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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위안부와 조선민족남자 댓글:  조회:9  추천:0  2024-11-27
'위안부'와 조선민족 남자 입력 : 2014.08.01 20:5 최근 언론에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많이 오르고 있다. 진짜 를 관심하는 것인지?! [정치인들의 눈 가림인지•••] < 위안부>는 세계 백여 개 나라, 몇 백 개 민족 속에 조선(한국)과 조선민족에게만 속하는 특유의 이다. < 위안부>는 한 세 기전 일본이 조선을 멸하고 조선과조선민족사내들에게 들씌운 치욕의 오강이다.. 나는 일본 애들 말하지 않는다.조선민족 여성들이 강 족에게 끌려 다닌 적이 처음이고, 일본애들 뿐이가? 예전부터 나는 조선민족사내들을 말한다. 나도 조선사내지만... 사내란 게 제 나라, 제 여자를 지키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고 그 많은 아녀자들이 오랑캐들에 끌려 다니며 치욕 당했는가?! 역사상 그것도 한번 아니고... ... 세계 백여개 나라 몇 백 개 민족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왜 세계 그많은 나라, 민족 중에 유독 조선과 조선민족에게만 가 있고, 란 딱지가 붙는가?! 조선,한국,중국조선족들이 사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슬쩍 살펴보면 왜(外)족에 쫓기고 강적을 섬기며 동족끼리 살육하는 세월이었다고 본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조정이 부패무능하고 관리, 양반들이 늘 기생, 여자들을 차고 강가, 숲 속을 누비며 북, 장단 속에 를 꼬부랑 외치며 아녀자들 치마속에 묻혀 삶의 을 향수하며 세월을 보낸다. 덕으로 이웃나라, 민족에게 큰 땅덩이를 다 때웠고 쪼고만 조선반도로 몰 리였다. 후로는 바다건너 작은 섬나라 일본 애들에게 망하는 꼴이 됐고 민족에게 [위안부]란 세계에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도 얻게 되였다. 현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라가 분열되고 혈육이 갈라져 사는 민족이다. 그 현황에서도 한시도 한 피 줄타고 난 형제를 비방하고 멸하지 못하여 이를 갈고 있다. 조선민족이 반성하고 사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잍본을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여성들이 제 남자들을 원망하고 그들에게서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조선민족남자들이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제 여자를 잘 보호하였으면 그 여자들이 왜(外)족들에게 끌려 다니며 굴욕을 당 하 였게는가? ! 조선사내들이 제 책임을 다 하였으면 조선나라 조선민족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란 치욕적인 딱지가 붙어 겠 는가?!조선민족사내들이 똑똑하고 잘하였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일본 애들이 사과할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사내들이 우리여성들에게 심심히 허리 굽혀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 왜,조선민족이 이렇게 되였는가? 왜,조선민족에게 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가 붙게 되였는가?! 전체 조선민족이 사유해 볼 일이라고 본다. 부끄럽게 떠들썩거리지 말고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한국경기도안성에서 여때 여건이 안 되여 써놓아 던 글을 이제야 올려 본다. 글 : 소옹 © 동포투데이
62    핵보다 귀한 것을 가진 북한(조선) 댓글:  조회:21  추천:0  2024-11-26
핵보다 귀한 것을 가진 북한     우리 자본주의 속물사회가 떠드는 것을 보면, 북한이 마치 가진 것이라곤 핵밖에 없는 가난한 거지국가여서 하루빨리 잘 사는 부자나라에 핵을 팔고 자기네도 잘 살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착각이 아닐까?   속물 자본주의 사회의 터무니없는 자가당착, 자아도취에 빠진 어리석은 시선이 보여져서 측은할 뿐이다. 이는 이 사회의 부자나 성공했다는 자들이, 남들도 다 자기처럼 되고싶어 안달할 거라고 넘겨짚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이다.   내가 한가지 묻고 싶다. 그럼 우리는 그렇게 잘 사는 행복한 부자나라인데 왜 이를테면 TV며 인터넷에는 늘상 탐욕스러운 입들이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광경들이 주야장창 흘러나오는가? 마치 먹을 것이라곤 몇 개월은 구경도 못한 거지들의 나라처럼 말이다.    못 가졌다고 거지가 아니다. 더 갖지 못해 비굴한 자가 바로 거지이다. 가진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더 갖지 못해 초조하고 갈급하고 게걸스럽다면 그게 바로 거지이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종류의 인간들 아니던가?   더 많은 물질과 돈과 명성과 기타 등등을 갖지 못해 초조하고 갈급하고 게걸들린 그 눈빛들, 그걸 갖기 위해 온갖 추한 짓을 서슴지 않으며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애타는 표정들, 그거야말로 우리가 어디서나 발에 채이도록 흔히 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걸신들린 사회라고 생각한다. 음식에 물질에 갖가지 쾌락들에, 넘치는 욕망에 스스로 중독되어 절제가 안되는 병든 사회이다. 그건 못 가져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많이 가졌기에 오는 해결할 수 없는 기갈이다.   욕망은 가지면 가질수록 부풀어 오른다. 절제는 탐하면 탐할수록 더 어려워진다. 편안함과 쾌락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불편하고 거친 삶으로 돌아오기란 어렵다. 혀와 감각의 단맛은 인간을 포섭하고 나약하게 만들어 더욱 더 물질에 의존하고 탐욕을 부리게 만든다.   우리는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물질을 많이 가졌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속물 자본주의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의 태반을 차지한 가난한 사람들, 약자들, 보통 서민들, 노동자 농민들, 이들 모두는 실패한 불행한 인생이 된다. 그들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지주이고 뿌리인데도 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남들의 천대와 무관심을 받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해 너도나도 죽도록 노력해서 남들이 가진 것을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가난하고 약해진다는 것은 바로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버림받은 신세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나라 북한은, 노동자들이 주인인 나라여서 망치와 낫과 펜을 새긴 노동당이 국가 운영권을 쥐고, 물론 최고지도자라는 사람도 일개 노동자여서 검게 탄 얼굴로 밤낮 주야로 전국의 현장들을 찾아다니는 나라이다.   적어도 그 나라 북한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직장에서 똑같이 배급표 한장씩을 받아 훌륭한 국영식당에서 다 같이 똑같은 점심 한 그릇씩 먹고, 퇴근길에 줄지어 서서 똑같은 맥주 한 잔씩 나눠 마실 줄 아는 나라이다.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나라, 사람들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니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내 아파트, 내 땅값이 치솟아야 좋은 나라인가? 젊은이들의 꿈이 건물주인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 극소수 부자들의 허영과 허세를 수천만 서민들이 매스컴으로 눈요기하는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교통수단과 발전소와 기업과 공장과 병원과 학교와 어린이집과 식당들이 모두 국영이어서,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욕망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해 운영되고, 모두가 안전하고 믿을만한 환경에서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우리가 못 가진 정말 귀한 것을 북한이 가진 것이다. 교통수단과 발전소와 기업과 공장과 병원과 학교와 어린이집과 식당들이 죄다 개인들이 돈을 벌어먹기 위해 만든 욕망의 장치들이어서, 믿을 수 없고 위험한 음식을 먹고 치료를 받으며 애들을 맡겨야 하는 우리가 절실히 못 가진 것을 말이다.   나는 북한이 자신이 가진 귀한 것을 모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건 바로 사람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이고, 한낱 물질을 위해 그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나라를, 바로 전 지구를 몰락으로 이끌고 있는 고작해야 자본주의 국가 따위나 되라는 것이 저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평양이며 개성이며 신의주가 빌딩숲으로 뒤덮히고 네온사인으로 북적이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온갖 사장들과 투기꾼들과 건물주들이 불어난다는 것이 무엇인가? 부자들만이 가는 식당과 학교와 병원이 생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타락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세계의 출구 없는 자본주의, 무한 욕망의 대결장이 또 다른 엘도라도를 찾아냈다. 미개척의 처녀지 북한을 말이다. 그럼 자본주의 각국에 뿌리박은 투기세력들을, 도려낼래야 도려낼 수도 없이 일체가 된 종양들을 북한더러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같이 좀비가 되자는 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자본주의는 이미 종말단계에 들어섰다. 각성하지 않으면 나라가 아니라 전세계가 사라질 것이다.   보다 겸허하고 소박하며 사람을 존중하는 문명, 욕망을 근거로 작동하지 않는 문명을 일궈내야 한다. 그런 문명을 상상하기 어렵다면 가난하고 행복한 나라들, 아직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나라들을 돌아봐야 한다. 돌아보고 뼈저리게 배워야 한다.    헌데 그러기는커녕, 조금 더 가졌다고 덜 가진 사람들을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그 천한 속물 자본주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고, 오존층 한번 파괴한적 없고 공장굴뚝으로 미세먼지나 온실가스 뿜어낸 적도 없으며 움막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평화로운 사람들을 비웃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나라들은 몰락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름아니라 그 속의 사람들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단맛에 길들여지고 욕망의 논리에 포섭되어 지지리 가난하면서도 극소수 부자들의 천한 세계관의 앞잡이로 사는 자들이 가득할 때, 몰락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핵보다 열배는 귀한 것을 가졌다. 그건 바로 사람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사회,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존중받으며 다같이 주인공이 되는 사회를 향한 이상이다. 부디 초심을 잃지 말기를, 지구를 파멸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막차가 되지말고 인류를 구원할 새문명의 첫차가 되기를 바란다.   -우창헌-  
61    차비하라 민족반역아들아 댓글:  조회:88  추천:0  2024-11-16
《탈북자》! 네놈들은 인간쓰레기들 꽃제비같이 살고파 시궁창(남조선;한국)으로 찾아들어간 버러지들 인간추물들이여서 애당초 소중한것이 하나도 없는 놈들 부실한 잔명을 위해 태를 묻은 고향도, 품어준 조국도 서슴없이 저버린 놈들 하여 네놈들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억속에서 추악한 그 몰골을 증오의 불길로 태워버렸다 뭇꽃이 피여나던 고향의 들판은 증오의 분화구가 되였다 조국은 인간이기를 그만둔 네놈들을 추악한 인간쓰레기, 민족반역자, 천하의 역적으로 영원히 락인지었거니 네놈들은 인간오작품으로 무서운 수치를 안고 몸부림치리라 해빛을 등진 생쥐같은 네놈들 이 땅에 지은 죄 씻을 길 없건만 오, 또다시 만고대역죄 덧쌓았으니 천추에 용납할수 있으랴 태양이 있기에 이 땅의 모든 생이 있는 법 삶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은혜로운 그 태양을 감히 네놈들이 가리우려 했으니 어찌 네놈들을 징벌하지 않으랴 악담질한 네놈들의 혀바닥을 쭉 뽑아 칼탕을 쳐도 씨원치 않고 더러운 몸뚱아리를 갈가리 찢어도 분을 삭일수 없음이 이 땅의 민심이다 헌데 미친개는 주인믿고 설치고 짖는다고 속통이 먹통같은 남조선당국것들이 네놈들을 옆구리에 척 끼고서 나발통을 불도록 적극 부추긴다니 앞에서는 《대화》와 《협력》을 읊조리며 삵의 미소를 짓고 돌아앉아서는 검은 흉심을 품고 동족대결의 칼을 가는 남조선당국것들 비루먹은 《탈북자》 네놈들에게 뜨물통 아낌없이 기울여주며 대결망동부리라 추동질하더니 이제와선 아닌보살 모르쇠를 하니 구미여우인들 이보다 더 하랴 《탈북자》쓰레기들이나 그걸 멍석처럼 깔고앉은 멍텅구리들이나 모두 배꼽맞은 한통속것들이니 가릴것도 없고 잴것도 없다 한바리에 실어도 짝지지 않을 네놈들이 죄를 짓고도 또다시 하늘을 볼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한으로 될터이니 차비하라 민족반역아들아 구린내나는 주둥이로 다시는 짖어댈수 없게 죄악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도록 우리 엄정히 결산하리라 세상 제일 더러운것들 펄펄 끓는 지옥의 불가마속에 처넣어 한줌 재도 남지 않게 죽어도 이 땅에 묻힐수 없게 이 행성밖으로 내던지리라! 우리민족끼리
60    삼황오제 댓글:  조회:217  추천:0  2024-10-13
皇,古为上天,光明之意,“因给予万物生机谓之皇”   帝者,生物之主,兴益之宗,“因其生育之功谓之帝”   皇为上,帝为下,古人的皇帝意指天地,而皇帝一词则是告诉人们,天地是万物之主。   上古时代(三皇五帝)   三皇:伏羲、女娲、神农   五帝:黄帝、颛顼、帝喾、唐尧、虞舜   三皇五帝是中国在夏朝以前出现在传说中的“帝王”。从三皇时代到五帝时代,历年无确数,最少数千年。三皇五帝,并不是真正的帝王,仅仅是原始社会中后期出现的为人类作出卓越贡献的部落首领或部落联盟首领,后人追尊他们为“皇”或“帝”。三皇五帝是中华上古杰出首领的代表。三皇五帝率领民众开创了中华上古文明,近现代考古发现了大量与这一时期相对应的龙山文化遗址,证明三皇五帝时期确实存在。基本上,无论是按照史书记载或者中国神话传说,都认为三皇所处的年代远早于五帝的年代。   近代考古在中原地区发现的裴李岗文化及贾湖文化等,从7,000年前至10,000年前已经进入农业社会,其中出土的具有文字性质的龟骨契刻符号与约3,000年前的殷商甲骨文有类同和相似之处。   三皇简介   伏羲氏,又称皇羲,以通神明之德创八卦,教民结网,从事渔猎畜牧,致嫁娶,以丽皮为礼,造书契,以代结绳之政。而已考古发现中国最早的文字,就约在五千年前,因此,伏羲氏确实应该是中华文化最早的代表。   女娲是在伏羲氏以后为天下共主,他作笙簧,是音乐的开始,传说她练石以补天,聚芦灰以止滔水。   神农氏(炎帝)继女娲后为天下共主,传说他是农耕和医药的发明者,又创造了五弦琴,开始蜡祭和市场。看来,至他开始,中华民族开始进入农耕社会。   上古时代统治顺序(氏族、别称、简介)  1、 盘古氏 天皇氏 地皇氏 人皇氏 有巢氏 燧人氏 太昊伏羲氏(天皇) () 女娲氏 大庭氏 柏皇氏 中央氏 栗陆氏 骊连氏 赫胥氏 尊卢氏 混沌氏 皞英氏 后有巢氏 朱襄氏 葛天氏 阴康氏 无怀氏 庖牺氏 神农氏    2、神农氏신농씨:地皇、炎帝、姜榆罔,(前4082年-前3702年)。神农氏是中国古代汉族神话传说中的人物。作为五氏出现的最后一位神祇,他的出现以后,结束了一个时代。因以农业为主,他的部落称神农部落。中华大地经过三皇的辛勤努力,中华世界有了很大的进步,但人们的生活依然非常艰难。这时,伟大的各种神祇人物,应运而生。就在三皇之后,又经过漫长的若干年代,出现了下列五氏:有巢氏;燧人氏;伏羲氏;女娲氏;神农氏。五氏的“氏”的原意也是神祇,但神性比“皇”更少些,可列入第三个级别神祇。神农氏;因为他的肚皮是透明的,可以看见各种植物在肚子里的反应。神农氏又被尊为医药之祖,曾亲自用口品尝百草,发明药物及教人治病。这样能分辨什么植物可以吃,什么植物不可以吃,亲尝百草,以辨别药物作用。后世传说神农氏玲珑玉体,能见其肺肝五脏,因而能化解百毒,又传说他因尝百足虫(一说断肠草),不能解其毒而死。另有传说神农氏即炎帝。神农氏撰写了人类最早的著作《神农本草经》、教人种植五谷、豢养家畜,使中国汉族农业社会结构完成。    3、有熊氏유웅씨:黄帝,泰皇,姬姓,轩辕氏,号有熊,(前2698年--前2598年)。建都邑,立百官,制典章,举贤能,命臣民建屋室,种五谷,作衣裳,造舟车,文字、医学、算数、历法、乐器、陶器、蚕桑等发明相继出现。黄帝身边史官仓颉造了字。黄帝用宝鼎观测太阳运行,推算历法节气日辰,发明天干记日法,用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十个字,逐日依次用一个字来标记一天。中国最早数学知识和数学工具在黄帝时代发明,最早算数由隶首创作。黄帝正妃嫘祖发明养蚕,教给人利用丝茧编织衣服。由于黄帝贤德,万国安定,年年丰收,百姓富足,后世尊轩辕黄帝为人文初祖。姓姬(或云公孙),号轩辕氏、有熊氏,原居于西北,后迁徙至涿鹿(今河北涿鹿东南)一带。炎帝传为神农氏,姜姓,号烈山氏或厉山氏。时南方强悍的九黎族,在其首领蚩尤率领之下,和炎帝争夺黄河下游地区,炎帝失败,向北逃串,向黄帝求救,并结为联盟。黄帝统帅炎、黄二部与蚩尤战于涿鹿之野,黄帝在大将风后,力牧的辅佐下,大败蚩尤,结果蚩尤被杀。涿鹿之战后,炎黄两部落发生战争,黄帝击败了炎帝。从此,中原各部落咸尊黄帝为共主,炎、黄等部落在黄帝的领导下融合成华夏民族。故中华民族素自承为『黄帝后裔』,又因炎、黄两部落融合成华夏民族,故也称为『炎黄子孙』    4、金天氏금천씨: 少昊, 姬玄嚣,(前2598年--前2514年)。    5、高阳氏고양씨:颛顼,姬颛顼,(前2514年-前2436年)。黄帝升天后,颛顼即位(号高阳),教导百姓养殖牲畜,充分利用地力,推算四时节令以顺应自然,依顺鬼神以制定礼义,理顺四时五行之气以教化万民,洁净身心以祭祀鬼神。    6、高辛氏고신씨:帝喾,姬夋,(前2436年--前2392年)。颛顼死后,帝喾即位(号高辛),爱护教化万民,推算日月运行以定岁时节气。    7、帝挚: 姬挚,高辛氏,(前2392年--前2383年)。帝喾死后挚接替帝位,没干出政绩,于是尧登位(号陶唐)。    8、陶唐氏도당씨:唐尧,伊祁放勋,(前2383年--前2282年)。尧制定历法教给民众,告诫百官各守其职。    9、有虞氏유우씨:虞舜,姚重华,(前2279年--前2240年)。尧将帝位禅让给舜(号有虞),舜校选贤任能,按绩升贬,修明礼仪,慎用刑罚,疏浚河川,校正四时节气,统一音律和长度、容量、重量标准。    10、有虞氏:帝商均。 该文章《上古时代皇帝列表,上古时代有哪几位皇帝》来源于出国留学网,网址:https://www.liuxue86.com/a/2419526.html  
59    고구려, 어지간해선 멸망할 수 없었다 댓글:  조회:173  추천:0  2024-10-13
외적의 위협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과거 중국의 역사는 크게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시기인 5세기 이전에는 주로 중원의 서북쪽에 있는 이민족들이 중국을 위협했다. 흉노족·선비족 등의 위협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제2시기인 5세기부터 14세기까지는 위협의 방향이 분산되어, 서북 및 동북 양쪽에서 중원에 대한 위협이 가해졌다. 서북쪽의 유연·돌궐·몽골, 동북쪽의 고구려·발해·거란·여진의 위협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제3시기인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동북쪽이 중원을 위협하는 핵심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동북쪽에 있던 만주족은 중원을 장악하여 청나라를 지배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마지막인 제4시기에는 주로 해상으로부터 위협이 가해졌다. 아편전쟁(1840년) 이후의 상황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개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5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중원의 동북쪽에 있는 민족들이 점차 성장하던 시기였다. 제2시기와 제3시기에 중원의 일부 혹은 전체를 장악한 동북쪽 민족으로는 요나라(거란족), 금나라(여진족), 청나라(만주족)가 있었다. 몽골족도 아시아 동북쪽의 민족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에 관해서는 좀 더 고찰이 필요하리라 본다.  위와 같이, 5세기 이후로 아시아 동북쪽은 점차 상승 분위기를 타고 있었다. 마치 오늘날 세계문화의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듯이, 5세기 이후의 아시아에서는 힘의 중심이 서서히 동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추세를 고려해 볼 때, 중원 동북쪽의 민족들이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던 7세기에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동북쪽의 전반적인 상승세에 더해 고구려는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612년부터 4차에 걸친 국제대전에서 세계제국 수나라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당 태종의 2차에 걸친 침공을 모두 격퇴한 것으로부터 그 국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런 고구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가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에게 멸망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최근 대하드라마 에서도 ‘고구려의 지친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에서 전쟁으로 지치지 않은 민족은 없었다. 누가 더 많이 지쳤는가를 기준으로 하면, 당나라도 고구려 못지않게 지쳐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오랜 전쟁으로 지쳤기 때문에”라고 설명하는 논리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그 오랜 전쟁에서 번번이 승리한 쪽은 고구려이었다. 그리고 매번 패배한 쪽은 중국이었다. 그런데 오랜 전쟁에서 번번이 승리한 쪽은 지쳐서 멸망하고, 매번 패배한 쪽이 지치지 않고 승리했다고 하는 설명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다.  오랜 전쟁으로 지쳐서 멸망했다고 한다면, 고구려가 아니라 중국이 멸망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장기적인 전쟁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럼, 고구려 멸망의 첫째 원인으로 무엇을 꼽아야 할까? 우리는 그 단서를 당 태종의 유조(遺詔, 군주의 유언)와 그 이후의 상황 변화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고 한쪽 눈까지 실명한 것으로 알려진 당 태종은 죽을 때에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같은 중국 역사서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이 유조는 이후 천년이 넘도록 중국 황제들에게 두고두고 기억되었다. 그 후 중국 내부에서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야심’이 부각될 때마다 자체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억누르기 위해 제시되곤 하던 것이 바로 당 태종의 유조였다.  그런데 역대 황제들에 의해서 아주 잘 지켜진 이 유조은 정작 당 태종의 아들 고종에 의해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당 고종은 한족 황제 중에서 이 유조를 지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유조를 어기고 대(對)고구려 전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전근대 시대의 중국에서 선(先)황제의 유조는 곧 법률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황제일지라도 객관적인 명분 없이 그러한 유조를 어기기는 힘들었다.  그럼, 당 고종이 아버지의 유언을 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외전쟁 같은 중대 사안에서는 황제의 사심이 관료들의 공론에 의해 묻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나라 정부에서 당 태종의 유조를 어긴 데에는 무언가 객관적인 명분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 그 객관적 명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라의 협공 약속이었다. 고구려 대 중국의 대결에서는 당 태종의 말처럼 승리를 기대하기 힘들지만 고구려 배후에 있는 신라의 협공을 이끌어내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당 고종은 아버지의 철석 같은 유조를 어기고 고구려 침공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종전에는 고구려 대 중국의 전쟁에서 신라·백제는 대체로 관망의 자세를 취했었다. 중국을 지지한다고 말한 적은 있지만, 그 경우에도 정작 군사적 협공만큼은 꺼려한 두 나라였다. 다시 말해, 김춘추·김유신처럼 노골적으로 중국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 사람들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종래에 고구려와의 단독 대결에서 한번도 고구려를 꺾은 적이 없는 중국은 고구려 배후에 있는 신라의 협공에 힘입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장본인은 당나라였지만, 그것은 신라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추세나 고구려의 국력으로 볼 때에 고구려는 ‘웬만해선 멸망할 수 없는 나라’였지만, 신라의 협공이라는 의외의 변수가 국면을 뒤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의 협공이라는 중대한 상황 변화가 있었기에 당 고종은 태종의 유조를 어기고 고구려 침공에 나서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5세기 이후 아시아 동북쪽의 상승세를 타고 급성장하던 고구려는 신라에게 꼬리가 잡혀 결국 중원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고구려·발해 멸망 이후 그 지역에 있던 거란족·여진족이 결국 중원 진출에 성공했다는 것은 당시의 동북쪽이 기본적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는 자체 기운이 상승함과 동시에 반미감정이 서서히 확산되고 있고, 또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미국과 정면승부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상당히 모호하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한미동맹으로 북한을 붕괴시키자’는 수구세력의 논리가 일정한 힘을 갖고 있다. 과연, 미국은 당나라가 되어야 하고, 한국은 신라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일부 사람들은 고구려와 신라가 상호 적대적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두 나라가 같은 민족이었음을 부정하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오늘날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남과 북도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일부 사람들은 ‘민족’이라는 단어가 근대에 와서 출현한 점을 들어 고구려와 신라가 동류의식을 가졌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지만, 어느 시대에나 ‘우리’라는 의식은 존재했고 그 ‘우리’라는 표현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라는 의식이 없었다면, 지난 수천 년간 한민족의 민중들이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똘똘 뭉친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오늘날의 우리가 수구세력의 주장처럼 미국과 합세하여 북한 붕괴에 일조를 가한다면, 북한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니라 미국의 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훗날의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21세기판 ‘짝퉁 신라’라며 두고두고 손가락질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미국에 정면 승부를 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동족인 북한과 외세인 미국의 대결’에서 동족을 해하고 외세를 편드는 ‘반인륜’ 만큼은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58    문란紊亂인가 자유自由인가 '섹스천국' 신라新羅 댓글:  조회:233  추천:0  2024-10-05
문란인가 자유인가 '섹스천국' 신라 뉴시스 입력 2009.08.12. 13:11 업데이트 2009.08.14. 10:31 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 스캔들 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 스캔들 여자도 왕이 될 수 있었던 나라, 과부나 연상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왕후가 화랑과 사랑에 빠져 도망하기도 하고 형의 아내를 물려받던 나라, 왕에게 전문적으로 섹스를 제공하는 특수 상류계층이 존재한 나라, 남매끼리 결혼이 자연스러웠고 남자도 신분이 높은 여자에게는 몸을 바쳐야 했던 나라…. 신라다. '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스캔들'은 이러한 신라의 특성에 주목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신라는 자유로운 성(性)을 신국의 도(道)로 섬기는 대단히 개방적인 나라였다. 이 책에 실린 12개 연애스캔들은 곧 신국 최고의 위험한 로맨스들이다. 신라의 역사를 처음 접할 때면 현대의 기준으로 봐도 너무나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에 놀라게 된다. 신라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여러 남자를 거느릴 수 있었다. 남매간 결혼이나 남색도 크게 허물이 되지 않았다. 특히 주목할 것은 신라의 색공지신(色供之臣) 가문이다. 왕실에 색을 제공하는 특성화 집안으로 이 집에서 태어난 여자는 숱한 왕실 남자들과 관계하며 엄청난 권력을 누렸다. 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도 색공지신 가문 출신이다. 소년 진평왕에게 음사를 가르친 미실의 이야기, 남편을 주고받은 선덕과 천명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신라가 화랑을 어떻게 운영했는 지도 세세하게 알 수 있다. 박은몽 지음, 264쪽, 1만2000원, 랜덤하우스코리아 [추천! 오늘 읽을 책]
57    슬픈 사색 댓글:  조회:220  추천:0  2024-09-07
우리 중국 조선족들은 오늘날처럼 처량해보기는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이 세상에 성립을 고하면서 우리 조선족들은 그들과 많은 운명을 하였다. 말도 많고 풍파도 많고 위험도 많았던 중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조선 사람이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중국 56개 민족중의 일원으로서 이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망국의 쓴맛을 맛볼 대로 맛본 부모님 세대들은 중국에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할 줄 알았다. 부모님 세대들은 고향에서 깨여진 꿈을 중국에서 하나하나 주어모아 키우기 시작하였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그들의 꿈을 누가 공짜로 실현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여 중국공산당과 공조하면서 신임을 얻어 사회의 직위와 권리를 늘여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소수민족 중 민족간부 비례가 가장 높았고 우리 말 우리글을 배울 수 있는 소학교로부터 대학교까지 구전이 갖추어놓았고 우리 말 신문사, 방송국도 꾸리고 민족 촌, 민족향진, 자치주가 생겨났다.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하에 사라져가던 우리 말, 우리글을 부모님 세대들은 중국이라는 이국에서 새롭게 꽃피워 갔다. 나는 지금 일 글을 쓰면서 우리 부모님 세대들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또 그들의 현명한 처사와 먼 앞날을 내다보는 고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후대들에게 지상낙원을 만들어 주기 위해 부모님 세대들은 피와 땀을 흘렸고 심지어 아까운 생명가지 바쳤다. 뿐만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 이 나라에서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민족자존심도 심어주었다. 해마다 조선족 촌들을 기본 단위로 운동회를 조직함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 단합하는 모범도 보여 주었다. 지금 우리 중국 조선족들은 오늘날처럼 처량해보기는 없었다. 촌은 황폐하고 학교는 무너져 가고 총각들 장가들기 힘들고 가족은 동강나고 빚 때문에 숨어 다니고... 적지 않은 우리 조선족들이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한중수교나 “잘 살지만 또 무정한 고국-한국”에서 찾고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언제 고국인 한국이나 조선을 원망했던가. 그리고 또 중국을 원망했던가. 원망이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원망, 원망만 하다간 원망만 생길 뿐 아무런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을 그래 모른단 말인가.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에서 물러간 것도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총 들고 나서서 싸웠기 때문이지 집에 앉아 무릎을 치며 넋두리 원망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한중수교 어언30년이 넘었다. 양국 두 정부사이 엄청난 발전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우리 같은 민족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퇴보를 가져오고 있다. 서로 의심하고 깔보고 비난하고... 조선족(한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나는 구태여 한국이 어쩌고저쩌고 말하고 싶지 않다. 마치 친구사이 모순이 생겼을 때 먼저 친구에게서 잘못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 못을 먼저 찾듯이. 그래서 “한중수교가 없었더라면”이라는 가설로 오늘날 우리 조선족사회의 모든 불행을 한국에 떠밀지 말아야 한다. 그런 가설은 다만 독자들을 오도하게 되고 그보다도 우리 조선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에 가서 진짜 약만 팔고 가짜 약을 팔지 않았다면... 만약 친척방문을 간 조선족이 한국친척에게 정신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기한내로 중국으로 돌아왔다면... 조선족연수생이 말 그대로 연수하고 계약대로 중국으로 돌아왔다면... 한국에서 조선족들이 조용히 돈벌이에만 전념하고 패거리 싸움을 하지 않았다면... 이국이라고 외롭다는 핑계로 돈 번다는 우월감으로 고향의 가족을 멀리하고 임시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나 중국의 한국기업에서 월급을 더 많이 주는곳이 있다고 미리 통보도 없이 훌쩍 떠나가는 현상이 없었다면. 같은 민족이라고 믿고 맡기는 거금을 가지고 달아나지 않았다면... 허황한 황금 몽에 외국수속 함네 하고 논을 팔아치우고 빈둥거리며 놀지 않았다면... 외국에서 눈물겹게 벌어 보내온 돈을 마작 판에 화투판에 밀어 넣지 않고 사흘이 멀다하게 식당으로 카라OK로 가지 않았다면... 개혁개방당시 우리 민족의 특색인 김치 짠지를 가지고 도시 진출하던 그 창업정신과 근면을 오늘날까지 보존 발전하였다면... 눈앞의 이익만 보고 어린자식들을 한족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면... 돈을 급급히 향수하는데 쓰지 않고 기술을 배우거나 경제활동에 참여하는데 쓰였다면... 민족간부들과 민족지식인들이 한중간 민간교류가 활발히 벌어지는 그때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한국인과 사회주의 체제의 조선족들과 있게 될 마찰과 모순에 대한 심도 있게 연구하고 미리 발전방향과 대응책을 내놓았다면... 그리고, 우리 부모님 세대들의 삶의 지혜와 그 정신, 모든 일을 남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열심히 삶의 환경을 개선하고 주위와의 관계를 유연하게 보존하면서 신임을 쌓아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서 낯 설은 곳에서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배낭을 풀어 살기 좋은 제2고향을 만들어내는 부모님 세대들의 간고분투와 자력갱생하는 정신 그리고 그 어디서나 진공과 방어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그 지혜를 이어받았다면 그리고 자기들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발휘함으로서 단점을 미봉할 줄 아는 자아완성의 방법을 이어받았다면 오늘의 불행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 힘냅시다. 오늘의 사회가 아무리 살기 어렵고 경쟁이 치열하고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어찌 우리 부모님 세대들의 그 헐망한 세상과 비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운명은 바로 우리들의 손에 쥐여져 있습니다. 마치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중국에서 오늘날의 기업을 일떠세웠듯이 우리도 우리들의 내일의 기업을 위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다듬어 진정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국제시민이 되기에 다 함께 노력합니다. 우리들의 가치는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또한 우리 민족이 이 세상에서 우수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새봄이 상큼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군요. 일년지계는 봄에 있고 일일지계는 아침에 있다고 합니다. 새해 아침부터 좋은 하루 되시고 새봄에 품은 아름다운 씨앗이 가을엔 주렁 진 열매를 맺기를 삼가 바랍니다. [소감: 이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우리의 앞날을 개척하기위해 피와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얼에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들도 생존을 위해 금전이 필요 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이 후대를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 단아한 민족 주거지, 교육시설, 민족문화 ...이것을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였습니까. 하여 지금은 많은 조선족 인재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민족의 명맥이 점점 미약해져 감을 느낍니다. 여기에는 후손인 우리들이 책임과 의무를 다 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지금 국내에 있는 단체나 인사들 중, 그리고 재한 교포들 중 동포사회를 위해 발 벗고 나서서 자원봉사 하는 분들을 보면 매우 존경스럽습니다. 누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사명감을 가지고 힘을 합쳐서 선조들의 얼을 이어 갑시다. ]
56    [친구찾기] 친구 김효정 金效廷 찾아요 댓글:  조회:245  추천:0  2024-08-26
건공소학교 1반, 실험중2007년급 1반, 연길시2중 2반(2014년 졸업) 졸업한 동창생 김효정 金效廷 (본명 김란 金兰)을 찾습니다. 김효정金效廷씨 생일은 1994년 1월 20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집은 철남 재정국 근처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효정씨의 친구거나 김효정씨를 알고 계신분, 현재 김효정씨와 연락하고 계신 분들은 저한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위챗: 15944318256 QQ: 2934636643, 2047940864 mail: 2047940864@qq.com huangjingyou0433@163.com
55    한복 韓服 —이상각 — 댓글:  조회:496  추천:0  2024-06-29
  한 복 韓服   — 이상각 — 당신의 살결처럼 부드럽습니다 당신의 체취처럼 향긋합니다 당신의 모습처럼 어여쁩니다 당신 몸에 어울리는 당신의 한복 언제나 당신을 떠날수없습니다 조용히 서있으면 노을입니다 사뿐히 걸어가면 물결입니다 말쑥한 그 모습 선녀입니다 마음으로 만져본 당신의 한복 이 몸도 당신을 떠날수 없습니다
54    광고 책구합니다 "녀자애들의 왕국 사내애들의 천당" 댓글:  조회:889  추천:15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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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광고 중고책 사렵니다 "녀자애들의 왕국, 사내애들의 천당" 댓글:  조회:887  추천:7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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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고구려,백제, 신라,가야, 발해 왕계표 댓글:  조회:1078  추천:0  2023-09-03
  고구려 왕계표 왕명 : 왕, 태왕(太王), 대왕(大王), 열제(烈帝) - 성(姓) : 고(高) - 28대 705년(7161~7865, BC37?∼서기668)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연호 재위기간 약 사 1 추모왕(芻慕 鄒牟) 주몽왕(朱蒙王) 동명성왕(東明聖王) 7161-BC37 다물 多勿 18 名은 주몽(朱蒙), 추모. 해모수의 4세손. 父는 불리지, 母는 하백의 딸 류화柳花. 2 유리명왕(琉璃明王) 7179-BC19 37 名은 유리, 유류(孺留), 여률(북사). 母는 예씨부인. 3 대무신왕(大武神王) 7215-18 26 대해주류왕. 名은 무휼(無恤), 막래(북사).母는 다물국 송양의 딸 송씨부인. 4 민중왕(閔中王) 7241-44 4 名은 해색주(解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5 모본왕(慕本王) 7245-48 5 名은 해우(解憂), 해애루. 대무신왕의 원자. 6 태조왕(太祖王) 7250-53 융무 隆武 93 국조왕. 名은 궁(宮). 유리왕의 2대손. 륭무(隆武) 7 차대왕(次大王) 7343-146 19 名은 수성(遂成). 태조왕의 동생.명림답부에게 죽음 8 신대왕(新大王) 7362-165 14 名은 백고(伯固) , 백구(伯句). 태조왕의 막내동생. 9 고국천왕(故國川王) 7376-179 18 名은 남무(男武), 이이모(북사). 신대왕의 2자 10 산상왕(山上王) 7394-197 30 名은 연우(延憂) ,위궁(位宮).신대왕의4자(형 발기를 제끼고 왕이되어 형 발기가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죽음)선황후우(형수)를 황후로 맞이함.을파소 참전계경 11 동천왕(東川王) 7424-227 21 동양왕. 名은 우위거(憂位居). 12 중천왕(中川王) 7445-248 22 중양왕. 名은 연불(然弗). 13 서천왕(西川王) 7467-270 22 서양왕. 名은 약로(藥盧) , 약우(若友). 14 봉상왕(烽上王) 7489-292 8 치갈왕. 名은 상부(相夫) , 삽시루. 15 미천왕(美川王) 7497-300 31 호양왕. 名은 을불(乙弗) , 우불(憂弗). 서천왕2대손. 父는 고추가 돌고. 16 고국원왕(故國原王) 7528-331 永和 40 국강상왕. 名은 사유(斯由) , 쇠(釗).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교전중 사망. 17 소수림왕(小獸林王) 7568-371 13 소해주류왕. 名은 구부(丘夫). 18 고국양왕(故國壤王) 7581-384 8 名은 이련(伊連) , 지지(只支) 소수림왕의 아우. 19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7589-392 영락 永樂 21 광개토경호태왕, 名은 담덕(談德). 20 장수왕(長壽王) 7610-413 건흥 建興 79 장수홍제호태열제,名은 거련(巨連). 475년 백제 한성으로 공격하여 개로왕 주살. 21 문자명왕(文咨明王) 7689-492 명치 明治 27 문자호태열제,名은 나운(羅雲).장수왕 2대손.父는 조다(助多). 22 안장왕(安藏王) 7716-519 12 名은 흥안(興安). 23 안원왕(安原王) 7728-531 14 名은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24 양원왕(陽原王) 7742-545 14 양강왕. 名은 평성(平成). 25 평원왕(平原王) 7756-559 대덕 大德 31 평강상호태열제. 名은 양성(陽成), 탕(북사). 26 영양왕(拏陽王) 7787-590 홍무 弘武 28 영양무원호태열제, 名은 원(元), 대원.사서 5권 편찬.수나라 양왕 광의113만 대군을 대장군 을지문덕이 물리침. 27 영류왕(營留王) 7815-618 24 名은 건무(建武),성(成)영양왕의 이복동생.연개소문에게 죽음 28 보장왕(寶藏王) 7839-642 개화 開化 26 名은 장(臧). 영류왕의 아들 태양왕의 아들로 연개소문에 의해 옹립.당 이세민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연개소문의 세아들 남생,남건,남산의 분란으로 7865(AD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멸망) 7865-668  백제 왕계표 왕명 : 왕(王) - 성(姓) : 부여(夫餘,扶餘) - 32대 678년 (한기7180~7857, BC18?∼서기660)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약 사 소서노(召西努) 7156-BC42 고구려의 신하 연타발의 딸로,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다.(BC31)년에 고구려에 의해 제후로 인정. 1 온조왕(溫祚王) 7180-BC18 45 고주몽의 아들. 형은 비류(沸流). 2 다루왕(多婁王) 7225-28 49 온조왕의 맏아들.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 3 기루왕(己婁王) 7274-77 51 다루왕의 맏아들. 4 개루왕(蓋婁王) 7325-128 38 기루왕의 아들. 북한산성을 쌓았다. 5 초고왕(肖古王) 7363-166 48 소고(素古).개루왕의 아들. 6 구수왕(仇首王) 7411-214 20 귀수(貴須). 204년 위구태의 구태백제에 복속하여 온조백제는 구태백제의 후국이됨 7 사반왕(沙伴王) 7435-234 1 구수왕의 아들.사반왕이 너무어려 정사를 볼 능력이 없어 폐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오름 8 고이왕(古爾王) 7436-234 52 초고왕의 아우. 9 책계왕(責稽王) 7483-286 12 고이왕의 아들. 청계(靑稽).AD298년 가을 9월, 한 나라가 맥인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10 분서왕(汾西王) 7495-298 6 책계왕의 맏아들 11 비류왕(比流王) 7501-304 40 구수왕의 아들. 12 설왕(契王) 7541-344 2 분서왕의 맏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7543-346 29 비류왕의 둘째아들. 고구려 평양성에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살해. 고흥이 서기 집필 14 근구수왕(近仇首王) 7572-375 9 휘수(諱須). 15 침류왕(枕流王) 7581-384 1 근구수왕의 맏아들. 16 진사왕(辰斯王) 7582-385 7 근구수왕의 둘째아들. 17 아신왕(阿莘王) 7589-392 13 아방(阿芳).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전支王) 7602-405 15 직지(直支). 혹은 여영.아신왕의 맏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7617-420 7 전지왕의 맏아들. 20 비유왕(毗有王) 7624-427 28 구이신왕의 맏아들. 21 개로왕(蓋鹵王) 7652-455 20 근개루(近蓋婁). 名은 경사(慶司).고구려 장수왕 공격으로 아차산에서 사망(475년) 22 문주왕(文周王) 7672-475 2 개로왕의 아들.웅진으로 도읍을 옮김.병관좌평 해구에 의해죽었다. 23 삼근왕(三斤王) 7674-477 2 임걸(壬乞). 문주왕의 맏아들. 24 동성왕(東城王) 7676-479 22 名은 모대(牟大) 혹은 마모(摩牟). 문주왕의아우 곤지(昆支)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7698-501 22 名은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아들.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명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26 성왕(聖王) 7720-523 31 名은 명농(明농).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27 위덕왕(威德王) 7751-554 44 名은 창(昌). 28 혜왕(惠王) 7795-598 1 名은 계(季). 성왕의 둘째아들. 29 법왕(法王) 7796-599 1 名은 선(宣) 혹은 효순(孝順). 30 무왕(武王) 7797-600 41 名은 장(璋). 31 의자왕(義慈王) 7838-641 19 7857(AD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멸망) 7857-660  신라 왕계표 왕명 : 거세간(居世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 왕(王) 성(姓) : 박(朴),석(昔),김(金) -56대 992년 (한기7141~8132, BC57 ∼ 서기935)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성 왕호칭 약 사 1 혁거세(赫居世) 7141-BC57 61 박? 거세간 나이 13세에 양산촌등 6부 촌장에 의해 왕으로 추대.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2 남해(南解) 7202-5 19 박 차차웅 혁거세의 아들. 3 유리(儒理) 7221-24 33 박 이사금 남해의 아들.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부의 성(姓)을 하사.관직을 이벌찬등 17등급으로 제정 시행. 4 탈해(脫解) 7254-57 23 석 이사금 토해(吐解).남해의 사위.김알지 탄생 5 파사(婆娑) 7277-80 32 박 이사금 유리의 둘째 아들. 6 지마(祇摩) 7309-112 22 박 이사금 지미(祇味). 파사의 아들 7 일성(逸聖) 7331-134 20 박 이사금 유리의 큰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이다. 8 아달라(阿達羅) 7351-154 30 박 이사금 일성의 맏아들. 9 벌휴(伐休) 7381-184 12 석 이사금 탈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각간(角干) 구추(仇鄒)이다. 10 나해(奈解) 7393-196 34 석 이사금 벌휴의 손자. 11 조분(助賁) 7427-230 17 석 이사금 제귀(諸貴). 벌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골정(骨正) 갈문왕이다 12 첨해(沾解) 7444-247 15 석 이사금 조분의 동생이다. 13 미추(味鄒) 7459-262 21 김 이사금 미조. 김알지(金閼智)의 5대손 구도(仇道)의 아들. 14 유례(儒禮) 7480-283 15 석 이사금 조분의 장자. 15 기림(基臨) 7495-298 12 석 이사금 기립(基立)조분의 2대손 父는 이찬걸숙(乞淑) 16 흘해(訖解) 7507-310 46 석 이사금 나해의 2대손. 父는 각간 우로 (于老). 17 내물(奈勿) 7553-356 46 김 이사금 나밀(那密). 구도仇道)의 2대손. 父는 각간 말구(末仇). 18 실성(實聖) 7599-402 15 김 이사금 김알지의 후손. 父는대서지 이찬 19 눌지(訥祗) 7614-417 41 김 마립간 내물의 아들. 20 자비(慈悲) 7655-458 21 김 마립간 눌지의 맏아들. 21 소지(炤知) 7676-479 21 김 마립간 비처(毗處).자비의 맏아들. 22 지증(智證) 7697-500 14 김 마립간 名은 지대로(智大路). 내물 3대손 갈문왕 습보(習寶)의 아들. 23 법흥(法興) 7711-514 26 김 왕 名은 원종(原宗). 24 진흥(眞興) 7737-540 36 김 왕 名은 삼맥종(삼麥宗) 혹은 심 맥부(深麥夫) 법흥의 왕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 25 진지(眞智) 7773-576 3 김 왕 名은 사륜(舍輪). 진흥의 2자. 26 진평(眞平) 7776-579 53 김 왕 名은 백정(白淨).진흥의 태자 동륜의 아들 27 선덕(善德) 7829-632 15 김 왕 名은 덕만(德曼). 진평의 장녀. 28 진덕(眞德) 7844-647 7 김 왕 名은 승만(勝曼). 진평의 모제 국반(國飯) 갈문왕의 딸. 29 무열(武烈) 7851-654 7 김 왕 名은 춘추(春秋). 진지의 아들 이찬 용춘 (龍春)의 아들. 백제를 멸망 시킴(A.D 660) 30 문무(文武) 7858-661 20 김 왕 名은 법민(法敏). 무열의 원자.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사실상 삼국을 파멸시킴.) 31 신문(神文) 7878-681 11 김 왕 名은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문무의 장자 32 효소(孝昭) 7889-692 10 김 왕 名은 이홍(理洪). 신문의 태자. 33 성덕(聖德) 7899-702 35 김 왕 名은 흥광(興光)신문의 둘째아들로 효소의 동복 아우. 34 효성(孝成) 7934-737 5 김 왕 名은 승경(承慶)성덕의 둘째 아들 35 경덕(景德) 7939-742 23 김 왕 名은 헌영(憲英)효성 이복 동생 36 혜공(惠恭) 7962-765 15 김 왕 名은 건운(乾運). 경덕의 적자. 37 선덕(善德) 7977-780 5 김 왕 名은 양상(良相). 내물의 10대손 으로 아버지는 사찬 효방(孝芳). 38 원성(元聖) 7982-785 14 김 왕 名은 경신(敬信). 내물의 12대손. 39 소성(昭聖) 7996-799 1 김 왕 名은 준옹(俊邕). 원성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 40 애장(哀莊) 7997-800 9 김 왕 名은 청명(淸明). 소성의 태자. 41 헌덕(憲德) 8006-809 17 김 왕 名은 언승(彦昇)소성의 동복아우 42 흥덕(興德) 8023-826 10 김 왕 名은수종(秀宗)헌덕의동복아우 43 희강(僖康) 8033-836 2 김 왕 名은 제륭(悌隆).원성의 손자이고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 44 민애(閔哀) 8035-838 1 김 왕 名은 명(明). 원성의 증손이며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 45 신무(神武) 8036-839 김 왕 名은 우징(祐徵). 원성의 손자이며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 46 문성(文聖) 8036-839 18 김 왕 名은 경응(慶膺). 신무의 태자. 47 헌안(憲安) 8054-857 4 김 왕 名은 의정(誼靖)신무의이복아우 48 경문(景文) 8058-861 14 김 왕 名은 응렴(膺廉)희강의아들아찬 계명 (啓明)의 아들 49 헌강(憲康) 8072-875 11 김 왕 名은 정(晸). 경문의 태자. 50 정강(定康) 8083-886 1 김 왕 名은 황(晃) 경문의 둘째 아들. 51 진성(眞聖) 8084-887 10 김 왕 名은 만(曼). 헌강의 여동생. 52 효공(孝恭) 8094-897 15 김 왕 名은 요(嶢). 헌강의 서자. 53 신덕(神德) 8109-912 5 박 왕 名은 경휘(景暉). 아달라왕 (阿達羅王)의 후손 54 경명(景明) 8114-917 7 박 왕 名은 승영(昇英).신덕의 태자. 55 경애(景哀) 8121-924 3 박 왕 名은 위응(魏膺)경명의동복아우. 56 경순(敬順) 8124-927 8 김 왕 名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으로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8132(AD935)년 나라를 고려에 넘기었다. (멸망) 8132-935   가야 왕계표 왕명 : 왕(王) - 성(姓) : 김(金) - 10대 520년(한기7239~7759, 서기42 ∼ 562)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약 사 1 수로왕(首露王) 7239-42 157 2 거등(居登王) 7396-199 54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卽位), 치세(治世)는 39년으로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음. 3 마품(麻品王) 7450-253 38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孫女)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음. 4 거즐미(居叱彌王) 7488-291 55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병오(丙午; 346) 7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음. 5 이시품(伊尸品王) 7543-346 61 혹은 이품(伊品). 정미(丁未; 407) 4월 10일에 죽음.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음. 6 좌지(坐知王) 7604-407 14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신유(辛酉; 421) 4월 12일에 죽음. 왕비는 도령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음. 7 취히(吹希王) 7618-421 30 질가(叱嘉)라고도 함. 김씨(金氏).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음. 왕비는 진사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 왕자(王子) 질지(질知)를 낳음. 8 질지 7648-451 41 김질왕(金질王)이라고도 함.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임신(壬申; 492) 10월 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를 낳음. 9 겸지(鉗知王) 7689-492 29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함.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 왕자 구형(仇衡)을 낳음. 10 구형(仇衡王) 7718-521 41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침략으로 멸망. (멸망) 7759-562 * 좌지왕 이후 가야연맹체의 주도권이 대가야로 넘어가게 되었다.   대진국(발해) 왕계표 왕명 : 제(帝),황제(皇帝) - 성(姓) : 대(大) - 15대 259년 (한기7865~8123, 서기668 ∼926) 대 왕 명 연호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 기간 명 약 사 묘호(廟號) 시 호(諡號) 1 세조(世祖) 진국열황제皇帝 중광 重光 7865-668 31 중상(仲象) 후고구려로 개국 2 태조(太祖) 성무고황제皇帝 천통 天统 7896-699 20 조영(祚榮) 대진국으로 개명 3 광종(光宗) 무황제(武皇帝) 인안 仁安 7916-719 19 무예(武藝) 동생 대문예 당으로 망명 4 세종(世宗) 광성문황제皇帝 대흥 大興 7935-738 56 흠무(欽茂) 국사 25권 편찬 5대원의(大元義) 7991-794 세종의 아우.포악하여 바로쫏겨남 6 인종(仁宗) 성황제(成皇帝) 중흥 重興 7991-794 1 화여(華璵) 세종의 아들인 굉림 (宏臨)의 아들. 7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 정력 正曆 7992-795 14 숭린(崇璘) 인종의 황숙(皇叔). 8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 영덕 8006-809 3 원유(元瑜) 9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 주작 朱雀 8009-812 5 언의(言義) 10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 태시 太始 8014-817 1 명충(明忠) 11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 건흥 建興 8015-818 14 인수(人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4세손. 12 장종(莊宗) 화황제(화皇帝) 함화 咸和 8029-832 26 이진(尋震) 13 순종(順宗) 안황제(순皇帝) 대정 大正 8055-858 14 건황(虔晃) 14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천복 天福 8069-872 29 현석(玄錫) 15 애황제(哀皇帝) 청태清太 8098-901 25 인선 8123(AD926)년 요에 의해 멸망. (멸망) 8123-926
51    옷차림의 특색 댓글:  조회:596  추천:0  2023-07-01
옷차림의 특색 조선민족의 옷차림은 자기의 발전행정에서 간단없이 개선되고 변화되였으며 민족적특색을 가지게 되였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아한대지방에서 살았기에 옷차림도 내한과 내열에 알맞게 저고리, 바지, 치마, 겉옷, 쓰개, 신발 등으로 구성되였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봄에는 화창하고 가을에는 청량하게 마련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온돌에서 좌식생활을 해왔으므로 그 옷차림도 좌식생활에 알맞게 짜여졌다. 말하자면 녀자들의 치마는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남자들의 바지 역시 폭에 여유가 있어 주저앉기와 서기에 편리하였고 걸터앉아도 보기 흉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옷은 체구와 조화되도록 지어졌다. 일반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일체비례상 상체가 비교적 길고 하체가 상대적으로 짧았으므로 하반신이 긴 서양사람들의 양복과는 달리 웃옷(저고리)을 짧게 하고 아래옷(바지 혹은 치마)을 길게 함으로써 옷을 우리 조상들의 체격에 알맞게 조화시켰다. 특히 치마는 폭이 넓고 길이가 길어서 하체를 더 풍부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민족의 옷은 일반적으로 몸의 선을 선명하게 나타내지 않고 자연스러운 옷의 선으로 몸의 선을 부드럽게 조화시키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우리 민족의 옷선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세련된 그리고 민족적특색이 짙은 옷선이다. 우리 민족의 옷선은 직선과 곡선을 리용하였는데 옷고름 하나라도 그것이 실용가치를 가지게 하였을뿐만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도 우아한 선을 나타내게 하였다. 우리 민족의 옷선에서 직선이나 곡선 어느것을 막론하고 모두가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배합되였으며 인공적인 무리감을 주지 않았다. 지어는 옷주름살같은것도 구김살을 보이지않고 조화롭게 만들어졌다. 사실 직선이란 선률적인 곡선보다 좀 딱딱하고 굳어보이지만 그러나 저고리에서는 곡선과 잘 배합되고 조화되여 선률을 이루는데 한결 더 운치를 돋구어주었다. 이를테면 녀자저고리에서 화장등선이라든가 뒤등골직선, 앞섶선 또는 끝동선 같은 직선들이 모두다 서로 어기고 곡선들의 도움을 받아 참으로 우아한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저고리동정, 고대 또는 동정끝 꺾이선까지도 단아한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옷선을 직선과 곡선의 대비방법으로, 때로는 십자형대비의 방법으로, 때로는 교차대비의 방법으로, 률동선으로 조화되게 한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사물조화의 원리를 잘 파악한 증거라고도 말할수 있다. 우리 민족의 옷선은 실로 아름다울뿐아니라 이런 옷선으로 특징되는 옷들은 강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강하고 단정해보이는 함축성과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흰옷을 즐겨입었다. 하여 우리 민족을 ,, 라는 말이 생겼다. 그렇다고 우리의 조상들이 꼭 흰옷만 입은 것은 아니였다. 처녀들은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 금박댕기를 늘여 개나리, 진달래를 나타내기도 했고 결혼한 부인들은 옥색저고리에 남색치마를 례복으로 입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옷은 많은 경우에 한 개 바탕(한가지 옷감-같은 색의 바탕)에 여러가지 색을 복잡하게 섞은 것이 아니라 되도록 단일한 색채로 그 특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였다. 이를테면 한가지 옷감(같은 색의 바탕)에 무늬를 놓아도 동색으로 무늬를 놓아 진하고 연한 빛이 서로 어울려 아름다워보이게 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옷색갈의 다채로움에도 류의하였다. 말하자면 색동저고리의 색배합을 보아도 5색이 령롱하게 그 하나하나의 채색의 특성을 그대로 보이면서 5색이면 5색, 7색이면 7색이 죄다 조화롭게 서로 합리적으로 배합되게 함으로써 다채로움과 화려성을 보여주었다. 상술한데서 알수 있는바 우리 민족의 전통적옷의 색갈은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고 담박하고 우아하며 경우에 따라 다채롭고 화려한 것이 특색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옷의 또 다른 하나의 특색은 사철옷이 기후의 각이한 특성에 알맞게 잘 마련되였다는 그것이다. 우선 겨울옷은 훈훈하고 포근하게 만들어 방한에 주의가 잘 돌려졌다. 봄옷은 화창한 기분을 돋구는 차렵옷, 겹옷 등이였다. 이를테면 봄철에는 꽃분홍이나 연보라, 연분홍치마우에 반회장저고리를 입었고 가을에는 봄철에 볼수 있는 더운 빛깔계통의 빛깔이 아니라 찬 빛깔계통의 색채 말하자면 더운 빛깔계통의 빛깔이 아니라 찬 빛깔계통의 색채 말하자면 진옥색 같은 빛깔을 맞추어 옷을 지어입었던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옷빛갈은 절기의 자연조건을 떠나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없다. 만일 봄옷빛갈이 살구꽃, 배꽃, 복숭아꽃, 진달래꽃과 같은 꽃빛갈의 정취를 떠나지 않았다면 가을옷빛갈은 도라지꽃, 석죽화, 들국화, 산나리꽃 같은 경쾌하고 청상한감을 자아내는 그런 빛깔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옷과 자연이 서로 어울리도록 하였다. 여름옷의 경우도 례외가 아니다. 뜨거운 여름에는 시원한 느낌을 줄수 있는 옷감에 그런 색갈을 맞추어 옷을 지어입었다. 이를테면 여름에는 잠자리날개와 같은 한산세모시나 열두새 세부포나 꾀꼬리빛갈 같은 안동포로 치마와 적삼을 해입었던것이다. 모두어말하면 조선민족의 옷차림에는 조선민족의 고유한 성격과 기호가 반영되였으며 전통적인 옷 특히 녀자옷은 간편하고 활동적이며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산뜻하며 세련되였다. 하기에 우리 민족의 녀자옷은 지금도 자기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자기의 우세를 자랑하고 있는것이다. 우리 민족 인민들은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는 것을 첫째가는 례절로 여기였다. 문밖을 나설 때면 꼭 옷매무시를 둘러보고 옷과 모자를 단정하게 손질하였다. 특히 손님을 맞을 때에도 외출할 때와 마찬가지로 옷차림을 단정히 하였다. 우리 민족 인민들은 웃옷을 벗은채로 손님을 맞는 일은 례답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언제나 깨끗한 것을 좋아한 우리 민족 인민은 옷이 더러워질세라 동정을 갈아달고 자주 빨아입었다. 그리하여 항상 단정하고 깨끗한 옷차림을 하여왔다.
50    상경룡천부 댓글:  조회:575  추천:0  2023-07-01
기행문]상경룡천부 160여년간 발해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상경룡천부옛성터(홀한성이라고도 함)는 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에 위치해있다. 3월 30일 이른 아침, 연길을 출발한 승용차는 4시간 여를 달려서야 발해진에 도착했다. 발해진에 들어서는 첫 어구에 옥수수술공장이 있는데 그 길목으로부터 외성이 시작된다. 외성은 방대한 평지성이였다. 성터우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니 멀리 장광재령과 로야령이 아득히 보이는 사방 수백리의 평원지대였다. 상경룡천부외각으로 목단강이 흘러지나고 2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경박호까지 있으니 이곳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황성옛터였음이 틀림없어보인다. 길가에 세워져있는 외성을 소개한 비문에는 외성의 길이는 18.5킬로메터, 평균높이는 2메터라고 적혀있었다. 시내길을 따라 곧추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에 접어들어 조금 가니 바로 오봉루(일명 “오문”이라고도 함)라고 부르는 궁성정문이 보였다. 마당에는 상경룡천부유적비와 말을 매였던 돌들이 여기저기 세워져있거나 쓸어져있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옛우물 하나가 있었다. 오문자리에 남아있는 기단은 6메터남짓 높아보이고 동서길이 60메터, 남북의 너비 20메터 남짓 되는것 같았다. 오문을 지나 뒤로 가보니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밟고 올르니 궁성내가 한눈에 안겨왔다.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원모습 그대로거나 보건된 궁전터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한무리의 양떼들이 궁성내에서 뛰여다니면서 풀을 뜯고있었고 어디선지 경운기가 통탕거리는 소리가 들릴뿐 궁성은 자못 한적해보였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수십개의 웅장한 초석이 단단히 박혀있었다. 그 초석이 받쳐주는 기둥에 루각이 건축되였겠으니 얼마나 웅위로웠을가. 궁성은 발해왕실의 거주지인 동시에 국가의 통치권력을 행사하던 곳이다. 오문에서 내려 200메터쯤 들어가니 제1궁전자리였다. 기단을 쌓은 돌은 옛돌 그대로 보였다. 기단의 높이는 3메터, 길이는 56메터, 너비는 25메터였다. 밖으로 돌을 쌓고 안에 흙을 다진 기단우에는 대형원형초석이 묻혀있는데 56개가 건재해있었다. 그 초석을 딛고 궁궐이 일어섰겠으니 그 웅위로움 또 얼마나 가관이였겠는가. 5개의 궁전이 한 개의 중추선우에 배렬되여있는데 제1궁전과 제2궁전사이는150메터, 제2궁전과 제3궁전 사이는 130메터, 제3궁전과 제4궁전 사이는 30메터, 제4궁전과 제5궁전 사이는 80메터였다. 궁전터 일부는 복원되였지만 더러는 기단이 허물어진 상태의것들이였다. 물론 궁전의 전각들은 모두 소실되여있고 기단우에는 원형모양의 초석들만 박혀있었다. 궁전터사이의 공지는 경작지로 리용되고있었다.궁전터곁이거나 밭머리에는 궁전터에서 주은 기와파편을 쌓아놓은 커다란 무지가 여기저기 있었다. 제2궁전자리의 동쪽에 “팔보유리정”이라는 패말이 세워져있는 옛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정자로 보호되여있었다. 돌을 던져보니 마른 우물이였다. 때마침 양치기늙은이가 다가와서 물었더니 이 우물은 원래 꿀은 탄것처럼 달고 시원한 샘이 솟는 우물이였다고 한다. 마을의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돌과 나무가지를 무작정 던져넣어 지금은 페우물이 되었다는것이였다. 아쉬운 일이였다. 이상하게도 궁성내의 많은 고목이 말라죽고있었다. 다가가보니 나무밑턱을 누군가 둥그렇게 칼로 파놓아 우정 죽게 한것이였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오봉루에서 듣던 경운기소리는 제5궁전곁의 넓고 기름진 밭에서 들린것이였다. 농부들이 경운기로 한창 밭갈이를 하고있었다. 외성내에 있는 남대묘에 보전되여있는 석등탑 또한 유명한지라 이리저리 물어서 찾아가보았다. 석등탐은 발해시기 많은 유적, 유물 가운데서 가장 뛰여나고 잘 알려져있는 불교조각품이다. 이 탑은 현무암으로 만든것인데 밑부분은 지대석우에 복련화문을 조각한 하석대를 올려놓은 양식으로 만들고 그우에 원주형으로 된 간주석을 세웠으며 간주석우에는 양련화문을 조각한 상대석을 올렸다. 그우에는 8개의 창문과 16개 구멍을 낸 화사석을 놓았고 그우에는 8각의 옥개석이 올려져있다. 옥개석우의 상륜부는 7층의 보륜을 장식하였다. 석등탑의 높이는 5메터남짓 되어보였다. 탑은 능히 뜯을수도 있고 조합할수도 있다고 한다. 비록 천년동안의 비바람을 맞았지만 발해인들의 창조적이고 천재적인 재능에 기대여 오늘까지도 꿋꿋한 자태를 자랑하는 모습 멋지기만 하다. 외성의 흥륭사에 보존되여있는 대석불 또한 발해시기의 유명한 유물이라고 하는데 이날 유감스럽게 가보지 못했다. 발해는 818년 10대 선왕(830년까지 즉위)이 최고 흥성기를 이루었다. 선왕은 내분을 수습하고 대외정복활동을 벌여 발해력사상 최대의 령력을 확장했다. 중국의 사서 “신당서” 발해전에 서술한 사방 5천리땅내에 설치한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은 이때에 완비했던것이며 세상은 이를 두고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상경룡천부는 755년부터 785년까지 30년간, 그후 성왕 대화여시기에 도읍을 다시 길림성 훈춘의 동경룡원부로부터 옮겨 망할 때까지 132년간, 도합 162년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698년 대조영이 돈화의 동모산에서 일으켜 오동성, 중경현덕부(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동경원룡부(길림성 훈춘시 팔련성)를 거쳐 상경룡천부에 이르기까지 228년동안 15대 왕을 이어오던 발해는 926년 내분과 자연재해(지진), 거란의 외침에 의해 망하게 된다. 발해의 흥망성쇠를 생각하니 귀로의 차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마음 저으기 안타깝기만 하다. 160여년의 력사와 문화의 숨결이 묻혀있는 상경룡천부, 궁성안에 당나라 장안성을 본딴 주작대로까지 건설해놓고 고관대작을 거느리던 황포의 발해사나이와 궁궐을 수놓았을 어여쁜 발해녀인들의 웃음, 대륙을 주름잡았을 발해의 무적의 장수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자신들이 엮었던 찬란한 꿈을 되돌아보고있을가. 발해진에서 멀어지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홀한성의 외성은 시내를 멀리할수록 오히려 더 뚜렷히 눈에 안겨온다. 상경룡천부옛터는 참으로 웅장하고 기품이 있는 도읍지자리였다.
49    호태왕비 ; 광개토대왕비 댓글:  조회:584  추천:0  2023-07-01
호태왕비(김철호) (사진은 1998년에 찍은 호태왕비이다.)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5 ㅡ힘찬 남성을 방불케 하는 6.39메터의 거대석 우뚝 솟은 웅장한 기세와 힘찬 남성을 방불케 하는 호태왕비을 바라보노라면 우선 그 거대함에 압도당하게 된다. 집안시 태왕향 태왕촌에 세워져있는 호태왕비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부왕 담덤(淡德) 즉 호태왕의 공로와 수묘인의 관리제도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호태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인데 호는 령락태왕, 시호는 국강상관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18세에 등극하여 39세에 작고하기까지 22년간 64개의 성과 1천4백개의 촌락을 정복하면서 서북으로 료하를 넘어 료서지방을 공략하고 북으로 잔존촌락을 모두다 통합하였다. 남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조공을 받았으며 한강계선의 백제령토를 점령하였다. 한편 동남으로 신라를 위압하여 또한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락동강하루지방의 가야족에 침입해온 왜족을 격퇴시키면서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떨친 고구려에서의 가장 걸출한 국왕이다. 비석은 높이 6.39메터, 각면의 너비 1.3ㅡ2메터 사이이고 중량이 37톤이나 되는 하나의 방추체자연형모양의 회색 응회암(凝灰岩)의 화산석을 조금 다듬어서 만든것이다. 석좌(石座) 역시 거대한 화강석으로 다져졌는데 보매 원래는 한덩이였댔으나 어떤 원인으로 깨여져 지금은 세쪽으로 되였지만 의연히 땅에 단단히 배겨있으면서 비석을 굳게 받들고있었다. 호태왕비의 석재는 모래구성이 있는 응회암으로서 이런 종류의 석재는 오직 화산구부근에서만 발견되는 돌이다. 집안경내에서는 이와 같은 돌이 나는곳이 없다. 그러니 가능하게 백두산천지주위에서 채굴하여 옮겨온것으로 사료된다. 머리속에 거대석재를 운반하는 장면을 상상만 해보아도 저절로 혀가 차진다. 애급의 금자탑을 세우는 그 장면과 뭐가 다를바가 있겠는가. 또 37톤이나 되는 거석을 들어 올릴수 있는 설비도 없었던 그 시기에 이 돌을 어떻게 세웠으며 무슨 수로 1580여년의 자연계와 인류사회의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끄떡 않게끔 고정해놓았을가. 그리고 사면 석면에는 어떻게 글을 새겼고… 비석은 1면에 11줄, 2면에 10줄, 3면에 14줄, 4면에 9줄 이렇게 모두 44줄의 글자를 새겨넣었는데 한줄에 41자가 새겨져 1804자가 되겠으나 결자가 생겨 실제로는 1775자이다. 줄과 줄사이에는 세로로 칸을 나누어 선을 그었으며 좌로부터 우의 순서에 따라 정방형으로 조각하였는데 글씨의 크기는 손만큼 했다. 《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울 때 북부여에서 왔노라. 그이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였노라. 알을 깨고 출생하매 원래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노라…(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子有聖德…)》 이렇게 고구려의 건국신화로터 서술되여있는 비석에는 왕위의 계승과 전쟁업적, 조상의 묘를 지키고 생계를 유지하는 등 당시의 당부까지 까근히 기록되여있어 그야말로 고구려력사를 연구하는 진귀한 자료가 아닐수 없다. 15세기 좌우, 조선의 사람들은 압록강 건너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면서 이 거대석을 금나라 황제의 묘비가 아닐가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70년에 와서야 당지 채벌농민들에 의해 이끼가 차고 넝쿨이 덮인 선돌로 발견되여 소문이 났는데 청나라 화인현 현지사 아래에서 일하는 관원 관월산(關月山)이라는 사람에 의해 그 깊이가 파지게 된다. 관월산은 돌에 낀 이끼를 뜯다가 뜻밖에도 글이 새겨져있는것을 발견하고 미칠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탁본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끼가 덮여 도무지 되지 않아 겨우 뜯어낸곳에서부터 몇글자를 탁본할수밖에 없었다. 그는 탁본한것을 친구들께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우분, 마분을 바르고 마른후 불을 달아 이끼를 없애고 탁본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때 불에 달구어지면서 돌이 튀는 바람에 귀중한 몇글자를 손상받게 되였다. 찬찬히 바라보니 불에 튄것 같은 자리와 금이 선곳이 보였다. 우리의 안내를 맡은 태왕체창시자이며 태왕체서예학회 회장인 진유국씨는 호태왕비의 서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호태왕비의 서법은 소박하고 무게가 있으며 웅위롭고 대범하며 안정된 산과 같이 드맄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호방하다.》 호태왕비건립년대는 기원 414년, 바로 중국의 동진시대로서 진나라 황실이 남하하면서 남북이 대치하는 국면이 형성된 시기이다. 이로인해 중원지구가 계속 전화를 겪고 황실이 흔들리자 이 혼란한 틈을 타 고 구려가 이 지역에서 신흥력량을 이루었다. 고구려정권이 형성된후 무력이 끊임없이 증강되고 령토 역시 부단히 확대되여 직접 황실까지 위협하자 진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에 많은 군사를 파하여 토벌과 진압을 단행했으나 이러한 전쟁은 오히려 고구려로 하여금 더욱더 정치경제의 높은 봉우리로 밀어올려주었을뿐이였다. 또 이 전쟁은 중원의 서법예술을 북방에 전달하는 역활을 하여 고구려민족의 기질과 상호 융합되게 한것이다. 호태왕비는 고구려의 형성과 발전의 력사를 탐색하는데 극히 중대한 사료를 제공해주는 자료보고(寶庫)이며 고구려민족의 지혜가 슴배인 건축예술의 명주이다. 호태왕비는 압록강 푸른물을 바라보면서 고구려의 유풍을 영원히 보존하는 기념비로 솟아 세인들을 불러들일것이다. 우리들은 경탄의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호태왕비를 우러러 크게 머리를 숙였다. 연변일보 1999년 3월 26일
48    화려한 고구려고분벽화 댓글:  조회:477  추천:0  2023-07-01
기행문]화려한 고구려고분벽화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4 ㅡ1400년 추월추풍에도 색바래지 않은 고구려고분벽화 길림성 백산시문물관리소에서 일하고있는 태왕체창시자이며 태왕체서예학회 회장인 진유국씨가 이날 우리를 인도해 오회분탐방을 진행했다. 진유국씨는 다년간 고구려유적에 대해 깊이 탐구한 한족학자로서 집안의 유적지를 들고꿰는 사람이였다. 오회분참관도 금지되여 있는 상황이었지만 관리일군과 막연한 사이였는지라 손쉽게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묘에 대한 시간적 제한없는 참관을 할수도 있었다. 아래에 서술되는 묘실에 대한 묘사와 벽화에 대한 묘사는 진유국씨가 그날 구체적이고 생동하게 설명해주어 가능했었다. 또 그가 다년간 연구한 자료와 《집안문물지(集安文物志)》가 큰 도움을 주었다. 통구고분군 우산묘구에는 5기의 높고 큰 봉토묘가 있는데 동서 한일자로 배렬되여있고 5개의 큰 투구같기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오회분(五盔墳) 또는 오괴분(五塊墳)이라고 부르고있다. 오회분은 통구평원중부 우산묘구 최남단에 위치해있는데 남면은 철도주택구이며 북면은 논밭이다. 남으로 집안역과 350메터쯤 떨어져있고 서에서 동으로 다섯번째 묘가 바로 5호묘인데 민간에 유일하게 개봉한 벽화무덤이다. 이 묘는 항일전쟁때 이미 도굴다했었다. 바깥문을 따라 묘도에 들어서니 넓은 공간이 있고 묘실로 인도하는 용도(甬道)좌우에는 힘찬 력사(力士)가 그려져있었다. 한사람은 활에 살을 먹여 당기고있고 다른 한사람은 손에 창을 쥔채 묘실을 지키는 모습이였다. 순간 묘실안은 신비로운 분위기에 싸이면서 종교적성역에 들어선것 같은 착각이 오는것 같았다. 묘실의 평면은 반듯한 정방형으로 동서길이 4.37메터, 남북 너비 3.56메터에 정교하게 다듬은 큰 화강암석재로 쌓았고 백회로 틈을 메웠다. 네벽은 높이가 2.18메터로 약간 안으로 경사졌고 그 우로 량방(樑枋)을 바로 두었다. 량방우는 말각천정으로 교차되는 구조이며 맨 우는 반듯한 돌로 천정을 막았다. 묘실의 높이는 4메터쯤 되여보였다. 묘실안에는 세개의 돌로 된 관대를 두었는데 동서로 배렬되였다. 관은 없고 텅빈 관대만이 남아았었다. 용도 좌우벽을 비롯해서 묘실 네벽, 천정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있었는데 그 절묘하고 신비로움에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벽화는반듯한 석재 암면우에 직접 그려졌는데 찬란하고 다채로우며 화려하고 웅장했을뿐만아니라 뛰여나고 류창했다. 묘실 네벽에는 큰 폭의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있어 전체 벽화의 주체를 이루고있었다. 머리는 남을 향해 치켜세우고있는 자태인데 황, 록, 홍갈색을 입혔다. 사지는 흰 날개가 달려있고 발톱은 예리했다. 이 묘의 벽화중에는 룡이 모두 39마리 있다고 한다. 서벽에 그려져있는 벽화는 남으로 뛰여나오는 자세였다. 몸은 백색이고 묵선으로 얼룩무늬를 묘사했으며 복부는 분홍색이였다. 다리뒤에 흰 날개가 달려있었다. 남벽은 용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량단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주작을 한마리씩 그렸다. 부리는 뾰족하고 가늘며 붉은 색은 불타듯 강렬했다. 몸은 홍색, 꼬리와 날개는 황색, 홍색으로 구분되여있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서로 마주보며 복판 련화자에 서있는 모습이 금방 날개치며 날아갈것만 같았다. 북벽은 현무(玄武)인데 거북과 뱀이 뒤엉켜있었다. 거북은 몸은 서쪽으로 향하면서 머리를 돌려 우를 향하여 아래로 뻗쳐있는 뱀머리와 상대하고있었다. 묘실 네귀퉁이에는 괴수가 천정기둥을 받치고있는데 모두 짐승얼굴에 사람몸이였다. 뿌리있는 라체였다. 신비하고 상징적인 주제를 합리적인 배치와 보완적인 배렬을 통해 현란한 색채와 동중정(動中靜)의 붓길로 표현한 기교에 저절로 혀가 차졌다. 벽화의 다른 부분의 내용은 신선, 우인(羽人), 비천(飛天)으로 천정석말각에 교차된 천정우에 그려졌다. 첫번째 천정석의 4면에는 각각 룡이 한마리씩 그려져있는데 발은 량방에 서있고 배와 등은 천정끝에 닿아있었다. 입은 크게 벌려져있어 마치 석벽우의 작은 구명을 물고있는것 같았다. 구멍안에 백회흔적이 보이는것으로 미루어 진주거나 옥석같은것을 상감으로 장식했었지 않았을가 짐작된다. 동남면 말각석우에는 오른쪽으로 소머리를 한 사람과 비천이 있었다. 소머리를 한 사람의 눈은 송록석(松綠石)을 상감했고 몸체는 선인의 형태로 갈색의 깃이 뽀족하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록색의 천이 졸라매여져있었다. 오른 손에는 벼이삭을 쥐고 뒤를 향해 무엇인가를 부르고있었다. 그 뒤는 비천인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코수염을 길렀다. 황색의 깃이 뾰족하고 소매가 긴 도포를 입었는데 오른 손에는 홰불을 들고있었다. 동북에는 복희, 여와의 일월신이 그려져있었다. 동방의 천지창조신이다. 서북에는 룡을 탄 선인과 나는 기발을 탄 사람이 그려져있었다. 서북에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제륜신(制輪神)이 있다. 그리고 제륜신의 오른쪽에는 갈색의 긴 우의(羽衣)를 입은 사람이 보리수아래에서 허리를 굽히고 무언가를 조작하고있는데 틀림없는 야철신(冶鐵神)이다. 고구려 제철업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하는 벽화이다. 두번째 천정석의 각면에는 룡을 타고 앉은 기악천인(伎樂天人)이 그려져있었다. 천정석아래와 천정의 두껑돌에는 몸을 틀고있는 룡 또는 룡호상박의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추상적인 소재의 현실적인 표현은 그야말로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있었다. 진유국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이 묘의 벽화에는 원래 도금무늬가 입혀져있었고 조수(鳥獸)의 눈은 청옥(靑玉)으로 상감되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한 선인의 오른쪽 눈에 송록석이 박혀있는 외에 그 나머지 상감물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상감을 입힌 흔적만 있을 따름이였다. 봉토의 규모, 화면내용의 풍부하고 화려함으로 볼 때 이 묘임자는 고구려왕족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굉장한 묘실구조와 완숙한 회화기교로부터 고구려인들의 뛰여난 재능을 충분히 볼수 있었다. 1400년의 추월추풍속에서도 의연히 생동한 색채를 보존하고있는 벽화를 우러르노라니 한편 고구려는 강대한 국력을 갖고있는 문화의 대국이였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뿌듯해났다. 연변일보 1999년 3월 23일
47    동방의 피라미드ㅡ장군총 댓글:  조회:423  추천:0  2023-07-01
[기행문]동방의 피라미들어ㅡ장군총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3 피라미트형의 고분 장군총(將軍塚)은 집안시교의 동북쪽 5킬로메터쯤 상거한 룡산기슭에 우뚝 솟아있다. 마주하는 순간 애급의 피라미트를 바라보는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누구라 없이《금자탑!》하고 부르짖게끔 웅위롭기 한량없는 고구려의 적석고분이였다. 뭇박힌듯 우두커니 서서 그 장엄함에 매혹되여 련속 경탄을 터치는데 예쁘게 생긴 안내원 한족아가씨가 장군총에 대해 까근히 해설해주었다. 장군총의 외형은 잘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방형 7단의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었는데 바닥밑변 한변의 길이는 35.6메터, 높이는 12.4메터 된다. 웃부분은 뽀족하여 면마다 보호하기 위한 큰돌이 세개씩 세워져있다. (12개 받침돌가운데 1개가 잃어져 지금은 11개가 남아있다.) 1100여개의 세밀히 가공된 석재가 사용되였는데 가장 큰 석재의 길이는 5.7메터, 너비는 1.12메터, 두께는 1.10메터나 되였다. 장군총에서 서북 20킬로메터 떨어진 양차향 고대촌 상록수다리부근에서 고구려채석장 하나를 발견했는데 장군총석재와 석질이 똑 같다고 한다. 지금도 정자리가 또렷한 돌과 채 다듬지 않은 석재가 널려있는 채석장은 장군총석재의 원지임이 틀림없다고 하니 돌을 캐여 현지에서 잘 다듬은후 20킬로메터의 험하고 가파로운 산길을 운반했음이 분명하다. 여름의 땡볕에 그을고 겨울의 한풍에 얼면서 선혈로 이룩한 고루려사람들의 장거이다. 맨 밑층의 석재는 허리께를 넘었다. 잘 드는 칼로 썩둑 벤든 곱게 다듬은 석재를 손으로 쓸어보니 너무도 깔끔했다. 정자리 하나 없이 다듬느라니 얼마마한 정력과 지혜가 들었으랴. 자그마한 오차도 없이 모가 딱 맞게 다듬은 석재는 현대도구로 가공한대도 이렇게 바를수가 있을가. 작은돌 무게 15톤 릉묘의 무너지을 방지해 기대여놓은 보호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였는데 높이가 3.5메터쯤씩 되여 보였고 가장 작은 돌의 무게가 15톤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장대석을 받쳐놓은 곳은 지금도 평형을 잡고있는 반면 하나 잃어져있는 뒤면 오른쪽 벽은 돌의 틈새가 벌어지면서 곧 무너져내릴것만 같았다. 참으로 멋으로 기대여놓은 장대석이 아니라 1600여년의 세월을 버티여주게 한 기둥석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고구려사람들의 건축공예에 다시 한번 혀가 차졌다. 다섯번째 층에 묘실까지 통하는 구명이 나있는데 일찍 도굴당할 때 낸 구멍자리라고 한다. 거대의 암석을 어떻게 깨고 들어갔는지가 의문이다. 서늘한 기운이 풍기는 묘실에 들어서니 길이와 너비가 5메터쯤 되고 높이가 그보다 좀 더 높아보이는 널방에 장방형 석관좌가 두개조로 나뉘여져있는것이 보였다. 왕과 왕후의 관을 놓았던 자릴일것이라고 한다. 이 무덤의 서남쪽 1킬로메터쯤 되는 지점에 관개토왕비가 서있어 이 무덤이 가능하게 광개토왕릉묘라고 하는 일설도 있으나 아직 고증이 확실치 않아 어느 왕의 릉묘인지 모르나 확실히 왕의 릉묘인것만은 사실인것 같았다. 고구려벽화무덤의 기원을 3세기무렵까지 밀고올라갈수 있다고 하니 이 적석총은 그 이전의 무덤이 아닐가 생각된다. 빤빤한 묘실벽에 한점 벽화도 그려저있지 않은건 묘주의 신분이 낮아서가 아니라 아직 그러한 문화가 도래되지 않았기때문일것이다. 탄성이 나오는 암괴 묘실의 정상부는 한개의 통 암괴로 덮였는데 60평방메터의 50톤 되는 돌판이라고 한다. 저런 암괴를 어떻게 얹었을가. 탄성이 나오지 않을수 없다. 그 돌판을 버티게 쌓은 묘실벽은 가쯘히 다듬은 석재로 6층되게 쌓아올렸는데 귀가 딱맞고 틈서리가 조금도 없이 맞물려있었다. 묘실을 나와 무덤꼭대기에 오르면 회색무늬의 기와쪼각 같은것을 손쉽게 주을수 있었다. 네면 가장자리의 돌에 인공으로 다듬은 기둥구멍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있게 많이 뚫려있는데 보아하니 전각을 세웠던 자리인것 같았다. 고구려의 대형적석묘 웃부분에는 건축물이 축조되여 있었다는 기재도 있으니 전각이 세워졌댔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장군총뒤의 북쪽 50메터쯤 떨어진 곳에 순장무덤 한자리가 있는것이 보였다. 그 형태는 돌기초우에 세운 돌막이였다. 이런 무덤이 원래 다섯자리 있었다고 하나 지금에 남아있는것이 이것 하나뿐이다. 역시 도굴당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빤히 내다보일만큼 구멍이 펑 뚫려있고 한모서리가 허무러져내리기까지 했다. 태양이 면바로 직하하고있는 점심때쯤이라 장군총꼭대기에 름름히 서서 허리에 손을 찌르고 사위를 둘러봄이 사뭇 위무당당한 기분이였다. 무덤의 방향은 정면이 서남이 되도록 되여있고 네 모서리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있었다. 북쪽으로 룡산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니 비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촌락들과 조선의 군산이 눈에 잡혀온다. 이 땅에 살면서 위대한 문화를 창조한 고구려사람들의 뜨거운 숨결이 금방 피부에 닿는것만 같았다. 연변일보 1999년 2월 22일.
46    동북아의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환도산성 댓글:  조회:488  추천:0  2023-07-01
기행문]동북아의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환도산성 환도산성전경 집안시 고구려유적지답사.2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2.5킬로메터 떨어진 환도산에 위치해 있다. 삼국사기에《유리왕 22년(기원 3년) 수도를 졸본ㅡ오년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위나암이 바로 환도산성이다. 환도산성은 동북쪽에서 서남으로 이어져내려 압록강북안의 여러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있는 장백산계 로령산맥의 산악에 위치해 있다. 웅장한 암산(岩山)을 타고 축조되여 남향개면(南向開面)하였고 고구려산성의 특징인 포곡형(包谷形)으로 골짜기를 끌어안은 모양이 보기에도 마음이 무거워나면서 걸음마저 들떠졌다. 여기가 바로 만주땅을 호령하고 중원까지 힘줄을 뻗치면서 동북아의 호랑이로 틀고앉았던 고구려제국의 발전기지였단 말인가. 옹성을 가진 성문이 있었다는 남문유적지를 쑥 꿰면서 곧바로 성내로 걸어들어가는 마음이 자꾸만 설레이였다. 발부리에 걸채이는 허무러진 성벽의 돌들, 여기저기 널려있는 기와파편을 바라보노라니 탄성이 절로 터졌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의 외각에 있던 군사수비성으로 국내성과 거의 동시에 쌓은것으로 판단되고있다. 고구려는 수도근처에 반드시 일종의 대피하거나 장기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수비성을 두고 때로는 수도로 쓰기도 하였다. 환도(丸都)는《알맹이》라는 뜻이다. 즉 중핵도시란 의미와 함께 수도를 가리킨다. 그러니 우리가 한창 밟고있는 이 땅이 거의 2천년전부터 400여년을 고구려문화를 형성하고 그 빛발을 만방에 뽐냈던 황성옛터인것이다. 남문을 금방 통과한후 곧추 바라보니 옹성북쪽에 산 같아보이는 둔덕이 눈에 띄였다. 전투지휘소로 알려지는 점장대라는것이다. 바로 그 둔덕의 동남쪽에 50평방메터쯤 되여보이는 작은 늪이 멀리서도 파란 물기를 반뜩이고있는데 유명짜한《음마지(飮馬池)》라고 한다. 고구려 제3대 임금 대무신왕(재위 기원 18년ㅡ44년) 11년 7월, 한나라 료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전방안을 짜는데 좌보(左輔) 을두지가 맞서싸우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접어놓으면서 수적으로 렬세이기에 꾀로 물리쳐야 한다고간했다. 왕은 을두지의 계략에 머리를 끄덕인후 성문을 굳게 닫고 적들의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 수십일을 굳게 지켰으나 적들이 도무지 포위를 풀려고 않자 급해난 왕이 다시 을두지에게 계략을 물었다. 이에 을두지는 한나라군사들은 오래동안 포위함으로써 우리들이 견뎌내지 못하기를 기다리고있으니 못속에 잉어를 잡아서 술을 곁들여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했다. 한나라 군사들은 과연 잉어와 술을 받고는 곱다라니 포위를 푼후 퇴각해버렸다. 성안에 물과 고기, 량식이 충족한줄로 여겼던것이다. 이런 유명한 사화의 산지인 음마지를 바라고 금방 가을밭갈이를 마친 밭사이를 꿰지르는 걸음이 급하기만 했다. 마른 풀에 둘레를 가리우고있는 작은 늪은 대군의 식수원으로는 천만 부족했다. 잉어인것이 아니라 미꾸라지도 기르기엔 지금엔 힘든 늪이였다. 그러나 늪가에 앉아 맑은 물에 손을 잠그고 지략이 넘치였던 고구려장군의 충혼을 빌기에는 마음이 넉넉하기만 했다 음마지에서 자리를 떠 높이 11ㅡ12메터쯤 되여보이는 점장대에 올라서니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통구하와 집안시의 한모퉁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산성의 지형이 더욱 눈에 잘 안겨왔다. 자연이 만든 봉우리들의 등성이를 리용하여 석축된 산성은 동, 서, 북의 3면은 거의 반원형을 이룬 험준한 암산릉선을 돌아가기때문에 성외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이고 안으로는 넓다란 언덕을 이루며 남벽만이 지세가 낮아진 강안절벽우에 있어서 천연적으로 키모양을 이루고있었다. 10만명을 능히 주둔할만큼의 장소였다. 성벽 총둘레가 길이가 6951메터,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676메터이다. 성안에는 4ㅡ5세기에 만든것으로 보이는 36기의 무덤이 남아있고 주추돌이 줄지어놓여있는 3개의 건물터가 있는데 아직도 고구려의 기와와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있다고 한다. 동쪽 그닥 높지 않은 릉선우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니《산성하고분군》이 한눈에 잡혀왔다. 아름다웠다. 아니, 웅위로웠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고분군의 하나인 산성하고분군은 한폭의 거대한 화폭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이 환도산성주변에만 무려 4700여기의 고분이 있으며 집안지역 전체에는 1만2000여기가 있다고 한다. 작은 고분도 있지만 직경이 60메터 넘는 엄청난 크기의 고분도 적지 않다는것이다. 이같이 거대한 고분군은 고구려의 문화수준과 함께 경제력도 뛰여났음을 시사해준다. 고구려를 위대한 나라로 만든 강한 힘은 과연 무엇이였을가. 700여년 강국으로 존속할수 있은 그 위대한 힘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을가. 고구려는 강한 군사력으로 대외팽창을 강행했으며 특히 광개토왕과 장수왕시기는 동북아세아의 력학관계가 급변하면서 다중방사상(多重放射狀)외교라는 복잡한 신질서가 구축됐다. 이 틀속에서 고구려는 지리적리점과 황해의 해양활동권을 활용해서 중핵조정자로서의 역활을 했다. 5ㅡ6세기경의 고구려령토에는 동만주와 연해주일대의 수렵삼림문화, 동몽골과 북방방면의 유목문화, 화북에서 올라오는 한족의 농경문화, 해양을 통해서 들어오는 해양남방문화 그리고 조선반도 남부의 문화 등이 하나로 모였다. 그러니 고구려가 동북아세아에서 가장 다양한 문화가 집결된 중심지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문화가 군사력과 경제력을 우쩍 키워 고구려제국의 찬란한 력사를 이룩했을것이다. 연변일보 1999년 1월 28일
45    고구려의 두번째 도읍 국내성 댓글:  조회:516  추천:0  2023-07-01
[기행문]고구려의 두번째 도읍 국내성 ㅡ집안시 고구려유적지답사.1 기원 3년부터 400여년간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 그 력사를 짙에 수놓았던 압록강중류지역 집안시, 고구려 제2대 유리왕때 졸본 또는 홀성골성에서 천도한 국내성(國內城)의 초로한 잔해는 집안시내 주택가의 아빠트단지에 포위되여있었다. 유적은 지상 2메터 정도까지 돌이 남아있을뿐 볼품없이 방치돼있어 마주선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장방형의 석재로 5메터 높이의 성벽을 거의 2700메터나 쌓았다는 웅기의 풍치는 어데로 가고 페허를 방불케 하는 돌각담으로 남았을가. 국내성은 동쪽의 룡산, 북쪽의 우산 그리고 서쪽으로 통구하를 건너 칠성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수상 전형적인 배산림수(背山臨水)의 지형,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 어려운 천험의 요새요 천혜의 도읍이였다. 서쪽과 남쪽의 천연적인 해자(垓子)외에도 동쪽과 북쪽의 성벽을 따라 건해자(乾垓子)의 흔적이 있는데 폭이 10메터쯤에 이르렀으나 시가지로 형성되면서 흔적이 거의 없이 메워지기도 했다. 이러한 천혜의 땅을 도읍으로 정한 유리왕은 어떤 사람인가. 기원전 37년, 북부여의 기성세력의 등쌀에 배겨낼수 없었던 고구려시조 주몽은 단신으로 탈출, 졸본(卒本)에 고구려의 첫 도읍을 세우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이 되였으나 아들 유리는 어머니 례씨와 함께 부여에 남아 남들로부터《애비없는 후례자식》이라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신상을 지꿎게 따지는 유리의 물음에 어머니는《일곱모진 바위돌우의 소나무아래에 유물을 묻어두었으니 그것을 찾아가지고 오면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떠날 때 한 아버지의 말을 전한다. 유물을 찾아 산과 물을 샅샅이 뒤지다가 결국 자기 집 퇴마루밑에서 일곱모진 주출돌과 주추돌우에 세운 소나무기둥을 발견하고 거기서 부러진 칼토막을 찾아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가 끝내 태자로 된후 왕업까지 이어받는다. 유리왕 21년 3월에 나라의 교제(郊祭)에 쓸 됒가 달아났다. 옛날 고구려사람들은 돼지를 신에게 바치는 례물임과 동시에 국도를 정해주거나 왕위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주는 신통력을 지닌 짐승으로 인정했다. 그러한 돼지가 달아났으니 큰일이 아닐수 없었다. 왕은 장생(掌生) 설지를 시켜 돼지를 쫓아가게 하였더니 국내 위나암(國內尉那岩)에 이르러 돼지를 붙잡아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한후 돌아와 아뢰기를 국내위나암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땅은 오곡을 키우기에 마땅하며 또한 노루와 고라니와 자라와 물고기가 많이 나니 왕이 만약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리익이 무궁할뿐만아니라 또한 병혁(兵革)의 두려움도 면할수 있다고 하였다. 이해 9월 왕은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온후 유리왕 22년(기원 3년) 국내에 천도하였다. 그러니 국내성은 돼지가 점지해준 수도인것이다. 성의 평면구조는 거의 네모꼴이며 산하(山河) 의 방향을 따르고있다고 할수 있어 동남향이다. 둘레는 2686메터, 성내의 도로는 남북을 관통하는 조양가와 동서를 가로지나는 승리로, 북쪽의 단결로로 이루어졌는데 옛 고구려시기에도 성중의 주요한 도로였다고 여겨지며 이들 도로가 통하는 6개의 문 역시 옛터일것이다. 40년대까지만 하여도 성문과 성벽이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성은 아빠트나 상가가 들어차고 그 사이로 길이 가로세로 뻗어 성문은 물론 성벽마저 거의 파괴되여가고있었다. 다만 북쪽의 아빠트단지 사이에 마치 뚝처럼 5ㅡ6단 정도가 남아 동서로 뻗어있다. 통구하옆 주택지안에 있는 서벽은 잡초가 우거진채 민가마다 헛간이나 측간의 벽으로 사용되고있었다. 집안시박물관마당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여있는 고구려석재유물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한숨을 톺았다. 그 하나하나가 비할데 없이 귀중한 유물이건만 마치 임자없는 물건마냥 사철 눈비를 맞으며 구석에 처박혀있으니 가슴아프지 않을수 없다. 박물관을 참관하면서 구겨졌던 마음이 조금 풀려지는것 같았다. 고구려건국전후의 각종 류형의 출토문물과 건축유적모형, 환도산성지형모형, 대형호태왕비탁본 및 사진, 국내외 학자들이 호태왕비를 연구한 저작, 자료, 고구려무덤의 연변관정을 보여주는 도편과 왕릉사진, 고분벽화사진…. 이러한것들이 체계적으로 잘 소개되고있었다. 기원 3년부터 기원 427년 장수왕때 평양에 천도하기전까지의 424년의 그 비운의 고구려력사가 금방 눈앞에 펼쳐지는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났다. 이제 다녀보아야 할 환도산성, 호태왕비, 장군총, 고분벽화 등을 눈앞에 그리면서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여야 했다. 연변일보 1999년 1월 1일
44    白衣民族 朝鲜族 댓글:  조회:671  추천:0  2023-02-24
白衣民族---朝鲜族 发布时间:2017-07-21 来源:中国网 朝鲜族的源流 公元十四世纪,李氏朝鲜建立,这个民族复被称为朝鲜族。此后一个时期居住在朝鲜半岛东北部的女真人,部分北迁成为女真族枣满族的一部分,部分南徙加入于朝鲜民族之中。 朝鲜族是我国邻邦朝鲜的主体民族。但由于近代有不少朝鲜族迁居到我国东北地区,因此朝鲜族也是我国东北地区的民族之一。要讨论东北民族的源流,也就不能不讨论朝鲜族的源流。同时我国东北地区和朝鲜仅一水之隔,两国各族之间经常互相交往、融合。因此早在历史上,我国东北民族的源流就和朝鲜民族的源流有着千丝万缕的联系。正确认识朝鲜民族的源流,对促进我国各族人民的团结和中朝友谊都有积极作用。 朝鲜民族在其形成过程中,和世界其他民族一样曾经不断融合进许多民族和种族成分。 朝鲜民族的主源,或者说朝鲜半岛最早的居民是韩和秽。他们的先人早在旧石器时代就一直居住在朝鲜半岛。韩种族属于南方蒙古人种,居住朝鲜半岛的南部。秽种族属于北方蒙古人种,居住在朝鲜半岛的北部及我国东北地区。韩、秽两种族早就人口众多,并创造了灿烂文化。他们是朝鲜半岛旧石器以至新石器时代诸文化的主人。 在我国商、周之时(公元前十一世纪),原来居住在我国辽东地区的东夷人,开始迁徙到辽东半岛。商朝贵族箕子东走建朝鲜的记载,应当是这一迁徙在史籍上的反映。辽东式石棚及青铜短剑的分布于朝鲜半岛北部,也应当是东夷族进入朝鲜半岛的遗迹。据《后汉书·东夷传》载:“昔武王封箕子于朝鲜,箕子教以礼义、田 ,又制八条之教。”《三国志·东夷传》也有相同的记载。表明古朝鲜是由箕子所率领东走的商人(东夷人的一支)和朝鲜半岛土著的秽人结合而成。 中外史学家对箕子王朝鲜之说,颇有争议,存在两种不同的看法。朝鲜的多数学者否认“箕子东来说”,少数人则认为是历史事实。南朝鲜史学界有人认为箕子是存在的,并要求在“国史”中加以记述。有人则否认箕子朝鲜的存在,认为“华北文化”传入朝鲜,“并不和哪个特定人物--箕子的东来相关联”。我国史学界,有些认为箕子朝鲜说“未必完全可靠,可能是后人的牵强附会”。也有人认为此说是能够成立的。但不论分歧如何,双方都认为我国华北地区文化进入朝鲜半岛是无可置疑的,即使不把它和箕子联系起来,有一部汉族先人早在青铜时代及以前就迁居朝鲜半岛也应当是事实。其二,即使主张箕子建古朝鲜者,也不否认朝鲜半岛早有居民存在。这也是双方一致公认的。其三,对见于大量史籍记载的“箕子东走说”轻易否定还是不妥当的,至少从目前看,否定者还提不出强有力的根据。司马迁的《史记》综合了古代史籍中关于箕子的记载,在《宋微子世家》中作了系统的科学的论述。并在《朝鲜列传》中,明确地记载了当时朝鲜侯姓箕,照应了他们和箕子的承袭关系。还是可信的。 公元前三世纪左右,燕人占取辽东,并攻占了古朝鲜西部的土地,促使了居住在辽东的夷人和新牵来的燕人(华夏族的一支)融合成新的燕人,不久并入于秦,成为今汉族的一部分。而居住朝鲜半岛的夷人,则和当地的秽人融合成了古朝鲜族。 公元前二世纪,我国秦汉之交,中原战乱,“燕、齐、赵民避地朝鲜者数万口”4。汉初,燕人卫满东走出塞,“度贝水,居朝鲜之西界秦故空地上下障。满诱亡党(中国移民)众稍多,乃攻准,准逃亡。”卫满建立了卫氏朝鲜。卫氏朝鲜的建立,表明了燕人的进一步迁入朝鲜半岛北部。 与此同时,箕氏的后代箕准南走马韩为王。此外在秦代还有一部分汉人,为逃避秦的徭役,逃亡到朝鲜半岛的东南部,与当地土著韩族结合形成了汉代的辰韩。北方民族进入了朝鲜半岛的南部。 公元前一O八年,汉武帝灭卫氏朝鲜,于朝鲜半岛北部建立了乐浪等郡县,汉民更进一步迁居朝鲜半岛。 汉魏之时,在朝鲜半岛南部,居住着韩种的三支,马韩、辰韩、弁韩。史载马韩有五十四国总十余万户。辰韩、弁韩各有二十国。共七十八国。共计为二十万户,约近百万人。 公元一世纪开始,原居住在鸭绿江流域的高句丽人逐渐南下占有朝鲜半岛北部,公元四世纪攻占了乐浪郡。部分汉人如张统等迁居辽西、退出了朝鲜半岛。部分汉人留居朝鲜半岛和古朝鲜人、秽人一起在高句丽人统治下,逐渐融合成新的民族。同时,高句丽人有部分南下与朝鲜半岛南部的韩人相结合建立了百济国。辰韩(由南迁的秦人和当地的土著的韩人结合而成)的苗裔建立了新罗国家。朝鲜半岛初步形成了三个并列的小民族。 公元七世纪,新罗和唐联合,攻灭了高句丽和百济,不久唐兵被迫撤出朝鲜半岛。新罗基本上统一了朝鲜半岛,在朝鲜半岛上第一次形成了一个统一的民族枣新罗民族。 但当时朝鲜的东北部还为渤海国所占,渤海族是以粟末摸和及高丽遗民为主融合其他秽百人形成的一个民族。高句丽民族一部分迁居我国中原地区加入于汉族之中,一部分加入渤海族之中,一部分加入新罗民族之中。 公元十世纪,辽灭渤海,将渤海人西迁,部分渤海人南投新罗,加入新罗族中。而同时,原居牡丹江流域的女真人南下,占有了朝鲜半岛的东北部。 也在公元十世纪初,王建创立了高丽王朝,新罗人改称高丽人。高丽人与新罗人不同是前者吸收了十余万渤海人,但主体是一样的。高丽人和高句丽人却根本不同。高句丽人是横跨中朝两国国土,但又不包括朝鲜半岛南部的一个古民族。而高丽人则是纯属朝鲜半岛上的一个民族。 公元十四世纪,李氏朝鲜建立,这个民族复被称为朝鲜族。此后一个时期居住在朝鲜半岛东北部的女真人,部分北迁成为女真族枣满族的一部分,部分南徙加入于朝鲜民族之中。 朝鲜民族虽在长期发展过程中吸收了许多民族,但它的主体是秽和韩,以后又加入了大量汉人(东夷也是汉人先人的一支)和高句丽人。 朝鲜民族迁居我国东北地区是清代以来的事。清朝为了统治全国各族把满族人大批迁移到全国各地,使东北很多地区荒芜,朝鲜人开始北度图们江进入我国东北地区。成为今天我国东北的一个民族。但他们并不是长期居住东北的土著民族。过去学术界有一种错误认识,认为我国古代东北地区的夫余人、高句丽人都是今天朝鲜族的祖先。我国古代东北地区的夫余人和高句丽人是有相当一部分加入了今天的朝鲜族,但更多的是加入于我国的汉族之中。现在居住在我国东北的朝鲜族并不是古代居住在我国东北地区的高句丽人的直接后裔。如果说他们含有高句丽人的血统,也只能说他们中包含了部分居住在朝鲜半岛的高句丽人的血液。 弄清这些,就可正确认识中朝各族既有同源,又有区别的关系;认清中国各族(特别是东北诸族)和朝鲜民族血肉相连的关系。就没有必要再为东北地区世上一些民族的归属,进行一些过分的影响中朝友谊的争论。即使对历史上一些古民族的源流,学者间还有一些分歧的看法、但任何人都不能否定中朝各族人民血肉不可分的关系。在这一基本事实上,学者们可以求同存异,继续争论,这种争论的目的应该是求同,是促进团结。(作者 孙进己) 孙进己:民族史学家 据《中国文物报 》2006.7.21的报道称,孙进己先生是辽宁省社会科学院历史所专门研究东北民族史的研究员。时年75岁,仍然笔耕不已,仍以每天写3000字的进度在从事写作,进行民族史的研究。 孙先生著作等身,著有《东北民族史稿》、《东北民族源流》、《东北各民族文化交流史》、《东北民族史论研究》、《东北民族史研究》(一)、《北方民族史研究》(一)等书,发表论文一百余篇。 但很少有人知道,这位民族史学家、原中国辽金契丹女真史研究会会长的前半生是相当坎坷的。1957年整风反右时,正是他在东北人大历史系(现吉大)即将毕业之际,却被补定为右派。20年后才知当时并非正式审批。其间,他曾在长春搪瓷厂劳动改造;在海龙师范任教,“文革”中以走“白专道路”受到批判,被关入“牛棚”;尽管命运如此不幸,可是他始终没有放弃对民族史的学习与研究。此间,他通读了二十四史的大部分,写出了《海龙女真摩崖》、《柳河上游新石器遗址调查》、《东北民族史》两卷约20万字,并将史稿刻印本寄谭其骧、陈述、李文信等先生征求意见。1978年党的十一届三中全会召开,同年9月孙进己先生被调到辽宁省社会科学院历史所,专门研究东北民族史。1979年以后是他在学术上取得成就最多最快的时期。 理清东北民族源流,他认为单靠文献是解决不了的,必须掌握有关考古学、历史地理学、民族学、民俗学、人类学、语言学等相关学科的有关问题。 孙进己在四十多年从事东北民族史的研究中,他的主要体会是,我们决不能囿于成说,要分清假设和定论,往往前人提出的许多观点都仅是一种假说,还要经过检验;也不可以为自己提出的观点就都是定论,其中有的也可能还是假说。因此就要不断用新的事实来反复检验、更新,只有反复检验被证实的,才能说是定论。 朝鲜族民族乐器 朝鲜族民间乐器原有40多种,流传至今的只有伽倻琴、唢呐、洞箫、长鼓、片鼓、横笛、短箫、筚篥等十余种。 长鼓:打击乐器,亦称“扙鼓”。流行于吉林、黑龙江、辽宁的朝鲜族地区。长约70厘米,鼓身木质呈圆筒形,鼓的两端粗空,鼓面蒙皮,鼓腰细小而中实。以铁圈为框,系皮条或绳索,可以调整鼓的音高。演奏时,右手执细竹条敲击,左手敲击鼓的另一面。两手节奏交错,技法丰富。在乐队中,将鼓放在演奏者前面的鼓架上,在歌舞中一般将鼓挂在身前。常用于声乐和舞蹈的演奏。 细筚篥(Xie Pi Li):朝鲜族吹奏乐器。流行于朝鲜族聚居地区。用细竹管制成,长约25厘米,开有8个按音孔(前7后1),哨长4厘米,双簧。用于独奏和民间歌舞的伴奏。它的装饰性颤音很具有朝鲜族音乐的特色。 伽倻琴:为朝鲜族传统弦乐器之首,是民族色彩很浓的弹拔乐器。它的形状近似于汉族民乐器古筝。伽倻琴由共鸣箱、琴弦、琴码三部分组成。共鸣箱长150厘米,宽25厘米、中间厚5厘米。质料分别用梧桐树板和桦木板制作。琴线用蚕丝制作。共13根弦,琴弦的两头各固定在琴头和琴尾,在琴头有弦枕。13根琴弦用码子支柱,琴头可以左右移动,调节音阶。伽倻琴富有表演力,是善于表达民族柔和情感的民间乐器。因此,伽倻琴弹唱是各族人民喜闻乐见的一种表演形式。 短萧:朝鲜族吹奏乐器。朝鲜语称“单扫”。流行于延边朝鲜族自治州。形制如汉族洞箫,短细,长约35厘米,传统短萧,上端开一吹孔,管身开五个按音孔,可吹奏五声音阶的曲调。解放后改革的短萧,开七个按音孔,有的加键,并在吹孔与按音孔间加镶铜插口,可演奏七声音阶的乐曲。音色柔和高亮。 朝鲜族民间习俗——捣衣 朝鲜族民间习俗——捣衣   朝鲜族民间习俗——捣衣 捣衣是朝鲜族特有的风俗之一,每年的仲秋时节,朝鲜族妇女都要拆洗衣服被褥,进行浆洗晾晒,待衣物半干后,将其叠成长方形放在砧板上棰打,这就是捣衣。捣衣有两点好处,一是捣后的衣物平整、光洁;二是再洗时易于清除衣物表面的污垢,因为衣物带浆进行捶打后,一般的油垢多浮在衣物的表面,渗不进纤维里。 捣衣用的砧板是用约 50 厘米长、 22 厘米宽、 17 厘米厚的硬木或石头做成。砧面磨得光滑洁净,为了减轻重量而在砧底横竖挖出宽槽。捶打用的棒槌类似洗衣棒,用硬木制作而成,磨得十分光滑。 捣衣的形式多样,可以对坐交叉捶打,也可以一人拿一棒或双手各拿一棒捶打。每当少妇、少女对坐捶打时,通常表现出捶打的艺术和劳作的乐趣,或慢或快,或轻或重,如鼓手击鼓,棒槌声和清脆的笑声此起彼伏,宛如一首清新明快的协奏曲。 朝鲜族服装特点 朝鲜族人民不仅能歌善舞,喜爱音乐,而且注重衣着打扮,讲究仪表。 白色是朝鲜族最喜欢的服装颜色,象征着纯洁、善良、高尚、神圣,故朝鲜族自古有"白衣民族"之称,自称"白衣同胞"。随着纺织工业的发展,如今妇女们穿用的衣料颜色更是绚丽多彩、不拘一格,但短衣长裙这一传统民族风格久久不变,因为它符合朝鲜族妇女的审美心理,充分反映了她们温顺、善良和勤劳淳朴的美德。朝鲜民族服装的结构自成一格,上衣自肩至袖头的笔直线条同领子、下摆、袖肚的曲线,构成曲线与直线的组合,没有多余的装饰,体现了"白衣民族"的古老袍服的特点。 朝鲜族传统女装 朝鲜族民族服装根据穿着者的年龄和场合,选用各种质地、颜色的面料制作。女子婚前穿鲜红的裙子和黄色的上衣,衣袖上有色彩缤纷的条纹 ;婚后则穿红裙子和绿上衣。年龄较大的妇女,可在很多颜色鲜明、花样不同的面料中选择。 朝鲜族妇女的短衣长裙,是朝鲜族服饰中最具传统的服装,这也是朝鲜族妇女服装的一大特色。短衣在朝鲜语中叫"则高利",是朝鲜族最喜欢的上衣,以直线构成肩、袖、袖头,以曲线构成领条领子,下摆与袖笼呈弧形,斜领、无扣、用布带打结,在袖口、衣襟、腋下镶有色彩鲜艳的绸缎边,只遮盖到胸部,颜色以黄、白、粉红等浅颜色为主,女性穿起来潇洒、美丽、大方;长裙,朝鲜语也叫做"契玛",是朝鲜族女子的主要服饰,腰间有长皱褶,宽松飘逸。这种衣服大多用丝绸缝制而成,色彩鲜艳,分为缠裙、筒裙、长裙、短裙、围裙。年轻女子和少女多爱穿背心式的带褶筒裙,裙长过膝盖的短裙,便于劳动。中老年妇女多穿缠裙、长裙,冬天在上衣外加穿棉(皮)坎肩。缠裙为一幅未经缝合的裙料,由裙腰、裙摆、裙带组成。上窄下宽,裙长及脚面,裙摆较宽,裙上端有许多细褶,穿时缠腰一圈后系结在右腰一侧,穿这种裙子时,里面必须加穿素白色的衬裙。 此外朝鲜族服饰中还有一种七彩上衣,用七彩缎做成,象征幸福和光明,一般是在集会和喜庆活动时穿戴。 朝鲜族传统男装 朝鲜族男子一般穿素色短上衣,外加坎肩,下穿裤腿宽大的裤子。外出时,多穿以布带打结的长袍。男子短衣朝鲜语也叫"则高利";成年男子的上衣衣长较短,斜襟、宽袖、左衽、无纽扣,前襟两侧各钉有一飘带,穿衣时系结在右襟上方。他们还喜欢黑色外套或其它颜色的带纽扣的"背褂"即“坎肩”,"坎肩"朝鲜语叫"古克", 一般套在"则高利"上衣的外面,多用绸缎作面,毛皮或布料做里,有三个口袋,五个扣,穿上显得特别精神。 朝鲜男子爱穿"灯笼裤",这种裤子裤长腰宽,而且白色居多。"巴基"是指传统的朝鲜族服饰"裤子",其裤裆、裤腿肥大。由于朝鲜族传统房屋都有火炕供暖系统,人们常常是坐卧在地面的垫子或席子上,穿这种裤子便于在炕上盘腿而坐,随便轻松,裤腿系有丝带,外出时可以防寒保暖。 朝鲜族传统儿童装 朝鲜族儿童服装主要是七彩衣,是用七色绸缎给儿童做的衣服,好像彩虹在身。朝鲜族认为彩虹是光明和美丽的象征,或出于审美心理,或出于避邪的目的,意在让儿童美丽幸福,使孩子们显得更加聪慧、活泼可爱。还有的认为是过去朝鲜妇女善于保存各种颜色的布块,用来给孩子做衣服等等。 朝鲜官服 过去朝鲜族的官服,随官职、身份而异,但基本式样大体上是冕服,用黑色绸缎做团领,受中国冕服十二章纹饰的影响,肩部亦有带色之龙,袖口画有火、华虫、宗彝等图案。裳用红绸缎缝制,裳前有藻、粉米的纹饰图案。 朝鲜泡菜 制作泡菜 制作泡菜 泡菜是朝鲜族具有代表性的传统发酵食品。朝鲜族泡菜做工精细,享有盛誉,是入冬后至第二年春天的常备菜肴。泡菜味道的好坏,也是主妇烹调手艺高低的标志。 辣白菜是泡菜的一种,泡菜是朝鲜族具有代表性的传统发酵食品,是以米饭为主的朝鲜族饮食生活中最重要的副食之一。相传的哪怕一日无泡菜,都难以吃下饭啦。 泡菜的酱汁,可以补充米饭中缺乏的蛋白质。另外,在泡菜酵的过程中,虾酱、凤尾鱼酱、黄石鱼酱等含有的蛋白质分解为氨基酸。 蔬菜中含有钙、铜、磷、铁、盐等丰富的无机物,促进维生素C和对以米饭主食的人尤为重要的维生素B的吸收。 韩国研究人员认为,泡菜在发酵过程中,乳酸菌不仅令泡菜味道鲜美,而且还可以抑制肠内有害细菌的繁殖。 泡菜随着发酵的成熟产生酸味的乳酸菌,不仅使泡菜更加美味,食用后还能抑制肠内的其他有害菌哦。 朝鲜泡菜是朝鲜半岛人民日常生活中最普通的食品,也是朝鲜半岛的第一美食,从古代起就是每餐必备的食品。由于朝鲜半岛山地较多,油和食物运输比较困难,而泡菜制作方法简单,易于保存,一年四季皆可食用。朝鲜半岛的妇女是制作泡菜的能手,尽管使用材料一样,可每家做出的泡菜味道却各不相同。朝鲜泡菜是以白菜、萝卜为主要原料,以芥菜、水芹菜、葱、生姜、大蒜为辅料,用盐、辣椒面、酱油和各种虾酱、鱼酱等进行调味后,再经过发酵而成。泡菜的发酵过程非常重要,直接决定着泡菜的味道。在通常情况下,夏天腌渍的泡菜一般只需要两天的时间就可以发酵成熟。 朝鲜医书《东医宝鉴》 《东医宝鉴》对日本“汉方医学”也产生了一定的影响 《东医宝鉴》对日本“汉方医学”产生了一定的影响(图片来源于光明网) 《东医宝鉴》:《东医宝鉴》是朝鲜医学家许浚所著。公元1596年(李王朝宣祖二十九年),宣祖王命许浚编纂一本医书,许浚与太医杨寿礼、金应铎、李命源、郑礼男等一同设编辑局,着手编辑医书,不幸于翌年遇上“丁酉再乱”(“丁酉再乱”是指日本侵略朝鲜的战争),使参与编纂工作的诸医分散,编辑局拆散。乱后,宣祖王改命许浚一人独自编纂。许浚经过十几年坚持不懈的努力,到了光海君二年(公元1610年)终于完成编撰任务。于公元1613年(光海君五年),用内医院训练都监之活字上梓开刊。 此书共25卷,包括目录2卷、内景篇4卷、外形篇4卷、杂病篇11卷、汤液篇3卷、针灸篇1卷。此书主要参考中国医书如《素问》、《灵枢》、《伤寒论》、《证类本草》、《圣济总录》、《直指方》、《世医得效方》、《医学正传》、《古今医鉴》、《医学入门》、《万病回春》、《医学纲目》等71种和高丽医学古有的医书《乡药济生集成方》、《御医撮要方》等撰集而成,确立高丽医学理论体系的朝鲜传统医学一“高丽医学”的最高峰之作,不仅对“高丽医学”的发展起了极大作用,而且对整个东方传统医学的发展起了很大作用。因此,朝鲜李王朝光海君称《东医宝鉴》为“医学的统合,高度评价许浚说:"东垣为北医,丹溪为南医,刘宗厚为(陕)西医,许浚则朝鲜之医,亦可谓之‘东医’”。又说:“鉴者明照万物。元朝罗谦甫著《卫生宝鉴》,本朝龚信著《古今医鉴》”,故许浚之著作,“亦可名为《东医宝》”。此医书已有36种不同版本。 该书明末清初传入我国,乾隆丙戍年(1766)由顺德人左翰文在广东刻版,嘉庆丙辰年(1796)又在江宁重刻,于1955年人民卫生出版社根据朝鲜重刊本影印发行。该书在朝鲜和中国医学的发展中有积极的影响。 朝鲜族秋千(图) 荡秋千 朝鲜族是爱好体育运动的民族,压跳板和荡秋千是朝鲜族妇女最喜爱的传统民间体育运动。秋千和跳板具有悠久的历史,从文献上来看,朝鲜人荡秋千和跳跳板最晚也起源于十三世纪,是朝鲜族妇女喜爱的运动项目,它们的特征是具有朝鲜族独特的运动形式,表现了朝鲜族人民热爱生活,富于创造和活泼大方的民族气质,是朝鲜族代表性的体育运动形式,它们对丰富和完善中国民族体育竞技形式具有重要的意义。 荡秋千:也叫“打秋千”,是朝鲜族传统体育项目,多在元宵、端午和中秋节举行。尤其受到妇女们的喜爱,并经常进行该项目的比赛。比赛时评定优胜者有几种方法:一种是以秋千架前方高树上的树叶或花朵为目标,用脚碰着或咬掉树叶(花朵)者为胜;一种是在踏板底下挂一根长绳,测量秋千荡起的高度,高者为胜;还有一种是在秋千架前方竖两根树杆,杆上横拉一根系有铃铛的绳子,荡秋千者以碰铃次数多少决定胜负。 秋千活动具有高、飘、悠、巧、柔、美的特点。秋千绳一般拴在高大的树木结实的横枝上,在秋千的前方上空悬有彩带或铃当,秋千板要触及这个标志才能获得欢呼与赞扬。常常是一人荡起,众人瞩目,场边喝彩连连。大型荡秋千竞技比赛更为迷人,比赛中常常可见到空中悬挂着一面皮鼓,荡秋千的姑娘们在观众的助威声中高高荡起,在空中用力踢鼓,谁踢响的次数最多,谁就将成为冠军。 朝鲜族说唱艺术传承人申玉花 居住在沈阳市苏家屯区民主街道的申玉花是朝鲜族说唱艺术的代表性传承人,虽然年事已高,但申玉花仍然能够表演《春香传》等朝鲜族说唱艺术的经典作品。据了解,作为朝鲜族说唱艺术的保护单位,苏家屯区文化馆多年来为传承和保护这一非物质文化遗产项目做出了许多努力。 朝鲜族说唱艺术是一种叙事性说唱艺术,历史悠久。表演中大多一人饰演多个角色,以说唱为主,用长鼓伴奏,伴以舞蹈形式来叙述一个长篇故事。名叫“板唆哩”,是朝鲜族音乐中一个重要的组成部分,流行于东北三省朝鲜族聚居地。朝鲜族说唱艺术的代表作品共有12种,内容均取自民间传说和古典小说,如《春香传》、《沈清传》等。说唱艺术中“说”的部分又叫“叙唱”,没有固定的节奏,可以随词意自由变化;“唱”的部分则节奏感强,以民歌曲调为主,风格明快流畅。一个曲目大多以“短歌”,即一种抒情叙事歌开头。 被评为苏家屯区优秀民间艺人的申玉花是苏家屯区朝鲜族说唱艺术最具代表性的传承人,她曾在延边歌舞团担任演员、在延边艺校任教,退休后居住在沈阳苏家屯区从事朝鲜族说唱艺术的教学、演出和研究活动,并于1990年、1995年、2000年分别获得国家级、省级表演艺术奖项。除了89岁的申玉花不遗余力地传承朝鲜族说唱艺术,还有48岁的金春玉积极传承这一宝贵的非物质文化遗产。据金春玉介绍,在不同时期,朝鲜族说唱艺术有着不同的艺术特征,对朝鲜族说唱艺术进行深入的挖掘整理,对于研究朝鲜族音乐以及民俗具有重要价值。 朝鲜族说唱艺术是在民间产生,在民间流传的一种独特的艺术形式,具有曲调优美,说唱结合的特征,富有艺术感染力和表现力,表达了朝鲜族人民对生活的热爱,是传承民族历史文化的重要载体。朝鲜族说唱艺术是朝鲜族传统艺术,其发声方式、表演技巧难度较高,并且受到现代音乐的冲击,因此,朝鲜族说唱艺术的传承人寥寥无几。朝鲜族说唱艺术濒危的状况引起了苏家屯区有关部门的重视。据了解,苏家屯区文化体育广播电视新闻出版局非物质文化遗产调查组曾对朝鲜族说唱艺术进行了一次全面调查,对其历史价值、传承谱系等有了一个基本的认识和了解。朝鲜族说唱艺术不仅被列为苏家屯区非物质文化遗产名录,而且于日前被列为沈阳市第三批非物质文化遗产名录。 沈阳市苏家屯区文化馆将对朝鲜族说唱艺术进行进一步的挖掘和整理,继续收集相关资料,保存音像资料。下个阶段需要做的工作就是要进行一次全面细致的普查工作,彻底摸清朝鲜族说唱艺术的发展历史沿革,充分掌握传承人及道具、服装、现存作品及其价值等全部状况,然后将普查所掌握的文字、音像资料全部进行分类整理和存档。 沈阳市非物质文化遗产保护中心重点保护传承人,促进其传承发展,给予培训和经费方面的资助,进行活性保护传承;建立相关档案,将申玉花演出过程录像保存。保护和传承朝鲜族说唱艺术的重中之重就是大力培养传承人,以及定期举办朝鲜族说唱艺术专场演出。加强对朝鲜族说唱艺术的保护和传承对增进民族团结,推动文化建设将起到积极的作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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