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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죄
김경화
1.
“은서야 가자.”
등교시간이 다가오는데 아이는 자꾸만 길옆의 화단에 눈을 팔고 있다. 그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재촉한다. 아이는 그의 재촉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한테 다가오기는 커녕 화단 옆에 붙어서서 이름 모를 작은 꽃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꼭 다문 입술과 새초롬히 내리깐 저 눈이라니. 그는 아이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는 순간, 며느리를 떠올렸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올랐다.
“가자니까 말을 안 듣냐?”
그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만진 사람처럼 화뜰 놀라며 꽃에서 손을 뗀다. 여전히 입술을 꼭 다물고 새초롬히 내리깐 눈이 일그러지며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 되더니 화단에서 물러나 앞에서 총총 걸어간다. 에미를 닮아 성질머리 하고는.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따라간다.
학교 문앞에 이르자 아이는 뜀박질하듯 빠른 걸음으로 들어간다. 그는 아이의 뒤모습을 바라본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으로 뒤돌아보지도 않고 뛰여간다. 행여 저 멀리에서라도 뒤돌아보지 않을가 싶어 그는 아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본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는다.
인사를 꼭꼭 하라고 그리 가르쳤건만.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문다. 어차피 여기서 소리를 질러봤자 들리지도 않을 것이였다. 그는 들쑥날쑥한 마음을 애써 가지런하게 다독거리며 돌아섰다.
저도 견뎌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학교 등교시간이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꽃잎을 어루만지며 기어이 뭔가를 시위하듯 하고 싶은 게 있을 것이였다. 할아버지한테 기어이 등을 보이고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하는 인사 따위를 거부하고 싶은 뭔가가 있을 것이였다. 그는 그렇게 어린 손녀의 마음을 리해하고저 한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다 못해 홀랑 나와버려 반바지라고도 말하기 힘든 바지에 겨드랑이가 휜하게 들여다 보이는 팔이 없는 민소매를 입은 녀자애 둘이 종알거리며 지나간다. 요즘 애들은 옷도 참 민망하게 입고 다닌다. 적당히 가리고 다니면 보기에도 좋고 더 이쁘련만 왜 저렇게 홀랑홀랑 살을 쉽게 내놓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보기 흉할 정도로 구멍이 펑펑 난 바지는 대체 왜 입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옷이란 기후에 맞춰 몸을 보호하라고 입고 이쁘라고 입는 건데 구멍이 뻥뻥 뚫린 바지가 뭐가 이쁘다고 입고 다니는 건가. 며느리도 저러고 다녔었다. 아가씨도 아니고 애까지 있는 녀자가 옷차림이 너무 경박해보여 그가 몇번이나 아이 엄마 답게 정숙하게 하고 다니라고 듣기 좋게 말해주었다. 어른이 말하면 례의상 예 하고 수긍하고 잘못된 걸 고쳐나가는 게 도리건만 며느리는 그의 말에 내키지 않는다는듯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거리고는 또다시 뻥뻥 구멍 뚫린 바지를 입고 가슴골이 다 파인 적삼을 입고 돌아다녔다. 전혀 말이 먹히지 않는 애라는 걸 인정하고는 그도 포기를 했었다. 그렇게 녀자가 고집을 꺾지 않더니 결국 집안꼴이 이렇게 되여버린 것이다. 그는 도리를 젓는다.
바람이 불어온다. 이마에 스치는 바람이 차지 않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제 봄이 오긴 왔구나. 그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이 더운 날씨에 손녀한테 하필이면 긴팔을 입혔다. 손녀가 반팔을 입겠다고 아침에 고집 피우는 걸 아직은 춥다고 기어이 긴팔을 입힌 건 그였다. 더울가? 그나마 얇은 소재로 된 긴팔티라 괜찮긴 할 것 같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인다. 티를 입고 우에 교복을 입혀놔서 더우면 교복을 벗긴 하겠지만 그래도 날씨를 보아하니 점심나절부터 오후 한두시까지 땡볕이 내리쬐면 더울 것 같다. 그냥 반팔을 입게 내버려둘 걸 그랬다 싶은 게 슬그머니 후회스럽다. 그래도 추운 것보다 더운 게 낫겠지 하고 자아위안을 해본다.
오늘은 참 날씨가 화창하다. 하늘도 파랗게 개여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멀지 않은 산자락에 나들이를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은 날씨이다. 그 생각을 하자 조각조각 깨여진 나루배처럼 다시 회복될 여지가 없이 깨여진 자신의 가족이 떠올라 그는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아들놈은 그 안에서 밥이나 제대로 먹고 있을가. 부연 죄수복을 입고 입술이 초들초들하게 말라있던 아들을 떠올린다. 초점을 잃은 퀭한 눈은 꼭 혼이 빠진 놈이였지. 하긴 안해를 제 손으로 죽이고 딸은 이 먼곳에 두고 저도 제정신이 아닐 테지. 화김에 저지른 살인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저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 죄값을 받아야지.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한다. 사람을 죽이고 제대로 밥을 먹고 잠을 자면 그게 사람일가. 더구나 아이를 낳고 함께 살을 비비고 살던 안해를 죽였으니 그 놈도 그 안에서 죽지 못해 살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모진 놈, 편지라도 한통 보내오지. 부모와 자식한테 어떻게 있는다는 소식이라도 좀 전해오면 좋으련만 감옥에 들어간 지 3년이 되도록 아들은 그가 간간히 보내는 편지와 손녀의 사진을 받아보았을 텐데 답장 한번 없다.
후… 한숨이 나간다.
그는 자신의 안해를 생각한다. 안해가 집안에 갇혀버린 지가 이제 반년이 거의 된다. 안해를 가둔 건 안해 자신이다. 그리고 그걸 방관한 건 다름아닌 그였다. 생각 같으면 오늘처럼 날씨 좋은 날, 안해를 데리고 어디 가까운 곳에라도 나들이를 다녀오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안해는 동물원의 관상용 동물처럼 기꺼이 집안에 갇혀 얌전히 웅크리고 구세주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안해인들 바깥바람을 쏘이고 싶지 않겠는가. 하루하루 얼굴이 허옇게 뜨고 표정에 그늘이 짙어가는 안해를 바라보는 그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먹고 사는 일이 먼저니까. 밥 한그릇이 절박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른다. 모든 것에 앞서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안해도 그도 그걸 너무 잘 알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못할 일은 없다. 그와 안해만이라면 이 모진 고통을 안으로 삭히며 짜면 고름이 흐를 것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언녕 함께 죽었을 것이였다. 그러면 이 고통스러운 삶이 끝날 것이니까. 아무 것도 모르면 편안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도 안해도 아직은 죽을 수가 없다. 손녀가 커서 자립할 때까지 그들은 죽음도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남의 귀한 딸을 죽인 살인범을 아들로 둔 처지에서 미안하고 렴치없지만 그는 아들이 감옥에서 풀려나오기를 기다린다. 아들은 우발적인 살인이고 음주로 인해 심신이 미약한 상태였다는 것이 참작되여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3년이 지나갔으니 이제 12년이 남았다.
잘 버텨내야 할 텐데, 단 얼마간이라도 사람답게 살아보고 그 놈도 죽어야 하는데, 이쁜 딸하고 시간도 보내보고 죽어야 하는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흠칫하고 놀란다. 자기 자신이 너무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안해가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집안에 갇혀버린 건 지난 가을에 량주가 페품 주으러 다니다가 만난 어떤 아주머니의 말 한마디에서였다.
“아니, 할머니는 다리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자식도 없슴두? 이렇게 페품 주으러 다니시는 걸 보니 참 안됐네요.”
그러면서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하더니 이제 애들이 다 커서 필요 없게 됐다면서 교과서며 참고서 따위를 무더기로 내놓는 것이였다. 돈을 주려고 해도 기어이 싫다고 하며 가지고 가라고 손사래를 치는 착한 아줌마였다. 랭장고에서 음료수까지 꺼내서 주며 아줌마는 그들 량주한테 친절을 베풀었다. 어떻게 되여 두 로인네가 성치도 않은 몸으로 이렇게 돌아다니냐는 말에 안해는 빙그레 웃었다. 언제나 안해는 그렇게 말 한마디도 아끼는 사람이였다.
“아들도 며느리도 죽고 없수. 우리 량주가 손녀를 키우는데 이거라도 해야 먹고 살지.”
그는 그렇게 내뱉었다. 자기가 내뱉고는 웬지 울컥 설음이 북받쳤다.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데 그들 량주가 돌아서는 등뒤로 그 아줌마가 던지는 말이 있었다.
“페품 주어서 돈이 얼마나 되겠슴둥? 차라리 가두에 가서 말해봅소. 최저생활보장금이 두분 것도 나오고 손녀 것도 나올게꾸마. 그래구 요새는 어려운 분들 도와주는 사회단체도 많스꾸마. 하긴 두분 다 아직 운신할 만하니까 조건이 안될지는 모르겠스꾸마. 한분이 운신을 못한다거나 하면 그건 또 사정이 다르니 도와주는 데가 많겠지만은.”
뒤통수를 확 때리는듯한 말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태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서 살 생각만 했지 남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해보지 못하고 살던 그였다.
“여보, 나 그냥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들어앉아있을가 봄다. 내가 나가봤자 제대로 걷지도 못해 당신한테 별로 보탬도 안되구… 저번에 그 아줌마 말처럼 차라리 남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낫지 않을가 싶슴다.”
그 날 저녁 안해가 다리를 주무르며 하는 말이였다. 안해의 두 다리는 금방 쪄낸 순대처럼 팽팽하게 부어있었다.
“당신 다리 아파서 쉬라고 했잖소. 기어이 따라다니더만.”
그는 안해를 나무랐다.
안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날 이후, 안해는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가 혼자 나다니자 아빠트 주민들이 할머니는 아프시냐고 물었다.
“할머니 이제 걷지를 못해유. 화장실 출입도 못하는 걸유.”
처음이 어려웠으나 몇번 그렇게 말해보니 그 자신도 가끔 안해가 이제 바깥출입을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가두에 찾아가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떼오라고 했다.
“아예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힘들게라도 걸을 수는 있을 텐데…”
의사가 안해의 다리를 잡고 무릎을 굽혔다 펴게 해보고 여기저기 꾹꾹 눌러보더니 머리를 살래살래 저었다.
“전혀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 걸요. 억지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면 숨이 넘어갈 것 같아요. 아퍼서…”
안해는 낮으나 힘든 투가 력력하게 말했다.
그는 침을 삼켰다.
의사는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속이 조마조마했지만 다리가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안해의 태연한 반응과 두다리를 찍은 엑스레이 사진에 선명하게 나타난 무릎관절에 자라난 군살을 보며 젊은 의사는 체념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안해는 천연덕스럽게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은 상태에서 손으로 다리를 잡고 하나씩 옮겨놓았다. 다리가 옮겨질 때 안해는 웃이로 아래입술을 지긋이 누르고 이마살을 찌프렸다. 누가 봐도 고통스럽고 힘겨운 기색이 확연해보일 만한 표정이였다. 그도 놀랐다. 안해에게 저런 구석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의외였다. 눈물이 나오려고 해 그도 안해처럼 웃이발로 아래입술을 눌렀다.
그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안해를 업고 병원을 나왔다.
병원 진단서를 가두에 가져가자 최저생활보장금이 내려왔다. 달마다 나오는 돈이 생기자 숨이 나왔다. 다리를 쓰지 못하는 할머니와 어린 손녀를 몸이 성치 않은 칠순의 할아버지가 돌보면서 살아간다는 사연은 련민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가두를 통해 사연을 접하고 아빠트 주민들이 이것저것 먹을 것을 들고 왔고 낯선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오고 가정방문을 왔다. 돈도 가져오고 물건도 가져왔다. 량주가 페품을 줏기보다는 퍽 나았다.
그런데 집에서 쉬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았던 안해의 다리는 다리를 끌면서 페품을 주으러 다닐 때보다 증세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벽을 짚고 안깐힘을 써서야 겨우 일어난다. 한발한발 앞으로 다리를 옮겨놓는 안해의 표정은 병원에서 의사를 상대로 지었던 고통스러운 표정과 똑같았다.
그 표정을 떠올리자 가슴이 뾰족한 칼로 찌르는듯 아파난다. 그는 침을 삼킨다. 후둑후둑 심장이 가파르게 뛰면서 호흡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쉬였다가 후 하고 내뱉는다. 안해가 집에 갇히고 이런저런 후원을 받으면서부터 이렇게 가끔 가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고르지 못한 증세가 생겼다. 몸에 무슨 병이 생긴 건지 아니면 마음이 불편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스적스적 걷는다.
올해 봄은 유난스러웠다. 겨울이 지나고 이제 봄이 오는가 싶었는데 반팔을 입고도 땀이 날 정도의 초여름 날씨가 련며칠 지속되였었다. 훌쩍 봄을 건너뛰는 건가 했더니 또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졌었다. 들쑥날쑥한 그의 마음처럼 하늘도 견디기 힘든 게 있어 이토록 몸부림을 치는구나 할 무렵, 몸부림 끝에 비로소 평정을 찾은듯 이렇게 제대로 된 봄이 찾아온 것이다.
화단 곁을 지나다가 그는 우뚝 멈춰섰다. 화단 중앙께는 키 큰 꽃들이, 가장자리에는 키가 작고 꽃송이가 자잘한 꽃들이 이쁘게도 피여있다. 꽃모종을 떠다가 줄을 세워 옮겨놓은듯하다. 아침 일찍 물을 뿌려놓은듯 자잘한 물방울이 아직 꽃이파리에 남아있다. 그는 한참 서서 꽃들을 바라본다. 맨드라미, 국화 그리고 저 작은 꽃은 이름이 뭐더라. 애써 이름을 떠올려보지만 기억은 쉽게 소환되지 않는다. 이토록 이쁜 꽃인데 어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질 열살짜리 녀자애라면 이런 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였다. 마음이 아릿하다. 지각할 정도는 아니였는데도 왜 그토록 아이한테 역정을 내며 소리를 질렀던 것일가. 좀 참고 기다려줄 걸 그랬다. 그는 자책하며 손으로 꽃이파리를 만져본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느껴진다. 쉽게 마음을 풀지 못하는 성격인 손녀는 분명 오늘 하루종일 기분이 잡쳐있을 것이였다.
안 그래도 엄마 아버지의 사랑이 뭔지를 모르고 자라 마음이 허전할 아이를 왜 나까지 들쑤셨을가. 여리디 여린 어린 것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는 손녀를 어루쓸고 보듬기보다는 이렇게 역정을 내고 소리를 지르는 일이 더 많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수한 장국냄새가 코를 찌른다. 안해가 식탁을 짚고 서있다가 그가 들어서자 애써 입꼬리를 우쪽으로 끌어당겨보인다. 안해는 언제부터인가 그를 마주하면 저렇게 억지로라도 웃어보려고 애를 쓴다. 그게 우는 것보다 더 상대의 마음을 후벼놓는다는 걸 안해는 몰라서 저럴 것이다. 저렇게라도 웃어보이며 살려고 모지름을 쓰는 게다. 살자고, 살아야 한다고 자신한테 말하고 그한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안해한테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장국과 김치를 놓고 량주는 조용히 밥을 먹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도 하고 밥도 폭폭 야무지게 떠먹고 학교에 갔으면 좋으련만 손녀는 아침에 두번 세번 깨워서야 겨우 일어난다. 아침을 차려놓아도 먹지를 않아 이제는 아예 빵과 우유를 먹여 보내고 아침은 량주만 먹는다.
아침밥상은 늘 그렇듯이 부실하기 짝이 없다. 그도 안해도 두 사람이 먹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손녀가 밥상에 마주앉는 저녁이라야 고기반찬도 가끔 하고 갈치나 고등어도 구워올린다. 다 늙은 두 로인네가 좋은 걸 먹어 뭐 하겠는가. 배만 부르면 되는 것이다.
밥을 먹는 동안, 안해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그는 장국을 한숟가락 푹 떠서 입에 넣어본다. 잘 익은 감자가 입안에서 으깨여지고 진한 된장향이 입안에서 감돌다가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아침에 손녀한테 소리를 지른 것 때문에 치런치런했던 그의 마음이 안해가 끓인 장국 한숟가락이 들어가자 비로소 차차 자리를 잡아가는듯 가지런해진다. 평생을 먹어온 장국인데도 맛있다. 어데 가서 장국을 먹어도 안해가 해주는 이 맛은 흉내낼 수 없다. 그는 묵묵히 밥 한공기를 다 비우고 일어선다. 안해가 힘겹게 다리를 손으로 짚으며 일어나 빈 그릇을 싱크대로 가져간다. 그는 위태로운 안해의 몸짓을 슬쩍 쳐다보고는 그대로 식탁에서 물러난다. 안해를 도와줄 법도 하지만 그는 안해가 혼자서 저 정도는 하게 내버려둔다. 그래야 안해도 덜 그에게 미안해하고 들쑥날쑥한 마음도 달래고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낀다는 걸 그는 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바닥에 펴놓은 자리 옆에 앉아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대 꺼내 입에 물고 라이타로 불을 붙인다. 깊숙이 한모금 빨아들이자 익숙한 향기가 페속까지 스며든다. 손녀 앞에서 그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어린 것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그다. 이렇게 방바닥에 편안히 앉아 담배 한대를 피우는 건 마누라하고 단둘이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이다.
담배 한대를 다 태우고 그는 일어선다.
오늘은 산에 가기로 했다.
“일요일에 무슨 애심협회 사람들이 방문 온다고 전화 왔습데. 저번에 가두에 그 아즈마이 제보를 했나 봅데. 해주겠다고 하더니만. 후원학생으로 선정되면 고중 졸업할 때까지 달마다 오백원씩 준다는구만.”
그는 신발을 신고 일어서며 그렇게 무심한듯 말한다.
안해가 엉금엉금 기여다니며 장판을 닦다 말고 그를 바라보며 끄덕끄덕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겠다는 뜻이다.
굳이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안해는 이제 얌전히 두다리를 뻗고 저 자리에 누워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가며 화장실도 스스로 갈 수 없는 중환자가 되여있을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극본이 없이도 그와 안해는 호흡이 척척 맞는 환상의 연기를 펼쳐갈 수 있을 것이다.
안해도 그도 알고 있다.
이 삶을 기어이 살아내야 한다는 걸. 어떤 식으로든.
2.
그는 부모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가 세상에서 태여나기 전 그의 아버지는 큰비가 련 며칠 내려 마을 앞강물이 다리를 넘도록 불어나고 밭뙈기가 물에 잠기던 어느 여름, 물에 떠내려가는 돼지를 건지려고 시누런 흙탕물 속에 뛰여들었다가 그만 그대로 물살에 휘말려 내려갔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여나서 얼마 안되여 그를 포대기에 꽁꽁 싸서 할머니네 집 앞에 가져다 놓고 마을 뒤산의 커다란 느릅나무에 목을 매달고 목숨을 끊었다. 녀자가 한번 시집을 가면 그 집 귀신이 되여야 한다는 관념이 뿌리 깊었던 그 년대에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막막했을 터였다.
“할머니, 난 왜 엄마가 없고 아버지도 없슴가? 다른 애들은 다 엄마 아버지하고 사는데 왜 나는 할머니하고 삼가?”
어린 그가 그렇게 물으면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머리를 쓸어주며 혀를 끌끌 찼다.
“이 불쌍한 것을 어쩌노.”
할머니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만져주었다. 그럴 때면 머리며 얼굴이 옥수수잎으로 문지르듯 꺼끌꺼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그 손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다는 알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나고 눈물이 솟구치려고 했다. 다른 아이들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은 애초부터 가지지 못하고 있구나. 나는 다른 애들과 뭔가 다르구나 하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그의 어린 마음을 고양이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가 내버린 실뭉치처럼 헝클어버리군 했다.
어린 나이에 견뎌야 했던 아픔은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래 남자애들과의 싸움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그가 특별히 덩치가 크다거나 싸움기술이 좋아서는 아니였다. 그에게는 그 아이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 있었다. 마음속의 단단함으로부터 솟아나는 배짱과 지면 안된다는 오기였다.
그가 앞집 용식이를 끝내 쓰러눕히고 항복을 받아낸 날이였다. 또래 중에서 서열 2등이였던 용식이와의 싸움은 특별히 의미가 컸다. 그 싸움으로 인해 그는 또래에서 대장인 자기보다 두살 더 먹은 영수 바로 밑이 될 수 있었다. 승리의 희열은 입가에 흐르는 피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게 해서 그는 슥 입을 문질렀고 손에 묻은 피를 그대로 방치한 채 터덜터덜 걸었다. 용식의 주먹과 발길질에 맞은 배와 허벅지의 아픔이 얼얼하게 느껴질 때는 오히려 그것이 승리의 훈장이라도 된듯 달콤하기까지 했다. 찢어진 바지가랭이가 바람에 너풀거렸다. 꼭 승리를 경축하는 기발 같았다.
그러나 그 승리의 달콤함을 그는 오래 느껴볼 수 없었다.
“아이구, 이것아, 어쩌려고 이런다냐. 너 같은 건 구뎅이에 빠져도 건져줄 사람도 없다는 걸 왜 모르냐.”
할머니는 그의 그 대단한 승리에 대해 전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나 이제 용식이 다음이 됐단 말임다. 싸움에서 지면 애들이 나를 얕잡아본단 말임다. 그래서…”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오히려 호되게 그의 어깨를 때렸다.
그는 억울해서 할머니한테 대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할머니한테 돌린 순간,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올랐던 흥분된 마음이 누가 바늘로 콕 하고 풍선을 찔러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서히 김이 빠지더니 스르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였다.
그날 밤, 할머니는 등잔불 밑에서 그의 바지를 한뜸한뜸 기웠다. 그는 옆에서 바늘에 실을 꿰여 할머니한테 드리고 공손하게 두손을 앞으로 모으고 앉아 할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김치독에 돌을 얹어 김치를 누르듯 할머니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천천히 바늘을 놀려가며 바지를 기워나가는 할머니 입가에 밖으로 스며나오지 않게 하려고 안으로 삭히는 한숨이 걸리는 걸 그는 보았다.
그 날 밤, 그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서렬 2위가 되기 위해 주먹을 갈고 닦았던 시간이 허무하고 어이없게 생각되였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며 무엇보다 할머니가 속상해하실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그는 다른 아이가 되였다.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할머니의 일손을 도왔다. 밭머리를 다니며 능쟁이와 비듬을 한주머니씩 캐왔다. 할머니는 이발이 다 빠져 이몸만 남은 입안이 들여다보이도록 웃었다. 그가 캐온 능쟁이와 비듬을 커다란 고무다라에 놓고 씻은 다음 옥수수겨를 넣고 커다란 가마에 끓여서 돼지죽을 쑤었다.
그의 마음을 알리 없는 아이들이 대결을 신청해왔다.
싸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에 그는 상대방이 이기고도 화를 낼 정도로 허망하게 져주었다. 허망했지만 대결은 대결이였다. 그것은 이긴 사람과 진 사람으로만 구분되였고 곧 서렬로 이어졌다. 그는 주먹으로 앞자리 다섯 안에도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이들과의 서렬다툼 정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할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세투리를 뜯어다가 통나무를 짤라 만든 칼판에 놓고 무딘 칼로 쪼아 옥수수겨에 버무려 닭모이를 만들어 닭을 먹이고 여기저기 닭알을 주어들이고 밭일도 도왔다. 그가 풀을 뽑고 량쪽 밭고랑을 날이 잘 선 호미로 썩썩 후벼 곡식 주변에 흙을 모아놓으며 기음을 매나가면 할머니는 엉금엉금 뒤에서 그를 따라나오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구야. 니가 할미보다 백배는 낫구나. 할미는 이제 다 늙었다.”
그는 때이르게 철이 들었고 까불고 잘 웃던 아이로부터 과묵한 아이가 되여버렸다.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딱지치기를 하고 쇠구슬을 치는 걸 보면 같이 뛰놀고 싶기도 했지만 그는 참았다. 그는 점차 아이들과 멀어져갔다.
그는 외로워졌지만 할머니는 기뻐했다. 동네방네에 다니면서 손주자랑을 했다. 할머니의 얼굴에 피여나는 웃음은 그로 하여금 친구들과 뛰여놀고 싶은 마음과 담배도 피워보고 술도 마셔보고 싶은 마음의 반란을 누를 수 있게 했다. 이제 그는 그가 원하는 것 따위는 멀리 던져버렸고 대신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커갔다. 그 할머니가 자신의 전부이듯이 자신 또한 할머니에게 세상의 전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고 할머니를 속상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언제부터인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학교에 큰아버지와 먼 친척들이 찾아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집에 가자.”
“네? 할머니가? 그럴 리 없어요.”
그는 혹시 잘못 들었겠지 싶어 다시 물었다.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할머니가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어제까지 내 손을 잡아주고 이름을 불러주던 할머니가 어떻게 말을 멈추고 숨 쉬기를 멈출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상복을 입고 할머니의 상여를 따라 걸었다. 커다란 구뎅이에 할머니가 누워있는 나무관이 들어가고 큰아버지가 먼저 흙을 한삽 떠서 관을 덮었다. 이어 마을 어른들이 삽으로 흙을 퍼서 관을 덮기 시작했다. 관이 흙으로 덮이고 이어 봉긋한 무덤이 만들어질 때까지 그는 그저 멀거니 서서 그 과정을 지켜만 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훌쩍 웃자란 쑥이며 자주색 꽃봉오리가 지기 시작한 익모초들이 고개를 흔들며 술렁거렸다. 분명 여름인데도 그는 추웠다. 두손을 올려 한기가 오스스 올라와 떨려나는 량쪽 팔을 붙잡고 그는 나는 이제 어떻게 되나 하고 생각했다. 큰아버지가 다가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호상이라고 했다. 그 때 년세로 팔순을 넘기셨고 자리보존을 하지 않고 복하게 돌아갔다고 했다. 할머니를 산에 묻고 와서 사람들은 기장쌀로 친 떡을 먹었고 아이들은 할머니 제사상에 올려놓았던 밀가루로 만든 손바닥 만큼 큰 과자를 나누어 먹었다.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그의 사촌형제들과 동네 아이들은 잔치라도 열린듯 즐거워하며 평소에 손에 쥐여볼 수 없는 과자를 뜯어먹고 개눈깔사탕을 씹는 소리가 옆에서도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먹을 수 없었다. 혼자 강가로 나와 강물을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었다. 밤중에 큰아버지가 찾아나와 어깨에 두손을 얹었다.
“걱정 말어. 이제 큰아버지 집에서 사는 거다. 큰아버지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할머니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다. 저세상에서도 널 내려다보고 있을 게다. 그러니 너무 상심해하지 말거라.”
큰아버지가 큼직한 손으로 힘차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쿵쿵 큰아버지의 손바닥이 그의 어깨에 닿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그제야 참았던 울음을 엉엉 크게 소리내여 터뜨렸다.
커다랗고 둥근 달이 하늘에 둥실 떠있던 밤이였다. 그는 눈물로 부옇게 흐린 눈으로 달을 올려다 보았다. 할머니가 달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얼굴이 온통 주름으로 자글자글했다.
그 이후로 그는 아무리 해도 그 날 밤처럼 환한 달을 볼 수 없었다.
“고모네 집에서 자랐슴다.”
“아, 나는 큰아버지네 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는 할머니하고 살았구.”
“예, 그렇다고 들었슴다.”
녀자가 수줍게 웃었다.
“냐. 아버지는 내가 태여나기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나를 낳고 얼마 안돼서 돌아가셨소. 난 부모 얼굴을 보지 못했소.”
“나두. 어쩜 이렇게 처지가 똑같슴까.”
“그러게 말이요.”
그는 녀자를 흘긋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녀자는 수줍은듯 손을 뻗어 키 낮은 풀을 어루쓸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날 밤은 별들도 금방 세수를 하고 나온듯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녀자가 앉은 바닥이 차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웃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 녀자보고 앉으라고 했다. 녀자는 아니아니 하고 사양하다가 못이기는 척 살포시 앉았다. 썰물이 밀려오듯 따듯한 것이 그의 가슴으로 밀고들어와 기분이 좋아지게 했다.
“어느 해 봄이였슴다. 학교에서 봄이면 산으로 들놀이를 가잖슴가. 5월인가? 5월이 맞을 겜다. 고모는 며칠 전에 시내에 가서 우리가 들놀이 갈 때 갖고 갈 간식거리들을 미리 사다가 창고 안 쌀뒤주에 넣어놓았는데 그걸 어떻게 사촌동생이 발견하고 꺼내 먹었던 겜다. 들놀이 가기 전날 저녁에 창고로 들어갔다가 반 이상 먹어버린 간식을 보고 고모가 란리 난 겜다. 고모부가 우리 셋을 불러놓고 누가 한 짓인가를 조사했슴다. 우린 셋 다 고개를 저었슴다. 그런 일 없다고. 그 때 서로 옆사람을 곁눈질해보았던 것 같슴다. 사촌동생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누구보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 걸 보면서 아 죄인이 얘구나 생각했슴다. 고모부가 소리질렀슴다. 셋 다 아니면 쥐가 물어갔니? 강아지가 물어갔니?”
“큰일났군. 그래서?”
“제대로 말 안하면 셋 다 오늘 밤 내쫓을 거라고 했슴다. 그런데 사촌동생이 겁이 났는지 덜컥 언니가 먹어버렸다고 하는 겜다. 고모부는 멈칫했슴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며 정말이니? 하고 묻는데 그 낮지막하고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가 왜 그리 심장 떨리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는 겜다. 잠간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데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야 될 것 같았슴다. 고개를 끄덕이고 고모부 잘못했슴다.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겜다. 그만 소리내면서 울어버렸슴다.”
‘겜다’를 버릇처럼 뒤에 달아가면서 녀자는 그렇게 말했다. 지난 일을 떠올리는 것인데도 녀자는 감정이 격해져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그는 알 것 같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남의 집에 얹혀사는 자의 빚진듯한 마음이랄가. 그리고 항상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기회가 올 때마다 수렁인 줄 알면서도 주저없이 발을 들이미는 심리가 무엇인지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임다.”
녀자는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른듯 말을 이었다.
“놀라운 건 고모부의 반응이였슴다. 방금 전까지 눈을 부릅뜨고 죄인을 찾고야 말겠다는듯 비장한 표정이던 고모부가 스르르 굳어진 얼굴을 펴는 겜다. 그러더니 그래, 알겠다, 하고 일어서더니 아무 일 없다는듯 고모한테 지금 합작사에 다녀오라고 하는 것이였슴다. 고모는 예 하면서 고모부를 바라보면서 웃었슴다. 그 때 그 고모의 표정, 그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표정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슴다. 민망하게 쉽게 울음이 그쳐지지 않아 흐느끼면서 그걸 바라보는데 그냥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습데다. 아무튼 사건은 그렇게 끝나버리고 사촌동생은 살아났다는듯 후 하고 숨을 내쉬고 사촌오빠는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서더라구요. 지난 일이지만 그 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모르겠슴다. 그런 기분 아마 부모 있는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겜다.”
그는 손을 뻗쳐 녀자의 손을 잡았다. 녀자의 작은 손은 그의 손안에서 두어번 꼼지락거리다가 가만히 있었다.
손으로 전해오는 녀자의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그는 가슴이 먹먹해났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했다. 이상하게 할머니가 갑자기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아무 것도 없이 시작했으나 둘 다 생활력이 강했기에 그와 안해는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서로가 아픔을 알았고 가정을 사무치게 그렸던 터라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살았다. 아들을 낳았다.
그는 아이를 엄하게 키웠다. 아들애는 그의 바람 대로 공부도 어지간히 하고 말썽도 피우지 않고 잘 커갔다. 그도 안해도 아이를 여럿 낳아 키우고 싶었지만 웬 일인지 아들애를 낳고 나서 안해는 더는 임신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도 해보고 인공적으로 임신도 한다지만 그 때는 그저 안 생기면 못 낳는 법이려니 하던 시절이였다.
그와 안해는 모든 희망을 하나 뿐인 아들에게 걸었다. 합작사에 천이 오면 안해는 천을 끊어다가 밤도와 야무진 손재간으로 아들애의 옷을 지어입혔다. 닭이 알을 낳고 일어나기 바쁘게 안해는 주어들여다가 콩기름을 넣고 노랗게 볶아서 아들애한테 먹였다. 그는 아침 일찍 소에게 풀 뜯어먹게하려 나갔다가 들판에 말뚝을 박아놓고 돌아오면서도 딸기며 머루며 개암이며를 따다가 잠든 아들애의 베개머리에 놓아주었다.
호도거리를 하자 그는 안해와 함께 남들이 내버리는 밭을 당겨서 해바라기를 심어 시내 해바라기 장사군한테 넘겨 돈을 만들었다. 닭도 키우고 돼지도 키우고 소도 정성을 다 해 키웠다. 살림은 나날이 윤택해져갔다. 그는 아들애를 공부시켜서 그와는 다른 삶을 살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도시에 나가고 그처럼 밭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 그림 그리고 싶슴다.”
“뭐?”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화가 났다. 앞길이 묘연한 그림을 그리겠다니, 공부를 해서 미래가 보장되게 살라는 부모 마음을 이리도 모르다니, 그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리유를 묻지 않고 아들애의 멱살을 잡고 귀뺨을 쳤다. 아들애가 코피를 쏟으며 푹 무릎을 꺾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쓰러진 아들애를 걷어차며 소리질렀다.
“이눔 자식아. 넌 대학에 가야 해. 아버지 엄마는 공부하고 싶어도 환경이 안돼서 못했어. 친부모 밑에서 자라는 게 얼마나 복한 겐지 니는 알고 있냐. 이눔아. 넌 공부도 하고 출세해서 좋은 녀자 만나 애도 여럿 낳고 잘살아야 한단 말이다. 이 망할 눔아.”
안해가 아들애를 그러안았다. 그는 더는 아들을 때리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여보, 사실은 쟈가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슴다. 당신 쟈 그림 그린 거 한번도 못 봤잼가?”
그 날 밤, 안해가 그에게 아들애가 그린 그림이라며 그림 몇장을 내밀었다. 이상한 그림이였다. 나무나 강이나 강아지나 고양이를 똑바로 그렸다면 모르겠지만 무슨 해골 같은 모양을 그린 것도 있고 산도깨비 같은 모양에 험상궂은 표정을 한 괴물을 그린 것도 있었다. 크레용으로 꼼꼼히 칠한 그 그림은 그림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가 봐도 뭔가 예술작품이긴 한 것 같은데 어쩐지 분위기가 침침했다. 그는 화가 버럭 났다.
“무슨 이따위 걸 그리느라고 아까운 도화지를. 당신도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구… 말리지는 못할망정 뭘 철없는 애 편에 서서 붙는 불에 키질 하려구 그래오? 무조건 공부를 해야지.”
“이게 무슨 예술그림이라는데 우리는 알아보지 못하지만 뭐라고 하던데 .”
“그만하래두.”
안해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듯 입을 열었다가 멈칫하더니 다시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번의 귀뺨으로 아들애는 철이 들었는지 더는 이상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깊은 생각에 잠긴듯이 가만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들애의 노르스름한 손끝을 보고는 단단히 혼을 낼가 하다가 저도 무엇으로라도 마음을 풀고 싶을테지 하고 리해하기로 하고 그만두었다.
한동안 지나자 아들애는 안정되는듯했다. 여전히 말은 별로 없었지만 공부를 수걱수걱 했다. 성적은 뛰여나지 않아도 중간 이상은 되였다. 마을 아이들이 하나 둘 공부를 그만두고 돌아왔다. 아들애는 공부를 이어나갔고 고중에 붙었다. 마을에서 몇 안되는 고중생이 된 것이였다. 고중에 가서도 아들애는 여전히 썩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의 바람 대로 대학에 붙었다.
그는 이제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3
그는 오토바이를 길가에 세워놓고 산에 오른다.
그닥 가파르지 않은 언덕임에도 벌써 허리가 시큰거리고 숨이 차올라 중간에 한번 쉰다. 한달음에 달려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던 곳인데 산 중간께도 못 와 숨이 가빠지며 헉헉 소리가 난다. 허리가 지끈거린다. 허리를 쭉 펴보는데 저절로 아구 하고 신음소리가 나간다. 허리를 굽히고 한참만 걸으면 이렇게 통증이 일어난다. 휴…
내가 벌써 나이를 이렇게 먹고 몸이 이렇게 망가졌나 싶은 게 서글프다.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본다.
앞만 보고 달리기를 하듯 살아온 세월이였다. 옆도 뒤도 돌아볼 새 없이 살았었다. 돌아봐서도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살아본다면, 다시 살 수 있다면 옆도 살피고 뒤도 돌아보면서 살고 싶어진다. 다시 아들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던 그 때로 돌아간다면 그 이상한 그림이 아무리 해괴하고 어둡더라도 그래 네가 해보고 싶은 걸 해봐라 하고 내버려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때, 그 그림을 그렸더라면 살인범이 되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저릿저릿해난다.
그는 복잡하게 밀려오는 생각들을 떨쳐내고저 머리를 흔든다. 이미 식탁에 엎질러진 물잔처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자꾸 생각해서 뭣 하겠는가. 머리만 아파날 뿐이다. 긁어 부스럼을 내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그는 스적스적 산중턱을 가로질러 나무들이 울창한 사이로 들어간다.
갓 봄이 시작되던 4월에 와서 참도스깨를 뜯어가고 한동안 안 왔는데 그새 풀들이 발목을 넘게 자라있다. 고개를 숙이고 풀들을 헤가르며 나아가다가 그는 얕게 탄성을 지른다. 자연은 성실하다. 때를 어기지 않고 기름고비가 무더기로 자라있다. 막 자라난 거라 손을 대니 실도 일어나지 않고 똑똑 잘도 꺾인다. 저녁에 데쳐서 볶아주면 손녀가 맛있게 먹을 것이다. 고사리가 나물 중에 제일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제철에 난 기름고비가 고사리 이상으로 맛있는 나물이다. 고사리가 독성 때문에 데쳐서 많이 우려내야 하는 거라면 기름고비는 데쳐서 여러벌 씻어 다리에 부스스한 털만 떼서 그대로 볶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그는 이 동네에서 이 산을 뛰여다니며 자랐다. 이 산은 그에게 눈을 감으면 어느 곳에 어떤 바위가 있고 어느 곳에 개암이 나고 어느 곳에 머루가 나고 어느 곳에 산딸기가 무더기로 나고 어느 곳에 어떤 나물이 나는지 환하게 떠오를 만큼 익숙한 곳이다. 그는 물이 오른 나무가지를 눕혀가며 산을 누벼나간다. 두벌두릅이 파랗게 돋아나있다. 그는 두릅을 하나하나 따면서 요건 아무래도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터이니 아빠트단지 아래에서 팔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굳이 시장까지 가지 않아도 그가 손수 따서 가져가는 산나물은 자리를 펴고 내놓기 바쁘게 아빠트 주민들이 앞다투어 가져갈 정도로 인기있었다. 우정금과 삽주도 보여 그는 몇개 손 가는 대로 따서 넣는다. 안해가 좋아하는 나물이다. 안해는 우정금과 삽주를 데쳐 기름에 볶다가 물을 붓고 육수를 만들어 옥수수온면을 만들 것이다. 안해가 나물을 고명으로 해서 만든 온면은 별미이다.
허리를 오래 굽히고 있었나 보다. 시큰거린다. 그는 일어서서 허리를 편다.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온다.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다. 이 시간에 안해는 무엇을 할가. 아픈 다리로 엉금엉금 기여다니면서 집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겠지. 집에만 갇혀있는 일이 답답하기도 하련만 안해는 그런 내색조차 없다. 안으로 모든 걸 꾹꾹 눌러 담으며 안해는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저렇게 눌러 담다가 더 이상 누르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어떡할가.
그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될수록 잡념을 덜고 단순하게 그날그날 살고저 그는 노력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더러 쓰나미처럼 잡념이 몰려오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그는 산속 깊이 들어가 소리를 지르고 미친듯이 땅이라도 파헤치고 광기를 부려보고 싶다. 그는 그런 순간이 오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고 애써 자신을 진정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을 꾹꾹 누르는 일 밖에 없다는 걸 그는 안다.
오늘은 수확이 꽤 좋다. 쌀포대 밑굽을 톡톡히 차지한 나물은 어림잡아도 무게가 5키로 이상은 나갈듯하다.
“은서야.”
아직 아침의 앙금이 남아있는지 그가 소리쳐 부르자 아이는 쭈볏거리다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손안에서 꼬물거린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걸어서 십분 가량이다. 낡은 오토바이가 있지만 그는 늘 이렇게 걸어서 아이를 학교에 데려가고 마중해서 데려온다. 이제 다 큰 애를 뭐 하러 데려가고 데려오냐고 혼자 학교 다니게 하라고 주변에서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아이를 혼자 다니게 할 수 없다. 자신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도 이 아이를 건드릴 수 없게 보호해줄 것이다. 허리가 아파도 몸이 말째여도 그는 하루도 아이를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빼먹은 적이 없다.
어린 시절 그가 할머니에게 가졌던 그 감정을 그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손녀가 지금 그에게 가지는 감정도 그러할 것이다. 아마 그래서 그는 더더욱 손녀한테 각별한지도 모르겠다.
“은서야, 날도 더운데 아이스크림 먹겠니?”
아이스크림가게 앞을 지나는데 아이가 자꾸만 멈칫거리길래 물어본다. 분명 먹고 싶어 입술을 감빨면서도 아이는 선뜻이 먹겠다고 하지 않는다. 이제 열살짜리 아이는 너무 일찍 자기 처지를 알고 가난을 알아버린 걸가. 종래로 뭘 사달라고 하지 않는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한족아주머니가 깔대기 모양의 과자를 손에 쥐고 기계버튼을 아래로 누른다. 아주머니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하얀 색과 분홍 색이 무늬처럼 섞인 아이스크림이 깔대기 모양의 과자에 라선형 모양으로 담겨진다. 그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건네준다. 아이는 덥석 받아든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저리도 손놀림이 급할가 싶다.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아이는 먹기가 아까운지 혀를 내밀어 아이스크림을 아래로부터 핥는다.
“그냥 뚝뚝 끊어서 떼먹어. 그렇게 핥지 말구.”
그래도 아이는 여전히 혀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걷는다.
“너 그러다가 또 다 녹아서 아이스크림이 땅에 떨어진다 저번처럼. 빨리 먹어.”
그가 다그쳐서야 아이는 입을 벌리고 조금 떼서 먹는다.
“할아버지, 오늘 학교에서 칭찬받았슴다. 글씨 이쁘게 썼다구.”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깔대기 모양의 과자까지 오작오작 씹어먹고도 아쉬운지 입을 다시던 아이가 여태 꼭 닫고 있던 입을 연다. 말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니 기분이 한결 좋아진 것 같다.
“그래? 잘했구나. 이따가 집에 가서 보자. 얼마나 곱게 썼는지.”
“그리구 오늘 달리기도 2등 했슴다.”
“그래? 잘했구나. 일등은 못하겠더니? 이제 더 잘해서 일등 해야 한다 알았니? 넌 꼭 뭐든지 남보다 잘해야 한다. 알겠냐?”
“네. 할아버지. 알겟슴다.”
아이가 입술을 감빨며 머리를 끄덕인다. 까만 고무줄로 하나로 동여맨 머리가 아래우로 찰랑거린다.
4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가.
그는 아직도 아들이 왜서 살인자가 되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다.
특별히 문제될 만한 건 아무 것도 없던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우락부락했던 아이도 아니였다. 그가 아이를 엄격하게 키우긴 했지만 그것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행동을 바르게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례의범절에 어긋나지 말라는 옳바른 교육을 한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는 맹목적으로 아이를 때린 적도 없었다. 딱 한번 그 때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을 때 귀뺨을 때린 것 외에는 그가 기억하는 한 없었다. 그는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지도 않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가장이였다. 안해도 집청소를 깨끗하게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려놓는 나무랄 데 없는 엄마였다. 다른 집 아낙네들처럼 그한테나 아들한테나 잔소리를 심하게 늘어놓지도 않았다.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아들한테 보여준 적도 없었다. 그와 안해는 서로 리해하고 존중하고 아껴왔다. 집에서 큰소리 한번 난 적이 없었다. 그들 부부는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을 최대한 아이에게 주려고 애썼고 눈동자처럼 아들을 사랑했다.
그번의 그림사건 이후, 아이가 말이 없고 웃지 않는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그게 문제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이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제 시름을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대학졸업 이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들애는 한동안 집에 있더니 남방으로 가서 회사에 취직했다. 가끔 전화가 와서 물어보면 잘 있는다고 했고 두어번 용돈도 보내왔다. 그는 흐뭇했다. 아들만 자기 인생을 잘 살아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와 안해는 남은 삶을 지금까지 그래왔듯 서로 기대고 리해하며 살아가다가 때가 되면 조용히 가버리면 될 것이였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은 완전하게 둥글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애가 거기에서 자리잡고 결혼하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아들애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큰 도시에서 자리잡으려면 집도 장만해야 하고 돈이 많이 필요할 것이였다.
그는 한국행을 선택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길로 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단단하게 혼자서 풀숲을 헤치듯 삶의 힘든 과정들을 맨몸으로 헤쳐가며 살아온 그에게 주저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밭을 남에게 양도하고 다리가 아픈 안해는 집에서 쉬게 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남들은 일이 고되고 힘들다고 했지만 그는 딱히 힘들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가 못해본 일이 무엇이겠는가. 농장일, 노가다일 닥치는 대로 했다. 돈은 벌어졌고 그는 한장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통장에 착착 돈이 모아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는 그 돈을 고스란히 안해한테 보냈고 안해도 일전 한푼 허투루 쓰지 않고 모았다. 언젠가는 아들이 집을 살 때 보태줄 료량이였다.
3년 만에 돌아왔을 때, 아들은 녀자친구를 데리고 왔다.
“만만한 애는 아니겠구나.”
아들의 녀자친구를 보는 순간 드는 생각이였다. 각진 코날에 어딘가 고집스런 눈매가 마음에 걸렸다. 말이 없고 조용하지만 의외로 고집스런 면이 있는 아들의 짝이라면 너그럽고 시원시원해서 아들을 품어줄 수 있는 녀자거나 안해처럼 모든 걸 남편의 의사대로 따르는 순종적인 녀자가 좋겠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이 좋다면 됐지 하고 그와 안해는 동의했다.
그는 좀더 돈을 벌려고 한국으로 다시 나갔다.
아들이 드디여 결혼을 했다. 그는 결혼식에 참가하려고 들어왔다가 인차 다시 한국에 나갔다. 안해가 아들이 남방에서 다니던 회사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돌아올 것 같다고 했다. 얼마 후에는 며느리가 임신했다고 하더니 아기를 낳을 무렵 둘이 함께 고향에 돌아왔단디. 이제 남방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살 거래요, 여보. 안해가 전화로 말했다. 그는 뭔가 석연치는 않았지만 모았던 돈으로 집을 사주라고 했다. 어디서든 자리를 잡고 살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얼마 후, 안해는 시내에 집을 사라고 아들한테 돈을 줬다고 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새로 지은 아빠트를 샀고 인테리어를 하고 살림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집에서 며느리는 아기를 낳았다. 눈이 커다란 녀자아이라고 했다.
“여보, 그렇게 이쁠 수 없슴다.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보다 더 신이 나고 이쁨다.”
손녀가 태여나던 날, 평소 조용하던 사람이 웬 일인가 싶게 안해는 수화기 저편에서 흥분된 목소리로 손녀가 태여났다고 알려왔다. 그도 기뻤다. 철학관을 찾아가서 특별히 손녀의 이름을 부탁했다. 은서라는 이름을 지어서 보내며 그는 흐뭇해했다.
그런데 손녀는 커가는데 아들이 통 취직할 생각을 하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이상한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였다. 숨이 컥 막혀왔다.
“무슨 그림을 그리오?”
“전에 아이 때처럼 해골이나 그런 건 아닌데 갈대들이 가득 서있는데 보일락말락하게 작은 나그네가 갈대밭 한끝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본다든가, 하여간에 보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가슴이 무너지는 그림을 그림다. 여보, 어찜까?”
“이런 망할 놈”
“여보, 며느리는 남편이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고 바가지를 긁어대고 소리를 박박 지르고 이 녀석은 뭘 잘했다고 짜증을 내고 둘이 갈 때마다 전쟁임다. 아이는 빽빽 울고 가보면 부산스러워서 앉아있지를 못하겠슴다. 에구, 키워서 장가까지 보내놓으면 끝나는 줄 알았더니 이건 결혼하기 전보다도 더 속을 바글바글 태우니 어쩌면 좋슴까?”
“저런 썩을 자식, 대학까지 나와서 집에 틀어박혀 놀고 있다니? 결혼하고 자식도 있으면 피를 토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밖에 나와 돈을 벌어서 안해와 자식을 먹여살려야지. 이런.”
그는 화가 나서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사지 멀쩡한 놈이 한창 피 끓는 청춘에 무지렁이처럼 집에 들어박혀 그림이나 그린다니? 그것도 돈도 안되고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할 것을 번연히 알면서 하는 노릇이라니 더욱 기가 막힌다. 대학까지 나온 놈이 어디인들 자기만 노력하면 일자리 하나 못 구해서 집에서 안해한테 그따위 대접을 받으며 놀고 먹는지 도무지 리해할 수가 없었다. 저런 놈이 내 아들이라니 용납이 안되는 노릇이였다. 며느리도 그렇다. 남자들이란 살다 보면 비딱하게 나가기도 하고 철없는 아이처럼 방황하기도 하는데 그걸 좀 다독여서 마음을 잡게 하면 좀 좋을가. 처음부터 각진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애까지 낳은 녀자가 왜 저다지도 융통성이 없을가 싶은 게 속이 부글부글 괴여오른다.
“여보, 그래서 말인데 어떡함까. 당신이 힘들게 번 돈이지만 애들 생활비로 좀 주면 안되겠슴까? 내 자식이 저래고 있으니 며느리한테 미안해서 죽겠슴다. 돈이라도 보태주면 며느리가 좀 덜 짜증을 내겠는지. 휴…”
안해가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을 지었다. 그도 한숨이 나갔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였다. 그렇게 그 때부터 그가 버는 돈은 아들네 생활비로 들어갔다.
당분간이겠지. 애가 커가면 정신을 차리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애가 첫돌 생일이 돼서 그가 집에 돌아와보니 아들은 문제가 심각했다. 어쩐 일로 비오기 직전의 하늘처럼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소리내여 웃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 나이 또래에 있어야 할 생기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며느리네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그는 아들을 찬찬히 건너다 보았다. 고민으로 가득해보이는 텅 빈 눈, 말없이 빠르게 비우는 술잔, 세상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어하는듯한 모든 것이 귀찮다는 표정…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문드러질 지경이였다. 게다가 며느리는 남편 밥 먹는 것조차 꼴보기 싫다는듯 식탁에 앉아서 몇번이나 남편을 흘겨보는 것이였다. 어쩌다 아들이 입을 열면 짜증난 말투로 톡톡 남편한테 쏘아붙이고 있었다. 다 큰 아들을 때릴 수도 없는 터라 그는 못 본 척하고 밥을 먹고 물러나 앉아 손녀를 안았다. 손녀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지며 해쭉해쭉 웃었다.
그는 손녀의 재롱에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겨울에 홑옷바람으로 바깥에 서있는듯 시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아들 녀석을 방안에서 끌어내고 세 식구가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할 만한 방도를 생각해봤으나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장애물은 어떤 일이 닥쳐도 잘 헤쳐나왔는데 자식의 일을 마주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다시 한국으로 갔다. 그가 돈을 벌어 보내고 안해는 그 돈을 아들네 생활비로 갖다주는 생활이 다시 되풀이되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공사장에서 허리를 상해 수술을 받게 되였다. 더 이상 공사장에서 일을 못하게 되자 그는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돌아오자 그와 아들네 식구까지 다섯의 생계가 모두 문제가 되였다.
“아버님, 저 한국으로 나가겠슴다. 애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맡아주쇼. 돈을 벌어야 먹고 살 거 아님까.”
며느리가 하는 말이였다.
“그럼 넌 어쩔 거야?”
아들을 흘긋 쳐다보았다.
“저도 나가겠습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아들이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며느리는 아들을 할끔 쳐다보더니 못마땅하다는듯 눈을 내리깔았다.
아들과 며느리가 트렁크를 끌고 멀어져가는 뒤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였다. 드디여 아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로 한 것인가 싶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한국에 나가 처형의 도움으로 집을 잡고 한국에서 H2비자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하러 다녔다. 얼마 후에는 며느리가 식당에 다닌다고 전화가 오고 곧이어 아들도 회사에 취직이 되였다고 했다. 뭔가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님, 전 리혼하겟슴다.”
며느리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가 왜 여태 이렇게 한심한 남자하고 살아보겠다고 애를 썼는지 저절로도 리해가 안 감다. 그동안 제가 너무 순진하고 바보스러웠던 것 같슴다. 생각할수록 내 청춘이 아깝고 이 사람과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하면 아득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 여태 내 아들이 무능해서 네가 고생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를 잘 다니고 있지 않니? 둘이서 돈을 벌고 돌아와서 은서를 데리고 잘살아야지, 그럼 안된다.”
그는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누르면서 며느리를 달랬다.
“아버님, 회사를 잘 다닌다구요? 그동안 아버님이 걱정할가봐 말 안했는데 이 사람 회사를 벌써 몇번째 바꿨는지 모름다. 뭐가 문제인지 짧으면 며칠이고 길면 한두달 다니고 회사를 그만둠다. 무슨 애도 아니고 이렇게 적응을 못하면 어떡함까? 이런 사람 믿고 제가 어떻게 평생 삼까? 아버님 저도 제 인생이 있슴다.”
후…
한숨이 나왔다.
“그래 내가 좀 따끔하게 말해놓을게. 네가 고생이 많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아들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너 한 집안의 가장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 마누라와 자식을 위해 가장은 뭐든지 참아내야 하는 거다. 알겠니?”
“예. 제가 못나서… 죄송함다, 아버지.”
겨우 목구멍에서 짜내는듯한 목소리로 아들은 그렇게 대답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한국에 가서 얼마 안되여 며느리는 밖으로 나돌았다. 다른 남자가 생겼던 것이다. 물질의 유혹과 새로운 사랑에 빠진 며느리한테 직장에 적응도 하지 못하는 아들은 귀찮은 걸림돌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며느리가 늦게 귀가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둘은 끊임없이 싸웠다. 며느리는 아예 며칠씩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밖으로 나돌았다.
보름 만에 안해가 집에 돌아왔었습니다. 전 직장을 그만두고 며칠째 빈 속에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안해는 나갈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긴 생머리였었는데 파마를 했고 옷도 새로 산 것 같았는데 비싸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보지 못했던 가방을 들고 있었고 신발도 새로 산 것인듯했습니다. 한마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져서 들어왔습니다. 안해가 집에 들어와서 한 첫마디가 리혼하자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어떤 놈이냐고 따졌습니다. 안해는 벌레를 바라보듯 경멸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픽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꼴에 남자라고 질투가 나냐? 병신 같은…라고 중얼거리는데 그 말에 저는 리성을 잃었습니다. 주방 쪽으로 다가가 식칼을 잡았고 도망가려는 안해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쓰러뜨리고 칼로 찔렀습니다.
아들이 진술한 사건의 전말이였다.
아들은 식칼로 며느리를 사십여곳을 찔렀다. 사건 직후, 아들은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경찰이 당도했을 때 아들은 피투성이된 안해를 껴안고 있었다고 했다.
그가 우들우들 떨며 손녀를 안고 있는 안해를 두고 한국에 갔을 때 며느리는 벌써 사체실에서 랭동시체가 되여있었다. 땅에 주저앉아 울기도 지친듯 고개만 주억거리던 안사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의 마음으로 들어서는 그를 그저 한번 쳐다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후사정이야 어찌됐건 내 자식이 남의 귀한 딸을 데려다가 잘 보듬기는 커녕 목숨을 빼앗았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며느리의 장례를 치르고 그는 아들을 면회하러 갔다.
저게 과연 내 아들인가.
살인죄로 기소되여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이 머리를 수그리고 걸어나와 걸상에 앉았다. 그는 흘긋 아들을 건네다 보았다. 산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얼굴이였다.
그도 아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면회시간은 침묵 속에서 끝났고 아들은 다시 고개를 수그린 채 일어나 그에게 등을 보이며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제 저곳으로 걸어가면 나오지 못하겠구나. 멀어져가는 아들을 바라보다가 돌아서는데 현기증이 일었다.
쓰러지면 안돼.
그는 호흡을 애써 조절하며 숨을 몰아쉬였다.
5
“안녕하십니까.”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온다.
“예. 뉘신지?”
“예, 송은서 할아버지 되시죠? 저는 연길시 별빛애심협회 학생부장을 맡고 있는 박춘연이라고 합니다.”
“아. 예.”
그는 자리를 고쳐앉았다.
“예, 할아버지, 저희는 불우한 학생들을 돕는 민간단체 조직이구요, 십년 넘게 학생들을 돕는 사업을 이어온 정규적인 애심협회입니다. 제보를 받고 상황을 료해하고저 전화를 드렸는데요, 할아버지, 전화 통화 괜찮으시죠?”
“예, 예.”
한껏 교양을 살린 목소리는 화단에 핀 꽃이파리처럼 부드럽다.
“예, 지금 은서는 10살이고 소학교 3학년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
“예, 3학년 맞습니다.”
“예, 할아버지, 제보한 분을 통해 사정을 들었습니다. 애기 엄마는 돌아가시고 애기 아버지는 감옥에 있다고 했죠?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 시중을 들어야 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구요?”
“예, 예. 그 눔이 그렇게 사고를 치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화기를 바싹 귀에 갖다 대며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한다.
“가정의 경제래원은 어떻게 됩니까?”
“예, 지금 경제래원은 없지요. 띠보라고 최저생활 보장금이라 함까. 그게 세식구 합쳐서 800원 나옴다. 나하고 로친 거는 200원 나오구 애게 좀더 되더라구요. 400원 해서 그게 총 800이고 밭을 양도해준 게 일년에 이천원 나오고 그 다음엔 없습니다.”
그는 없습니다를 힘주어 말한다. 걱정했는데 정작 마주하고 보니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 그러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어휴- 할머니 치료는 어떻게 하십니까? 다리가 아프셔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시던데 관절염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통, 통풍으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집안일이라도 해주면 내가 밖에 나가 아무 일이라도 해서 좀 보태겠는데 아예 움직이지 못하다나니 내가 해야 해서 아예 죽겠습니다.”
말을 하며 그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아 숨을 후 내쉰다.
“예, 할아버지, 그럼 집은 어떻게 됩니까? 집은 본인 집인가요?”
“집은 시골에 있는데 애 공부 땜에 시내로 나오다 보니 지금 집은 한국에 있는 친척이 있으라고 해서 림시 있습니다.”
저도 몰래 식은땀이 흐른다.
그들이 원하는 건 좀더 그럴듯한 감동 어린 스토리일 것이다. 그것을 위해 그는 좀더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만 후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달에 오백원씩 정기적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꼭 따내야 할 것이였다.
“예, 할아버지, 일단 잘 알겠습니다. 은서 공부성적이나 품행이나 등 학교생활에 관한 건 제가 담임선생님한테 전화로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저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품행이 단정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은서 학교와 가정에 관해 전화로 기본적인 걸 조사하고 이걸 협회에 회보할 거구요, 그 다음 일요일에 말씀드렸던 대로 가정방문을 가게 됩니다. 할아버지, 저와 몇분이 함께 가서 가정정황을 좀더 료해하고 후원여부를 결정지을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예.”
“그럼 할아버지, 일요일에 뵐게요. 은서도 그 날 집에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저희는 아이 정면사진은 찍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예, 알겠슴다. 감사합니다.”
휴대폰을 내려놓으니 숨이 훌 나온다.
안해는 다리가 몹시 아픈듯 벽에 기대앉아 저 혼자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다가가 안해의 다리를 말없이 꾹꾹 주물러주었다.
안해가 희미하게 웃어보인다.
안해와 눈길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밖을 내다본다. 비가 오려는 걸가 하늘이 잔뜩 흐려있다. 오늘은 우산을 가지고 손녀 마중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힘주어 안해의 다리를 주무른다.
6
“은서야, 네 이름이 은서지?”
애심협회에서 방문을 왔다. 남자 몇명과 전화통화를 했던 학생담당이라는 애된 아가씨로 보이는 녀자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과일과 우유와 고기와 쌀을 내려놓고 그들은 엉거주춤 바닥에 앉는다.
“은서 공부 잘하니? 반에서 몇등?”
“모르겠슴다.”
손녀가 쑥스러운듯 몸을 탈며 대답한다.
“오, 그래? 모르는구나. 호호 선생님한테 물어보니 은서 잘하다고 하더라. 은서 필기장 보자. 어머 글씨도 이쁘게 쓰네. 얘 글씨 쓴 것 좀 보세요.”
학생담당이라는 녀자가 이것저것 손녀한테 묻는다. 가까이에서 보니 눈가에 가늘게 주름이 건너간 걸로 봐 서른은 넘겼을 법하다. 아까 차에서 내릴 때 스물대여섯살 정도로 보였던 건 작고 마른 몸매와 하얀 피부 때문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요? 할머니는 아예 운신을 못한다구요?”
남자 묻는다.
“내가 이렇게 들어앉아있어서 저 령감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름다. 다리가 아예 굳어버려서 앉았다가 겨우 눕는 것 밖에 못하니 령감 고생이 막심하지요.”
안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그도 놀랐다. 안해가 저렇게까지 할 줄은 미처 몰랐다. 학생담당이라는 녀자가 할머니 울지 마세요. 하면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안해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준다. 쭈글쭈글한 손에 쥐여진 빨간 꽃이 수놓인 하얀 손수건은 목이 다 늘어진 회색 적삼을 입고 세상의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린듯이 앉은 안해와 너무 대조적이다.
“아… 애도 어리고 할머니도 편찮으시고 참…”
나이 들어보이는 회장이라는 남자가 머리를 끄덕끄덕한다.
“참 너무 안타깝습니다.”
학생담당이라는 녀자가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이것저것 적는다.
그는 엉거주춤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다. 손녀는 처음에 쑥스러워하더니 학생담당이라는 젊은 녀자와 곧잘 대화를 나눈다. 평소에는 낯선 사람을 보면 입을 닫아버리더니 저게 어린 녀자를 보고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엄마가 그리웠나 싶어 눈시울이 붉어진다.
“자식을 키울 때 사람을 죽이라고 키우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불쑥 입을 열어 하고 보니 너무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아 그는 스스로 어이없어진다.
“할아버지, 저희 그만 가보겠습니다. 돌아가서 저희끼리 좀더 토론해보고 후원여부를 결정지어서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예, 예. “
그는 검은색의 승용차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허리를 굽신거렸다. 이제 그는 돈을 벌기에는 너무 늙었고 몸도 쇠약해져있다. 조금만 무리를 하면 통증으로 시큰거리는 허리지만 그 허리를 굽신거려서 안해와 손녀를 먹여살릴 수만 있다면 허리가 부러질 때까지라도 굽신거리고 싶다.
7
감동할 만한 스토리 덕분이였는지 아니면 안해의 눈물 덕분이였는지 애심협회에서는 방문하던 날 저녁에 바로 학생담당 아가씨가 후원이 결정되였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계좌번호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달마다 10일에 후원금 500원이 들어갈 거라고 했다.
안해가 운신 못하는 환자로 둔갑해 그동안 집안에서 갇혀지낸 보람이 있구나 싶은 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밭을 양도한 것이 일년에 이천원 나온다고 했지만 실은 칠천원 정도 나온다. 거기에 쌀 600근을 받기로 했으니 쌀은 사지 않아도 된다. 최저생활보장금이 한달에 800원 나오고 딸은 죽었지만 외손녀를 외면할 수 없어 사돈이 한달에 천원씩 보내오는 돈이 있고 가두에서 쌀이며 기름이며 화장지 같은 생필품을 들고 방문을 온다. 그가 가끔 나물을 뜯어 팔고 가두의 소개로 생과일즙을 만드는 공장에 가서 도와주고 받아오는 돈도 많지 않지만 몇백원 정도 된다. 이번에 방문 온 애심협회에서 달마다 오백원씩 보태주면 이제 그럭저럭 살아가기엔 문제 없다.
“예? 은서가요?”
“예, 그렇다니까요, 할아버지, 뛰여가는 애를 발로 걸어놔서 애가 콩크리트바닥에 넘어지면서 무릎이 까졌는데 피가 심하게 나서 병원에 왔슴다. 여기 지금 무릎 까진 애 부모님들도 와있고 은서도 있슴다. 저는 수업이 있어서 지금 학교에 들어가야 됨다. 할아버지, 얼른 병원에 오셔야 될 것 같슴다. 빨리 와주세요.”
“무슨 일이람까? 은서가 어떻게 됐담까?”
안해는 벌써 우들우들 떨고 있다. 아들이 사고를 쳤을 때 생긴 병이다. 안해는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온몸을 덜덜 떤다. 그는 별일 아니라고 안해를 안심시키고 집을 나섰다.
“은서야.”
병원에 도착하여 두리번거리는데 은서가 병원 복도 의자에서 일어선다. 크게 혼내야겠다고 벼르고 왔는데 정작 겁에 잔뜩 질린 아이의 얼굴을 보니 혼내지도 못하겠다.
“은서 할아버지 되심까?”
아들 또래나 될 법한 남자가 걸상에서 일어선다. 잔뜩 굳어있는 얼굴이다.
“예. 제가…”
“아…”
남자가 그를 아래우로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뭐 은서 상황에 대해서는 담임선생님한테서 대충 들었습니다. 저희도 귀한 아들이라 화가 나긴 했지만 할아버지네 상황을 들어보니 치료비를 받기도 애매함다. 그만 애를 데리고 들어가십시오.”
“아, 그래도 어떻게 치료비는 우리가 내야지요.”
그는 손녀의 손을 잡고 공손하게 두손을 모으고 남자 앞에 섰다. 남자가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님다. 애는 무릎을 세바늘 꿰매고 엄마가 데리고 갔슴다. 휴- 이런 애하고 한반에 다니다 보니 그렇게 된 걸 뭐 어찌겠슴까. 집에 가서 애 단속이나 잘 시키세요. 어디 무서워서.”
남자가 혀를 끌끌 차며 냄새 나는 음식 대하듯 그들을 힐끔 바라보고 가버린다.
그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굳어있었다. 너그러운 척 착한 척 하면서 묘하게 사람 기분을 밟아놓는다. 꽉 틀어쥔 주먹에서 우드득 소리가 난다. 이런 애하고 한반에 다니다 보니라니, 어디 무서워서라니. 사람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집에 가자.”
그는 손녀의 손을 잡고 병원문을 나섰다.
밥을 먹으면서 건너다 보니 손녀는 아무 말 없이 폭폭 밥을 떠먹는다.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그 큰 일을 저지르고 저렇게 태연히 밥을 퍼먹다니? 아직 자기 잘못이 뭔지를 모르는 건가?
“은서야,”
그는 아무래도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이의 이름을 각진 목소리로 불렀다.
막 된장찌개에 숟가락을 들이밀던 아이의 손짓이 그대로 뚝 멈춘다.
“너 학교에서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지 오늘처럼 친구를 밀어놓으면 되니?”
될수록 부드럽게 말하려고 그는 모진 애를 쓴다.
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숟가락을 든 채 굳어져있다.
“다시 그러면 안된다. 알았지? 너 오늘 가네 부모님이 맘씨 좋아서 치료비를 내라고 안했으니 다행이지 돈을 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니? 너도 알다 싶이 할아버지 할머니는 돈이…”
거기까지 말하다가 그는 멈춘다. 어린 아이 앞에서 너무 구질구질하게 신세타령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너 잘못을 뉘우치고 이제 그 애가 래일 학교에 나오면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선생님한테도 잘못했다고 하고 알았지?”
아이는 여전히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의 굳게 다문 입술과 결연하게 내리깐 눈을 보느라니 화가 확 치밀어오른다.
“은서 너, 얼른 예 하지 못하니?”
“싫슴다.”
아이가 입을 열더니 낮으나 단호하게 말한다.
“뭐?”
너무 뜻밖의 반응에 그는 아연해진다. 싫다니? 사과를 하지 않겠다는 건가? 고작 열살짜리가 무슨 고집이 이렇게도 세다는 말인가. 그것도 녀자애가. 이렇게 달래듯이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할아버지가 한번도 너를 때리지 않았지? 한번 할아버지한테 맞아볼 거야?”
그가 손을 번쩍 올리쳐든다.
“아이구, 당신두 참. 은서야, 얼른 할아버지 잘못했습니다 하고 사과해.”
안해가 그의 손을 잡고 아이를 재촉한다.
딱 소리가 나게 아이가 숟가락을 내려놓은 것은 그 때였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자꾸 사과를 하람까?”
“야가 점점. 너 사람을 때려서 피가 났는데두 잘못한 게 없어?”
“없슴다.”
그가 안해한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한대 쥐여박았다. 기다렸다는듯이 와 하고 아이가 울음보를 터뜨린다. 아이의 입안에서 밥알들이 뿜겨져나와 식탁에 어지럽게 흩어진다.
“갸가, 성주가 나를 살인범의 딸이라고 놀렸단 말임다. 너도 감옥에 들어가라고 했단 말임다. 그런데 왜 선생님은 성주는 혼내지 않고 나만 혼냄까.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왜 내가 왜 성주를 때렸는지는 물어보지 않고 나만 혼냄까. 아버지가 엄마를 죽인 것도 난 다 암다. 아버지가 지금 감옥에 있는 것도 난 다 암다. 앙앙…”
가슴에 걸레가 컥 막히는 기분이다. 그는 손녀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태 아무 내색도 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알고 있었다니.
“은서야. 어서 가서 세수하고 공부해.”
그는 한껏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제야 아이는 숟가락을 놓고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더니 구석에서 네모진 밥상을 꺼내 펼쳐놓고 앉아 책가방을 뒤적인다.
후… 한숨이 나온다.
안해는 절름거리며 아이가 뿜어낸 밥알을 걸레로 닦아내고 설겆이를 한다. 종이로는 불을 감쌀 수 없듯이 결국은 아이한테 아무 것도 숨기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손녀를 그렇게 놀려주고 있다는 건 전혀 몰랐던 일이였다. 저 혼자 그동안 그걸 견디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가. 저 어린 것이 그토록 모질다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제 열살, 아이가 앞으로 견뎌야 할 모진 것들은 그가 상상하는 이상일 것이다.
밖은 어느새 어둠이 썰물처럼 밀려와 한낮의 눈부시던 것들을 어느새 수월하게 덮어버리고 있다.
삶이 저토록 수월하다면 얼마나 좋을가. 내가 덮어버리고 싶은 건 덮어버리고 지워버리고 싶은 건 지워버리면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고단한 하루가 끝나간다.
두려운 건 래일도 달라질 게 별로 없는 하루일 것이라는 것이다.
8
“아니, 할아버지가 이 시간에 어떻게.”
당황스러운 기색이 력력하다.
그는 들고 간 산나물봉다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딸기를 먹고 있던 참인가. 통통한 남자아이가 반쯤 베여먹은 딸기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빨갛고 커다란 딸기는 갓 밭에서 따온듯 싱싱하다. 은서는 저런 딸기를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지. 그는 가슴이 아리다.
“니가 우리 은서가 밀어놨다는 애구나. 너 이름이 뭐니?”
“성주.”
“성수?”
아이가 머리를 절레절레 젓는다.
“성주.”
“오, 그렇구나. 다리 많이 아프냐?”
그가 손으로 붕대를 친친 감은 아이의 다리를 어루만지려 하자 아이의 엄마가 얼른 아이를 끌어당긴다.
“정말 죄송하오. 우리 손녀 때문에 집의 아이가 다쳐서 정말 미안하오.”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뭐 찢어져서 꼬매고 피도 많이 나긴 했지만 뭐 어쩌겠슴가. 애들이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고. 할아버지가 이 시간에 찾아와서 이렇게 사과하시니까 됐슴다.”
“치료비라도.”
“아니, 우리 그 정도 돈이 부족하지 않슴다. 갠찮슴다.”
그의 사과에 마음이 풀어졌는지 아이 엄마도 됐다고 하고 아이 아버지도 아까 병원에서 날 선 말을 하던 것과는 달리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애도 잘못했더라구. 우리 은서한테 들을라니.”
그는 드디여 참았던 말을 한다.
“예? 그게 무슨.”
“이 집 성주가 먼저 살인범의 딸이라고 우리 손녀를 놀려서 우리 손녀가 화가 나서 밀어놨다는구만. 선생님도 왜 그랬는지 은서한테 묻지 않았구 나도 집에 가서 손녀만 나무랐는데 들어보니 그렇더구만.”
그가 흘깃 쳐다보니 성주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
“너 정말이니?”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바라본다.
“너 래일 학교 가서 우리 은서한테 사과하고 다시는 우리 은서를 놀려주지 말어. 자식을 낳을 때 사람을 죽이라고 낳은 부모가 없고 사람을 죽인 아버지의 딸이 되고 싶은 자식도 없단다. 알겠니? 우리 은서도 너한테 사과를 하도록 말해놓을게. 잘못은 서로 빌어야지 않겠니?”
성주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두 젊은 부부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본다. 뒤통수를 맞은 표정이다.
그는 이제 가야겠다고 하고 일어섰다.
“전학을 시키던지 해야지 원.”
“와, 저 늙은이 완전 여간내기 아님다. 사과하러 온 줄 알았더니 이건 뭐 똥 뀐 놈이 성낸다구.”
등뒤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9
손녀는 그번 일이 있고 난 뒤에 말수가 적어졌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교도 잘 다니고 있었다. 성주가 손녀한테 사과를 했는지 안했는지 전학을 갔는지 어쨌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손녀가 학교를 잘 다니고 있으니 어쨌거나 안심이 되는 일이였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간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다.
안해의 걸음걸이는 점점 못해진다. 이제 벽을 짚고 모진 애를 써서야 겨우 한발을 옮겨놓는다. 화장실을 가기도 버거운 눈치이다. 전처럼 집청소도 하지 않아 항상 반짝거리던 바닥은 부옇게 먼지가 끼여있다. 저러다가 정말로 드러누워버리는 게 아닐가 싶어 기분이 우울해진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그는 정성을 다해 안해의 시중을 들 마음의 준비가 되여있다. 그는 안해를 사랑한다. 어떤 남편보다도 더 특별하게 안해를 사랑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마리.
여느 때처럼 은서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니 전에 없이 안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안해의 노래였다. 그는 안해도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사실에 놀랐다. 결혼식 날에도 끝끝내 노래를 하지 않은 안해였다. 오래 사니까 별일이 다 있다 싶었다.
문제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고 시작한 노래가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하는 걸로 이어져 밤비 내리는 령동교를 할 때부터였다. 심심풀이로 노래를 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목소리가 크다는 생각에 그는 안해를 바라보았다. 안해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일에 인생을 건 사람처럼 때로는 얼굴을 찌프렸다가 때로는 폈다가 하면서 완전히 심취되여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보, 그만하지.”
그가 말했다.
안해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해서 노래를 부른다.
이상하다.
“여보, 그만하라니까.”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해가 노래를 멈추더니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는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다는 생각이 들어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말했다.
“여보, 시골도 아니고 여긴 층집이재요. 좀 목소리를 낮추어 살랑살랑 불러야지.”
안해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눈을 찌프리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누구심가? 왜 우리 집에 있슴가?”
“여보,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여보, 왜 이러오? 여보.”
그는 안해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든다.
“할아버지, 이러지 마쇼. 아픔다.”
안해가 고개를 반짝 쳐들고 그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비워낸듯한 순진무구한 얼굴이다. 정말로 어깨가 아픈듯 안해의 얼굴은 일그러져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도 불지 않는 고요한 날씨이다. 나무들이 미동도 없이 서있다. 빨간 승용차 한대가 서서히 미끄러져 지나가고 뚱뚱한 아줌마가 터질듯하게 꽉 낀 치마를 입고 뚱기적거리며 걷는다.
세상은 이토록 평온하게 굴러가는데 그는 가슴에 더러운 걸레가 콱 막힌듯 답답해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는 안해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스르르 내렸다. 참으로 삶이 힘들구나. 난 열심히 살았는데… 안해를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고 손녀를 사랑하고 그 옛날 어린 시절엔 할머니를 사랑하고. 열심히 내가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사랑한 죄 밖에 없는데 왜 이토록 삶이 힘든 것인가. 남들보다는 더 지극히 더 특별하게 사랑하고 죽기내기로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삶은 내게 가혹한 것이냐.
그는 손바닥을 펴서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크게 한숨을 내쉬였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안해도 후-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그와 안해가 한숨을 내쉬자 고요하던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 창밖의 나무들이 일제히 가지를 흔들며 술렁거렸다.
출처:<장백산>2018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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