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동방의 피라미들어ㅡ장군총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3
피라미트형의 고분
장군총(將軍塚)은 집안시교의 동북쪽 5킬로메터쯤 상거한 룡산기슭에 우뚝 솟아있다.
마주하는 순간 애급의 피라미트를 바라보는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누구라 없이《금자탑!》하고 부르짖게끔 웅위롭기 한량없는 고구려의 적석고분이였다. 뭇박힌듯 우두커니 서서 그 장엄함에 매혹되여 련속 경탄을 터치는데 예쁘게 생긴 안내원 한족아가씨가 장군총에 대해 까근히 해설해주었다.
장군총의 외형은 잘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방형 7단의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었는데 바닥밑변 한변의 길이는 35.6메터, 높이는 12.4메터 된다. 웃부분은 뽀족하여 면마다 보호하기 위한 큰돌이 세개씩 세워져있다. (12개 받침돌가운데 1개가 잃어져 지금은 11개가 남아있다.) 1100여개의 세밀히 가공된 석재가 사용되였는데 가장 큰 석재의 길이는 5.7메터, 너비는 1.12메터, 두께는 1.10메터나 되였다.
장군총에서 서북 20킬로메터 떨어진 양차향 고대촌 상록수다리부근에서 고구려채석장 하나를 발견했는데 장군총석재와 석질이 똑 같다고 한다. 지금도 정자리가 또렷한 돌과 채 다듬지 않은 석재가 널려있는 채석장은 장군총석재의 원지임이 틀림없다고 하니 돌을 캐여 현지에서 잘 다듬은후 20킬로메터의 험하고 가파로운 산길을 운반했음이 분명하다. 여름의 땡볕에 그을고 겨울의 한풍에 얼면서 선혈로 이룩한 고루려사람들의 장거이다.
맨 밑층의 석재는 허리께를 넘었다. 잘 드는 칼로 썩둑 벤든 곱게 다듬은 석재를 손으로 쓸어보니 너무도 깔끔했다. 정자리 하나 없이 다듬느라니 얼마마한 정력과 지혜가 들었으랴. 자그마한 오차도 없이 모가 딱 맞게 다듬은 석재는 현대도구로 가공한대도 이렇게 바를수가 있을가.
작은돌 무게 15톤
릉묘의 무너지을 방지해 기대여놓은 보호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였는데 높이가 3.5메터쯤씩 되여 보였고 가장 작은 돌의 무게가 15톤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장대석을 받쳐놓은 곳은 지금도 평형을 잡고있는 반면 하나 잃어져있는 뒤면 오른쪽 벽은 돌의 틈새가 벌어지면서 곧 무너져내릴것만 같았다. 참으로 멋으로 기대여놓은 장대석이 아니라 1600여년의 세월을 버티여주게 한 기둥석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고구려사람들의 건축공예에 다시 한번 혀가 차졌다.
다섯번째 층에 묘실까지 통하는 구명이 나있는데 일찍 도굴당할 때 낸 구멍자리라고 한다. 거대의 암석을 어떻게 깨고 들어갔는지가 의문이다.
서늘한 기운이 풍기는 묘실에 들어서니 길이와 너비가 5메터쯤 되고 높이가 그보다 좀 더 높아보이는 널방에 장방형 석관좌가 두개조로 나뉘여져있는것이 보였다. 왕과 왕후의 관을 놓았던 자릴일것이라고 한다. 이 무덤의 서남쪽 1킬로메터쯤 되는 지점에 관개토왕비가 서있어 이 무덤이 가능하게 광개토왕릉묘라고 하는 일설도 있으나 아직 고증이 확실치 않아 어느 왕의 릉묘인지 모르나 확실히 왕의 릉묘인것만은 사실인것 같았다.
고구려벽화무덤의 기원을 3세기무렵까지 밀고올라갈수 있다고 하니 이 적석총은 그 이전의 무덤이 아닐가 생각된다. 빤빤한 묘실벽에 한점 벽화도 그려저있지 않은건 묘주의 신분이 낮아서가 아니라 아직 그러한 문화가 도래되지 않았기때문일것이다.
탄성이 나오는 암괴
묘실의 정상부는 한개의 통 암괴로 덮였는데 60평방메터의 50톤 되는 돌판이라고 한다. 저런 암괴를 어떻게 얹었을가. 탄성이 나오지 않을수 없다. 그 돌판을 버티게 쌓은 묘실벽은 가쯘히 다듬은 석재로 6층되게 쌓아올렸는데 귀가 딱맞고 틈서리가 조금도 없이 맞물려있었다.
묘실을 나와 무덤꼭대기에 오르면 회색무늬의 기와쪼각 같은것을 손쉽게 주을수 있었다. 네면 가장자리의 돌에 인공으로 다듬은 기둥구멍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있게 많이 뚫려있는데 보아하니 전각을 세웠던 자리인것 같았다. 고구려의 대형적석묘 웃부분에는 건축물이 축조되여 있었다는 기재도 있으니 전각이 세워졌댔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장군총뒤의 북쪽 50메터쯤 떨어진 곳에 순장무덤 한자리가 있는것이 보였다. 그 형태는 돌기초우에 세운 돌막이였다. 이런 무덤이 원래 다섯자리 있었다고 하나 지금에 남아있는것이 이것 하나뿐이다. 역시 도굴당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빤히 내다보일만큼 구멍이 펑 뚫려있고 한모서리가 허무러져내리기까지 했다.
태양이 면바로 직하하고있는 점심때쯤이라 장군총꼭대기에 름름히 서서 허리에 손을 찌르고 사위를 둘러봄이 사뭇 위무당당한 기분이였다.
무덤의 방향은 정면이 서남이 되도록 되여있고 네 모서리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있었다.
북쪽으로 룡산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니 비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촌락들과 조선의 군산이 눈에 잡혀온다. 이 땅에 살면서 위대한 문화를 창조한 고구려사람들의 뜨거운 숨결이 금방 피부에 닿는것만 같았다.
연변일보 1999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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