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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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장편소설 《진허》(11)
2013년 12월 04일 15시 10분  조회:1899  추천:1  작성자: 김극민
11
 
“눈을 떠보아라.”
허공에서 귀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이는 눈을 떴다. 다락기둥에서 날개를 펼치던 메뚜기가 바닥에 뛰여내리고 흰구름은 느릿느릿 흘러갔으며 산과 숲은 본래의 모습이였다. 준이는 아까부터 자기를 주시해온 눈길이 진허법사의 눈길이였음을 짐작할수 있었다.

준이는 부르튼 소리를 했다.
“법사님, 너무하십니다. 왜 저의 불행한 과거를 억지로 회상시키고 또 그것을 재미있는 구경거리인양 들여다보구계셨습니까? 남의 사생활을 이렇게 함부로 침해해두 되는겁니까?”

“젊은 시절에 넌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뭘 부끄리는거야?”

“법사님두 참, 다 들여다보시구두, 저는 방목장에서 저지른 음행때문에 지금두 후회하고있습니다. 그때 조금만 참았더라두 인생을 다르게 살수 있었겠는데…”

“그것을 왜 음행이라고 하느냐? 소들이 교배하는것처럼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였더냐?”

“하긴 글쎄 참새를 얼려잡듯 감언리설루 꼬인것두 아니구 순간적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저지른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짓 한번 하구 평생 책임을 져야 했으니 그게 억울하지요.”

“구차스러운 변명 늘어놓지 말어라. 인생을 다시한번 살아보니 느낌이 어떠냐?”

“뭘 다시 살았다구 그럽니까? 과거에 대한 회상에 불과한데…”

“넌 진짜 과거로 돌아갔다 왔느니라.”

“무슨 요술 같은 말씀을… 저의 전반생이 그래 메뚜기가 천장에서 뛰여내리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찰나가 곧 무량겁이요, 무량겁이 곧 찰나이니라. 고차원에서의 시공의 무궁한 조화를 네가 어찌 알겠느냐?”

준이는 아인슈타인이나 호킹의 책을 읽었기에 시공의 상대성이며 시간역전 따위 문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금방 소년시절, 청년시절로 돌아갔다 왔다는것을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다.

“법사님, 저는 스무이틀동안이나 모진 고역에 시달리다가 오늘 자유를 얻었습니다. 여유나 즐겨보려고 이 야산에 들어온겁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혼자 있기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독을 무서워한다지만 저는 고독을 즐깁니다. 왜 청하지도 않은분이 나타나셔서 저를 이렇게 혼란에 빠뜨리는겁니까? 뭘 깨우쳐줄듯하면서도 깨우쳐주지 않으시고…”

깨달음이란 스스로 깨달아야지 누가 깨우쳐주는것이 아니다.”

“스스로 깨달을수 있다면 목사며 법사며 경전 같은것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것으로서의 존재리유가 있고 너는 너로서의 존재리유가 있다.”

“그러게 저의 실존문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사 하는게 아닙니까?”

“……”

“언젠가 저는 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깜짝 놀란적이 있습니다. 저란 인간은 그저 세상에, 인생에 응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것이고 진정한 자기는 어딘가 따로 있는듯한 느낌이였습니다. 그 기괴한 느낌은 그저 그때뿐이 아니였습니다. 내심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튀여나왔습니다. 진정한 자기가 따로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저한테는 현실적인 모든것이 하등의 가치도 없어보였습니다. 제가 그 어떤 종교도 사회적리념도 믿지 못하고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관인 지위, 명예, 금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것도 그 원인인것 같습니다. 글쎄 사장노릇을 하든 막벌이를 하든 매 한가지라고 생각할 정도니까요. 제가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실패와 좌절만 겪어온것이 그따위 진정한 자기에 대한 궁금증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저는 자기를 들여다보는것을 무서워하는겁니다.”

진허법사님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알고있느니라.”
“저는 이렇듯 흐리멍텅한 상태로 인생을 거의다 살았습니다. 이제 와서 자기를 깨달은들 뭘 어쩌겠습니까?”
“한세상 어리둥절하게 왔다가 어리둥절하게 가는게 소원이냐?”
“그건 아닙니다. 인생의 진짜의미를 깨닫고싶지만 깨달아지지 않는걸 어떡합니까? 젊었을 때는 그나마 공산주의리상이라는것이 있어서 자기의 삶이 의미가 있다구 생각했지요. 아니, 압박과 착취가 없고 평등하구 자유롭구 아름답구 행복한 사회, 그런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삶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다가 문화대혁명을 경과하면서 볼라니까 어이쿠, 개판이라두 그런 개판이라구야…”
“이놈, 또 그따위 말투를 쓰느냐?”
“죄송합니다. 한 시대를 속혀서 살아온게 너무 밸이 나서…”
“……”

“법사님, 저는 평생 예술과 문학을 숭상해왔습니다. 10년동란때두 글쎄 남모르게 책을 읽었다니까요. 책을 모두 불태워버렸겠는데 어디서 구할수 있었는가구요? 페품수구소 같은데 무더기로 쌓여있었지요. 고철이나 유리쪼박, 넝마들과 같이 비를 맞아 곰팡이냄새가 코를 찌르는 책들, 불쏘시개를 하겠다고 돈을 몇푼 주면 한자루씩 사내올수 있었습니다. 무슨 역반심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먹지 말라는 열매가 더 맛있어보인다구 저는 ‘독초’로 몰리는 책에 더욱 흥미를 느꼈습니다. 독서에 무슨 뚜렷한 목적이 있은건 아닙니다. 그런 시국에 입시공부나 하구 무슨 ‘출세’를 하려구 책을 읽었다면 진짜 미친놈이였겠지요. 그저 재미로, 심심풀이로 읽었다니까요. 아무튼 책을 좀 읽었으면 뭘 깨닫는게 있어야 하겠는데 이눔은 깨닫기는 고사하고 갈수록 어리뻥뻥해졌습니다. 예술과 문학이 표방하는것이 무엇입니까? 진선미(真善美)가 아닙니까? 하지만 세상에서 진리라 하는것은 항상 상대적인것이였구 지어 사이비한것이였습니다. 선이란것두 위선과 사악함과 뒤섞여 어느게 어느겐지 분별할수 없었구 미란것두 글쎄 자연, 사회, 예술 광범위한 령역에 걸쳐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그건 미의 겉모습이였지 본질은 아니였습니다. 아마 제가 미술교육에 종사하면서부터일겁니다. 저는 미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문제를 파악해야만 저의 인생의 의미나 가치를 깨달을수 있을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허 참, 법사님한테 무슨 이런 심각한 얘기를… 법사님, 그냥 듣고계십니까?”

“……”
“법사님, 그나저나 이거 담배생각이 나서 못 견디겠는데 담배 한대 피워두 괜찮겠습니까?”
“……”
준이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주위의 경치를 둘러보노라니 자기가 여태까지 혼자서 중얼거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법사님이 과연 있기나 한가?
그는 시탐조로 물었다.
“진허법사님, 정말로 허공에 계십니까?”
“……”
“또 잠적하셨나?”
“……”
“법사님, 그렇게 계시듯 안 계시듯 하시지 말고 대범하게 형체를 드러내시구 저하구 마주앉으시지요. 어서 내려오십시오. 에헴, 아취! 칵… 아이쿠, 이놈의 담배…”
법사님의 호통소리가 울렸다.
“이런 한심한 놈 봐라. 너 나를 한담이나 들어주는 동네늙은이로 아느냐?”
“아차, 그냥 계셨구만요. 죄송합니다.”
“너 심심해두 한참 심심한 모양인데 너처럼 책두 많이 읽구 환상두 좋아하는 친구를 불러주마, 그 친구하구 심심풀이나 해라.”
“허허허, 저한테는 친구가 없습니다.”
“있느니라.”
“없습니다. 술친구는 있지만 간담상조(肝胆相照)하구 의기투합(意气投合)하는 친구는 없습니다.”
“있느니라.”

허 참, 없다는데도 한사코… 도대체 누구를 그러시는가? 술친구 백선생을 그러시는가? 장기친구 서동무를 그러시는가? 법사님께서 신통력이 있으니까 려권이니 항공편이니 상관없이 대바람에 여기를 데려오기는 하겠지만… 그 친구들은 정신분야의 심각한 문제를 토론할만한 수준이 아닌데…

이윽하여 어디선가 말발굽소리며 당나귀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야산에 웬 마바리행차야. 미처 의문을 풀기도전에 다락앞에 괴이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한 사람은 키가 큰 말라꽹이로서 갑옷차림에 창과 방패를 들고 여위디여윈 말을 타고있었고 한 사람은 배가 불쑥 나온 땅딸보로서 채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당나귀를 타고있었다. 이런 이런, 돈 끼호떼와 그의 시종 싼쵸 빤싸가 아닌가. 준이는 억이 막혀 입을 딱 벌렸다.

싼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나서 입을 열었다.

“동방사람들은 왜 이렇게 우습게 생겼어? 눈알은 새까맣구 코는 납작하구… 어이, 자네 주인은 어디 갔어?”

싼쵸는 준이를 자기와 같은 시종으로 여기는것 같았다. 돈 끼호떼는 마분지로 만든 투구가리개를 올리며 엄숙하게 말했다.

“싼쵸, 무례하게 나서지 말아. 이분이 바로 동방성자께서 만나보라고 하신 ‘고독한 학사’님이시다.”

“동방성자”라고 하면 필경 진허법사님이시겠지. 어느새 이런 어리광대 같은 인물들을 불러오셨는가. 돈 끼호떼가 둘시네아공주를 사모하여 스스로 자기한테 “우울한 얼굴의 기사”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거기에 대응하여 나한테 “고독한 학사”란 우습강스러운 별명을 붙인 모양이다. 아무튼 법사님께서 신통력을 부려 연극을 꾸미시는것 같은데 내가 그만한 배역이야 못 놀겠는가. 준이는 소설의 말투를 본따서 돈 끼호떼에게 말을 걸었다.

“라만차의 저명한 편력기사 돈 끼호떼선생께서 이런 오지를 광림해주신데 대하여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돈 끼호떼가 약간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실례지만 학사님께서는 저의 신분을 잘못 알고계십니다. 저는 1605년 에스빠냐의 위대한 작가 쎄르반떼스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진후 오늘에 와서는 세계적인 편력기사로 명성을 떨치고있습니다. 라만차란 시골이름을 저의 명성과 결부시키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동방성자께서는 무슨 연유로 기사님을 이리로 보내신겁니까?”

“‘고독한 학사’님께서 지금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심각한 미혹상태에 빠져있다고 하셨습니다. 저와 간담상조하고 의기투합하는 친구로 될수 있다면서 면담을 부탁하신겁니다.”

이런, 사람을 웃겨도 유분수지. 아니,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누군데? 당신이야말로 기사소설에 환장하여 총포로 싸우는 세월에 창과 방패를 들고 기사행각을 벌이지 않았던가. 주막을 성곽으로 여기고 양떼를 적군으로 여겨 미친듯이 뛰여들어가 좌충우돌하고…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린 사람과 내가 어떻게 같을수 있단 말인가… 법사님, 법사님께선 아마 독으로 독을 치는 비방을 쓰는지는 몰라도 이건 너무하십니다.

돈 끼호떼가 물었다.
“학사님께서는 기사소설을 읽으셨는지요?”
“왜 안 읽었겠습니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로부터 월터 스코트의 ‘아이반호’까지… 그래도 수많은 기사소설중에서 쎄르반떼스의 ‘돈 끼호떼’가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약 40년전, 제가 스무살전에 그 책을 읽었는데요. 기사님을 따라 17세기 에스빠냐의 광야며 수풀을 꿰지르고 다녔고 귀족들과 평민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기사님의 덕택에 저는 그 당시 에스빠냐의 풍토인정을 직접 살아본것처럼 실감했습니다.”
“학사님의 감수성에 탄복합니다. 동방에도 기사소설이 있는가요?”
“동방에서는 기사가 대개 영웅호걸로 통합니다. 서방의 기사들은 개인영웅주의적인데 반하여 동방의 기사들은 끈질긴 인간관계속에서 활동하지요. 중국의 《삼국연의》라든가 《수호전》 같은 책들이 기사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한국이란 나라에는 기사소설이 딱 한책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홍길동》이라고…”
“동방에서 왜 저와 같은 탁월한 편력기사가 출현하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게 되였습니다. 학사님께서 저처럼 기사소설을 많이 읽었더라면 꼭 저에 버금가는 편력기사로 출세했을겁니다.”

흥, 오만하기 짝이 없군. 자기와 동등한 자격도 아니고 버금이라니. 그나저나 내가 자네보다 기사소설을 곱절 읽었더라두 자네처럼 미치광이짓은 안할거라구…

준이는 점잖게 물었다.
“기사님께서는 이 세상에 기사소설뿐만아니라 예술, 문학, 철학에 관한 책들이 수없이 많다는것을 알고계시겠지요?”

“그런 책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을 불구로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학사님께서 본성을 잃은것은 바로 그런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은탓입니다.”

준이는 부아가 치밀어 지금 환상상태라는것을 잊어버리고 큰소리를 냅다 질렀다.
“내가 본성을 잃었는가, 자네가 본성을 잃었는가? 기사는 무슨 떡대가리 같은 기사야. 자네는 워낙 시골뜨기신사지? 본명은 퀘사다인지 뭔지… 그따위 기사소설에 미쳐가지구 자기를 마치 불세출의 걸출한 기사인양 착각하지 않았는가? 별의별 해괴한 짓거리를 다해서 온 세상 사람들을 웃기구. 자네 진짜 필마단창으로 세상을 구할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자기 주제는 모르고 내가 본성을 잃었다고? 허 참, 기막혀서 원…”

돈 끼호떼가 창과 방패를 추스르면서 눈을 부릅떴다.
“말투를 들어보니 당신은 학사가 아니라 교양 없는 하층빈민이구만? 당신은 나를 심하게 모욕했소. 명예로운 기사로서 하층빈민에게 결투를 신청하는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너무 괘씸하면 무작정 무력을 쓸수 있다는것을 명심하시오.”
문득 허공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돈 끼호떼가 허공을 쳐다보더니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요 애숭이야, 게 섰거라! 내 오늘 네놈한테 버릇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돈 끼호떼가 아니다.”
돈끼호떼가 창을 비껴들고 말에 박차를 가하더니 허공에 솟구쳤다. 준이가 멍해있는데 옆구리가 근질거렸다. 돌아보니 싼쵸가 다락에 올라와서 채찍자루로 자기를 건드리는것이였다.

준이가 호통을 쳤다.
“싼쵸! 이게 무슨 무례한짓이야?”
싼쵸가 히죽히죽 웃었다.
“이봐, 자네두 나 같은 평민이지? 돌아다니면서 막벌이하는 인부가 아니야?”
“이런, 사람을 몰라봐두 분수가 있지. 겉모습이 허술하다구 다 자네와 같은 사람인줄 아는가?”
“뻔한데 뭘, 허허허…”
“뭐가 뻔하다는거야? 자네는 일자무식이지만 나는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야.”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람이 벼슬은 반쪽두 못한것 같구먼?”
“난 벼슬하자구 책을 읽은게 아니야. 인생의 재미나 느끼려구 읽었을뿐이야.”
“아니, 벼슬도 못한다면서 책은 읽어 뭘 하우? 먹은 소 똥 눈다는데…”
“허 참, 에스빠냐에두 우리와 똑같은 속담이 있는 모양이군?”
“사실이 그렇지 않수? 책 많이 읽었으문 바보가 아닌 이상 신부(神父)가 되든지 아니면 바보보다 더한 바보가 되여 우리 주인처럼 편력기사노릇을 하든지…”
“싼쵸, 주인이 없는데서 주인을 바보라고 비방하다니? 자넨 충성스러운 시종이 아니군그래.”
“충성은 무슨 개뿔 같은 충성이요? 먹을알이 있을가 해서 따라다니는거지.”
“주인이 약속한 섬나라 총독자리를 바라는가?”
“아니우. 사람들이 웃음가마리를 만드느라구 나를 총독자리에 한번 앉힌적이 있지만 다시는 그런 장난에 속히우지 않을테요. 문제는 돈이요. 우리 주인이 4백년 동안 모험을 계속하면서 얼마나 많은 책과 영화를 만들어냈소? 하지만 그 돈이 다 출판상이나 영화거간들의 수중에 들어가구 주인이나 나한테는 한푼도 차례지지 않았단 말이요. 주인은 바보여서 돈을 거들떠보지 않지만 난 꼭 그놈들한테서 출연료를 받아낼거요.”
“그나저나 자네 주인은 어디로 갔어?”
“영국의 조무래기녀석을 쫓아다니우. 너무 까불어서…”
“어떤 앤데 자네 주인을 시끄럽게 굴어?”
“해리 포터라구 새로 나온 녀석인데 마술학교를 나와 그런지 별의별 모험을 다한다니까. 고 녀석때문에 우리 주인이 세상에서 잊혀지게 생겼는데 화나지 않게 됐수?”
“자네 주인은 지금두 둘시네아공주를 사랑하는가?”
“말두 마오, 아마 바다가 마르구 돌이 썩는다 해두 그 미친 사랑은 변하지 않을거요. 그 시골구석의 못난 계집애가 인젠 늙어죽은지도 언제인데 그냥 절세의 미인으로 상상하면서…”
“그건 플라톤식의 정신적사랑이라는건데 자네따위가 어찌 알겠는가?”

싼쵸가 비죽거렸다.
“당신두 우리 주인처럼 머리가 좀 돈것 같구만.”

말울음소리가 나더니 돈 끼호떼가 돌아왔다. 명마 로시난테가 숨을 헐떡거리며 주둥이에서 게거품을 흘리는것을 보아 큰 격전을 치른듯했다.

돈 끼호떼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개인명예와 관계되는 사무때문에 학사님과의 면담을 잠시 중단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돈 끼호떼는 떠나기전에 있었던 불유쾌한 언쟁을 잊어버린듯했다. 과연 미치기는 했어도 풍도만은 고상한 귀족 못지 않게 의젓했다.
준이가 말했다.
“아까 기사님의 명예를 손상한데 대하여 사과드립니다.”
“저의 명예를 훼손하는것은 저 해리 포터란 녀석입니다. 그 애는 나오자마자 전세계 어린이들을 사로잡았지요. 물론 매스컴의 일방적인 부추김탓도 있지만…”
“기사님께서는 그 애를 질투하시는겁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그 애의 모험담이 어린이들의 렵기적인 취미만 만족시키는데 있습니다. 저의 모험담처럼 교훈적이 못되고 정신적함양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지요.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그 애를 세상에 내보낸 저자가 영국의 평범한 과부이기에 결투를 요청할수도 없고… 그래서 그 애만 쫓아다니면서 혼내주고있는 판입니다.”
“기사님, 지금세상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세계는 황페해지고있습니다. 세계적인 편력기사로서 기울어지는 세상을 바로잡을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요. 저는 정의를 위해 세상에 태여난 몸입니다. 불행한 고아, 과부, 약자들 켠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는것이 저의 천직이지요. 세상에 불의가 존재하는 한 저는 손에서 창과 방패를 놓지 않을것입니다.”

싼쵸가 주인의 말을 중단시키고 허공을 가리켰다. 돈 끼호떼가 허공을 쳐다보더니 창을 올렸다내렸다하면서 무슨 중세기적인 례의를 표시하는것 같았다. 그리고는 준이한테 얼굴을 돌려 하직을 고했다.

“학사님과 면담을 해보니 동질성이 있어보입니다. 앞으로 무력을 쓸 일이 생기면 저를 불러주십시오. 그럼 안녕히… 자, 싼쵸, 가자!”
두 사람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허공에서 법사님이 껄껄 웃고있었다. 준이는 비꼬아 말했다.
“법사님께서 허공에 홀로 계시자니 심심하신 모양입니다. 저한테 인생역전도 시키시구 어리광대 같은 인물을 친구라고 불러주시구… 신통력이 비범한줄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거 장난이 너무 지나치신거 아닙니까?”

“허허허… 어찌 실없는 장난으로 여기느냐? 너의 심성에 따라 자기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였거늘…”

“돈 끼호떼는 현실적으로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한 미치광이입니다. 법사님께서 저를 돈 끼호떼에 비기는 저의는 무엇입니까?”
“그 친구 혐오스러우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별별 우스운 짓거리를 다해두 밉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저속하지는 않으니까요.”
“그한테는 실제상 닭의 모가지를 비틀만한 힘도 없다. 하지만 그의 정의감, 선량함, 숭고한 사랑은 력사상 그 어느 진짜기사도 따르지 못할것이니라.”

“말씀을 들어보면 법사님께서 오히려 돈 끼호떼 같은 리상주의자이십니다그려?”
“현실주의자니 리상주의자니 하는건 너와 같은 범인(凡人)들의 말공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과 저것의 대립관계에서 어느 한켠에만 집착한다면 미혹에서 영원히 해탈하지 못한다. 현실에선 순수한 진선미가 존재할수 없는데도 한사코 그것만 추구한다면 너의 서양친구처럼 될수 밖에 없느니라.”

“그렇다면 저는 평생을 허무하게 보낸거 아닙니까? 정신적가치에 대한 저의 추구는 부질없는것이였습니까?”
“누가 너의 추구가 잘못되였다더냐? 고만큼한 정신적추구조차 없다면 버러지와 뭐가 다르겠느냐? 너의 천기로 보아서는 반드시 큰 깨달음을 얻을수 있건만 세속의 기운에 너무 짓눌려 자기를 모르고있을뿐이다. 오늘 너한데 심안(心眼)을 틔워주었으니 머리우에서 령광(灵光)이 감돌것이니라. 그 빛을 보고 령계의 인물들이 혹간 너를 찾아갈것이니 그들과 교류하면서 큰 깨달음에 정진하라.”
“법사님, 법사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
“신령적인 존재로 보자니 인간성이 너무 많고 인간적인 존재로 보자니 너무 신령스럽고… 신적인 존재도 인간적인 존재도 아니니까 더구나 신임이 갑니다만…”
“말이 그렇지 이제 산에서 내려가면 또다시 나의 존재를 의심하구 이 모든것을 환상에 밀어붙일것이니라.”
“그럴리가 있습니까?”
“자, 어서 산에서 내려가거라.”
“아니, 잠간만, 저는 아직두 할 말이 많은데요?”
“……”
“법사님!”
“……”
법사님은 다시 응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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