게 벌떡벌떡 일어나 나와 악수를 청하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흥성촌에서 내려 해란강남안에 있는 “리짬장”네 집으로 향했다. “리짬장”이란 동성향문화소 소장 리룡칠선생님을 말한다. 리소장과 나는 그전부터 서로 면목을 익힌 사이였다. 당시 동성향은 전국문화사업보급선진단위였다. 그래서 “가무의 고향”이라 불리웠고 동성사람들은 어디에 가나 노래를 잘 불렀고 춤을 잘 추었다. 상대적으로 문화소질이 높은 고장이였다. “연변문예”편집선생이 내려왔다는 소문이 어떻게 새나갔는지 그날 숱한 문학도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거기에서도 문학창작통신학부와 “개간지”원지를 꾸리게 된다는것과 문학창작에서의 첫걸음을 어떻게 떼겠는가에 대해 일장 열변을 토했다. 좁다란 농가의 아래웃방은 문학도들의 열기로 화끈 달아올랐었다.
그렇게 약 반달동안 돌고 편집부로 돌아오니 신청등록인이 몇십명 늘어나있었다. 나는 더욱 신심이 커졌다. 한번 사내답게 멋지게 해보자.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건 둘째문제다. 문학에 몸을 담군이상 연변에서 우리 민족의 문학붐을 일궈보자. 나는 즉시 우리 문단에서 영향력이 있는 소설가, 시인, 평론가, 편집, 번역가 44명을 통신학부의 과외지도교원으로 초빙했고 “천지문학창작, 번역통신수업장정”을 내왔고 통신생등기표와 통신수업증을 찍어냈다. 그리고는 인차 동북 3성을 상대로 각지, 각 향진의 문화일군과 문학창작에서 지명도가 있는 분 오륙십명을 모셔다가 동원대회를 열었다. 회의장소에다는 자전거 열대를 사다가 갖춰놓았다. 그때만 해도 자전거가 주요교통도구였고 가정에서는 큰 재산으로 칠 때였다. 통신생이 백명 넘는 고장에다는 통신학부 분원을 세워주고 사업용으로 자전거 한대씩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들이 돌아가자 각 지방에서는 인차 문학창작통신수업에 참가하는 열조가 일어났다. 점점의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타오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 시기가 바로 연변문학사에서는 전례없었던 비약의 시기였다. 등록송금표가 하루에도 몇십장, 몇백장씩 날아들었고 통신생들이 부쳐보낸 원고 역시 하루에 몇십편씩 날아들었다. 나는 기본상 밤잠을 제대로 잘 사이가 없었다. 낮이면 강선생님과 장동무를 데리고 신청자의 명단에 따라 등기표와 수업증을 발급하고 들어온 원고들을 소설, 시, 수필, 번역 등 쟝르별로 분류해서 지도교원게 보내고 밤이면 “개간지”창간호와 통신학부제1기교과서편집을 다그쳐야 했다. 눈이 아홉이래도 그 숱한 원고를 다 보아낼수 없었고 손이 아홉이래도 그 많은 평어를 다 써낼수 없었고 다리가 열개래도 이곳저곳 다 달아다닐수가 없었다. 사람을 써야 했다. 학부관리원도 있어야 했고 편집일군도 있어야 했고 발행원도 있어야 했으며 부기원도 전직으로 두어야 했다. 그때에야 나는 “처녀지”를 개간한다는 것이 얼마나 간고하고 벅찬 일이란 것을 뼈로서 느끼게 되였다. 장가를 들 때에는 허공에 붕-떠서 어리벙벙하게 숫처녀를 “개간”했었지만… 헌데 문학원의 “처녀지”는 얼뜰하게 고추장 맛보기로 개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가지 원칙을 세웠다. 통신학부와 “개간지”의 모든 사업과 활동은 통신생을 위해서 진행되여야 하고 “개간지”에 발표되여 나갈 작품은 전부 통신생의 원고와 통신생들을 지도하기 위한 지도교원의 원고여야 하며 모든 사업일군과 편집일군, 그리고 발행원들까지도 모두 통신생들가운데서 선발해서 써야 한다는것이다. 오직 그래야만 통신학부와 “개간지”가 진정 통신생들의 포근한 요람으로 될수 있고 그들의 련락처로 될수 있고 활동중심으로 될수 있으며 그들이 자기의 처녀작을 발표할수 있는 원지로 될수 있고 그들이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춤출수 있는 무대로 될수 있는것이다. 모든 통신생들의 요구를 다 만족시켜줄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다시 분발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줄수 있고 희망을 안겨줄수 있는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아니겠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문학창작에 천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인재를 더는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발견해낼수 있고 계속 개발해낼수 있다는 점이였다.
일은 나의 뜻대로 번지여 갔다. 통신생신청인이 매일 배로 늘어나자 편집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해나섰고 문련당조에서도 관심을 돌렸다. 정말 범에게 날개를 돋쳐준 셈이였다. 통신학부로 찾아오는 통신생들이 매일 줄을 설 지경이였다. 개산툰의 윤씨도 다시 찾아왔고 먼 할빈에서도 면목 모를 분이 찾아왔고 심양, 장춘, 목단강, 동경성…지어 압록강변의 집안과 통화에서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매일 들어오는 신청자들의 간력을 살펴보면 사회의 각계 각층이 다 있었다. 농촌의 농민이 있는가 하면 공장의 로동자도 있었고 대학교의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 소학교의 교원도 있었고 사회의 구직청년이 있는가 하면 감옥의 죄수도 있었고 병원의 의사가 있는가 하면 기관의 간부도 있었고 가정의 주부가 있는가 하면 경로원의 로인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중공당원도 있었고 공청단원도 있었으며 해방군전사도 있었고 기독교신자도 있었으며 장애인도 여러명 있었다. 환갑이 지난 로인이 있는가 하면 금방 학교문을 나온 풋내기도 있었고 부부간이 있는가 하면 형제간이거나 자매간이 참가한 친인들도 있었다… 문학의 힘은 그처럼 컸고 문학의 영향력은 그처럼 넓게 퍼져나가고있었다. 문학이란 무엇이길래? 나 스스로도 리해될수 없을만큼 감동을 받을 때가 많았다.
나는 “개간지”제1기편집을 다그치는 한편 사업일군을 모집했다. 그래서 하태렬 등 통신학부관리일군들과 김룡길 등 “개간지”편집일군들도 초빙해왔고 전일규 등 발행일군들도 40여명 받아들였다. 모두 통신생가운데서 추천하고 심사를 거쳐 받은 사람들이였다. 받아들인 사람들의 사업열정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지경이였다. 그들과 함께 모든 일을 밀고 나아가면서 통신학부개학식준비를 다그쳤다. 정말 통쾌하기 그지 없었다. 사업이란 조건이 좋아서 잘되는것도 아니고 곤난이 첩첩하다 해서 안되는것도 아니고 장애가 있다 해서 막히는것도 아니였다. 오직 목표가 뚜렷하고 의기가 분발되고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열정이 끓어넘친다면 그 어떤 엄청난 사업도 해낼수 있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광복의 홰불을 지펴들고 장백의 밀림속에서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해나가던 항일련군들의 혁명열정이 얼마나 높았겠는가를 상상해보았고 섬북의 토굴집속에서 등잔불에 비치는 래일의 새중국전망을 내다보시며 글을 쓰신 모택동의 심정이 얼마나 벅차올랐겠는가를 련상해보기도 했다. 근 37년이란 나의 사업경력에서 그때처럼 성수나게 일해본 적은 별반 없었다.
드디여 우리는 통신학부개학식을 성황리에 거행하게 되였다. 1985년 4월 7일 오전, 해빛도 화창한 봄날이였다. 우리 통신학부와 “개간지”의 전체 사업일군들은 새옷을 갈아입고 아침 일찍 새로 락성한 연변대학교학청사로 갔다. 대회장소는 5층의 계단식강당으로 정했다. 우리는 문어귀에 두줄로 서서 개학식에 참가하러 온 지도교원과 통신생들을 뜨겁게 맞아주고 환영했다. 벌써 8시가 좀 넘자 통신생들이 줄줄이 찾아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춘색이 완연했다. 서로서로 초면이였지만 구면처럼 스스럼없이 악수를 나누고 얼싸안고 빙빙 돌아가기도 했다. 문학에 대한 성스러운 창작욕이 그들의 마음을 한줄에 꿰매여놓았고 문학창작통신수업이 뉴대가 되여 그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던것이다. 회의장은 명절날 축제의 분위기로 전환되였다.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피여났고 열기 띤 목소리로 부르고 화답하느라 장내는 화기롭게 웅성거렸다. 그날 감동적인 장면은 화룡시의 장애인 처녀 최성자가 부모님과 함께 전문 차를 세내서 직접 대회장문앞까지 달려온것이였다. 이에 감화된 내가 성자를 업고 아래층에서 5층까지 올라갔다. 내가 그녀를 업고 회장에 들어서니 숱한 사람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보내왔다. 성자가 낀 하얀 안경밑으로 맑은 이슬이 반짝이였다. 통신생 조기택씨는 이런 시구로 그날의 그 장면을 남겼었다.
……
년로하신 분들도 나어린 소년도
불타는 구지욕에 하나의 지향
불구의 청년들도 교양소의 죄인도
한결같이 모여왔네 통신수업 개학식
……
그 넓은 강당은 통신생들로 자리가 꽉 메워졌다. 빈자리라곤 찾을수 없어서 후에 온 사람들은 량쪽 벽체거나 뒤켠 창문턱에 걸터앉았다. 두줄로 된 주석대에다는 주위 선전부, 문련당조(작가협회도 문련에 소속되여 있었음), 편집부 등 해당 부문의 지도성원들과 우리 문단의 덕망높은 로작가, 로시인, 로교수 등 20여명을 정중하게 모셨다.
시간이 되여 내가 발언석에 나서 개학식을 선포하자 장내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길게길게 터졌다. 내가 일어서서 팔을 내저으며 제지시켜서야 박수소리는 점차 가라앉았다. 그다음 리상각주필님이 편집부를 대표하여 개막사를 올렸다. 그이도 퍽 격동된 모습이였다.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누가 첫 보습날을 개간지에 박을것인가? 누가 첫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줄것인가? 다름 아닌 그대들, 문학에 큰뜻을 둔 열혈청년들, 정다운 통신생들이여, 어서 손에 손을 잡고 우리네 화원에서 마음껏 뛰놀자. 즐거이 노래하며 춤추자.”라고 호소하였을 때 장내에서는 또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그의 개막사는 수시로 되는 박수소리에 눌리웠다가 다시 우러나오군 했다. 뒤이어 문련당조의 축사도 있었고 통신생대표들의 발언도 있었다. 그들의 발언 역시 수시로 터져나오는 박수소리에 자주 끊기군 했다. 그 가운데서도 장애인 최성자의 발언은 많은 통신생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최성자는 눈물을 머금고 속심에 서리서리 맺혀있던 고초를 이렇게 실실히 풀어냈다. “운명이 불운하였던가 팔자가 기구했던가 저는 일곱달만에 소아마비증에 걸렸댔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여나서 사람구실 못하는 것 이상 큰 슬픔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활개치는 청춘들을 볼 때마다 치마꼬리를 날리는 녀인들을 볼 때마다 저는 삷의 권태를 느꼈습니다…문학은 저에게 생명을 주었고 기쁨을 주었으며 웃음을 주었습니다…공식없는 문학이란 배움의 길에서 엎어지고 머리를 깨며 그 언젠가 한무더기돌틈에서 퇴화될지 모르지만 기어코 그 길로 가고야 말겠습니다.” 그 목메인 소리에 많은 통신생들이 눈굽을 찍었다. 그다음 감옥에서 온 죄수 통신생인 장성보의 발언이 또한 큰 충격을 주어 장내분위기를 한번 더 일렁거리게 했다. 그는 이렇게 자기의 심중을 토로하였다. “이번에 제가 개학식에 참가하려고 감옥문을 나설 때 동범들은 다투어 나의 손을 잡아주며 자기들을 대신해서 지도교원들께 인사를 전해달라고 거듭 부탁하였습니다… 우리는 결심코 개조의 발걸음을 다그쳐 진지하게 문학창작기초지식을 잘 배우겠습니다… 가장 큰 희망이라면 통신학부내에서 허용되는 일상 필요한 일들을 우리에게 맡겨주십시오. 죄지은 우리는 땀으로 심령속의 오물을 가셔내려 합니다…”
나중에 전반 개학식대회장의 클라이맥스 고조는 소설가 림원춘선생님이 지도교원대표로 발언할 때 이루어졌다. 벌써 그가 발언석에 나서자 아래에서는 박수소리가 터져나오며 그칠줄 몰랐다. 원래 체격이 쭉 빠진 미남인데다가 그날 따라 하얀 샤쯔깃과 앞섶이 두드러지도록 까만 양복을 받쳐입고 거기에 걸맞게 빨간 꽃줄이 세로 쭉쭉 금을 친 나비넥타이까지 깡똥 매듭을 지어놓으니 그야말로 인기 만점이였다. 거기에 소탈한 성격 그대로의 솔찍한 고백, 허스키한 저력적인 음성, 창작욕을 불러일으켜주는 문학에 대한 진지한 감정이 통신생들의 마음을 확 끌었던것이다. “저는 내가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후배들에게 몽땅 쏟아붓고싶은 충동으로 항상 자신의 가슴을 들먹이군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알고있는 전부를 하나도 속임없고 탐오함이 없이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싶은 그 마음입니다.”라고 그가 자기의 심정을 절절하게 토파하였을 때 장내에서는 또다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사업에 참가한 수십년래 크고작은 회의에 수없이 참가해 왔었다. 회의로 사업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의 경력에서 그번 개학식만큼 감격적이고 열광적인 대회에 참가하고 소집해보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다. 우리의 문학창작통신수업은 이렇게 첫 시작을 성공적으로 개시하게 되였다. 통신수업에 참가한 통신생은 1천3백여명이였는데 중국경내에서 무릇 조선족이 있는 곳이면 한두명씩 다 참가한것으로 된다. 이민사에 뒤따른 우리의 민족문학사가 이미 백여년력사를 가지고있는데 1985년에 있은 문학창작통신수업은 력사상 있어본적이 없는 가장 큰 규모의 문학창작활동이였다고 할수 있다. 우리의 문단사를 펼쳐보아도 천여명 초학자들이 붓을 들고 창작에 뛰여든 실례가 여지껏 없었고 그처럼 영향력이 넓게 퍼진 적도 없었고 그때만큼 많은 창작품이 나온 적도 없었으며 그처럼 많은 지도교원들이 동원되여 성심껏 지도해준 적도 없었다. 또한 초학자들이 자기의 전문 원지를 가지고 그 어느 부문이나 개인의 협찬금도 없이 대형적인 창작활동을 거대하게 진행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문단사에서는 그 전례를 찾아볼수 없었다.
물론 그처럼 크게 벌린 활동이고 또한 처음 해보는 일이라 많은 면에서 실수가 빈발했고 허점들이 여기저기에서 벌거벗고 로출되였다. “개간지”제1기가 출판되여 나올 때였다. 나는 발행원들이 올려보낸 수자와 각지에서 올라온 주문예약에 따라 주먹구구를 해보았다. 원래는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따져봐야 하는데 시간도 급촉했다. 그래서 4만 8천부를 빨리 찍어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연변문예”가 3만부가량 발행될 때였다. 편집부의 마음좋은 분들이 4만 8천부를 찍는다는 말에 너도나도 찾아와서 진심으로 나를 말렸다.
“도대체 어쩌자구 이래? 처음부터 코밥 먹자구!”
“우전국발행도 아닌데 저네 몇사람의 힘으로 될가?”
“정간(正刊)도 3만부인데 부간(副刊)을 그것보다 더 찍는다면 그게 말이나 되오?”
……
그때나 지금이나 나로서의 사업풍격은 방향이 정해지고 주선이 제대로 그어졌다면 기타의 부선이나 잡건에서는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처사가 많았다. 그 당시 잡지 한부의 값은 0.45원이였는데 많이 찍어도 손해를 보고 적게 찍어도 손해를 보는 판이였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한 보름쯤 품을 들여 다시 확인해 보는것인데 그러자면 다른 일에 영향이 미치게 된다. 제일 중요한건 천여명 통신생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수 있다는 점이였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자기들이 가꾼 원지-“개간지”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중이였다. 하루란 시간이 늦어져도 그들에게는 한바가지의 찬물을 끼얹는것으로 된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원래의 주장대로 4만 8천부를 계속 빨리 찍어내라고 고집을 부렸다. 손해를 보면 나 개인이 책임지겠으니 인제부터 누구도 이 일로 시간을 더 지체시켜서는 안된다고 막 밀어내붙였다.
“연변문예”잡지는 줄곧 우전국에 위탁하여 발행되였다. 그러다 보니 내가 편집부에 들어와 2년철 잡게 공작하였지만 발행에 대해서는 상식조차 없었다. 4만 8천부란 그저 나의 머리속에서 수자에 불과했지 그것이 얼마만한 무지에 몇묶음으로 되였겠는가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이 인쇄되였다는 통지가 왔고 미포장에 백책씩 묶은 몇백 묶음의 잡지가 트럭에 실려왔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부리우고 보니 아름찼다. 모두들 나와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때에야 나는 속이 꿈틀해났다. (아이들 장난이 아니구나!)
편집부에는 책을 보관해 둘 창고도 없었다. 우리는 림시로 책을 편집부의 복도 량옆 벽에다 쌓아두는 수밖에 없었다. 복도가 숨막히게 비좁아졌다. 편집부가 들어있는 그 낡은 3층건물은 원래 부대의 초대소였다고 하는데 우리 편집부만 아니라 문련 각 협회사무실도 들어있었고 중국조선족소년신문사와 주 공청단위, 주 인대, 주 세무국 등 여러 부문 기관들이 들어있어 래왕하는 사람들이 많고 복잡한 곳이였다. 복도가 꽉 메니 자연 사람들의 불평을 자아내기 마련이였다.
“앗따, 우둔하게두 찍어냈구만.”
“어마나, 이걸 언제 다 …”
“여기가 뭐 창고인가 하네. 과연실루!”
……
나는 전체 통신학부와 “개간지”의 사업일군들을 거느리고 누구말마따나 빨찌산식의 “돌격전”에 “속도전”을 벌려나갔다. 이틀동안 묶는 사람은 전문 묶고 주소를 쓰는 사람은 전문 주소를 쓰고 세는 사람은 전문 책을 헤여놓고 봉투에 넣는 사람은 전문 봉투에 넣고 하면서 낮에 밤을 이어갔다. 다행히도 하남우전지국이 거퍼 열미터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우리는 보일러실의 밀차를 빌어 포장된 책을 쉽게 실어갈수 있었다. 한 밀차 한 밀차씩 련이어 실어가니 우전국녀자들이 거기에 언제 다 도장을 찍겠느냐고 입을 한발씩 내밀었다. 그 숱한 책을 다 처리하고나니 사람마다 손에 물집이 생겨나서 손바닥을 입에 대고 호호 불어댔다.
월요일날 아침에 출근하던 사람들은 복도가 텅텅 빈걸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은 분분히 통신학부의 문을 열고 고개를 기웃거렸다.
“여기 책들이 다 어디로 갔어?”
나는 그저 시무룩이 웃어만 주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약 일주일후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묶음, 두 묶음씩 부쳐보낸 책이 웬일인지 반환되여 되돌려오기 시작했던것이다. 그 후에는 다섯 묶음, 일여덟 묶음씩 마구 들이닥쳤다. 대부분 포장이 툭툭 터진채로 돌려져 왔다. 복도에 다시 책무지가 쌓여졌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일시 어찌 할 방도가 나질 않았다. 구경 무슨 문제인가? 나는 인차 각 현시의 발행을 책임진 통신생들을 불러다가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분석해보았다. 사전에 미처 예견못했던 문제거리가 많이 제기되였다. 회의끝에 제기된 문제들을 귀납하고 추리해보니 대개 아래와 같은 문제들이 존재했던것이다. 많이 보내야 할 곳에다는 적게 보내고 적게 보내야 할 곳에다는 오히려 많이 보낸것이다. 례를 들면 석현은 원래 크지 않은 고장이고 거주민 대부분이 한족이 많고 조선족이 적은 곳인데 2천 5백부나 보냈던것이다. 그와 반면에 평강벌을 끼고있는 투도는 조선족이 집중되고 그 주변의 룡수, 룡문, 동성 등 지역에는 젊은 독자층이 많은 비례를 차지하고있었는데 천여부밖에 보내지 않았다. 그 다음 문제는 통신생의 비례에 따라 독자비례를 추측해서 보냈는데 그것이 틀린 실책이였다. 통신생비례가 상대적으로 높은 고장이지만 독자비례가 낮은 고장도 있고 통신생비례가 상대적으로 낮은 고장이지만 독자비례가 높은 고장도 있었던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기타의 문제들도 생각보다 휠씬 심각했다. 나는 그 문제들을 편집부와 문련당조에 회보한다음 문련 박주석의 비준을 거쳐서 발행이 바쁠 때마다 일정한 비용을 내고 차를 쓰기로 하였다. 당시 문련에 “쌍패쭤”(쌍줄배기좌석차)소형화물차가 있었는데 운전수 백씨는 내가 량식국에 있을 때부터 아는 사이라 시간상 거리상에서 차를 무난하게 마음대로 움직일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부터 우리는 책을 차에 싣고 떠났다. 비암산을 넘어 동성으로부터 룡수, 룡문에 이르기까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독자들의 비례를 따져가며 나눠주었다. 당지의 통신생들이 발벗고 도와나섰다. 그리고 평강벌의 문학명인들도 적극적으로 협조해나섰다. 동성에서는 리룡칠소장이 몇백책을 맡았고 팔포강록장의 박은선생님도 나섰고 룡호의 정세봉선생님도 나섰고 연안의 차룡순선생님도 나섰다. 특히 우리를 감동시킨 분은 정세봉선생님의 사모님이였다. 당시 마을의 부녀주임이였던 사모님은 4백책이나 맡아가지고 책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나눠주었던것이다.
그 다음 우리는 계속 차를 가지고 조양천, 안도, 팔도 등 고장을 돌았고 이어 개산툰, 도문, 훈춘, 왕청, 배초구 등 지를 돌면서 다시 수자를 조절하며 발행했던것이다. 그렇게 다 돌고 나서도 나중에는 2-3천부 적치되였다. 허지만 큰 손실은 아니였다. 전반적으로는 일정한 리윤이 나왔었다. 제1기”개간지”발행에서 그런 경험교훈이 있었기에 제2기부터는 기본상 적치되는 페단이 없이 다 발행되여 나갔다. 지금도 그 때 그 옛날의 “개간지”잡지가 있다면 높은 가격이래도 사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후 대개 굵직굵직한 일들은 순리롭게 진행되여 나간 셈이였다. 개학식을 성황리에 열고 “개간지”제1기발행도 마치고 뒤이어 “문학통신학부 교과서”제1책도 인차 편집출판되여 나갔다. “개간지”제2기와 교과서제2책의 편집도 정상적궤도에 들어섰다. 그런데도 해야 할 일들은 자꾸 밀려오며 쌓이고 쌓였다. 지도교원들의 순회강연이나 구체보도를 해달라는 요구가 각지로부터 강렬하게 제기되여 왔다. 그다음 하루에도 한아름씩 들어오는 통신생들의 원고를 순서에 따라 절차있게 쟝르별로 지도교원들께 보내여 그들의 지도를 받게 해야 했다. 그것은 정말 시끄럽고 자질구레하고 실수가 빈발하는 일이였다. 원고가 들어오는 족족 지역별로 주소에 따라 등기하고 쟝르에 따라 선택해서 모 지도교원에게 보내고 며칠후 그 지도교원이 다 본다음 의견이나 평어를 달아놓으면 그걸 가져다가 다시 분류해서 주소에 따라 부쳐보내야 하는데 그 기간에 어느 한 환절에서 외끼거나 문제가 생기면 원고가 분실되거나 다른 사람한테 잘못 가기가 일수였다. 그래서 통신생, 사업일군, 지도교원사이에 서로 네탈내탈 하면서 얼굴을 붉힐 때도 있었다. 이런 일보다 실제적으로 골치 아픈 일은 발행원들의 로임문제였다. “개간지”잡지를 찍기로 결정한 다음부터 우리는 통신생가운데서 비교적 꼴꼴하다고 인정되는 젊은이들을 물색하고 추려서 사오십명 뽑았다. 그들이 연변 각지와 동북3성을 주름잡으며 뛰여다녔기에 우리의 “개간지”가 기마다 몇만부씩 나갈수 있었던것이다. 그 가운데는 전형적인 인물이 한사람 있었는데 장백산아래 첫 동네인 숭선의 어느 한 골안 마을에서 올라온 전일규란 젊은이였다. 그는 혼자서 “개간지”전년분을 1천 6백여부나 돈 일전 차남이 없이 주문해왔다. 지금에 와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좀 불어치는 소리겠지 하고 생각할수도 있다. 오십명 가운데서 그가 제일 어리무던하고 순진해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제대로 해낼수 있겠는가고 근심되여 원래는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제기하는 요구가 아주 간단하고 진솔하고 천진한것이였다. 자기는 스무살을 먹도록 여태껏 숭선골안을 벗어나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 어떤 보수도 요구하지 않겠으니 전국에 산재해있는 조선족마을을 다 돌게 해달라는것이였다. 그런데 그 요구가 통신학부내 일부 사람들에게 꼬리로 잡혔다. 그 녀석이 잡지발행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곳구경이나 하자는 것이니 절대 내보낼수 없다는것이다. 허지만 나는 그의 순진함을 믿었다. 하여 그의 신분확인에 따른 발행원공작증을 발급하도록 비준하고 일정한 려비를 주어서 지정한 발행로선에 따라 나가게 했다. 그는 약 한달반동안 연변과 동북 3성을 한바퀴 빙 돌고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정신이 더 포만해졌고 더 활발해져서 말도 술술 잘했다. 아닌게 아니라 집안에 있는 똑똑이보다 나다니는 머저리가 낫다는 속담이 딱 맞는 것 같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한달반동안 그는 한 끼니도 식당에 가서 사먹어본적이 없다고 한다. 갈 때 어머니가 큰 통졸임통에 담아준 고추장에 만두나 빵을 사다가 찍어 먹었다는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목이 꺽 메여올라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일규의 어깨만 툭툭 쳐주기만 했다. 내 기억에는 그때 우리 통신학부에서 그에게 특별장려금을 내주었고 아래우 옷 한벌을 사준것으로 기억된다. 그가 입고 다니는 옷이 낡아서 볼성모양 없었던것이다. 그후 통신학부가 마무리되면서 전일규와 갈라진후 여직껏 한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 지금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말 한번 보고싶다.
“개간지”제1기발행이 끝난다음 우리는 그 오십명 발행원가운데서 또 능력과 조건에 따라 20명을 추려서 남겼다. 그런데 “개간지” 한 잡지만 발행해서 그들의 로임을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돌려보내면 “개간지”가 정상적으로 발행될수 없었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량난에 빠진 셈이였다. 어떻게 할것인가? 일개 잡지사의 편집으로서는 어디 가서 돈을 구할수 있는 구멍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문화계통에서는 “문화산업으로 문화를 살리자!”(以文养文)는 구호가 제기되였다. 그 때 그 말을 듣자마자 나의 머리속에서는 그 무엇이 반짝 불꽃을 튕겨주는 것이 있었다. 나는 당장 그 자리로 당시 “개간지”에 몸을 담고있던 김룡길씨(아동소설작가임)를 불러내여 맥주점으로 데리고 갔다.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그 반짝 튕기던 불꽃에 대한 구상을 내놓았다. 서로 의견을 교환하다가 나중에 합의를 보았다. 그것인즉 “개간지”외에 다른 잡지나 도서를 경영하고 발행할수 있는 합법적인 발행기구를 내오자는것이였다. 그러면 “개간지”도 정상적으로 계속 발행할수 있고 발행원들의 로임문제도 해결할수 있으며 또한 리윤이 있게 되면 통신학부운영에도 보태쓸수 있다는 것이 당시 우리 둘의 생각이였다. 그 술좌석에서 우리 둘은 모든걸 다 결정하였다. 내가 명의상 총책임을 지고 김룡길씨가 구체적으로 책임지기로 하고 기구의 명칭을 “천지서간사”로 정했다. 이튿날부터 김룡길씨를 “개간지”편집에서 뚝 떼내여 전문 “서간사”창건준비사업에 달라붙게 했다. 그당시 정황으로는 무엇을 결정하면 결정하는 그 시각부터 행동에 옮겨야 했다. 그걸 세워서 리윤을 볼수 있겠는가 밑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문제따위는 고려해볼 사이도 없었다. 그걸 고려하느라면 다른 일이 망태기가 되여버린다. 무릇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떠오르면 그걸 눈앞에서 해야 했다. 래일에 가 밑져서 망해빠진다 해도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에 해야 했던것이다. 세계 유명기업의 창업사를 두루두루 뚜져보아도 대개는 이러한 것 같다. 초창기에 언제 모든 것을 다 따져보고 고려해보고 준비한다음 일떠선 기업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기업이 일정하게 발전한다음 여유작작할 때 하는 노릇이였다.
김룡길씨가 며칠간 달아다니더니 알맞춤한 경영장소를 찾아내였다. 바로 신흥파출소곁에 있는 자그마한 일본식 2층 양옥이였는데 아래층은 매대를 놓고 경영할수 있고 웃층은 사무실로 쓸수 있었다. 지금의 광주상점자리인데 듣는 말에 의하면 우리 문단의 로선배이신 김창걸선생님의 옛 저택이였다고 한다. 그때 돈으로 1만 2천원을 주고 그 집을 사서 자리를 정한다음에는 인차 공상국이요 세무국이요 도시관리대대요 하는 해당 부문의 “어르신님”들을 모셔다가 없는 돈에 식당놀이를 해대며 복잡한 수속을 거침없이 밟았다. 거기에 20여명 발행원들을 배치해놓고 “개간지”외에 다른 잡지도 발행하고 도서도 경영했다. 내가 직접 목단강민족출판사에 가서 많은 도서를 구매해오기도 했다. 그해 하반년에는 “연변녀성”잡지를 총도거리로 맡아 호황을 이루기도 했다. “천지서간사”를 꾸리면서 재미있는 일도 있었고 눈물겨운 일도 있었고 내 일생을 망쳐먹을번한 고통스로운 일도 있었다. 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 털어놓을 작정이다.
통신생들의 요구에 따라 순회강연을 조직하는것도 통신학부의 중요한 활동이였다. 이 공작은 하태렬씨가 구체적으로 책임지고 조직했다. 그는 일을 해도 언제나 깔끔하고 날파람있었다. 경비때문에 먼곳과 편벽한 고장에는 가지 못했지만 통신생이 집중된 각 현시의 주요 지역들은 대부분 돌며 순회강연이나 개별보도를 진행했었다. 그 가운데서 인상깊었던 것은 연길감옥과 돈화추리구감옥에서의 순회강연이였다. 감옥이란 좀 특수한 곳이여서 우리도 호기심을 가졌고 감옥측령도에서도 아주 큰 중시를 돌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죄수들에 대한 재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긴 모양이였다. 그들의 초청에 의해 내가 지도교원 몇분을 모시고 감옥에 들어가 강연하게 되였다. 그 걸음에 감옥안도 한바퀴 돌아볼수 있었고 도대체 죄수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도 관찰해볼수 있었다. 감옥안에는 운동장도 있었고 가공공장도 있었다. 죄수들의 생활은 전부 군사화였다. 침실에는 2층짜리 침대를 놓았는데 이불을 개여놓은것도 병영처럼 모두 네모반듯하게 각이 났다. 어찌나 깨끗한지 침실안에서 수지 한장 널려있는 것을 발견할수 없었다. 화식도 생각보다는 휠씬 좋았다. 밥은 하얀 입쌀에 노란 강냉이쌀을 섞은 “얼미빤”(二米饭)이였고 국도 돼지고기 흰점이 둥둥 뜬 배추국이였고 반찬도 가지볶음채와 김치가 있었다. 원래 나는 감옥안에서는 강냉이떡만 먹는가고 생각했었다. 생활상에서는 별로 일반 사회사람들과 큰 차별이 없지만 자유가 없고 로동에 참가하면 로동강도가 높고 시간상에서 좀 지루할 때가 많다는것이였다. 우리가 통신생들만 모여놓고 강연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감옥측에서는 다른 죄수들도 함께 방청할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제기해왔다. 문학강연이란 듣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강의가 조선말로 진행되기에 조선족죄수들 가운데서 중범과 병자, 그리고 작업중인 죄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참가하였다. 그들의 회의장 입장도 각 반급별로 렬을 지어 한줄 한줄 들어와서는 차렷 자세로 기립하고 서있다가 반장의 구령에 따라 하나, 둘, 셋 하며 번호를 불러 자신을 확인시킨다음 다시 구령에 따라 반급끼리 집체로 착착 자리에 앉는것이였다. 그날 지도교원 여러 분이 강연하는 바람에 시간이 꽤나 길어지게 되였다. 허지만 누구 하나 도중에 소변보러 가는 자도 없었고 서로 소곤거리며 소동작을 부리는 자도 없었다. 매번 강연이 끝날 때면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지군 했다. 나도 학생생활 십여년에 교원사업도 해보고 무슨 강습반이요 당교학습이요 하며 수많은 강연활동에 참가해보았지만 그날처럼 질서정연하고 엄숙하고 조용하고 열렬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된 강연은 처음 참가해본다.
그리고 그날 감옥활동에서는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죄수들이 화식하는 모습을 돌아보면서 나는 몇몇 낯익은 자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그들은 나를 보는 순간에 혹은 외면하거나 혹은 계면쩍게 피씩 웃고는 돌아서는것이였다. 그러는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리해할만 했다. 어느 한 침실에 들어서는데 한 녀석이 밥을 떠담다가 나를 힐끔 올려다 보더니 밥주걱을 훌 던지고 돌아서 구석쪽 침대가에 가서 걸터 앉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다시 쳐들지 않는것이였다. 갸름한 얼굴에 판들거리는 작은 눈이 너무나도 눈에 익은 면목이였다. 어릴 때 공신 “웅덩개마을”에서 함께 놀았던 친구인데 나보다 아래아래 학년 후배였었다. 성이 강씨이고 이름이 휘여서 우리는 늘 그를 “휘야”라고 불렀다. 공부는 안하고 장난질이 심했고 그때 벌써 손길이 늘 거칠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자식 여럿을 낳았는데 이래저래 다 죽고 나중에 그의 아버지가 “휘야”를 유복자로 남겨두고 돌아가셨단다. 과부로 된 어머니는 그 아들 하나만 믿고 정말 애지중지 하며 길러냈단다. 한번은 “휘야”가 크게 앓아서 죽게 된 것을 어머니가 집까지 팔아 사경에서 그를 구해냈단다. 집이 없는 그들 모자간은 우리 웃집웃집 룡철네 헛간을 빌어 살았다. 집에 들어가면 구들복판에 늘 구겨져있는 이불과 요밖에 없었다. 밥상도 없어서 모자간이 늘 마루널장판우에 마주 앉아 밥을 먹군 했다. 우리 어머니가 그집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별다른 음식이 있으면 나를 시켜 조금씩 보내주군 했다. 그런데 그런 집에서 자란 아들이 그만 이상제하도 모르고 헤덤비는 야반무례한 무뢰배로 자라났고 제어미도 마구 잡아두드리는 “도리깨아들”로 커갔다. 한번은 자기가 어디에 가서 후무려온 확대경의 볼록렌즈유리(해빛에 초점을 맞추면 불을 붙일수 있음. 당시 성냥이 긴장해서 아이들이 담배를 남몰래 피울 때면 그런 유리를 리용했음)가 없어졌다고 제또래 친구들 앞에서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감아쥐고 마구 흔들어 대는것이였다. 그때 우리는 아이가 로인이거나 이상 어른들께 쌍욕을 하거나 손찌검질을 하는 것을 세상 제일 큰죄로 생각하고있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 “휘야”가 자기의 어머니한테 마구 대들어 잡아채고있지 않는가! 녀동생이래도 그렇겠는데! 우리는 너무 기가 차서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달려들어 뜯어말렸다. 뒤이어 더 희한하고 우리를 어리둥절케 하는 장면이 벌어졌다. 머리가 마구 헝클어진 그의 어머니가 이제 당금 “빗강대”(비자루)같은 것을 잡아쥐고 그 아들의 못된 행실을 잡아주려니 해서 긴장해 있는데 뜻밖에도 그의 어머니는 히죽이 웃으며 아들을 올려다 보는것이였다.
“얘두, 전번에 그걸 저 뒤마을 남철이한테 준걸 벌써 잊었니?”
그제야 “휘야”도 생각나는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며 제쪽에서 오히려 버럭 소리를 지르는것이였다.
“그럼 왜 언녕 그렇다구 할게지?”
“네가 머리를 마구 끄잡아당기니 생각나더구나. 히히!”
“에잇, 씨베-”
우리로서는 정말 어처구니 없게 보이는 일이였다. 그런 “휘야”가 지금 감옥안에 와있다. “휘야”를 이런 길에 들어서게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겠지만 나는 어쩐지 그의 어머니가 생각나며 가슴이 쓰려났다. 지금 아들을 감옥에 보낸 그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가? “휘야”가 먼저 알은체 했더라면 나는 그의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보았을것이다. 허지만 때와 장소도 그렇거니와 그가 외면하고있는데 먼저 건드릴 수가 없어서 그런대로 훌 나와버렸다. 어쨌든 처량한 기분이 감돌아 심정이 착잡해졌다. 강연할 때 보니까 “휘야”는 네번째 줄 왼쪽 창문가에 앉아있었다. 다른 사람이 강의할 때에는 그도 기타 동범들과 같이 발언석을 지켜보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강의 할 때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있었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 수시로 그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허지만 그는 시종 고개를 쳐들지 않았다.
강연이 끝나자 감옥측에서는 저녁식사를 준비해놓고 우리를 청했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김씨라는 경관에게 강휘의 정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는 강휘란 죄범이 없다고 했다. 내가 몇호실에 있고 강연할 때 어느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말했을 때 그는 인차 그의 이름이 강휘가 아니라 강××(변성명했다는 이름이 지금 생각나지 않음)라고 했다. 후에 이름을 고친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의 가정정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자기가 구체 담당경관이 아니여서 똑똑하게는 모르겠지만 어떤 꼬부랑할머니가 가끔 그 손자를 보러 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가 손자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들을 보러 오는것이라고 알려주면서 그 자의 어릴 때 정황을 간단하게 교대해주었다.
그해 년말에 통신학부졸업식을 준비하면서 감옥의 통신생대표들을 참가시킬 일로 또 그 김경관을 만나게 되였다. 그때 김경관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휘야”라는 녀석이 하루는 김경관을 보고 나의 소설 “구촌조카”를 얻어서 빌려달라는 것이였단다. 김경관이 친구를 통해 얻어주었더니 녀석은 그걸 한벌 다 베끼기까지 했단다. 그걸 베껴서 외우자고 했는지 아니면 두고보자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후 개조표현이 남다르게 좋아졌다고 한다. 감옥안에서 개조표현이 좋아 모범수가 되면 감형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그날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쩐지 심정이 거뿐해났다. 아무튼 그가 하루라도 빨리 나가 년로해지신 어머니의 근심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줄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였다. 그후 나는 그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 다음 인상이 깊었던 것은 오상사범학교에 가서 한 강연활동이였다. 그때 내가 김성휘, 림원춘, 류원무 등 십여명의 지도교원을 모시고 좀 품위있게 떠났었다. 따지고 보면 차원이 높고 규모가 선 강연대오였다. 오상역에 내려서 인상이 깊었던 것은 오상의 “마차택시”였다. 말 한필이 끄는 단두마차인데 짐실이가 높고 평평해서 그 우에다 벼짚이나 도래멍석을 깔면 제법 푹신푹신 했고 덜렁거리며 달리는 멋이 좋았다. 그런 “마차택시” 수백대가 오상현내를 주름잡으며 손님을 끌었는데 일이원이면 현성내의 그 어떤 목적지까지 다 도달할수 있어서 편리했다. 원래 그걸 타고 학교까지 가려고 했는데 학교지도부성원들이 봉고차를 가지고 역까지 영접하러 나와서 우리 일행은 봉고차에 앉았다. 후날 나는 일부러 학교앞에서 그 “마치택시”를 타보았던것이다.
학교에서는 수백명되는 사생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환영하는 대회까지 열어주었다. 강연은 오전오후로 나뉘여 이틀동안 진행되였는데 강의하는 지도교원도 그렇고 강의를 듣는 사생들도 그렇고 모두 문학열로 끓어번지는 흥분의 도가니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당시 오상은 연변보다 먹거리가 더 풍요로웠다. 우리가 머무는 2박3일동안 대소연회가 교내식당에서, 교외음식점에서, 교원저택에서 련이어 벌어졌는데 번마다 그 갖춤새가 풍성스러워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군 했다. 우리가 도착하는 날 저녁에 학교식당에서 큰연회가 베풀어졌는데 김성휘선생님이 도도한 기분에 일어나시여 술잔을 들고 일장연설을 펴내시였다. 선생님은 연설가운데 가끔 즉흥시를 읊조리기도 하셨다. 원래 운치있는 스타일이지만 선생님이 그때만치 멋져보일 수가 없었다. 록화기가 없어 그 장면을 영상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무슨 내용의 시구였던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아무튼 주옥 같은 시구에 감정이 서리서리 옥맺힌 읊조림이여서 사생들의 갈채를 자아냈고 그들의 기분을 열광에로 끌어올렸다. 하여 연회장은 나중에 노래와 춤판으로 번지여갔다. 그날 선생님이 상마다 돌며 기분나게 “깐베이”하는 바람에 그만 만취되고말았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을 업고 침실로 올라가게 되였다. 선생님을 업는 순간, 나는 속이 뭉클해났다. 마치도 우리 집에 다섯살짜리 아들 홍파를 업은것처럼 가볍고 홀가분한 느낌이였다. 이런 몸에서 그처럼 주옥 같은 시구들이 샘물처럼 용솟음쳐 나왔다는걸 생각하니 어쩐지 코마루가 찡-해났다. 나는 한달음에 3층침실까지 올라가 선생님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드렸다. 선생님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천룡이, 참 안됐소.”하시고는 조용히 눈을 감고 주무시는것이였다.
이튿날 학교에서는 우리를 위해 들놀이를 조직했다. 이름난 명승지인 룡풍산저수지로 가서 유람선을 타고 저수지주변의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였다. 그들은 연변사람들이 생선국과 생회를 즐긴다는 말을 듣고 직접 강물에서 잡아올린 펄펄 뛰는 물고기로 잉어생회도 치고 생선국도 끓이고 여러 가지 생선료리도 해올렸다. 우리는 그걸 천처히 맛보며 웃음꽃도 피우고 노래도 불렀다. 그번 오상행은 그야말로 문학으로 불꽃 튕기는 열광의 려정이였고 노래와 춤으로 즐긴 환락의 려정이였고 풍성한 음식을 감미롭게 음미한 만포식의 려정이여서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길수 있었다.
통신학부에서는 또 일부 특수한 통신생이거나 지방에 대해서 개별지도를 하여 그들의 창작능력을 제고시키는데 중시를 돌리기도 했다. 석현에 당시 칠순에 가까운 박운규라는 로인이 계셨는데 창작열정이 대단하셨지만 수준제한으로 난이도가 크다는 정황을 료해하고는 두세번 찾아가서 구체적인 지도를 해드려 미숙하나마 작품을 발표할수 있게 해드렸다.
그리고 녕안현 마련하에서 젊은 문학도들의 창작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즉시 하태렬씨 등 사업일군을 파견하여 그들의 정황을 조사하게 하고 그들의 창작활동을 구체적으로 지도하게끔 하였다. 거기에는 김재호, 박룡철, 장혜영, 김미화 등 통신생들이 있었는데 하태렬씨의 광림은 그들에게 크나큰 힘으로 되였다. 그후 그들은 “개간지”뿐만 아니라 기타 여러 문학잡지에도 많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였었다.
바쁠수록 시간은 빨리 흘러가는 법인가부다. 어느새에 일년이 훌떡 지나갔다. 제1기문학창작, 번역통신학부졸업식과 “개간지”총결을 지어야 했다. 우리는 지나간 일년동안 걸어온 로정을 회고해보았다. 성과도 컸지만 실수도 많았고 허점도 많이 드러나있었다. 그동안 “개간지”를 6기 꾸려냈고 도합 16만부가량 발행하였으며 통신학부교과서를 3책까지 편집출판하여 도합 4천여책을 찍어 통신생들에게 공급해주었고 크고작은 순회강연을 50여차 조직했고 통신생들의 창작품(소설, 시, 수필, 민담, 재담, 씨나리오극본, 이야기 등 쟝르가 포함되였음)과 번역품이 200여편이 발표되였고(그 기간 다른 잡지에 발표된 통신생들의 작품은 여기에 통계되지 않았음) 지도교원들의 창작리론, 문학과 번역기초지식, 창작경험담, 작품평어, 강연재료 등 50여편을 교과서에 실어내보냈고 수많은 원고에다 수개의견이나 평어를 달아 보내주었다. 그 기간 통신생들의 원고는 하루에 한아름씩 받아들였는데 그 수자를 통계해낼 방법이 없었다. 지금처럼 컴퓨터를 사용했더라면 그 수자를 정확하게 통계해낼수 있었을텐데…
우리는 우수통신생과 우수지도교원을 추천할데 관한 통지를 각지에 발급했고 “개간지”문학상과 번역상작품추천활동도 벌렸다. 각지에서 올라온 추천명단과 작품에 대해 반복적으로 심의하고 추려서 후선명단과 후선작품을 편집부에 넘겨서 최후결정을 짓게 했다. 결과 김성훈 등 46명 우수통신생과 김응준 등 8명 우수지도교원이 최후로 결정되였고 김승일의 단편소설 “나그네의 시집살이” 등 3편 작품이 “개간지”문학상과 안종훈의 번역작품 “산촌소야곡” 등 3편 번역작품이 “개간지”번역상을 타게 되였다. 모든것이 다 준비되고 모든 것이 다 결정되자 우리는 “천지제1기문학창작, 번역통신학부”졸업식과 “개간지”문학상, 번역상수상식을 함께 성황리에 열었다. 그날 주석대에는 주 선전부, 주 문련의 지도동지들과 지도교원대표들이 올랐고 특별히 두리모자를 쓴 주 검찰원과 감옥의 지도동지들도 올랐던것이다. 그들은 감옥의 통신생대표가 몇 명 참가하였기에 우리가 특별초청해 온것이였다. 그 가운데는 당시 주 검찰원 부검찰장이였던 고 조병철동지도 참석하였었다. 졸업식과 수상식은 축하의 분위기속에서 화기있게 진행되였다.
“천지제1기문학창작, 번역통신학부”와 그 원지인 “개간지”가 일으킨 역할은 력사적으로나 그 당시 현실적으로 모두 심원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 한국에서 온 문학인들과 이 일을 말했더니 그들은 한국에서도 국제적인 문학창작활동은 몇번 있었지만 이처럼 규모있는 군중성적인 문학창작활동은 없었다고 했다. 조선에서도 이처럼 큰 문학창작활동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전반 조선문학사에 이처럼 규모가 큰 군중성적인 문학창작활동은 그 전례를 찾아 볼수 없는것이다. 비록 특정된 력사적조건하에서만 진행될수 있었던 활동이지만 그 활동이 일으킨 력사적의의와 우리 문단의 후비력량양성의 토대를 닦아놓았다는 현실적의의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만약 그때 창작통신학부와 “개간지”를 꾸리지 않았더라면 천부적인 창작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게 붓대를 꺾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 문단에서 중견역할을 놀고있는 작가나 시인들 가운데서 그 절반이상이 그때의 통신생출신들이다. 어느 땐가 내가 통신생등록부를 가지고 대조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글은 쓰고있지 않지만 우리의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때의 통신생출신들이다. 또한 통신학부를 통해 “개간지”에 작품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여 중소학교 교원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고 문화소 사업일군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고 향진정부에 들어간 사람도 있다. 그들이 지금 우리 민족문화교육사업에서 기본 력량으로 되고있다. 그들 가운데는 앞으로 다시 붓대를 들고 창작에 달라붙을 사람도 적지 않다. 통신생들 가운데는 또한 자기의 맡은바 공작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출세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령도직위에 올라간다음에도 계속 문학사업을 적극 지지해주고있다.
나는 그때 그런 문학창작의 통신학부를 꾸리고 그 원지인 “개간지”를 창간하여 꿈많은 문학도들에게 마음대로 발버둥질 칠수 있는 “요람”을 만들어 주었다는데 대해 지금도 아주 큰 자호감을 느낀다. 흘러온 세월에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는 것이 그래 자호감을 느껴볼수 있는 자본이 아니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 그 시절에 꾸었던 문학꿈을 다시 해몽해볼 때마다 가슴이 들먹거리군 한다. 기회만 있으면 그런 일을 또 하고싶다. 아직도 그 문학꿈에서 깨여나지 못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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