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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대화
김경화
열살 때 일이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한마리가 있었다. 회색 털에 눈이 똥그랗고 털이 반들반들한 강아지였다.
“이리 온.” 하고 부르면 총알같이 달려와 꼬리를 흔들고 “왼발 줘봐.” 하면 왼발 주고 “오른발 줘봐.” 하면 오른발을 펼쳐진 내 손바닥 우에 올려놓던 강아지였다.
하학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 내 발자국소리를 들었는지 저 멀리서부터 뛰여왔고 친구집으로 놀러 가도 항상 따라오던 강아지였다. 나는 좁쌀에 감자를 섞어 먹던 그 시절에 늘 내 몫의 밥을 조금씩 남겨서 옥수수가루와 풀을 섞어 끓여서 만든 개죽에 넣어주곤 했다.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자린고비인 아버지도 내가 강아지를 이뻐하는 마음에 감동이라도 받은 건지 그것만은 뭐라 하지 않았다.
강아지는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허리께가 늘씬해지면서 제법 우람한 개로 커갔다. 나는 앉은키가 나 만한 강아지를 껴안고 무수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늘그막에 낳은 딸이라고 친구들이 아버지를 보고 너네 할아버지냐 했을 때 창피했던 거며 그 때 나보다 여섯살 이상인 오빠가 몰래 담배를 피웠는데 비밀로 해주긴 했어도 어쩐지 나쁜 일을 숨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한데 그렇다고 어른들한테 말하면 고자질이 되는 것 같고 그래서 심히 혼란스럽다는 거며 새로 부임되여오신 잘생긴 체육선생님이 나를 무지 이뻐한다는거며 그게 참 좋은데 친구들 앞에서는 아닌 척 한다는 거며 아무한테도 터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그러면 내 말에 개는 눈을 끔뻑끔뻑거렸고 나는 넌 알아도 못 듣지? 하면서 툭 이마빡을 쥐여박군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그 개가 보이지 않았다.
“촌에서 청년활동이 있는데 우리 개를 사갔다. 아마 지금 쯤 잡아서 가마에 끓이고 있을 걸.”
언니가 내 눈치를 살피며 그런 말을 해주었다.
툭.
내 어깨에서 국방색의 천가방이 미끄러 떨어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더없이 비통한 마음으로 청년활동이 있다는 아래집 박철이네 마당께로 다가가 자잘한 널판자로 된 울타리 너머로 그 집 마당을 들여다보았다.
박철이네 집 마당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영이네 엄마, 부녀주임, 동춘이네 아버지도 보였다.
마당에 림시로 돌을 막아 부뚜막을 해놓고 거기에 커다란 솥을 걸어놓았는데 장작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빨간 다라에 한가득 고기덩어리가 담겨져있었다. 영이엄마가 가마뚜껑을 열자 김이 확 피여올랐다. 다리, 갈비쪽, 차마 우리 집 개라고 믿을 수 없는 그것들이 하나씩 가마 안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불에 그슬려 눈께가 시커멓게 된 대가리가 건져올려졌을 때 나는 차마 그것을 마저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강으로 달렸다.
믿을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책에서 보던 나쁜 사람들이 아니였다. 길에서 만나면 이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삶은 옥수수를 쥐여주던 사람들이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였고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였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개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불로 개의 털을 그슬리고 내장을 빼고 각을 떠버렸다는 것, 그 행위들을 심지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웃으며 행하고 있다는 것, 맛있는 한끼 식사가 누군가에겐 고통이 된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 것.
열살짜리 소녀에게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였다.
강물 속의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들여다보면서 해가 지도록 강가에 하염없이 앉아 고민했던 그 저녁, 나는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세상은 리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고 온통 모순덩어리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저녁이였다.
나이를 먹고 점차 어른이 되면서 나는 이 모든 것은 생존의 법칙이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알게 되였다. 또한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였다. 많은 걸 안다는 건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의미라는 것도 동시에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세상이 내게 보여주는 모순 속에서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던 많은 시간들, 그 시간들을 거쳐가면서 나는 늘 마음이 헛헛했다. 그 헛헛함은 달달한 음식으로도 우정으로도 사랑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내 글쓰기는 그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내 마음의 헛헛함을 위한 것, 그러므로 내 글쓰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해야겠다. 거창한 것도 아닌, 지극히 내 자신의 내면의 충일을 위한 것,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전부의 리유이다.
첫 소설을 시작해서부터 꼭 십년이 된다. 십년 동안 쭉 글을 써온 건 아니다. 소설이 밥이 되지 않는 세상을 살며 꿈과 일상 사이에서 모순에 빠지고 아파하는 수많은 선배님들과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밥을 버는 일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나를 던져왔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해 육체적으로 아픈 시간도 있었다.
그 시간을 거쳐 이제 나는 안다. 정신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웨치는 건 참으로 철없던 시간의 오기 같은 것이라는 것,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은 손가락 사이로 새여나가는 모래알보다 더 빨리 무너져버린다는 것.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는 분이 어떻게 저런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할 수가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리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아, 저렇게 추악한 사람의 내면에도 아주 작은 빛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글도 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나이가 되였다.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육체적으로 많이 피페해져있었고 따라서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던 시기였다.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어떤 것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몸만 회복되면 글 같은 건 안 써도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회복되고 일말의 여유가 생기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아, 이제 소설을 쓸 수 있겠구나였다. 아마도 나는 글을 써야 되는 사람인가 보다.
글을 쓰다 보면 정말 난 재능이 꼬물 만치도 없는가 보다 하면서 한없이 절망하는 시간이 온다. 더듬더듬 어둠 속을 짚어나가다 보면 가까스로 한편의 글을 완성하기도 한다. 그런 걸 보면 썩 문학적인 재능이 있는 건 아닌가 보다는 스스로의 평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의 소설을 완성하면 그렇게 뿌듯하고 글 쓰는 동료와의 대화보다 더 신명나는 일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나는 글쓰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시간의 발자국을 짚어올라가 내 열살 소녀의 가슴을 온통 치런치런하게 했던 그 강아지를 다시 안아본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내 강아지를 일용할 량식으로 간주했던 그 분들도 너그럽게 안아보기로 한다.
삶은 본래 그러한 것을.
모든 사물은 존재 자체가 모순인 것을.
내 글쓰기는 그 모순투성이인 삶을 향해 던지는 내 방식의 대화이다.
부디 나와 삶 사이에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할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덜 헛헛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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